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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2.26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130. 신간회

 

130. 신간회(新幹會)

 

 

3·1운동이란 약소민족 해방의 봉화가 계림팔도에 팽배함에 이어, 일본 여러 곳 대, 소 전문학교의 유학생들은 어느덧 사회주의 사상에 침투되어 그 격랑은 드디어 극동 전역을 석권하는 판도가 되었다.

 

순순하고 열렬한 민족주의자의 단일 전선에 소비에트 러시아의 국제 공산당은 대한민국 독립운동의 지하 근거지로 발화시켜, 이 불꽃으로 민족 전선에서 속속 이탈하게 되었는데, 예를 들면 이루스쿡크파 여운형의 고려 공산당 같은 것이며, 내지에서도 이들 수배(數倍)의 선풍이 농민운동, 노동조합 부녀동맹, 청년동맹 심지어 소년소녀동맹, 독서회 등 수십 개의 관계 단체에도 휘몰아쳤다.

 

때가 소비에트의 콤민테룬의 지령에 움직이고 있는 때라, 민족주의라는 보수적 고첩(孤疊)에 고민하고 있는 진영은 그렇지 않아도 호시탐탐하고 있는 공산계에서는 민족진영에서 대동단결하자 비합법 통일정당이며 표현기관이다 하여 갖은 미소(媚笑)와 추태를 던져 오므로 이 기회를 놓칠세라 드디어는 1927(소화2) 신간회라는 기상천외의 기형아가 고고의 소리를 울렸다.

 

민족 전체-대동단결-정신 총집중 운동-이라는 거대한 권위체라는 것이 나타나자 대세를 판가름 못하는 눈 어둔 유상무상(有像無像)들은 너도나도 솔선하여 신간회로 질주했다. 혹자는 신간탕(新幹湯)이라고 야유하기도 하였다.

 

그들이 무엇보다도 항일 민족통일전선 연합정신에 기간을 두고 다음 5대 정책을 내세웠다. 조선인의 착취기관 철폐, 이민 정책 반대, 조선본위 교육실시, 조선어 교육실시, 과학사상 연구 자유 등인데,

 

마산에서는 당시 민족주의-우국 일변도로 숭앙을 받던 창산(蒼山) 이영재, 허당 명도석, 일파 김용환, 객원으로 김형철 등, 사회주의자로서 김형두, 김명규, 손문기, 이주만 등 기라성같은 인물들인데 이 중에 손문기는 처음 이론(異論)도 하고 논쟁도 하였으나 결국 흡수되어 대체로 무난히 결성되었다.

 

여기에 시종 그들의 합작과 대동단결이란 것이 어부지리가 되고 말 것이라고 단언하고, 반대한 것은 새벽 하늘에 별과 같이 몇 사람 안 되는 무정부주의자들뿐이었는데, 처음부터 사회주의계의 잠식수단(蚕食手段)을 경계하지 못한 민족진영은 광주학생 사건을 전후하여 서울 조선극장 내 김무삼(金武森) 사건 배후를 예()히 검색한 결과 신간회 온상 깊숙히 ML당이란 가공할 비밀결사가 노출됨과 아울러 1931년에 해산되고 말았다.

 

이것은 마산에 국한된 것이 아니다.

전국적으로 동일한 사회주의자들의 음모의 화신이란 것을 인식하지 못한 우매한 민족진영 전체가 어이없이 도괴된 동일한 현상이 아닐 수 없다.<<<

 

 

마산야화의 저자 김형윤 선생은 무정부주의자로 알려져 있다. 그래서인지 모르지만 신간회에 대한 평가가 객관적이지 못한 것 같아 보충자료를 올린다.- 옮긴 이

 

* 민족대백과사전에 소개된 신간회

<개설>

국내 민족유일당운동의 구체적인 좌우합작 모임이다. 1920년대30년대 민족해방운동은 민족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의 두 흐름으로 파악될 수 있다. 그런데 두 흐름은 민족운동의 이념, 방법, 주도세력 등에 따라 여러 갈래로 나뉘어져 있었다.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고 민족주의 좌파와 사회주의자들의 민족협동전선으로 창립된 것이 신간회였다. 19272월부터 19315월까지 존속한 신간회는 서울에 본부를 두고 전국적으로 120150여 개의 지회를 가지고 있었으며 24만 명에 이른 일제하 가장 규모가 컸던 반일사회운동단체였다. (초대 회장은 월남 이상재)

 

<의의와 평가>

신간회의 해소는 조선의 민족해방운동이 새로운 단계로 이행하는 과정에 있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민족해방운동은 신간회로는 더 이상 해결할 수 없는 단계에 이르렀고 신간회는 거기에 무력함 모습만을 보일 뿐이었다. 이에 사회주의자들은 신간회 해소운동을 통해 민족해방운동의 새로운 전위와 아래로부터의 반제통일전선 결성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그러므로 신간회 해소에 있어서 가장 큰 오류는 그 방법에 있었다.

 

 

<1927년 2월 14일 신간회 창립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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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11.14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123. 기자 피살사건, 124 - '비(秘)'를 알리는 경무국

123. 기자 피살사건

 

 

현역 신문지국 기자가 폭한에게 피살되었다.

 

피해자는 당시 조선총독부 어용지인 매일신보 마산지국 기자 박성화(朴性和)이며 가해자는 마산시 오동동 이성화의 자 이 모()로서

 

가해자 이()가 저지른 전날의 비행이 전기(前記) 신문에 보도된 일이 있었는데 이것은 반드시 동 지국 기자 박성화의 취재 송고에 의한 것으로 그릇 판단한 가해자 이(), 항상 박에 대한 살의를 품고 오던 중 193510월 모 일 밤 11시경 시내 서성동 동사무소 옆에서 그를 만나자 근처 술집 식도를 들고 나와 다짜고짜로 하복부를 두세 번 찔러 병원에 옮겨 놓은 즉시 숨지게 한 것이다.

 

박 기자는 피살되던 다음날 동아일보 지국으로 옮기게 되어 있었던 것인데, 그는 평소에 형평운동(衡平運動)에 자진 투신하여 백정계급에 대한 일반의 차별 대우에 감연히 궐기하여 투쟁한 바 있었으며, 남들의 호의와 존경을 받던 사람이었으나 가해자의 그릇된 판단으로 인하여 참혹한 피해를 입은 것이다.

 

가해자의 살인 공판에서는 관여 검사로부터 5년 징역의 구형을 받았으나 판사들은 방청인들의 분위기를 참작하였음인지 불과 4, 5분간의 합의로써 7년 징역의 선고판결을 내렸었다.

 

현역 신문기자가 피살된 것은 마산으로서는 처음 생긴 사건이었다.

 

 

 

 

124. ‘()’를 알리는 경무국

 

 

총독부 당국은 국내외에서 발생하는 독립운동이나 사회운동에 관한 기사를 관제(管制)하는데 심혈을 경주하는 것은 천하가 주지하던 일이다.

 

중앙 각 신문은 사건 발생한 정보를 보도하므로 경무 당국은 기휘(忌諱)에 저촉이니 무어니 하여 해당 기사를 삭제하는 일방 행여나 하여 각지 주재소에 지급전화로 미삭제의 신문 단속에 약기(躍記)하던 그때는 경비 전화 시설이 없는 때문에 전화요금이 막대하다고 했다.

 

그런데 중앙지에 대해서는 삭제로서 안도하는 모양으로 지방지들은 중대사건을 전연 감지하지 못하고 있는데 으레 경고하는 ()’가 프린트로서 전달된다.

 

1. 제등(齊藤) 총독이 압록강 유역을 시찰 중 대안(對岸)에서 부정선인(독립군) 김일성(金日星)이 총격을 가해 왔다.

 

2. 의열단의 김지섭(金祉燮)이 황송하옵게도 이중교(二重橋)를 습격, 황거(皇居)를 향해 돌진코자 하다 수비 경관에 피체(被逮) 운운.

 

예3. 신의주에서 김유정(친일) 변호사에 폭행을 가한 자의 가택 수색을 한 결과 임원근 일파의 비밀단체인 공산당 사건이 발로(發露)됐다.

 

4. 충북 충주에서 요로(要路) 인물 암살, 관공서 폭파 등을 음모한 무정부주의자 등 흑기(黑旗) 연맹이 관련자 일방 타진 운운하면서, 이상 경고함 등으로 지방에 앉아서 중대사건이 돌발한 것을 알게 되었다.<<<

 

 

 

<조선총독부 경무국 / 해방 후 경찰청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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