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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14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123. 기자 피살사건, 124 - '비(秘)'를 알리는 경무국

123. 기자 피살사건

 

 

현역 신문지국 기자가 폭한에게 피살되었다.

 

피해자는 당시 조선총독부 어용지인 매일신보 마산지국 기자 박성화(朴性和)이며 가해자는 마산시 오동동 이성화의 자 이 모()로서

 

가해자 이()가 저지른 전날의 비행이 전기(前記) 신문에 보도된 일이 있었는데 이것은 반드시 동 지국 기자 박성화의 취재 송고에 의한 것으로 그릇 판단한 가해자 이(), 항상 박에 대한 살의를 품고 오던 중 193510월 모 일 밤 11시경 시내 서성동 동사무소 옆에서 그를 만나자 근처 술집 식도를 들고 나와 다짜고짜로 하복부를 두세 번 찔러 병원에 옮겨 놓은 즉시 숨지게 한 것이다.

 

박 기자는 피살되던 다음날 동아일보 지국으로 옮기게 되어 있었던 것인데, 그는 평소에 형평운동(衡平運動)에 자진 투신하여 백정계급에 대한 일반의 차별 대우에 감연히 궐기하여 투쟁한 바 있었으며, 남들의 호의와 존경을 받던 사람이었으나 가해자의 그릇된 판단으로 인하여 참혹한 피해를 입은 것이다.

 

가해자의 살인 공판에서는 관여 검사로부터 5년 징역의 구형을 받았으나 판사들은 방청인들의 분위기를 참작하였음인지 불과 4, 5분간의 합의로써 7년 징역의 선고판결을 내렸었다.

 

현역 신문기자가 피살된 것은 마산으로서는 처음 생긴 사건이었다.

 

 

 

 

124. ‘()’를 알리는 경무국

 

 

총독부 당국은 국내외에서 발생하는 독립운동이나 사회운동에 관한 기사를 관제(管制)하는데 심혈을 경주하는 것은 천하가 주지하던 일이다.

 

중앙 각 신문은 사건 발생한 정보를 보도하므로 경무 당국은 기휘(忌諱)에 저촉이니 무어니 하여 해당 기사를 삭제하는 일방 행여나 하여 각지 주재소에 지급전화로 미삭제의 신문 단속에 약기(躍記)하던 그때는 경비 전화 시설이 없는 때문에 전화요금이 막대하다고 했다.

 

그런데 중앙지에 대해서는 삭제로서 안도하는 모양으로 지방지들은 중대사건을 전연 감지하지 못하고 있는데 으레 경고하는 ()’가 프린트로서 전달된다.

 

1. 제등(齊藤) 총독이 압록강 유역을 시찰 중 대안(對岸)에서 부정선인(독립군) 김일성(金日星)이 총격을 가해 왔다.

 

2. 의열단의 김지섭(金祉燮)이 황송하옵게도 이중교(二重橋)를 습격, 황거(皇居)를 향해 돌진코자 하다 수비 경관에 피체(被逮) 운운.

 

예3. 신의주에서 김유정(친일) 변호사에 폭행을 가한 자의 가택 수색을 한 결과 임원근 일파의 비밀단체인 공산당 사건이 발로(發露)됐다.

 

4. 충북 충주에서 요로(要路) 인물 암살, 관공서 폭파 등을 음모한 무정부주의자 등 흑기(黑旗) 연맹이 관련자 일방 타진 운운하면서, 이상 경고함 등으로 지방에 앉아서 중대사건이 돌발한 것을 알게 되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 / 해방 후 경찰청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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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11.18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88) - 강점제3시기

도시와 관련한 두 가지 기사입니다.

10. 1938년 7월 21일자 매일신보 6면입니다.

기사의 제목은 馬山午東洞에 夜市」이며 기사는 마산부 오동동에 있는 번영회 주최의 납양야시(納凉夜市)는 작년부터 개시 하였던 바 금년에도 지난 17일부터 개시되었는데 첫 날부터 나온 사람이 무려 수천 명에 달하여 납량구역 오동동 일대에는 미증유의 잡담과 은성을 이루었고 주로 과일 도시 목공물 포목 십전균일품 등으로 또 값도 싸므로 성적이 양호하다고 한다」입니다.

1937년부터 개장된 오동동 야시장이야기인데 당시 오동동 모습을 짐작하게 해주는 기사입니다. 기사 중 납양야시(納凉夜市)는 '여름철 더위를 피해 시원한 밤에 열리는 시장'으로 이해할 수 있겠고, ‘은성을 이루었고…’는 요즈음 잘 사용하지 않는 언어로 ‘번화하고 풍성하였고…’라는 뜻입니다.

야시장이 열린 정확한 위치를 추정해 보겠습니다. 기사 아래 그림이 현재 오동동 거리가 나오는 위성사진입니다.

그림에서 노란 점이 표시된 도로는 이 신문보다 훨씬 전인 1920년대에 있었던 도로이고 붉은 색이 표시된 도로는 1937년 개통되었습니다. 기사에서 오동동 야시장이 1937년 시작되었다니 이 도로 개통 후인지 개통 전인지는 알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전체 도로구성을 보아 녹색표시가 된 오동동 네거리 주변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11. 1939년 7월 8일자 동아일보7면입니다.

기사의 제목은 「馬山驛前을 擴張 噴水公園設置」이며 기사는 「철도용지인 마산역전의 확장은 오래 전부터의 결정이었으나 사변관계로 지연되었다가 금번에는 확정되어 현재 역전의 건물 즉 상반여관(常盤旅館), 조선운송, 도전운송 등은 전부 확장에 희생될 것으로, 동 역전은 아스팔트로 면목을 일신할 것으로 더욱이 분수 소공원까지 설치될 것으로 여객과 시민에 일위안이 될 것이다」입니다.

지금은 없어진 마산중부경찰서 앞의 마산역 광장에 관한 기사입니다.

기사 아래 사진은 마산역 광장을 확장하기 전 모습입니다. 오른쪽 건물이 마산역인데 역 광장에 건물(상반여관, 조선운송, 도전운송 등으로 추정 / 사진의 왼쪽)이 있습니다. 이 건물들을 철거해내고 광장을 넓힌다는 기사입니다.

그 아래 사진은 1943년 다시 지은 마산역 건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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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류창현 2013.11.18 10:54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재밌게 잘읽었습니다.
    1939년 7월 8일 동아일보 기사 도입부에 흐릿해 잘안보이는 단어는 '결정'으로 확인되네요.
    <기사원문>
    http://newslibrary.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39070800209207004&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39-07-08&officeId=00020&pageNo=7&printNo=6422&publishType=00020

    • 허정도 2013.11.18 17:25 신고 address edit & del

      고맙네 ^^

2013.11.04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86) - 강점제3시기

도시변화와 관련된 기사 두 개 소개합니다.

6. 1935년 10월 22일자 매일신보 3면 기사입니다.

기사의 제목은 ‘舊馬山驛移築 用地買收完了’ 이며 기사 내용은경남 제2의 능률을 내고 있는 구마산역은 외관상 누추와 내용상 협애(狹隘) 및 이의 장래발전에 반(伴)하는 요충지대에 이축을 계획하고 그 동안 용지 매수에 열중 중이던 바 가격 평가가 원만히 되지 못하여 매수에 지장이 되어있던 바 근일에 이것이 호전되어 매수가 거의 완료된 모양이라 하며 가급적 금년 내 완성을 보게되도록 할 것이라 하며 완성 후는 구마산에 신위관(新偉觀)을 정(呈)하리라 한다’ 입니다.

지금의 육호광장 자리에 있었던 구마산 역은 이 신문 기사처럼 위치를 약간 옮겨온 자리입니다. 처음에 있었던 역도 비슷한 위치에 있었습니다만 역사(驛舍)가 오래되고 좁아서 더 넓게 역 터를 잡고 역사도 다시 짓기로 했다는 기사입니다.

구마산역은 철도 마산선이 개통된 1905년에는 없었습니다만 마산포 주민들의 요구에 의해 1910년 7월 5일 개설되었습니다. 개설 후 67년 간 사용하다가 1977년 12월 26일 지금의 마산역으로 마산역·구마산역·북마산역의 세역이 통합되면서 그 소임이 끝났습니다.

기사 아래 사진은 애당초 있었던 구마산역과 이전 후 지은 역입니다.

 

7. 다음은 1935년 12월 4일자 동아일보 5면 기사입니다.

제목은 ‘구마산공설시장’ 이며 기사 내용은 ‘구마산 공설시장의 상옥 개축 낙성식은 그 동안 공사도 끝났으므로 오는 5일 11시 동 공설시장에서 거행키로 되었다고 한다’ 입니다. 오는 5일은 1935년 12월 5일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구마산공설시장은 부정(富町, 현 부림동)공설시장이라고 불리기도 했던 현재의 부림시장을 말합니다.

이 시장은 1924년 9월에 개설되었고 주로 한국인들이 이용하였으며 간혹 일본 아낙들이 야채나 두부를 들고 나와 팔기도 했습니다. 평일에도 사람들이 많이 붐볐지만 특히 음력 5일과 10일에 열리는 5일장 때에는 인근 50리 안에서 모여드는 장꾼들과 고객들로 발디딜 틈이 없었다고 합니다.

시장건물은 5-9칸으로 된 3동의 벽돌건물과 여러 채의 함석지붕으로 된 바라크형 건물로 되어 있었는데 이 기사는 그 시장건물들을 개축했다는 기사입니다.

기사에서 말하는 상옥(上屋 / うわや 우와야)은 일본어에서 ‘역이나 부두에 있는 간이건물’이나 ‘벽체가 없이 기둥과 지붕만 있는 간이건물’을 말합니다. 신문기사에 나온 상옥(上屋)은 오래된 시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벽체 없이 기둥과 지붕만 건물’을 말하는 것 같습니다.

기사 아래 사진은 1937년 경 구마산공설시장(현재의 부림시장)의 모습입니다. 사람들 건너 편에 있는 건물이 기사의 건물 아닌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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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창동공화국 2013.11.10 09:28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교수님께서는 창원시의 노면전차 도시철도도입에 관하여 비판적인 입장인것으로 알고있습니다 저또한 그렇습니다. 꿈의도시라 불리는 "꾸리찌바"와 같이 원통형 버스정류장, 유니버셜디자인, 정류장선불시스템, 스크린도어등을통해 기존 버스승객의 편의제공이 먼저 확충되면서 대중교통이용의 수요자를 늘리는 방법에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 허정도 2013.11.12 10:24 신고 address edit & del

      각 도시의 조건이 달라 꾸리찌바 시스템을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을 겁니다만 큰 틀에서 보면 가장 적절한 시스템이라고 생각합니다.

2013.10.28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85) - 강점제3시기

오늘도 두 기사 소개합니다.

4. 1935년 4월 11일자 동아일보 기사로 마산의 교육현안에 대한 내용입니다.

기사의 제목은 ‘내 地方當面問題(지방당면문제)’로 내용은 두 가지입니다.

첫 번째 기사는 ‘高普設置問題(고보설치문제)’라는 제목으로 마산에 중등교육기관인 고등보통학교가 필요하다는 내용이며, 두 번째 기사는 ‘商校昇格問題(상교승격문제)’라는 제목으로 당시 3년제 을종학교로 1922년 개교한 마산상업학교(옛 마산상고, 현 용마고)를 5년제 10학급 갑종학교로 승격시키자는 겁니다.

첫 번째 주장인 고등보통학교 설립 문제는 이듬해인 1936년 4월 11일 마산공립중학교(현 마산고등학교 / 개교 당시 5년제 10학급)가 개교됨으로 이루어졌고, 두 번째 주장인 마산상업학교 승격문제는 1939년 5년제 10학급 갑종학교가 됨으로써 해결되었습니다.

신문기사 아래 사진은 마산고등학교 옛 교사이고 그 아래 사진은 상남동에 있었던 마산상업학교 옛 교사입니다.

5. 다음은 1935년 8월 9일자 매일신보 기사로 마산교도소 이전에 대한 내용입니다.

기사의 제목은 舊馬山市街住民 刑務所移轉渴望(구마산시가주민 형무소이전갈망)’ 이고 기사 내용은 ‘마산형무소는 구마산 시가의 중심지대에 있기 때문에 시가지의 발전상, 도시미관상, 자녀교육상 여러 가지 방면으로 그 영향됨이 많아 일반 부민은 이의 이전을 갈망하여 마지않던 중 최근에 와서 오동동주민 및 완월동 주민 등은 대표로 음재식 명도석씨 등을 선정하고 연서진정서를 제출한 후 당국에 이에 대한 대책을 심심히 주목하고 있다’ 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형무소는 지금의 삼성생명빌딩과 가톨릭 마산교구청 및 옛 한국은행 경남본부 터에 있었습니다.

일제가 처음 이곳에 자리를 잡을 때가 1909년이었는데 당시에는 여기가 마산포 시가지 밖이었습니다. 1920년대에 이미 ‘도시 내 형무소’라는 문제로 여론이 들끓었는데 1935년 8월 9일에 이런 기사가 또 났습니다. 사실 이 때는 마산포의 도시범역이 많이 확대되어 이 위치는 이미 시내 한 복판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여론과 달리 이 형무소는 1970년경 지금 회성동 자리로 옮겨갔습니다.

기사 아래 사진은 부산감옥 마산분감으로 시작했을 당시의 마산형무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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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04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5) - 강점제1시기

<요보?>

<한 시기의 마산사회상황을 짧은 글로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만 1910년대 마산상황 중 종교와 교육 그리고 당시 사회분위기의 일편을 간략히 포스팅합니다>

합방 2년 후인 1912년 4월 8일 당시 양산 통도사 주지인 천보(天輔) 김구하(金九河) 큰 스님이 마산지역의 포교를 위해 사답(寺畓)을 팔아 현 추산동 포교당(정법사) 터에 설법전(說法殿)을 창설한 것이 근대 마산불교의 시초입니다.

1년 후인 1913년 서울 각황사에서 전국 30본사(本寺) 주지들이 조직한 ‘불교진흥회’의 발기 간사인 위암(韋庵) 장지연(張志淵, 1864년-1921년)이 진주에서 마산으로 이주하여 8년 동안 살았습니다.
이 때 위암은 마산불교진흥회를 조직하여 불교 발전에 진력을 다했으며 천보(天輔)스님과 자주 교류하였습니다.

아래 사진이 1912년에 건축한 추산동 포교당입니다.
 

새 건물을 짓는다고 최근 헐었습니다.
 마산에서 가장 오래된 불교건축이 사라진 겁니다. 우리 지역 불교사의 상징적인 유산이 없어진다고 일각에서 안타까움을 표하기도 했지만 소리가 너무 작았습니다.

1901년 조선예수교 장로교회 공의회가 조직되면서 마산교회를 태동시킨 기독교는 이후 노산 이은상의 부친 이승규 등이 입교하는 등 교세를 넓히다가 1903년에는 마산포교회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1919년에는 추산동에 신축예배당을 준공하고 명칭을 문창교회로 고쳤습니다.
아래 사진이 당시 신축한 문창교회의 사진입니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석조 건물입니다.

 20세기 벽두에 들어온 가톨릭은 완월동에서 천천히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고 개항직후 들어온 일본불교도 확장되어 갔습니다.

그 시절 마산의 교육기관으로는 합방 이전부터 있던 마산공립보통학교(현 성호초등학교), 마산공립심상고등소학교(현 월영초등학교), 사립 창신학교, 노동야학을 비롯해 1910년에 설립해 1911년 학생 50명으로 인가를 받은 외서면 완월리의 사립성지학교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1913년에는 창신학교의 여학생들로 구성된 의신여학교가 독립하여 개교하였고, 1915년에는 장군동 2가에 마산공립실과여학교가 개교하였습니다.
사립여학교는 의신과 성지가 있었지만 공립으로는 마산실과고등여학교가 최초였습니다. 이 학교는 1921년 실과여학교에서 고등여학교로 바뀌었는데 현재 마산여자고등학교의 전신입니다.
 

이 중 사립창신학교는 당시 신교육을 접한 많은 양심적 지식인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안확을 비롯한 민족지도자들이 학생을 가르쳤고 고루 이극로 같은 선각자들이 이분들에게 배웠습니다.
창신학교는 식민지 백성의 혼을 일깨우고 민족독립을 위한 저항정신을 불어 넣는 신식교육기관으로 마산사람들의 자존심이었습니다.

뿐만아닙니다.
개교할 때 호주선교사들의 도움이 컸던 탓에 학문, 체육, 예술 등 서양문물도 창신학교를 통해 많이 들어왔습니다.
한 예로 1914년 한강이남 최초로 창신학교 고등과에 7인조 밴드부가 창설되어 서양음악을 경남지역에 보급하기도 하였습니다.
아래 사진이 당시 창신학교밴드부입니다.


당시 창신학교를 말할 때 유독 ‘사립’을 강조하며 접두어로 붙였습니다.
식민지시대라 ‘공립’은 사실상 일본인 것이었고 '사립'만 한국인들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밖에 1907년 마산의 유지들에 의해 개교된「노동야학」은 1914년 10월, 1,300엔이라는 당시로서는 큰돈으로 창동에 교실 여섯 개를 가진(140평) 교사를 마련하였습니다.
마산의 노동야학활동은 전국적으로도 이름이 높았습니다.
1921년 한 해 동안 동아일보가 마산의 노동야학에 대해 보도한 것이 열일곱 번이나 될 정도였으니까요.

강점제1시기인 1910년대는 이질적인 두 나라의 문화충돌이 심했습니다.
지배자의 오만과 피지배자의 절망이 낳은 충돌과 갈등이 전국을 뒤덮었습니다.

식민지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더라도, 식민지 땅에서 일어난 지배민족과 피지배민족 간의 차별과 탄압, 그리고 전혀 다른 가치관과 문화에서 오는 이질적인 생활 습관 때문에 전국적으로 두 민족 간의 갈등과 마찰이 노골화되었습니다.

당시 일본인들은 한국인을 ‘요보’(‘여보세요’에서 ‘여보’의 일본인 발음으로 한국인을 놀리는 표현)라고 불러대며 모욕하였습니다.
공중목욕탕에서는 일본인들이 목욕을 마친 다음에라야 한국인의 입탕이 허용되었습니다.
기차나 전차에서 일인의 옆 좌석이 비어있더라도 한인은 앉을 수 없었으며, 길 가던 일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는 이유로 함부로 구타하는 횡포가 일상화되어 문제도 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마산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런 상황을 알 수 있는 그 시기 언론보도 몇 가지를 소개합니다.

① 매일신보 1915년 2월 6일
「중전(中畑)이라는 일본인이 인천나무시장 근처를 가다가 나무바리가 길가에까지 차서 통행에 지장이 있다고 하여 성냥불로 이 나무 저 나무에 불을 질러 불이 크게 번짐」
② 동아 1920년 4월 19일
「시야(矢野)」라는 부산의 일인 운수업자가 노임 시비 끝에 한인 노무자 수백 명에게 권총을 난사」
③ 동아 1920년 6월 21일
「여름철만 되면 일인들이 벌거벗고 길거리를 횡행하여 큰 사회문제화」
④ 동아 1920년 8월 6일
「서울 황금정(을지로) 4가 공동수도물을 먼저 길러가겠다고 일인 우체국원 조천(早川)이 한국 부인을 군도(軍刀)로 위협」<<<



2011/05/1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8) - 강점 제1시기
2011/05/2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9) - 강점 제1시기
2011/05/3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0) - 강점 제1시기
2011/06/0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1) - 강점 제1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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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 3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주택 시장은 사회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맞물려 개발과 성장의 논리가 지배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지어진 단독주택은 대부분 도시 한옥과 양식이 가..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7 /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3)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 2 1960년대는 한국사회의 큰 전환기였다. 4·19혁명과 5·16쿠데타에 따른 정치적 격변을 겪었고, 소위 경제개발정책에 따른 제반 개발이 계획적으로 유도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6 /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3)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 1 1945년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면서 비로소 주체적인 주거문화를 창달할 수 있는 계기를 맞게 되지만 경제 사회적 제반 여건이 불비하여 주체적인 역량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5 /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

2)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 2 일제하의 중·상류계층의 주택 유형으로는 양식주택과 절충식(개량식)주택·개량 한옥·문화주택·공동주택·영단주택 등을 들 수 있다. 양식주택은 서양식주택을 말하며, 절충식 주택은 과도기적 상황에..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4 /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

2) 개항기부터 일제시기까지 - 1 구한말(舊韓末)까지도 조선 사람들이 살았던 보편적인 주거 유형은 한옥이었다. 1882년 그리피스(W. E. Griffis)가 쓴 한국에 관한 역사서 『은자의 나라 한국』에는 당시 전통 한옥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