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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24 00:00

마산 창원 역사읽기 (27) - 옛사람들의 쓰레기장, 성산패총

4. 유적으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

4-1  옛사람들의 쓰래기장, 성산패총

 

직선길이 12.5km로 전국 시가지 도로 중 가장 긴 창원대로를 따라 자동차로 20여분 달리다 보면 광활한 창원공단 한 복판에 야트막한 야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거기에 성산패총이 있다.

성산패총은 공단도시 창원시민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창원공단은 기계생산이 주류이다. 지금의 창원모습이 될 것이라고 예견하듯 성산패총에는 조개껍질과 토기류 외에 철을 생산했던 흔적이 발견돼 야철지(冶鐵地)로도 명성이 높다.

오늘날 창원공단을 이룬 요람인 셈이다. 지금 성산패총은 사적 240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지금도 유적지가 발굴되어 보존되는 경우는 드물다. 개발이 항상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성산패총이 발굴된 1970년대 초는‘산업근대화’를 부르짖던 시기였으므로 두 말할 필요 조차 없었다.

청와대 비서관들은 성산패총을 보존할 경80여억원의 추가 예산이 필요한데다 무엇보다 대통령의 특명사업인 자주국방을 위한 공단조성의 공정이 1년 이상 지연되는 문제가 발생한다고 주장하며 보존을 반대했다.

즉, 발굴조사에는 지장이 없도록 예산 등 모든 지원을 하겠지만 보존만큼은 피해야 한다는 것이 요지였다.

하지만 당시의 관련학자들은 차라리 발굴조사를 하지 않는 한이 있더라도 유적만큼은 보존돼야 한다고 맞섰다.

결국 성산패총의 보존 문제는 대통령에게로 넘어갔다.

현장에서 브리핑 받고 발굴현장을 보고 나서도 아무런 언급이 없었던 박정희 대통령은 만찬장에서 “공단을조성하게 되면 조망할 수 있는 위치로는 그 곳 밖에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이 한 마디로 보존은 결정되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성산패총은 살아 남게된 것이다.

<성산패총 유물전시관과 전시관 내 야철지 유>

 

-성산에서 보이는 것들-

성산패총은 창원분지의 남측에 형성된 구릉에 자리하고 있는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에 이르는 마을유적이다.

유적이 분포하는 구릉을 성산(城山)이라 부르는데, 이 곳에 돌로 쌓은 삼국시대의 성곽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의 성산은 벌판 가운데 홀로 솟은 구릉이다. 원래는 그 북동쪽의 가음정동 당산(堂山)과 이어져 있었으나 창원공단의 중심도로인 산업대로의 개설로 그 줄기가 잘리고 지금의 모습으로 남게된 것이다.

옛 사람들이 먹거리를 구해 먹고 그 찌꺼기를 내다 버린 쓰레기터로서 조개껍질이 집중적으로 쌓여 있어 그 모양이 얕은 언덕이나 무덤과 비슷하여 조개무지[貝塚]라 불리기도 한다.

이 곳에는 조개껍질에 함유된 알칼로이드화 성분으로 인해 많은 유기질 유물이 원래의 모습으로 보존되므로 당시의 물질문화와 식량자원, 자연환경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해 준다.

또한 해안선의 변화에 기인하는 패각의 구성인자 분석과 패총의 분포권을 토대로 해안선 추정에도 중요한 근거를 제공한다.

성산패총에서는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 삼국시대에 이르는 문화층이 확인되었다. 성산패총의 중심 유적은 패총과 야철지로서 철기시대에 해당된다.

무엇보다도 당시의 쇠부리터가 확인된 점은 획기적인 발견이랄 수 있다. 지금도 이 유구는 이전 복원되어 시민들이 관람할 수 있다.

성산산성은 삼국시대에 조성된 것이다. 조사된 유물들을 구역별로 살펴보면, 동쪽 패총구역은 지금은 없어진 성산마을 배후 사면의 해발 약 20m 정도되는 곳에 정남향으로 입지해 있었다.

<성산패총 발굴광경>

 

패총의 규모10×15m 정도의 소규모이다. 조개껍데기는 굴이 대부분이며, 전복·대합·소라 등이 섞여 있다.

유물은 연질도기 위주이고, 경질도기와 골각기도 출토된다.

이 구역에서의 가장 두드러진 성과는 청동기시대 문화층의 확인이다. 즉 무문토기들이 출토되었다.

이외에도 반월형석도를 비롯한 석기와 수정제곡옥, 각종 골각기, 두형토기, 시루 등의 연질도기류가 출토되었다.

서남쪽 패총구역에서는 유구석부와 지석, 마제석촉, 석부 등의 석기류와 각종 골각기가 출토된 것을 비롯하여 다양한 도기류가 검출되었다.

중국화폐인 오수전(五銖錢)이 출토되어 패총이 어느 시기부터 사용되었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갖가지 조개껍질과 짐승뼈가 출토되어 당시인의 생계유형을 보여주기도 한다. 패류는 굴·방갑·고동 위주였다.

재첩도 보였는데 이 성산부근이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짐승뼈는 사슴·노루·멧돼지·말 등을 비롯하여 개·닭·쥐 등이 포함되어 있다.

어류로는 참돔·농어·다랑어·새치다래 등이 있는데 다랑어 등의 존재로 미루어 당시의 어업이 연안에만 한정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성산패총 출토유물>

 

패각층 아래에서 야철지가 조사되었다. 야철지는 굴뚝의 하부로 여겨지는 소형의 원형유구와 쇳물을 흘러내린 것으로 보이는 홈통 등의 유구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야철송풍관이 출토되어 이 곳이 야철유적임을 증명하고 있다.

야철지의 조성시기는 출토된 오수전으로 볼 때 기원을 전후한 시기로 추정된다.

구역의 가장 중요한 성과는 쇠부리터의 발견이다.

이 곳에서 발견된 오수전은 중국 한나라 선제때 주로 사용된 것이므로 성산패총의 연대가 기원전 1세기 경이었을 가능성을 보여 준다.

북쪽 패총구역에서는 마제석검, 유구석부, 지석 등의 석기류와 각종 골각기 및 도기류가 출토된 것을 비롯해 다른 패총 구역에 비해 철기가 많이 출토된 것이 특징이랄 수 있다.

이 곳에서 출토된 철기 중 특기할 만한 것은 철기의 제작시 이용되었던 망치가 출토된 점이다.

성곽은 자연석으로 축조하였는데, 성곽의 형태는 성산 정상부위의 외곽을 따라 구축한 테뫼식이다.

서벽의 경우에는 성내에 성곽과 관련된 생활유적이 확인되어 성곽 내에 일정한 규모의 병력이 주둔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성곽의 서남쪽 구간에서 당나라 고종 무4년( 621)에 처음 주조되어 당나라에서 널리 사용되었던 개원통보(開元通寶)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성의 축조 시기는 7세기였을 가능성이있으나, 삼국시대 전기의 도기류 출토에 근거하여 3세기 대로 추정하기도 한다.

 

-옛사람들의 삶을 쓰레기장에서 알 수 있고-

성산패총의 발굴조사를 통해 혹은 그 존재로써 우리는 많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우선 이 패총의 존재로써 당시의 환경을 헤아려 볼 수 있다. 패총의 분포 사실로써 이곳과 가까이에 바다가 있었음을 쉽게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패총의 분포권을 잇게 되면 옛날의 해안선에 대한 대체적인 이해가 가능하다.

실제 창원분지내에는 성산패총과 비슷한 시기에 형성된 많은 수의 패총이 분포한다.

가장 북쪽의 소답패총 및 남산패총, 가장 남쪽의 성산패총과 가음정동 패총으로 이어지는 그 가운데의 낮은 곳이 당시의 해역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추정은 조선시대의 지리지에 등재된 포구와 염전 등의 분포를 통해 방증된다.

그 범위는 지금의 시외주차장을 중심으로 한 사화동(조선시대에 사화포가 있었음, 북측 외곽에는 반계동패총과 남산패총, 소답동패총이 있음)과 명서동(한마음병원 일대에 염전 및 염창이 있었음), 대원동, 지귀동(조선시대의 지이포가 있었음) 반림동, 내동(내동패총이 있음), 외동(외동패총 및 성산패총이 있음), 가음정동(가음정동패총이있음) 부근으로추정된다.

또한 패총에서 출토된 다종다양한 자연유물의 분석을 통해 당시의 생계경제와 이를 위해 활동한 자원영역 등을 알 수 있다.

발굴보고서에 의하면, 육지와 바다의 각종 동물유체가 출토되어 이들이 식료로 사용되고 그 부산물은 도구로 혹은 장신구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육지동물은 사슴, 돼지, 노루 등이 잡혔다. 이는 지금의 동물상과 크게 다를 바 없다.

하지만 해수산 어패류 중 다랑어의 존재는 당시의 자원영역이 연안어로에 한정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또한 민물조개인 재첩의 존재는 성산 부근이 민물과 바닷물이 섞이는 지역임을 알게 해 준다.

청동기시대의 구조물은 세 차례의 조사에서 한 번도 확인되지 않았지만 동쪽과 서남쪽 패총구역에서 출토된 청동기시대의 유물들은 이 시기에도 성산 구릉에서 사람이 생활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특히 다른 곳에서의 유적 발굴 예를 비교해 보면 청동기시대의 유적은 구릉지에 입지하는 경향이 많은데 가까운 곳의 남산유적에서는 구릉의 정상부에 입지한 청동기시대 마을의 한 형태로서 구릉의 꼭대기나 그 비탈에 형성된 마을의 바깥에 둥근 고리 모양의 고랑(환호 環濠)을 파서 외적을 막는 방어적 성격을 가진 마을 즉, 환호취락이 조사되었다.

이러한 예를 통해 볼 때, 성산의 정상부에도 청동기시대의 취락이 입지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조사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였다.

조사 전의 성산 일대는 북측사면을 제외한 삼면은 경사가 완만하였고, 그 남쪽사면에는 약 30여호의 민가로 구성된 외동마을이 조성되어 있었다.

조사 전의 상황을 볼 수 있는 사진에 의하면 성산의 정상부는 주위 사면과 구분되는 봉우리가 있었다.

바로 이 부분이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에 이르는 취락이 조성된 곳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 곳은 주변 사면부의 야철지와 패총에 대한 조사만 진행된 채 삭토가 진행되어 조사의 손길조차 미치지 못하였다.

조사당시의 상황이야 여러 모로 보아 이해가 되지 않는 바는 아니지만 취락 전반에 대한 조사로 진행되지 못한 것은 못내 아쉽다.

성산패총에서의 야철지 발견은 고대 창원지역사회의 발전정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철을 매개로 인근지역과 교역했고, 선진문화를 받아들였을 것이다.

지금 창원지역이 기계생산의 메카로 자리잡았던 것은 고대사회의 철생산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먼 옛날의 철제련 역사는 오늘날 야철제(冶鐵祭)로 이어지고 있다.

이 행사는 창원시로 승격된 날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시민의 날에 선보이는 향토 고유의 축제이다. 광활한 시청 광장 가운데 마련된 제단에 인조 용광로에 불을 지펴 창원시의 번영을 기원하고 있다.

공단 내의 용광로 기술자들이 성산패총 야철지에서 부싯돌로 불씨를 만들고 성화에 불을 붙여 시청앞 광장까지 봉송한다. 창원시장은 이 불씨를 받아 용광로에 불을 지핀다.<<<

최현섭 / 당시 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 조사연구부장

이 글은 창원시가 마산 진해와 통합되기 이전에 쓴 글이기 때문에 현재 상황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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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10 00:00

마산창원 역사 읽기 (25) - 문화권력, 이은상

3. 지역의 인물을 찾아서

3-8  문화권력, 이은상

 

 

어제 온 고깃배가 고향으로 간다하기 / 소식을 전차하고 갯가으로 나갔더니 / 그 배는 멀리 떠나고 물만 출렁거리오. (<고향생각>, 1923년)

봄처녀 오시누나 새 풀옷을 입으셨네 / 하얀구름 너울쓰고 구슬신을 신으셨네 / 꽃다발 가슴에 안고 누굴 찾아 오시는고. (<봄처녀>, 1925년)

내 고향 남쪽바다 / 그 파란물 눈에 보이네 / 꿈엔들 잊으리요 / 그 잔잔한 고향바다 / 지금도 / 그 물새들 날으리 / 가고파라 가고파. (<가고파>, 1932년)

 

앞의 두 노래는 중고등학교 음악교과서에 실려 우리에게 친숙한 곡이고, 마지막 노래는 우리 국민들 모두가 애창하는 노래다. 이 노래 가사를 지은 사람이 이은상이다.

<가고파>가 국민들이 애창하고 또 마산을 상징하는 노래로 널리 불려지면서 이은상은 마산의 대표적인 문인으로 간주되어 왔다. 

<노산 이은상 (1903~1982)>

 

-노산, 그는?- 

노산 이은상은 19031022에 마산에서 교육가 이승규선생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918년 부친이 관계한 마산 창신학교 고등과를 졸업한다. 창신학교 시절 그는 안확(자산)의 민족주의와 국학에 대한 연구로부터 크게 영향을 받는다.

1923년에 연희전문학교 문과, 1925년부터 1928년까지 일본 와세다 대학 사학부와 동양문고에서 사학과 국문학을 공부한 후 귀국한다.

1928년 마산에 돌아와 고향의 노비산(鷺飛山)에 올라 시조 한 편을 쓴다.

내 놀던 옛동산에 오늘 와 다시 서니 / 산천의구란 말 옛 시인의 허사로고 / 예 섰던그 큰 소나무 베허지고 없구려 (<옛동산에올라>, 1928)

 

이은상은 고향의 산인 노비산 이름을 따서 자신의 호를‘노산’으로 짓는다.

그는 1929년 월간잡지『신생』의 편집장을 한 후, 1931년-32년 이화여자전문학교 교수를 비롯하여 동아일보사 기자, 『신가정』편집인, 조선일보사 출판국 주간, 조선일보사에서 발행되는『조광(朝光)』의 편집주간을 했다.

1942년 조선어학회 홍원 사건에 연루되어 함경도 홍원경찰서와 함흥형무소에 구금되었다가 이듬해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고 한다.

일제 말에 전라도 광양에 은신해 있다가 해방이 되자 노산은 광주에서 194512월에「호남신문」을 창간하여 1947815일자부터 처음으로 가로쓰기로 종합일간지를 간행했다.

이은상은 일제하에 낭만적 민족주의자로서 전통시조를 계승하여 많은 시조를 창작하였다.

1933년에 나온『노산시조집』은 생동적이면서도 뛰어난 언어적 기교를 발휘한 작품들을 모은 것이다.

그는 시조 창작과 기행문 등을 통해 조선의 자연을 노래하고 우리말을 지키는 노력을 했다.

노산의 작품에서 식민지 지식인의 고뇌와 진지한 역사의식을 찾아보기는 어렵고 또『조광』의 편집주간을 한 것 등 때문에 그의 일제 때 친일 행적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아직 분명하게 입증된 것은 없으므로 일단 기존의 연구 결과에 따르기로 한다.

일제 때의 소박한 낭만적 민족주의자들이 해방 후 좌우익의 갈등에서 우파적이 되는 것은 일반적인 현상이다. 특히 노산은 일찍이 1920년대 후반 카프(프롤레타리아) 문학에 대해 국민문학을 주창하고 이에 기초한 작품활동을 했으므로 그에게 이승만에 의해 주도된 분단국가는 당연히 받아들여야 할 새로운 국가였다.

그리고 6·25전쟁을 겪으면서 그는 북한공산주의 집단에 대한 분노와 북진통일(‘고지’)에 대한 염원을 직설적으로 표현하기도 한다. 

고난의 운명을 지고 역사의 능선을 타고 / 이 밤도 허우적거리며 가야만 하는 겨레가 있다 / 고지(高地)가 바로 저긴데 예서 말수는 없다. (<고지가바로저긴데>, 1953년)

 

이처럼 소박한 민족주의자로서 또 반공주의자로서 노산은 이승만정권 하에서 전남대학교 재단이사장, 이충무공기념사업회 회장 등 굵직한 직함을 가지고 다양한 활동을 한다.

3·15가 일어나기 얼마 전 이은상은 ‘문인유세단’을 조직하여 자유당 대구 유세에서 당시 시국을 임진왜란과 비교하면서 “이순신같은 분이라야 민족을 구하리라, 그리고 그 같은 분은 오직 이 대통령이시다”고 말하였다고 한다.

1960년「서울신문」35일자에는 “대통령선거 유세 중에 시인 이은상씨는 이승만 박사의 위대함과 아울러 이기붕 의장의 성실하고 자애로운 인간성을 설명하여 깊은 감명을 주었다”고 보도했다.

 

또한 39일 오후 1시 마산무학초등학교에서 정부통령 선거유세를 지원하는 강연회가 열리는데 이 때 소설가 박종화 등과 함께 이 강연에 참여하여 선거유세를 했다.

그러므로 마산에서 이승만 정권의 부정선거를 규탄하는 3·15민주화의거가 일어나자 노산은 이를 비판하면서 3·15의거는 “무모한 흥분”으로 “지성을 잃어버린 데모”“불합리·불합법이 빚어낸 불상사”이며 따라서 시위가 확대되는 것을 ‘마산사람’으로서 염려하며 마산시민들에게 “자중하기를 바란다”고 당부하고 있다.

<이은상이 박종화 등과 함께 마산무학초등학교에서 리승만의 선거유세를 한다는 벽보>

 

-박정희를 미화하고-

이승만 외에도 이은상이 이순신 같은 구국의 영웅으로 미화한 또 다른 인물이 박정희이다.

박정희는 만주국 군관학교를 거쳐 일본 육사를 졸업한 후 1944년에 만주군 보병부대에 배치되어 일제가 패망할 때까지 그 부대에 있으면서 항일무장투쟁 세력에게 총부리를 겨눈 경력이 있다.

박정희는 해방 후 한때는 남로당의 박헌영 계열에 속해 있다가 군내 좌익세력을 제거하는 숙군작업에서 자신의 동료들을 팔아 목숨을 건졌고, 6·25를 거치면서 승승장구하여 마침내 소장으로서 5·16쿠데타를 주도하여 군사정권을 세운다.

이은상은 5·16쿠데타 사실을 사전에 알고 있었으며 어느 정도 협력했다는 사실도 증언에 의해 밝혀졌다.

그러므로 이은상은 군사쿠데타로 박정희가 집권하자 공화당 창당선언문을 써주고 박정희의 문화행정 자문역으로 민족문화협회장 등 다양한 감투를 쓰고 박정희정권의 문화,교육정책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은상은 박정희 묘비 헌시비문에 “…조상의 얼과 전통 찾아서 되살리고 세계의 한국으로 큰 발자국 내디뎠기 / 민족의 영도자외다, 역사의 중흥주외다”라고 찬양할 정도로 독재자 박정희를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로 숭배하였다.

<이은상이 지은 박정희 조곡>

 

노산은 이승만과 박정희에 대한 협조와 찬양에 그치지 않고 수많은 광주시민을 학살하고 권력을 잡은 전두환 정권에 대해서도 협조하고 찬양하기에 이른다.

전두환이 간접선거에 의해 대통령에 당선되자『정경문화』19809월호에 <새 대통령에게 바란다>라는 글을 실“전두환 대통령의 당선을 경하하며”, “한국의 특수한 상황으로 보아 무엇보다도 강력한 지도자를 원하는 것이 거의 일반적 여론”이라는 글을 쓰고 다음 해 4월 전두환 정권의 국정자문위원이 된다.

 

노산은 다음 해(1982년) 918일에 세상을 떠났다.

오늘날 노산에 대한 평가는 상당히 극단적이다. 뛰어난 시조작가이자 민중시인으로 또 훌륭한 민족주의자이자 민주주의자로 찬양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일제시대의 친일 혐의를 제기하고 특히 해방 후의 독재정권에 아부하여 출세하고 명예를 얻으며 권력을 좇아 산 어용 지식인으로 폄하하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다.

우리가 볼 때 노산의 문학적 업적에 대해서는 인정해야 하겠지만 그가 이승만, 박정희의 독재정권을 옹호하고 심지어는 전두환 정권에 대해서까지 찬사를 보낸 것이 명백히 사실로 드러난 이상, 노산에 대해 다시 냉정하게 평가해야할 시점에 이르지 않았나 생각한다.<<<

김재현 / 경남대학교 인문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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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실비단안개 2014.11.10 11:31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평소 궁금했던 점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 허정도 2014.11.11 13:12 신고 address edit & del

      방문 감사합니다

  2. 김기철 2014.12.21 07:33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반갑습니다, 하시는 일과 생각하시는 모든것에 늘 박수를 보냅니다.
    늘 건강 하시길 ....
    많은 자료와 글 들이 너무 좋습니다, 잘 읽겠습니다, 감사 합니다.

2009.10.12 08:27

선생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선생님이 돌아가셨습니다》


선생님이 돌아가셨습니다.
마산 창신공고 건축과에서 우리를 가르친 선생님입니다.
2학년 1학기가 시작되던 1969년 봄에 우리 반 담임으로 부임하셨으니 선생님 만난 지 꼭 40년 되었습니다.

첫날 인사에서 선생님은,
마산이 고향이며 한양공대 건축과를 졸업한 후 공군 제대하고 학교로 왔다고, 잘 해보자고 하셨습니다.
그 날 입었던 선생님의 차분하고 개성 있는 카키색 양복과 화려하게 붉었던 넥타이가 참 멋졌습니다.
옷 뿐 아니었습니다.
호리호리한 몸매에 서늘한 눈매, 약간 웨이브진 머리칼, 요즘 말로 얼짱이었습니다.
첫날 그 멋졌던 선생님의 모습은 그 후 오래 동안 내 기억 속에 남아 있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미술부장을 했다는 선생님은 그림을 잘 그렸습니다.
흰색·붉은색·푸른색 분필로 세계의 유명 건축물들을 그려가며 강의하던 모습은 환상적이었습니다.

지금의 사모님과 열애 중일 때라, 그 야릇한 소문이 하이틴이었던 우리들을 더 뜨겁게 달구었습니다.

당시는 박정희 대통령이 밀어붙이던 경제개발 시기라 공고졸업하면 취직은 잘되었습니다만 교육시설은 엉망이었습니다.

내가 다닌 학교는 원래 인문고였는데 정부시책에 맞춰 공고로 전환하였고, 나는 첫 입학생이었습니다.

그러니 실업교육을 시킬 충분한 준비를 못한 채 학생을 받았던 모양입니다.
건축공부에서 기본인 제도판조차 준비가 제대로 안 되었고 교재도 변변치 않았습니다.
어영부영 1학년을 대충 마친 우리들에게 선생님은 대학교재에서 우리 수준에 맞는 내용을 발췌, 등사본 교재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그 내용이 대학교재의 엑기스였다는 건 세월이 제법 흘러 내가 건축에 대해 뭘 좀 안 뒤 알았습니다.

<선생님과 함께 찍은 졸업사진>



-졸업 후에도 이어진 선생님의 사랑-

1972년 말, 겨울 날씨가 한창일 때였습니다.
그때 나는 고등학교를 막 졸업하고 마산시청 옆의 작은 설계사무소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저녁 8시 쯤 선생님께서 사무소에 찾아 오셨습니다.
가끔 찾아왔지만 밤에 오신 적은 없었는데, 그 날은 내가 야근하는 줄 아신 것처럼 그렇게 찾아 오셨습니다.
분명히 마음먹고 날 찾아오셨을 겁니다.
그날 저녁 사무소에는 나 외에 아무도 없었습니다.

선생님께서 날보고
“여기 난로 옆에 와 앉아보라”고 하셨습니다.
피어오르는 불이 빤히 보이는 검은 색 난로였는데 깔때기 모양의 석유통과 난로가 한 세트로 장착된 것이었습니다.
영문도 모를 뿐 아니라 ‘선생님’은 왠지 어렵고 무서워 주저주저하며 의자를 끌어와 선생님 곁에 슬 앉았습니다.

“이제 건축을 좀 배웠냐?”
“아, 예에, 조금,,,”
“내가 하는 말 잘 들어라”
“예-에”
“지금 네 실력은 건축하지 않는 일반사람들도 알고 있는 상식 수준 정도다, 조그만 재주 믿다가 큰 코 다치니 절대 노력을 게을리 하지마라.”
“아, 예-에”

그날 밤 선생님의 그 한마디, 그것은 내게 청천벽력 같았습니다.
‘내 능력이 상식수준’이라는 말 때문이었습니다.
그 때 나는 내가 제법 하는 줄 착각하고 있었거든요.
그럴만한 이유도 나름대로 있었습니다.
바로 그 전 해에 실업계고등학생들이 겨루는 각종 기능경기대회에서 설계 잘 한다고 상을 많이 받았거든요.
주변에서 ‘잘한다’는 소리도 자주 들었고요.
그런 분위기 때문에 내가 마치 뭐나 된 것처럼 속으로 우쭐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아직 어렸거든요.

그러나 나는, 그날 밤 내 기를 콱 죽이는 선생님의 그 말씀을 가슴 깊숙이 새겨 넣었습니다.
제법 긴 세월이 흐른 뒤까지 선생님의 그 말씀을 내려놓지 않았습니다.
그 겨울밤,
선생님의 그 말씀 한 마디는 젊은 시절 내가 건축가로 성장하는 기름진 자양분이 되었습니다.

몇 년 후,
공부가 하고 싶어 어려운 여건을 뚫고 대학에 가려했을 때, 선생님께서 도움을 주셨습니다.
내가 유명 건축가 문하로 가게 되어 서울로 올라갈 때, 선생님은 더 없이 기뻐하시며 “꼭 좋은 건축가가 되라”고 격려하셨습니다.

세월이 흘러,
나도 선생님처럼 건축사가 되었고, 동종업계 같은 회원으로 사회생활을 했습니다.
건축이나 도시 관련 각종 위원회에서 함께 활동하기도 했습니다.
‘3.15의거기념사업회’에서는 선생님과 나란히 임원으로 활동했습니다.
내가 도시문제를 주제로 발표나 토론을 할 때면 선생님은 언제나 방청석에 앉아 내게 힘을 보내주었습니다.
좁은 지역이라, 사회생활하면서 선생님과 자주 얼굴을 마주치며 지냈습니다.

해마다 오월 스승의 날이 되면,
어느 해는 넥타이니 카네이션이니 조그만 선물을 들고 선생님을 찾았고,
어느 해는 통술집에서 선생님께 술잔을 드리기도 하면서 그렇게 세월이 흘렀습니다.

십년 전 쯤 이었을 겁니다.
한 번은 선생님께,
“그 겨울 밤 난로 옆에서 하신 그 말씀 한마디가 제게 끼친 영향이 너무 컸습니다”
고 말씀드렸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가만히 생각하시더니,
“잘 모르겠는데, 내가 그랬던가? 허허”
웃으셨습니다.

선생님을 만나면 늘 무언가를 의논드리고 묻고 했습니다.
도의원을 지내기도 한 선생님은 지역의 주요현안에 대해 당신 나름의 생각을 갖고 계셨기에 들어 두어야할 말씀이 많았습니다.

그랬는데,
언제부터인가 선생님께서도 가끔 내 의견을 물었습니다.
내 나이 쉰 가까이 되고, 선생님께서 예순 정도 되었을 때부터였습니다.
선생님의 둘째 아들 진로문제를 두고도 많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나는 선생님의 그런 모습이 좋았습니다.
날 믿어주는 선생님이 고마웠습니다.
그 옛날,
까마득한 40년 전 사제지간이 그렇게 이어지는 게 참 좋았습니다.

서너 달 전,
신문사 대표직을 마치고 나니 앞으로의 내 진로를 물으시고 깊은 신뢰를 보내주셨습니다.
나는 선생님께,
‘옛날의 선생님으로 다시 돌아가 절 이끌어 달라’고 부탁드렸고, 선생님은 내 청을 기분 좋게 받아주셨습니다.

그랬던 우리 선생님께서 며칠 전 돌아가셨습니다.
지난 6일 아침 일찍,
선생님의 둘째 아들이 내게 부음을 알려 왔습니다.
전화하던 중 목이 콱 막히며 눈물이 툭 하고 떨어졌습니다.
건강이 좋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갑자기 가실 줄은 몰랐습니다.

저녁에 도립 마산의료원 영안실에서 아들을 만났더니,
“어제 밤에 선생님(선생님의 아들은 날 선생님이라 부릅니다)의 얼굴이 TV에 비치는 걸 보며 좋아하셨는데 오늘 새벽 2시에 그만 돌아가셨......"
끝내 말을 잊지 못했습니다.


장례식 날,


땅에 묻히는 선생님께 마지막 인사를 드렸습니다.
영정 속 선생님은 조용히 웃고 계셨습니다.

돌아오는 길이 허전했습니다.
기댈 수 있는 언덕 하나가 허물어져버린 것 같았습니다.

그날 밤,
선생님 생각이 나서
‘혹시 고등학교 앨범이 있는지, 있다면 선생님 젊은 시절 사진이 있을 텐데’
싶어서 이리저리 찾아보았더니 책장 한 구석에 그 동안 잊고 있었던 낡은 졸업앨범이 있었습니다.

앞의 흑백사진은 거기서 찾은 선생님의 40여 년 전 모습입니다.
스물아홉 우리 선생님입니다.

"김정수 선생님, 감사합니다.
부족한 저를 끌어 주시고 믿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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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천부인권 2009.10.12 09:06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선생님은 행복하신 분입니다.
    마음에 두고 사실 수 있는 스승님이 있다는 것은 기준을 가졌다는 것인데
    저는 그런 분이 부럽습니다.

    • 허정도 2009.10.12 14:17 신고 address edit & del

      감사합니다.
      늘 가까이서 절 응원하셨던 선생님인데 이렇게 갑자기 떠나시니 마음이 참 아픕니다

  2. 김현진 2009.10.13 18:07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저는 고등학교 교사입니다.
    어느덧 교직경력 10년이 다 되어갑니다.
    학교 수업이, 학교 생활이 이제는 익숙해지고
    그 만큼 열정도 엷어졌습니다.

    이버님께서....짧은 시절 교직생활 동안에 이렇게 제자의 가슴속애 아름다운 존재가 되었음에 비해
    저는 아직 아무것도 한 것이 없어 참으로 부끄럽습니다.

    • 허정도 2009.10.13 18:12 신고 address edit & del

      둘째 며느리군요.
      우리 선생님께서 며느리 칭찬과 자랑을 많이 했는데, 바로 그 며느리네요.
      다시 한번 위로 드립니다.

  3. 김동훈 2009.10.13 22:18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선생님,
    저는 큰아들 동훈입니다.
    위로와 격려 덕분에 아버지를 마지막 가시는 길 잘 모시고 일상으로 돌아왔습니다.
    묘소도 잘 정돈하고 아버지 유품도 정리하고 왔습니다.
    사람들과 무심코 하던 얘기가 저에게 이렇게 닥칠 줄은 몰랐는데
    현실이 되었습니다.
    樹欲靜而風不止 , 子欲養而親不待
    불과 며칠사이에 세상이 많이 달라진 느낌이네요.
    약간의 적응기가 필요할 것 같기도 합니다.
    아버지의 서재에서
    돋보기, 틀니 등 평소 쓰시던 물건들을 챙기고,
    학생증, 교사신분증, 수십년 전의 비망록, 메모들을 비롯한
    수십년씩 된 기록들을 챙기고,
    병상에서도 마지막까지 쓰시던 글들을 읽어보며 회상했습니다.
    깨알같은 글씨로 연말까지의 일정을 꼼꼼이 기록해두신 수첩에서
    날이 갈수록 힘이 약해지는 필체와 실천하지 못하고 X표를 하신 계획들을 보며
    눈물을 흘렸습니다.
    마지막 열흘여간 병원에서 함께 생활하며 수발을 들었습니다.
    일생동안 가장 고통스러웠지만 가장 아름다운 시간이었습니다.
    산소호흡기 탓에 발음은 부정확하지만
    오랫동안 가슴속에 묻어둔 대화를 나누고
    숟가락으로 식사를 떠서 드리고, 세수를 시켜드리고, 이를 닦아드리고,
    어릴적 저의 기저귀를 갈아 주셨듯이 아버지의 대소변을 받아드렸던,
    운명하시기 며칠 전에는 신부님을 모시고 병자세례를 받으시고
    하염없이 울기도 했고,
    며느리의 배를 만지시면서 뱃속의 아기이름을 지어주지 못해서
    끝내 미안하다고 하시던,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의식이 돌아오실 때면
    어머니와 자식들의 볼에 입맞춤을 하시며 안아주시던
    어버지가 그립습니다.
    평소 깜끔하신 분이셨는데 함께 목욕 한번 제대로 못한 것과
    하루 시간을 비운 사이 운명하셔서 임종을 하지 못한 것이
    못내 가슴 아픕니다.
    하늘에서 고통없이 편안히 계실 겁니다.
    이제는 암으로 투병 중인 어머니 잘 모셔야 겠다는 다짐을 해봅니다..

    아버지를 기억할 수 있는 소중한 글 감사합니다.
    선생님께서도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김동훈 拜上

    • 허정도 2009.10.14 07:39 신고 address edit & del

      선생님게서 늘 자랑스럽게 생각하시던 큰 아들이군요.
      큰 아들 결혼 않는다고 걱정을 많이 하셨는데, 가시기 전 큰 며느리도 보고 임신한 것까지 아셨으니 제 마음도 참 좋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무는 바람이 건드리고, 부모는 예고 없이 떠나버리지요.
      선생님께서 그렇게 어려운 시간 보내실 때 함께하지 못해 정말 부끄럽고 죄송합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는 가셨지만 두 아들 두 며느리, 그 밑에 손자들,,,
      이렇게 이어 갈거니 외롭지는 않으실테죠.
      어머님이신 우리 사모님 건강 회복되기를 간절히 빕니다
      아드님과 가족 모두에게 진심으로 위로 드립니다.

  4. 백영식 2009.10.20 11:07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안녕하십니까 교수님
    벌써 10여년이라는 시간이 지나서 기억 하실지 모르겠습니다.
    잘 지내시는지 궁금합니다.
    자주 찾아뵙고 해야하는지 그러지 못해서 너무나 죄송할 뿐입니다.
    이번에 고인이 되신 김정수선생님 글을 읽다가 낯익은 허교수님 글을 읽고 이렇게 글을 남깁니다.
    둘째 아들 동한이형과 친분이 있어서 저도 간간이 얼굴만 뵙고 했었는데
    부고 소식을 듣고 대구에서 부랴부랴 마산에 찾아 갔었습니다.
    저는 지금 대구에서 공무원 신분으로 있습니다.
    건축학도로서 끝까지 최선을 못하고 있어서 늘 아쉽지만 나름대로 건축 공무원으로써
    성실하게 맡은 바 직무를 하고 있습니다.
    예전 방학때 한번씩 찾아뵙던 때가 그립습니다.
    지나고나면 추억이 참 소중하다는걸 느낍니다.
    그리고 아침 방송에 나오신다길래 보았습니다.
    긴장되지 않고 말씀을 너무나 잘 하시는 모습에 뿌듯했습니다 ㅎㅎ
    덕분에 저도 갈수록 집사람한테 소흘히 하는것 같아서 미안했는데 이제 책도 읽어주고 해야겠습니다
    얘기가 길어지는것 같습니다.
    선생님도 건강하시고 사모님과 행복하시길 바랍니다.
    그럼 이만 줄이겠습니다.

    • 허정도 2009.10.20 14:48 신고 address edit & del

      백영식군, 반갑네.
      대구에서 공무원생활한다는 이야기는 들어 알고 있었네.
      학교 다닐 때 정말 열심히 했지, 성실했고.
      그 때 처럼 초심을 잃지 않고 살아간다면 앞으로도 큰 발전 있을 것이네.
      잘 지내게.

  5. 영영사랑 2009.11.26 01:01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김정수지부장님의 소식에 너무 놀랬습니다. 제가 협회다닐때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때오셔서 `천양아 부모잃은 죄인이니 하늘보지말고 울어라`하시면서 어깨를 두드려주셨는데......
    무심히 세월이 지났네요. 허소장님의 아름다운추억이 계시듯 저에게도 철없던이십대에 4년을 모신 지부장님이신데 이렇게 소식을 듣네요. 살면서 지난시절이 그리워지고 후회도하지만 그때가 참 행복했습니다 늦었지만 지부장님~고통없는 하늘나라에서 편안하시기를 빕니다. ~ 올해가 가기전에 연락한번드릴께요~

    • 허정도 2009.11.26 08:58 신고 address edit & del

      반갑습니다.
      저와 함게 이 블로그에서 글도 쓰는 신삼호 건축사에게 '20년 전 협회에 근무했던 천양이 글을 올렸던데, 참 반갑더라. 혹시 기억나나?'고 했더니
      '기억 납니다, 복스럽게 생긴 얼굴에 마음씨가 참 고왔던 아가씨였는데'라고 하더군요.
      신삼호 건축사는 갓 대학졸업하고 제 사무실에 근무할 때라 협회에도 자주 왔다갔다해서 잘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아무튼 반갑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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