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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20 00:00

기억을 찾아가다 - 6

6. 한국전쟁기의 봉암동 - 징병, 피난 귀향

 

전쟁 나고 열흘 쯤 되었다. 낯선 얼굴을 보기 어려운 시골마을에 낯선 복장에 낯선 체형의 사내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우린 아직 어려 잘 인지하지 못했으나, 어른들이나 형들의 말을 들으면서 우리의 눈에도 그들의 양태가 박히게 되었다.

허름한 바지저고리에 짚신이나 낡은 검정고무신 차림과는 완연히 대조되는, 색깔 있는 셔츠에 빳빳한 바지, 그리고 단단하고 날렵해 보이는 운동화 차림이었다.

가을이 되어서는 당시로선 구경조차 하기 어려웠던 점퍼들도 입고 있었다. 체격도 구부정한 농민들과는 달리 몸이 곧고 날렵해 보였다. 형사들이었다.

그들이 나타나면 우리들도 알아보게 되었고, 형들이나 아저씨들에게 전해주기도 했었다.

그들은 징집대상자들을 차출하러 그렇게 다니면서 나이 웬만한 남자들을 보면 꼬치꼬치 추달했었다.

골목 어귀에서 맞닥뜨린 동네 형이 산 쪽으로 도망치다 잡혀오는 것도 보았고, 미리 귀띔을 받고 산골로 들어가는 동네 형이나 아저씨들도 더러 보았다.

내 큰형은 고1(당시 학제로는 중4)이라 징집 적령이 멀었는데도 키가 컸던 탓으로 그들의 추달에 곤욕을 치른 일이 여러 번 있었다.

그랬는데도 우리 동네에선 간 사람보다 안 간 사람이 더 많다고들 했다.

한편, 보국대(전시근로동원법에 의한 차출)라는 명칭으로 차출되었다오는 사람들도 많이 보았다. 주로 삼십대 후반이나 사십대 초반의 남자들이었던 것 같은데 그보다 훨씬 나이든 아저씨들도 끌려갔다 왔다는 이야기도 몇 번 들었다. 할당 받은 사람 수를 채우지 못할 땐 그렇게 된다고들 했다.

 

<산악전 지원을 위해 준비하고 있는 보국대>

 

피난 직전, 그러니까 7월 중순쯤에는 사태의 심각성도 모른 채 내 큰형도 나갔다가 온 식구가 조바심을 쳤던 기억도 가지고 있다.

진동에 가서 길 고르는 일 두어 시간만 하고 점심 전으로 데려다 준다고 집집마다 한 사람씩 나오라고 해서 큰형이 자원했고, 그래도 행여나 해서 아버지는 같이 가는 이웃집 아저씨들한테 신신당부해두었는데 그날 자정이 넘어서야 사색이 되어 걸어서 돌아왔던 것이다.

가니까 참호를 파라고 했고, 거기에 모래자루 쌓는 일까지 다 마치니 멀리서 대포소리 같은 것이 들려 더 공포스러웠다고 했다.

거기다 감독하는 사람이 형의 나이를 묻고, 회유도 하고 협박도 하는 통에 이웃집 아저씨까지 합세해서 회피하느라 더 힘들었다고 했다. 형사들 들락거림은 아마 전쟁기 내내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마산이 인민군들이 들어오지 못한 얼마 안 되는 지역이었던 터라 피난 갔다 온 얼마 후부터 다른 피난민들이 들어오기 시작했고, 외지에 나가 있던 동민 가족들이나 친척들도 상당수 보였다.

어느 날, 이웃에 살던 물집(염색업하는 집) 어머니와 딸들이 울면서 아리랑고개(1차 매립 때 동네 서쪽 들머리에 생긴 조그만 고개) 쪽으로 뛰어가는 것을 보았다.

부모님들과 우리 형제들도 한길로 나가 그쪽으로 보고 있는데 얼마 안 있어 고갯마루로 그 집 가족들이 나타났다. 우리 부모님들도 울먹거리며 마중을 나가다가 통곡하며 오는 그 가족들과 마주 했다.

부모님들끼리 손을 잡고 인사를 나누었는데, 어린 내 눈에도 그 아저씨와 두 딸의 모습은 너무나 남루했다. 딸 일곱으로 해서 딸부자 소리를 들었던 그 아저씨는 전쟁 일 년 전 쯤 딸 둘을 데리고 서울로 가서 고무신 공장을 했었다.

자세한 얘기는 못 들었지만, 전쟁나자 바로 딸들 데리고 귀중품만 챙겨 군인들을 피해서 걸어왔다고 했다.

인민군도 피하고, 미군도 피하고, 국군이나 경찰도 되도록 피하며, 길도 묻고 물으며 빈집이나 산야에서 숙식하며 사십 일 이상이나 걸어왔다고 했다. 준비한 고무신 다섯 켤레씩이 모두 걸레처럼 됐다고 했다.

 

 

그로부터 여러 달 후에 서울 살던 넷째 고모 네가 우리 집에 왔다. 고모부는 서울에서 무슨 장사를 했었다고 들었다.

그들은 산호동에 큰댁이 있어 거기에 거처를 마련했는데 그날 우리 집에 다니러 왔던 것 같다. 나보다 대여섯 살 아래인 딸과 아직 업혀 다니는 딸을 데리고 왔었는데, 그날 큰딸이 보인 행태가 아직도 내 눈에 삼삼하다.

마당에서 나와 내 여동생과 무슨 놀이를 하고 있을 때 공중에서 제트기 소리가 났다.

몇 달 전까지만 해도 신기한 소리였으나, 전쟁 후부터는 하루에도 십여 차례씩 들었던 소리라 예사로 느꼈는데, 갑자기 그 동생이 내 바짓가랭이를 붙들고 부들부들 떠는 것이었다.

의아해하는 우리 가족들은 고모의 설명을 듣고서야 이해할 수 있었다. 서울 수복 때 제트기의 공습이 수없이 있었고, 그때마다 군데군데 불바다가 일어 질겁했는데, 그때 충격을 받은 것 같다고 했다.

얼굴도 예쁘고 눈매도 초롱초롱했던 그 여동생은 그 후 오랜 세월 동안에도 그 상처를 극복하지 못해 정신 이상 상태로 고생하다 갔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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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06 00:00

기억을 찾아가다 - 4

4. 한국전쟁기의 봉암동 - 미군들

 

미군들에 대한 이야기의 상당 부분은 필자의 졸저 상식의 서식처에서 빌어 오고자한다.

 

피난처에서 돌아온 날부터 나는 참 신기한 것들을 많이 보았다.

귀를 막아야 할 정도의 굉음을 내며 땅 흔들림을 발로 느낄 정도로 요란스레 굴러가는 탱크와, 탱크 위에 달린 대포보다 훨씬 큰 포를 끌고 가는 차, 엄청나게 크면서도 쇠뭉치로 만든 것 같이 견고해 보이고, 그러면서 간혹 꽝하고 큰 방귀를 뀌는 것 같은 소리를 내며 달리는(그래서 우리들은 그것을 방귀쟁이 차라 불렀다) 큰 군용차 등이 모두 신기하게 보였다.

그리고 더 신기한 것은 그 위에 앉은 모든 군인들이 희고 검은 괴상하게 생긴 사람들이란 사실이었다. 우리 집은 마진국도변에 있었기 때문에 그런 광경들을 많이 볼 수 있었다.

진해항에 싣고 온 군인과 장비들을 수송하는 일이 내 기억엔 한 달 이상 지속되었던 것 같다. 낮엔 마루와 방을 덮은 흙먼지 때문에 지겨워했고, 밤엔 귀가 멍하고 어깨가 털썩거려 몇 번씩이나 깨다가 다시 잠들곤 했다.

 

<6.25때 미군이 탔던 GMC 군용트럭>

 

열 살 나이에도 전쟁의 심각함이나 우리들의 앞날에 대한 염려 같은 건 염두에 없었던 것 같다. 그저 처음 보는 피부색들과 생김새들이 신기했고, 굉장하고 다양한 무기들과 장비들에 경이의 눈길을 주었던 기억들만 남아 있다.

이웃 양덕동에 제법 큰 규모의 미군부대가 들어섬으로써(양덕시장 일대) 우리들이 미군들을 보고 대하는 일이 잦아졌고, 그래서 동네사람들의 일상사에도 적잖은 변화가 생겼다.

우리 또래들이나 서너 살 위아래까지도 미군차가 지나가면 손을 내미는 일이 다반사가 되었다. 간혹 던져주는 껌이나 비스켓 등에 맛을 들였기 때문이다.

좀 큰 형들은 세차를 하는와시와시꾼이나 구두를 닦는슈샨보이로 나서기도 했다.세차는 주로 어린천이나 양덕천에서 했고 구두닦이는 부대 근처에서 했다.

 

지금 사보이 호텔 조금 아래쪽이나 양덕오거리 정도가 되겠는데, 사오 명씩 조를 이루어 대기하고 있다가 미군 차가 오면 와시와시하면서 다가가고 운전수가 얕은 곳에 차를 세우면 물세차를 해주고 돈이나 물품을 받았다.

대체로는 나온 순서를 지켜 일거리를 받았는데 간혹 어거지를 쓰는 패들이 있어 미군 앞에서 볼썽사나운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부대 주둔 얼마 후부터 위안부들이 부대 근처로 접근하면서 다방이나 술집들이 많이 생겼는데, 구두닦이들은 이 업소들에 다니면서 일을 한다고들 했다.

또 큰 형들 중엔 미군 보급품 수송차들이 어두울 때 지나가면, 속도가 느려지는 길이 험한 곳에서 뛰어 올라 물품을 훔치는(‘도꾸다이라고 불렀다) 위험한 짓까지도 하는 사람이 생겨났다.

그런 한편, 일반 시민들이 피해를 입는 일도 참 많이 일어났다.

 

길가에 서 있는 방구쟁이차 앞자리엔 흑백 병사 둘이 탔고, 뒤 칸엔 대여섯 명이 있었는데 조수석에 앉은 혹인 병사가 창턱에 걸친 군용화 옆구리에 뭘 대고는 찍 긋자 불이 붙었다.

아무 것에나 마찰만 시키면 불이 나는 대가 굵은 성냥을 그때 처음 봤다. 그는 그걸로 담뱃불을 붙인 뒤 바로 옆 초가지붕 위로 휙 던졌다. 대가 굵어서 그런지 성냥불은 꺼지지 않고 지붕에 떨어져 초가을 날씨에 잘 말라있는 초가를 삽시간에 살라버렸다.

집주인 김 씨 아저씨네 식구들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는지 보이지 않았고 이웃사람 서너 명이 뛰어 나왔으나 손쓸 엄두도 못 내었다. 물 한두 통 끼얹다가 그만두고 집과 미군들을 번갈아보며 멍청히 서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미군들은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저희들끼리 손뼉까지 쳐가며 깔깔대고 웃더니 껌과 과자가 든 깡통 몇 개를 던져 놓고는 꽝하는 큰 방귀소리를 한번 낸 뒤 떠나가 버렸다. 가면서도 그들은 연방 호쾌한 웃음소리를 남겼다.

 

함지 이고 가는 부녀자 옆에 다가가 자동차로 폭발음을 내어, 놀란 부녀자들이 함지를 팽개친 채 논으로 빠지는 것을 보고 깔깔대는 광경 정도는 다반사였다.

수레 옆을 지나면서 굉음을 내어 놀란 소가 폭주하는 바람에 수레가 도랑에 빠지거나 농부와 소가 다치는 일도 종종 일어났다.

 

전쟁 전에 집에서 합포초등학교까지 2남짓 가는 동안 자동차 10대 이상 보는 일도 드물었는데 그즈음해서는 차 소리 그칠 새가 거의 없었다.

수레에 올라앉아 고삐를 느직하게 잡고 소 가는대로 맡겨놓던 풍경은 거의 사라졌다.

당시엔 진해나 상남에서 다니는 버스는 없었고 상남에서 오동동까지 정기적으로 다니던 열 서너 명까지 합승할 수 있는 포장마차가 있었는데, 언제부터인지 안 다닌 것도 이런 도로 사정 때문이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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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09 00:00

오키나와 사람들은 오키나와 신문을 본다

“일본국민 대다수는 아사히 요미우리 마이니치 세 신문 중 하나를 본다.
그러나 오키나와 사람들은 다르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오키나와 신문을 본다”

오키나와 사키마 미술관에서 만난 더글러스 러미스(C. Douglas Lummis) 교수의 말입니다.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라는 책으로 유명한 더글러스 러미스 교수는 '오키나와에서 동아시아를 바라보고 그 시선을 통해 세계평화의 길을 찾는 미국인 정치사상학자이자 평화운동가'입니다.

오키나와-일본-미국, 다시 돌아와 한반도-중국-동아시아에 이르기 까지 그의 지식은 넓고 깊었으며 그의 자세는 진지했고 겸손했습니다.

       <한반도를 일본영토로 표기한 1920년대 일본지도를 보여주고 있는 러미스 교수>

두 시간의 강연과 뒤풀이까지,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그에게서 많은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하지만 그 많았던 말 중, 내 귀를 가장 진하게 울렸던 것은 “오키나와 사람들은 오키나와 신문을 본다”는 한 마디였습니다.

그 한마디 때문에 섬에 머무는 동안 오키나와 사람들이 읽는 신문을 살펴봤습니다.
그의 말대로 일본 어디를 가나 한국의 조중동처럼 눈에 띄었던 ‘아요마’(아사히 요미우리 마이니치)가 잘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요마’ 대신 오키나와의 두 신문 「류큐신보(琉球新報)」와「오키나와타임즈(沖繩タイムス)」는 식당, 호텔로비, 주점, 공항에서까지 손쉽게 구할 수 있었습니다.

「오키나와타임즈(沖繩タイムス)」는 미군정 시기였던 1948년 창간되었고, 「류큐신보(琉球新報)」는 19세기 말인 1893년 창간된 오키나와 최초의 신문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신문인 정부발행 「한성순보」창간이 1883년이고 서재필이 발행한 「독립신문」 창간이 1896년인데, 작은 섬 오키나와의 민간발행 「류큐신보(琉球新報)」가 1893년 창간되었다는 사실에 놀랐습니다. 거기에다 120년이 다 된 지금까지 제호도 바꾸지 않고 발간되고 있어서 더 놀랐습니다.

                                     <류큐신보와 오키나와 타임즈>

내용을 살펴보았더니, 두 신문 모두 1면에는 전국적인 기사가 실려 있었고 나머지 모든 면은 우리처럼 지역기사였습니다.
순간 '웬 전국소식?'하고 의아스러웠지만 다시 생각하니 ‘아요마’를 읽지 않는 오키나와 주민들에게는 당연한 편집이었습니다.

조중동 중 하나를 반드시 읽는 우리에게는 지역소식만 있더라도 아무 문제없지만 러미스 교수의 말처럼 이곳 사람들은 오키나와 신문만 보니 전국소식을 지역신문이 다루는 건 당연했을 터입니다.

지역관련기사들도 우리와 사뭇 달랐습니다.
미군철수니 오키나와 정체성회복이니 하는 소위 오키나와평화운동의 동력이 지역신문에서 나오는 것 아닌가 싶을 정도였습니다. 지면 곳곳에 오키나와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국제사회와 오키나와의 관계 등에 관한 기사들이 줄을 이었습니다.
특히 미국과 일본본토와의 관계 속에서 발생하는 오키나와평화문제에 대한 기사가 유독 눈에 많이 띄었습니다.

예민한 반응이었는지 몰라도 오키나와의 정체성을 회복하고 오키나와가 진정 오키나와다워지기 위한 주민들의 염원이 신문활자 한자 한자에 흐르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오키나와 역사문화안내단체의 회원인 히카료코 씨가 태평양전쟁 때 오키나와 주민들이 집단자결한 동굴 앞에서 전쟁의 참상을 설명하던 도중, 일본정부의 오키나와 전쟁 왜곡의도에 항의하는 오키나와 주민집회를 보도한 류큐신보 호외판을 보여주고 있다. 신문은 정부입장에 반대하는 주민들의 입장을 강하게 전하고 있다>


<
오키나와 전쟁 60주년이던 지난 2005년에 류큐신보는 「오키나와 전쟁신문(沖繩戰新聞)」이라는 특집을 발간하였다. 사진은 2005년 4월1일자 특집7호 신문 1면.
신문의
왼쪽 상부에 오키나와 전쟁 60년 - 당시의 상황을 지금의 정보와 시점에서 구성이라는 제작의도가 밝혀져있고  그 곁에제7호-1945년 소화(昭和)20년 4월1일 일요일」이라고 적혀있다. 기사 큰 제목은 '본 섬에 미군상륙' 작은 제목은 '병력18만3천명 투입' '일본군 반격않고 각지에서 집단사'라고 적혀있으며 사진은 '미군상륙장면'을 사용하였다.
1945년 4월 1일은
미군이 오키나와에 최초로 상륙했던 날로, 참혹했던 오키나와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날이
>


지난 달, 합포문화동인회가 주최한 김두관 도지사 초청 강연에서 김 지사는 “옛날 제가 대학 갈 때만 해도 부산대학과 경북대학이 상당한 명문이었습니다만 요즈음은 서울의 대부분 사립대학보다 입학이 쉽다고 들었습니다. 이래가지고서야 어찌 지방이 경쟁력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라고 말해 참석자들로부터 공감을 얻었습니다.
어디 참석자뿐이겠습니까. 서울사람을 뺀 대한민국 국민 모두의 생각일 겁니다.

그 동안 수도권은 마치 아귀처럼 지역을 삼켰습니다. 수도권 빨대현상을 생각하면 정말 나라의 앞날이 걱정됩니다.
세계적으로 유래가 없는 한국의 서울집중현상에는 언론이 능동적으로 작용합니다.
특히 제대로된 지역소식은 다룰 수도 없고 다루지도 않으면서 전 국민을 지배하고 있는 신문이 더욱 그렇습니다.

조중동으로 대표되는 신문의 중앙집중현상(보다 정확히 말하면 서울집중현상)은 중앙과 지방의 격차를 점점 더 넓힐 뿐만 아니라 지역을 피폐화시키는 원인이기도합니다.

오죽 심했으면 부산일보 모 논설주간이 서울언론의 태도를 두고 “지역 스스로 자신을 지키지 않으면 지역민의 자존심까지 상습적으로 추행 당하게 될 것”이라 경고까지 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위 전국지라 부르는 서울지는 공짜 신문에다 자전거, 가전제품, 심지어 현금까지 뿌려대며 독자를 사들이는 통에 돈이 없는 지역신문들의 위축속도는 점점 더 빨라지고 있습니다.

제가 경남도민일보 사장으로 근무하던 2006년 경, 우리나라 지역신문 구독률은 평균 6%를 밑돌았습니다.
그나마 경남지역은 16%대로 타 지역에 비해 많이 높은 편이었지만 충청 호남 강원지역은 3-6%에 그쳤고 경기지역은 1%정도였습니다.

같은 시기 독일은 93%, 프랑스가 73%, 영국이 67% 정도를 지방지가 차지했으니 우리나라의 신문시장이 얼마나 왜곡되어 있는지 잘 비교되실 겁니다.

이런 사정을 알고 최근 경상남도에서는 ‘지역신문발전을 위한 지원 조례’도 만들고 위원회까지 구성했습니다만 ‘언 발에 오줌 누기’일 뿐 주민들의 자발적 관심이 없으면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그래서 해보는 생각입니다.
오키나와주민에게 배우는 건 어떨까요.
설령 정보량과 편집과 서비스가 조금 미흡하다하더라도, 우리자신이 우리 문제와 우리 사정을 잘 알아야 우리다워지고, 그래야 스스로를 사랑하게 된다는 생각으로 지역 언론 사랑하기, 어떻습니까?

몸은 지방에 있으면서,
아침마다 서울시내 출근길 도로사정 TV방송을 보고, 화장실에 앉아 여의도 소식만 담긴 신문을 읽고, 그 이야기를 점심 먹으며 되새김질하고, 밤에는 강남 부자이야기 연속극을 보며 살아가는데, 지방의 정체성과 자생력이 어떻게 생기겠습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무관심한데 누가 우리에게 관심을 갖겠습니까.


“일본국민 대다수는 요미우리 마이니찌 아사히 세 신문 중 하나를 본다.
그러나 오키나와 사람들은 다르다. 오키나와 사람들은 오키나와 신문을 본다”

오키나와의 작은 미술관에서 들었던 벽안의 노(老) 교수 음성이 지금도 귀에 쟁쟁거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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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주완 2011.02.09 14:58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2010.09.29 00:00

도시 한복판에 동굴이?


도시 한 복판에 동굴이 있다면 믿어집니까?
최근 마산에서 실제로 있었던 사건(?)입니다.

마산 창포동이었습니다.
공사를 하던 중 땅바닥이 아래로 꺼지면서 발견되었습니다.

지하 1.5m 지점에 폭 3m, 높이 2m, 길이 20m 정도되는 반원형 동굴이었습니다.
벽이나 기둥, 지붕 등 동굴을 지탱하기 위한 구조물은 아무 것도 없었고 인력으로 흙만 파내 뚫은 것이었습니다.
마사토와 황토가 섞인 토질이었는데 매우 견고해 원형이 그대로 유지되어 있었습니다.

동굴의 위치는 1899년 개항 직후 일본인들이 들어와 신마산이라는 도시를 만들기 시작한 각국공동조계지의 해관(현, 세관)이 있었던 곳이었습니다.
조계지를 조성 때 최초로 개발되었던 지역으로 당시에는 바다와 인접한 부지였습니다.
사정(査定)토지대장의 기록에, 일제강점기 내내 이 터의 소유주가 국가(일본, 조선총독부)였던 걸로 보아 해방될 때까지 계속 공공시설로 사용된 터였던 것 같습니다.

아래 위치입니다.



연세 높은 이웃 주민의 말을 들어보면 일제시대 일본인들이 판 동굴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어르신께서 어렸을 적 이 동굴 안에서 놀기도 했다니 말입니다.
지금은 땅 속에 묻혀있지만 원래는 동굴 양쪽으로 입구가 트여있었다고 합니다.
1950-60년대까지 사람들이 이 동굴을 지나 다니기도 하고 무언가를 저장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제 눈에는 일본인들이 방공호로 팠던 굴 같았습니다.

태평양 전쟁 막바지에 한반도에도 연합군의 공습이 있었습니다.
최초로 한반도 근해, 즉 부산과 제주도 남방에 미군비행기가 날아다닌 것은 1944년 7월 8일 자정 무렵이었습니다.

그 후부터 심심찮게 내습하다가 1945년 들어서는 빈도가 잦아져 45년 5월 경 부터는 거의 매일 같이 나타났습니다.
그 때부터는 한반도 남부뿐만 아니라 인천 황해도 대전 광주 원산 청진 나남 나진 등에까지 내습하여 항해중인 선박과 운행 중인 열차 및 육상 해상 시설에 총격과 폭격을 가했습니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일제는 1945년 4월 4일자로 '소개(疏開)실시요강'을 공포하였고 이어서 4월 7일 '소개공지대(疏開空地帶)'로 경성 5개, 부산1개, 평양1개소를 고시했습니다. 
그러다 6월 14일에는 전국의 중소도시 20 곳에 소개공지(
疏開空地)를 고시했는데 신의주 함흥 여수 대구 원산 등이 포함되었습니다.
이 때 마산에도  소개공지 1개소가 고시되었습니다.

소개관련 공지는 지역에 따라 규모와 형태가 달랐습니다.
마산에 고시된 '소개공지'는 중요시설 주변 30m∼50m내에 있는 기존건축물을 철거·소개하여 공지를 확보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쉬운 점은 그 때 마산에 고시된 '소개공지'의 위치에 대한 기록이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은 겁니다.

도시사학자 손정목 선생은 일제기의 '소개공지대'와 '소개공지'에 대해,
'도시계획의 눈으로 보면 소개공지대는 방공법에 의한 새로운 계획가로의 설정이었고 소개공지는 새로운 계획광장의 설정이었다' 견해를 밝힌바 있습니다. 

이번에 발견된 동굴이 '소개공지'와 직접 상관있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하지만 해방직전의 급박했던 전황을 생각해보면 이 동굴은 바로 그 시기, 한반도에 미공군기의 폭격이 시작되었던 그 때 팠던 것 아닌가 싶습니다.
무시무시한 공습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땅 속으로 몸을 숨기는 것이 최선이었고, 동남아시아와 남태평양 등 태평양 전쟁을 겪었던 나라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전쟁흔적이니까 말입니다.

시청 관련부서에서 신속히 조치를 취해 위험은 완전히 없어졌습니다만 하마터면 큰 사고로 이어질 수 있었던 사건이었습니다.

폐쇄하지 말고 식민지시대 유적으로 보존할 수도 있다 싶었지만 주변상황이 워낙 위험해 권해보지는 못했습니다.

사진을 한 번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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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한 복판에서 갑자기 땅이 아래로 꺼졌습니다.


지하 1.5m 지점이었습니다.


입구 폭은 2.4m 정도였지만


안으로 들어가니 3m 정도 되는 곳도 있었습니다.


높이는 2m가 조금 넘어 행동하기에 불편함이 없었습니다.


꽤 넓어 보이지 않습니까?


안전하게 동굴을 막기 위해 준비공사를 시작합니다.
아래 큰 놈은 콘크리트 주입구이고, 위 작은 놈들은 공극을 없애기 위한 조치입니다.


밀도를 높이기 위해 모래와 시멘트만 섞은 모르타르를 주입하고 있습니다.


공사가 끝났습니다.
동굴 위에 2층 건물이 두 채나 있던데 하마터면 큰 사고로 이어질 뻔 했습니다.



도시 한복판 땅 속에서 긴 세월 잠자고 있었던 이 동굴을 보며 지난 세기 이 도시 마산이 겪었던 질곡의 역사를 다시 한 번 느꼈습니다.

조용했던 포구에 일본인들이 밀고 들어와 땅을 차지하고, 신작로를 뚫고, 이 도시를 제 멋대로 삼켰습니다.
해방이 되자 미군과 귀환동포에 도시가 북적였습니다.
전쟁이 나자 피난민들로 이 도시가 다시 들끓었습니다.

지금은 기억하는 사람조차 없지만 이 도시에 사연을 남기고 간 그 많았던 사람들,,,,,
그들의 음성이 귓전에 돌고, 그들이 흘린 땀냄새가 코 끝을 스치는 것 같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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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23 10:11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0) - 개항기


오늘부터 개항기 때 제작된 마산지도를 소개하겠습니다.
지도의 기본정보 표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는 지도의 제목이며 제목 아래에 표기한 것이 지도의 기본 정보입니다. 표기 순서는「제작연도 / 제작자 / 발행처 / 축척 / 수록처 / 소장처」순입니다.
기록이 불가능한 부분은 해당 칸을 비워「/ /」로 표기하는데 지도제목이 동일한 경우에는 지도명칭 뒤에「*, **, ***」를 붙여 구분하겠습니다.


<馬山浦 及 附近, 마산포 및 부근>

1899년 / 上野亮 外 / 일본해군 / 1 : 49,054 / / 일본국회도서관


일제는 일찍부터 마산을 자신의 식민지 주요 거점으로 눈독 들여왔었습니다. 그러므로 원산․부산 등과 마찬가지로 마산지역의 측량과 지도제작도 진작 시작되었습니다.

이 지도는 일제가 침략을 목적으로 한반도를 측량하기 시작한 직후 제작된 것입니다. 근대적 측량법에 의해 만들어진 최초의 마산관련지도로 추정됩니다.

표기내용과 축척, 제작시기 등을 미루어 지난 주 올린 글에서 소개한「군용비도(軍用秘圖)」의 초기도면으로 보입니다.

지도의 왼쪽 상부가 마산포인데 도면의 명칭처럼 진해, 웅천까지 마산포 근방 해안을 상세히 표기한 지도입니다.
오른쪽 상부에 별도로 그려놓은 것은 거제도 지세포 항을 확대한 지도입니다.

마산포부분만 확대하여 옮겨보겠습니다.


지도 상부에 짙게 표시된 삼각형 지역이 마산포입니다.

이 지도에 의하면 1899년 마산의 도시상황은 마산포(원마산)의 영역인 남성동을 중심으로 성립한 일단의 자연발생 취락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산포(원마산) 남서쪽으로 약 2km 떨어진 소위 신마산에 일본인들이 새로운 도시, 즉 각국공동조계지를 조성하기 시작했는데 위치는 지도의 좌측중앙부입니다. 가늘게 직선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이 두 곳 사이에 위치한 중앙부(마산포와
신마산의 중간 부분인 현 자산동․중앙동 그리고 장군동 일대)는 논밭으로 이어진 채 인가(人家)가 거의 없었습니다.

원마산 외에는 오산이라 불렀던 용마산 아래의 현 산호동에 마을이 있었으며 북쪽으로 교방동 및 회원동 그리고 현 봉암교 아래의 봉암동에도 마을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양덕과 합성 쪽에도 이 당시 사람이 살고 있었지만 이 지도에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 외에도 환주산 근처에 성호동과 자산동, 그 남쪽으로 완월동․신월동․월영동 쪽의 마을도 잘 그려놓고 있습니다.

무학산에서 마산만으로 흐르는 하천은 교방천과 회원천․척산천(尺山川)․장군천․창원천이 표기되어 있는데 특이한 것은 장군천이 현재처럼 직선으로 마산만과 연결되지 않고 휘어져 있다는 점입니다.
지도상의 장군천 하구는 마산선 철로의 기점이었던 마산 역 자리입니다.
1905년 이후에 제작된 자료들과 관련해 볼 때
장군천은 1905년 일본군에 의해 마산철도와 마산 역이 건설될 때 지금처럼 직선화된 것 같습니다.

각국거류지라고 표기되어 있는 조계지 내의 세관․일본영사관과 함께 나타나고 있는 건물은 개항과 함께 개설된 우편국을 말하는 것으로서 1899년 당시에는 임대건물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습니다.

특이한 것은 봉암동 쪽입니다.
지금의 창원공업단지에 표현되어 있는 염전인데 구전으로 전해오던 봉암의 대규모 염전이 이 지도가 정확하게 그 실체를 표기하고 있습니다.
지도의 오른쪽 상부에 바둑판처럼 격자로 그어 놓은 것이 염전 표시인데 이 염전은 해방 이후까지 존속하여 1947년에 미군이 촬영한 항공사진에도 나타납니다.

보는 것처럼 이 지도에는 진해만을 중심으로 마산포 부근의 해안선․수심․지형 등이 비교적 정밀하게 표기되어 있습니다.

특히 간석지의 경계까지 상세히 표기해 놓아서, 매립 등으로 사람의 손이 닿기 전에 존재했던 천연상태의 마산포 해안 원형을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유일한 자료로 보입니다.

이 지도는 일본 국회도서관에서 찾았습니다.
지도를 보는 순간, 그리고 이 지도가 1899년 제작되었다는 기록을 보는 순간, 저는 전율했습니다.
너무나 상세하고 정확한 지도의 내용에 놀랐고, 다음은 1899년이라는 시기와 제작자가 일본해군이라는 점에 또 놀랐습니다.

1899년에 제작했다면 비밀리에 한반도 곳곳에 들어와 측량한 시기는 그 보다 몇 년 전일 겁니다.
1899년은 마산이 개항된 해이기도 하지만 을사조약 6년 전, 경술국치 11년 전인데 이미 그 때 한반도의 해안을 이렇게 샅샅이 조사해 놓았다는 사실에 놀랐던 겁니다.

조선을 식민지 삼겠다는 야욕이 한 눈에 확인되는 이 지도를 보면서 '이렇게 치밀하고도 은밀하게 준비한 일제의 야수를 벗어날 길이 없었겠구나'라는 자조감도 들었습니다.


아래 그림은 위 지도에 표기된 부분의 현재상황입니다.



끝으로 이 지도를 조금 더 확대해 현재 마산시내의 시설물들 위치와 비교해보겠습니다.
3.15의거 탑 바로 앞이 바닷가였고, 대우백화점은 바다 한 복판이었습니다.<<<





2010/04/08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여는 글)
2010/04/12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 - 통일신라 이전
2010/04/19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 - 통일신라시대
2010/04/26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 - 통일신라말기
2010/05/03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쳔사 (4) - 고려시대
2010/05/10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 - 고려시대
2010/05/17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 - 고려시대
2010/05/24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 - 고려시대
2010/05/31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 - 고려시대
2010/06/07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 - 고려시대
2010/06/14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 - 조선시대
2010/06/21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1) - 조선시대
2010/06/28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 - 조선시대
2010/07/05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 - 조선후기
2010/07/12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4) - 개항기
2010/07/19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5) - 개항기
2010/07/26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6) - 개항기
2010/08/02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7) - 개항기
2010/08/09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8) - 개항기
2010/08/16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9) - 개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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