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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30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135. 진해만의 군항 건설

 

135. 진해만의 군항 건설

 

 

1. 국토의 약탈과 국민생활 제재(制裁)

 

일본은 노일전쟁 전에 거제도 일대(송진포松津浦 / 원문에는 송포진)를 근거로 어업 이권을 독점하고 있던 중 일본 대노국(對露國)간에 전쟁이 일어나자 군사적 근거지로 획정하여 우리 국민들의 가옥을 철거하게 하고 전답을 점령하였다.

 

광무 89월에 그들은 소위 해군 방위대 본부를 거제군 송진포에 두고 우리 정부와 사전 협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대일본 가근거지(假根據地) 방비대 군령을 공포(광무 8927일 감시 보고 제58호에 의거)하고 우리 국민의 생활에 제재를 가하였다.

 

 

방비대 군령

 

대일본 해군 방비대 사령관이 군대를 안전케 보지(保持)함을 위하여 각하(刻下)에 긴급한 좌개군령(左開軍令)을 제정하여 지실(知悉)게 하니 이등(爾等) 국민은 능히 준봉(遵奉)하여 만약 위범자가 유()하면 속히 아군위(我軍衛)에 신고함이 가().

 

명치(明治) 378

 

대일본제국(大日本帝國) 가근거지(假根據地) 방비대(防備隊) 사령관(司令官)

 

군령

 

1조 결당(結黨) 반항(反抗)을 기도하며 기타 군대와 군함(軍艦)과 군용 선박에 대하여 적항소위유(敵抗所爲有)하 자를 사형에 처함이라.

 

2조 방비지역과 수역내(水域內)에 가설(架設)한 군용 전선에 가해한 자를 사형에 처함이라.

 

3조 간첩(間諜, 탐지군探知軍) 행실(行實)이 유()한 자를 사형에 처함이라.

 

4조 군사기밀을 누설한 자를 사형에 처함이라.

 

5조 군사 시행(施行)함을 방해하는 자를 군벌(軍罰)에 처함이라.

 

6조 군용지(軍用地) 영조물(營造物)과 선박과 도로와 교량과 정천(井泉)과 수도를 비해(備害)하고 또 파괴오탁(破壞汚濁)케 하거나 또 병기탄약(兵器彈藥) 군수물건(軍需物件)盜奪毁損(도탈훼손)하는 자는 군벌에 처함이라.

 

7조 방비지역(防備地域)과 수역내(水域內) 수륙형상(水陸形狀)을 측량(測量)촬영하게 사형녹취(寫形綠取)하거나 우간연(又干連)한 도서를 발간함을 금함이라. 우범(右犯)한 자를 군벌에 처하되 기제출물(其製出物)과 범행지용(犯行之用)에 공()하는 물건은 몰수(沒收)함이라.

 

8조 방비지역(防備地域)과 수역내(水域內)로 출입하야 방비상 현상과 지형을 시찰하는 자를 군벌에 처함이라.

 

9조 방비수역내(防備水域內)에서 방비대사령관(防備隊司令官) 허가를 득()하지 못하고 일반 어장과 채조(採藻)함을 금()함이라. 우범()한 자를 군벌에 처하고 기범행시(其犯行時)에 공용(供用)하던 물건을 몰수함이라.

 

10조 방비 수역 내에는 일본제국 관선(官船) 이외 방비대 사령관 허가 없이 선해급(船海及) 정박(碇泊)함을 금함이라. 우범(右犯)한 자는 군벌에 처하고 기선박(其船舶)을 몰수함이라.

 

11조 자제일보(自第一條) 지제사조(至第四條)를 범()한 자는 정범종범(正犯從犯) 교사자(敎唆者) 범행(犯行) 기수자(己遂者) 미수자(未遂者) 기타 예비(豫備)와 모사(謀事)만 하는 자를 물론하고 기정장(其情壯)에 유()하여 사형에 처하되 혹은 감등 처분함을 득()함이라. 정장(情壯)을 지()하고 전항(前項) 범행자(犯行者)를 장닉(藏匿)한 자도 역이동벌(亦以同罰)로 논()함이라.

 

12조 전조(前條) 범행자를 체포하여 내고(來告)하는 자에 금이십원(金貳拾圓) 이내로 상여(賞與)함이라. 우범자(右犯者)를 밀고하여 체포케 한 자에는 금십원(金拾圓) 이내로 상여(賞與)함이라.

 

13조 방비지역(防備地域)과 수역내(水域內)에 가설(架設)한 군용전선 보호는 공전선(共電線)이 통과하는 동내(洞內)의 책임으로 하고 각 동리에서 존위동(尊位洞)을 수석(首席)으로 하여 위원(委員)으로 설치하여 전선 보호를 담당함이 가(). 보호위원의 태만으로 군용 전선에 손해가 날하면 기보호위원(其保護委員)을 태형(笞刑) 혹은 구수(拘囚)에 처하되 동내(洞內)에서 기가해자(其加害者)를 체포하여 내고(來告)하면 기형벌(其刑罰)을 면제케함.

 

14조 본회 중 군벌이라 칭함은 사형 감금(監禁) 축방(逐放) 과료(過料) 태구수(笞狗囚)라 하되 필요에 응()하여 벌명(罰名) 변개(變改)함을 득().

 

군령 시행법 중 중요한 조항을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3조 가덕도(加德島) 거제도(巨濟島) 봉엄도(峰嚴島) 한산도(閑山島) 부근에서 어장 채조(採藻) 등 사업을 경영하고자 한 다는 거처, 성명, 연령을 기록하여 주마산제국영사관(駐馬山帝國領事館)을 경유하여 방비대사령관처에 청원하고 기허가(其許可)를 득()한 후 어장 채조(採藻)를 시행 작업할 시()는 반드시 허가표를 대행(帶行)하여야 한다.

 

4조 어장 채조 허가표는 목판에 청원자 거처, 성명, 연령, 어장과 채조할 허가 문자를 명기하고 기외(其外) 가근거지방비대(假根據地防備隊) 사령관인(司令官印)을 압날(押捺)함이라.

 

5조 어장과 채조 허가표는 일장일인(一張一人)을 한하되 가족과 종자(從者)가 항상 가주(家主)나 주인에게 반종(伴從)하여 어장과 채조에 참여하려면 일장(一張) 청원서에 각자 거처와 성명, 연령을 열기(列記)하여 일장(一張) 허가표 수용함을 득()하되 차장합(此場合)에는 허가표에 수반자(隨伴者) 씨명(氏名)을 열기(列記)함이라.

 

6조 어장과 채조허가표(採藻許可票)는 표기인명 외에 통용함을 득()치 함이라.

 

7조 어장과 채조허가표(採藻許可票)를 대지(帶持)아니하고 채조한 자로 인()하면 속히 제지(制止)하여 역외(域外)로 퇴거(退去)케 함이라.

 

이와 같이 군령이 시행됨으로 말미암아 우리 아국민(我國民)이 얼마나 속박을 당하였던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기록을 보면 광무 1013(감리보고 제2) 군용전선을 절단한 아국인(我國人)20년간 경상도 외로 추방한 일까지 있었다. 또 일본 방비대의 요새지 부근에 우리의 무기고가 있으면 우리 국민이 그들에게 봉기할 우려가 있다는 이유로서 약탈을 자행한 것이다.

 

전략(前略) 거차조회우주(據此照會于駐) 본항일영사(本港日領事)······ 현접(現接) 해영사(該領事) 삼포미오랑(三浦彌五郞)의 회복내개(回覆內開)에 웅천군수(熊川郡守) 권석구(權錫九)에서 동군가덕면(同郡加德面) 병천역면(並天域面) 소재(所在) 군기고지(軍器庫之) 무기고류(武器庫類)를 일본인이 취거(取去)한 지의(旨意)를 통보(通報)에 접()하여 우환부사조회(右還付事照會) 제오호(第五號) 양실(諒悉)인바 가덕도 일부를 일본 육군에서 수용하여 기이방비(旣以防備)를 요새지대(要塞地帶). 우지대부근(右地帶附近)에 무기고지존재(武器庫之存在)라 함이 혹도민지간(或島民之間)에 불은(不隱)을 유기려(誘起慮)가 유()하니 방비지배치상(防備之配置上)에 직()히 방애(妨碍)한지라. 동도(同島) 요새관헌(要塞官憲)에 우등(右等) 무기(武器)를 일시 영지(領置)하였사오니 양지상성도(諒知相成度) 회답등인(回答等因)이옵기······.

 

이 같이 거제도 일대를 해군 방비대 가근거지로 삼고 그들은 야비한 약탈 행위를 하였고, ·러 전쟁이 일본 승리로 돌아가자 일본국은 본격적으로 동아침략(東亞侵略)의 근거지로 해군 공항 건설에 착수하게 되었다.

 

 

<일본군이 '진해만'이라고 불렀던 범>

 

 

 

2. 진해만 일본 군항

 

광무 10820일 재정 의정부 훈령 제3호에 의하면

 

경상남도 진해만(鎭海灣)을 군항(軍港)으로 예정(豫定)하고 국군비(國軍備)가 충실(充實)하기까지는 일본 정부에 행장위탁설비(行將委託設備)이기 경계(境界) 도면급준수사항(圖面及遵守事項)을 당경반포(當經頒布)이니 준차양실(遵此量悉)하려니와 당선(當先) 해지역내토지(該地域內土地), 가옥 기타 부동산을 외국인에게 매각(賣却), 교환양여당(交換讓與當)하거나 혹한(或韓일관헌(日官憲)에 허가를 불경(不經)하고 대여(貸與)함을 금()한 사()로 별회(別繪) 도면(圖面)하고 준변(遵辨) 사항을 훈령(訓令)하니 조량신변(照諒迅辨)하여 무혹만환(無惑漫患)함이 위가(爲可).

 

광무 10820

 

의정부(議政府) 참정대신(參政大臣) 박제순(朴齊純)

 

창원감리서(昌原監理署) 김서규(金瑞圭) 귀하(貴下)

 

좌 개(左 開)

진해만 군항 예정지내(豫定地內)에서 별지(別紙) 도면에 적선(赤線)으로 기재(記載)한 토지 중 수수(手授) 절차(節次)

 

1. 일본 정부에 인도(引渡)를 수()할 구역내(區域內)의 사유지는 본국 정부에서 매수하고 기대가(其代價)는 일본 정부가 본국 정부에 지변(支辨)할 사().

 

2. 양국 정부 간에서 전기(前記)한 토지의 수수대금(受授代金) 지발기타(支撥其他)에 관한 상호간 귀결(歸決)은 별위(別爲)함을 요함으로써 마산 이사청 이사관 삼증구미길(三增久米吉)과 협의하고 실행에 당()케 하기 위하여 상당한 권한을 당해 관헌에게 부여(付與)할 사().

 

3. 전기(前記) 양항(兩項)을 실시함에 대하여 내외인의 교회(狡獪)한 획리수단(獲利手段)을 예방하기 위하여 별지(別紙) 도면에 적선(赤線)으로 기재(記載)한 지역은 현금간(現今間) 매매(賣買), 교환, 양여(讓與), 당대차(當貸借)를 금지할 사()로 관계 관헌급 국민에 대하여 지급(至急) 발령(發令)할 사() 광무 10815일 진해 요새지대 취체규칙(取締規則)과 진해 요새지대 시행세칙(施行細則) 및 요새지대 내 세입취체규칙(歲入取締規則)을 별책(別冊)과 같이 규정하여 시행하다.

 

이렇게 당시 의정부 참정대신 박제순은 창원감리 김서규에게 훈령을 내렸다.

 

한편 군항 예정지를 일본 통감부에서 일방적으로 선정한 위원으로 하여금 실지 입회하여 조사 정계(定界)한 다음 입계표(立界標)를 세워 군항 경계를 획정(劃定)토록 하고 그 위원인 해군 중좌(中佐) 삼월즉(森越卽)과 해군주계중위(海軍主計中尉) 영본요랑(鈴本要郞)이 광무 1098일에 본항(本港)에 도착하였다.

 

그리하여 동() 14일에는 마산 이사청(理事廳) 일본 이사관(理事官)(三增久米吉)과 참원감리(金瑞圭) 입회하에 진해군항 예정지를 획정하고 입계표(立界標)를 세웠다.

 

그러나 군항 요새지로 획정(劃定) 정계(定界)한 범위가 주위 2백리, 7·8()이 이에 포함되므로 경내(境內) 주민들의 소요(騷擾)와 의구(擬懼)가 반드시 일겠기로 정계위원(定界委員) 삼 중좌(森 中佐), 영목(鈴木)중위, 삼증(三增) 이사관, 경 경부(境 警部), 창원감리 등은 이들 주민을 열유위무(說諭慰撫)함에 주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창웜감리의 보고에 의하면

 

해단항지(該單港地)에 대하여 일반사무(一般事務) 창원감리(昌原監理)가 담임(擔任)토록 지령(指令)하였으나 본부(本府)에서는 기무특정권한(旣無特定權限)이옵고 후운(後云) 담임(擔任)이 이난청종(理難聽從)이옵고 본서무항(本署務煩)’에 불가구광(不可久曠)이옵거날 여욕전력해지(如欲專力該地)오면 동다체애(動多滯碍)이오며 차이(且以) 요새지대(要塞地帶) 실선이내(實線以內)로 언지(言之)하오면 주긍(周亘) 이백리(二百里)에 범입(犯入) 7,8()하오니 수비현행미수(雖非現行買收)이오나 기어정계(其於定界)에 필히 소요(騷擾)할 것이고 이적선이내(以赤線以內) 1(第一區)로 말하면 민유토지(民有土地)를 일병(一幷) 매입하고 급기(及其) 해당지내(該當地內) 가옥(家屋)을 철리(撤利)하게한 바 언념중정(言念衆情)에 조현어우(鳥䮄魚喁)는 여소필지(廬所必至)라 이에 위무(慰撫)하여 아국인민(我國人民)들의 전답(田畓), 가옥수용조치(家屋收容措置)‘(광무 1095일 감리보고 제42, 동년 98일 동보고同報告 42호 의거)

 

그리고 동년 916일 동보고(同報告) 45호에 의하면 전기(前記) 삼 중좌(森 中佐), 영목 주계(鈴木 主計), 삼증 이사관(三增 理事官), (경희명 경부)境喜明 警部는 기선(汽船)을 타고 웅천군에 와서 경계 적선(赤線) 내의 이이동민(二二洞民)에게 일장효유(一場曉諭) 비진형(備陳形)하온즉 처음 의구(疑懼)다가 종내위안(終乃慰安)하여 거개(擧皆)가 환영(歡迎)’하였다 하며 그 효유(曉諭)의 요지인즉 다음과 같다.

 

1. 진해만은 일한 양국의 국방을 위하여 군항을 작()할 필요를 한국 정부의 인()한 바에 의하여 827일 관보에 공보하였음.

2. 한국은 국력이 아직 자위함이 부족하기 때문에 국방상 필요한 군비를 충실하기까지 일본 정부에서 제반 경영을 하여 차()군항을 사용할 사()로 협정하고 일본 정부는 필요한 설비를 하기로 승인하였음.

3. 관보에 기재한 군항 예정 지역은 확대하여도 인민의 재산급 생활상 등에는 하등 구애에 영향도 피함이 무()하고 단 해()구역 내 토지를 외국인의 소유에 귀()치 홀()할 뿐 사().

4. 군항 예정지역 내에 모도(毛島)로 행암리(行巖里)까지 급기(及其) 부근토지(附近土地)는 일본 정부에서 해군에 필요한 설비(設備)를 위하여 외국인은 물론하고 한일간에라도 매매(賣買)든지 기타 소유권의 이동에 관한 소위(所爲)를 금지할 의()로 이() 중앙정부로 훈령이 유()한바 상이승지(想已承知)하여야 함.

5. 토지수용에 관하여 상당한 가액(價額)을 차하(次下)하기로 가령 대가(代價)를 차하(次下)하여도 기()이 사용치 아니할 부분은 종전과 같이 거주급(居住及) 경작을 허()하되 그 부분이 다대(多大).

6. 가옥급(家屋及) 묘지이전비(墓地移轉費)는 전기(前期)하여 비득(費得)한 가격을 정치(定置)하였다가 이전함을 명할 시()에 차하(次下)할 사().

7. 여의(汝矣) 등은 이상 주의(注意)에 불편함이 무()케 수용법 집행에 상좌(相左)가 무()할 양()으로 수용 당사자는 명령을 종()할 사().

 

만약 우진(右陳)한 훈의(訓意)를 불수(不守)하고 부당함을 주장하거나 혹 교활한 수단을 구성하여 국가에 불충(不忠)한 사()가 유()할 시에는 중벌을 난면(難免)하고 본관도 상당한 책임 유()하니 만일 해득(解得)하여 무지위배(無至違背)케 함이 위가사(爲可事).

 

이리하여 광무 11113(감리보고 제2)에는 최종적으로 진해만 군항의 설정경역(設定境域)을 정하였으니 이에 대한 감리 보고를 보면

 

본월(本月) 13일에 진해만 군항정계사(軍港定界事)로 해군참모(海軍參謀) 삼 월태랑(森 越太郞)의 청요(請要)를 거()하와 본 부윤과 해() 참모(參謀) 삼급웅천군수(森及熊川郡守)로 회동(會同) 전주우(前住于) 본부(本府) 상남면 불모산리(佛母山里)(김해경金海境 3리허三里許 웅천경熊川境 7리허七里許)하여 군항(軍港) 요새지대(要塞地帶) 한계(限界)를 시자(始自) 해리(該里)로 역지(歷至) 우본부하남면월촌리(于本府下南面月村里)(남접웅천경南接熊川境)이 간간(間間) 착주(着株)하옵고 우어(郵於) 16일에 본 부윤과 해참모(該參謀) ()도 본항(本港) 아국(俄國) 거류지(居留地) 율구미(栗九味) 서남(西南) 지진해경(至鎭海境)이 간간착주(間間着株)하옵고 우자해착주처(又自該着株處)로 역진해서남(歷鎭海西南) 지고성군(至固城郡) 대울비기(大鬱飛崎)히 각해군(各該郡) 평대동(平帶同)하와 연락(連絡) 착주(着株)하옵고 해착주내(該着株內) 지형회도1(地形繪圖一本)을 제우본부(除于本府)하올 태()로 담청십해참모(談請十該參謀)하였사온즉, 대기도본부래(待其圖本付來)하와 갱위(更爲) 점보계료(粘報計料)하오며 자선(玆先) 보고하오니 사조(査照)하심을 복망(伏望).(광무 11120)

 

당시 군항 내 가입(加入)하온 지명 및 평수급(坪數及) 본도(本圖) () 기요새지대(其要塞地帶)의 전부도본(全部圖本)을 점부(粘付), 보고(광무 11521)를 보면 진해 군항이 일본국의 국방과 동남아 침략을 위한 그 근거로 삼으려는데 있다.

 

그리하여 종전 조계장정(租界章程) 조항을 보면 조계(租界) 10리 이내라는 규정은 사실상 유명무실하였다.

 

위와 같은 경위를 거쳐 일본국은 진해군항을 건설하였던 것이다.<<<

 

 

<1914년 준공한 진해요항부 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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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23 00:00

'군항도시 진해' 탄생 배경


일찍이 제포 왜관 설치 후 삼포왜란이 발발하였고 그로부터 100년도 못돼 임진왜란을 겪은 진해지역이 다시 300여 년 만에 일본에 의해 식민지 군항도시가 되었습니다.
넓지 않은 한 지역이 일본이라는 인접한 나라와 이처럼 모진 악연을 이어오다가, 해방 후부터는
우리나라 해군의 요람이 되어 지금에 이른 도시가 진해입니다.

일본이 진해를 군항으로 삼은 것은 10년을 사이에 두고 벌어진 청일(1894-5년) 러일(1904-5년) 두 전쟁을 거치면서 아시아 패권국이 되겠다는 야망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습니다.
대마도를 중심으로 남쪽의 좌세보(佐世保, 사세보)와 북쪽의 진해에 군항을 두어 대한해협을 장악하고 이를 바탕으로 동아시아의 바다를 제패할 수 있다는 전략 때문이었습니다.

실제로 진해가 군항이 되자 일본의 한 민간단체는 「일본의 한국경영 가운데 이보다 중한 것이 없다. 한일의정서나 보호조약도 이보다는 못하고 통감설치나 철도점유도 이보다는 못하며 두 군항(진해만·영흥만)의 획득이 최대 환영이다」라고 극도의 만족을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일본정부가 러시아에 대해 정식으로 선전포고한 것은 1904년 2월 10일이었지만 일본이 실질적인 전투행위에 들어간 것은 2월 5일이었습니다.

이 날 일본의 군사본부였던 대본영은 「연합함대는 황해방면의 러시아함대를 격멸하고 육군의 선유부대(先遺部隊)를 호송할 것. 제3함대는 진해만을 점령하고 조선해협을 경계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명령에 따라 일본해군 제3함대가 진해만을 점령한 것은 2월 6일부터 7일 아침까지였고 이때부터 창원·웅천·거제 각 군은 사실상 일본해군의 세력권에 들어갔습니다.

이어서 2월 23일자로 체결된 한일의정서 제4조 「일본의 전쟁수행을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군사전략상 필요한 지점을 언제든지 사용할 수 있다」는 규정에 따라 거제도와 진해만뿐만 아니라 이 나라 해안을 온통 일본해군이 마음대로 사용할 수 있도록 되어버렸습니다.
그것도 강제가 아닌 한일 두 나라 합의라는 형식을 통해.

진해만을 점령한 일본해군이 가근거지(假根據地)로 마련한 곳은 거제도 장목면 송진포였습니다.
(여기서 언급하는 ‘진해만’은 다음 그림에서 나타낸 지역으로 웅천·창원·칠원·진해·고성 등 각 군의 일부와 거제도 전역에 걸친 해역일대를 말합니다)


그러나 일본 군부는 이미 그때부터 송진포항의 규모가 작아 영구적인 군항으로 부적합함을 알고 새로운 후보지를 물색하였습니다.
때는 미국이 한반도를 사실상 일본에게 넘기기로 약속한 소위 가쓰라-테프트 밀약(7월 29일)과 치욕적인 을사조약(11월 17일)이 체결되던 바로 그 시기였습니다.

진해만 내해에 위치한 현 진해지역의 막대한 땅을 수용하겠다는 일본 측 요청이 한국정부에 전달된 것은 다음해인 1906년 7월이었습니다. 원산 영흥만과 함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통감 이등박문은 마치 진해군항을 한국정부가 추진하는 것처럼 눈속임을 하였습니다.
그는 의정부참정대신 박제순에서 보낸 공문에서
「………귀국정부는 진해만과 영흥만을 군항으로 예정하고………」
라며 한국정부에서 진해군항을 추진하는 양 표기하면서
「………군사시설은 일본에서 하는데 한국의 군비수준이 높아질 때 까지 사용할 것」
이라고 위장하였습니다.
강압적으로 밀어붙이는 군항과 신도시에 대한 민심을 의식했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이 때 ‘군항’으로 예정된 지역의 면적은 4,388.8정보(43.52㎢, 1,300여만 평)였습니다.
범역은 1973년 7월에 창원군 웅천면이 진해시에 편입되기 이전의 진해시 전역이었으며 그 중에서 시가지면적은 약 12만평이었습니다. 거제도의 장목면과 하청면 일부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군항과 신도시 건설 때문에 철거대상이 되었던 마을은 서부지역의 현동(縣洞)․도만(道滿)리․도천(道泉)리․여명(余明)리․중평(中平)리․좌천(佐川)리․신좌천(新佐川)리․안곡(安谷)리․속천(束川)리 등 9개 마을과 동부지역의 하구․중동 등 2개 마을, 모두 11개 마을이었습니다.
11개 마을의 가구 수는 390호, 쫓겨나야 했던 사람은 2천여 명이었습니다.

(하구와 중동에는 일본육군연병장을 둘 예정이었으나 나중에 계획이 취소되었습니다. 하구와 중동의 위치에 대해서 진해·웅천향토문화연구회 황정덕 회장은 하구는 자은동, 중동은 석동과 하구마을 사이라고 했습니다)

군항으로 예정된 1,300여만 평의 땅은 한국정부에 의해 매수와 철거 조치를 끝낸 후 곧장 일본해군의 관할 아래 들어갔고, 이때부터 진해는 해군기지와 군항도시의 첫 발을 내딛습니다.

지금부터 104년 전인 1907년, 진해는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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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06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2) - 개항기

사람 손 닿기 전의 신마산 옛 모습

<마산포 각국조계도>

1899년 / 네델란드인 스태든으로 추정 / 각국정부 / 막대추정 / 군산 마산포 성진 각국조계장정 / 규장각

이 지도는 외부대신 박제순과 각국 대표들이 맺은「군산․마산포․성진 각국조계장정」에 첨부된 설계도면입니다.
개항기 마산관련 자료 가운데 비교적 널리 알려진 지도로 근대적인 측량기법으로 작성된 마산시내 최초의 지형도라는 점에서 가치가 높습니다.

등고선으로 표시된 지도라 지형의 고저(高低)와 기복(起伏)을 잘 알 수 있으며 해안의 간조선과 만조선 그리고 하천까지, 사람 손이 닿기 전의 조계지(신마산) 옛 모습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있는 자료입니다.


등고선의 단위(고저차)가 표기되지 않아 아쉽습니다만 현재의 지형과 비교해보면 등고선의 고저차가 크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지도에 나타난 자연지형 및 관련자료들을 종합해보면, 마산포에서 진주로 가던 '진주가도'는 해안에서 5-6번째 등고선 정도 아닐까 싶습니다.

각국공동조계지의 범역(Settlement Boundary)이 그려져 있으며 주도로(Main Road)의 동쪽(도면의 방위표에는 착오로 W와 E가 바뀌어 있습니다) 해변에 세관을 비롯한 개별 필지들이 표기되어 있습니다. 조계지 최초로 조성할 부지로 계획했던 것 같습니다.
주도로는 지금의 월남동 성당 정문 앞의 간선도로이며 짙게 표기된 도로가 사잇길인데 이 지도에서 계획된대로 길이 뚫렸고 모두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습니다.

북쪽 신월천 중간 쯤에 급경사로 인한 폭포(Bluff)가 있습니다.
이미 오래 전에 복개되었기 때문에 지금 저 위치에 폭포가 보이지 않습니다만 이 주위에서 살고 있는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요즈음도 비가  많이 오면 지하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제법 크게 들린다고 합니다.

지도 중간에 표기된 하천이 옛 마산시장 관사 앞의 창원천(대곡천)이며, 아래 쪽 하천이 월영천인데 지금은 복개되어 경남대 정문앞 월영광장 지하에 흐르고 있습니다.

폭포 윗부분에 해관장 관사(Grounds Reserved for a Commissioner's Residence)가 표기되어있습니다.
지금의 제일여고 자리입니다.
해관장 관사는 계획만 했을 뿐 지어지지는 않았습니다. 나중에 마산 신사(神社)가 들어섰고 일제기 내내 마산공원으로 사용된 곳입니다.

지금의 월포초등학교와 경남아파트, 마산종합복지관 터는 봉곳하게 틔어오른 작은 봉우리라 조계지와 마산 앞바다를 내다 볼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지금도 이곳에 가면 솟아 올랐던 당시의 지형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전체 지형을 보면 조계지는 마산 앞바다와 무학산 사이의 좁은 경사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지형적 조건은 지난 100년간 이 도시에 매립이 끊이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평지가 별로 없었는 당시 지형을 보면,
이곳 월영리와 신월리에 살았던 마산의 옛 사람들은 다랑이논 몇 뼘 외에 합포만과 갯벌, 그리고 무학산록에 기대어 생업을 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지도에 표기된 조계지의 범역을 현재로 옮겨 보았습니다.
속칭 깡통골목에서 경남대 정문 앞 월영광장까지, 뒤로는 제일여고 뒷경계 까지가 조계지였습니다.
두 개의 해안선은 간조선과 만조선입니다.<<<




2010/04/08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여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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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09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8) - 개항기

<마산이 문을 열다>

1899년 5월1일, 마산이 문을 열었습니다.
'개항'이라는 이름으로 인근 신월리와 월영리(현, 신월동과 월영동)에 '각국공동조계지'가 설치되면서 이 도시는 세계를 향해 문을 열었습니다.
'조계지'의 위치는 마산포의 남쪽 약 2km 거리의 해안이었습니다.
 


개항은 긴 세월 동안 마산사람들 삶의 터전이었던 마산포의 도시구조에도 결정적인 변화와 충격을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그 이후부터 마산포(원마산)의 모든 것들은 개항지인 소위 ‘신마산’과의 관계 속에서 진행됩니다.

마산포 개항은 1898년 5월 26일 의정부 회의에서 찬성 7표 반대 3표로 결정되었습니다. 사흘 뒤인 5월 29일, 대한제국 외부대신이 마산포․군산․성진의 개항과 평양의 개시(開市)가 결정되었음을 각국 공사에게 통고하였습니다.
이 중 평양은 연기되었고 마산포․군산․성진 만 시행되었습니다.

개항업무를 관장하기위해 구(舊) 조창전운사아문(漕倉轉運使衙門)이었던「마산창」자리(현 남성동 파출소 일대)에 「창원감리서」를 설치하였습니다.  그리고 창원군수 안길수를 창원감리서리로 겸임시킨 후 1년 이내에 개항준비를 마치도록 명령했으며, 해관(海關)측량사를 마산포에 파견하여 그 해 8월까지 조계지로 사용할 부지의 측량을 마치게 하였습니다.

외부대신의 명령을 받은 창원감리는 곧바로 신월리와 월영리 일대 138,880여 평을 구획하여 각국공동조계지로 정하고 이를 1899년 5월 1일 각국 대표자인 부산세관장 스카글리오티(A. Scagliotti, 이태리인)에게 인도함으로써 마산포 개항이 시작되었습니다.
조계장정의 조인은 같은 해 6월 2일 외부대신 박제순과 일본 영국 러시아 프랑스 독일 공사가 참석한 가운데 이루어졌습니다.

스카글리오티는 각국공동조계지를 인도한 후 곧바로 창원감리서 내에 부산세관 마산출장소를 설치하고 출장소 주임에 독일인 아르노스(Arnous)를, 보조로 일본인 관세사 등본종태랑(藤本鍾太郞)과 고교가길(高橋嘉吉)을 임명하여 조계지 획성(劃成)업무를 보게 하였습니다.

지금의 '신마산'은 개항기 때 설계한 '조계지'의 도시형태 그대로입니다. 현 마산도시의 공간구조가 '조계지'의 영향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에서 개항 당시 '조계지'의 설계는 현 마산도시구조의 근간이었습니다. 시내 간선도로를 살펴보면 쉽게 확인할 수 있습니다.

도시사학자 손정목 선생은 마산 조계지의 설계자가 네델란드인 스태든이라고 했습니다.

스태든은 일찌기 주한 초대 영국공사 파크스와 초대 경성총영사 아스톤(W. G. Aston)에 의해 고용된 측량기사입니다. 일본과 중국 등지에서 활약하다가 그들과 더불어 내한하여 마산조계지 외에도 인천 목포 군산 등 여섯군데 조계지를 설계하였습니다.
앞에서 말한 '마산포에 파견된 해관측량사'가 스태든 아닌가 싶습니다.

아래의 그림이 조계장정에 첨부되었던 마산의 각국공동조계지 설계도면입니다.
설계도면에 그은 푸른색 안쪽 부분과 현재 도시 상황을 자세히 비교해보면 개항 때의 도시계획이 이 도시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조계지가 확정되자 공동조계의 획정을 내용으로 하는 조계장정을 조인했습니다.

각국공동조계지로 구획된 토지는 제1등지(甲地區․A地區․Low Lying Lots․低地區), 제2등지(乙地區․B地區․Hill Lots․山地區․高地區), 제3등지(丙地區․C地區․Foreshore Lots․海邊地區) 3종으로 구분하였습니다.

제1등지는 해안에 근접한 상업지로 현재 시내버스가 다니는 간선도로를 중심으로 동쪽 바닷가 일대입니다. 위 설계도면에 표기된 부분이 제1등지입니다.
제2등지는 제1등지가 근접해 마주보는 서쪽일대였으며, 제3등지는 제일여고 정문앞도로 주변의 경사지였습니다.

조계장정에는 조계지 주위 10여리를 개방하여 매매와 양도가 가능하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습니다. 또한 조계지 내에는 경작을 금지하고 오직 건축만 하도록 했으며 위험하거나 고열을 취급하는 건물은 허가하지 않았습니다.

조계지의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 ‘마산포각국조계(馬山浦各國租界)’라는 문자를 조각한 표목을 경계선 양단의 만조점에 각각 한 개씩, 그리고 조계지 구역 경계선이 꺾어지는 지점마다 한 개씩 세웠습니다.

마산에 외국인이 합법적으로 살 수 있었던 최초의 땅 '마산포 각국공동조계지'는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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