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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31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121. 경영난의 남선일보

 

121. 경영난의 남선일보(南鮮日報)

 

 

마산지방에서 발간하는 일간지(일문 4페이지)는 멀리 명치 38년 경에 마산신문으로 발행하다가 폐간, 그 후 명치 43년 경 경성일보가 발행권을 가졌다.

 

강용일(岡 庸一)이란 사람이 10년 계약으로 운영하였는데, 기계는 16() 수동식, 소설은 일본서 지형(紙型)아닌 연판(鉛版)으로 들어오고, 사옥은 신마산 진일기계사 창고 옆에 있다가 다시 구 러시아 영사관(현 일성펌프공장)으로 옮겼으나, 기계에 모터 장치란 꿈에도 모를 때고, 족답(足踏)으로는 회전이 되지 않아서 기계공 4명이 수동을 하여 신문 한 장이 나오는 시간이 약 4초 내지 5초가 소요되었다.

 

기계공 4명 모두 유발자(有髮者)라 수동할 때 상방(相方) 2명의 상투가 수동 회수에 따라 꺼떡거리는 광경은 지금 생각해도 봉복절도(捧腹絶倒) 않을 수 없다.

 

이리하여 경영난에 허덕이던 이 신문도 계약만료로 인해서 10년간 지방지를 위하여 애쓰던 사장 강용일(岡 庸一)은 물러나고 구주(九州) 웅본(熊本)에서 농민운동도 했고,

 

지방지 경영도 하였다는 횡뢰(橫瀨)라는 사람이 판권 계약을 맺고 사옥은 현 마산세무서 후편 사방(砂防)관리소 자리에 신축하고 진용도 상당히 정비하였으나 역시 운영이 뜻대로 되지 않아서 부산일보 마산지사장 고교(高橋)에게 이양하였으나 역시 운영난에 허덕이다가 윤전기는 조선일보사에 매각 처분하였다.

 

발행 부수는 하루 평균 모조지 2,3백장에 불과하였으며 사원 봉급도 제대로 못주어서 파업도 빈번한데다 내근 간부는 편지로, 외근 기자는 제주머니식을 하니 회사가 될 수 없을 뿐 아니라,

 

심복인(心腹人)이라는 적총(赤塚) 회계는 월급이 늦을 때는 증서를 받고 이자를 청구, 사사(私事)로 출장 가도 출장비를 청구하는 등 질서가 뒤죽박죽하는 판국에 19416월 지방신문 통제라는 회오리 바람과 함께 사라지고 말았다.<<<

 

 

<남선일보 자리였던 농산물검사소, 현 농림부국립식물검역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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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0.17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119. 태운환의 취항

 

119. 태운환(太運丸)의 취항

 

 

바다에 화륜선(火輪船)이 생긴 뒤로 목조 범선이 취급하던 하물과 승객을 거의 아끼던 시절에 마산 앞바다에 하나의 색다른 배가 생겨 일반의 호기심을 자아냈었는데 그게 바로 빡락선’(혹은 똑딱선)이라는 발동선이었다.

 

1912년에 진해(현동)-마산간의 화객(貨客)을 취급하던 배였는데 몸집이 크고 속도가 느릿느릿하게만 보이던 화륜선보다 통탕통탕 성급한 소리를 내며 까불까불 달리는 빨락선에 인기가 집중되었던 것이다.

 

물론 회조업(廻漕業)은 스노우찌(須之內, 수지내)라는 일인이 독점하였으나, 매표는 노천 선착장에서 일인과 조선인 두 사람이 따로따로 출찰(出札)하였다.

 

개업한 이틀째부터 자연히 생기게 되니, 일본 매표구는 파리를 날리는 판이 되고 조선인 매표구는 저가(시장)처럼 붐비기 시작했다.

 

두 매표인 간에 언쟁이 생기고 드디어 난투극까지 벌어지게 되면서부터 매표대행제는 폐지되었다.

 

조선인으로서 일인 회조업소(廻漕業所) 사무원은 있었으나 출장소를 가진 사람은 보지 못하던 때에, 마산의 예만 들어도 일인 업자로서 상기(上記)한 수지내(須之內) 외에 대판고선화물(大坂高船貨物) 취급소로 택산상회 원구(圓口), 신마산에 택산 출장소 외 정기여객선 제1, 2, 3, 천신환 등 굵은 회사들이 있었다.

 

그 당시 조선인으로서 근해 해상권을 가진다는 것은 감히 생각조차 못할 일이었는데, 바로 그 무렵 남해군 창선면 출신 청년 사업가인 김석문(마산보교 7회 졸업)이란 사람이 뜻한 바 있어 해운사업에 착수,

 

일착(一着)으로 마산-통영간 여객선 노선 허가를 얻어 ××(××, 선명, 톤수 망각)을 구입, 개업하자 여태까지 일인 업자들의 횡포와 오만한 태도를 참아왔던 조신인의 비분이 일시에 폭발, 환희 갈채를 아끼지 않은 것은 시대의 속일 수 없는 당연한 현상이 아닐 수 없었다.

 

그리하여 사업이 날로 확대되자 선주 김석문은 직접 일본의 조선소에 의뢰, 호화 신예(新銳)의 여객선 태운환(太運丸)’을 입수, 통영 거제의 앞바다에서 만함식(滿艦飾)으로 처녀운항의 진주식을 가졌다.

 

그 뒤론 한 사람의 조선인도 일인 정기선을 이용하지 않았으며 아무리 용건이 화급해도 선발하는 일인선(日人船)을 탄다는 것은 어림도 없었다.

 

사업이 날로 기울어가는 일인 업자는 궁한 대책으로 승객들에게 담배와 타올을 선사하고 선임을 인하하는 등 만단의 친절을 베풀었으나 손님들은 염담부동(恬淡不動)하여 궁지를 헤매고 있을 때 아주 불행한 해상사고가 발생했다.

 

해상 대참변

 

19433월 경 역시 마()-()간 정기여객선인 스미레마루’(승객수 및 톤수 등 미상)가 오후 1시경 통영을 출발, 마산으로 오던 도중 창원군 구산면 설진포(設津浦) 목전에서 돌연 선체가 오른쪽으로 기울자 당황한 승객들이 우왕좌왕 함과 동시 선체는 왼쪽으로 기울어 침몰의 운명은 결정적이었다는 것이다.

 

그것을 재빠르게 직감한 갑판 위에 있던 고창열(수영선수)이라는 승객은 있는 힘을 다하여 3미터 아래의 해상으로 다이빙하였다는데 잠시 후 그가 뒤돌아보았을 때는 커다란 선체가 저부(低部)만 드러낸 채 서서히 침몰 중이었다는 것이다.

 

생환한 승객 고창렬의 이야기론 승객 수는 약 400여 명에 사망자는 반수인 듯 하다고 했다는 것이다. 비극을 치른 기선회사는 그 사건으로 인해 재기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알려졌었다.<<<

 

 

<마산-통영간 정기여객선 스미레마루가 침몰한 구산면 설진포(設津浦)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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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26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115. 이등방망이 피살보

115. 이등(伊藤)방망이 피살보(被殺報)

 

 

19091027(이등 피살 이튿날) 마산공립보통학교 제4학년 정영관(본교 3회 졸업생)은 완월 의숙(義塾)학원 생도들과 하학 도중 성지학원 앞에서 만났다.

 

그는 이등박문이 북만주 하르빈이라는 정거장에서 한인 독립군 안중근이라는 사람으로부터 총에 맞아 죽었다는 말을 전했다.

 

전보 통신이나 라디오가 없던 시절인 만큼 신문보도인 경성일보를 본 흑목원이(黑木源二) 교장이 전교생을 모은 가운데 울면서 말하더라는 것이다.

 

이등이 어떠한 위치에서 무엇을 하는 위인인가는 확실히 모르면서도 한인의 원수라는 것만은 막연하게 알고 있는 일부 국민들은 덮어놓고 통쾌하게 생각했으며,

 

이등박문이라는 것이 와전되어 이등방망이가 한국인의 방망이에 맞아 죽었다고들 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을 죽인 안중근의 원하던 노래가 삽시간에 퍼져 나왔다.

 

    만났도다 만났도다

    원수 너를 만났도다

    너를 한 번 만나려고

    혹은 륜선 혹은 기차

    수륙으로 수십 만리

    너 만나기 원이었다(이하 망각)

 

이리하여 경찰과 밀정들은 혈안이 노래 부르는 자의 색출에 힘을 다했다.

 

이때 보통학교 기숙사에는 백주에 정복 경시(警視)가 나타나 가택수색 사건이 벌어졌다.

 

소문은 감판동(甘判同)이라는 3년생 학생이 창신학교에서 불온 창가를 담임 김학배 선생에게 전하였다는 것으로 교내가 소란하였는데 배일 훈도 장기현 선생은 흑목(黑木) 교장에게 직접 화풀이를 했다.

 

문제의 대상인물 김학배 선생은 극도로 흥분하여 사무실에서 금지된 황실가를 소리 높게 부른 일도 있었다.<<<

 

<안중근 의사와 이등 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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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9.19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113. 생도들의 복습소, 114. 간수의 인권유린

113. 생도들의 복습소

 

 

천자문에서 사서삼경을 공부하는 동안 신학문이 들어오고 학교가 설립됨에 따라 학교에서 하학하면 과거의 서당과 마찬가지로 그 날 배운 과목을 단순히 통독하는 것이 관습이 되어 있었고, 이것을 독려하기 위한 무료 과외 수업격인 복습소를 웬만한 가정에서는 차릴 수가 있었다.

 

즉 한 칸 방을 복습소로서 다수 학생을 상대로 이를 제공하게 되면 학부형들은 연료인 화목대(火木代)만 부담하면 석유대는 없어도 좋고, 또 전등이 있더라도 전기 사용료라는 명목은 없었다.

 

상급 생도는 하급생을 감독하였고, 또 일정한 시간에 출석하여 일정한 시간에 복습을 시킨 후 공동 취침을 하는데, 때로는 복습소끼리 경쟁을 하여 성적이 우수한 복습소에는 학교 선생과 부형들로부터 표창을 받기도 하였다.

 

여기에는 각 복습소를 순찰하는 암행어사격인 상급생의 시찰반이 있어서 때에 따라서 시찰(視察)’이라고 쓴 초롱을 들고 급습을 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이 가운데는 게으름뱅이도 있어서 책만 펴놓고 다른 잡담만 씨부렁거리고 있는 것을 시찰은 공부하는 것으로 오인하고 돌아갈 때도 있었다.

 

공부에 권태를 느낄 때는 망보는 아이를 내세워 놓고 놀다가 연락이 오면 그제야 책을 펴들고 읽어대는데 시찰은 그것도 모르고 칭찬이 자자하였다.

 

또 어떤 때는 담배를 태우다가 들켜 혼이 날 때도 있는가 하면 시찰이 와 있는 것을 모르고 눈치 없이 술상을 들고 들어오다가 벼락이 떨어지는 수도 있었다.

 

특히 기억되는 것은 이렇게 복습을 하는 생도 속에도 고질 게으름뱅이가 두어 사람 있어서 학교에는 가지 않고 일찌감치 복습소로 나와서는 일본 집 울타리 판자를 뜯어서 군불을 지피고는 낮잠을 자곤 하다가 드디어 2, 3차 낙제국을 먹게 되면 이웃이 부끄러워 스스로 퇴학하고 마는데 이런 아이들은 사회에 나가서도 마찬가지 낙제꾼들과 접촉하다가 결국 타락하고 만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속담이 여기에 적중된다고나 하여둘까?

 

당시 마산보통학교 관하(管下)에 손꼽을 수 있는 복습소는 서성동에 서림숙(西林塾)’, 김제성 집의 복습소, 중성동 나인한 집의 시선숙(示善塾)’, 오동동의 오산복습소등이었다.

 

 

<마산보통학교(현 성호초등학교) 본관>

 

 

 

 

114. 간수의 인권 유린

 

너무 오래 되어 기억은 잘 나지 않으나 수십 년 전 일정(日政) 때 일이다.

 

마산 형무소 기결감(旣決監)에 농촌의 우부(愚夫) 한 사람이 전매법 위반이던가 상해죄이던가는 똑똑히 모르겠으나 벌금형이었던 것을 돈이 없어 치르지 못하고 하루 평균 일원씩을 환산하여 입감 노역을 하고 있었다.

 

입감 수일 후에 그의 가족이 벌금을 마련하여 부랴부랴 그 지방의 경찰서에 보상을 하여서 경찰 측은 마산형무소에 공문 전보로 석방을 통지하였다.

 

그리하여 입감자의 친구들은 석방될 그를 영접키 위하여 형무소 문전에서 학수고대하였으나 종무소식으로 장본인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뒤에야 그 경위를 규명해 보았더니 숙직 간수라는 자가 전문을 주머니에 집어 놓고 상부에 보고할 것을 깜박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을 이틀 후에야 깨달았던 것이다.

 

소내(所內) 간수장급들은 그제야 당황하여 사건을 비밀에 붙이고 본인을 석방시키려 하였던 것이나, 일본 신문기자 한 사람이 재빠르게 이 소오스를 취재하여 대서특필로 보도하고 말았다.

 

이 결과로 전문을 받았던 간수 주임은 즉각 파면이 되고, 소속 간수장은 시말서 제출의 소동까지 벌였던 것이다.<<<

 

<일제강점기 마산형무소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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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18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101. 독립교회의 탄생 102.제약회사의 선전 경쟁

101. 독립교회의 탄생

 

19271127일 마산 문창 장로교회에서 벗어나온 교인 일단이 신앙의 자유와 자활적 정신에 입각하여 모든 교파를 초월하고 그리스도에게로, 인위적 조직과 제도를 더나 성서중심으로 돌아가자는 이념을 내어 걸고 독립 마산예수교회를 창설했다.

 

당시 교인 총수는 손덕우 장로를 비롯하여 남녀 200여명, 초대 교역자로는 김산(金山) 목사(중국 남경 금릉대학 출신)를 추대하니 교회 초창기에 희생적인 노력이 많았다.

 

19281127일에 헌당식을 거행했다. 당시 김 목사를 중심으로 교회에 희생적으로 봉사한 교인은 다음과 같다.

 

손덕우(장로)

한좌건, 김주봉, 박덕우, 박채우, 김은수, 최종안, 이창우, 최원칙, 유진구, 정대근, 박덕근, 황덕수, 문덕중, 이일래, 서상삼, 설반옥, 김달필, 홍삼시, 정외희, 구봉남

 

192945일 예배당 뒤 대지 54평을 추가 매수하고 교회 부대사업으로 중앙유치원을 신설, 보모 김현경 씨를 초빙하여 많은 어린니들을 기독교 정신으로 보육했다.

(역대 원장-박성칙, 이봉수, 김은수)

 

 

<1919년 건축한 문창교회. 이 교회에서 독립교회가 분리되었다 - 옮긴 이>

 

 

 

 

102. 제약회사의 선전 경쟁

 

지금은 옛날 같고 거짓말 같이 들릴지 모르지만 종전(終戰) 전까지만 해도 제약도시라는 별칭이 있었던 일본 부산시(富山市)에서는 수만 명의 선전원을 일본, 조선, 만주에 파견하여 15종입(種入)-1(, 가정 상비 구급약)를 집집마다 비치시켜 매월 1회 수금원이 순방하는데 약대는 복용한 봉투에 넣어 두기만 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다.

 

또 각 열차마다 이 구급약을 서비스하여 승객의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였고, 철도당국도 이 약을 상비해 두기도 하였으나 지금은 이런 일은 눈을 닦고 볼래야 볼 수가 없다.

 

이것은 가정상비약에 대한 얘기지만 제약회사에서는 각 병원에 어느 정도 후대를 하였던가?

 

마산도립병원에 오래 근무한 생존자의 한 사람인 동인의원 조석환 원장의 회고담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내가 일본서 돌아와서 마산도립병원에 봉직한 것은 1927년부터였지만 각 가정에다 상비약을 비치했던 사실은 나도 잘 알고 있다. 그것보다 각 관공립 혹은 개업의들이 경험한바 제약회사들의 서비스란 특수한 것이었다.”

 

단순한 선전용이나 광고용이 아닌 고급 약을 대량으로 병원에 무료 제공해 주는 것이다.

 

회사도 무명회사가 아니라 현재도 일본 국내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제일(第一), 산내(山內), 염야(鹽野), 무전(武田), 삼정(三井), 전변(田邊) 등의 제약회사에서 필요한 약은 매월 빼지 않고 우송해 왔으므로 각 병원에서 약품 구입에 신경을 별로 쓰지 않았으며,

 

더욱이 도립병원 같은 곳에서는 사무 감사 때 변명하기가 오히려 귀찮았을 뿐 아니라 처치 곤란해서 당시 사체 안치소 옆에다가 암거(暗渠)를 파고 많은 약품들을 소각 처리한 일까지 있었다고 하였다.<<<

 

 

<1927년 건축한 도립마산병원, 현 도립마산의료원 위치 - 옮긴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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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6.20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97. 탄산가스 소동

97. 탄산가스 소동

 

마산의 도로 연혁이 별로 없으니 상보(詳報)는 어려우나 부림시장에서 서성동 내림길 일대에는 수백년을 헤아리는 고목들이 가히 천일(天日)을 가릴만치 울밀(鬱密)하여 이곳을 숲골(林谷)이라 불렀고,

 

또는 서림(西林)이라고도 하여 지금 이한철(李翰喆) 치과의원 아랫집 터에 보통학교 생도들의 복습방이 있어 그 이름을 서촌숙(西村塾)’이라고 부르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이곳에 신작로를 설치하기 위하여 모든 초부(樵夫)들을 동원하여 그 굵은 나무들을 톱질을 해서 베어내는 것인데,

 

그 초부라는 것이 산에 잡목이나 메는 말하자면 졸때기들이어서 고목을 베는 큰 톱을 써 본 적도 없을 뿐 아니라 고목을 베는 상식조차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몇 개의 고목을 베는 동안에 초부 수십명이 한꺼번에 졸도를 해 버린 사실이다.

 

몰려든 가족들로 하여 난데없이 작업장 현지는 상갓집처럼 울음바다가 되었다.

 

원인을 모르는 사람들은 이렇게 오래 묵은 고목을 베는 데는 제물을 갖추어 목신(木神) 앞에 경건히 제사를 올리지 않았기 때문에 목신의 노여움을 사서 그 벌을 받은 것으로 단정하였다.

 

졸도해서 깨어난 초부들은 지금부터라도 목신에게 치성을 드리기 전에는 작업을 거부한다는 태세이었는데, 알고 본즉 오래된 고목을 베는 데서 발산하는 탄산가스 때문에 그것을 마신 초부들이 의식을 잃고 조롣한 것을 그 뒤에야 알아낸 것이었지만, 미신에 젖은 몽매한 그들에게는 아무리 설명을 해도 소뿔에 벌 쏘는 격이 되어 막무가내였다.

 

과연 그들의 고집대로 목신제(木神祭)를 올리고 작업을 계속했던 것인지 그 후문은 듣지 못하였지마는,

 

그 당시 신작로라고는 해도 현재의 부림시장 입구 구도로의 넓이와 별로 다를 게 없었고,

 

옛날의 강본(岡本) 사진관(현재 이한철 치과) 앞에는 신작로 이전까지만 해도 노목(老木) 10여 주가 늠름히 서 있었던 것으로 그 기억이 새롭다.<<<

 

 

숲골이라 불렀던 서성동 내림길은 아래 지도 가운데 있는 동서동주민센터 앞 길이다 - 올린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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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3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93. 어시장

93. 어시장(魚市場)

 

마산의 한인 경제의 동맥이라고 일컫는 구마산 어시장의 연혁은 확실치 않으나 약 2백 수십 년 전부터라는 고로(古老)들의 추측으로서 생선과 일용품 시장은 6,70년 전까지는 구강(舊江, 현 산호동)이라는 취락의 발상지라는 것이다.

지금은 어업조합으로 약진하여 부산에 버금되는 조합건물이 윤환(輪奐)의 위세를 뽐내고 있지마는, 조합 이전의 어시장에는 객주 제도라는 것이 있어서 영세 어민에게는 조업자금을 대여함으로써 어로고(漁撈高)의 몇 분의 얼마를 이자조로 공제하여 객주와 어민간의 상호 유대를 견지해 왔던 것이다.

합포사라는 객주들의 협의기관을 조직하여 외래자금의 침투를 공고하게 방어하여 그 움직임이 일사불란하였다.

 

<마산포 해안의 석축돌제(위)와 부두(아래)>

 

한 예를 들면 외래자금이라는 것은 특히 일인들을 지칭하는 것인바, 그 당시 욱일 승천의 강압세력을 가진 신마산 방면의 일인들이 음양으로 한인업계를 침식코자 하였으나 난공불락의 한인 아성에 근접도 못했으며,

실례로 길형(吉形)이라는 일인이 점포를 빌리기는 했어도 상거래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 그 결과는 명약관화로 수개월간에 파산한 바 있었다.

재래의 업자 외에는 연고 없는 여하한 한인이라도 냉연히 거부함으로써 마산의 몬로집단이요, 2의 개성이라는 명예스러운 평도 받았다.

그리고 연중 행사의 하나로서 풍어를 기원하는 어민들은 별신당에서 가장 경건한 제사를 올리기도 한다.

별신제의 음호(陰護)라고 할까? 그때만 해도 어업 허가는 지금처럼 남발이 아니었고 남획도 없었던 탓인지 언제이고 규격에 맞는 계절 생선이 풍요하였을 뿐 아니라 창원강(진해만 연안 즉 통영, 고성, 남해, 거제, 가덕의 통칭)의 생선은 그 진미에 있어서 멀리 동해와 서해의 것에 비교할 수 없이 월등하여 남녘 바다에서 합포만으로 몰려오는 어선은 장관을 이루었고 뭍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십 필의 운반 우마차가 인근 군부(郡部)로 종락(終絡)하는 은성상(殷盛相)이었다.

그러던 것이 시세의 변천과 지방의 자연 발전으로 옛날 선창 앞 해변을 매축하여 현재의 위치에 어조(漁組)의 면모가 일신하고 석일(昔日)의 어시장은 옛날 모습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일인들은 매축으로 확장된 이곳에 공동권과 우선권을 방패삼아 소위 내선합자어업조합을 강제로 조직하여 위세를 떨쳤으나 일본의 패전으로 진주한 지 불과 1,2년 만에 총 퇴진하고 오늘에 이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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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25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88. 법원과 검찰, 89. 제1차 공산당 사건

88. 법원과 검찰

현재 장군동 4(통정 4정목)에 자리잡 고 있는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원(지청)과 부산 지방검찰청 마산지청(검사분국)은 당초에는 구마산 시장입구 근처였던 속칭 아래학교’(여자보통학교-白洸燒酎工場) 언덕에 소재하고 있었던 것인데 1910(명치43)에 현위치에 신축 이전했다.

초대 상석판사(上席判事)는 대우가차(大友歌次), 상석검사(上席檢事)는 복산장병위(福山長兵衛)였으며 조선인 초대 판사는 고씨로 이분이 두 자제는 신마산 소재 일인의 심상소학교에 입학하였다.

<신축 이전 뒤의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원>

 

89. 1차 공산당 사건

소위 101명 조선공산당 사건이 신의주에서 변호사를 하던 심유정이란 친일파를 습격한 것이 발단이 되어 경찰은 이들 청년들의 가택을 수사한 결과 사건은 발로(發露)되고 말았다.

무산자신문(無産者新聞) 경성지국장 임원근(이 신문은 일본 공산당 좌야학佐野學이 주재한 것)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거물급들이 속속 검거, 신의주로 압송되었다가 사건을 경기도경으로 이송한 중대 사상사건이다.

신의주 사건보다 몇 해 앞질러서 구마산 객선부두 앞 원동회사 출장사무소에서 김상주, 김형선, 윤윤삼 등이 공산당을 비밀 조직하였던 것을, 경찰은 전연 감지하지 못하였다가 101명 사건 때 비로소 발로된 것인데 이것이 전국 최초의 공산당 사건이다(당시 일본조일朝日신문 호외에 보도됨).

신의주 사건은 1925(대정 14) 121일부터 검거 선풍이 불기 시작했는데,

마산에서는 김상주가 1차로 검거되고, 그 다음에 김명규가, 그리고 다음 해 7월경에 이봉수, 황수룡, 김직성, 김기호, 김용찬(이발업), 윤윤삼, 팽삼진, 김종신, 강모 등이 일망타진되어 경성으로 압송, 세정(世情)을 소연케 하였다.

이들은 1년 이상 2년의 실형을 받았으며 당원 중 김형선은 삭발하고 학생복 차림을 하고 상해로 탈출하였으며,

팽삼진과 김종신은 그들과 교우관계로 피검, 2년간 예심의 고초를 받다가 무협의로 면소(免訴) 출감되었다.<<<

<위 사건 후 1926년 상해로 탈출한 김형선이 7년 뒤 국내에서 일경에 체포되었다. 아래 사진은 1933년 7월 16일자 김형선 체포관련 동아일보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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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18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86. 고춧가루 강도, 87. 제2의 헤스마

86. 고춧가루 강도

 

확실히 1924년 봄이다. 그때만 해도 구마산(元町, 현 남성동) 우편소에서 직접 집배는 물론 적행낭수송(赤行囊輸送)하던 때다.

오전 7시면 먼동이 트이고 모든 물체를 확연히 볼 수 있는 때다.

7시 몇 분에 구마산의 발차시간에 우편직원(모라 했다)이 행낭과 우편물을 둘러메고 가는데 당시 상업학교 정문 근처에서 별안간 괴이한 청년이 나타나 아무 말 없이 호주머니에서 무엇인가를 꺼내어 뿌리는 찰나 직원은 쓰러졌다.

세상이 어둡기만 했으면 다행인데 눈이 따가운데다 눈물과 콧물 그리고 재채기까지 병발(倂發)하여 상당한 시간 동안 땅바닥에 쓰러져서 고통을 겪는 중 역으로 가는 승객들에게 구조되었는데 소중한 적행낭(赤行囊)만 없어지고 말았다.

행낭에는 대소액환 송금증이 들어 있었다는 신고를 받은 민완 형사진은 사방으로 분산, 사고 몇 시간 안에 범인을 창원역 근처에서 체포했는데,

범인은 일본인 청년으로 여숙비, 잡비에 궁하여 며칠 동안 생각한 것이 고춧가루 공세를 하는 것이 제일 간단하다는 것으로 자백했다.

이 사건이 각 신문에 일제히 보도되어 수개월 뒤에 경북 어느 곳에서던가 단 한 번 제2 고춧가루 노상강도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고춧가루 강도 출현 제1호는 마산이라 하였다. 

<구마산역, 사진의 건물은 위 사건 12년 후인 1936년 지은 건물이다>

 

87. 2의 헤스마

 

1925년 평북 순안에 영인(英人) 선교사 헤스마(한자 許時模, 허시모) 란 자는 자기 과수원에 조선인 아동이 침입하여 사과를 따먹었다고 그 얼굴에 콜탈로써 도독이라고 썼던 헤스마의 린치 사건이 동아·조선 양 지()는 물론, 일문지(日文紙) 아사히까지 대대적으로 보도하여 전국적인 의분이 격앙하고 있을 때인데, 마산 서성동에서는 일인 주택 벽에 낙서를 했다는 이유로 조선인 아동에게 폭력을 가한 가등(加藤)이라는 일인 간수장이 있었다.

실은 이 소년이 낙서를 한 것이 아니고 이미 낙서되어 있는 것을 지우고 있었던 것인데, 전기(前記) 가등(加藤)은 이를 오인하고 퇴근길이라 정복에 칼을 찬 그대로 소년을 발길로 차고 때리고 하였으니 너무나 겁에 질린 소년은 오줌까지 싸면서 넘어졌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공교롭게도 조선일보 지상에 보도가 되었다. 이것이 자극이 되어 모종의 불상사라도 일어나지 않을까 우려한 대구고검, 부산지검, 마산검사국 등의 검사장 및 검사, 고등계 형사들은 사건 진상을 조사한다는 구실로 취재한 기자를 금품 향응으로 매수하여 수회죄(收賄罪)로 구속을 시킬 방침이었으나 기자는 이를 당연히 일축하였던 것이다.

검찰당국은 할 일 없이 기자의 지조를 찬양하는 수밖에 없었고 가등(加藤)이라는 간수장은 부득이 김천 소년형무소로 좌천이 되어 버렸던, 헤스마 사건을 방불케 하는 사건이 마산에서도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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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04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83. 엽총 정사

83. 엽총 정사(情死)

 

1923(대정12) 초봄 무학산 봉우리에 아지랑이가 서리고 시냇가 버들가지엔 강아지가 겨우 필락 말락하는 약력 3월 중순경,

시내 장군교 교반(橋畔)으로 나이 60이 넘은 일본 노인 한 사람이 다비(일본 버선) 발로 헐레벌떡 달리다 역시 일본인 순사에게 검문을 당하고 있는데, 다리에서 서녘 윗길 30미터 되는 노상에서 총소리가 터져나왔다.

도망치던 노인은 일본 사족(士族)이요, 법정에서 입회 검사와 싸움 잘하는 변호사 장자빈(莊子斌) 노인이었다.

장자(莊子) 변호사집 건너편에 서기로 있는 관원(管原)이 살고 있었다.

이 자는 대구 검사국에서 사기 사건인가 공갈죄로 형을 받아 이 자와 동서(同棲)생활을 하던 조선인 여자가 이 자의 대리 복역을 하고 있었다.

진범은 그 자인 것을 아는 일본인들은 거의 경원하였던 것인데, 마산으로 이주하여 변호사 서기로 있었다.

마산에서 서기로 있으면서도 공갈행동이 빈번하므로 여기서도 해면되자 대서업을 하면서 당시 마산병원(도립병원 전신) 간호원과 동서생활을 하였다.

그런데 그 자가 간호원과 동서하기 전에 그 자 때문에 희생됐던 조선인 여자도 석방되어 마산으로 이주하였고, 또 이 여자와 먼 친척관계인지 선대와 교분이 두터웠던 경북 어느 곳의 의병대장의 3대 독자도 그녀를 의존해서 마산으로 오게 되어 마침 장자(莊子) 변호사의 서기로 채용되었다.

이것이 풀 수 없는 전생의 업원(業怨)이요 숙명이었던 것이다.

관원(管原)의 아내와 조선인 서기와는 집이 건너요, 용무가 비슷한 때문에 접촉이 자주 있게 되자 남편되는 자의 깊은 의심을 사게 되었다.

의심이 쌓일수록 확증을 잡을 기회만 노리고 있던 그는 그 수렵 해제 전인 3월에 수렵을 간다고 속이고 은밀한 장소에 은신을 하고 있었다.

마침 여자가 토지대장등본 관계로 창원군청(지금의 상공회의소, 당시 위치)으로 나갈 차비를 하는데 변호사 서기가 찾아와서 두 사람은 실내로 들어가 화로를 사이에 두고 몇 마디 담소를 하고 있는 동안 꽝하는 총소리가 울려나오고 연속 제2발이 터졌다.

1탄은 남자의 심장부를 명중하여 앉은 자세로 절명되고, 2찬은 여자의 목을 관통하였다.

날아오는 탄환을 본능적으로 막다가 왼손 장심을 뚫고 목을 거쳤는데 여자는 당장 절명되지 않고 최후의 단말마 그대로 도로까지 뛰어나와 엎치락 뒤치락 극심한 고통 끝에 절명하였다.

남녀 두 사람을 죽인 관원(管原)은 길에 뛰쳐나와 옆에서 피를 흘리고 고통하는 여자도 아랑곳없이 하늘을 우러러 최후의 서글픈 웃음을 남기며 왼쪽 다리를 꿇고 엽총을 목에 대고는 바른편 발가락으로 방아쇠를 눌러 자살하고 말았다.

이 바람에 평소 감정이 좋지 않던 장자(莊子) 변호사는 자기에게 해가 오지 않을까 하여 도주 했던 것이요,

여자는 지금과 같은 양장이 아닌 일본 옷이었기 때문에 여자의 중요한 부분까지 노출하는 등 4월의 벚꽃이 피기 한 달가량 앞선 평화스런 장군동 일대는 삼각관계의 붉은 피로 물들었던 것이다.<<<

 <아래 붉은 표시한 곳이 장군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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