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2016.03.28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82. 총각회 사건

82. 총각회 사건

 

시내 중성동에 자리 잡은 목조는 1921년 경에 진동읍내 김상범이란 청년지주가 장만한 주택건물이다.

50여년이 지난 오늘에도 수리 한 번 한 일이 없이 그대로의 모습이다. 오직 변한 것이 있다면 집 주인 뿐이다. 주택으로 병원으로 여관으로 변하였다가 현재에 이르렀다.

외면으로는 평탄하게 지낸 듯 하지마는 처음 주인 김 씨 때 벌써 큰 문제가 생겼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전국에서 처음으로 생긴 소위 총각회 사건이다.

내용인 즉 예나 지금이나 한국의 중산계급이면 으레 소실을 두는 것이 공공연한 통례이니 여기에 김 씨가 빠질 수 없다.

시내 모 사립여학교를 중퇴한 묘령에다 미모인 조()섭이란 처녀가 있었다. 여학교를 중퇴하였다 하면 그 가정 형편은 짐작할 수 있는 일이나 18,9세의 묘령이라면 보통 못난 처녀라도 장미꽃같이 활짝 피는 때이니 조섭이와 같이 보통 이상의 미모에 남성의 마수가 침범 않을 리 없다.

가난과 여자의 미모에는 불행한 신의 악희(惡戱)를 면할 수 없는 것이 여성의 숙명이랄까?

문제의 주인공 김상범은 황금의 위력으로 기어코 처녀 조섭이를 간단히 함락시키고 말았으면 그런 다행이 없었을 것이나, 한창 발육기의 청년들은

총각회를 결성해서 혼기를 놓치고도 총각으로 지내는데 김상범은 정실과 자녀까지 있으면서 하등의 정신적 사랑도 없이 오직 돈의 힘으로 순진한 처녀를 약탈하느냐? 이 동물보다도 못한 자야!”

라고 외치면서 내정(內庭)으로 돌입하여 형세 자못 험한 절정에 다다랐을 때, 급보를 들은 경찰당국은 이 사건이 청년들의 이색적인 행동이라 하여 함소(含笑) 석방한 일인데 이것이 그 당시 둘밖에 없는 동아·조선 양지(兩紙)에 보도됨으로써 전국적인 화재가 되었다.

마산 사람을 만나는 객지에서는 총각회 소식을 묻기도 하였는데 당시 총각회장은 팽삼진(彭三辰)이었다.

이 때문에 사회적으로 크게 창피를 당한 김상범은 옳은 사랑의 보금자리도 꾸며보지 못하고, 금일봉으로 남의 집 귀한 자녀의 신세만 망쳐놓고 바람과 더불어 사라지고,

조섭이는 그 후 송 모라는 청년과 가정을 이루어 11녀를 낳고 살다가 미인박명 그대로 쓸쓸하게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팽삼진(彭三辰 : 1902 1944) - 국가보훈처 독립유공자 공훈록 / 옮긴 이

경상남도 마산(馬山) 사람이다. 1919년부터 1935년까지 사이에 마산의 독립만세운동을 주동하였다. 그는 19193월 마산에서의 독립만세운동에 참여하였다가, 이해 515일 부산(釜山)지방법원 마산지청에서 징역 6월형을 받고 옥고를 치렀다. 출옥 후 192395일에는 학생층을 대상으로 독립정신을 고취하다가 소위 소요혐의로 다시 투옥되었으며, 출옥 후에도 또다시 독립만세운동을 계획하다가 193576일 마산경찰서에 체포되는 등 계속적으로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애족장(1977년 대통령표창)을 추서하였다.

 

<동아일보 1923년 9월 11일자 3면에 실린 총각회 사건 기사>

 

 

 

 

 

 

Trackback 0 Comment 0
2016.03.21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80, 어속령의 참화, 81. 두 청년의 순정

80. 어속령(魚束嶺)의 참화

 

마산 시내에 자동차를 운영한 곳은 대정 2(1913) 마산역전 상반여관(常盤旅館)인 것 같다.

마산에 소위 신작로가 생기고, 함안, 진주로 통하는 길은 1908(지금 신마산 쪽에서 시청 앞 도로는 1914년 경인 듯)이다.

이의 증거로 마산 창신학교 앞 회원교에 융희 2년 건립이란 표석이 있었으니 이를 미루어 보아 1908년인바 해방 후에 반가지(半可知)의 애국자들의 손으로 삭제되고 단기연호로 박혀버린 것이다.

각설 상반여관이 소유한 차량은 그때는 포드포장차(布裝車) 7인승이며 이것으로 매일 혹은 격일제로 진주까지 내왕하던 한산한 시절이었다. 1917년 가을경이다.

지방신문인 남선일보사 주최로 미기(美妓) 투표의 승자인 배학희 양은 애인의 본댁으로 가는 도중 군북을 통과한 차가 함안 진주 군계(郡界)인 어속령에 이르자 운전 부주의의 탓인지 이것도 미인박명이라 할까,

어속령의 절벽에서 전락하여 아깝게도 현장에서 절명하고 둥승하였던 진해 해군통제부 사령관인 동향모(東鄕某) 중장은 좌측 늑골이 부러지고 그 외의 중경상자는 진주군내 배돈(倍敦)변원으로 수용한 일이 있어 최초의 시외 택시의 참사 사고이었던 것이다 

위 글에 소개된 차입니다.

이 버스에는 승객이 10명 정도까지 탈 수 있었으며, 낮에는 지붕이 없이 달렸지만 밤이 되면 천막지붕을 치고 가스등도 달고 다녔다고 합니다. 멋졌을 것 같지 않습니까?

요금은 일반인들이 타기에는 상당히 비싼 1인당 380전이었습니다. 당시 쌀 한가마니 값이 4원이었으니 말입니다.

마차로 하루 종일 걸려 다녔던 마산-진주간 70km 길을 버스로 4시간 만에 주파하였는데, 도로 주변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생전 처음보는 버스를 보기 위해 길가에 나와 넋을 잃고 구경했다고 합니다.

요금은 비쌌지만 하도 빠르고 편리해 그 때까지 이용하던 마차와 인력차는 승객이 없어졌고 급기야 마차는 영업을 중지했다는 '매일신보 19121017일자 기사'도 있습니다.

당시 유행한 노래 한 구절 소개합니다.

낙동강 700리에 공구리(콘크리트) 다리 놓고 신작로에는 자동차 바람에 먼지만 나누나

  -이상 옮긴 이-

 

81. 두 청년의 순정

 

마산경찰서가 현 창원군청 앞 토목관구(土木管區)사무소 자리에 있을 때이니 1920년 경의 일이다.

어느 달 어느 날인지 성명 석자마저 기억이 나지 않으나 호송 경찰 없이 피의자 두 청년이 유치장으로 포승에 묶인 채 들어온 일로 해서 서내(署內)가 온통 웃음판에 휩쓸린 일이 있었다.

내용을 알아보면 이 청년들은 창원군 삼진방면에 수대를 거주하던 토착민인데, 도박인가 술집에서 폭행을 한 혐의로 관할 주재소에 구금되어 본서(本署)인 마산으로 오는 중인데 버스가 없었던 시절이라 보행으로 오산리(午山里)까지 당도 하였을 때,

압송하는 순사는 공교롭게도 그들 아버지들과 죽마지우라 몹시 마음이 아픈데다가 오산에는 술집이 있어서 친구 아들들과 한잔 또 한잔에 대취하여 술방에 곯아 떨어졌다.

다른 사람 같으면 도주할 수 있지마는 그리되면 아버지 친구의 형편이 낭패되리라 걱정이 되어 두 청년은 순사를 재워둔 채 포승 묶인 그대로 본서에 수감된 일이 있었다.

친구 아들을 애련히 여긴 순사와 아버지 친구를 위한 두 청년 사이의 명랑한 화재가 되었다.<<<

 

 

 

Trackback 0 Comment 0
2016.03.18 00:00

마산 해양신도시 운명 결정할 안상수 시장님께

마산 해양신도시 운명 결정할 안상수 시장님께

 

오래 동안 지역을 떠나있었던 분이라 2년 전 취임 때는 걱정이 많았습니다. 하지만 취임 후 보여준 모습은 예상과 달랐습니다.

특히 도시철도문제의 간명한 해결과 주남저수지 보전에 대한 입장은 매우 신선하였습니다. 이 글은 그런 기대감으로 씁니다.

 

인공 섬 해양신도시가 처음 계획된 것은 어언 15여 년 전입니다.

당시 황철곤 마산시장은 저 섬에다 고층아파트를 지을 계획으로 시민들 동의를 구했습니다. 그러나 도시 사정을 잘 아는 다수시민들의 반대에 부딪혀 결국 계획을 바꾸었습니다. 매립은 하되 아파트는 짓지 않겠노라 약속했던 겁니다.

이 약속은 통합 이후에도 이어졌습니다.

박완수 시장도 아파트와 상가가 아니라 공익을 위한 용지로 개발하겠다고 여러 차례 약속했습니다. 주민설명회에서도 똑같은 약속이 있었고, 담당국장과 개발계획자문위원장도 같은 약속을 했습니다.

이 분들이 저 섬에 아파트와 상가를 짓지 않겠다고 약속한 이유는 단순합니다.

기존 마산도시에 아파트로 재개발해야할 대상지역이 너무 많고, 힘들게 장사하며 생계를 이어가는 소상인들이 너무 많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공직자가 아무리 좋은 약속을 해도 돈 없으면 그 약속 지킬 수 없습니다.

하여 시민단체에서는 매립규모를 줄이는 방법과 돈을 적게 들여 매립하는 방법을 제시하였습니다. 그러나 창원시는 투입비용의 고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았고, 그동안 시장님도 바뀌었습니다.

이제 드디어 우려가 현실로 나타났습니다.

놀랍게도 창원시가 공모한 해양신도시 개발사업에 아파트건설 전문기업인 부영주택이 단일후보로 참여했습니다. 그리고 바로 오늘, 부영이 제출한 제안서의 적정성 여부를 심사합니다.

부영이라고 해서 이 섬 모두에 아파트만 짓는 것은 아니다고 해명하겠지만 시민들은 이미 알고 있습니다. 부영이 개발권을 가지게 되면 저 섬은 아파트와 상가로 가득찰 것이라고 말입니다.

 ‘시장인 내가 막아 내겠다고 하셔도 그건 시장님 임기 중에만 가능한 일입니다.

 

안상수 시장님! 만약 부영이 사업자로 선정되어 저 섬에 아파트와 상가가 줄지어 들어서면 기존도시는 매우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됩니다.

외국의 비슷한 사례로 유추하면, 셔터를 내린 상가들과 낡고 빈 건물들이 적지 않게 나타날 것이고 지가는 하락할 것입니다. 도시재생도 말잔치로 끝날 것입니다.

저의 이런 예측이 시장님 듣기에 거북할지 모르지만 결코 빈말 아닙니다.

인구증가세가 멈추고 시민들의 평균연령이 높은 도시에 신도시 건설해서 아파트와 상가를 지어댄 곳(마산 도시상황과 꼭 들어맞지 않습니까?)에서 흔히 일어나는 보편적인 현상입니다. 일본과 중국은 말할 것도 없고 미국에도 이런 도시 적지 않습니다.

나타나기 전에는 보이지 않고 나타난 뒤에는 아무리 후회해도 되돌릴 수 없는 것이 도시난개발(sprawl) 재앙입니다. 그런 점에서 한 번 오고 가버리는 태풍 매미가 차라리 좀 낫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시장님께서는 지난하게 끌어온 해양신도시 개발의 마지막 문턱에 서 계십니다.

초중고 어린 시절을 보낸 이 도시의 미래를 걱정하신다면, 그래서 시장 직을 맡으셨다면, 개발의 환영만 쫓는 이들을 내치고 저 섬과 기존도시가 공생하는 길이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지도자의 한순간 판단이 수십만 시민의 삶을 평화롭게도 할 수 있고 내팽개칠 수도 있습니다. 공동화로 쓰러진 도시들의 몰락원인도 발전을 명분으로 자행된 잘못된 도시정책때문이었습니다. <<<

<이 글은 오늘자 경남도민일보에 실린 투고입니다>

 

<3년 전 창원시가 투자 유치를 기대하며 제시한 홍보물>

 

 

 

 

Trackback 0 Comment 9
  1. 강대준 2016.03.27 21:42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정말 좋은 글입니다

  2. 진경배 2016.05.10 01:30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저 곳에 아파트를 올리는 것보다, 저 곳에 나무를 심고 잔디를 깔아서 인공 숲을 조성 하였다면 아마 마산은 최고의 명품 도시로 이미지 변신을 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아무래도 패를 잘못 던진듯 하네요...당장 눈앞에 이익에 회복되지 않을만큼 도시가 망가지고 있는듯합니다. 그저 않타까울 뿐이네요...

  3. 글쎄요 2016.07.20 10:39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서민주거 임대아파트의 대명사인 부영이 단일후보인 건 참 그렇지만...마산은 신시가지나 신도시를 꾸며나가야 합니다. 구도시재개발이 누구의 의지로 저절로 되는거 아닙니다. 주변에 경쟁력 있는 주거지가 들어서고 경쟁력잇는 상가지역이 들어서면서 재개발이 활성화됩니다. 악후되고 사람들이 떠나는 동네에 누가 무슨이유로 재개발 투자를 합니까? 창동을 보면 알지 않습니까? 벌써 수십년전부터 인구가 줄어드는 부산에 해운대 신도시가 들어섰습니다. 부산 상가 다 망했습니까? 해운대 주변 재개발 다 망했습니까? 이대로면 창원인구 장유,율하로 다 빠져나갑니다. 맨날 창동만 붙잡고 다른 동네 개발하면 창동 죽네 창동죽네 이럽니다. 순수함이 느껴지긴 하나 저변시각에 대해선 참 한심스럽습니다.

  4. 글쎄요 2016.07.20 10:53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그리고 사견은 좋지만 님의 의견을 다수 시민의 의견인양 곡해 마세요. 님은 시민들 대표가 아닙니다. 시민들이, 시민들이, 하지 마세요. 님과 동등한 창원 시민의 한사람으로서 부아가 난답니다.

  5. 글쎄요 2016.07.20 11:19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님의 논리는 언제나 그렇습니다. 공부 잘하는 사람 우리 학교 입학하거나 전학오면 안된다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공부 못하는 기존 학생들이 여러모로 피해를 본다는겁니다. 그게 과연 사실일까요? 늘 피해보는 그 학생들이 걱정이라고 합니다. 정말 걱정되는거 맞습니까? 경쟁하는 곳에 발전이 있고 그 발전되는 지역 주변이 함께 성장합니다. 좁게 보면 너 때문에 내 등수가 내려갔다지만 타 학교와 비교하면 전체적으로 실력이 나아집니다. 우물안만 걱정해서 우물안에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는 개구리가 되지 맙시다.

  6. 허정도 2016.07.24 00:01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방문 감사합니다.
    오해가 많으시군요. 저는 해양신도시 개발에 대해 무조건 반대하지 않습니다. 매립을 시작할 즈음에는 매립 자체를 반대했지만 이미 매립이 되었는데 지금와서 어쩌겠습니까?
    제가 문제 삼는 것은 저곳에 기존 도시의 경제권을 침범할 시설들이 들어서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글쎄요'님을 비롯해 적지 않은 분들이 기존시설보다 더 좋은 것들이 들어서면 도시발전에 도움된다고 말씀하시는 것 잘 압니다. 영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것은 성장하는 도시의 경우에 해당됩니다. 마산 도시에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많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그렇게 해야 성장한다'고 말씀하실 겁니다. 하지만 도시의 성장은 여러가지 조건이 갖추어 져야합니다. 이 도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바람만으로 되는 일은 아닙니다. 깊이 생각해볼 일입니다.

    • 새로운 2016.10.22 10:16 신고 address edit & del

      아공 글이 아주 멋지시네요 저도 공감합니다 산을 깎고 툭하면 바다를 매립하고 아파트른짓고 또 아파트앞에 노는땅은 또 못보고 분수대를 짓고 정말 욕심이 끝도없네요

  7. 이동원 2017.02.01 20:37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저도 마산의 발전이 과연 아파트와 상가만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가 의문입니다. 마산 창동을 보면 저는 한일합섬의 몰락이 곧 창동의 몰락으로 이어졌다고 봅니다. 양질의 일자리가 없는 도시는 자연스럽게 청년들이 사라집니다. 통합창원시가 되어버린 지금 마산의 구 시가지가 더 쇠퇴하리라 봅니다. 이미 한국은 성장기를 지났고 창원도 성장하기보단 제자리걸음을 하게 될 가능성이 크겠죠. 창원을 떠받치기 위해 마산이 희생될까봐 걱정입니다. 통합으로 부동산 투기꾼들 외에 마산의 누가 혜택을 봤는지 의문입니다.

    • 허정도 2017.02.02 17:03 신고 address edit & del

      글쎄 말입니다.

2016.03.14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78. 일경부의 피습, 79. 일기루의 화재

78. 일경부(日警部)의 피습

 

1905(광무 9) 2월 모임 마산포 주재(일본 영사관 소속) 경부 경익태랑(境益太郞, 병합 후 마산초대서장)은 낙동강 하류 연안에 수렵갔던 귀로(歸路),

일몰로 해서 창원군 내서면 근주(近珠, 일명 살구징이) 한인객사에 투숙했다가 밤중에 괴한 십수명이 기습하여 그가 소지한 엽총, 탄환, 행이(行李) 등을 탈취한 후 흉기로 난자하여 경()은 빈사 상태에 빠졌다.

일본 영사 삼포(三浦)는 일헌(日憲)과 일경(日警), 한경(韓警)에 급히 연락하여 즉각 인군(隣郡)에 비상망을 펴고 범인 체포에 활동하였으나 수색 8개월이 되도록 단서를 잡지 못하고 고민하던 중 간단한 실마리로 함안읍에서 수괴 정원길을, 일미(一味) 8명은 창녕읍에서 타진,

마산경무청(현재 부림동 시장에 있었음)으로 압래(押來)하여 창원감리서(마산) 현학균의 주심으로 전원 강도모살죄(强盜謀殺罪)로 사형판결이 내려 범인들의 다리를 분질러 지게에 싣고 구강당산(舊江堂山) 남쪽 기슭에서 교수 집행하였다.

이 끔찍스런 광경을 본 심약한 부녀자 중에는 졸도 혹은 탈분(脫糞)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이 사건의 범인 일미(一味)를 타진한 일인 순사 갑비(甲斐)2계급 특진하고 일본 영사 삼포(三浦)는 현학균 창원감리에게 한인 권임(權任, 지금의 경감) 한용신도 계진(階進)토록 상신(上申)하라고 공문으로 요청한바 있어 외무대신 이하영에게 26호로 보고한 일이 있었다. 

 

79. 일기루(日妓樓)의 화재

<1908년 신마산에서 시작한 일본 요정 망월루> 

 

명치 41년이면 서기 1908년이다. 그때는 은행도 전기도 없던 마산이다.

기루(妓樓)도 구마산에 생기지 않았을 때인데 길촌(吉村)이라는 일인이 구마산 서성동(후에 일인 安達이 경영하던 조선 창녀로서 吾妻亭이란 옥호로 청루 자리)에 일본 태본현(態本縣, 쿠마모도) 천초도(天草島)에서 창녀를 끌어들여 목조 2층을 짓고 명월루(明月樓)란 이름으로 경영하고 있었다.

전기(前記)한 해 늦은 봄에 포주 길촌이 새벽잠을 깨어 변소에 가려고 일어났을 때 천장에 달아둔 램프를 들이받아 다다미와 침구에 석유가 쏟아짐과 동시에 삽시간에 온 방안이 불바다가 되자,

밤늦게까지 남자들과 운우의 흥을 일으키다 늦잠이 든 기녀들은 별안간 불벼락을 맞아 탈출구를 찾아 헤매었다.

기녀들의 도주를 방어하기 위하여 출입문을 굳게 잠가두는 것이 비인간적인 포주들의 공통된 심리인지라 단말마적으로 허둥대던 기녀와 동침하던 남자들은 명월루 뒤뜰로 뛰어내려 인근의 구조를 호소하였다. 물론 반나체였다.

화마는 사방을 둘러쌌고 열띤 기왓장이 이웃으로 튀고 있었다.

신마산 변두리에 있는 일본 군대의 소방차가 당도하였을 때는 이미 다 타고 도괴(倒壞) 직전인 때이었다.

화기 때문에 아무도 얼씬 못하던 때인데 그 집 나까이계집이 금고를 집으러 뛰어감과 때를 같이하여 불타던 건물은 그녀를 덮쳐 영락없이 타죽고 말았다.

그의 소사(燒死)한 시체는 소방대원의 곡괭이에 걸려 나왔는데 마치 생선 탄 몰골이 되어 금고를 꼭 껴안고 있었다고 한다.

주인을 위해서였을까? 돈이 아까웠을까? 그 한창 나이에.....<<<

 

 

 

 

 

Trackback 0 Comment 0
2016.02.08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72. 법창야화

72. 법창야화

 

율산(栗山)검사의 저울질

 

마산 검사국 검사로서 인격자도 있었지마는 풍각장이 형()의 검사도 몇 사람 있었다. 그 중 대표적 인물로 율산(栗山) 검사를 들 수 있다.

이 사람은 동경제국대학 즉 적문(赤門) 출신의 법학사로 전임처가 어딘지는 기억이 안 되지만 성품이 상당히 이질적으로 광적이었다. 그가 재임 시에 연출한 기상천외의 연극 몇 토막을 소개해 본다.

매월 21일은 관공리(官公吏)의 봉급날이라 평소의 인색하기 한이 없는 율산은 검사의 본때를 보일 양으로, 당시 소도 효(小島 孝)라는 경찰서장을 요정 망월루로 불러놓고 제법 호기 있게 산재(散財)’를 하다 취흥이 무르익자 면도칼 같은 10원권에 코를 풀어 내던지면 서장은 코 묻은 돈을 닦아 율산에게 무릎을 꿇은 채 바쳐 올린다. 이에 신명이 난 율산은 호주머니에 있는 돈을 마구 뿌려 기생에게 팁으로 주니 기생은 지옥에서 부처님이나 만난 듯 그렇게 반가운 일이 없었으리라. 그들은 백배(百拜)로서 감사의 인사를 드린다.

그 이튿날 삽시간에 소문이 퍼져 가는 곳마다 화제가 되었을 무렵 검사국에서는 돈 받은 기생 전원을 호출하여 어제 받은 돈을 즉석에서 반납하라 하여 보는 사람들을 얼떨떨하게 만들었다.

검사국 출입기자 중 시계가 없는 사람이 있으면 적어도 기자 쯤 돼 가지고 시계가 없어 되겠느냐하면서 원하지도 않는 자기 팔뚝 시계를 주어 물욕에 소탈한 사람이라고 우선 감심도 한다. 그러나 아니나 다를까 시계를 준 지 2, 3일 후에 그 기자를 검사실로 불러들여 가져간 시계는 장난으로 준 것이니 내놓으라하여 다시 받는다.

이런 일은 약과라고 할까. 피의자 취조상황을 보면 탁자에는 담배를 4, 5종 두고 해태를 피우는가 하면 금세 마꼬를 피우다 또 이내 피젼아니면 시끼시마로 갈아 피우다 피의자에게 내 던진다.

취조시엔 앉지를 않고 이리저리 거닐다가 피의자가 문()을 부인할 때면 마시다 남은 찻물을 얼굴에다 휙 뿌린다. 실로 발작의 일순이다.

언젠가 창원군 북면 사람의 고소사건이 있었다. 피고소인은 궁여의 꾀로 만족할 정도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봉투 한 장을 율산의 손에 건네 주었다. 이 눈치를 챈 고소인은 피고소인이 준 것보다 더 넉넉하게 싼 봉지로 역습을 했겠다. 이에 율산은 쌍방 뇌물을 먹을 순 없고 이해경중(利害輕重)을 저울질하고 나서 피고소인을 호출하였다. 물론 피고소인은 검사국 직원 입회하에 증회죄(贈賄罪)로 투옥할 것이로되 관대하게 할 터이니 봉투를 가지고 가라는 말을 듣고 간신히 호구(虎口)를 벗어나 밖으로 나온 다음 돈이 들어 있는 줄로만 알았던 봉투를 열어보니 아무 것도 없는 빈털터리였다고 한다.

이렇듯 뇌물이라면 대소를 가리지 않고 먹어대던 율산은 그 후 대구로 전근, 변호사로 있다가 검사 재임 시 부정 사실이 탄로됨과 동시 오촌(奧村) 검사(후 변호사)와 같은 운명을 안고 그의 고향으로 추방되었다.

 <1910년 건축된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청>

 

() 판사의 정직(停職)

 

부산지방 법원 마산지청(현재 지원)과 동 검사분국(현 지청)에서 세인의 눈길을 끈 일이 두 가지 있었다. 하나는 검사국 상석(上席, 현 검사장) 검사 사건이요, 또 하나는 법원의 한인판사 사건이니 두 가지가 모두 인권에 관한 일이었다.

검사 사건이라는 것은 대정 13년께에 상석 검사 진구정 보(津久井 室)에게 일인 사기범 한 사람이 최조를 받는 동안 이 자가 검사 앞에서 대담하게도 삿대질을 수차 하자 이에 비위가 상한 진구정(津久井) 검사는 누구 앞에서 버르장 없이 삿대질을 하느냐?’ 하는 일갈과 동시에 가졌던 부채로 피의자의 손을 탁 쳤다. 이때 그 일인 사기범은 노기충천하여 최조하는 검찰관이 피의자를 대하는 태도가 친절은 고사라고 이렇게 인권유린까지 예사로 행하니 이런 검사의 취조에는 응할 수 없다면서 기피를 주장하여 상당한 물의를 일으켰던 것이다.

그 이듬해이던가 그해이던가 유명한 장 판사 사건이 벌어졌다. 사건인즉, 북마산 성남교를 북북으로 건너는 직전에 일인의 기와공장주()란 자가 민사 사건 한인 채무자를 상대로 한 지불명령 소송재판이던가에 증인으로 출정하여, 소위 신성하다는 법정에서 일개 한인 판사쯤이야 하는 우월감으로 불손한 진술을 하므로 고얀 놈이라면서 퇴정 명령을 내리자 강호진이라는 20대의 정정(廷丁)이 끌어내려는데 반항하므로 수차 구타한 사건이었다.

그 당시 서울서 발행하던 일본의 야당계 신문 조선신문 마산특파원인 산본(山本) 기자가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자 당황한 조선총독부 법무당국에서는 장 판사를 정직 6개월, 구타한 강 군은 파면 처분을 단행한 것이다.

 

단편(斷片) 여담

 

대정 말기에 마산법원 지청에 수재형의 경도제대 출신의 단구(短軀) 미남 예심판사 한 사람이 있었다. 설명은 기억되지 않으나 예심정에서 피고를 다루는 태도가 극히 부드럽다는 호평을 받던 사람이었다.

술 담배를 하지 않고 평일에는 독서 삼매경에, 공휴일에는 낚시에 열중하던 사람인데 어찌된 영문인지 한인 피고인의 판결을 잘못하여 이 오판 사건으로 한국 남단의 마산에서 평북 강계에서도 보행으로 20리 걸리는 궁벽한 초산(楚山)으로 좌천되고 말았다.

그 당시만 해도 각 법원의 판결서와 예심 종결문을 수집하여 매월 간행, 전국 법조계에 반포하여 모든 판검사의 법 운영의 신중성과 존엄성을 지키도록 독려했었는데 현재의 법관들은 어떠한지 궁금도 하다.<<<

 

 

 

 

 

Trackback 0 Comment 0
2016.02.01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71. 변심 여자의 참수사건

71. 변심(變心) 여자의 참수(斬首) 사건

 

()

통칭 살로매란 이름이 세계에 세 가지로 알려져 있다.

첫째 예수가 십자가에서 숨지는 광경을 멀리서 바라본 여인 막달라 마리아와 둘째 작은 야곱’,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리고 살로매(마가 1540)’로 되어 있다.

독일의 음악가 리히알트 스트라우스의 악극 살로매의 내용을 약술하면 헬롬 대왕의 생신 축하에 춤을 춘 살로매에게 감격한 헬롬 대왕은 살로매가 원하는 것은 무언이든지 들어 주겠다고 하니 살로매는 자기의 불타는 사랑을 거절한 요카난(세례 요한을 말함)의 목을 베어 달라고 했다.

헬롬 대왕은 즉시 요카난의 목을 베어 쟁반에 담아 가지고 왔다. 살로매는 피투성이의 요카난의 목에 키스함으로써 실연의 복수는 하였지만 이 꼴을 본 헬롬 대왕은 질투의 불길을 참지 못하여 살로매를 압살(壓殺)하고 마는 것인데 이와 비슷한 얘기를 마태 전에서도 볼 수가 있다.

즉 헬롬 대왕이 그 아우의 처 헬로디아와 간통함을 의()가 아니라고 직간한 세례 요한을 옥에 가둔다(중략).

헬롬의 생신일, 헬로디아의 딸 살로매에게 축하의 춤을 추게 하여 헬롬을 기쁘게 해주므로 헬롬은 그 조카 딸 살로매에게 원하는 것은 모조리 들어주겠다는 말에 살로매의 모() 헬로디아는 남편의 형 헬롬과 간통한 것을 직간한 요한에게 복수하리라 결심하고 요한의 목을 베어 오도록 딸 살로매에게 말하라 한다.

살로매의 말대로 헬롬은 옥중에 있는 요한의 목을 베어 쟁반에 받쳐 오도록 한다(143-11).

이와 같이 요한은 살로매의 사랑을 거절한 때문에, 또 요한은 헬로디아가 남편의 형인 헬롬과의 사연(邪戀)을 반대했기 때문에 여자의 함원(含怨)으로 하여 두 사나이가 참혹한 최후를 마쳤지마는,

다음 얘기의 두 사나이는 여자의 변심에 격분하여 여자의 목을 벤, 말하자면 현대판 남자 살로매의 사건인데 여기에서는 사건 발생 순서를 편의상 바꾸어 놓기로 한다.

 

1

193228일 일본 명고옥시(名古屋市) 중도미야정(中島米野町) 호기(戶崎) 교외(郊外) 밭 가운데 있는 계분(鷄糞) 창고에 길전송강(吉田松江)이라는 19세의 처녀가 피어나지 못한 꽃 봉오리인채 무참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범인은 처녀보다 25세 위인 제과직공(製菓職工) 증연음길(增淵音吉)이라는 자였는데 3,4년 전 상처를 하고 고독하게 지내는 증연(增淵)을 동정한 송강(松江)은 아비뻘 되는 그와 깊은 사랑에 빠졌던 것이며,

양인(兩人)은 가정을 가질 수도 없는 형편이라 밀회 때마다 고민을 거듭해 오다가 전기(前記) 밭 가운데 있는 계분창고에서 만났을 때 서로 정사(情死)를 하기로 결심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자를 죽인 뒤 별안간 공포에 질린 사나이는 도망을 치려 하다가 지극히 사랑하던 여자를 그냥 두고 갈 수가 없어 목과 유방과 음부를 시체에서 도려내어 행방을 감추었던 것이다.

수개월 후 모발을 뽑아낸 여자의 목과 사나이의 시체가 바다에서 떠올랐는데, 그 후 증연(增淵)은 양심의 가책으로 목을 안고 투신자살한 것으로 판명이 되었던 것이다.

이 사건은 꼭 마산 사건보다 20일 후에 발생하였다.

 

2

마산 산제당(山祭堂) 참수(斬首) 사건

인물

가해자 ; 경북 청도군 동창면(동명 미상) 방랑승 배성룡(일명 배중) 37, 자 익해(益海)가 있음

피살자 ; 경북 대구부 남산동(번지 미상) 기녀 박순덕(일명 월순) 27, 자 노분교가 있음

수사관 ; 강상(江上) (, 마산 검사국 상석검사), 소도효(小島孝, 마산 경찰서장 경부), 강보형(姜寶馨, 마산경찰서 사법주임) , 외근 형사 수십명

도의(道醫, 마산 公醫) ; 시체 검안자 한규상(의사)

범행일시 ; 1932121일 하오 8시경

범행 장소 ; 공신당산(貢神堂山) 서편 산복(山腹)

 

마산 서북부에 용립(聳立)하고 있는 두척산 좌편에 제3지산(支山)인 정신산당(貞神山堂) 산제당(山祭堂) 중심, 완월폭포, 척산동, 약수암, 서원골 등은 공기가 맑아 일출 전 등산객들이 운집하는 곳이다.

음력 섣달 보름 아침 등산을 갔다 온 소년(김모군)이 갑자기 발열을 하였고, 익일도 다른 소년이 다녀온 후로 원인 모를 열병을 앓았는데 그 결과가 두려워 이웃에도 말을 하지 않았다. 다음 날 세 번째의 등산객으로부터 중대한 신고가 경찰에 입수되었다.

신고를 접한 수사관들은 아연 긴장하여 부내(府內) 전역에 삼엄한 경계망을 치고 한규상 공의(公醫)를 대동, 현장에 당도하니 목 없는 여자의 하반신이 산제당 위 바위 밑에 노출되어 있지 않은가?

검시 결과 하복부는 배꼽에서 음부에까지 선이 그어져 있음을 보아 상당히 반항한 흔적이 있다고 하였고, 목은 예리한 단도로 절단되었으며 범행은 10시간이 경과했다고 하여 범인 체포에 중대한 차질을 가져왔었다.

공의가 발표한 시간이 그 후 범인의 진술대로 하면 마산을 탈출하여 함양 방면에서 호남 지방으로 도피하던 시간과 부합되었던 것이다.

<피살 사건 기사 / 마산야화>

 

범행 경위

범인 배승(裵僧)과 피살자 순덕 여인은 19308월 경 대구부 모처에서 동서(同棲)하다가 그해 1월 마산으로 이주, 중성동 대구여관에 투숙하면서 상남동 모처에 전세방을 얻어 음식점 개업을 계획 중, ()가 가졌던 자금이 날로 소비됨을 보자 여자는 고향인 대구로 다니러 가게 되었으며 전과 달리 냉정하게 마음이 변해 있었다.

이것을 눈치 챈 배승(裵僧)은 살의를 품고 구마산 시장 입구 일본인 좌좌목철물상(佐佐木鐵物商)에서 단도 1정을 입수하고 그의 아들 익해와 병약한 순덕의 딸 분교와 그녀의 모 순덕 여인을 대동하고 분교의 병을 고치기 위한 치성을 구실로 산제당으로 올라갔다.

배승(裵僧)은 순덕 여인의 마음이 돌아서도록 분향 축원하였으나 여인을 아랑곳없이 이내 그 자리를 떠나려 하였으며, 아이들의 말이 엄마는 집을 나간다고 하더라 하자 배승(裵僧)은 여인에게 덤벼들어 격투가 벌어진 끝에 칼로 여인의 복부를 찔러 숨지게 한 뒤 목을 베어 산제당 근처 바위 밑에 묻어 두고 지리산 대원사에 일박한 뒤 아들을 데리고 함양 방면으로 떠나면서 순덕의 딸 분교는 산청군 시천면 사리 백영기 주조장(酒造場)에 맡겨 둔 것이 단서가 되어 배()를 추격하는 수사진은 마산을 필두로 경남, 전남북 삼도 경찰의 총동원으로 전주, 장수, 남원, 담양 등지에 치열한 범인 체포의 경쟁까지 벌어졌다.

범인 배승(裵僧)은 주지사(住智寺), 실상사(實相寺), 금원사(金院寺)로 탁발 방랑타가 정세를 살피고자 귀정사(歸政寺)2박하고 죽림사(竹林寺)에서 3박 아침에 탈출하고자 문전으로 나왔다가 함양서(咸陽署) 형사대에 검거, 개가를 올렸다.

범행 후 실로 15일 만에 범인은 체포되었던 것이다.

부기해 둘 것은 공의(公醫)의 검안 착오로 범인 체포 일보 직전에서 마산서 형사대가 체포를 놓친 것을 두고 한으로 삼았던 것이다.<<<

 

 

 

 

 

Trackback 0 Comment 0
2016.01.25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70. 영미연초의 출현

70. 영미연초(英美煙草)의 출현

 

1907, 8년 경에 일본서 창설된 영미연초(英美煙草)와 동아연초주식회사는 한국으로 진출.

마산에서 맨 처음으로 선전 판매한 담배는 오본입(五本入) 병정표와 십본입(十本入) 새표, 파이레트(통칭 칼표)와 자전거표.

그 다음으로는 담배가 나올 때마다 이상한 차림을 한 선전 부원들은 나팔과 북을 치며 가두 행진을 하면서 담배를 공짜로 마구 던지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기다란 연죽(煙竹)에 엽초(葉草)를 즐기는 때라 생활의 여유있는 사람들은 옥()이나 호박 빨뿌리에다가 금박 장식을 한 은삼조동(銀三鳥銅) 담배통을 즐겼으며,

담배는 한때 이름났던 원산초(元山草)가 아니면 충청도산 엽초에다 소주와 꿀물을 뿜어가지고 이것이 습도나 건조의 중간쯤 해서 곱게 접어 그 위에 무게 있는 것으로 눌러 두었다가 지금은 보기 어렵지마는 단()칼의 날을 날카롭게 세워가지고 머리 때가 묻은 목침에 담배를 놓고 실고추처럼 썬다.

이것을 지아미혹은 지사미라고 한다(일어 キザミ刻草의 와전된 말). 꿀과 혹은 재래식 소주를 뿜은 담배 향기는 피우는 사람은 물론 곁에 있는 사람까지 혹한다고 한다.

그런데 이 지사미담배를 만드는 까다로운 절차 때문인지 차츰 권련(卷煙)팬이 늘기 시작하니 연초 회사에서는 상술을 바꾸어 온 갑을 파는 한편 한 가치 씩 팔게 되어 병정표 오본(五本)이 오분(五分) 1전인데 한 푼만 가져도 해갈은 하게 되어 새 담배는 뒤를 이어온 것이 역시 양절(兩切)로서 갓표, 범표, 사자표, 산호주, 칼표(파이레트), 투구표, 자전거표, 구두표, 일본말로 구부(口付, 필터)로서 조일(朝日, 아사히), 부도(敷島, 시끼시마) 등 일본 내의 제품과 꼭 같은 것은 종전까지 있었으며,

별도로 아주 가늘디 가는 구부오십입(口付五十入)으로 로시아가 잠깐 나돌았으며 파고다를 마지막으로 1921년 총독부 연초전매제도 실시로 동회사는 만주대륙으로 진출하고 말았다.

회사의 연고자라 하여 식은(殖銀, 제일은행) 광장의 2층 건물에서 조선인 상대로 하는 포목 도매상 길전익태랑(吉田益太郞)이 초대 전매서 책임자였는데 전매제에서 생산한 담배는 대충 다음과 같다.

피죤(10~12), 카이다(해태 12~15), 송풍(松風, 9), (, 8?), 조일(朝日, 12), 부도(敷島, 15), 마코(5), 장단(壯丹, 52), 흥아(興亞, 10), 베풀(10), 가찌도끼(/10), 미도리(10) 등이고 각연(刻煙)은 장수연(長壽煙)인데 장단(壯丹) 한 가지로 농촌에서만 팔게 하였다.

<조선총부가 제조한 담배 가찌도끼와 장수연 / 군국주의 냄새가 물씬난다>

 

전매제 실시 전에는 현 남성동 천주교회 뒷골목에 연초 도매상으로 그 판로의 범역이 상당하였는데 당시 홍치익 김좌근 양씨가 공동 경영하였다.

다음 점포는 현 시장 동()입구에 자리 잡은 럭키 도매상 자리에 옮겼으며 전 마산 방송국사 입구 우편과 구마산 시장입구의 두 곳에 사제(私製) 담배공장이 있었다.<<<

 

 

 

 

 

Trackback 0 Comment 0
2016.01.11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68. 회상되는 각계 건물

68. 회상되는 각계 건물

 

도시계획에 따라 허물어지고 없어진 시내에 점재(點在)하던 이름난 건축물을 살펴본다. 

동척(東拓)지점(와가 / 瓦家 - 목조단층) - 오동동 삼각상점에서 동으로 신작로가 남으로써 건물과 정원의 2/3 이상이 철훼(撤毁)되는 동시에 지점도 폐쇄되고 그 자리가 중화요정 봉래관(蓬萊館)이 되었다.

명태창고 - 이 건물은 1920년 여름 남한을 휩쓸던 호열자(虎列刺) 때 환자 수용소로 일시 이용한 때도 있었으나 역시 도로 확장에 따라 반 이상이 철훼(撤毁)되고 지금은 잔영만이 있을 뿐이다.

박간(迫間) 창고 - 이곳은 창고와 광장이 있어서 그때는 환등(幻燈)과 활동사진을 공개하였고, 창고는 농구상(農具商), 보덕상회(報德商會)와 서야도기(西野陶器) 창고로 사용되었다가 지금은 국민은행 지점과 경남은행 본점이 자리 잡고 있다.

마산재무서(財務署) - 철제 아치형 현대식 건물로서 금융조합과 비등한 업체였던 것이 그 후 김종신이 경영하던 약주회사로 바뀌었다.

조창(漕倉)과 감리서(監理署) - 현재 제일은행이 들어선 곳인데 대한제국이 말소(抹消)되자 운명을 같이 한 건물인바 한때는 경상남도 기업전습소(1921년경 / 다른 기록에 의하면 1912년 경 ; 옮긴이)가 대치되어 부녀자들에게 방직기술을 전수하다가 농공은행 지점과 포목도매상인 길전(吉田)상점이란 목조 2층이 들어앉았다가 1926년 식은(殖銀)지점이 설치되자 길전상점은 동아연초(東亞煙草) 총판소로 바뀌었다가 1921년 조선 전매서가 발족함으로써 현재 위치로 이전하였으며 길전건물은 식은(殖銀)이 흡수하여 종전 후는 한때 저축은행이었던 것을 제일은행으로 명의 변경하였다.

구 사옥은 노동자의 쇠망치로 만신창이가 되어 석일(昔日)의 면모는 일장(一場)의 회상에 그칠 뿐이다.

<1760년에 건축된 조창 마산창>

 

경무청 - 부림시장 입구의 목조 와가(瓦家) 상하 3동이었는데 이곳을 경무청이라 했고, 그 둘레에 있었던 조그마한 일용품 저자가 오늘날 대규모 공설시장의 전신이다.

경무청은 감옥 구실을 했고, 병합 후 오동동 감옥이 설치될 때까지 부산감옥 마산분서(分署)란 간판으로 순사(巡査) 주재소 행세를 하다가 1926년 여름 현재 남성동 파출소로 이전했는데 당시 위치 문제를 둘러싸고 마산부윤과 경찰서장 간에 의견 대립이 있었던 상보(詳報)는 별항으로 미룬다.

아래학교 - 매우 오래된 명사로서 당시 아래학교의 생도는 불과 수인(數人)이었을 뿐 아니라 생존자 중에서도 그 이름을 망각한 사람이 대부분이다.

해방 후 삼·일주조장 좌후편 언덕 위에 단층 목조 와가 2동에 운동장이 있었다.

높이는 현재 철로 높이였으나 도로 높이에 준해서 깎아 내린 곳인데 창건 초에는 개화기의 영향을 받아 서당과 학교의 중간격인 의숙(義塾)으로 출족(出足)하였다가 성호동에 공립 보통학교가 개교됨으로써 전기 구교사(舊校舍)를 아래 학교라 부르게 되었던 것이다.

구교사(舊校舍)는 편발(編髮)한 처녀들만을 교육하는 여학교로서 출발하였던 것인데 몇 해 후 성호보통학교에서 남녀공학을 함으로써 자연 폐쇄가 되었고, 그 자리는 법원 건물이 준공되기까지 임시 청사로 사용하였다.

부기(附記)하지만 당시 아래 학교 제141번 졸업생은 김노전(金魯全)이었음을 기억하고 있다.

민의소(民議所) - 민의소는 서울 청년회관에 버금가는 건물로서 마산 한민(韓民)의 유일한 공회당인 동시에 대일 투쟁시에는 한민의 인권과 이해(利害)를 옹호하는 자치기관, 말하자면 항민(港民)의 의사가 결집한 대변기관으로서 1908(광무2)에 준공된 것이다.

병합과 동시에 해산되었으나 한민들의 용솟음치는 혈맥(血脈)은 조금도 냉각함이 없이 대소 사회문제, 항민 이해관계, 민족문제 등이 여기서 논의되었으며 청년들의 토론과 외래 명사들의 강연회도 여기서 행해졌는데 가장 인상 깊은 것은 19237월에 개최한 동경자유법조회 중진인 포시진치(布施辰治)’ 변호사의 강연(통역은 김형두 변호사였는데 미개업으로 종료)1924115일에 있었던 강연회였는데 연사는 김종명(), 서정희, 송봉우, 신철 등 4명으로 송봉우의 연제(演題)인간운동과 유영운동(幽靈運動 / 종교를 지적)’이었다.

그런데 연설 도중에 질문이 있었다.

문제가 되었던 내용인즉, 일인 행덕추수(幸德秋水 / 명치천황 암살 음모의 대역죄로 1910년에 사형을 당함)의 유저(遺著) 기독교 말살론의 서문 중 십자가는 남녀 생식기의 상징이란 대목이었는데 당시 창신학교에 봉직 중인 최 모라는 신진 목사의 질문에서부터 논쟁이 벌어져 강연장에서 끝을 내지 못하고 연사들의 숙소에까지 연장되었던 일도 있었다.

또 한 가지는 서울에서 안서(岸曙) 김억이 내마(來馬)하여 민의소에서 2주간 에스페란트어 강좌를 열었던 일이며 김명규, 김종신, 팽삼진 등이 무산자제(無産子弟)를 가르치던 마산학원도 여기에 있었다.

뜰 앞 출입구 좌편 숙직실을 허물고 이정찬이 주간이 되어 유도도장 숭무관(崇武館)을 건립하였다가 박삼조 사범의 주장으로 정무관(正武館)으로 개칭하여 유망한 선수들을 많이 배출하였다.

그러나 뜻밖에도 관원들에게 일섬벽력(一閃霹靂)이 떨어졌다. 19357월경 신마산 마산극장 주인이며 청부업자이던 본전퇴오랑(本田五郞, 부회의원)이란 자와 부회의원 구() 모가 비밀리에 정무관 대지를 매매 계약을 하여 시가보다 헐값인 평당 40원에 낙착했다는 것이다.

통분한 부민들은 매매 무효 부민대회까지 열었으나 경찰의 탄압으로 실패하고 말았던 것이며, 정무관 유도 선수들은 울분을 못 참고 울부짖었지만, 대세는 이미 기운 뒤라 어찌할 수 없이 수많은 우여곡절과 애환을 지닌 채 38년 역사의 전통은 자취도 없어지고 그 자리에 버젓이 공락관이란 철근 3층의 극장이 들어서게 되었다.

추산정(騶山亭) - 구마산 주민들의 하절(夏節) 납량처(納涼處)로서 추산정은 공기가 맑고 춘하추동 할 것 없이 등산객들이 부절(不絶)하여 위장병, 신경통, 고혈압 등의 치유에 효험이 많았다는 선전이 대단하였다.

<마산 3.1만세의거 때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던 추산정>

 

추산정은 일면 사정(射亭)이라고도 하는데, 많은 한량재녀(閑良才女)들이 모여 들었고 스포츠맨들은 건강의 도장이라고까지 하였다.

설치 연대는 미상이나 고로(故老)들의 말에 의하면 2백년 내지 3백년은 될 것이라고 하는데, 확실하지는 않지만 추산정 주위를 둘러싼 울창한 노목들의 수령을 보아 어느 정도 과학적인 추정이 가능하다.

고로(故老)들의 말에 의하면 여기서 각종 각색의 행사가 많았는데 정자를 중심으로 한 시인묵객(詩人墨客)들이 시음회(詩吟會)는 물론 춘계(春季)에는 사우(射友)들의 경사대회(競射大會), 하절(夏節)에는 피서객들이 모여 들었고, 추계(秋季)의 백일장과 추석의 추천놀이에는 궁벽하고 답답한 규방의 부녀자들이 아끼던 고까옷에다 아미를 단장하고 모여들어 이를 구경하는 부녀자들과 어울려 마치 유록(柳綠) 화홍(花紅) 수백 종의 꽃과 나비들의 원무를 연상케 하였으며 저 유명한 3·1 독립선언서를 발표(낭독 일파一波 김용환 씨)한 곳이 또한 이 추산정이란 것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렇게 유서 깊은 추산정이 어떠한 경로로 하여 천리교라는 하필이면 일본 종파의 손으로 넘어갔던 것인지 조선인 공유재산을 잘 관리할 줄 알았던 부()가 무슨 권한으로 일개인에게 매각 처분을 하였으며, 정부에서 보호하라는 노목(老木)들은 어찌하여 남벌해 버렸던 것인지 지금은 만목(滿目) 황량(荒凉)하여 부민들의 원정조차 묵살하고 있는 처사가 석연치 않다.<<<

 

 

 

 

 

Trackback 0 Comment 0
2015.12.28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64. 오보와 똥소동 65. 목장

64. 오보(午報)와 똥소동

 

지금 마산은 장군천변에 있는 소방서와 남성동 경찰파출소의 두 곳에 오보(싸이렌-오전 4시 통금 해제, 정오 12, 오후 11시반과 12시에 취오吹嗚) 장치가 되어 있지만 12,3년 전에는 완월 심고(新敎-천주교) 성당의 신부 시계에 의해서 오종(午鐘)을 치는데

그 때만 해도 지금 성지교(聖旨校) 이하는 일인주택 1동과 조금 내려와서 오반전(五反田) 양조장(푸른집 / 도립의료원으로 증축하고 있는 전 크리스탈 호텔-옮긴이) 그리고 산전(山田)장유공장(현 몽고장유) 외에는 허허벌판이며, 구마산 입구 주차장 가는 첫 골목에는 장승 한 쌍과 세칭 아래학교(현 성호초교 전신) 뿐이었던 때다.

성당 종소리가 현 구마산 천주교회 근처까지 은은히 들려오므로 동민들은 정오 12시를 알게 된다.

그뿐 아니라 마산 본역에서 발차 신호로써 역장이 부는 호각 소리가 서성동 모래밭 너머로 해서 구마산 매축지(남성동)까지 들려오는데 철도 시각은 정확하다하여 아침저녁 발차 때 호각소리를 따라 시각을 알게 되었다.

그 뒤 현 시청 청사 자리에 발전소가 설치된 뒤로 정오와 오후 정각 6시가 되면 흰 증기를 뿜으므로 해서 시각을 고하였다.

일본에서도 그때 큰 공장 외는 상시전(常時電)이 없을 때라 정오 시각에는 각 가정 및 군소 공장에 30초 정도 조명하여 줌으로써 오보(午報)를 알리기도 했다.

조선의 각 도시마다 오포(午砲) 제도가 실시되어 마산은 대정 말기인지 소화 초기에 마산부청(창원군청 / 현 경남대 평생학습관-옮긴이) 서남 광장에 비로소 오포를 비치하였으나 위치가 서편벽지에 편재한 때문에 신마산 방면에서만 오포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이리하여 세월이 흐름에 따라 오포 대신 지금과 같이 싸이렌이 생겨 처음 싸이렌 비치장소가 시청 남쪽 매축지 노변이었는데, 그곳이 여자들 세탁소라 공교롭게도 소피(용변)하던 처녀나 부인들이 싸이렌의 용심스런 소리에 엉덩이를 깐 채 놀라 뛰어 나오는 넌센스도 있었다.

그래서 싸이렌을 소방서에 옮겼으나 2차대전 시에는 소방서 망대(望臺)는 적기 내습을 감시하는 초소가 됨에 따라 마산부청 내에서 관리한 때도 있었다.

여기 오포 대문에 부의회 때 논란되었던 이야기 한 토막을 들면, 부청 사환이 오포 책임자(일인)였는데 이 사환이 발포 몇 분 전에 변소에 가서 용변을 마치고 나왔을 때에는 이미 5분이 지난 때문에 이날 오포를 놓치고 말았던 것이다.

이것으로 의회에서 이사자(理事者)와 다투다가 오포 책임자의 증언가지 듣자고 떼를 부리는 의원도 있었는데 이것이 부회의의 똥 소동이라는 것이다.

<1871년에 시작된 동경의 오포(午砲) 홍보자료> 

 

 

65. 목장

 

마산 통정 5정목(通町 五丁目 / 현 장군동 5) 경전(한전)지점 후도(後道) 현 전도관 건너편에 촌상(村上)이라는 일인이 마산 목장이란 명칭으로 홀스타인 젖소 두 마리를 길러 우유를 일정 배달해 준 것이 1909년경이니 조선 사람들은 처음 보는 일이라 사람이 소젖을 먹을 수 있느냐 하여 모두들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조선인으로 유경(遊京)한 사람들도 점점 소젖을 먹게 되고 영업도 서서히 늘어나자 현재 자산동 동사 자리로 이전 확장되었다.

수년 후 벼락 광산왕 중산(中山) 모라는 자가 인수, 중포 대대행로(大隊行路) 근방으로 이전 영업 중 종전으로 광산 용원(傭員) 진재구가 관리하다가 다시 정 모에게 전매하였으나 우유에 관한 전문지식과 경험 부족 탓으로 완전히 실패하였다.<<<

 

 

 

 

Trackback 0 Comment 0
2015.12.21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62. 금융계의 공황 63. 각 관공서의 한동

62. 금융계의 공황(恐慌)

 

1927(소화2) 전국 금융가를 휩쓸던 모라토리엄(moratorium : 지불유예 또는 지불정지)은 금융가 뿐 아니라 국민생활에 일대 공황을 가지고 왔다.

때는 동녕 422일자로부터 대만은행을 제외한 전 일본 영토를 포함한 은행과 금융기관(조선의 금융조합도 동일)에 예치한 금액을 향후 3주일간, 512일가지 5백운 이상은 지불 유예하기로 긴급 칙령 96조로서 공포했던 것이다.

당시 마산 식은(殖銀)지점과 조선은행 출장소 문전에 게시한 공포문은 다음과 같다.

 

사법(私法)상 금전 채무의 지불 및 수형(手形) 등 권리보존 행위의 기한 연장을 하는 건이 바로 모라토리엄이라 해 놓고는

1. ··(··) 그 외의 공공단체의 채무지불.

2. 급료 및 임금의 지불.

3. 급료 및 임금을 지불하기 위하여 은행 예치금의 지불.

4. 그 외의 은행 예금의 지불로서 일일 5백원 이하에 대해서는 적용치 않음.

 

<모라토리엄 공포문을 붙였던 식산은행 마산지점 / 전 제일은행 마산지점 자리>

 

이상과 같이 지불 유예 또는 지불 제한이라는 선풍의 진원이 된 것은,

동경에 본점을 둔 대만은행이 스즈기(鈴木, 령목)이라는 개인 상사에 35천만원이라는 거금을 부당 대부하고 회수가 불능하여 파산에 직면하였던 터라, 이 구제의 일책으로서의 공포 시행하였던 것인데

이 격랑은 불과 수 년만에 정치문제에까지 비화하여 당시의 여당이던 정우회 전중(田中)내각이 도각(倒閣)되고 전중 총리는 자살까지 하였으며 철도상 소천(小川), 문부상 교본(橋本) 외 삼토(三土) 4, 5명의 거물급이 구속되는 등 일본 정계에 추한 파문을 던졌던 것이다.

이 지불유예 소동으로 인한 일본 상공계의 피해는 어느 정도였던가?

소화 3년호 조일신문(朝日新聞) 발행의 조일(朝日)연감을 인용하면

상공성(商工省)의 의촉(依囑)을 받은 동경실업조합연합회는 422일부터 3주간의 지불 정지의 실제적 방면을 조사한 것을 다시 동경상공회의소에서 엄밀히 재겸토한 결과 그 손해 견적액은 714904천원인데 내역은 다음과 같다.

1. 최인고감소(取引高減少)에 의한 확정액                              485,450,000

2. 상품상장(商品相場)하락에 의한 손해고                              215,177,000

3. 수형지불연기(手形支拂延期)에 의한 이불(利拂) 손실고         12,780,000

4. 매잔품(賣殘品)에 대한 보관료에 의한 손실고                         1,415,000

 

63. 각 관공서의 한동

 

1935(소화10) 한여름 동안 전국 각 관공서에 토요일이 아니라도 평소 출근일은 정오 시보를 알리면 한동이라 하여 일제히 퇴근, 각기 취미에 따라 행동하게 되므로 공무원들을 기쁘게 한 일이 있었다.

한동이란 말은 일본말 반()오란다(네덜란드의 일본식 표현)말인 과 합해서 반휴일(半休日)이란 뜻인데 원래 오란다어 존다그(Zondag)라는 것은 휴일이라는 뜻인데 일본인들은 이것을 돈다그로 발음을 와전해온 것이다.

그들 발음대로 전휴일을 반휴일이라 하기 위하여 이라한 것이다. 그들 말대로 한돈을 시행한 후의 사세(事勢) 능률이 매우 신속하고 청내 분위기가 명랑할 뿐 아니라 오후의 피로가 한결 줄어지고 건강에 좋은 영향이 있었다고 하나 그 후로 전쟁 준비 관계였던지 중단되고 말았다.

* 부기 ; ‘한돈중에 사무계통은 정오까지 집무하고 운전수는 오전과 오후 교대로 근무하였다.<<<

 

 

 

 

 

Trackback 0 Comment 0
공간과 건축의 궤적 - 창원 성산구 대원동 '꿈에그린' 재건축 터의 역사 - 3

1. 시작하는 글 2. 주거의 변화(대원2구역에 아파트가 들어서기까지) - 2 창원 신도시에 주거용 건물이 본격적으로 건설된 시기는 1980년대였다. 대부분 단독주택으로 민간사업자들이 주도한 조적조 2층의 철근콘크리트 구조였으..

공간과 건축의 궤적 - 창원 성산구 대원동 '꿈에그린' 재건축 터의 역사 - 2

1. 시작하는 글 2. 주거의 변화(대원2구역에 아파트가 들어서기까지) - 1 수혈주거로 시작된 인간의 거주양식이 드디어 아파트라는 형식에까지 도달했다. 생활에 필요한 내외조건의 변화에 따라 인간은 달라졌고 인간의 삶을 담았던..

공간과 건축의 궤적 - 창원 성산구 대원동  '꿈에그린'  재건축 터의 역사 - 1

<이번 포스팅은 창원 의창구 대원동에 재건축 중인 '꿈에그린' 아파트 부지(아래 그림의 붉은 밑줄친 부지)에 존재했던 현대사원아파트를 비롯한 여러 아파트들에 대한 내용이다. '마을흔적'을 남기기 위해 정리했던 글이다.> 목차..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8

Ⅳ. 맺음말 이 글에서 우리는 1960년 3월 15일 마산에서 일어난 1차 시위에 참가한 하상칠이라는 특정 개인의 경험에서 도출된 다음 두 가지 의문에 답하고자 노력했다. 하나는 시위 참가 동기에 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오..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7

1. 그는 왜 시위에 직접 참가했던가 2. 그는 왜 그토록 오랫동안 침묵했던 것일까 1) 보복 공포와 빨갱이 트라우마 2) 증언 결심 동기 하상칠은 그동안 증언을 하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 “그날 밤 내 혼자만 싸웠던 것도 아니..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6

1. 그는 왜 시위에 직접 참가했던가 2. 그는 왜 그토록 오랫동안 침묵했던 것일까 하상칠의 증언에서 품게 되는 두 번째 의문은 그는 왜 그토록 오랫동안 시위 참가 사실을 비밀로 유지해왔는지 그리고 50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증..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5

1. 그는 왜 시위에 직접 참가했던가 1) 사회적 요인 2) 개인적 요인 동일한 사회적 요인이 주어져 있다 해도 모든 시민이 동일한 반응을 하는 것은 아니다. 저항심이 강하든 정의감이 투철하든 또는 사회적 불만이 가득하든 모두..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4

Ⅲ. 얼음장수의 미스터리 3․15의거 역시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일어났던 다른 대규모 시민항쟁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분석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기존 분석은 대부분 거시 사회사 분석으로서 항쟁 참가자들의 정의감이나 불만이 저..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3

Ⅱ. 얼음장수의 정체, 증언 및 평가 2. 녹취와 증언록 다음은 하상칠이 2010년 7월 21일 14시 3 15의거기념사업회 회의실에서 당시 백한기 회장 앞에서 2시간여에 걸쳐 진술한 증언 녹취록을 풀어 그해 말 동 사업회에서..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2

Ⅱ. 얼음장수의 정체, 증언 및 평가 1. 연구 대상자 프로필 (이 부분은 연구 대상자가 필자의 장인이어서 평소 필자가 그에게 들어서 알고 있는 사항과 그의 사망 후 필자가 이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후 그의 가족, 일가, 지인..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1

이 글은 1960년 3․15의거 당일 야간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가했던 한 개인의 증언을 바탕으로 그의 개인사를 하나의 창으로 삼아 역사적 사건을 재조명한 경남대학교 경제금융학과 서익진 교수의 논문이다. 연구는 사적 기록이나 증..

걸작 - 이집트 룩소르 구르나 마을 - 4

구르나 마을이야기 - 2 《극장》 극장은 아름다운 내부공간과 무대를 가지고 있었다. 햇빛을 가리기 위해 담쟁이가 덥혀있었다는 객석 회랑 목조 파고라 위의 담쟁이는 이미 찾아볼 수 없었지만 흙으로 빚어진 구조물은 모두 원형대로 ..

걸작 - 이집트 룩소르 구르나 마을 - 3

구르나 마을 이야기 - 1 일행이 나일강변에 자리한 경관 좋은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던 오후. 안내자와 함께 조그만 배를 타고 나일강을 건너 구르나 마을로 향했다. 구르나 마을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현지 안내자 덕분이었다. 그..

걸작 - 이집트 룩소르 구르나 마을 - 2

위대한 건축가 하싼 화티(Hassan Fathy) - 2 하싼 화티가 구르나 마을을 건설할 1940년대 중반, 그 당시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던 이집트는 서양식 건축이 판을 치고 전통적인 이집트 양식의 건물들은 사라져가고..

걸작 - 이집트 룩소르 구르나 마을 - 1

위대한 건축가 하싼 화티(Hassan Fathy) - 1 (이 글은 이집트 여행 중 우연히 만났던 하싼 화티의 구르나 마을 경험담이다. 오래 전 일이다. 지금 생각해도 그 우연은 내게 축복이었다. 울렁이는 감격으로 구르나를 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