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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18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101. 독립교회의 탄생 102.제약회사의 선전 경쟁

101. 독립교회의 탄생

 

19271127일 마산 문창 장로교회에서 벗어나온 교인 일단이 신앙의 자유와 자활적 정신에 입각하여 모든 교파를 초월하고 그리스도에게로, 인위적 조직과 제도를 더나 성서중심으로 돌아가자는 이념을 내어 걸고 독립 마산예수교회를 창설했다.

 

당시 교인 총수는 손덕우 장로를 비롯하여 남녀 200여명, 초대 교역자로는 김산(金山) 목사(중국 남경 금릉대학 출신)를 추대하니 교회 초창기에 희생적인 노력이 많았다.

 

19281127일에 헌당식을 거행했다. 당시 김 목사를 중심으로 교회에 희생적으로 봉사한 교인은 다음과 같다.

 

손덕우(장로)

한좌건, 김주봉, 박덕우, 박채우, 김은수, 최종안, 이창우, 최원칙, 유진구, 정대근, 박덕근, 황덕수, 문덕중, 이일래, 서상삼, 설반옥, 김달필, 홍삼시, 정외희, 구봉남

 

192945일 예배당 뒤 대지 54평을 추가 매수하고 교회 부대사업으로 중앙유치원을 신설, 보모 김현경 씨를 초빙하여 많은 어린니들을 기독교 정신으로 보육했다.

(역대 원장-박성칙, 이봉수, 김은수)

 

 

<1919년 건축한 문창교회. 이 교회에서 독립교회가 분리되었다 - 옮긴 이>

 

 

 

 

102. 제약회사의 선전 경쟁

 

지금은 옛날 같고 거짓말 같이 들릴지 모르지만 종전(終戰) 전까지만 해도 제약도시라는 별칭이 있었던 일본 부산시(富山市)에서는 수만 명의 선전원을 일본, 조선, 만주에 파견하여 15종입(種入)-1(, 가정 상비 구급약)를 집집마다 비치시켜 매월 1회 수금원이 순방하는데 약대는 복용한 봉투에 넣어 두기만 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다.

 

또 각 열차마다 이 구급약을 서비스하여 승객의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였고, 철도당국도 이 약을 상비해 두기도 하였으나 지금은 이런 일은 눈을 닦고 볼래야 볼 수가 없다.

 

이것은 가정상비약에 대한 얘기지만 제약회사에서는 각 병원에 어느 정도 후대를 하였던가?

 

마산도립병원에 오래 근무한 생존자의 한 사람인 동인의원 조석환 원장의 회고담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내가 일본서 돌아와서 마산도립병원에 봉직한 것은 1927년부터였지만 각 가정에다 상비약을 비치했던 사실은 나도 잘 알고 있다. 그것보다 각 관공립 혹은 개업의들이 경험한바 제약회사들의 서비스란 특수한 것이었다.”

 

단순한 선전용이나 광고용이 아닌 고급 약을 대량으로 병원에 무료 제공해 주는 것이다.

 

회사도 무명회사가 아니라 현재도 일본 국내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제일(第一), 산내(山內), 염야(鹽野), 무전(武田), 삼정(三井), 전변(田邊) 등의 제약회사에서 필요한 약은 매월 빼지 않고 우송해 왔으므로 각 병원에서 약품 구입에 신경을 별로 쓰지 않았으며,

 

더욱이 도립병원 같은 곳에서는 사무 감사 때 변명하기가 오히려 귀찮았을 뿐 아니라 처치 곤란해서 당시 사체 안치소 옆에다가 암거(暗渠)를 파고 많은 약품들을 소각 처리한 일까지 있었다고 하였다.<<<

 

 

<1927년 건축한 도립마산병원, 현 도립마산의료원 위치 - 옮긴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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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19 00:00

마산 창원 역사 읽기 (35) - 제일여고 터에 일본 신사가 있었다

4. 유적으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

4-9  제일여고 터에 일본 신사가 있었다

 

일제가 우리 민족을 무력으로 위압한 것이 군대와 경찰이었다면 정신적으로 위압한 것은 신사(神社)였다.

마산 제일여고 터가 신사였다.

<마산 시사 / 현 제일여고 터>

 

지금은 제일여고 뒤에 큰 도로가 나있지만 신사의 뒤쪽은 산이었다. 바다에서 보면 산을 향해 일직선으로 급하게 상승하는 길의 끝이다.

길 양옆에는 벚꽃나무가 즐비했고 길바닥은 조약돌이 깔려 있었으며 신사의 신주문에 이르기까지 층층이 돌계단을 밟고 올라가야 했다.

조선인이 거주했던 구마산 지역 산제당 가는 길의 꾸불꾸불하고 아기자기한 산길과는 몹시 대조적인 길이었다.

신주문 앞의 왼켠 마당에는 큰 대포 하나가 있었는데, 그 대포도 신사와 함께 동향으로 서서 마산 시가지를 내려다 보았다.

마산시의 지붕에 일본의 식민정책을 상징하는 두 쌍벽이 나란히 있었던 셈이다.

대포는 고 김형윤씨의 글에 의하면 일본 조병창에서 건조된 것으로, 일본의 군사력을

과시하기위해 마산만 중포병대대 입구의 산정에 두었다가 대대장이 1935년 마산부에 기증했고, 마산부는 이것을 신사 앞에 거치시킨 것이다.

광복 후에도 대포는 공터에 그대로 있었는데, 어느 날 「진일철공소」라는 고철공장이 마산시의 허가를 받아 망치로 두들겨 분해해서 뜯어 갔다고 한다.

일제침략을 증언하는 역사적 유물이 안타깝게도 고철로써 처분되어버린 것이다.

신사 주변과 신사로 올라가는 길가에 즐비했던 수많은 벚꽃나무들은 6·25 전쟁을 전후해서 주민들에 의해 모조리 베어져 땔감이 되었다.

배일감정도 있었지만 광복 후의 심각했던 물자난이 큰몫을 했다. 건축자재를 구한다는 것도 몹시 어려워서 집을 새로 짓기보다는 일본인들이 쓰던 건물을 가급적 그대로 고쳐 썼다.

마산 신사건물은「신마산교회」에 의해 잠시 예배당으로 사용되었다가, 1947년 제일여고의 전신인 마산 가정여학교가 이 자리에 들어서면서 교사(校舍)로 썼다.

가정여학교는 신사의 본전 건물을 교무실과 교장실로 썼고 부속건물을 교실로 사용했다.

부속건물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남아서 몇년 전 허물 당시까지 학교 민속관으로 사용해 왔다.

학교와 학교주변에 아직도 신사의 흔적이 몇몇 남아 있다.

학교 안과 바깥에 있는 길고 넓은 돌계단이 옛 신사계단이다. 돌계단은 일제하 마산 부민의 근로봉사 작업이라는 명목의 강제노역에 의해 조성된 것이었다.

근로봉사 작업은 여러 차례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지금도 제일여고에 가면 입구의 돌기둥을 받쳤던 주춧돌이 교정의 정원석으로 남아 있고 담벼락에는 축조발기인이라고 밝힌 일본인의 이름을 음각한 돌도 박혀있다.

그리고 마산제일여고의 정문이 신사의 신주문을 닮았다고 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

물론 의도적으로 신주문을 모방하지는 않았겠지만, 보기에 따라서 그럴싸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아마 계단 아래에서 바라본 육중한 문이 보는 사람을 제압하고 있다는 사실과 옛 신사에 대한 기분 나쁜 기억이 엉키어서 불러낸 느낌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설립자 이형규씨에 의하면 이 문은 전주 체육관의 정문을 보고와서 그대로 설계해 지은 것이라고 한다.

 

<제일여고 정문과 신사 입구 계단으로 사용되었던 돌계단>

 

-왜 마산에 신사를 세웠나-

원래 신사는 일본의 토착신앙을 믿는 사람들이 참배하는 곳이었다.

이 토착신앙을 신토(神道)라고 하는데, 신토는 일본인들의 악령에 대한 두려움과 초자연적인 힘에 대한 참배로부터 생겨났다.

그러므로 신토는 뚜렷한 교리도 없이 취락별 민간신앙의 범주에만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 마을마다 도시마다 그들이 받드는 주제신(主祭神)도 다양했다.

주제신은 천황가의 조상신이라고 생각하는 천조대신(天照大神)이 가장 많고, 역대의 천황, 유명한 귀족들, 무사나 문신, 각 씨족의 조상신을 마을의 수호신으로 신사에 모셔 놓고 있다.

이와 같은 공식화된 신사 이외에 일본에는 별별 희한한 귀신들을 모시는 곳이 많다.

여우를 제신으로 모시는 신사가 있는가 하면, 개를 모시는 신사, 술신을 모신 신사, 된장신을 받드는 신사, 김치를 받드는 신사, 만두를 섬기는 신사, 부뚜막신을 받드는 신사, 젓가락을 받드는 신사, 냄비를 받드는 신사, 굴뚝신을 받드는 신사, 쌀을 받드는 신사, 물을 받드는 신사, 곳에 따라서 남근(男根)이나 여음(女陰)을 제신으로 하는 신사도 있다.

여우를 제신으로 모시는 신사를 도하신사(稻荷神社)라고 하는데, 광복 이전의 한반도에도 마산을 포함해서, 서울 남산, 인천, 목포, 부산, 진해, 진남포, 신의주, 용천, 성진 등지에 있었다.

마산신사의 본전에는 천조대신을 봉안했지만, 경내 오른쪽에 여우를 모신 도하신사(稻荷神社)와 주호신(酒護神)을 모신 송미신사(松尾神社)를 병설했다.

마산에 송미신사를 특별히 세운 것은 마산이 술의 고장이기 때문이다.

산의 기후와 수질이 양조에 적합해서, 일제 당시에 우리나라 청주의 6할이 마산에서 생산되었다고 한다.

마산의 일본인 양조업자들은 일년에 한차례씩 송미신사 앞에서 성대한 제를 올렸다.

일본인은 원시신앙에 머물러 있던 신토를 일본 천황의 가계에 맞추어 조직화하고 제도화하면서 그들의 세속적 지배에 유리하게 변질시켜 왔다.

그들의 논리는 이렇다.

일본황실의 조상은 천조대신(天照大神)이다. 천조대신의 직계종손인 역대의 천황은 만세를 일계로 이어나가는 현인신이다. 천조대신은 그의 직계손인 천황이 통치하는 일본국을 항상 보살펴 주고 보호해 준다는 것이고, 일본은 신국이고 황국이며 유신의 대도가 존귀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 신사라는 이야기이다.

한반도에 가장 먼저 들어온 신사는 부산신사인데 이미 17세기에 일본인이 부산에 상주하면서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그 후 1876년 한일수호조약이 체결된 후 각 지역의 각국 공동 조계(租界)에 일본 거류민의 수가 많아지면서 거류민들은 그 조계에 신사를 세우기 시작했다.

마산조계에도 일본인들이 꽤 많은 집단을 이루고 살았는데, 이 곳에 마산신사가 세워진 것은 1909년의 일이다.

마산신사는 일본상인 히로시 세이죠(弘淸三)의 창도로 건립되었다.

「마산항지」가 신사 건립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세이죠는 마산에 사는 일본인 유지들과 신사 창건의 필요성에 대해 공감하고, 이사청을 방문해서 이사관으로부터 마산해관장 사택 예정지에 신사조성을 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는다.

마산신사는 세이죠의 말에 의하면 ‘거류민으로서의 조상신을 애호하는 염원과 진충보국 정신을 발양할 목적’으로 세워진 것이다. 1909년의 일이다.

이 때는 조선총독부가 한반도에 본격적인 신사정책을 펴기 전이고, 마산신사는 거류민들의 신앙적 차원에서 자발적으로 세워진 것이었다.

 

-일제는 신사참배를 통해 순종을 요구했다-

1915년에 들어서 조선총독부는 신사설립 기준과 그 인가절차를 정한「신사사원규칙」을 발표하고, 일본거류민들에 의해 세워졌던 각지의 대부분 신사들이 총독부로 부터 공인되고 정리된다.

1925년은 일제가 한반도 내에서 신사정책을 본격화하게 된 획기적인 분수령이 된다.

그해 서울 남산에 5년여의 공사기간에 걸쳐 조영한 조선신궁이 완성된 것이다.

조선신궁은 한반도에 거류하고 있는 일본인뿐만 아니라 한국인의 정신과 신앙심까지도 교화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조선신궁의 건립을 계기로 신사는 조선인을 소위 황국신민(皇國臣民)으로서의 충성을 강요하여 일본화(日本化)시키려는 방법으로 원용(援用)되었고, 혹독한 기독교 탄압으로 이어졌다.

1930년대의 일제는 중국 대륙 침략의 첫 발로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국을 세우고, 뒤이어 국제연맹에서 탈퇴하고, 드디어 노구교 사건을 유발하여 본격적으로 중국 본토를 침략하는 전쟁을 수행한다.

그들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 가장 절실한 것이 바로 한민족의 정신적 통일과 순종의 자세였다.

일제는 이러한 정신적인 지주를 신사 참배에서 찾으려고 했다.

조선총독부가 각 기관, 학교, 민간유지, 종교단체로 하여금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한 것은 1937년의 일이다.

그 이듬해「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이 조직되었고 이 운동의 말단 기관으로 애국반이란 것이 있었는데, 애국반원과 경찰은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또 매일 아침 시민들이 참배를 하고 있는지 감시하는 역할을 했다.

일제말기에 이르러 애국반이 460만명에 이르렀다고 하니 그 당시 신사참배의 광풍이 얼마나 참담했는가를 짐작할 수가 있다.

대부분의 조선민족이 신사참배에 굴복한 가운데 기독교인이 가장 강하게 거부했다. 끝까지 신사참배에 항거한 교회가 평양의 산정현교회였다.

산정현교회에는 민족의 거두라고 할만한 많은 인물들이 모여 있었는데, 당시 산정현교회의 장로는 한국의 간디로 통하는 고당 조만식 선생이었다.

고당 조만식 선생이 마산의 문창교회를 찾아와서 주기철(18971944) 목사를 산정현교회로 초빙한 것은 1936년의 일이었다.

주기철 목사는 진해 사람인데, 오산학교와 평양 장로회 신학교를 졸업하고 경남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부산 초량교회에서 첫 목회활동을 했다.

그는 이 때 이미 “신사참배가 기독교 교리상 어긋난다”며 ‘신사참배 반대 결의안’을 경남노회에 제출하여 정식 가결을 받아 내기도 했다.

그가 산정현 교회에 부임해 가기 전에는 마산 문창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즈음 일제는 신사참배에 반대하는 교인들을 모조리 구속하고 고문하는 잔악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주 목사가 산정현교회에 부임해서 새 교회당을 완공하고 설교를 할 때, “우리 교회는 일본 우상에 대항하여 신사참배를 절대로 아니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로 인해 주목사는 1938년 부터 1944년 마지막 순교를 할 때까지 모두 5차례에 걸쳐 총54개월 간의 투옥생활을 하게 된다.

그는 옥중에서 몽둥이찜질, 채찍질, 쇠못 밟기, 거꾸로 매달아 코에 고추가루 뿌리기, 발바닥 때리기 등 상상도 할 수 없는 갖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내 신앙적 변심을 하지않았다.

5번째로 구속돼 형무소에 갇히기 직전 자택에서 늙은 노모와 처자, 20명의 평양 산정현교회 교인들이 모인 가운데 그는 생애 마지막 설교를 남긴다.

“… 나는 바야흐로 사망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나는 저들의 손에 몇 번째 체포되었다가  나와서 이 강단에 다시 섰으나 나의 목숨을 빼앗으려는 검은 손은 시시각각으로 닥쳐오고 있습니다. 이제 나는 ‘사망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 아니할 수 없습니다. 무릇 생명 있는 만물은 다 죽음 앞에서 탄식하며 무릇 숨쉬는 인생은 다 죽음 앞에서 떨고 슬퍼합니다. 사망 권세는 마귀가 사람을 위협하는 최대의 무기인가 봅니다. 죽음을 두려워 의를 버리며 죽음을 면하려고 믿음을 버린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

숱한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그는 평양형무소의 한 귀퉁이에서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주기철 목사의 장례>

 

-일본 귀신은 승신식을 통해 일본으로 갔다-

일본의 침략전쟁이 끝난 1945815일 현인신으로 군림하던 천황은 보통 인간으로 돌아왔다.

조선총독부는 종전과 동시에 조선신궁에 안치해 두었던 어령대를 동경 궁내성으로 돌려 보내고 각 지역의 신사에서는 승신식을 일제히 실시하게 했다.

승신식이란 신사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신관이 엄숙하게 주문을 읽고 위패를 불태우면 신령이 하늘로 해서 본국으로 돌아간다는 의식이다.

마산신사의 승신식은 총독부의 지시에 따라 94일 집행되었다.

광복과 함께 한반도에서 광기를 부리던 일본의 군국주의 망령이 비로소 제 고향으로 되돌아가게 된 것이다.<<<

이현도 / 당시 창원대학교 독문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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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양만춘 2015.01.22 10:42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그런 귀신을 받들었으니 사람을 그렇게 탄압한 게 아니겠어요?
    아직도 잘못한 걸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귀신에 씌여도 단단히 씌인 게 이닐지...

    • 허정도 2015.01.22 17:54 신고 address edit & del

      그러게 말입니다.

2014.08.25 00:00

마산·창원 역사 읽기 (14) - 일제하 치열했던 민족해방운동

2. 청동기시대에서 10·18까지

2-7 일제하 치열했던 민족해방운동

 

1876년 조선이 강제적으로 세계자본주의체제에 편입된 이후 마산지역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일본인들과 친일 조선인들에 의해 잠식당하였다.

원래 마산은 개항 이후 러시아와 일본의 조차지 경쟁이 치열했던 까닭으로 개항 초기부터 외세에 의한 피해가 컸던 지역이었다.

특히 마산은 항구를 끼고 있었기 때문에 해상운송부문 및 어항과 관련한 상업부분을 잠식하기 위한 일본 상인들의 침략이 노골적으로 진행되어 마산은 일본인의 소굴로 변해 갔다.

1911년 일제는 마산항의 개항(開港)을 폐쇄하고 일본과의 단독무역만을 허락하였다. 그 결과 마산은 조선의 쌀을 비롯한 각종 물자를 일본으로 실어나르는 전초기지 역할을 하였고 동시에 일본의 소비재를 수입하는 창구로 변질되어 갔다.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해 쌓아둔 인천항의 쌀가마니>

 

또한 일제는 과거 일본인 조계지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식민도시를 건설하기시작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에 대응하는 마산사람들의 저항도 점차 그 강도를 더해가게 되었는데, 시장권과 매축권을 수호하기 위한 운동과 어용단체 신상회사(紳商會社) 철폐 및 국채보상운동 등이 그 한 예이다.

또한 마산의 토착 상인들은 일본상인들과 대결하기 위해 민의소와 조선인 상업회의소를 만들어 일본의 경제적 침략에 대응하기도 하였다.

 

-‘천황만세’를 거부한 창신학교 학생들-

1910년 조선을 완전식민지로 만든 일제는 조선인의 저항을 막고 영구적인 지배를 위해 무단통치라는 극악무도한 지배방식을 택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에 대한 조선인들의 저항은 의병전쟁의 패배로 그 힘이 약화되어 본격적인 투쟁을 하기에는 역부족이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점차 독립에의 꿈을 버리고 일제에 굴복하는 경우가 많았다.

마산의 민의소와 조선인상업회의소에 관계하였던 많은 조선인 자본가들도 자신들의 입지를 위하여 일제에 굴복하였으며, 일제를 칭송하였다.

나아가 그들은 대표적 친일단체 마산교풍회를 설립하고 민중들을 통제하는 앞잡이 역할을 하였는데, 김병선, 손덕우, 김선집, 옥기환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들은 한말 이후 교육과 계몽을 통해 마산의 근대화에 앞장선 점도 있지만, 또한 친일의 길을 걸어갔던 것도 사실이었다.

이들에 비해 같은 자본가였지만, 비밀결사를 조직해 일제에 저항한 조선인 상인들도 있었다.

1910년대의 대표적인 민족해방운동 비밀결사조직인 ‘조선국권회복단 마산지부’의 지부장 안확, 이형재, 김기성, 배중세 등이 그러하였다.

뿐만 아니라 창신학교와 의신여학교 그리고 마산노동야학교에 관계했던 많은 사람들도 1910년대의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독립에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1911년에 일어난 창신학교 학생들의 항거사건은 그 좋은 예라고 할 수있다.

1911년 조선침략의 우두머리였던 일본국왕 명치(明治)가 죽고 대정(大正)이 즉위하자 일제는 이를 기념한다는 명목 하에 각급 기관과 학생들을 동원하여 시가행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천황만세를 소리 높이 외칠 것을 주문한 일제에 대해 당시 행사에 동원되었던 창신학교 학생들은 호응하지 않고 일제에 저항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제의 기마경찰과 충돌한 학생들은 일제 경찰들을 공격하여 자산천(지금의 무학초등학교 옆 개울)에 밀어넣어 버렸다. 이 일로 창신학교는 많은 곤욕을 치룬 것으로 알려졌다.

일제에 강점당한 이후 국내에서는 일제에 반대하는 투쟁이 계속되었지만, 대부분의 투쟁은 일회적인 것이었고 조직적으로는 전개되지 못하였다.

그러19193월 만세시위는 그 사정이 달랐다. 그 시위는 일제를 놀라게 하였고 독립을 위한 조선인의 기개를 만방에 드높인 것이었다.

당연히 마산에서도 시위는 조직되고 시도되었다. 마산의 3·1운동은 기독교 계열과 연계되어 있던 이갑성(민족대표 33가운데 1인)과 임학찬 등이 중심이 되어 시작되었지만, 비밀결사 대동청년단 세력과 연결이 되고 있었던 김용환, 이형재 등 전투적 민족주의자들도 큰 역할을 하였다.

이 밖에 창신학교와 의신학교의 교사였던 이상소와 박순천 등도시위를 계획하거나 주도하였다.

만세 시위의 주 참가자는 창신학교와 의신여학교, 마산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마산 시민과 인근 지역의 농민 등 광범위한 대중들이 참가하였다.

특히 마산의 시위는 33일 두척산(무학산) 시위를 필두로 321일, 325일, 331일 등 4차례 이상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으며, 4월에는공립보통학교의 학생들도 만세시위를 감행하는 등 어느 지역 못지 않게 그 열기가 뜨거웠다.

그러나 일제는 김용환, 이상소, 박순천 등 48명을 감옥살이를 시켰으며, 특히 김용환은 일제의 심한 고문으로 감옥에서 옥사할 정도로 그 기개가높았다.

3·1 운동 이후 국내외를 막론하고 전민족적인 민족해방과 독립에의 열기가 고조되고 있었지만, 민족해방운동 진영에서는 운동의 방법론을 둘러싸고 운동세력들이 나뉘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대개 실력양성을 통해 점진적인 독립을 추구하는 세력과 일제에 대한 전면적인 항쟁을 통해 즉각적인 독립을 추구하는 세력으로 나뉘어졌다.

그러한 상황은 마산지역도 마찬가지였다. 마산지역에서도 3·1동 이후 실력양성론을 추구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른바 ‘문화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이들은 19206월경 마산지역 문화운동의 구심점으로‘마산구락부’를 창립하고 교육·체육·계몽·교류활동 등을 활발하게 벌여 나갔다.

마산구락부를 만든 사람들은 과거 마산 민의소의 회원들이 많았으며, 손덕우, 옥기환, 김치수 등 대개가 상인을 비롯한 지주 출신의 자본가들이었다.

이들은 마산학원과 마산여자야학을 설립하여 정규학교에 가지 못한 아이들을 교육하였다.

또한 조선인 전용의 운동장을 만들어 각종 체육행사를 열었으며, 강연회, 토론회 등도 개최하는 등 적극적으로 문화운동에 나섰다.

밖에도 마산지역의 문화운동을 이끌었던 단체로 기독교 계통의 면려청년회와 면려청년회를 지원하던 문창예배당(교회)도 큰 역할을 하였다.

 

<1901년 설립된 마산문창교회의 1919년 모습>

 

그러나 마산지역의 문화운동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1922년 이후에는 극심한 침체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것은 1920년 이후의 경제공황과 더불어 조선인 자본가들의 자금력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며, 또 일반 대중을 조직과 사상면에서 이끌어 갈 수 있는 힘이 부족하여 더 이상의 발전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마산지역 문화운동의 집회장소로 자주 이용되던 문창예배당을 교회측이 더 이상 집회장소로 사용하지 못하게 한 것은 문화운동이 대중과 분리될 수 밖에 없었던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것이다.

 

-사회주의가 주도한 노동·농민 운동-

한편 문화운동을 주도하던 민족주의 계열의 인사들이 민족해방운동전선에서 이탈할 즈음 마산지역에서는 사회주의사상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새롭게 등장하고 있었다.

김명규, 김형두, 손문기, 이주만, 이근우 등은 19221111일 ‘신인회’라는 사상단체를 조직하였다.

사상단체란 1920년대 전반기 사회주의 사상을 중심으로 한 진보적 사상을 연구하며 노동운동과 농민운동 등 대중운동을 지도했던 단체로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에서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신인회는 19238월 조직을 확대하여 혜성사(살별회)로 개편되었는데, 신인회와 혜성사의 초기 회원 중에는 민족해방과 새로운 사회 건설이라는 1920년대 사회주의 운동의고유한 목표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혜성사의 조직 이후 혜성사의 주요 조직원들은 사회주의 사상의 본격적 연구와 전파, 그리고 성장하는 노동·농민운동을 비롯한 민중운동을 지도하려고 하였다.

 

<1921년 준공된 마산 경찰서>

 

1924년 마산노동 동우회를 통하여 경남지방의 노동·농민운동 단체를 ‘조선 노동 총동맹’에 가입시킨 것은 이들의 활약에 힘입은 바가 컸다.

또한 노동자를 대상으로 하는 각종 강습회를 개최하였으며, 동경대지진 학살 동포에 대한 추도 및 기근 구제활동 그리고 지역내부의 파업활동에 대한 지원 등 여러가지 사회활동을 전개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1925년 건설되는‘조선공산당’에도 적극 참여하여 조선공산당 마산 야체이카(세포 -당원)가 되었다.

특히 김영규와 김형선은 1926년 조선공산당의 경상남도 집행위원회의 당과 공산청년회의 책임자가 되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신인회와 혜성사 출신의 민족해방운동가들이 경남지역에서 어떤 위상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알게 해준다.

그러나 1926년 조선공산당이 계획하고 주도한 6·10만세운동의 준비과정에서 김명규, 김기호 등 10명이 검거되고 김형선은 상해로 탈출을 하게 되는데, 지도부가 검거되자 마산지역의 조선공산당 활동은 사실상 중단되게 되었다.

이것은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 따른 결과이기도 하겠지만, 당원의 대부분이 일제에 쉽게 노출될 수 있는 대중단체의 간부직에 있었던 그들 자신들의 잘못된 활동 때문이기도 하였다.

일제하 마산지역에서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계열 외에도 아나키즘(무정부주의)계열의운동도 존재하였다. ‘마산 아나키스트 그룹’이 바로 그들이다.

마산 아나키스트 그룹은 1925년 김형윤을 중심으로 조한응, 김계홍 등이 최초로 시작하였는데, 본격적 활동은 1927년 서울에서 ‘김산’이라는 무정부주의자(직업은 목사)가 내려오면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외국인 선교사나 일제로부터 벗어난 자주적인 독립교회 활동을 전개하여 대중들의 지지를 많이 받았다.

대중의 지지를 확보한 마산의 무정부주의자들은 창원의 무정부주의 단체인 ‘창원 흑우연맹’과 연계하여 무정부주의에 관한 서적을 탐독하면서 일제에 저항하는 반제국주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1928년 상해에서 개최된‘동방 무정부주의자 연맹 결성대회’에 회원인 이석주를 파견하여 국제단체와 연계하기도했다.

그러나 마산과 창원에서 활동하던 이석주가 일제에 체포되면서 김형윤 등 다른 조직원들도 검거되어 마산아나키스트 그룹의 활동은 현저히 약화되었다.

일제하 마산지역에서는 이후에도 일제에 대한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1929년 조선전역을 강타한 광주학생운동의 여진 속에서 발생한 ‘친일교사 배척운동’ 시위사건과 1937년 신사참배거부를 주도했던 마산 창신학교의 학생들은 폐교가 될 때까지 일제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였다.

이외에도 수없이 많은 노동자·농민 등 생산대중의 일제에 대한 투쟁도 일제하 마산지역의 민족해방운동에서 당당히 그 역할을 다했다고 할 것이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이승만 독재와 박정희 독재정권에 대항하는 민주화운동의 성지로자리잡은 마산의 역사적 위상은 바로 일제의 억압에 굴하지 않고 치열한 저항정신을 보여준 마산인들의 역사적 경험에서 이미 예고되었다고 해야할 것이다.<<<

신춘식 / 당시 동아대학교 사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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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04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5) - 강점제1시기

<요보?>

<한 시기의 마산사회상황을 짧은 글로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만 1910년대 마산상황 중 종교와 교육 그리고 당시 사회분위기의 일편을 간략히 포스팅합니다>

합방 2년 후인 1912년 4월 8일 당시 양산 통도사 주지인 천보(天輔) 김구하(金九河) 큰 스님이 마산지역의 포교를 위해 사답(寺畓)을 팔아 현 추산동 포교당(정법사) 터에 설법전(說法殿)을 창설한 것이 근대 마산불교의 시초입니다.

1년 후인 1913년 서울 각황사에서 전국 30본사(本寺) 주지들이 조직한 ‘불교진흥회’의 발기 간사인 위암(韋庵) 장지연(張志淵, 1864년-1921년)이 진주에서 마산으로 이주하여 8년 동안 살았습니다.
이 때 위암은 마산불교진흥회를 조직하여 불교 발전에 진력을 다했으며 천보(天輔)스님과 자주 교류하였습니다.

아래 사진이 1912년에 건축한 추산동 포교당입니다.
 

새 건물을 짓는다고 최근 헐었습니다.
 마산에서 가장 오래된 불교건축이 사라진 겁니다. 우리 지역 불교사의 상징적인 유산이 없어진다고 일각에서 안타까움을 표하기도 했지만 소리가 너무 작았습니다.

1901년 조선예수교 장로교회 공의회가 조직되면서 마산교회를 태동시킨 기독교는 이후 노산 이은상의 부친 이승규 등이 입교하는 등 교세를 넓히다가 1903년에는 마산포교회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1919년에는 추산동에 신축예배당을 준공하고 명칭을 문창교회로 고쳤습니다.
아래 사진이 당시 신축한 문창교회의 사진입니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석조 건물입니다.

 20세기 벽두에 들어온 가톨릭은 완월동에서 천천히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고 개항직후 들어온 일본불교도 확장되어 갔습니다.

그 시절 마산의 교육기관으로는 합방 이전부터 있던 마산공립보통학교(현 성호초등학교), 마산공립심상고등소학교(현 월영초등학교), 사립 창신학교, 노동야학을 비롯해 1910년에 설립해 1911년 학생 50명으로 인가를 받은 외서면 완월리의 사립성지학교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1913년에는 창신학교의 여학생들로 구성된 의신여학교가 독립하여 개교하였고, 1915년에는 장군동 2가에 마산공립실과여학교가 개교하였습니다.
사립여학교는 의신과 성지가 있었지만 공립으로는 마산실과고등여학교가 최초였습니다. 이 학교는 1921년 실과여학교에서 고등여학교로 바뀌었는데 현재 마산여자고등학교의 전신입니다.
 

이 중 사립창신학교는 당시 신교육을 접한 많은 양심적 지식인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안확을 비롯한 민족지도자들이 학생을 가르쳤고 고루 이극로 같은 선각자들이 이분들에게 배웠습니다.
창신학교는 식민지 백성의 혼을 일깨우고 민족독립을 위한 저항정신을 불어 넣는 신식교육기관으로 마산사람들의 자존심이었습니다.

뿐만아닙니다.
개교할 때 호주선교사들의 도움이 컸던 탓에 학문, 체육, 예술 등 서양문물도 창신학교를 통해 많이 들어왔습니다.
한 예로 1914년 한강이남 최초로 창신학교 고등과에 7인조 밴드부가 창설되어 서양음악을 경남지역에 보급하기도 하였습니다.
아래 사진이 당시 창신학교밴드부입니다.


당시 창신학교를 말할 때 유독 ‘사립’을 강조하며 접두어로 붙였습니다.
식민지시대라 ‘공립’은 사실상 일본인 것이었고 '사립'만 한국인들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밖에 1907년 마산의 유지들에 의해 개교된「노동야학」은 1914년 10월, 1,300엔이라는 당시로서는 큰돈으로 창동에 교실 여섯 개를 가진(140평) 교사를 마련하였습니다.
마산의 노동야학활동은 전국적으로도 이름이 높았습니다.
1921년 한 해 동안 동아일보가 마산의 노동야학에 대해 보도한 것이 열일곱 번이나 될 정도였으니까요.

강점제1시기인 1910년대는 이질적인 두 나라의 문화충돌이 심했습니다.
지배자의 오만과 피지배자의 절망이 낳은 충돌과 갈등이 전국을 뒤덮었습니다.

식민지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더라도, 식민지 땅에서 일어난 지배민족과 피지배민족 간의 차별과 탄압, 그리고 전혀 다른 가치관과 문화에서 오는 이질적인 생활 습관 때문에 전국적으로 두 민족 간의 갈등과 마찰이 노골화되었습니다.

당시 일본인들은 한국인을 ‘요보’(‘여보세요’에서 ‘여보’의 일본인 발음으로 한국인을 놀리는 표현)라고 불러대며 모욕하였습니다.
공중목욕탕에서는 일본인들이 목욕을 마친 다음에라야 한국인의 입탕이 허용되었습니다.
기차나 전차에서 일인의 옆 좌석이 비어있더라도 한인은 앉을 수 없었으며, 길 가던 일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는 이유로 함부로 구타하는 횡포가 일상화되어 문제도 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마산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런 상황을 알 수 있는 그 시기 언론보도 몇 가지를 소개합니다.

① 매일신보 1915년 2월 6일
「중전(中畑)이라는 일본인이 인천나무시장 근처를 가다가 나무바리가 길가에까지 차서 통행에 지장이 있다고 하여 성냥불로 이 나무 저 나무에 불을 질러 불이 크게 번짐」
② 동아 1920년 4월 19일
「시야(矢野)」라는 부산의 일인 운수업자가 노임 시비 끝에 한인 노무자 수백 명에게 권총을 난사」
③ 동아 1920년 6월 21일
「여름철만 되면 일인들이 벌거벗고 길거리를 횡행하여 큰 사회문제화」
④ 동아 1920년 8월 6일
「서울 황금정(을지로) 4가 공동수도물을 먼저 길러가겠다고 일인 우체국원 조천(早川)이 한국 부인을 군도(軍刀)로 위협」<<<



2011/05/1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8) - 강점 제1시기
2011/05/2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9) - 강점 제1시기
2011/05/3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0) - 강점 제1시기
2011/06/0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1) - 강점 제1시기
2011/06/1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2) - 강점 제1시기
2011/06/2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3) - 강점제1시기
2011/06/2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4) - 강점제1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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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14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9) - 개항이후

<한일병합 전, 마산포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오늘부터 마산포(원마산)의 옛 모습에 대해 7회로 나누어 포스팅하겠습니다.

근대적인 계획도시였던 신마산과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전통도시 원마산의 사정은 사뭇 달랐습니다.

당시 마산포(원마산)의 규모입니다.


1900년-1910년 경 마산포는 인가(人家)가 조밀하고 상점이 번화했으며 2,000여 호의 재래식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습니다. 상점가는 주로 해변에 면해 있었습니다.

마산포의 중심부인 현 제일은행 마산지점 자리에는 정사각형의 1,500여 평의 부지에 150여 년 동안 존속해 온 마산창이 개항과 함께 감리서아문(監理署衙門)으로 변해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마산창은 100여년 전까지 존재했던 건물로서 규모․위상․역사성이란 측면에서 가장 상위의 관아였습니다.
마산창에 대해서는   <2010/06/28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 - 조선시대> 에서 이미 소개하였습니다.

마산창 주변은 좁은 길가에 잡화상과 미곡상 등의 상점으로 가득 차있었으며 주위 안팎에 마산창과 관련된 공덕비를 비롯한 석탑들이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일제기에 창동을 석정(石町)이라고 불렀는데 이 석탑들 때문에 지어진 지명이었던 것 같습니다.

기록으로 당시 마산포 상황을 짐작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1901년 창동 구 시민극장 뒷골목에 있었던 황영택 장로의 집에서 마산의 기독교가 시작되는 최초의 모임이 있었다는 『문창교회백년사』 기록과
같은 해 마산 최초의 천주교 신자 김달시시오의 집이 오동동에 있었다는 『
天主敎馬山敎區設定10주년기념집』이 그것입니다. 
이 두
기록을 보면 도로변을 제외한 골목 안쪽은 대부분 주거용 건물로 사용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 밖에 창동의 옛 시민극장 자리에 마산민의소가 1908년 건립되어 사용되고 있었으며 1898년 마산창 내에 마산포우편물취급소가 설치된 후 1909년에 구마산우편소로 개칭되어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이 외에 남성동 일대에 마산금융조합과 진주농공은행마산지점 등의 금융시설이 있었으며 1909년에는 수성동에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출장소가 생겨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1906년 조창부지 서쪽에 일본인 등기공수(藤崎供秀)가 한인가옥 사이에 일본식의 점포를 2-3채 지어 세를 내주고 그 지역이 마치 제 지역인양 등기정(藤崎町)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1908년에 마산포 영역인 서성동에 길천(吉川)이란 일본인이 사는 목조2층의 요정 '명월루'에 화재가 났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등기공수(藤崎供秀)와 길천(吉川)에 대한 두 기록은 을사조약 후 일본인들의 마산이주가 본격화되고부터 원마산에도 일본인들이 건축물도 짓는 등 상당한 진출이 있었던 것을 보여주는데 더 이상 자세한 정황은 알 수가 없습니다.


마산포의 시장은 번화했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당시의 마산포(원마산) 사정을 엿볼 수 있는 사진 두 장을 소개합니다.

조선통감부농상공부수산국에서 1910년 펴낸 『韓國水産誌』에 수록된 사진입니다. 책의 간행연도가 1910년(隆熙4년)이니 사진촬영 시기는 1908-1909년 혹은 그 이전일 수도 있습니다.




「구마산예시의 건염어점(舊馬山例市の乾鹽魚店)」이라는 설명과 함께 소개된 두 사진을 보면 좁은 시장통에 초가의 상점이 늘어서 있는 정경과 사람 수를 보아 상당히 성황을 이룬 거리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목조 흙벽에 초가를 얹었지만 늘어선 품새로 보아 시장이 번성했음을 한 눈에 알 수 있습니다.
아마 마산포 시장의 이런 모습이 조선 후기 내내 이어져 왔을 것입니다.

다음 글은 1908년 일본인 전연우언(田淵友彦)이 쓰고 박문관(博文館)에서 펴낸『한국신지리(韓國新地理)』254쪽에 수록된 마산관련 글입니다. 

**************************************************************************************한인가(韓人街, 마산포)는 마산만 안쪽의 북쪽에 각국거류지로부터 20여 정(丁, 1丁은 109.1m, 町이라고도 함)에 있으며 구마산이라고도 칭한다.

수 천 여 호에 인구가 약 4,500에 이르는데 옛날 조공미를 모은 집산지로서 함경도의 원산, 충청도의 강경과 더불어 팔도 3대 항구 중 하나로 일컬어 온 곳으로서 경상남도에서는 시가(市街)로서 제3위를 점한다.

마산 개항 당시에는 일본 상인들이 모두 여기에서 조선인들과 혼거하여 살았다. 또한 본 항 무역의 대부분을 점하고 있는 미곡은 가을과 겨울, 출하의 계절에 오직 여기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므로 일본인들도 여기서 거주하는 사람이 많은데 1904년 6월 현재 호수는 42호이고 남자89명․여자 56명이다.

구마산의 개시일(開市日)은 매월 3회로 5일․15일․25일에 열리는데 장날에는 부근 10 리 내지 20 리 떨어진 지역으로부터 주민들이 모인다. 특히 쌀이 출하되는 계절에는 조선화폐 취급고가 50,000관(貫, 관은 ‘괘’의 뜻으로 엽전 열 꾸러미, 곧 열 냥을 하나치로 계산하는데 쓰는 말이므로 1관은 10냥(兩)을 말한다) 이상 달하기도 한다.

구마산은 또한 어류집산지로서 염장어(鹽藏漁)를 위시하여 해삼․명태 등의 건어물을 취급하는 상점이 20여 호이며 매년 취급고가 수 십 만원까지 오른다. 어류는 일본어선 및 한국어선으로 공급하고 판로는 경상도․전라도로부터 충청도 방면까지 이른다.

일본인 중에서 구마산에서 일본어 학교를 열어 한국인 자제의 교육에 착수한 사람이 있다. 현재 학생이 수 십 명에 달하며 점차 발전하고 있다.




다음 글은『한국신지리(韓國新地理)』보다 6년 먼저 나온『韓國 案內』의 마산기록 중 마산포의 도시상황을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 책은 일본인이 쓴 근대기 마산관련 최초의 문헌으로, 일본인
香月源太郞이 쓰고 東京 靑木嵩山堂에서 1902년 출간했습니다.

서울대 중앙도서관에서는
『韓國 案內』를 '대한제국기에 한국을 방문하는 일본인 여행객들을 위하여 한국의 개항장 등의 경제발전상황을 통계자료를 이용하여 소개하고 관광할 만한 명승고적과 은행 등의 위치를 기록하고 있는 책자이다'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구 마산포(舊 馬山浦) p.322

각국 거류지를 지나 약 10리 거리의 창원가도(昌原街道)에 있고 인가가 조밀하고 상점이 번화한 곳이다. 호수는 2,000여호이며 감리서(감리는 창원군수가 겸임), 경찰서 등이 있고 시가는 해변에 면하여 선박화물의 폭주가 매우 빈번하다.

옛날에는 이곳이 일본상인(행상)의 근거지였지만 마산개항에 즈음하여 신마산으로 이전하였다. 지금도 20여 호가 있고 대부분 조선가옥에 기거하고 있다.
 
**************************************************************************************

에 나오는 한국인과 일본인의 숫자는 다른 자료와 차이가 많아서 정확도에 의문이 생기지만 당시 마산포가 얼마나 활발했었는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산포의 세밀한 상황은 복원도를 포스팅할 때 소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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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2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7) - 개항이후
2010/12/2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8) - 개항이후
2011/01/0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9)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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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는 왜 시위에 직접 참가했던가 2. 그는 왜 그토록 오랫동안 침묵했던 것일까 1) 보복 공포와 빨갱이 트라우마 2) 증언 결심 동기 하상칠은 그동안 증언을 하지 않았던 이유에 대해 “그날 밤 내 혼자만 싸웠던 것도 아니..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6

1. 그는 왜 시위에 직접 참가했던가 2. 그는 왜 그토록 오랫동안 침묵했던 것일까 하상칠의 증언에서 품게 되는 두 번째 의문은 그는 왜 그토록 오랫동안 시위 참가 사실을 비밀로 유지해왔는지 그리고 50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증..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5

1. 그는 왜 시위에 직접 참가했던가 1) 사회적 요인 2) 개인적 요인 동일한 사회적 요인이 주어져 있다 해도 모든 시민이 동일한 반응을 하는 것은 아니다. 저항심이 강하든 정의감이 투철하든 또는 사회적 불만이 가득하든 모두..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4

Ⅲ. 얼음장수의 미스터리 3․15의거 역시 한국의 민주화 과정에서 일어났던 다른 대규모 시민항쟁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분석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기존 분석은 대부분 거시 사회사 분석으로서 항쟁 참가자들의 정의감이나 불만이 저..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3

Ⅱ. 얼음장수의 정체, 증언 및 평가 2. 녹취와 증언록 다음은 하상칠이 2010년 7월 21일 14시 3 15의거기념사업회 회의실에서 당시 백한기 회장 앞에서 2시간여에 걸쳐 진술한 증언 녹취록을 풀어 그해 말 동 사업회에서..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2

Ⅱ. 얼음장수의 정체, 증언 및 평가 1. 연구 대상자 프로필 (이 부분은 연구 대상자가 필자의 장인이어서 평소 필자가 그에게 들어서 알고 있는 사항과 그의 사망 후 필자가 이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후 그의 가족, 일가, 지인..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1

이 글은 1960년 3․15의거 당일 야간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가했던 한 개인의 증언을 바탕으로 그의 개인사를 하나의 창으로 삼아 역사적 사건을 재조명한 경남대학교 경제금융학과 서익진 교수의 논문이다. 연구는 사적 기록이나 증..

걸작 - 이집트 룩소르 구르나 마을 - 4

구르나 마을이야기 - 2 《극장》 극장은 아름다운 내부공간과 무대를 가지고 있었다. 햇빛을 가리기 위해 담쟁이가 덥혀있었다는 객석 회랑 목조 파고라 위의 담쟁이는 이미 찾아볼 수 없었지만 흙으로 빚어진 구조물은 모두 원형대로 ..

걸작 - 이집트 룩소르 구르나 마을 - 3

구르나 마을 이야기 - 1 일행이 나일강변에 자리한 경관 좋은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던 오후. 안내자와 함께 조그만 배를 타고 나일강을 건너 구르나 마을로 향했다. 구르나 마을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현지 안내자 덕분이었다. 그..

걸작 - 이집트 룩소르 구르나 마을 - 2

위대한 건축가 하싼 화티(Hassan Fathy) - 2 하싼 화티가 구르나 마을을 건설할 1940년대 중반, 그 당시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던 이집트는 서양식 건축이 판을 치고 전통적인 이집트 양식의 건물들은 사라져가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