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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6.10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165) - 강점제3시기

이번 회부터는 「觀光の馬山」이라는 아래 리플렛(leaflet) 속에 들어 있는 사진들을 소개하겠습니다.

 

 

이 리플렛과 리플렛 속에 들어 있는 마산 지도는 이미 포스팅한 바 있습니다만 지도의 아래위에 실린 사진은 처음 소개합니다.

2012/11/0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4) - 강점제3시기

2013/01/0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43) - 강점제3시기

 

이 리플렛은 1937년에 제작 발행되었습니다. 일본관광객 유치용 마산 홍보 혹은 마산을 방문한 일본인들에게 마산 도시를 안내하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된 리플렛입니다.

「觀光の馬山」이 발간된 1937년은 만주사변(1931년)에 이어 일본군부가 중국대륙을 삼키기 위해 중일전쟁을 일으킨 해로 일본 제국주의 세력이 극성을 부리던 시기였습니다.

이 때 한국은 그들의 전쟁수행을 지원하는 대륙전진 병참기지로서의 역할이 주어졌기 때문에 그에 맞춘 산업구조의 군사적 개편이 진행되었습니다. 따라서 일제의 식민지배는 강압폭력정책으로 치달았고 그 결과 우리의 사회경제적 상황은 최악으로 변해갔습니다.  

「觀光の馬山」은 이런 내외적 상황, 곧 밖으로는 식민지 영토를 늘리기 위한 침략전쟁을 수행하면서, 안으로는 식민지배정책을 점점 강화해나가던 시기에 제작되었습니다.

제작 목적은 일본인들의 마산관광을 유도하고 마산을 방문한 일본인들에게 마산의 도시상황은 물론 길안내 · 역사 · 문화 · 명승고적까지 자세히 소개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1899년 개항 이후 마산에 정착하기 시작한 일본인들은 1930년경에 이르러 행정 산업 문화 교육 등 마산사회의 모든 분야를 지배하였습니다. 따라서 자신들의 힘으로 건설한 근대적 도시 마산은 일본인들의 자부심을 만족시켜 줄만한 도시였습니다.

「觀光の馬山」제작은 이런 배경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 점에서 「觀光の馬山」은 한국 땅이 완전히 일본 땅으로 변하였음을 보여주는 자료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 리플렛의 잔존 매수는 극히 제한적입니다. 그 중 1매를 시인이자 불휘기획 대표인 우무석 선생이 소장하고 있습니다. 마산역장을 지낸 외조부 문판개 선생의 유품을 우무석 선생이 보관하고 있습니다. 흠이 없지는 않지만 보관상태가 비교적 좋습니다.

이 리플렛1937년 5월 5일 인쇄하여 5월 10일자로 馬山名勝古蹟保存會(마산명승고적보존회)에서 발행하여 비매품으로 보급하였으며 편찬자는 우에하라 사카에(上原榮), 저작권자 겸 인쇄자는 오야마 키치조(小山吉三), 인쇄소는 日本名所圖繪社(일본명소도회사)입니다. 우에하라 사카에(上原榮)은 마산공립보통학교(현 성호초등학교) 교장이었습니다.

이 리플렛은 세로16.5㎝ 가로10.0㎝의 봉투와 그 속에 마산을 소개하는 안내서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봉투는 접어서 끼우는 형태로 만들어졌습니다. 속의 안내서는 접어서 채색봉투에 넣도록 제작되었으며 안내서의 크기는 세로30.0㎝ 가로45.0㎝입니다.

안내서 앞면에는 채색판으로 「馬山」이라는 제목의 지도와 함께 상하단에 당시 마산의 중요한 관공서 · 학교 · 금융기관 · 기업 등을 비롯하여 유원지와 명승고적의 흑백사진 55매가 인쇄되어 있으며 뒷면에는 「馬山案內」라는 제목으로 마산의 도시상황과 통계 등이 인쇄되어 있습니다.

중앙부 좌단에는 진해요항부와 마산헌병대의 검열을 받았다는 표시가 있고 검열일로 昭和12년(1937년)1월30일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앞으로 소개할 사진은 안내서 앞면에 실린 55매의 사진입니다.

안내서의 뒷면에는 「馬山案內」라는 제목으로 마산의 도시상황과 통계 등이 인쇄되어 있는데 내용은 ‘마산안내’와 ‘명승고적’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마산안내’ 부분에는 연혁 · 위치 · 풍경과 기후 · 교통 · 산업(농업 · 공업 · 상업 · 수산업 · 무역상) · 교육 · 종교 · 위생 · 금융 · 관공서 · 호구 등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호구부분에는 1936년 말 기준 마산의 인구는 일본인 5,427명 한국인 25,529명 중국인 47명 기타외국인 9명으로 총 31,012명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명승고적’ 부분에는 몽고정 · 마산성지 · 합포현성지 · 정동행성지 · 율구미 · 월영대 · 마산신사 · 마산공원 · 근위빈(近衛濱)공원 · 추산공원 · 산제당 · 저도 · 벚꽃 · 해수욕장 · 완월폭포 · 봉암온천 · 자안지장(子安地藏) · 관해정 · 마금산온천 등에 대한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이번 포스팅에서는 안내서 전체 사진만 소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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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27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4) - 강점제3시기

<강점 제3시기 마산의 무역>

무역량을 일일이 열거하는 것은 별의미가 없는 것 같아 빼다보니 글이 짧습니다.

1931년 만주사변 후 일제가 중국대륙으로 진출하면서 병참기지 기능을 맡았던 한국의 역할은 마산의 무역량을 늘이는데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1930년대 마산항의 무역은 그 구조상 1920년대와 별 차이가 없이 수․이입에 비해 수․이출의 금액이 훨씬 많았습니다. 전체금액은 1930년의 730만 엔에서 1939년에는 1,770만 엔으로 두 배 이상 증가하였습니다.

하지만 1930년대 이후 마산항의 무역 증대는 정상적인 무역이라기보다는 일본의 침략전쟁 수행에 필요한 제반물자의 반․출입 증가에 지나지 않았던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일제하 마산항의 수․이출, 특히 미곡의 일본 반출량 증가는 우리나라 국민들에게 굶주림을 강요한 결과였으며 전쟁 중에 이루어진 기아수출이었습니다.

             (사진은 일본으로 수출하기 위해 쌀가마를 야적해 놓은 인천항입니다)

1940년대에도 1930년대와 비슷한 양상이었습니다. 1941년 일제에 의해 일어난 소위 태평양전쟁 이후 전쟁에 필요한 식량과 군수품 비축을 위해 한국산 미곡의 반출은 더욱 많아졌고, 대용식량으로 만주산 조와 대두 등을 수입하였습니다.

특히 태평양전쟁 중 한국인들은 양질의 쌀을 빼앗긴 대신 일제가 수입한 만주산 깻묵으로 식량을 대신하는 고초를 겪기도 했습니다.

바야흐로 전쟁의 광풍이 불기 시작한 강점제3시기는 전시물자 부족문제가 심각했습니다. 물자난을 해결하기 위해 공출이란 이름으로 한국 가정의 식기는 물론 제기까지, 심지어 교회나 사찰의 종에 이르기까지 쇠로 만든 것들을 모조리 약탈해가는 악행을 저질렀습니다.

마산에서 일본이나 중국 등지로 각종 수출품을 실어낸 곳은 지금의 제1부두, 제2부두, 중앙부두였습니다. 세 항만 모두 일제가 건설했는데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습니다.

지금의 위성사진에서 세 부두 위치를 확인해 볼까요?

다음 사진은 해방 후 찍은 항공사진인데, 바다 쪽으로 툭 나온 부두가 제2부두, 왼쪽으로 이어지는 부분이 중앙부두입니다.<<<

 

  

2012/07/3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0) - 강점제3시기

2012/08/0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1) - 강점제3시기

2012/08/1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2) - 강점제3시기

2012/08/2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3) - 강점제3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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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8.06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1) - 강점제3시기

<한반도 최초의 도시계획>

마산은 1920년대부터 시작된 산업구조 변화가 계속되는 가운데 30년대에 이르러 전쟁으로 인한 군수물품 공급창으로서의 기능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들이 원인이 되어 해안 전역에 걸쳐 대규모 매립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행되었습니다.

그런가하면 1920년대 중반부터 형성되기 시작한 중앙마산이 완성됨으로써 이전까지 공간적으로 나누어져 있던 두 도시가 하나의 도시로 연담화되었으며, 원마산은 철도의 발달과 인구의 증가로 범역이 크게 확산되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도시계획법은 1934년 6월 20일자로 만들어진「조선시가지계획령」입니다. 이보다 앞서 1920년에 시가지계획령을 입안한 일이 있으나 시기상조란 이유로 폐기되어 버렸습니다.

도시계획과 관련한 법제 중 가장 이른 것은 한일병합(1910) 이전에 개별 건축물을 규제하는 장치로 만든「건축규칙」라고 전해집니다. 그러나 이 규칙이 만들어진 정확한 시기와 내용은 알려져 있지 않습니다.

구체적인 내용이 담긴 도시 관련정책으로는 1912년에 조선총독부가 시달한「시구개정훈령」으로, 시가지 내의 도로․교량․하천 등의 관리를 위한 내용으로 시행된 바 있습니다.

1913년에는「시가지건축취체규칙」이 제정되어 개별 건축물의 방화․위생․건축선 등 건축 경찰적 의미의 규제가 도입되기도 했습니다.

이 두 가지 제도가 근대화 여명기에 있었던 우리나라 도시 관련 정책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도시정책은 최소한의 도시 관리에 그친 정책이었으며, 대규모의 도시개조와 개발은 주로 군사적․경제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초법적인 식민지 통치행위의 일환으로 시행되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1930년대 초까지 지속되다가 「조선시가지계획령」이 제정되었던 것입니다.

이 법은 크게 다섯 가지의 내용을 담고 있는데 ① 도시계획의 수립 ② 도시계획사업의 집행 ③ 지역․지구의 지정 ④ 건축제한 ⑤ 구획정리사업에 관한 사항이 그것입니다.

말하자면 이 계획령은 오늘날의 기준으로 본다면 도시계획․건축․도시개발을 포괄하는 총체적인 도시 관련 법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시기적으로는「동경시구개정조례(1887)」보다 47년, 일본의 도시계획법(1919)보다는 15년 늦게 제정되었습니다.

이보다 앞선 1921년에 서울․부산․대구․평양 등 중요 도시에 대하여는 도시계획실시를 전제로 한 도시계획조사가 진행된 바 있지만 구체적으로 시행되기는 이것이 처음이었습니다.

「조선시가지계획령」이 최초로 적용된 도시는 나진이었습니다.

서울을 비롯한 도청소재지는 이보다 2년 뒤인 1936년부터 적용하였으며 해방되기까지 전국의 총 42개 지역의 도시계획을 이 계획령으로 수립하였습니다.

「조선시가지계획령」 제정의 직접적인 동기는 나진 개발의 긴급성과 당시 전국 도시인구의 급격한 증가 현상이었습니다.

나진 개발의 긴급성이란 다음과 같습니다.

만주사변(1931)의 결과로 일본에게 만주국이라는 괴뢰국가가 생긴 것은 1932년 3월 1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만주와 일본을 연결하는 경제수송로로 일본본토-해로-나진항-만주국내 도문-길림-신경(현재의 장춘) 노선이 결정되었습니다. 1931년 말 현재의 인구 4,520명이었던 빈한한 어촌 나진을 갑자기 이렇게 결정하자 1931년 경, 평당 12-13전 하던 땅값이 1932년경에는 40원 이상 급등하였습니다. 이런 토지투기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총독부 당무자들이 땅을 사지 않고 계획적으로 조성하는 방법, 즉 토지구획정리사업으로 시가지를 조성할 계획을 세웠던 것입니다. 이러한 일련의 상황을 두고 나진 개발의 긴급성이라 합니다.

이런 사정 때문에 나진의 땅값이 얼마나 요동을 쳤던지, 1932년 11월 13일 동아일보 나진 르포기사에 나진 일대 부동산에 투자하여 수백배의 차익을 남긴 동일상회 두취 김기덕에 대한 기사도 실려 있을 정도입니다.

「조선시가지계획령」은 기존 시가지의 개량보다는 신시가지의 창설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에 한반도 내 많은 신시가지가 이 계획령에 의해 조성되었습니다.

하지만 긴급히 시행한 까닭에 여러 가지 문제도 야기되었습니다.

도시계획법과 건축법의 미 분리, 그리고 경험의 미숙 등으로 인해 오히려 무질서한 시가화를 유발하기도 했습니다.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조선시가지계획령」의 집행으로 형성된 전국 신시가지의 형태는 기존 시가지와의 관계에 따라 ① 구 시가지의 정비확장형(서울․평양 등) ② 신․구 시가지의 분리입지형(부산․목포 등) ③ 신도시형(신의주․진해 등)의 세 유형으로 구분하기도 합니다.

이 가운데서 ①의 유형은 조선시대에 이미 상당한 규모를 갖추고 있던 도시들로서 기존도로망의 확장․포장․직선화가 도시계획의 중요한 실적이었으며, 기타의 도시에서는 일본사람들의 거주지를 중심으로 한 신시가지의 형성이 중요한 도시공간의 변화였습니다.

이 도시 마산의 경우는 ②의 유형에 속한다고 볼 수 있습니다.<<<

 

 

2012/07/3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0) - 강점제3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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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30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0) - 강점제3시기

오늘부터는 1930년부터 1945까지 15년간을 올리겠습니다.

'일제강점 제3시기'로 분류되는 이 시기의 마산은 어떤 모습이었으며 어떤 변화를 겪었을까요?

 

<일제의 병참기지가 된 한반도>

이 시기는 일제가 대륙침략의 야욕을 드러낸 1931년 만주사변으로부터 일제가 패망한 1945년까지로 전쟁수행을 위해 한국을 병참기지화한 시기입니다.

1929년 10월 미국에서 발발한 경제공황은 자본주의 세계 전반에 파급된 대공황이었습니다. 대미무역에 상당히 의존하고 있던 일본 경제도 여기에 휩쓸리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공업생산이 위축되고 임금체불 노동자의 대량 해고로 노사 간의 갈등과 대립이 격화되었고, 그 여파가 농촌에까지 이어져 몰락하는 농가가 속출했습니다.

대내외적으로 심각한 위기에 직면한 일본자본주의는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1931년 만주에 대해 무력 침공을 감행하게 되며, 만주 침공 후에는 중국본토시장을 둘러 싼 열강의 대립으로 1937년 7월 중일전쟁을 일으키고 드디어 1941년 태평양전쟁으로까지 확대시킵니다.

일본의 독점자본은 1931년 만주 침공시기부터 중일전쟁 전․후기까지 전쟁 수행에 유리한 입지조건을 갖춘 한국에 급속히 진출하여 광물자원의 약탈적 개발과 군수공업을 이식하였습니다.

이로 인해 한국경제는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으며 전시경제체제하에「대륙전진 병참기지로서의 한반도」역할이 강조되어 산업구조의 군사적 개편이 진행되었습니다.

식민지 권력과 유착한 일본 독점자본의 이식은 일본제국주의가 절실히 요구하는 화학공업․금속공업․광업 등의 군수산업부문에 집중되었고, 그 결과 한국에는 급속하게 대형 공업시설이 들어왔습니다.

이 때 한국에 진출한 일본독점자본은 당시 일본 3대 재벌이었던 三井(미쯔이)․三菱(미쯔비시)․佐友(수미모토)를 비롯해 野口(노구치)․日鐵(닛데츠)․東拓(도다쿠)․伊藤(이토)․片倉(가다쿠라) 등의 중견재벌이었습니다. 이들은 주로 화학공업․금속공업․광업 등의 군수산업에 집중하였습니다.

아래 사진은 당시로서는 엄청난 금액인 5억 엔을 들여 1944년에 준공한 압록강 수풍댐 수력발전소입니다.

두 번째 사진은 1942년 준공한 흥남 조선질소비료공장 전경이며,

마지막 사진은 대전에 있었던 군시제사공장(郡是製絲工場)입니다. 부지면적 26,750 건물 5,085평 제사기 400대, 종업원 약 600여명, 연간 조업일수 344일로 1930년 기준, 한국에서 다섯 번째로 큰 제사공장이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일제는 1931년 일제의 만주침략 이후 만주 및 중국의 철․석탄 등의 지하 자원과 콩을 비롯한 농산물과 각종 군수물자의 수송 등 전시수송력 증강을 위해 한국의 철도와 항만건설에 주력하였습니다.

남북 1,000㎞에 달하는 부산-신의주의 대륙간선(大陸幹線)의 복선화가 이 시기에 실현되어, 1942년에는 철도 총 연장이 약 4,536㎞로 1919년의 2,197㎞ 보다 2배 이상 늘어났습니다.

뿐만 아니라 1876년 개항과 동시에 각 개항지에 그들의 우체국을 설치했던 한국의 통신수단을 정비하고 그 독점적 지배도 추진하였습니다. 이러한 통신지배는 경제적 수탈뿐만 아니라 군사․정치적 지배, 특히 그들의 소위 치안 유지에 필수적인 것이었다.

마산도 개항 때문에 체신의 역사가 매우 빨랐습니다. 개항 6개월 후인 1899년 11월 4일 당시의 행정 구역으로 창원시 외서면 중성리(현 마산합포구 중성동)에 부산우편전신국 마산출장소가 발족하여 12일 후인 11월 16일 사무를 개시하면서 우편과 일어문 전보를 취급했으며, 이듬해인 1900년 4월 15일 마산우편국으로 승격되어 6월 1일부터 업무를 시작했습니다.

1937년 중일전쟁이 개시되고 다시 태평양전쟁으로 전쟁이 확산된 식민지 후기에는 「대륙전진기지로서의 한반도」의 역할이 더욱 강조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한반도는 전시 경제체제가 한층 더 강화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일본자본의 한국진출이 보다 활발해지고 한국 내의 공업도 급속히 발전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산업발전에 필요한 원료․자재․노동력은 일본인 소유의 대형군수공장으로 집중된 반면, 한국 민족계 산업자본에 대해서는 오히려 통제와 억압이 가중되어 대부분의 한국인 중소기업은 쇠퇴해 갔습니다.

이런 변화 속에서 일제의 식민지배는 강압 폭력정책으로 치닫고 국내의 사회 경제적 상황도 이에 맞물려 최악의 상태로 변했습니다. 또한 기반시설을 갖추지 못한 도시에 피폐한 농촌에서 유입된 이농인구 때문에 도시문제는 점점 더 심각하게 되었습니다.

줄여 말하면, 한국내의 도시들은 ① 일본자본주의 도시의 상품시장 및 유휴자본의 투자대상지 ② 군사적 목적을 위한 세력 거점지 ③ 식민지 내 기생적 매판세력의 중심지 ④ 식량 및 원료집산지라는 성격을 동시에 띠고 있었습니다.

한반도 전체가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진 15년 간, 마산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직물, 술, 부식 등 군수품을 보급하기 위해 공장들이 들어섰고, 마산에서 생산된 물자를 전장으로 나르기 위한 부두가 건설되었습니다.

아래 그림처럼 지금도 돝섬으로 연결되는 마산여객터미널 일대의 제1부두, 제2부두, 중앙부두가 바로 이 시기에 건설된 것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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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02 01:00

술과 꽃의 도시



《유장근교수의「도시탐방대」에 참여해, 한 때 전국적으로 유명했던 마산의 술 공장과 벚꽃 휘날렸던 창원천을 둘러보니 일제기 ‘술과 꽃의 도시’로 명성이 높았던 ‘그 옛날 마산’이 생각나 이 글을 포스팅한다


특정한 도시를 한두 가지 단어로 정확히 규정 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느 도시건 그 도시 특유의 자연조건과 문화조건을 이용해 한마디로 규정하기도 한다.
부산하면 항구, 진해하면 벚꽃, 춘천하면 호수 등과 같은 의미다.
이런 관점에서 일제강점기였던 1930년대 경의 마산은 ‘술과 꽃의 도시’였다.


- 술의 도시 마산 -

개항 직후인 1904년 최초로 아즈마(東)양조장이 설립된 이후 꾸준히 성장했던 마산의 양조산업은 1928년에 부산을 제치고 이윽고 국내 지역별 주조생산량에서 1위를 차지하였다.
현 마산의 무학소주도 일제기였던 1929년 설립한 소화(昭和)주류주식회사에 그 뿌리가 닿아, 일전에 창립80주년 기념행사를 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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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9년에 설립된 소화주류주식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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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년대 마산의 일본인 양조장>

당시 주조방식을 생각해 보면, 술의 질은 물맛과 기후 그리고 양질의 쌀이라는 세 가지로 결정되었을 텐데 마산은 그 중 하나도 모자람이 없는 최상의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오래전부터 일본에는 각 지역마다 유명한 전통주가 많았다.
그 중 일본 효고켄(兵庫縣)의 나다(灘)지방에는 14세기경에 시작된 최고급술 나다자케(灘酒)가 있었다.
명실 공히 당시 일본 최고(最高) 최고(最古)의 술이었다」


1931년,
우리로서는 기억도 하기 싫은 만주사변을 일제가 일으켰다.
전장에 나섰던 조선과 일본의 젊은이들을 위해 공급된 술은 주로 조선 땅에서 담당했고, 조선 각지에서 생산되던 모든 술들이 공급되었다.
그런데
그 많은 술들 중 마산 술의 향과 맛이 최고라면서 마산 술을 ‘조선의 나다자케’라고 부르면서 즐겨마셨다는 기록이 있다.
마산 술이 만주에 까지 명성이 높았던 것이다.                  


‘술의 도시’라는 말을 이상하게 생각말기 바란다.
그것은 곧 마산이 맑은 물의 도시요, 기후가 좋은 도시요, 좋은 쌀이 생산되는 비옥한 땅이라는 뜻이다.
한 때 마산이 그렇게도 살기 좋은 도시였다는 자랑스러운 말이다.


- 꽃의 도시 마산 -

‘꽃의 도시’는 무슨 말인가.

그 옛날,
마산의 봄은 지금의 문신미술관 부근 환주산 일대를 비롯해 시내 전역에 벚나무가 만개하여 장관을 이루었다.
흔히 일본인을 통해 이 땅에 벚나무가 들어왔다는 속설이 있지만 그 이전부터 마산에는 벚나무가 많았다.

시내의 가로수는 경술국치 이전인 1908년에 마산이사청(현재 의미로는 시청)에서 심었는데 그 중 창원천변의 벚꽃이 가장 아름다웠다고 한다.
창원천은 대곡산에서 내려오는 하천으로 전 마산시장 관사 앞을 흐르는 하천이다.
현재 문화동인 이 일대의 지명을 사쿠라마찌(櫻町, 벚나무동네)라 불렀으니 벚나무의 위세를 알만하지 않은가.

‘술과 꽃의 도시’ 마산의 특징을 잘 나타내주는 자료로 1937년 마산부가 만든 관광홍보용 리플렛 「관광 마산」의 표지가 있다.

거기에는 마산을 둘러싸고 있는 무학산과 마산앞바다, 그 가운데 두둥실 떠있는 돝섬, 그리고 마산만을 통해 일본을 오가던 큰 배들이 그려져 있다.
바로 그 옆에 명주(銘酒)라고 적힌 일본식 술통과 함께 흐드러지게 만개한 벚꽃을 묘사하여 마치 마산을 꿈의 이상향처럼 소개하고 있다.


                    <1937년 마산부가 제작한 리플렛 '관광의 마산'>


일제기 마산에서 활동을 많이 한 일본지식인 추방사랑(諏方史郞)은 당시 마산의 술과 꽃을 찬양하며 노래하던 시구(詩句)를 기록으로 남겼다. 일본인들이 부른 노래라 달갑지는 않으나 당시 마산의 분위기를 알 수 있어 소개한다. 번역은 경남대 배대화교수가 하였다.

꽃의 마산이냐 마산의 꽃이냐            花の馬山か 馬山の花か
가을 깊어가는 달의 포구                  秋は冱えたる 月の浦

술의 마산이냐 마산의 술이냐            酒の馬山か 馬山の酒か

꽃도 술술 피어나고 물은 용솟음치네  花もさけさけ 水はこんこん


                            <1929년경 창원천가에 만개한 벚나무>

『마산현세록』이라고, 일본인이 쓴 책이 있다.
1929년에 간행되었는데 그 목차에「술의 마산」과 「꽃의 마산」이라는 항목이 들어있어 ‘마산의 술과 꽃’에 대해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 책에 의하면,
당시 창원천 벚꽃은 4월 7일경부터 피기 시작하여 10일-11일에 70% 개화(開花)하고 13일-14일부터 만개하여 17일-18일경까지가 절정이었다.
특히 창원천의 맑은 물 위에 떨어져 흘러내려가는 낙화가 일품이었다고 적혀있다.

이 절경을 구경하기 위해 매년 4월 10일을 전후해 부산 대구 대전 서울 등지에서 사람들이 몰려들어 임시열차까지 운행되었다고 한다.
1930년대 마산의 봄은 전국 각지에서 몰려드는 관광객들로 시내 전역이 붐볐다.
진해 벚꽃보다 수 십 년 전의 일이다.

맑은 물, 맑은 공기, 아름다운경치.
이 도시의 자랑은 영원히 지나가버린 한 순간의 우연이었을까?
다시 되돌릴 수는 없을까?
정말 그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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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11.03 20:19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잘 읽었습니다.

    • 허정도 2009.11.03 23:21 신고 address edit & del

      방문 감사합니다

  2. 노상완 2010.03.22 20:56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그곳이 창원천이라는 걸 오늘 알았습니다...하천 상류에 있는 다리가 月見교 경교 월남교
    마산교 순으로 되어 있던데...(중간에 다리가 하나 더 있나? )

    지금 하천 주변의 벚꽃은 너무 초라하게 생명을 이어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도심의 쌈지터를 많이 사랑하게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허정도 2010.03.23 08:31 신고 address edit & del

      반갑습니다.
      창원천 외에 대곡천 등 명칭이 몇개 더 있었습니다.

  3. 우의영 2012.06.10 23:33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간장도 유명하죠??

    • 허정도 2012.06.11 14:17 신고 address edit & del

      그럼요, 간장도 유명했습니다. 지금의 몽고간장도 일본인이 경영하던 야마다장유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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