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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26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130. 신간회

 

130. 신간회(新幹會)

 

 

3·1운동이란 약소민족 해방의 봉화가 계림팔도에 팽배함에 이어, 일본 여러 곳 대, 소 전문학교의 유학생들은 어느덧 사회주의 사상에 침투되어 그 격랑은 드디어 극동 전역을 석권하는 판도가 되었다.

 

순순하고 열렬한 민족주의자의 단일 전선에 소비에트 러시아의 국제 공산당은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지하 근거지로 발화시켜, 이 불꽃으로 민족 전선에서 속속 이탈하게 되었는데, 예를 들면 이루스쿡크파 여운형의 고려 공산당 같은 것이며, 내지에서도 이들 수배(數倍)의 선풍이 농민운동, 노동조합 부녀동맹, 청년동맹 심지어 소년소녀동맹, 독서회 등 수십 개의 관계 단체에도 휘몰아쳤다.

 

때가 소비에트의 콤민테룬의 지령에 움직이고 있는 때라, 민족주의라는 보수적 고첩(孤疊)에 고민하고 있는 진영은 그렇지 않아도 호시탐탐하고 있는 공산계에서는 민족진영에서 대동단결하자 비합법 통일정당이며 표현기관이다 하여 갖은 미소(媚笑)와 추태를 던져 오므로 이 기회를 놓칠세라 드디어는 1927(소화2) 신간회라는 기상천외의 기형아가 고고의 소리를 울렸다.

 

민족 전체-대동단결-정신 총집중 운동-이라는 거대한 권위체라는 것이 나타나자 대세를 판가름 못하는 눈 어둔 유상무상(有像無像)들은 너도나도 솔선하여 신간회로 질주했다. 혹자는 신간탕(新幹湯)이라고 야유하기도 하였다.

 

그들이 무엇보다도 항일 민족통일전선 연합정신에 기간을 두고 다음 5대 정책을 내세웠다. 조선인의 착취기관 철폐, 이민 정책 반대, 조선본위 교육실시, 조선어 교육실시, 과학사상 연구 자유 등인데,

 

마산에서는 당시 민족주의-우국 일변도로 숭앙을 받던 창산(蒼山) 이영재, 허당 명도석, 일파 김용환, 객원으로 김형철 등, 사회주의자로서 김형두, 김명규, 손문기, 이주만 등 기라성같은 인물들인데 이 중에 손문기는 처음 이론(異論)도 하고 논쟁도 하였으나 결국 흡수되어 대체로 무난히 결성되었다.

 

여기에 시종 그들의 합작과 대동단결이란 것이 어부지리가 되고 말 것이라고 단언하고, 반대한 것은 새벽 하늘에 별과 같이 몇 사람 안 되는 무정부주의자들뿐이었는데, 처음부터 사회주의계의 잠식수단(蚕食手段)을 경계하지 못한 민족진영은 광주학생 사건을 전후하여 서울 조선극장 내 김무삼(金武森) 사건 배후를 예()히 검색한 결과 신간회 온상 깊숙히 ML당이란 가공할 비밀결사가 노출됨과 아울러 1931년에 해산되고 말았다.

 

이것은 마산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전국적으로 동일한 사회주의자들의 음모의 화신이란 것을 인식하지 못한 우매한 민족진영 전체가 어이없이 도괴된 동일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마산야화의 저자 김형윤 선생은 무정부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신간회에 대한 평가가 객관적이지 못한 것 같아 보충자료를 올린다.- 옮긴 이

 

* 민족대백과사전에 소개된 신간회

<개설>

국내 민족유일당운동의 구체적인 좌우합작 모임이다. 1920년대30년대 민족해방운동은 민족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의 두 흐름으로 파악될 수 있다. 그런데 두 흐름은 민족운동의 이념, 방법, 주도세력 등에 따라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고 민족주의 좌파와 사회주의자들의 민족협동전선으로 창립된 것이 신간회였다. 19272월부터 19315월까지 존속한 신간회는 서울에 본부를 두고 전국적으로 120150여 개의 지회를 가지고 있었으며 24만 명에 이른 일제하 가장 규모가 컸던 반일사회운동단체였다. (초대 회장은 월남 이상재)

 

<의의와 평가>

신간회의 해소는 조선의 민족해방운동이 새로운 단계로 이행하는 과정에 있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민족해방운동은 신간회로는 더 이상 해결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고 신간회는 거기에 무력함 모습만을 보일 뿐이었다. 이에 사회주의자들은 신간회 해소운동을 통해 민족해방운동의 새로운 전위와 아래로부터의 반제통일전선 결성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므로 신간회 해소에 있어서 가장 큰 오류는 그 방법에 있었다.

 

 

<1927년 2월 14일 신간회 창립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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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22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107. 최초의 야학교

107. 최초의 야학교

 

 

1911년 창원군 외서면 고산포(高山浦, 구마산)에는 한국 최초로 야학교(남자)가 탄생하였다.

 

발기인과 간부들은 지금은 전부 타계한 분들이지만 명부에 나타난 인물은 설립자 유천(柳川), 구성전, 교장 남전(藍田) 옥기환, 교감 창산(蒼山) 이형재, 경리 소원(小園) 김철연, 외 허당(虛堂) 명도석, 일파(一波) 김용환, 나인한(호 망각) 등 그때에도 쟁쟁한 청년 선각자들이다.

 

장소는 현재 시가지 구역확장으로 통로가 되었지만 당시 도면을 보면 남성동 69번지 조그마한 창고를 수리하여 시작하였다.

 

여기 수학생 중에는 초기 보통학교와는 달리 변발한 총각, 상투 있는 기혼자들로서 생도 전부가 선창에서 어물상의 고용인 또는 삭발 아동 등 혼성부대들이었다.

 

연혁은 기록이 소멸된 관계로 초대 교원의 성명은 도저히 찾을 길이 없지만, 선생은 대개가 창신학교 선생 혹은 보통학교 졸업자와 청년 유지들로서 보수는 봉사로 만족하였다고 한다.

 

처음 생도 수는 2, 30명에 불과하였으나 생도 수가 증가함에 따라 창동 64번지 민의소(현 시민극장)로 이전,

 

다음은 동 28번지에 목조 와옥(瓦屋) 4교실로 신축 이전하였다가 1926년 중성동 23, 전답 천여 평을 매입, 5개의 교실에 사무실, 수위, 사택 2동 그리고 회의실 등의 건축을 하여 이전하고, 창동에 있는 전 교사는 여자 야학교로 전용하게 되었다.

 

남자부 신축교사는 농촌공립학교보다 규모로나 건축 자체가 월등하여 전국에서 가장 하이칼라학교라고 당시 동아일보에 보도되기도 하였다.

 

교원의 봉급은 일인 평균 12원인데 모범교원에 한해서는 도 학무과에서 5원을 보조하기도 하였다.

 

학교운영을 옥기환 교장이 구마산 금융조합장으로서 받은 수당 3백 원을 1년 경상비로 충당하였으며 1936년에는 중학교 임시 준비책으로 옥기환 교장, 이형재 동아일보 지국장, 상원영(上原榮) 전 성호국민학교장 등이 합의하에 동 교내에 보습학원을 병설하기도 했다.

 

<1939년 마산 야학교 졸업사진, 가운데 앉은 노인이 남전 옥기환 선생>

 

 

그러나 가장 안타까운 일은 동교 출신 생존자라고는 거의가 없고 아니면 타처로 이사갔기 때문에 졸업생 수와 졸업 횟수를 알기에는 아득한 일이다.

 

* ; 보습학원의 전임강사는 박채우, 이영석

* 부기(附記) ; 교가 곡은 일본의 용감한 수병에서 흑동동칠야중(黑東洞漆夜中) 밤이 깊은데 억만창생(億萬蒼生) 잠들어 건곤(乾坤)이 적막(寂寞)’(가사 일부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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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06 00:00

마산창원 역사 읽기 (20) - 창씨개명 거부한 민족자산가 명도석

3. 지역의 인물을 찾아서

3-3 창씨개명 거부한 민족자산가 명도석

 

마산 진동 신기리 죽전마을 야트막한 뒷산 양지바른 곳에 묘 2기가 있다. 허당 명도석은 그의 부인과 함께 나란히 누워있다. 그의 사위인 김춘수가 지은 묘비문이 있다.

 

선생께서 남기신 항일투쟁 발자취는 크고도 뚜렷합니다. 일본인이 장악하고 있던 마산어시장에서의 상권투쟁(商權鬪爭), 노동야학교에서의 후진교육(後進敎育), 기미독립만세항쟁(己未獨立萬歲抗爭)의 마산에서의 주도, 동아일보 창립주주로 민족계도사업(民族啓導事業)에 참여 및 만주 땅 안동(安東)에서의 거사모의사건(擧事謀議事件)으로 체포되어 평양에서 치르신 옥고(獄苦), 밀양 폭탄사건(爆彈事件) 거사자금 전담(專擔), 의열단(義烈團) 경남거점조직을 주재(主宰), 일본에의한 창씨개명(創氏改名) 강요를 끝내 거부, 조선건국동맹(朝鮮建國同盟) 경남조직책 담당, 마산경찰서 갑종요시찰인(甲種要視察人)으로서 구금 10여 차례 등 이루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그는 18854월 마산에서 태어났다.

옥기환과 구성전이 설립한 마산노동야학에 참여하면서부터 지역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 고난의 세월을 보냈다. 그 결과로 1990년에는 독립지사로서의 공훈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追敍)받았다.

 

 <명도석 선생의 묘역>

 

-고난에 비켜서지 않고-

 

어시장 객주 출신으로 구마산 어시장 상민조합의 총무를 역임한 선생의 이름이 기록에 처음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9077월 설립된 마산노동야학교의 교사생활 부터이다.

암울한 조국의 현실에 깊은 우려를 나타내며 후진양성을 통해 민족의 운명을 개척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설립한 민족학교였다.

 

학교생활을 계기로 김철두, 이형재, 김용환, 김명규, 김종신, 팽삼진 등과 같은 뜻 있는 젊은이들과 자연스럽게 교류하게 되었고, 마산의 민족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게 되었다.

또한 선생은 마산지역의 3·1운동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312일 지역인사들과 사전에 모의하여, 321일 장날을 기해 거사를 일으키기로 계획하고 자금을 지원하는 한편, 거사 당일에는 군중과 함께 태극기와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을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며 시위행진을 주도하였다.

1920년 가을에는 미국에서 항일활동을 전개하던 박용만의 밀사와 중국 봉천성의 안동에서 만나 항일운동의 방향을 논의하던 중 일본 경찰에 발각, 체포되어 평양으로 이송되었다. 그러나 당시 일본 경찰측은 충분한 증거를 확보하지 못하여, 다행히 6개월만에 석방될 수 있었다.

그의 민족주의자로서 가장 두드러진 활동은 신간회 활동이었다.

신간회는 합법적인 운동조직이었다. 마산지회가 만들어진 것은 1927720일이고, 모두 4차례의 전체대회가 거행되었다. 명도석은 아주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1927720일에 신간회 마산지회 설립대회에서 서기홍과 함께 정치문화부장을 담당하였다. 19281228일에 열린 제2회 정기대회에서는 회장직을 맡았으며, 19298월에 열린 ‘복대표대회 규약개정에 따른 임시대회’에서는 대회의 최고 의결권자인 집행위원장의 직무를 수행하였다. 1930년의 제3회 정기대회에서는 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이처럼 명도석은 신간회 마산지회가 존립하던 시기에 열린 4차례의 대회에서 매번 중요 간부에 선임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신간회 마산지회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였는지 충분히 가늠케하고 있다.

신간회 마산지회는‘언론·집회·출판·결사·교육의 자유 획득, 조선어 교육의 실시, 실업교육 실시, 노동·농민·청년·소년·부인 형평운동의 건’ 등과 같은 중앙의 일반적인 강령을 준수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사립 마산 의신여학교 동맹휴학사건에 대한 조사 검토 건’, ‘보통학교 수업료 인상 반대의 건’, ‘일반 물가 인하[減下] 운동의 건’ 등 지역사회의 문제에도 깊이 관여하며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 초까지의 지역사회운동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명도석은 양조장을 경영하였고 또 옥기환 등과 함께 원동무역주식회사를 운영하고 있었지만, 19233월에는 노동자 200여 명이 모인 간담회에서 내빈으로 참석하여 축사하는 등 노동운동에도 비교적 호의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러한 행동은 마산의 진보적 지식인들로부터 신뢰를 이끌어낼수있었다.

명도석의 활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외지 독립운동단체와의 연계이다.

양조업에서 운송업으로 사업을 전환한 이후 자신이 운영하던 운송회사의 수송차량을 만주 등지에서 활동하고 있던 독립운동단체에 은밀히 독립자금을 지원하는데 이용하기도 하였다.

그 밖에도 옥기환 등과 함께 자력갱생을 위한 터전으로 만든 원동무역주식회사를 바탕으로,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부산의 백산 안희제와도 연락하면서 독립자금의 공급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일제말 몽양 여운형이 조선건국동맹을 결성하자, 경남조직책을 맡기도 하였으며, 그것을 인연으로 해방 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建準)의 마산시 위원장직을 맡기도 하였다.

  <창원시 마산회원구 봉암로에 위치한 명도석 선생 기념비>

 

-좌·우로부터 존경받던 민족자산가-

 

선생은 늘 “뜻은 행하되 드러내지 않고 공을 세웠으되 명예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신조를 바탕으로 평생을 살아왔던분이다.

그러한 선생의 신조 때문인지 선생은 많은 활동에도 불구하고 세간에 덜 알려져 왔는지 모른다.

생은 일제에 의해 조국의 주권이 말살 당하자 민족정신의 고취를 위해 교육활동에 종사하였고, 열악한 노동조건하에서 고통 받고 있던 노동자의 입장에서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편에 서기도 하였다.

1920년대 후반에는 보다 적극적으로 사회운동에 뛰어들면서부터는 민립대학 발기인, 마산물산장려회(馬山物産奬勵會)의 간부를 역임하고 신간회 마산지부를 이끄는 등, 실질적으로 마산의 진보주의 운동의 중심적 인물로 성장하여 좌·우 양 진영으로부터 존경을 받아 왔다.

그런 속에서도 자신의 사업을 운영하는데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또 거기에서 발생되는 수익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사용함으로써 민족자산가(民族資産家)의 표상을 이루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제의 탄압이 조여오던 1940년대 일제가 우리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요할 때도 선생은 그것을 끝까지 거부함으로써 민족정신을 굳건히 지켰던 분이다.

그러면서도 해방 이후에 잠시‘건준’의 마산시 위원장을 맡기도 하였지만, 자신의 영달을 안중에 두지 않고 자택에 은거하면서 195464일 파란만장한 일생을 접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허당 명도석 선생은 민족을 우선하는 선각자적 정신과 국난의 시기에 자산가들이 가져야 할 몸가짐을 스스로 실천하였다는 점에서 민족의 사표로서, 또 마산의 정신적 지주로서 길이 남을 만한 자취를 남겼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그의 행적에도 불구하고 몇몇의 관심을 제외하고 지역사회에서 그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

지역사회에 대한 애정과 관심은 어쩌면 지역 출신의 인물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출발한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묘비명은 이렇게 끝 맺고 있다.

 

집요한 감시와 위협 다 견디시고 온갖 간교한 회유, 모함 다 물리치시고 오직 광복의 그날 나라와 겨레가 질곡(桎梏)의 그 깊은 구렁에서 풀려날 그 날이 머지 않아 반드시 올 것을 굳게 믿으시고 또한 그런 그 신념을 끝내 버리거나 굽히지 않으신 선생 광복회천(光復回天)의 이 더 밝고 높푸른 하늘 아래 이제 고이 잠드소서.<<<

 

문은정 / 당시 경남대학교 박물관 학예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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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01 00:00

마산·창원 역사 읽기 (15) - 해방에서 5·16까지

2. 청동기시대에서 10·18까지

2-8 해방에서 5·16까지

 

한 시대의 사회운동을 살피는 일은 현재 우리사회의 주류 기득권 세력이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지를 규명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게 마련이고, 사회를 바꾸려는 사람들이 있으면,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반대 세력도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사회운동이 궁극적으로 그 사회를 형성하고 있는 낡은 기득권 세력을 교체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때, 이에 맞서 사회운동을 방해하고 탄압함으로써 기득권을 확대 재생산해온 세력의 실체를 파악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우선 1945년 해방 직후의 상황부터보자.

당시 마산 지역사회의 여론주도층 인사들은 대략 세 가지 부류로 나뉜다. 사회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 그리고 친일파 출신인사들이 그들이다.

이들 3파는 해방 이틀 후인 1945817일 마산 창동 공락관(이후 시민극장으로 바뀜)에서 건국준비위원회(건준·위원장 명도석)를 함께 결성해 치안유지를 담당했다.

건준은 해방 후 지역에서 생겨난 최초의 자치기구인 동시에 사회단체였다.

이처럼 3파가 연합한 마산 건준에는 친일혐의가 있는 일제하의 시의원 출신 인사들도 참여하고 있었다.

그러나 위원장은 물론 조직과 서기, 그리고 실질적인 행동대 격인 치안대장 등 핵심요직은 모두 진보적인 사람들이 맡고 있었다.

 

-미군정과 함께 두 갈래로 나뉜 사회운동-

이같은 건준의 진보적 색채에 불만을 품은 친일인사와 무정부주의자들은 9월로 들어서면서 일제히 건준을 탈퇴하게 된다.

이들의 건준 탈퇴는 서울에 진주한 미군이 건준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밝힌 것과때를 같이하고 있다.

이 때부터 마산의 사회운동은 두 갈래로 나눠지게 된다.

<좌우익 분열 / 광복 2주년 기념행사를 따로따로>

 

사회주의자들은 건준을 중심으로 미 군정과 대립적인 관계에 놓이게 되며, 건준을 탈퇴한 이들은 ‘한민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미 군정에 적극 협조하게 된다. 이 단체는 이후 ‘국민회’로 이름을 바꿔 마산지역의 대표적인 우익단체가 된다.

여기서 활동하던 사람들은 또한 각종 우익 청년단체를 결성해 계속 세력을 확장해 나간다.

당시 우익단체의 대표적 인물은 주로 손문기·민영학(국민회), 유석형·손상진(광복청년단·대동청년단), 문삼찬, 조철제, 노병덕·구혜숙(민족청년단), 이인호(서북청년단) 등이었다.

이들은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경찰의 보조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등 초법적인 공권력을 행사하면서 특무대·경찰과 함께 민간인 학살사건을 주도하기도 했다.

19603·15의거 당시 반공청년단으로 이름을 바꾼 이들은 시위대를 향해 폭력테러를 자행하면서 무자비한 진압에 나서기도 했다.

3·15의거 이후에는 잠시 위축된 듯한 모습을 보였으나 19615·16군사쿠데타 이후 박정희 정권 치하에서 반공연맹으로 다시 규합한다.

이 단체는 오늘날 자유총연맹 등 관변단체의 모태가 됐다.

한편 건준에서 우익세력이 탈퇴한 직후 사회주의자들은 인민위원회와 민주주의 민족전선 마산시위원회 등을 결성해 미 군정의 탄압에 대항했다.

들은 특히 194610월 미 군정을 상대로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켜 마산에서 12~17명, 창원군에서 5명 등 많은 희생자를 냈다.

당시 10월 봉기에 참가한 경남 도민은 18개 시·군에서 최소 74000명, 최대 60만 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희생자의 숫자나 시위참여 인원으로만 본다면 19603·15의거나 1979년 부마민주항쟁보다 훨씬 대규모의 항쟁이었던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은 또 194727일에도 일제히 봉기를 일으켰으나 역시 경남·북에서 39명의 사망자를 낸 후 지하로 잠적하거나 월북하고 말았다.

<마산여자중학교 학생들의 휴전반대 시위 / 1953년> 

 

-10월 봉기 이후 저항세력 일소-

그러나 이들이 남긴 후유증은 컸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사회주의자들에게 협조한 혐의가 있는 국민을 상시적으로 감시·관리하기 위해 ‘국민보도연맹’이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여기에는 실적을 채우기 위해 좌익세력과 전혀 무관한 평범한 시민들도 무차별적으로 가입시킨 경우가 많았다.

이승만 정권은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이들이 북한 인민군에게 협조할 것을 우려, 모두 체포·구금한 후 대부분을 재판 절차도 없이 학살해버렸다.

이로 인해 마산에서도 무려 1680여 명이 학살당했다. 이로써 사회주의자는 물론 이승만 정권에 대한 저항세력은 모두 제거되어 버린 것이다.

이승만 정권의 폭압에 숨죽이고 있던 시민들은 19603·15 정선거를 계기로 봉기를 일으키게 된다.

3·15의거는 표면적으로 당시 야당이던 민주당이 주도했으나 민간인 학살 유족들의 한이 폭발한 사건이기도 했다.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물러나자 지역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사회운동은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운동이었다.

524일 노현섭·김용국 두 사람이 ‘정부는6·25 당시의 보련(保聯) 관계자의 행방을 알려라!! 만일 죽였다면 그 진상을 공개하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마산시내에서 침묵시위를 벌이면서 시작된 진상규명운동은 마산유족회와 경남유족회·전국유족회의 창립으로 이어진다.

 

노현섭(우측 사진)씨는 전국유족회장을 맡아 이 운동을 주도하지만 이듬해 5·16데타 직후 유족회 간부들이 모두 구속되면서 좌절되고 만다.

4·19에서 5·16에 이르는 기간은 흔히 혼란기로만 알려져 있다. 많은 운동단체가 생겨났고 연일 시위가 끊이지 않았으니 위정자의 입장에선 혼란기로 볼만하다. 그러나 이는 억눌렸던 요구의 자연스런 분출이었다.

4월혁명 때 민중이 흘린 피의 댓가로 집권한 민주당은 당연히 자유당 독재의 잔재를 일소하고 이승만 장기독재에 억울하게 희생된 피해자들의 복권을 추진했어야 했다.

그러나 민주당 정권은 이같은 국민의 요구와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민주당의 배려하에 이승만은 미국으로 뺑소니를 쳤지만 그 에게 빌붙어 권력을 누리던 국회의원들은 여전히 국회 의석의 과반수를 차지한 채 떵떵거리고 있었다.

국민들이 이들을 단죄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당연했다.

이에 따라 의사당 앞에는 대학생과 혁신세력을 중심으로 한 시위대가 매일같이 몰려가 데모를 하였고 부산에서도 대학생들에 의하여 국회해산 데모가 일어났다.

4·19이후 석방된 정치범의 복권을 요구하는 데모도 발생했다.

과도정부가 자유당 치하에서 정치범으로 복역하던 자들을 모두 석방은 했으나, 그들

에 대한 공민권을 회복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4·19 직후는 과연 혼란기 였나-

이승만 정권의 북진통일론에 눌려 잠재돼 있던 평화통일 논의도 활발하게 일어났다.

민족자주통일협의회와 영세중립화통일추진위원회를 비롯,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라는 유명한 구호를 남긴 남북학생회담 추진이그것이다.

마산의 혁신세력은 196055일 <마산일보>에 ‘한국 혁신세력 집결 마산 촉진회’ 명의의 격문을 발표하면서 활동을 재개하게 된다.

이들은 57일 혁신정당 발기인 46명 중 35명이 참석한 가운데 대회를 열고 한범석을 임시 의장으로, 이상두·김문갑을 부의장으로 선출하고 7개 부차장을 선임했다.

런 과정에 따라 마산의 혁신세력은 김문갑을 위원장으로 하는 사회대중당 마산시당을 중심으로 활동을 벌여나가지만 19615·16군사 쿠데타로 인해 다시 강제 해산되고 주요인물이 투옥되는 등 시련을 겪게 된다.

사회대중당 결성과 비슷한 시기에 발족된 한국영세중립화 통일추진위원회 역시 김문갑을 위원장으로 하고, 부위원장 김성립·김형문, 기획실장 김해용 등을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벌여나간다.

 

<1960년 영세중립화평화통일추진위원회 결정 / 현, 경남은행 창동 지점 앞>

 

특히 이 단체가 116일 무학초등학교 교정에서 개최한 집회에는 수천 명의 시민이 운집해 마산시민의 높은 통일 열망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4월혁명 이전까지 전국의 교사들은 독재정권의 충실한 하수인이었다.

그들은 3·15정선거 때도 어김없이 동원됐을 뿐 아니라 학생들이 궐기했을 때도 정권의 지시에 따라 데모를 막는 데 앞장섰다.

명 이후 자괴감을 느낀 교사들이 앞장서 교원노조를 결성, 교육민주화투쟁에 나선 것은 교사로서 최소한의 자존심을 회복하려는 몸부림이었다.

마산에서511일 교원노조 결성준비위가 발족되고 18일에는 성호초등학교 강당에서 공식 출범식을 갖는다.

초등위원장은 성호초교 교사였던 황낙구씨였고, 중등위원장은 마산고 이봉규씨가 맡게 된다.

그러나 이마저도 민주당 정권은 탄압으로 일관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민주당은 그 태생에서부터 친일파와 수구·반공 우익세력으로 구성된  한민당의 후신이었으니 4월혁명을 제대로 수행할 리가 없었다.

그러다보니 처음엔 기가 죽은채 분위기만 살피고 있던 3·15부정선거 원흉들이 나중에는 오히려 큰소리를 치며 7·29총선에 출마하는 등 반혁명세력의 준동이 되살아났다.

그 대표적인 케이스가 마산 3·15부정선거의 원흉이자 자유당 국회의원인 이용범의 재출마였다.

마산의 3·15청년동지회(회장 강대인)와 한얼동지회(회장 김봉세) 등 단체들은 창원 을구에서 무소속으로 재출마한 이용범을 규탄하며 오동동 자택 앞에서 후보 사퇴를 요구하는 단식농성까지 벌였다.

그러나 이런 활발한 사회운동은 19615·16군사쿠데타로 다시 단절되고 만다.

 

<5·16 군사 쿠테타 / 서울시청 앞 광장에 모습을 드러낸 박정희 소장>

 

영세중립화통일추진위의 김문갑, 피학살자유족회 노현섭, 교원노조 이봉규 씨 등은 모두 구속 수감된다.

모든정당·사회단체의 해산명령을 내린 군사정권은 1963년 다시 활동을 허용하면서 반공연맹 등 관변단체와 예총 등 관변 예술단체를 만들어 이들을 집중 육성한다.

이에 따라 지역사회도 다시 우익단체가 모든 기득권을 되찾게 된다.

3·15의거와 4·19혁명 직전까지 이승만 독재에 빌붙어 그의 선거유세를 다녔던 마산의 문화권력 이은상도 5·16군사쿠데타 이후 박정희 정권의 공화당 창당선언문을 써주면서 화려하게 복귀하게 된다.

또한 쿠데타의 주체세력 중 한명이었던 청와대 경호실장 박종규씨도 지역사회에 또 하나의 권력으로 부상하게된다.

이들 권력자와 각종 관변단체에 의해 장악된 마산의 지역사회는 1979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사실상 무저항의 도시로 전락했다.

다행히 부마민주항쟁이후 ‘민주성지’로서 체면을 되찾았지만, 해방직후와 3·15거 직후의 활발했던 진보적 사회운동의 명성을 회복하기에는 한참 멀어 보인다.<<<

김주완 / 경남도민일보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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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25 00:32

250년 된 원마산(마산포) 골목길



「유장근 교수의 도시탐방대」 세 번째 참석 후의 글이다.
원마산(마산포)에 자연취락이 형성되면서 생긴 ‘길’에 대한 이야기다.

1760년, 마산창(馬山倉)이 설치된 후 마산이 도시 형태를 띠면서 도시공간의 성격도 형성되었다.
요즈음 말로 하자면 마산창 주변은 공공업무지구로, 현재 황금당 옆 골목길 주변은 상업지역으로, 동성동과 오동동 즉 코아양과점 뒤편 일대는 배후 주거지로 사용되었다.

‘·······사람이 다니면서 길이 생겼다’는 루쉰의 말처럼,
마산포에도 사람이 모이고 사람이 다니면서 ‘길’이 생겼다.
자연취락 특유의 좁고 꾸불꾸불한 ‘길’이었다.

<옛 마산 사람들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골목길>

지금도 생생히 남아있는 원마산의 좁은 골목길들은 멀게는 250년 가깝게는 200년이 족히 된 마산사람들의 ‘길’이다.
조선시대를 살았던 이곳 사람들이, 때로는 조창 쪽으로 때로는 해변의 선창 쪽으로 아침저녁 부지런히 다녔던 바로 그 길이다.
단지 길로서만이 아니라 마산 선인들의 숨결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삶의 흔적이기도 하다.

남성동 성당 옆 좁은 내리막 길도,
마산사람 누구나 친숙한 전설적인 떡볶이가게 ‘복희집’ 앞길도,
삼겹살로 유명한 삼도식당 골목도,
홍화집과 골목식당 길도, 아구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복잡하게 얽혀있는 동성동 좁은 골목길도,
옛 마산사람들이 걸었던 바로 그 ‘길’이다.

‘아는 것만큼 보이고 보는 것만큼 느낀다’고 했는데,
이 좁고 보잘 것 없는 골목이 ‘조선시대 길’이라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늘도 사람들은 무심코 길을 지난다.

도시탐방대원들과 골목길 내력을 이야기하고 복원도와 비교확인도 하면서 이 도시의 지난 시간을 맛보며 함께 걸었다.
간간이 들리는 옅은 탄성과 함께 탐방의 즐거움이 거리를 메웠다.



         <위 부터 남성동성당내려가는길, 삼도식당 길, 복희집, 홍화집 길>


<마산사람들의 자랑이었던 「원동무역」>

탐방길 시작한 후, 마산창(馬山倉), 매립 전 해안선, 어시장의 진동골목, 대풍골목, 서굴강, 동굴강을 지나 도착한 곳은 원동무역주식회사.

원동무역은 1919년 9월 독립지사 옥기환 선생과 명도석 선생이 마산 최초로 설립한 회사다.
현재 남성동 91-1번지에 남아 있는 사옥은1927년 8월에 착공해 1928년 4월에 준공한 철근콘크리트 2층 현대식 건물이다.
영욕의 세월을 지내고 외피만 바뀐 채 오늘도 말 없이 거리를 지키고 있었다.
설계한 사람이 누구이지 시공한 이는 또 누구인지 알길 조차 없지만 세련된 근대미의 격조 높은 이 건물은 일제기 마산포 사람들의 자부심을 한껏 채워준 건물이었다.
이 회사에서 남긴 이익금의 일부가 백산 안희제 선생에게로, 상해임시정부로 건너갔다고 한다.

옥기환 선생은 해방 후 초대 마산부윤(마산시장)을 지냈고, 허당 명도석 선생은 건준에 참여하는 등 해방 후에도 많은 일을 했다. 봉암로에 가면 허당 선생의 추모비도 있다.
마산이 배출한 주요인물 중 친일이니 친독재니 궂은소리 때문에 기념사업에 시비가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 두 분의 삶에는 흠결 있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암흑기의 자랑스러운 마산 어른이시다.


          <표지석 / 원동무역의 본래 모습 / 현 상태, 3층부분은 뒤에 증축>


<원마산 복원도 제작>

10여 년 전, 도시연구를 하면서 원마산(마산포)의 도시형태를 복원했다.
1912년 조선총독부가 공포한 사정지적도(査定地籍圖)를 이용해 분할과 합병으로 변형된 지적도의 원형을 추적해 복원하는 작업이었다.

1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지난했던 작업이 끝난 후 복원도를 들고 시내로 나갔다. 실제상황과 확인해보기 위해서였다. 현장 확인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골목골목 다니며 현장과 도면을 비교하면서 두 번 놀랐다.
도면상 복원한 작업의 정확도에 스스로 놀랐고, 복원도에 나타난 그 복잡한 골목길들이 그때까지 대부분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지난 토요일, 도시탐방대가 걸었던 길은 바로 그 때 확인되었던 길들이었다.
조그맣게 복사된 복원도와 창동 남성동의 골목길을 대조하면서 탐방대원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에 나도 즐거웠다.

<1908년 조선통감부 철도관리국에서 발행한 '마산전도' / 오른쪽 단선으로 표시한 길들이 원마산 골목길이다>


<1916년 조선총독부 육지측량부에서 제작한 '마산, 1/10,000지도' / 새로난 신작로와 원래의 골목길들이 그려져 있다.>

<복원도 / 1910년 경의 것이지만 도시계획이 없었던 시기라 조선시대로 까지 추정가능하다>
    <원마산의 옛 길 / 노란 색이 복원도에서 확인된 길인데 대부분 지금까지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뒤늦게 합류한 ‘창동의 산 역사’ 이승기 선생님의 창동과 극장과 영화에 읽힌 이야기가 분위기를 한층 더 띄웠다.
듣는 이와 말하는 이 즐겁기는 매한가지, 지나간 마산이야기에 토요일 오후가 금세 지나갔다.





<도시에서 역사란?>

마음만 먹으면 현대기술로 어떤 도시라도 만들 수 있다.
넓은 도로를 뚫고 번쩍번쩍한 건물도 짓고 키 큰 나무도 얼마든지 심을 수 있다. 그러나 도시의 역사를 급조할 수는 없다.
때문에 역사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곳이 남아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소중하게 보존해야 하고, 다음 세대에 잘 넘겨주어야 한다.

웬만큼 여행을 해본 사람이라면 잘 알겠지만 여행이란 것이 대부분 도시의 역사를 체험하는 것이다. 그래서 외국의 어떤 도시에서는 심지어 그들의 부끄러운 과거인 조계지까지도 복원하여 관광자원으로 이용하고 있다.
이처럼 도시의 역사는 단지 옛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치지 않고 그 도시의 소중한 문화자원, 관광자원으로 활용되는 것이다.
미국에서 서부 개척시대의 술집 따위들까지도 현재 사용하고 있는 집주인에게 국가재정까지 지원하면서 함부로 바꾸지 못하게 하는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이다.

마산 도시의 역사를 모두 복원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역사를 가진 도시에서 어떠한 역사적 흔적도 찾을 수 없고, 이를 위한 노력조차 하지 않는는 것은 심각한 도시적 비극이다.

창동과 동성동 일대에 남아 있는 골목길들은 자연취락을 원형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곳이며 마산의 도시역사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곳이다. 다른 도시에서는 도저히 이런 길을 만날 수 없다.
혹자는 꾸부러지고 좁은 골목길이 수치스러운 전근대적 모습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길은, 오늘의 마산이 있기까지 마산사람들이 서로 부대끼며 살았던 발자국이며 고금 모든 마산 사람들의 호흡과 땀이 녹은 생생한 기록이다.
그 역사적 가치는 어디에도 비할 바가 아니다.

한때 번성했던 마산 오동동이 최근 들어 점차 쇠퇴해지고 있는데 이곳을 살릴 길이 이 오래된 골목길 속에 묻혀있을 수도 있다.

생각해 보자.
250년이라는 긴 시간의 멋과 맛을 느낄 수 있는 ‘골목길’이 남아있다면, 우리는 어디로 가서 하루저녁 친구와 즐길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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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옥가실 2009.11.25 09:46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아침에 좋은 글 보고갑니다.
    특히 새로 작성한 원마산도로 지도가 좋습니다.
    이걸 들고 다시 옛길 탐사를 좀 해야겠군요^^

    • 허정도 2009.11.25 18:02 신고 address edit & del

      반갑습니다.
      공부해야할 것도 많을텐데 시민들을 위해 봉사하신다고 고생이 많습니다.
      언제 날 잡아서 물메기탕이나 한 번 먹읍시다.

  2. 영영사랑 2009.12.01 00:20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남성동,창동,복희집.. 떡볶이,오징어튀김.... 감동입니다. 혹시 아시는지요? 마산에는 골목이 많아 길을 잃었을때 어떻게 큰길로 나오는지? (하수구관따라 가다보면 큰길이 나왔어요 경험입니다) ?? 즐겁게 보고갑니다

    • 허정도 2009.12.01 10:40 신고 address edit & del

      하수구관 따라가 아니라 하수구 두껑따라 아닌가요?
      내 눈에는 하수구 관이 안 보이던데......
      방문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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