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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2.04 00:00

기억을 찾아가다 - 8

8. 한국전쟁기의 학교수업 - 떠돌이 수업

 

초등학교 5학년 때였던 1952년의 학교생활엔 참 변화가 많았다. 담임선생님도 세 번이나 바뀌었고 교실도 다섯 번이나 옮겨 다녔다. 그리고 전입생도 그 해에 갑자기 불어났다.

처음으로 갔던 곳은 오동동파출소 서쪽 옆길 건너편의 한의원 2층이었다.

꽤 넓었다고 기억되는 것이, 그 다다미 방에서 집단으로 고상받기’(레슬링 식으로 상대방을 항복시키는 놀이. ‘고상(こうさん)’은 항복의 일본 말)를 하다 선생님으로부터 단체 기합을 받았던 기억도 있다.

얼마 후엔 파출소 2층으로 갔는데 거기선 담임선생님의 심한 매질을 여러 급우들이 당했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시국 때문에 파출소가 비좁을 정도로 경범들이 많았던 상황에서도 아랑곳할 리 없는 우리들의 난동(?)에 경찰들의 신경질이 있었겠고, 지금도 매질 모습이 기억에 남아있을 정도로 신경질적이었던 담임선생님의 성격도 작용했던 것 같다.

여름이 가까웠을 때는 오동동 선창 끝머리에 있었던 어물창고로 갔다. 여기서의 두세 달은 지금도 미소를 머금게 하는 좋은 추억을 남긴 시간이었다.

이때 또 바뀌어 오신 선생님의 어진 품성도 그런 기억을 더 도왔다. 매일을 넘어 보통 하루 두세 번씩 교실 앞 바다에 뛰어들어 물놀이를 즐겼기 때문이다.

4학년 때는 한두 명에 그쳤던 피난민 편입생이 그 해 갑자기 불어 이때엔 십여 명이 되었었는데 물놀이에서 우리들과는 좀 다른 이들의 양태를 보고 어린 마음에 좀 놀랐던 기억이 있다.

토박이들은 모두 벌거벗은 채 물로 뛰어 들었는데 그들 중 몇몇은 수영복이란 걸 보여주었다. 우리는 장난으로 그 팬티를 벗기곤 했었지만 솔직하게는 좀 부러운 눈치들을 보였다고 기억된다.

 

<그때는 다들 이러고 놀았죠,, ㅎㅎ>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한 친구는 평소 바다에 한사코 들어가지 않았었는데 그 날은 친구들의 강권을 감당할 수 없었던지 수영팬티 윗줄을 꼭 잡고 조심스레 들어왔다.

그러나 장난 끼 많은 친구들이 그냥 둘리 없었다. 팬티를 잡아 내려버렸는데 다른 친구들과 달리 그는 매우 낭패스런 표정으로 주저앉더니 얼굴을 감싸고 울어버리는 것이었다.

팬티를 내리는 순간에 나도 얼핏 본 것도 같았으나 자세히는 인지하지 못했었는데 나중에 친구들의 이야기를 듣고서야 그 순둥이 친구의 낭패감을 이해할 수 있었다.

아버지가 의사라던 그 친구는 그때 이미 포경수술을 한 후였는데 포경이란 말조차도 모르던 우리들 눈엔 그 남근 모양이 우습고 충격적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 친구는 그것으로 하여 꽤 오랫동안 친구들 놀림에 시달렸던 것 같다. 으레 이런 말도 곁들였다. “서울내기 다마내기 맛 좋은 고래괴기”.

출신지역에 따라 억양 차이가 뚜렷했을 텐데, 그때 우리들 귀엔 다 비슷하게 들렸던 것 같다.

늦여름쯤, 전에 있었던 산호동으로 갔다가 늦가을에 우리는 본교로 돌아왔다. 본 교사는 징발된 그대로였으나 운동장 가운데를 철조망으로 막고 이쪽에 빙 둘러 판자 가교사를 교육당국이 지어주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운동장에서 뛰 수도 있었고, 철봉대에 매달릴 수도 있었으며 모래밭에서 뒹굴 수도 있었다. 그리고 학내 행사도 활성화됐다.

기름 먹인 판자로 엉성하게 지은 교사에 반쪽짜리 운동장이었지만 그래도 야외나 창고에는 비할 바가 아니어서 그때부터 학교생활의 면모가 조금씩 갖추어져갔던 것 같다.

겨울엔 난로도 피울 수 있었다. 난로는 군부대에서 폐기한 드럼통을 잘라 만든 것이 대부분이었다.

땔감은 간혹 학년 전체가 팔룡산으로 가서 솔방울이나 삭정이를 주워 와서 교실 구석에 쌓아두고 사용했다. 또 등교 시에 두세 토막씩의 나무를 의무적으로 가지고 오게 하기도 했었다.

전쟁 중임에도 입시경쟁이 상당히 의식되었었는데 여건상 준비를 못하다가 이때부터는 오후까지 수업을 했다.

도시락을 싸다녔는데, 식은 도시락을 데우기 위해 난로 밑자리잡기를 가위 바위 보로 정하던 기억도 선명하다.

 

<밑자리 도시락만 데워지지만 밥시간 기다리며 모두 즐거웠죠,,  ㅎㅎ>

 

이때부터 정식 체육시간이 생겨 달리기 시합도 했고 철봉의 기본동작을 배우기도 했다. 높이뛰기나 넓이뛰기 요령도 설명 들었다.

그리고 비록 운동장은 좁고 학생은 많아 좀처럼 공에 발을 대 보기도 어려웠지만 그래도 공 따라 다니다가 운 좋으면 한 번 차보는 재미도 맛보았다. 우리가 차고 놀았던 고무공은 군에서 나온 폐타이어를 녹여 재생한 고무로 만든다고 들었다.

소위 반공웅변대회란 행사도 이때부터 활성화되었던 것 같다.

반에서 뽑아 학교대회에서 입상하면 시 대회, 나아가 도 대회까지 진출시켰었는데, 피를 토하듯 한 열변이 아니면 등위에 명함도 못 내밀었다.

이런 대회의 성격상 봉암동, 양덕동 등의 촌아이들은 한 사람도 못 나갔던 것으로 기억된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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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27 00:00

기억을 찾아가다 -7

7. 한국전쟁기의 학교생활 - 떠돌이 수업

 

피난 갔다 와서 학교에 나가보니, 들은 대로 학교는 이미 군용병원이 되어 있었다. 이웃 마산상업중학교(용마고의 전신인 마산상고와 마산동중이 분리되기 전의 학교)도 마찬가지였다.

이때부터 우리들의 떠돌이 학교생활은 2년 남짓 계속되었다. 처음엔 용마산 남쪽 비탈 중하단 정도 되는 곳으로 등교했다.

거기엔 전쟁에 대비하여 파놓은 자형의 참호가 많이 있었고, 거기서 우리 반뿐만 아니라 여러 반이 이웃하여 학습생활을 했다.

 

<교실이 없어 마당에서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 1953년 6월 서울에서 촬영>

 

가운데에 작대기를 세워 칠판을 걸고 우리들은 호 안에 기대거나 서고, 바깥 풀 위에도 앉고 하여 진행하는 수업형태였다.

그때 우리들 각자가 선생님 지시에 따라 마련한 책상 대용 필수품이 화판이라 불린 물건이었다. 판자들을 덧대어 만든 넓적한 판 양쪽에 끈을 달아 목에 걸고, 판 위에 책과 노트를 올려 책상 대용으로 썼던 것이다.

노천에서 여러 반이 얼마 거리 없이 그렇게 수업하니, 두세 분 선생님의 목소리가 섞여 들리기도 했고 어떤 목소리 큰 선생님의 말씀은 다른 반 학생들의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던 기억도 남아 있다.

가을이 되자 우리가 옮겨간 곳은 용마산 동편 자락에 있던 서당과 그 옆의 어떤 창고였다.

당은 낡아 바람 막기도 어려워 판자나 비료포대 같은 것으로 얼기설기 벽을 만들어 사용했고, 창고는 판자벽이 그래도 양호하여 서당을 배정받은 우리 반 친구들은 창고 반 친구들을 부러워하기도 했었다.

바깥생활 내내 그랬지만 여기서도 학습생활이 옳게 될 리는 없었다. 그러나 우리들이 그곳에서 취한 놀이 행태는 지금까지도 뇌리에 남아있을 만큼 재미를 만끽시킬 정도였다고 생각된다.

창고 뒤쪽, 그러니까 용마산의 동쪽 끝자락이며 산호동의 뒷동산이 되는 곳에 열 그루도 넘었음직한 푸조나무가 있어, 나무에도 오르고 나무 뒤에도 숨고 동산 여기저기로 뛰어 다니며 쏘고 잡고 하는 푸조나무 열매 총놀이가 너무나 재미있었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지금도 용마산 동쪽자락에 푸조나무가 있다. 전문가들은 수령 2~300년으로 추정한다>

 

댓가지를 10티미터 남짓 길이로 잘라, 가운데 홈에 푸조나무 열매을 넣어 앞 구멍을 막고, 다음 알을 뒤에 넣고는 구멍에 알맞은 크기의 나무공이로 힘껏 밀면, 압축된 가운데 공기의 힘으로 앞의 알이 튀어나가는데, 그 힘이 꽤 되어 맞으면 따끔한 정도라 우리가 편을 갈라 쏘고 잡으면서 용마산 자락 일원을 누비고 다녔던 것이다.

4학년이 되자 우리 반만 따로 회원동으로 갔기 때문에 다른 반은 어땠는지 잘 모른다.

봉화산 자락에 위치한 회원초등학교(당시 회원국민학교) 바로 아래에 있는 판자 창고에 우리 반이 들어갔다. 물론 책걸상은 없으니 화판은 필수품이었다.

일제 때 마구간이었기에 퀴퀴한 냄새가 났고, 낡고 파손된 판자벽은 매섭기로 이름났던 봉오재바람을 그대로 통과시킬 정도였다.

그러나 때가 때인지라 별 불평들 없이 생활했던 것 같은데 정작 견디기 어려워했던 것은 회원초등학교 학생들의 집단 괴롭힘이었다.

반별로 전 시내에 뿔뿔이 흩어져 있었기에 선생님들이 여러 가지 업무 차 교실을 비울 때가 잦았었는데 그때를 틈타 수십 명(어떤 때는 백 명도 넘어 보였다)씩 몰려와 이유 없이 때리고 물건을 뺏곤 했고, 하교 시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또 그렇게 괴롭히곤 했다.

선생님(실력이 뛰어 나기로 소문났던 배종호 선생님이셨다)께 일러 학교에 항의하고 나서 좀 덜한 듯했으나 하교 길에 해코지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던 것 같다.

그걸 피하기 위해 우리는 인연을 활용하기도 했다.

이웃인 마산상업중학교가 회원초등학교 운동장에 군용텐트를 치고 학습생활을 했었는데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방과 후 좀 시간을 보내다가 그 형들이 하교할 때 같이 하는 것이었다.

형들은 우리들의 사정을 듣고서 잘 보호해 주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봉암동, 양덕동에서 다니던 우리들은 바냇들 가운데 길로 오면 가깝고 편했는데도 근처에서 지키는 아이들한테 한두 번 당한 뒤로는 그 형들을 따라 구마산 역으로 둘러오곤 했다.

런데 이런 유형의 패거리 행패문화는 그때 거기서만 체험한 게 아니었고, 그 후에도 오랫동안 여러 곳에서 여러 유형으로 아주 아프고 부끄러운 체험으로 남아 있어 뒤에서 한 번 더 거론하고자 한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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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찾아가다 - 6

6. 한국전쟁기의 봉암동 - 징병, 피난 귀향

 

전쟁 나고 열흘 쯤 되었다. 낯선 얼굴을 보기 어려운 시골마을에 낯선 복장에 낯선 체형의 사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린 아직 어려 잘 인지하지 못했으나, 어른들이나 형들의 말을 들으면서 우리의 눈에도 그들의 양태가 박히게 되었다.

허름한 바지저고리에 짚신이나 낡은 검정고무신 차림과는 완연히 대조되는, 색깔 있는 셔츠에 빳빳한 바지, 그리고 단단하고 날렵해 보이는 운동화 차림이었다.

가을이 되어서는 당시로선 구경조차 하기 어려웠던 점퍼들도 입고 있었다. 체격도 구부정한 농민들과는 달리 몸이 곧고 날렵해 보였다. 형사들이었다.

그들이 나타나면 우리들도 알아보게 되었고, 형들이나 아저씨들에게 전해주기도 했었다.

그들은 징집대상자들을 차출하러 그렇게 다니면서 나이 웬만한 남자들을 보면 꼬치꼬치 추달했었다.

골목 어귀에서 맞닥뜨린 동네 형이 산 쪽으로 도망치다 잡혀오는 것도 보았고, 미리 귀띔을 받고 산골로 들어가는 동네 형이나 아저씨들도 더러 보았다.

내 큰형은 고1(당시 학제로는 중4)이라 징집 적령이 멀었는데도 키가 컸던 탓으로 그들의 추달에 곤욕을 치른 일이 여러 번 있었다.

그랬는데도 우리 동네에선 간 사람보다 안 간 사람이 더 많다고들 했다.

한편, 보국대(전시근로동원법에 의한 차출)라는 명칭으로 차출되었다오는 사람들도 많이 보았다. 주로 삼십대 후반이나 사십대 초반의 남자들이었던 것 같은데 그보다 훨씬 나이든 아저씨들도 끌려갔다 왔다는 이야기도 몇 번 들었다. 할당 받은 사람 수를 채우지 못할 땐 그렇게 된다고들 했다.

 

<산악전 지원을 위해 준비하고 있는 보국대>

 

피난 직전, 그러니까 7월 중순쯤에는 사태의 심각성도 모른 채 내 큰형도 나갔다가 온 식구가 조바심을 쳤던 기억도 가지고 있다.

진동에 가서 길 고르는 일 두어 시간만 하고 점심 전으로 데려다 준다고 집집마다 한 사람씩 나오라고 해서 큰형이 자원했고, 그래도 행여나 해서 아버지는 같이 가는 이웃집 아저씨들한테 신신당부해두었는데 그날 자정이 넘어서야 사색이 되어 걸어서 돌아왔던 것이다.

가니까 참호를 파라고 했고, 거기에 모래자루 쌓는 일까지 다 마치니 멀리서 대포소리 같은 것이 들려 더 공포스러웠다고 했다.

거기다 감독하는 사람이 형의 나이를 묻고, 회유도 하고 협박도 하는 통에 이웃집 아저씨까지 합세해서 회피하느라 더 힘들었다고 했다. 형사들 들락거림은 아마 전쟁기 내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마산이 인민군들이 들어오지 못한 얼마 안 되는 지역이었던 터라 피난 갔다 온 얼마 후부터 다른 피난민들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외지에 나가 있던 동민 가족들이나 친척들도 상당수 보였다.

어느 날, 이웃에 살던 물집(염색업하는 집) 어머니와 딸들이 울면서 아리랑고개(1차 매립 때 동네 서쪽 들머리에 생긴 조그만 고개) 쪽으로 뛰어가는 것을 보았다.

부모님들과 우리 형제들도 한길로 나가 그쪽으로 보고 있는데 얼마 안 있어 고갯마루로 그 집 가족들이 나타났다. 우리 부모님들도 울먹거리며 마중을 나가다가 통곡하며 오는 그 가족들과 마주 했다.

부모님들끼리 손을 잡고 인사를 나누었는데, 어린 내 눈에도 그 아저씨와 두 딸의 모습은 너무나 남루했다. 딸 일곱으로 해서 딸부자 소리를 들었던 그 아저씨는 전쟁 일 년 전 쯤 딸 둘을 데리고 서울로 가서 고무신 공장을 했었다.

자세한 얘기는 못 들었지만, 전쟁나자 바로 딸들 데리고 귀중품만 챙겨 군인들을 피해서 걸어왔다고 했다.

인민군도 피하고, 미군도 피하고, 국군이나 경찰도 되도록 피하며, 길도 묻고 물으며 빈집이나 산야에서 숙식하며 사십 일 이상이나 걸어왔다고 했다. 준비한 고무신 다섯 켤레씩이 모두 걸레처럼 됐다고 했다.

 

 

그로부터 여러 달 후에 서울 살던 넷째 고모 네가 우리 집에 왔다. 고모부는 서울에서 무슨 장사를 했었다고 들었다.

그들은 산호동에 큰댁이 있어 거기에 거처를 마련했는데 그날 우리 집에 다니러 왔던 것 같다. 나보다 대여섯 살 아래인 딸과 아직 업혀 다니는 딸을 데리고 왔었는데, 그날 큰딸이 보인 행태가 아직도 내 눈에 삼삼하다.

마당에서 나와 내 여동생과 무슨 놀이를 하고 있을 때 공중에서 제트기 소리가 났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신기한 소리였으나, 전쟁 후부터는 하루에도 십여 차례씩 들었던 소리라 예사로 느꼈는데, 갑자기 그 동생이 내 바짓가랭이를 붙들고 부들부들 떠는 것이었다.

의아해하는 우리 가족들은 고모의 설명을 듣고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서울 수복 때 제트기의 공습이 수없이 있었고, 그때마다 군데군데 불바다가 일어 질겁했는데, 그때 충격을 받은 것 같다고 했다.

얼굴도 예쁘고 눈매도 초롱초롱했던 그 여동생은 그 후 오랜 세월 동안에도 그 상처를 극복하지 못해 정신 이상 상태로 고생하다 갔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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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찾아가다 - 5

 

5. 한국전쟁기의 봉암동 - 미군들

 

우리들은 예사로 할로를 외치곤 했지만, 어른들이 인식은 많이 달랐었다. 특히 처녀들과 젊은 아녀자들에게 미군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어느 새댁은 야산에 끌려가 윤간당한 후 소나무에 목을 맸다느니, 어떤 처자는 사후에 아예 양색시(미군 상대 매음부)로 변신했다느니, 회원동 난민촌에선 미군의 횡포에 대들던 청년이 총 맞아 죽었다느니 하는 소문들이 참 한참 동안 끊임없이 들려왔던 것으로 기억된다.

실제로 내 큰누님과 육촌형수가 집 앞 우물가에서 나물을 씻다가 둘 앞에 세우는 방구쟁이 차를 보고 혼비백산하여 집안으로 뛰어 들어온 일도 있었고, 언젠가는 그런 두 사람의 뒤로 두 미군병사가 따라 들어와 권총을 빼들고 아버지와 우리 형제들을 질리게 했던 일도 있었다.

 

<6.25전쟁 때 미군부대로 위문공연 온 마럴린 몬로>

 

그들로 인한 폐해는 산과 바다의 사냥질에서도 많이 보였다.

봉암동 양덕동 등의 산전(山田) 두락들은 고라니, 노루, 산돼지 등으로 인한 피해를 많이 입어왔고, 그래서 마을사람들은 짐승들 쫓고 울타리 강화하는데 많은 신경을 써 왔기에, 산짐승은 귀찮기는 해도 항상 같이하는 존재였었다.

그런데 미군들의 사냥질이 있고나서 어느 때인가부터 짐승 구경하기가 어려울 정도가 돼버렸다.

오륙 명씩 무리를 지어 와서 등성이마다 점거하고는 총소리에 놀라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짐승들을 여러 마리 잡아 방구쟁이 차에 싣고 가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아직 핏기가 가시지 않은 노루 배를 목덜미에 걸치고 휘파람을 불며 가는 미군을 보면서는 아직 어린 나이에도 착잡한 감정을 느꼈던 것 같다.

청수 들 둑에선 아주 특이한 사냥 행태도 경이의 눈으로 보았었다.

청수 들 둑에선 적현리나 귀산마을이 가깝게 건너다 보였다. 겨울이 되면 그 앞바다엔 오리 떼가 까맣게 보일만큼 많이 노는 풍경이 으레 연출되었었는데, 그 오리들을 무자비한 방법으로 잡는 광경이었다. 전술한 졸저 상식의 서식처일단이다.

 

그들은 모터보트 두어 척에 두세 명씩 타고서 귀산 쪽 모퉁이를 소리 없이 돌아 나와서는 적현리 쪽으로 방향을 잡는 순간 굉음을 발하며 최고 속도로 오리 떼를 향하여 돌진했다.

놀란 오리들이 비명을 지르며 새까맣게 떠오르는데 그때 미군들의 총구에선 콩 볶듯이 총성이 일었다. 느리게 물을 차고 떠오르는 오리 떼를 향하여 조준 없이 산탄총을 난사하는 것이다.

멀리서도 점점이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바로 맞은 놈은 수직으로 빗맞은 놈은 날갯짓을 하며 비스듬히 떨어졌다.

보통 서너 명이 육칠 초 동안 그렇게 쏘아서 잡는 오리가 많을 때 십여 마리도, 적어도 대여섯 마리는 되는 것 같았다

 

어둑살이 짙어갈 무렵엔 바다 둑에 앉아, 팔룡산으로 자러 가는 오리들을 조준하여 떨어뜨렸다. 좀 멀리 떨어지는 놈은 그들이 데리고 온 개들이 물고 오는 광경도 보았다.

그들의 총의 위력은 어린 내 눈에도 참 놀라워 보였다.

전쟁 전에는 국방경비대 대원들이 간혹 들고 다니던 구구식 장총을 본 것이 고작이었는데, 전쟁 나고부터는 엠원이니 카빈이니 하는 현대식 총들을 무시로 보았다.

 

<카빈소총(위)과 엠원소총(아래)>

심지어 휴가 나온 동네 형도 총을 지니고 온 걸 보았고, 유엔군 따라 다니다 잠시 쉬러 온 당숙도 엠원 소총과 탄알 수십 발을 들고 와 집안에 우스꽝스러운 사고를 남기기도 했다.

아버지께 인사차 들렀을 때 가지고 온 총을 아랫방 구석에 세워두었는데 점심 먹던 머슴이 멋모르고 방아쇠를 건드려 격발시켜 버렸던 것이다.

우레 같은 소리에 큰방에 있던 아버지와 당숙과 우리들이 아랫방 문을 열어젖히니 방안은 먼지로 컴컴한 상태인데, 놀라서 뒤로 눕듯이 허리를 젖히고 있는 머슴 발끝에 놓여있는 총구 앞에 큰 구덩이가 보였다.

그리고 깨어진 구들장 조각도 늘려 있었다. 나는 그 후 종종 친구들한테 그 장면을 들려주며 엠원 총의 위력에 대하여 떠들었었다.

이러한 총 문화의 영향 때문이었을까?

가게에도 화약과 나무총이 많이 있었고,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지만, 총탄의 알을 분리해 추출한 화약과 탄피를 이용하여 목제 장난감 총을 만드는 것도 다반사였다.

그리고 그것을 좀 더 발전시켜 철파이프로 방총(철판의 일본어 てっぱん을 말한 것으로 추정)이란 것도 만들어 오리사냥을 시험해본 기억도 있다. 그런 놀이는 전후에는 더 빈번해졌었다.

그래서 그랬을 것이다. 오랫동안 우리들 대화의 중심엔 미군과 총 이야기가 항상 자리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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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23 00:00

기억을 찾아가다 - 2

 2. 봉암동 형성

 

팔용산에 수원지가 건설된 것은 1930년이었다. 처음 만들었을 때는 일인 1일 급수량 170리터 기준으로 인구 16,000명을 예상하고 만들었다가 증축을 하기도 했다. 광역상수도 확장사업이 완료된 1984년 말까지 마산시민의 식수원이었다.

수원지 물은 송수관을 타고 추산동 산중턱에 있었던 정수장을 거쳐 시민들에게 공급되었다.

50년대 후반에 민원을 받아 송수관 중간에 지관시설을 하여 정수장으로 가기 전의 원수를 봉암동 주민들에게 주기도 했었다.

수원지 길 들머리에서 백여 미터 올라가면 왼쪽 계곡에 집채만 한 바위들이 여럿 늘려있고, 오른쪽 석벽엔 아직도 홈을 새긴 것 같은 길쭉한 다이너마이트 자국이 선명히 남아 있어, 당시 난공사의 일단을 말해주고 있다.

산악타기 초보자들의 암벽등반 연습장처럼 활용되고 있는 그곳의 암벽도 그때 형성된 것이 아닌가 한다.

오백여 미터 더 오르면 수원지지역 출입문이 나오고, 바로 왼쪽으로 보이는 십여 미터 다리 너머(지금 운동기구 놓인 자리)에 일본식 건물인 산지기집 두 채가 있었다. 삼사십 평짜리들로 잘 지어진 집들이었다.

해방 후에도 이전 체제를 이어받아 산을 잘 관리하여 도회지 복판의 산인데도 많은 짐승들이 살았었다. 고라니, 노루, 여우, , 늑대, 오소리, 산돼지, 산토끼 등이었다.

정문에서 백 수십여 미터 안에 있는 둑 문 위엔 여천무극(與天無極, 댐 높이를 비유적으로 표한 듯)’이란 글이 시멘트 바탕에 음각되어 있었는데, 지금은 그 위에 시멘트를 바르고 봉암수원지(鳳岩水源池)’라고 써 놓았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지름 1m 정도의 원통형 공간이 댐 꼭대기까지 뚫려있고, 그 벽엔 쇠사다리, 그 옆엔 눈금 따라 깊이 표시가 씌어있었다.

중학교 때 친구들과 함께 그 사다리를 타고 올라가 철판덮개를 밀고 나와 둑 위에 섰던 일이 있었는데 위에서 내려다 볼 때의 아찔했던 기억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둑은 195312월에 증축되었는데 상단 직립부분이 그것이다.

수원지 길을 다 내려오면 마진국도와 맞닿는데, 왼쪽은 봉암다리로 오른쪽은 마산으로 향한다. 지금의 작은 공장들 사이 도로가 그것이다.

오른쪽 길 아래 이삼십 마지기 논 옆엔 청수들(청수淸水는 일본인 매축공사자의 이름으로 추정) 농수 공급용의 오륙천 평 저수지가 있었고(지금 영락원 일대), 서쪽으로 이십여 만 평의 논과 갈대밭이 양덕천까지 전개되어 있었다.

둑길은 저수지로부터 1km쯤 직선으로 뻗었다가 자동개폐식 수문(큰 수문)이 있는 곳에서 오른쪽과 왼쪽으로 각각 100m50m 정도 가다가 팔룡산에서 오는 내()를 건넌다. 이어서 또 하나의 수문(작은 수문)을 거쳐 200m쯤 나간 후 오른쪽으로 100m쯤 가면 끝난다(지금 자유무역지역 후문 근처).

 

<1951년 제작된 봉암동 일대 지도>

 

둑길은 바다와 갈대밭을 끼고 있어 거닐기에 참 좋은 길이었다.

2차 매립공사(현 봉암동과 자유수출지역 사이의 도로, 즉 옛 마진국도를 기준으로 위쪽을 1차 매립지, 아래쪽을 2차 매립지하고 표기)는 완공을 눈앞에 두고 해방을 맞은 듯 공사 현장이 1940년대 말까지 우리들의 놀이터 구실을 했다.

팔룡산 자락에 흙 파는 현장이 넓게 있었고, 흙을 싣는 수레(우리는 그것 흙구루마라 불렀다)도 있었으며, 레일도 한길을 가로 건너 바다 둑 근처까지 길게 놓여있었다.

둑을 막고 팔룡산의 흙을 날라 갯바닥을 메우는 공사 방식을 짐작해 본 것은 내가 성인이 된 후였다. 그런 후에야 동네 동쪽의 팔룡산 자락이 급경사로 되어 있는 이유도 유추해 볼 수 있었다.

우리는 그 수레를 위 끝까지 밀고 올라가서는 아래로 밀면서 내려와 속도감을 즐겼는데, 속도에 욕심을 내다가 수레가 탈선하는 바람에 무릎을 깬 일도 여러 번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2차 매립지 상단에 새로 닦다가 해방을 맞아 중단된 큰 도로로 있었다. 우리는 새 한질(새로 난 큰 길의 뜻)’이라 불렀다.

기존도로보다 넓었던 이 도로는 아직 덜 될 부분이 많아 개통은 안 되고 비어 있었기에 동네사람들이 타작마당으로 이용하거나 50년대 중후반에 많이 다녔던 떠돌이광대들이 공연장소로도 활용되었다.

이 길은 1960년대 중후반에 개발되었고, 더 확장되어 지금의 마진국도가 되어 있다.

1930년대에 닦았던 도로는 봉암동 경남은행 뒤의 소방도로로써 그 흔적을 남기고 있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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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20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142. 영불의 함대 입항

 

142. ·(·) 함대 입항

 

 

1920년 여름, 안남(安南, 월남)에 있는 불함(佛艦)이 마산 저도 좌편 안쪽에 투묘(投錨)했다가 삼일 후에 출항한 뒤를 이어, 상해에 주둔하고 있는 영함(英艦) 호오킨스호가 동도(同島) 훨씬 뒤편 마산 바로 앞면에 정박했다.

 

 

<1926년 조선교통도 마산5호에 나타난 마산만 해안>

 

 

이들 영·불 양 극동 함대가 진해 해군기지에 들르지 않고 마산만으로 들어온 것은 어디까지나 일본과의 친선을 위한 단순한 의례적 순방이라 했지만, 그들이 일본 육해군의 중요한 요새지인 이곳에 온 근본 저의를 번연히 알고 있는 일본군 당국자들은, 과거 동맹국으로 국제 친선의 예방인 만큼 속으로는 앓고 있으면서도 표면상으로는 환대하지 않을 수 없는 형편이었다.

 

이 두 함대가 거제 수도(水道)에 나타나기 직전, 진해 해군기지에서는 연막을 쳐서 군항의 일체 형태를 감추는 한편 육해군 장병들의 외출을 엄금해서 그들과의 불의의 교유나 충돌을 막는데 애썼던 것이다.

 

입항 2일째, 진해 통제부 사령관의 의례적 탐방이 있었으나 옹졸하고 괴팍한 일인인지라 내심 초조함을 금치 못했을 것이다.

 

·(·) 함선 안에는 이미 이 지역의 상세한 지도와 사진 등 지리상의 기밀 재료가 이곳을 빈번히 내왕한 선교사의 손을 거쳐 입수돼 있는 것쯤 일본군 수뇌들이 알고 있었을 터인데, 그렇다면 아예 그들의 내방을 단순한 친선예방으로 대하는 것이 마음 편한 것이 아니었을까.

 

호오킨스 호가 들어올 때 갑판을 두들겨서 수심을 측량해가며, 만 톤이 넘는 배가 저도에서 백여 미터 거리의 마산 바로 앞면에 웅자(雄姿)를 나타낸 것은, 저도 앞에 투묘(投錨)한 불함(佛艦)보다 수심 측정 기술이 앞섰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한 것인성 싶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함내(艦內)에서 성수(醒水)를 담수(淡水)로 만들어서 음료수로 쓴다면서 자랑도 대단했다.

 

영함(英艦)이나 불함(佛艦)에는 소저부와 쿡크가 중국인 아니면 안남인(安南人)인데 안남인 쿡크에게 , 차이나?”하고 물었더니 , 안난!”하면서 지나인(支那人)으로 보인 것이 불쾌했는지 노기 띤 대답으로 관함자(觀艦者)들을 실소케 한 일도 있었다.

 

오늘날과 같이 외국어가 널리 보급되어 구두닦기와 아이들까지 서투른 영어 조각이라도 할 수 있고, 그들 외인(外人)들이 가진 물건 이름이라도 알았던들 특수 외래품 단속법에 걸릴 염려 없이 귀한 물건들을 입수할 수 있었을는지 모르나, 일본말도 제대로 못하던 그때인지라 함내(艦內)에서 귀한 것이라고 구할 수 있었던 것은 기껏 영·(·) 연초회사 발매의 칼표 담배가 고작이었고, 조선인들이 그들의 돈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일본 군함에서와 마찬가지로 공급해 준 야채 값뿐이었다.

 

영함(英艦)이 발묘(拔錨)한 날은 불함(佛艦)의 천명한 날씨와는 달리 가랑비가 조용히 내리는 무더운 저녁 노을 때였다.<<<

 

 

<142회로 김형윤의 마산야화가 모두 끝났습니다. 다음 주, 저자 김형윤 선생을 소개를 하는 것으로 연재를 끝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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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23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134. 매축권과 대일 투쟁

134. 매축권(埋築權)과 대일(對日) 투쟁

 

 

구마산포는 옛날부터 농수산물의 집산지로서 중부 경남의 인후(咽喉)에 해당되는 기능을 가진 요지로 발달해 온 곳이었다.

 

망국의 낌새가 스며들던 한말, 마산의 토지소유권을 비롯한 모든 이권이 노·일 양국의 각축과정에서 외인(外人)의 손아귀로 넘어가는 가운데서도 구마산 항민(港民)들은 꾸준히 그들의 상권을 투쟁으로 수호 유지해 왔다.

 

이러한 투쟁의 현실적인 뒷받침은 물론 축적된 상업자본의 힘에서 온 것이지만, 이러한 것이 인()이 되고 과()가 되어 더욱 상업자본이 축적되어 갔고 그 결과 일본 상인들에 대해서도 투쟁의 현실적인 실력을 갖추어 가게 되었던 것이다.

 

외인(外人)이 본격적으로 도래하기 시작한 개항 이후 그들이 노리는 중요한 이권 가운데 하나가 창탄(漲灘, Water frontage)의 매축권이었다.

 

원래 우리나라의 창탄은 매매가 허락되지 않았고, 외국인이 소유할 수도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노·일 양국은 이 창탄의 탈취를 둘러싸고 무섭게 대립하였던 것이니, 이는 매축권과 밀접하게 결부되는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마산의 본거지인 구마산의 해안지 즉 서성리, 중성리, 동성리, 오산리 지선(地先)의 창탄지는 구마산 항민들로 보아서는 그들의 상권, 어업권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 그들에게는 생존권과도 결부되는 중요한 터전이기도 했다.

 

구마산의 시장권을 빼앗으려다가 실패한 일본인들은 그 후 다시 이곳 창탄지 매축권을 빼앗으려고 시도했다. 이 낌새를 알게 된 구마산 항민들은 분연히 궐기, 꾸준한 항소 투쟁을 벌여 끝까지 이를 수호했던 것이니, 이 사실은 구마산 항민들의 근대적 투쟁으로서 높이 평가됨직한 것이었다.

 

마산포 개항 후 이를 둘러싼 노·일의 각축은 날로 치열해 가고 이에 따라 외국 선박의 마산항 출입도 빈번해 갈 무렵, 1899(광무3) 51, 구마산 동성리에 살던 김경덕은 만국의 통상이 성해지고 앞으로 구마산포에 있어서도 상여(商旅)의 집회와 화물의 풍비(豐備)가 예측되므로 구마산 서성리로부터 오산리에 이르는 창탄의 매축권을 창원감리서에 신청하여 감리의 인허를 받게 되었다.(189910)

 

 

<아래 그림은 김경덕이 매축청원서에 첨부한 도면. 이 도면을 현 도시공간에 표시한 것이 두번째 그림이다>

 

 

 

그 후 김경덕은 당시 일본육군성 자금으로 노국의 정책을 방해하기 위해 방간방태랑(부산을 거점으로 암약暗躍하던 일본인 식민재벌-편자주)과 같이 마산포 투지 매수에 혈안이 되어 있던 일본인 홍청삼(弘淸三, 오백정五百井 상점 마산 지배인)으로부터 15,000냥을 매삭 매양두 삼분식(每朔 每兩頭 參分式)의 이자로 광무 6(1902) 정월 회내(晦內)’를 기한으로 본전과 이자를 환부한다는 조건 밑에 매축 인허문권(認許文券)을 전집(典執)하고 빌렸던 것이다.

 

그리고 만일 기한이 지날 때는 매축인허문권을 영원히 허급(許給)한다는 차용증을 작성해 주었던 것이다.(홍청삼 주장)

 

그 후 얼마 안 되어(1902년 정월 회일晦日 ) 김경덕이 사망하게 되자 홍청삼은 서성리로부터 오산리에 이르는 창탄지에 표목(標木)을 세우고 장차 이곳을 매축하려 하게 되자 비로소 일본인의 야망은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이에 대한 감리서의 의정부 앞 보고를 보면 다음과 같다.

 

주본항일본이사관(駐本港日本理事官) 삼증구미길조회(三增久米吉照會)를 접준(接准)하온즉 내개(內開)에 본방(本邦) 상인(商人) 홍청삼이가 별지(別紙)에 통()한 마산포서성(馬山浦西城)으로 오산(午山)에 지()하와 해면매축권리이전(海面埋築權利移轉)할 양() 인원서(認願書)를 제출하니 사실(事實)을 조사(調査)하여 정당(正當)하거든 별지원서(別紙願書)대로 인허(認許)하기로 부속(附屬) 서류첨부(書類添附) 차단(此段) 조회등인(照會等因)이옵기 거차사(據此査)하온즉 광무 310월에 본항(本港) 동성거(東城居) 김경덕(金敬悳) 위명인(爲名人)이 자본항서성리전(自本港西城里前)으로 오산리전지창탄(午山里前至漲灘)을 한오십파(限五十把) 퇴축(退築)하오면 무해어공(無害於公) 이위이어상민(而爲利於商民)이라 청원(請願)하자 승인허(承認許)하야 음력(陰曆) 경자(庚子) 2월 초삼일에 해() 인허장(認許狀)을 전집어일상인홍청삼(典執於日商人弘淸三)하옵고 득임(得賃) 일만오천양미보(壹萬五千兩未報)하옵고 급위신사(伋爲身死)하였사오며 해() 전집급채지홍청삼(典執給債之弘淸三)하옵고 칙척빙인허(則尺憑認許)하옵고 견립표목(堅立標木)에 장영직축(將營直築)이온바 당초(當初) 인허성급(認許成給)하온 우시감리(于時監理)는 수위상무지흥왕(雖爲商務之興旺)이오나 지금매축권리(至今埋築權利)가 이전우외(移轉于外)이온 고()로 해() 청원(請願)에 승인(承認)하옵고 김경덕(金敬悳) 청원서(請願書) () 전집표(典執票)를 등서(謄書)하와 병기매축처도회(倂其埋築處圖繪)를 자()에 첨부보고(添附報告)하오니 사조처분(査照處分)하심을 복망(伏望).

광무(光武) 10411

 

창원감리서(昌原監理署) 주사(主事) 김병철(金炳哲)

 

의정부참정대신(議政府參政大臣) 각하(閣下)

 

 

그리고 위 보고서에 첨부된 김경덕의 청원서와 전집문기(典執文記)를 보면 다음과 같다.

 

청원서(請願書)

 

본항(本港) 동성거(東城居) 김경덕(金敬悳)

 

우청원단(右請願段)은 제자만국통상지회(際玆萬國通商之會)하야 초범오장(楚帆吳檣)이 차제래박(次第來泊)일세 본포(本浦)를 금기설항(今旣設港)즉 상여지회집(商旅之會集)과 물화지풍비(物貨之豐備)는 이소필연(理所必然)이라 자서성(自西城)으로 이지오산(以至午山)에 방축제창탄(防築際漲灘)을 한오십파퇴축성언(限五十把退築成堰)하와 주즙왕래(舟楫往來)에 무천착지려(無淺窄之慮)하고 시전포열(市廛布列)에 면분환지폐(免粉還之弊) 칙무해어공(則無害於公) 이위이어상민자성대의(而爲利於商民者誠大矣) ()로 회성형지(繪成形址)하와 자감점연앙청(玆敢粘連仰請)하오니 참상교시후(參商敎是後) 특위인허(特爲認許)하오셔 비위상판흥왕지지(俾爲商販興旺之地) 복망(伏望)

 

광무(光武) 310월 일

 

감리(監理) 각하(閣下)

 

指令

퇴축성언(退築成堰)이 상판(商販)에 여이(與利)함인즉 특념(特念) 인준(認准)할 사() 십월

대한(大韓) 광무(光武) 4년 경자(庚子) 2월 초삼일 홍공전표(弘公前票) 우표위사단(右票爲事段) 당차지시(當此之時) 긴유급용처(緊有急用處) 마산포양자서성(馬山浦洋自西城), 오산지방축제(午山至防築際) 창탄(漲灘) 한오십파퇴축성언차(限五十把退築成堰次) 감리서인준문기(監理署認准文記) 전집시유한전일만오천양우전출채(典執是遺韓錢壹萬五千兩右前出債) 이변칙매삭매양두(而邊則每朔每兩頭) 삼분식위정(參分式爲定) 이한칙광무(而限則光武) 6년 정월 회내(晦內) 구본이준보시의(俱本利準報是矣) 약과한불보(若過限不報) 칙우인허문기(則右認許文記) 영위허급(永爲許給) 이이차문기(而以此文記) 병위방매문기(倂爲放賣文記) 퇴축성언(退築成堰) 귀공자유(貴公自由) 임의(任意) 이일후약유잡담지폐(而日後若有雜談之弊) 칙이차표빙고사(則以此標憑考事).

 

標主 김경덕(金敬悳)

 

 

구마산 창탄을 일상인(日商人) 홍청삼(弘淸三)이 매축하려는 이 사실은 구마산 항민(港民)에게는 청천의 벽력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중대사였다.

 

당시 마산의 형편을 보면 구마산포에서 각국 조계지(신마산-편자 주)에 이르는 해안 십리는 일본 철도감부(鐵道監部)입표정계(立標定界)’하여 매축 예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구마산 서성리(西城里)로부터 오산리(午山里)에 이르는 매축권이 홍청삼(弘淸三)의 손아귀로 들어가게 되면 마산 창탄전역이 일본의 손아귀로 들어가게 되는 셈이 된다.

 

구마산 서성리에서 오산리에 이르는 지선(地先) 해면(海面)은 넓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인가(人家) 천호(千戶)가 나락일처(羅絡一處)’에 군집(群集)하여 있어 물화기사(物貨起卸)의 상전시사(商廛市肆)’를 설립코자 하여도 땅이 없으므로 이곳을 매축하면 상업이 크게 흥할 수 있는, 그야말로 상업발전의 최대 관건이 되는 곳이었다.

 

또 이때 구마산포의 배후 일대의 토지는 일본이 철도 부지로서 강제 점령하고 있었으므로 구마산 창탄 매축권을 일본인 홍청삼(弘淸三)이 차지하게 되면 구마산 항민들의 처지는 장차 목이 졸려 질식하게 되는 형편에 몰릴 것이 뻔했다.

 

따라서 구마산 항민들로서는 생존권에 관계되는 중대사가 아닐 수 없었다.

 

이때 감리서는 상부의 명도 있고 해서 홍청삼을 불러 누누이 타일렀으나 그는 전집문기(典執文記)를 빙자하여 응하지 않았다.

 

또한 김경덕은 이미 사망하였고, 원근 친척도 없었으므로 문제의 증빙서류를 고증해 볼 수도 없었고, 따라서 그 진실을 캐어 보기가 실로 어려웠던 것이다.

 

이에 대한 감리의 보고를 보면 다음과 같다

 

향이본항해면(向以本港海面)에 일상(日商) 홍청삼(弘淸三)이 통위매축일사(統爲埋築一事)로 보명본부(報明本府)하였삽더니 시승지령내개(施承指令內開)에 차단사항(此段事項)이 관계비경(關係非輕)이거늘 초불보명(初不報明)하고 체선인허우외인(遞先認許于外人)이 수속가아(殊屬可訝)함도격소(函圖繳消)하야 비무자안(俾無滋案)케 할 사등인(事等因)이시온바 차()를 준사(遵査)하온즉 항해매축(港海埋築)이 원계중요(原係重要)이온바 개이본항형편(槪以本港形便)으로 언지(言之)하오면 자구마산포(自舊馬山浦)로 지마산각국거류지(至馬山各國居留地)하여 연해일대(沿海一帶)에 장근십리(長近十里)는 기자철도감부(己自鐵道監部)로 입표정계고(立標定界故)로 향여십사호(向旅十四號) 보고(報告)에 회도점상(繪圖粘上)이옵고 사차이외(捨此以外)에 사합매축자(司合埋築者)는 서자서성리(西自西城里)로 동지오산(東至午山)토록 전인어총청삼(全人於弘淸三) 영축지도(營築地圖)하였삽는데 관기지형(觀其地形) 칙수미수리(則首尾數里)에 해면(海面)이 초활(稍闊)하고 해수(海水)가 초천(稍淺)하여 불비거력(不費巨力)이라도 가득실효(可得實效)이옵고 논기지리(論其地利) 칙인가천호(則人家千戶)가 나락일처(羅絡一處) 이총잡착박(而叢雜窄迫)하와 선박출입(船舶出入)에 물화기각(物貨起却)의 급부상전시사(及夫商廛市肆)를 욕설무타(欲設無他)이온즉 차약증축(此若增築)이오면 상유흥왕(商裕興旺)에 최대관건(最大關鍵)이옵거늘 조속지외인(朝屬之外人)이 극계완석(極係惋惜)일뿐더러 황승엄절(況承嚴節)에 불용유홀(不容琉忽)이옵기 해홍청삼(該弘淸三)을 루경초유(屢經招諭)에 혹완혹준(或婉或峻)하야 명기불연(明其不然)하오되 업사신사(業巳身死)에 겸무원근족친(兼無遠近族親)이라 하오며 소유일절서류(所有一切書類)를 참 수제존당(漱諸存檔)에 역무가고(亦無可考)이오니 사심아감(事甚訝感)이오나 역난사핵(亦難査覈)이온바 기존거행(其存擧行)에 귀각시민(晷刻是悶)이옵기 자()에 보고하오니 사조(査照)하심을 복망(伏望).

 

광무(光武) 1062

 

창원감리(昌原監理) 이 기 (李 琦)

 

의정부(議政府) 대신(大臣) 각하(閣下)

 

 

당초에 구마산 창탄의 매축권을 감리로부터 인허 받은 김경덕이 이때는 이미 사망한 뒤였으므로 일상인(日商人) 홍청삼(弘淸三)의 주장으로 보아 이 무렵 일본인들이 악랄한 갖은 수법을 상습적으로 저지르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전기(前記) 감리의 보고에서 사심아감(事甚訝感)이오나 역난사핵(亦難査覈)’이라 한 바와 같이 실로 허위 날조의 가능성이 짙은 것이다.

 

홍청삼은 현지 마산에서 구마산 항민들을 비롯한 감리의 반대로 자기의 뜻을 관철할 수 없게 되자 일본인 이권 옹호기관의 본산(本山)인 통감부로 하여금 조선정부에 압력을 가하여 매축을 허가하도록 강요했다.

 

통감부의 통첩을 받은 당시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은 창원부윤에게 다음과 같은 훈령을 통하여 창탄 매축예정기지(埋築豫定基址)의 장광평수(長廣坪數)와 인허시(認許時) 혹 타인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지를 상세히 보고케 하였다.

 

수사안당(漱査案檔)한 즉 광무 310월에 귀부동성거민(貴府東城居民) 김경덕이 자본항서성리전(自本港西城里前)으로 지오산리전(至午山里前) 창탄(漲灘)을 한오십파퇴축(限五十把退築)함을 이시감리(伊時監理)에게 승인(承認)한 후() 일인 홍청삼에게 이전(移轉)한 사()로 광무 104월에 전() 의정부(議政府)에서 전() 감리서(監理署), 김병철(金炳哲)의 보고를 거()하야 해인허(駭認許)함도격소(函圖繳消)할 사()로 지절재안(指節在案)인바 현접통감부내문(現接統監府來文)한즉 마산포(馬山浦) 재유홍청삼(在留弘淸三)으로부터 구마산포(舊馬山浦) 해면매축(海面埋築)할 사()로 청원(請願)하온바 우()는 통상무역(通商貿易)의 편리(便利)를 기()하기 위()하야 항구(港口)를 수축(修築)하야 신()히 선박격류장공동물화상륙소(船舶擊溜場共同物貨上陸所) ()을 설()하고 차매축지(且埋築地)는 창고및공동시장(倉庫及共同市場)에 소용(所用)할 목적(目的)으로써 차()에 기공(起工)할 계획(計劃)이오니 동지방산업(同地方産業)의 발전상(發展上) 유익(有益)한 사업(事業)뿐 부시(不是)라 기매축구역및설계(其埋築區域及設計) ()이 적당(適當)하므로 인()하오니 청원(請願)을 의()하야 허가등인(許可等因)이라 차()를 준사(准査)한즉 해() 창탄(漲灘)을 이시감리(伊時監理)가 불유상부(不由上部)하고 천행인허(擅行認許)가 실소아혹(實所訝惑)인지라 김씨(金氏)에게 인허(認許)한 기지(基址)의 장광평수(長廣坪數)와 해기지(該基址)를 인허(認許)함에 대하야 공동이익(共同利益)과 혹타인소유권(或他人所有權)에 구무방해(俱無妨害)인지 병상세보명(並詳細報明)할 사()로 자()에 훈령(訓令)하니 조량준변(照諒遵辨)함이 위가(爲可)

 

융희원년(隆熙元年) 105

 

內閣總理大臣 이 완 용(李 完 用)

 

창원부윤(昌原府尹) 이 기(李 琦)

 

 

이 훈령(訓令)에 대하여 창원부윤 이기(李琦)는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현승제삼십호(現承第三十號) 훈령내개(訓令內開)에 수사안당(漱査案檔)한즉 광무 2310일에 귀부동성거민(貴府東城居民) 김경덕이 자본항서성리전(自本港西城里前)으로 지오산리전(至午山里前) 창탄(漲灘)을 한오십파퇴축(限五十把退築)함을 이시감리(伊時監理)에게 승인(承認)한 후() 일인 홍청삼에게 이전(移轉)한 사()로 광무 104월에 전의정부(前議政府)에서 전감리서(前監理署) 김병철(金炳哲)의 보고를 거()하야 인허(認許)를 함도격소(函圖繳消)할 사()로 지절재안(指節在案)인바 현접통감부내문(現接統監府來文)한 즉 마산포(馬山浦) 재유 홍청삼(在留弘淸三)으로부터 구마산포(舊馬山浦) 해면매축(海面埋築)할 사()로 청원(請願)하온바 우()는 통상무역(通商貿易)의 편리(便利)를 기()하기 위()하야 항구(港口)를 수축(修築)하야 신()히 선박격류장(船舶擊溜場) 공동물화(共同物貨) 상륙소(上陸所) ()을 설()하고 차매축지(且埋築地)는 창고및공동시장(倉庫及共同市場)에 소용(所用)할 목적(目的)으로써 차()에 기공(起工)할 계획(計劃)이오니 동지방산업(同地方産業)의 발전상(發展上) 유익(有益)한 사업(事業)뿐 부시(不是)라 기매축구역및설계등(其埋築區域及設計等)이 적당(適當)하므로 인()하오니 청원(請願)을 의()하야 허가등인(許可等因)이라 차()를 준사(准査)한즉 해() 창탄(漲灘)을 이시감리(伊時監理)가 불유상부(不由上部)하고 천행인허(擅行認許)가 실소아혹(實所訝惑)인지라 김씨(金氏)에게 인허(認許)한 기지(基址)의 장광평수(長廣坪數)와 해기지(該基址)를 인허(認許)함에 대하야 공동이익(共同利益)과 혹타인소유권(或他人所有權)에 구무방해(俱無妨害)인지 병상세보명(並詳細報明)할 사()로 자()에 훈령(訓令)하니 조량준변(照諒遵辨)함이 위가등인(爲可等因)이시온바 훈사(訓辭)를 늠준凜准하와 해안건(該案件)을 심사(審査)하온즉 김씨에게 인허(認許)한 사()가 초무존당(初無存檔)이오며 설유전질권(設有典質券)이라도 사재광무(事在光武) 삼년도(三年度)뿐 부시(不是)오라 광무(光武) 101016일 칙령(勅令) 62호 난내(欄內)에 각종인허(各種認許)에 대()하야 일개년내실시혹착수(一箇年內實施或着手)치 못한 시()는 해인허(該認許)를 무효(無效)로 함이라 하셨사오니 해인(該人)에 차이전권(此移轉權)은 자귀무효(自歸無效)이온지라 이무경론(理無更論)이옵고 해창탄매축(該漲灘埋築)할 기지(基址)로 논()하와도 상년(上年) 62일 의정부(議政府) 지령(指令)을 승준(承准)하와 보명(報明)하였사온즉 자가동촉(自可洞燭)이 살건바 해안일대(海岸一帶)에 공동이익(共同利益)과 타인소유권(他人所有權)에 방해(妨害) 유무(有無)에 대()하야 동서(東西) 굴강(掘江)은 포칠리거민소용지지(浦七里居民所用之地) 위기선박지피풍우(爲其船舶之避風雨)이 수축처야(修築處也), 동성어선(東城魚船) 창여(艙與) 오산선창(午山船艙)은 각어물판매설점소(各魚物販賣設店所)이온즉 해창탄지긴요(該漲灘之緊要)가 기어상민(其於商民)에 최유관계(最有關係)이옵기 해기지(該基址)의 장광파수(長廣把數)를 회성도본(繪成圖本)하와 점부상송(粘付上送)하오며 자()에 보고(報告)하오니 사조처분(査照處分)하심을 복망(伏望).

 

융희원년(隆熙元年) 1029

 

창원부윤(昌原府尹) 이 기(李 琦)

 

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 각하(閣下)

 

 

즉 이 안건을 심사한즉 김경덕에게 사실이 초무존당(初無存檔)’하고 설혹 전질권(典質券)이 있다 하더라도 그 일은 광무 3년도(1899)의 일로 광무 10(1906) 1016일 칙령 제62호에 의해 무효화된 것이며, 타인 소유권에 대한 방해 유무에 관하여는 동서굴강(東西掘江)’포칠리(浦七里)’에 거주하는 항민(港民)의 소용지로서 선박의 대피지로 수축한 곳이요, 동성어물(東城魚物)선창은 오산(午山)선창과 더불어 각 어물 판매를 위해 설점(設店)을 하고 있는 터이므로 이곳 창탄(漲灘)은 구마산 상민들에게는 가장 긴요한 곳이라 보고하였던 것이다.

 

일상인(日商人) 홍청삼(弘淸三)이 통감부에 청원한 결과 통감부가 조선내각에 압력을 가하여 그에게 매축의 인허(認許)를 주도록 획책한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구마산 항민(商漁民)들은 분연히 궐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리하여 항민 박기수, 김하수 등은 서성 선창에 이르는 일대의 창탄을 합력투자(合力投資)하여 매축할 것을 결의한 후 조약(條約)을 준성(峻成)’하고 구마산 항민을 대표하여 다음과 같은 청원서를 창원부윤에게 제출했다. 이 일은 구마산 항민들이 경제적으로 실력 대항하려는 거사로서 실로 주목할 만한 사실이었다.

 

본항(本港) 소재(所在) 자서성동선창(自西城洞船艙)으로 지오산선창(至午山船艙)은 즉() 포칠리수천호거민(浦七里數千戶居民) 영업자생지신지(營業資生之信地)이거늘 일인(日人) 홍청삼(弘淸三)이 해기지해안전면(該基地海岸前面)을 통위매축(統爲埋築)할 양()으로 통감부(統監府)에 청원(請願)하야 자내각(自內閣)으로 해기지매축(該基地埋築)에 대()하여 공동이익(共同利益)과 혹타인(或他人) 소유권(所有權)에 구무방해(俱無妨害)인지 상세보명(詳細報明)하라신 훈령(訓領)이 내도(來到)하오니 차()에 대()하와 항민(港民)에 정장(情壯)을 추구(推究)하온즉 여간전토(如干田土)는 진입어철도및군용지(盡入於鐵道及軍用地)하옵고 자생여지(資生餘地)가 지시(只是) 자서성선창(自西城船艙)으로 지오산선창(至午山船艙)까지 내유서굴강여선창(內有西掘江與船艙)이라 차약양어타인매축(此若讓於他人埋築) 하오면 편동한구지인후(便同寒口之咽喉)요 폐호지문비(閉戶之門扉)라 본항기천호거민(本港其千戶居民)은 세장실업비산내사(勢將失業俾散乃巳)옵기 민등순의동일(民等循議同一)하와 자서성선창(自西城船艙)으로 지오산선창(至午山船艙)까지 일대(一帶) 창탄(漲灘)을 합력(合力) 구재(鳩財)하와 매축(埋築) 영업(營業)할 차()준성조약(峻成條約)하옵고 자()에 청원(請願)하오니 보내각승인(報內閣承認)하시와 사차무고기만생영(使此無辜幾萬生靈)으로 비보천식(俾保喘息)케 하심을 복망(伏望).

 

이 청원서에는 당시 구마산이 놓여있는 어려운 형편이 실로 잘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즉 당시 구마산 배후 일대의 전토(田土)가 모두 철도와 군용 부지로 일본에게 강제 수용을 당하고 구마산 항민이 자생(資生)할 수 있는 곳은 오직 구마산 해안 일대 뿐인데, 이곳 매축을 일인(日人)이 하게 되면 목을 조르고 문을 닫게 하는 것과 같아 이곳에 사는 수천호거민(數千戶居民)’은 장차 실업으로 산산이 흩어질 뿐이라 하여 이곳 매축권은 구마산 항민들의 생존권에 관계된다는 것을 환기시키면서 항민의 자체 매축을 청원하였던 것이다.

 

이 청원서에 접한 부윤은 1907111일 내각총리대신 앞으로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이본항매축사(以本港埋築事)로 낭승(曩承) 제삼십호(第三十號) 훈령(訓令)하와 축조보명(逐條報明)이삽던바, 현접항민(現接港民) 박기수(朴基洙), 김하수(金河守) 등 청원서(請願書) 내개(內開)에 본항(本港) 소재(所在) 자서성선창(自西城船艙)으로 지오산선창(至午山船艙)은 즉() 포칠리수천호거민(浦七里數千戶居民) 영업자생지신지(營業資生之信地)어늘 일인(日人) 홍청삼(弘淸三)이 해기지(該基地) 해안전면(海岸前面)을 통위매축(統爲埋築)할 양()으로 통감부(統監府)에 청원(請願)하야 자내각(自內閣)으로 해기지매축(該基地埋築)에 대()하여 공동이익(共同利益)과 혹타인(或他人) 소유권(所有權)에 구무방해(俱無妨害)인지 상세보명(詳細報明)하라신 훈령(訓領)이 내도(來到)하오니 차()에 대()하와 항민(港民)에 정장(情壯)을 추구(推究)하온즉 여간전토(如干田土)는 진입어철도및군용지(盡入於鐵道及軍用地)하옵고 자생여지(資生餘地)가 지시(只是) 자서성선창(自西城船艙)으로 지오산선창(至午山船艙)까지 내유서굴강여선창(內有西掘江與船艙)이라 차약양어타인매축(此若讓於他人埋築) 하오면 편동한구지인후(便同寒口之咽喉), 폐호지문비(閉戶之門扉)라 본항기천호거민(本港其千戶居民)은 세장실업비산내사(勢將失業俾散乃巳)옵기 민등순의동일(民等循議同一)하와 자서성선창(自西城船艙)으로 지오산선창(至午山船艙)까지 일대(一帶) 창탄(漲灘)을 합력(合力) 구재(鳩財)하와 매축영업(埋築營業)할 차()로 준성조약(峻成條約)하옵고 자()에 청원(請願)하오니 보내각승인(報內閣承認)하시와 사차무고기만생영(使此無辜幾萬生靈)으로 비보천식(俾保喘息)케 하심을 복망등인(伏望等因)이온바 차()를 사()하오니 해기지(該基址)가 항민(港民)에게 관계누중(關係累重)뿐 불시(不啻)오라 이항민공동소유지지(以港民共同所有之地)로 허항민매축업(許港民埋築業)이 식계여거(寔係與擧)옵기 자()에 보고(報告)하오니 사조(査照)하신 후 항민(港民)에 정장(情壯)을 특념(特念)하시와 의원매축(依願埋築)케 하심을 복망(伏望).

 

융희원년(隆熙元年) 111

 

창원부윤(昌原府尹) 이 기(李 琦)

 

내각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 각하(閣下)

 

이 같은 부윤의 보고를 받은 내각에서는 매축할 평수와 자본액수와 매축기한 등을 세밀히 검토한 다음 일후(日後) 어긋나는 일이 없도록 후에 인허(認許)하고 그것을 보고할 것을 창원부윤에게 훈령하였다.

 

이에 부윤은 항민들로부터 제출된 창원 마산항 탄지매축(灘址埋築) 명세서를 첨부하여 내각총리대신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현승제오십삼호(現承第五十三號) 훈령내개(訓令內開)에 내보거실(來報據悉)인바 해탄지(該灘址)를 항민등(港民等)이 매축영업(埋築營業)할 사()로 준성조약(峻成條約)이라 하였으니 매축(埋築)할 평수(坪數)는 기하(幾何)이며 소인자본(所人資本)은 기하(幾何)인데 하이변비(何以辨備)이며 매축필역(埋築畢役)할 기한(期限)은 이기허간약정(以幾許間約定)하였는지 차등각건(此等各件)을 일일확세정지(一一確細定之)하야 보무일후위오연후(保無日後違誤然後)에 내가준시(乃可准施)이니 축저보명사등인(築底報明事等因)이온바 차()를 늠준(凜准)하와 항민등(港民等)이 해탄지매축(該灘址埋築)할 사()로 예산(豫算)하온 명세서(明細書)를 수취(受取)하와 점부상송(粘付上送)하오며 자()에 보고(報告)하오니 사조(査照)하심을 복망(伏望).

 

융희원년(隆熙元年) 1229

 

창원부윤(昌原府尹) 이 기(李 琦)

 

태자소사내각총리대신(太子小師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 각하(閣下)

 

창원(昌原) 마산항(馬山港) 탄지매축(灘址埋築) 명세서(明細書)

 

1. 평수(坪數)는 자서성선창(自西城船艙)으로 지오산선창(至午山船艙)까지 통계일만일천오백십사평(統計壹萬壹千五百十四坪)

2. 필역기한(畢役期限)은 십이개월(十二個月)로 예정사(豫定事)

3. 소인자본(所人資本)은 사만환(四萬圜) 예산(豫算)인데 항민중(港民中) 자본가(資本家)에서 합력구취사(合力鳩聚事)

4. 자본인성명(資本人姓名)을 우개날장(右開捺章)하야 지방관청(地方官廳)에 보관사(保管事)

 

左開

이규철(李圭哲) 오천환 이상소(李相召) 오천환 손양손(孫梁損) 오천환

강홍규(姜洪奎) 오천환 김지관(金志觀) 오천환 권태창(權泰昌) 오천환

최병두(崔炳斗) 이천환 김창제(金昌濟) 이천환 김정기(金正基) 일천환

정인섭(鄭仁燮) 일천환 박기수(朴基洙) 일천환 김하수(金河守) 일천환

강성도(姜成度) 일천환 이장환(李章煥) 오백환 송치권(宋致權) 오백환

                                                                                계() 사만원(四萬圜)

    

실로 이때 사만환(四萬圜)이라는 돈은 막대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구마산 항민들은 그들의 생존권에 관계되는 구마산 매축권을 수호하기 위해 일인과의 투쟁에서 단결력에 의해 또한 꾸준한 항소(抗訴) 투쟁을 전개하여 드디어는 항민 자본가들의 합력(合力) 투자한 사만(四萬)의 자본으로 매축 인허를 받게 됨으로써 통감부의 압력을 뚫고 주권의 수호에 성공했던 것이다.

 

융기(隆起)해 오르는 이러한 구마산 항민들의 저항의식의 물결을 타고 1908년 자주적 이권 옹호의 자치 기관인 마산민의소가 탄생하였다.

 

이는 국내 봉건지배층과 외세(外勢)에 대항하여 구마산 항민들의 이권을 옹호하는 대변 기관이었다.

 

그 성격은 서울에 생겨났던 독립협회와 같은 성격을 띤 것으로 마산민의소는 항민의 의사를 집결하여 마산항의 주권을 옹호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조선의 일본에의 병합을 계기로 마산민의소도 강제 해산된 것은 나라의 운명과 궤를 같이 한 것이다.

 

이 같은 마산 항민들의 저항을 뒷받침한 현실적인 힘은 축적된 항민 자본이었고 이러한 자본은 상술(上述)한 바와 같은 투쟁을 통하여 민족 주체성 가운데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상인 홍청삼(弘淸三)은 그 목적한 바가 실패로 돌아가자 구마산 서성선창(西城船艙)에서 동성선창(東城船艙)까지의 서굴(西掘)을 재내(在內)로 하는 일부분의 매축권이라도 얻어 보려고 노력하였으나 역시 실패하였다.

 

이 결과 현지 일인 이사관과 감리 사이까지에도 금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같은 사실은 다음과 같은 당시 부윤의 보고를 통하여 잘 알 수 있다.

 

본부(本府) 마산항소재(馬山港所在) 창탄기지(漲灘基址) 자서성지오산선창(自西城至午山船艙)까지 매축(埋築)할 사()에 대()하여 무역항안(貿易港岸)에 공익상(公益上) 미거(美擧)됨은 본() 부윤(府尹)이오나 일이사관(日理事官)이오나 동일(同一) 사상(思想)이온데 단() 매축권(埋築權)에 재()하여는 다민(多民)에 원()을 불가부종(不可不從)하와 업사보명(業巳報明)이옵거니와 현거이사관호담(現據理事官哠談)하온즉 일상민(日商民) 홍청삼(弘淸三) 청원(請願)이 단서성선창(但西城船艙)으로 동성선창(東城船艙)까지 서굴강(西掘江)만 내재(內在)한 일부분(一部分)에 불과(不過)하다 하오니 해기지(該基址)가 항민(港民)에 청원(請願)한 기지내(基址內)에 포함기내(包含其內)하와 기어오십삼호지령(旣於五十三號指令)을 봉시(奉示)하와 갱보(更報)하온즉 해기지(該基址)에 매축권(埋築權)을 수모(誰某)에게든지 인허(認許)하심은 유재내각처분(惟在內閣處分)이옵거니와 항민(港民) 청원(請願) () 실업비산구어(失業俾散句語)로 통감부(統監府)에서 이사관(理事官)이 본부윤(本府尹)과 동의(同意)를 득()치 못한 양으로 해이사관(該理事官) 본부윤(本府尹)에게 유감(遺憾)이 불무(不無)이온바 대저(大抵) 본부윤(本府尹)의 보사(報辭)가 해기지매축(該基址埋築)이 불가(不可)로 성언(成言)함이 아니고, 해사업지권(該事業之權) 찬성(贊成)에 관()하여 인민(人民)의 청원사의(請願辭意)를 거보(據報)한 사()이오며 이사관(理事官)의 본의(本意)도 무론(無論) 수모(誰某)가 매축권(埋築權)을 득()하던지 내두공동이익(來頭共同利益)의 흥왕(興旺)함을 위함이온즉 본래(本來) 해안건(該案件)의 기이(岐異)한 의견소무(意見小無)하옵기 자()에 보고(報告)하오니 사조(査照)하신 후 지조통감부(知照統監府)하오셔 이사관(理事官)과 본부윤(本府尹)의 동일(同一)한 본의(本意)를 변명(卞明)케 하심을 복망(伏望). 地 呼 遽(지 호 거)

 

융희(隆熙) 217

 

창원부윤(昌原府尹) 이 기(李 琦)

 

내각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 각하(閣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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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16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133. 노공관의 점유지

133. 노공관(露公館)의 점유지

 

 

1899년 노서아와 일본 정부가 마산에 해군 근거지를 두려고 각축전이 치열했는데 노서아는 서부 마산에 조차 조약을 체결한 뒤 지금의 일성 펌프공장 자리에 영사관을 두고 백조악기점 자리에는 관사를 두었다.

 

그리고 신마산 공설시장 역내 대지 86번지 동 87, 88, 72-9, 722, 7217, 72-12 7개소를 점유하여 지금도 등기상 노서아의 소유가 되어 있으므로 한국인의 공유(公有)나 이유(利有)가 불가능하며

 

국립요양원 뒷산에는 로인(露人) 묘지 2()이 있었는데 지금은 자취를 찾을 수가 없다<<<

 

 

<현 월포초등학교 자리에 있었던 러시아 영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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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26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130. 신간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