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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19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6) - 강점제1시기

<마산 최초의 상업용 매립>

한일병합 직후 마산 최초의 상업용 매립이 남성동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위치는 어시장의 진동골목과 대풍골목 등 오래전부터 마산어시장 상권의 핵을 이루고 있는 지역입니다.

이 매립의 규모와 형태는 매립 전 마산포 지도(1899년)와 매립이 시작되려던 시점의 지도(1910년 초반), 그리고 매립이 끝난 후 마산포 지도(1919년)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1920년대 이후의 매립에 관해서는 국가기록원에서 그 경위와 내용을 찾을 수 있지만 합방직후에 시행된 이 매립공사에 관해서는 기록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어쩔 수 없이 매립의 규모와 위치 및 일자 등은 사정토지대장과 사정지적도를 보면서 낱낱이 확인하였습니다.

확인 결과, 이 매립은 대지 8,078평 도로 3,560여 평으로 모두 11,640여 평에 이를 정도의 대규모였습니다. (도로면적은 정확한 것이 아니고 각종 자료에 나오는 것을 인용하였습니다)

마산지방해운항만청이 발간한 『마산항백서』에 의하면 이 매립공사는 1911년 착공되어 1914년 7월 준공되었다고 합니다.
『마산항지』에서는 1910년 착공하여 1913년 준공되었다고 기술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 매립공사는 부산에 살았던 일본인 박간방태랑(迫間房太郞)에 의해 시행되었습니다.

박간방태랑(迫間房太郞)은 일본 화가산현(和歌山縣) 출신으로 대판 오백정장평(五百井長平)상점에 들어갔다가 21세가 되던 해 한국으로 왔습니다.
무역업으로 일을 시작한 박간은 1905년부터는 독립하여 수산업․창고업․목물무역업․토지매매중개업 등에 종사했습니다.

유명한 동래별장의 주인이며 당시 부산 제일의 땅 부자였습니다.
부산상공회의소 특별위원․경상남도회부의장․부산번영회장을 역임하였고 부산토지주식회사사장․부산상업은행과 조선저축은행 이사를 지내며 부산경제를 쥐락펴락한 인물입니다.

1923년 부산을 현지 르뽀한 잡지 개벽(開闢)의 기자는
「․․․․迫間方太郞 같은 사람은 그 한사람의 부력(富力)이 10,031호 조선인의 전 부력을 당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도시사학자 손정목은
‘그가 개인적으로 한반도 전체 일본인 중 최고의 자산가였다’
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그는 한국에 나온 일본인 중 최고부자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지역과도 인연이 깊습니다.
경남 도내 소작지의 3.5%를 소유하였고 소작농이 2,000여 호가 될 정도의 대지주였으며 김해 진영면과 창원 대산면 동면 등 3개면에 걸친 진영농장의 주인이기도 했으니 옛 창원시의 땅도 많이 가졌던 셈입니다.

그런가하면 1896년 11월에는 부산에서 자본금 2만 5천원으로 부산창고주식회사를 설립하기도 했는데 이 회사가 우리나라에 세운 일본인 회사의 효시입니다.

유명한 '마산포 사건' 때는 러시아의 진출을 막기 위해 조선인 지주들을 꾀어 토지를 매수하도록 하였고, 그 공로로 일본정부로부터 서훈을 받기도 했으니 마산과도 인연이 깊은 셈입니다.

유장근 교수와 함께 걸었던 도시탐방대 답사 때 무학산 어느 능선에서 그의 땅이었다는 표지석이 서있는 것을 발견한 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짧게 잡아도 7-80년은 되었을 돌이었습니다.
후에 생길지도 모를 ‘마산근대사 박물관’에 전시하기 딱 좋은 유물이라, 보관해 놓을 생각도 했는데 무거워서 옮기지를 못했습니다.

이 사진입니다.
‘박간소유지(迫間所有地)’라고 뚜렷이 음각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박간의 ‘마산과의 인연’은 바로 남성동 매립에서 극명히 드러납니다.

개항 초부터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에 매립 때문에 생긴 충돌, 즉 앞서 포스팅한 김경덕 매축권에 대한 홍청삼(弘淸三)의 권한 계승 시비 사건(2011/01/2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2) - 개항이후)이 있었던 이곳을 그가 매립한 것입니다.

매립의 실제 전주(錢主)는 박간방태랑이었지만 이 사업을 마산에서 직접 시행한 이는 바로 홍청삼(弘淸三)이었습니다.
홍청삼은 당시 마산거주 일본인의 거물로 현 제일여고에 있었던 신사건립을 주도한 사람이기도 합니다.(2010/11/2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4) - 개항이후)

다음 그림은 제가 복원한 당시 지도인데 이 그림을 보면 쉽게 매립전후를 비교할 수 있습니다.
먼저 것은 매립 전인 1910년 경 도면이고 뒤것은 매립이 끝난 1920년 도면입니다.
 

 

이 때 매립된 토지의 지번과 소유자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토지는 총 52필지로 수성동115, 116, 117번지와 남성동 172번지부터 221번지까지였습니다. 수성동에 3필지가 있지만 이 글에서는 편의상 이 지역의 명칭을 ‘남성동 매립지’라고 부르겠습니다.

매립된 52필지 중 수성동 116번지 374평과 117번지 34평, 합408평은 일본인 송원조장(松原早藏)의 소유(■부분)로, 남성동 200번지는 국유지(●부분)가 되었고, 나머지는 모두 매립주 박간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항만의 요지(要地), 즉 초록색으로 표시한 ●부분의 남성동 200번지, 102평의 대지가 국유지로 된 사유는 알 수가 없습니다.
박간이 너무 넓은 대지를 매립을 통해 일거에 소유하게 되자 그 답례로 부두용지 혹은 공공건물 부지로 총독부에 헌납했던지, 아니면 공공의 목적으로 그 땅을 정부가 매입했는지, 그저 추정만 해볼 뿐입니다.

박간 소유의 대지 49필지 7,568평은 아무런 변화 없이 전부 1936년 2월 22일 그의 아들로 추정되는 박간수웅(迫間秀雄)에게 이전되었고, 그런 상태로 해방까지 갑니다.

박간수웅(迫間秀雄)이 박간방태랑(迫間房太郞)의 아들이라고 했지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추정입니다.
성이 같다는 점과 당시의 사회적 관습에 미루어 자신의 재산 소유권을 승계 시켰다면 아들아닌가 라고 추정했을 뿐입니다.

다른 기록인 「19세기 후반․20세기 초 경남지역 일본인 지주의 형성과정과 투자 사례, 1999, p.68, 한국민족문화 제14집」에 의하면 박간의 아들로 박간일남(迫間一男)이 등장하고, 그의 가계 중 박간무웅(迫間武雄)이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박간수웅은 혹 박간의 집안 조카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일제강점기가 끝날 때까지 이 많은 토지를 한 필지도 매매하지 않고 소유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대지 혹은 건물을 전부 임대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동안 지역에서 발간된 자료에서는 ‘
새로 매립된 토지의 가격이 최저 7원 50전에서 최고 22원까지 토지의 위치에 따라 상당한 격차가 있었는데 이를 박간이 분양하였다’라고 했습니다만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이 매립지가 해방 때까지 소유자 변경이 없었다는 것을 토지대장에서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馬山港誌』의「馬山浦 埋立地」편에서도 추방사랑(諏方史郞)은 매립지에 대해「․․․유감스러운 것은․․․․․․차지료(借地料)가 비교적 고율이라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기도 합니다.

박간이라는 일본인 단 한 사람에게 마산포에서 생업을 이어 가던 모든 사람들이 대지와 혹은 건물을 임대하여 영업을 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아무튼 매립 후부터 이곳은 원마산 상권의 요충지가 되었습니다.

앞서 포스팅한 것처럼 마산만에는 박간 매립 전부터 여러 차례 매립이 있었습니다만 모두 군부 혹은 공공기관에서 시행했거나 임의의 매립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박간의 매립은 민간인이 이윤을 목적으로 법적허가를 득하여 매립한 사례로 최초의 것입니다.

또 한가지,
이미 포스팅한 1910년경 마산포 토지소유상태를 통해 이미 일본인의 원마산 진출은 확인했습니만 본 매립사업 이후 일제의 원마산 상권 장악이 더욱 심화되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매립은 일제가 항만도시 마산의 경제권을 장악하기 위한 식민정책 중 가장 직접적이고도 적극적인 수탈 사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이 때 매립된 남성동 해안에는 석축안벽(石築岸壁)과 석축돌제(石築突堤) 등의 항만시설이 조성되었고 소형 선박이 접안할 수 있는 시설과 물량장을 갖추었습니다.
이 부두는 어선과 소형 화물선들의 정박지로서의 기능뿐만 아니라 통영․거제 등 남해안 일대를 운항하는 연안 여객선 부두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매립지에 신설된 도로 사이에는 원정우편소(元町郵便所, 현 남성동우체국)를 시작으로 건축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매립하고 10년 쯤 지난 1924년, 이곳에 다음과 같은 길이 63.6m의 사석방파제가 설치되었습니다.

제 나이 열 두세살 쯤,
이 방파제 위에서 낚시를 했는데 팔뚝만한 뽀드라치를 한마리 낚아 올린 추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2011/05/1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8) - 강점 제1시기
2011/05/2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9) - 강점 제1시기
2011/05/3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0) - 강점 제1시기
2011/06/0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1) - 강점 제1시기
2011/06/1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2) - 강점 제1시기
2011/06/2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3) - 강점제1시기
2011/06/2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4) - 강점제1시기
2011/07/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5) - 강점제1시기
2011/07/1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6) - 강점제1시기
2011/07/1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7) - 강점제1시기
2011/07/2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8) - 강점제1시기
2011/08/0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9) - 강점 제1시기
2011/08/0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0) - 강점제1시기
2011/08/1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1) - 강점제1시기
2011/08/2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2) - 강점제1시기
2011/08/2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3) - 강점제1시기
2011/09/0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4) - 강점제1시기
2011/09/1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5) - 강점제1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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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01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9) - 강점 제1시기

-마산시의 첫 지도-

<마산부 관할구역도 / 馬山府管轄區域圖>

1913년 / 조선총독부官房總務局 / 조선총독부 / / 조선총독부 관보호외 / 서울대 중앙도서관

 

이 지도는 1914년 조선총독부가 단행한 지방행정구역 개편을 목적으로 1913년 12월 29일자로 발행한 것입니다. 총독부령 제111호로 도의 위치와 관할구역 그리고 부(府)와 (郡)의 명칭 및 관할구역 등에 관한 조정명령이었습니다.

이 때 개편된 마산부가 사실상 마산시의 시작이었습니다. 그러니 이 지도는 마산시의 첫 지도가 되는 셈입니다.

이 행정구역개편에서 마산부에는 관할구역으로 마산포각국거류지일원, 외서면의 완월리, 신월리, 월영리, 자산리, 서성리, 성호리, 중성리, 성산리, 동성리 및 오산리, 상남리, 교방리의 일부가 포함되었습니다.
지명을 이렇게 소개하였지만 사실은 앞서 포스팅했듯이 1910년부터 이미 원마산에도 한국식 지역지명 대신 일본식 정명(町名)으로 변경되어 있었습니다.
2011/02/28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7) - 개항이후

같이 단행된 관할구역 획정에서 창원군 부분에는 마산부 부내면, 상남면, 하남면, 동면, 북면, 내서면, 구산면, 대산면, 진동면, 진북면, 진서면, 양전면, 웅읍면, 웅동면, 천가면, 진해면, 웅서면, 외서면 중 마산부에 속하지 않은 지역이라고 기재되어 있습니다.

관할구역에 관한 지도이기 때문에 마산부의 경계가 뚜렷이 나타나있습니다.
이 지도에 의한 마산부 경계는 동쪽으로 마산만 해안선을, 서쪽으로 대곡산과 무학산 정상을, 남쪽으로 율구미, 북쪽으로 오동교부터 노비산까지를 포함하고 있으나 서원곡은 제외되어 있습니다.

범례에서는 마산부의 경계선 및 도로․철도와 정차장․논․밭․산악․하천․바다․건물 등을 표시하고 있는데 도로와 건물 표시 때문에 당시 신마산의 원마산 쪽 진출 정도를 약간 가늠할 수도 있습니다.

특히 현재의 마산경찰서 부근까지만 개설되어있던 중앙간선도로를 보면, 1910년에 원마산까지 3m폭으로만 개설되었다가 1912년에 15m 폭으로 완전 개통되었는데 그것이 표기되어 있습니다.
마산 역 앞에서 장군교 방향으로 사선형의 직선도로 서편 안쪽은 건물이 대부분 들어선 것으로 나타나 있고 조계지의 고지대는 고운로(孤雲路) 아래까지만 개발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위 지도의 마산부 경계를 현재 위성사진에 옮겨보았습니다.


지도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일제에 의한 정명변경이 있기 전 원마산 6개리를 비롯하여 교방리․상남리 등과 완월리․신월리․월영리의 위치와 경계를 나타내고 있다는 점입니다.

일본인 박간방태랑(迫間房太郞)에 의해 시행된 남성동 매립공사는 완성되지 않은 형태이나 공사중 임이 뚜렷이 표시되어 있습니다.

이 당시 이미 육군중포병대대 입구(현 남부터미날부근)에서 시작해 신월계라 불렀던 전 마산극장 앞까지는 해안에 직선의 호안이 조성되어 있습니다.

당시의 마산상황을 알 수 있는 참 좋은 자료인데, 흠이 있다면 동쪽을 북쪽이라고 나타낸 방위표시의 오류입니다.<<<




2011/05/1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8) - 강점 제1시기
2011/05/2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9) - 강점 제1시기
2011/05/3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0) - 강점 제1시기
2011/06/0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1) - 강점 제1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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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3) - 강점제1시기
2011/06/2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4) - 강점제1시기
2011/07/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5) - 강점제1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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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7/2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8) - 강점제1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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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wood pellet mills 2011.08.02 19:29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음.. 공감합니다. 어서 우리도 독도에 대한 적극적인 대처가 필요할 텐데요. 그런데.. 우리 정부는 크게 손을 대고 있는 것 같지 않습니다. 저런 극악무도한 일에 세계인이 알도록 홍보가 필요합니다. 우리 모두가 그 일을 해야합니다. 언론사, 정부, 국민....

2011.04.18 04:36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4) - 개항이후

<마산에도 차이나타운이?>

1910년 경, 일본인들은 마산포의 땅을 얼마나 차지했을까?

사실을 알기 위해 복원도에 나타난 모든 땅의 소유관계를 사정토지대장으로 확인해보았습니다. 
아래 그림에서
붉은 색 표기를 한 토지가 당시 일본인들이 소유하고 있던 부지입니다.

 

한일병합 직후에 한국인들의 오랜 터전이었던 마산포에 일본인들이 이처럼 많은 땅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놀랍습니다.

기존의 여러 문헌에서는 '비록 일본인들이 신마산은 차지했으나 주민들의 반일의식 때문에 마산포에는 쉽게 진출하지 못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만 위 도면을 보면 이런 주장들에 의구심이 생깁니다.

마산포 주민들의 반일의식과 달리 마산포 요지에 토지를 소유하고 있었던 사람들 중 적지 않은 분들이 일본인들에게 토지를 매도하여 결과적으로 일본인의 원마산 진출을 가능하게 하였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이 글에서 일본인의 마산포 진출여부에 대해 더 깊이 따져보지는 않겠습니다만, 토지소유권의 측면에서는 이 시기에 이미 마산포가 일본인들에 의해 심각하게 침해당했던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토지소유권이야말로 일본인들이 얼마나 마산포에 진출했는가를 가장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자료니까요.

주목할만한 사실은, 개항당시 마산포에 살았던 산본호장(山本好藏)과 송원조장(松原早藏)이 각각 부림동 18번지와 남성동 67, 76, 135, 151, 153, 154, 155번지의 7필지를 소유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이런 사실은 일본인들이 마산포에 터를 잡기 시작한 시기가 한일병합기보다 헐씬 이른 개항기
였던 것 아닌가라고 추측해볼 수 있는 구체적 사례이기도 합니다.
2010/10/1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7) - 개항이후

그림에서 보듯이
일본인 소유 토지는 수성동을 중심으로 서성동과 남성동 서편, 즉 마산포의 서쪽에 많았고, 상대적으로 상업성이 약하고 소규모 필지가 많은 북동쪽에는 많이 없었습니다.

일본인들이 주로 차지한 이 땅들은 그들의 거류지인 신마산과 연결되는 방향이기도 하지만 당시 가장 중심지였던 조창부근과 해안인접토지들로서 중요 상권 대부분이 이미 일본인들에게 넘어갔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당시 토지 소유상황을 필지와 면적으로 구분 정리해보았습니다.

      구분        필지수         비율(%)        면적(        비율(%) 필지평균면적
 정부,마산부            5           0.4       5,783.54            3.4       1,156.71
   기업, 단체           10           0.9       1,299.18            0.8         129.92
     일본인          271          23.4     53,228.14           31.4         196.41
     중국인           18           1.6       2,105.79            1.2         169.99
     한국인          853          73.7    107,051.13           63.2         125.50
       합계        1,157        100.0    169,467.77         100.0         146.47

이 중 기업소유 10필지는 마산금융주식회사 4필지, 역시 일본인 소유의 조선농사주식회사 4필지, 합자회사마산정미소 2필지인데 모두 일본인들의 창설하여 운영했던 회사였으므로 일본인 소유로 보아야 할 것입니다.

국유지는 조창(漕倉)이 있던 현 남성동 제일은행 일대의 부지입니다.

총 1,157필지 중 일본인 소유 토지는 개인 271필지(23.4%), 기업 10필지(0.9%)로 전체 281필지(24.3%)였습니다.

심지어 일본인들이 밀집해 있었던 수성동은 전체 111필지 중 62필지(55.9%), 면적으로 전17,877.69㎡ 중 11,814.81㎡(66.1%)까지 되었습니다.

일본기업과 개인이 소유하고 있었던 토지는 모두 281필지(24.3%), 면적은 54,527.32㎡( 32.2%)였으며 각 필지의 단위 면적은 전체 평균치 이상이었습니다.

이에 비해 한국인 소유의 토지는 국유지를 제외하고 853필지(73.7%), 면적은 107,051.13㎡(63.2%)였습니다.

일본인과 함께 중국인들도 마산포 토지를 제법 소유하고 있었습니다.

보라색으로 표시된 부분이 중국인 소유지인데,
총 18필지(1.6%), 면적은 2,105.79㎡(1.2%), 단위면적은 평균치 정도였습니다.
마산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아는 중국집 '쌍흥관'이 그 때부터 중국인 소유의 토지였습니다. 바로 초록색 조창부지의 아래편 땅이 옛 '쌍흥관' 터입니다.

중국인 소유 토지는 대부분 부림동과 창동의 경계를 이루는 도로(옛 경남은행 부림동지점 앞 길)를 중심으로 노변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이곳은 당시 번화했던 거리였습니다.
이런 현상은
 1882년에 체결된「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이후 조선에 대거 진출한 청국상인(淸國商人)들이 마산으로도 상당히 진출했었다는 사실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위 그림을 찬찬히 살펴보십시오.
보라색 땅들이 모두 특정한 거리에 집중해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말입니다만, 혹시 그들이 이 거리에서 차이나타운을 꿈꾸었던 것은 아니었을까요? 백년 전 마산에 들어왔던 중국인들이 말입니다.<<<




2010/10/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6) - 개항이후
2010/10/1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7) - 개항이후
2010/10/1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8) - 개항이후
2010/10/2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9) - 개항이후
2010/11/0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0) - 개항이후
2010/11/0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1) - 개항이후
2010/11/1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2) - 개항이후
2010/11/2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3)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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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11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3) - 개항이후

<마산포구의 두 굴강과 네 선창>

마산포가 조선시대 번성했던 포구라고 알려져 있지만 옛 마산포의 해안선이 현재 도시 속 어디였는지 정확하게 밝힌 적은 없었습니다. 시사(市史)를 비롯한 몇몇 자료에서 대충 언급했지만 추측일 뿐이었습니다.

오늘 포스팅에서 밝히는 마산포 해안선(海岸線)은 사정지적도(査正地籍圖)와 그 외의 여러 자료들을 통해 확인한 것입니다. 저는 정확(?)하다고 봅니다만 땅을 파보지 않아서 장담은 못하겠습니다.


마산포에는 일찍이 두 개의 굴강과 네 개의 선창이 있었습니다.

동굴강과 서굴강으로 불렸던 두 굴강에 대해서는 1964년 『마산시사 사료집 제1집』의 「마산축항지」에서 김준이 그 용도를 다음과 같이 말한바 있습니다.

「서굴강(西掘江)은 인공(人工)으로 구축된 듯한 방축(防築)이며 여러 파도를 막고 범선(帆船)들이 정박하는 곳으로서 방축 위에는 수 백년된 포구가 무성해 있었으며 그 위치는 현 남성동 우체국 지점이 된다.

동굴강(東掘江) 역시 서굴강과 같은 부두로서 북선(北鮮)서 온 명태 배가 풍랑을 피하기 위해 정박한 곳이다」

복원도를 놓고 보겠습니다.


복원도에 나타난 굴강의 위치․규모․형태를 보아 마산창 앞에 있으면서 규모가 큰 서굴강은 마산창과 관련한 관용기능을 하던 인공 굴강이었고, 동굴강은 민간인들의 영업과 관련한 민용 기능을 담당했던 자연굴강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관민구분 사용은 조운제도가 폐지된 19세기 후반까지였습니다.

서굴강과 동굴강을 중심으로 직선거리 약 500m의 해안에 걸쳐 네 개의 선창이 있었습니다.
명칭은 서성선창․백일세선창․어선창․오산선창이었고 그 위치와 형태는 위 그림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백일세선창(百一稅船艙)이라는 특이한 명칭에 대해 여러 견해가 있습니다.

어떤 이는 백일세(百一稅)가 아니라 ‘백일세(百日稅)’라고 하면서 이를 2월에서 5월까지 백일(百日) 내에 세(稅)를 서울 선혜청에 수송하기 위한 선창이란 의미라고 해석하고 그렇기 때문에 백일세선창을 조창부두로 판단합니다.

하지만 다른 이는 일반적으로 백일세(百一稅)란 수입의 백분의 일을 세금으로 납부하는 제도를 말한다면서, 예로써 군산항의 객주가 내장원에 백일세를 납부한 일이 있었다고 제시합니다.

여기서는 1907년 11월 1일 창원부윤 이기(李琦)가 일본인 홍청삼(弘淸三)의 매립과 관련해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에게 보낸 보고 제3호에 첨부된 마산 해안도면에 ‘百一稅船艙’이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百一稅라고 적었습니다.

우리나라간척사업과 제방공사의 효시로 고려 고종 35년(1248) 김방경(金方慶)에 의한 평안도의 위도(葦島) 간척사업을 듭니다만, 마산포 복원도를 보면 마산의 해안에도 석축호안(石築護岸)과 방파시설(防波施設)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추정하는 근거는 아래 그림 표에서 알 수 있듯이, 해안 곳곳에 자연발생적 형태라기보다는 인위적인 형태로 만들어졌다고 추정될만한 흔적이 여러 군데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인위적인 석축호안과 방파시설이 있었다고 추정하는 근거는 더 있습니다.
이미 이 시기에 석축돌제(石築突堤)가 있었다는 기록과 『창원군지』등 여러 자료에서 고려시대 석두창(石頭倉)에는 조곡(漕穀) 천석을 싣는 조선(漕船) 여섯 척이, 조선시대 마산창에는 천석을 싣는 조선(漕船) 스무 척과 이 배들을 운행시킬 조군(漕軍) 구백육십 명이 배치되어 있었다는 기록들이 그 가능성을 뒷받침해 줍니다.

물이 들어오면 바다가 되고 물이 빠지면 육지가 되는 갯벌지(간석지역)는 다음 두 그림에서 해안선과 인접해 그려진 점선 부분까지였습니다.
해안에서 가장 근접한 수심선에 1/2m라고 표기되어 있습니다.



동해 원산, 서해 강경과 더불어 조선 3대 포구였던 남해의 마산포 해안은 한일병합 1년 후인 1911년, 일본인 박간방태랑(迫間房太郞)이 착수한 매립공사에 의해 그 모습을 잃게됩니다.

동굴강 서굴강과 서성선창․백일세선창․어선창․오산선창은 바다를 떠나 육지 속으로 서서히 사라져 갔습니다.
그림에서 본 당시 해안의 석축들은 지금도 마산도심 땅밑에서 잠들고 있겠죠.
우리나라에 조선시대 항구가 보존된 도시는 없다는데, 발굴해서 역사문화자원으로 사용할 수는 없을까요? 전혀 불가능한 일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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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27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8) - 개항이후

<자복포에서 펼친 일본의 야욕>

-한국마산포 대일본제국 전관거류지 평면도-
1902년 5월 / 일본정부 / 한일양국정부 / 막대축척 / 마산포일본전관거류지협정서 / 규장각



마산의 일본전관거류지가 확정된 후 그 협정서에 첨부된 지도입니다.
자복포, 즉 구 한국철강 주변 일대가 상세하게 측량하여 표시되어 있습니다.

35회에 포스팅한 일본의 육군중포병대대(현재의 월영동 아파트 단지, 구 국군통합병원)가 옮겨오기 전의 자복포 일대를 세밀히 알 수 있는 유일한 자료입니다.

지금은 완전히 사라져 버린 자복포의 해안선이 상세히 나와 있을 뿐아니라, 범례를 만들어 도로, 가옥, 구거, 묘지 등까지 잘 표시되어 있어서 당시의 상황을 정확하게 알 수 있습니다.
월영리에서 율구미로 이어지는 옛길도 세밀하게 표시되어 있습니다.

토지의 소유도 러시아인소유지, 일본정부소유지, 일본인 박간방태랑(迫間房太郞) 소유지, 한국인소유지로 구분해 놓았으며 면적표까지 만들어 도로 및 구거의 면적 외에 토지 소유자별 면적까지 평방미터와 평방평 단위로 기재해 놓았습니다.

이 지도만 보아도 당시 일본이 러시아를 견제하고 마산을 집어 삼키기 위해 얼마나 심혈을 기우렸는지 알 수 있습니다.
지도 왼쪽 아래에는 창원감리 한창수와 일본영사 판전중차랑(坂田重次郞)의 인장이 있습니다.

이 지도의 표지글입니다.





지금은 사라져버린 자복포 부근의 원래의 모습입니다.
이 지도에서, 오늘을 사는 우리가 다시 살려야 할 것은 없을까요?
잃어버린 우리 모습의 한조각이라도 다시 찾을 수 있는 도구로 이 지도를 사용할 수는 없을까요?

위 지도의 현재 모습이 아래 그림입니다.
붉은 점이 동일한 지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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