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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16 00:00

기억을 찾아가다 - 1

오늘부터 연재하는 포스팅은 마산 봉암동(현 창원시 마산회원구 봉암동)에서 태어나 청년기까지 살았던 박호철 선생님의 기억 속에 있는 도시 이야깁니다.

한 개인의 삶에 투영된 도시의 흔적을 통해 이미 사라져 버린 우리의 과거를 찾아가보는 것이 목적입니다.

가치 판단은 후대의 몫이고 기록은 당대의 몫이라 생각하며 소박하게 쓴 글입니다. 어르신 한 분이 떠나시면 도서관 한 개가 사라진다는 말을 믿고 시작합니다.

1941년생이라 일제강점기의 기억은 없을 테지만 60년대 중반까지의 마산 도시를 직접 보았던 분입니다.

갇혀져 있던 기억들을 얼마만큼 끄집어낼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이신 박호철 선생님은 1941년에 태어나 초중고(합포초, 마산중, 마산상고)를 마산에서 마친 후 서울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였습니다. 교육자로 평생을 보냈으며 지금은 창원 사파동에서 살고 있습니다.

연재의 횟수와 게재 일자는 유동적입니다. 글이 준비되는 대로 올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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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그림은 봉암지역의 1947년과 현재의 항공사진입니다. 함께 보시면 글 이해가 쉬울 것 같아 소개합니다.

 

 

1. 봉암동 형성

 

지금 봉암동은 대부분이 매축지다.

최초의 매축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임의로 했고 해방 후에는 1970년 전후에 걸쳐 재일교포가 하다가 자금난으로 포기하자 정부가 받아 완공했다

원래 봉암은 팔룡산(본명은 반룡산) 최남단 자락에 있었던 작은 어촌마을 이름이었다. 지금 서광아파트와 봉암교까지의 도로 대부분이 경사진 마을 터였다. 그 아래쪽은 모두 1차 매축 때 형성된 매립지다.

창신고등학교가 있는 마을은 일제 땐 봉정으로 불리다가 해방 후에 봉덕이라 불렀다. 그 후 봉암교 쪽 마을과 같은 동이 되었을 때 함께 봉암동이 되었는데, 두 동네는 여러 번 붙였다 뗐다 했다.

나는 봉정에서 태어났는데, 어릴 때 어머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론 바다물결이 지금의 교육청 뒷산자락까지 철썩댔다고 한다. 지금도 오륙십 세 이상의 사람들은 교육청 옆 초등학교 뒤 계곡을 조개골이라고 불렀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아직도 밀물 수위가 높아질 땐 교육청 앞 동네 집들이 수몰 위기를 느끼는 것도 다 이 사실을 증명해 준다.

두 마을에 찻길이 난 건 1차 매립 후였다. 넓은 매립지로 하여 동네 복판으로 한길이 나고, 아랫각단이 조성되고 상당한 넓이의 농토도 생겼다. 이 길이 나면서 나룻배 대신 봉암다리도 놓여 졌고 신촌, 월림, 남면(웅남, 상남) 등지와 교류도 잦아졌다.

이 길로 하여 팔룡산 자락을 정지하여 지은 요정 봉선각(鳳仙閣)하이야(택시의 일본식 영어 발음)’가 올라갈 수 있는 길이 닦였다. 이 요정의 주인 이름이 다나카였는데 위세가 대단했다고 한다.

 

<1937년 마산부가 발행한 '관광의 마산'에 게재된 봉선각>

 

우리 집도 본래 웃각단에 있었는데 30년대 말에 한길 옆에 새집을 지어 이사했다고 들었다. 봉선각과 직선거리로는 백 미터도 채 안 되었다.

그래서 내 다섯 살 때의 기억으론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이 봉선각에서 어떤 사내가 종이나팔을 입에 대고 아래를 향해 구슈게이호~(くうしゅうけいほう, 공습경보空襲警報)’하고 외친 것을 본 기억도 있다.(당시 전국적으로 전시 대피훈련을 했었고 통상 통, 반장이 이 역할을 했으나 봉선각이 마을 위쪽에 있는 관계로 봉선각 주인이나 직원에게 이 역할을 맡기지 않았나 짐작됨)

반장이었던 장씨 아저씨의 인도에 따라 뒷산 중턱에 있는 천연동굴로 올랐던 일, 굴 안이 어두워 나 같은 조무래기들이 굴 앞에 옹기종기 앉아 있었던 기억들이 남아 있다.

봉선각은 해방 후 국유화되어 비어 있었기 때문에 우리 또래들의 놀이터가 되었는데, 어느 날 들어가 본 뒤꼍의 굴은 굉장히 깊었고 서늘했다. 아마 방공호와 식품창고의 구실을 했던 것 같았다.

봉선각 뒤쪽 팔용산 남쪽 끝 마루턱에 일본의 신사가 지어진 것도 삼십년 대였다고 들었다. 내가 신사를 본 건 초등학교 고학년 때였는데, 그 땐 거의 파괴된 모습이었다.

해방 후 좌익들의 야간집회가 이 산에서 열렸을 때 부쉈다는 말을 그 후에 몇 번 들었다.

신사가 있는 산먼뎅이를 야시당먼뎅이라고 불렀는데 야시는 여우의 방언이고 당은 집이란 뜻이니, 왜인들이 모이는 곳을 야유하여 이 동네 사람들이 만든 말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봤다.

한길과 봉암다리가 생긴 후부터 마산부창원과의 교류가 잦아졌다.

마산사람들로부터는 촌놈취급을 받았지만, 창원사람들로부터는 약간 우월적 대접을 받는 반촌이미지가 형성되었던 듯하다.

우리 어릴 때 정겹게 대해주셨던 대방때기·두대때기(대방댁·두대댁, 지금의 창원시 대방동과 두대동) 아지매들이 있었는데, 어머님 말씀에 의하면 창원이 친정이던 그 분들이 시집올 때 고향친구들로부터 시집 잘 간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는 사실이 그걸 보여준다.

1차 매립으로 이 동네 서쪽 들머리에 조그만 고개가 생겼는데 이 마을 사람들은 그것에다 아리랑 고개라는 속칭을 붙여줬다.

이 마을은 팔용산이 삼면으로 싸고 있어 비가 오면 흘러내리는 물의 양이 꽤 많았는데 매립으로 물길이 막히자 인공수로를 만들었다. 지금도 교육청 동쪽 담을 따라 흔적이 있다.

왜 그렇게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수로는 아래로 오면서 평지보다 사오 미터 높게 나 있었다. 그래서 한길도 그곳에 와선 그 높이의 고개를 이루었고, 사람들은 그 고개에 그런 예쁜 이름을 붙여줬고, 옆 동네나 마산부 사람들도 그렇게 불렀었다.

봉정과 서쪽으로 맞 닿아있는 팔용산 자락 따라 길쭉하게 나있는, 100호가 채 안됨직한 동네를 우리는 사기점(사기그릇을 굽는 곳이 있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불렀는데, 지금 양덕오거리에서 봉암 쪽으로 나있는 도로의 일부는 옛날 사기점 동네 앞을 흐르던 개천부지였다.

그 길과 마진도로, 양덕천 사이는 꽤 넓은 농토였었는데, 그 벌도 1차 매립 때 형성된 것이라 했다.

그 근처에 우리 논이 있어 종종 보았는데, 율림동 쪽에서 흘러오는 내와 양덕 쪽에서 흘러오는 내가 합해지는 양덕오거리 근처까지 바닷물이 밀려왔었다.

옛날로 거슬러갈수록 그곳은 더 깊었을 테니, 고려 말 합포첨사 배극렴이 왜구침탈 방어를 목적으로 축조한 합포성지가 그곳에서 직선거리 1.5내외 지역에 있다는 사실도 성지를 본 후에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질 낮은 정부들이 그 성터를 방치함으로써 지금은 거의 소실상태에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부끄럽게 만든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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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09 00:01

일제 강점기 신마산 혼마치(本町)

 

오래된 사진 한 장을 소개한다.

아래 것은 같은 장소에서 찍은 현재 사진이다. 위 사진을 현재와 비교하기 위한 사진이다.

 

 

1910년대에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마산 월남동 1가(현 3.15대로) 사진이다. 당시에는 혼마치(本町)라 불렀던 중심거리였다.

현 경남은행 신마산지점 앞 쯤에서 월영광장 쪽을 바라보고 찍은 사진이다.

두 사진을 비교해보면 지난 100년간 얼마나 도시가 많이 변했는지 알 수 있다.

사진의 길 왼편이 바다인데, 지금의 해바라기 아파트가 앉아있는 블럭이다. 나중에는 일본인들이 저 해안가에 버드나무를 심기도 했다. 저 바다는 1926년 매립되어 사라진다.

오른쪽 도로변의 일본식 건물들은 규모가 상당히 크다. 대부분 목조였고 3층건물도 있다. 도로는 비포장이었다. 길 양쪽을 줄지어 선 나무 전봇대가 인상적이다.

사진의 배경이 되는 뒷산은 무학산과 이어진 대곡산 줄기이다.

옛 사진에서 오른쪽 도로변으로 저 멀리 건물 한채를 자세히 보면 단층인데 층고가 높은 건물이 있다.(왼편 해안이 끝나는 지점 쯤. 벽체가 검게 보임) 지금 월남동 성당이 앉아 있는, 당시 일본제일은행 마산출장소 건물이다. 잘 생긴 건물이었다.

사진의 곳은 '신마산'이다.

조계지로 개항된 땅 신마산은 일본인들이 붙인 지명이었다. 자신들이 새로 건설한 마산이라는 의미였다. 

반면 전통도시 마산포는 구마산이라 불렀다. 낡고 오래되었다는 의미였다.

마산포 주민들은 이를 못마땅해 했다.

하지만 지배자와 피지배자간의 일이었다. 강점기 내내 그렇게 불리었고 그 관습이 지금에 왔다.

·(·) 속에 담긴 뜻은 오래 전에 사라졌지만 생명력 강한 지명은 아직 살아남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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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2.09 00:00

마산 창원 역사 읽기 (38) - 귀환동포와 하모니카촌

5. 삶과 문화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

5-3  귀환동포와 하모니카촌

 

1945년 8월 15일, 일본 왕의 항복 소식을 들은 한국 임시정부의 김구 주석은 깊이 탄식하며 눈물을 흘렸다 한다.

복군을 길러 연합군의 당한한 부대로 참전하려던 계획을 실현시키지 못한 상태에서 전쟁이 끝나버린데 대한 통한의 눈물이었다.

조국 해방의 주체가 한국민이 아니고 외세였을 때, 그 외세의 간섭이 조국의 운명에 어떤 부정적 영향을 끼칠지 염려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항복 소식에 국내외의 동포들은 감격에 벅차 있었지만 상황이 바람직한 방향으로 전개되지는 못했다.

여운형 중심의 중도계열 인사들이 건국준비위원회(건준)를 결성하여 치안을 맡고, 일본인들의 재산을 관리하며, 심지어 해외동포들의 국내 귀환을 위한 배까지 보내는 등의 활동을 펼쳤으나, 9월 들어 미국은 군정을 선포함으로써 건준의 활동은 사실상 정지되었다.

194599일, 남한 전역엔 일본 국기가 미국의 성조기로 교체되었다. 맥아더 사령관의 명령에 따라 주둔군 사령관 하지 중장과 군정장관 아놀드 소장 체제로 군정이 시작된 것이다.

그들은 포고문에서 해방군이 아닌 “점령군”임을 분명히 밝히면서 “일본인 및 미 상륙군에 대한 반란행위”는 엄히 다스리겠다고 했다.

심지어 제2포고문에선 “미 상륙군에 항의하면 인민을 잃고 아름다운 국토가 황폐화될 것”이라고 협박했다.

그리고 그들은 한국인의 환영도 금했으며, 그것을 모르고 환영 나간 한국인을 인천에서 사살하기도 했다.

미군정은 통치경비 조달을 위해 당시 국내 전 재산의 70%나 되는 적산을 불하했는데, 연고자에게 우선적으로 불하하는 원칙을 정함으로써 친일파들이 훗날 한국 경제의 주역이 되게 했다.

것은 미군정의 통치 목표인 ‘반공 친미 권력’의 형성에 부합되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 해외로부터 부푼 꿈을 안고 온 200만 귀환 전재민(戰災民)들, 특히 구호대상인 100만 동포들의 고통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구호법이란 일제 말의 조선구호령이나 군정이 응급으로 내놓은 훈령 정도였으니 수용시설이나 구호물자의 체계적 공급은 있을 리 없었다.

그런데다 미군정은 통치비용을 많이쓰기 위해 불환지폐를 발행하여 물가를 폭등시켰다.

1948815일 출발한 한국 정부도 별로 나을 것이 없었다.

일제가 이 땅에서 형성한 거대한 재산은 일제에게 착취당한 가난한 민중들 구호에 쓰여져야 할 텐데 이승만 정부도 ‘재조선 미군정청이 이미 행한 처분을 승인’함으로써 빈민구호는 외면하고 친일파들 재산만 불려주는 일을 했다.

19506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전쟁 직후에는 많지 않았던 전재민들이 이듬해 1·4 후퇴 후 크게 불어났다.

1952년 통계엔 전국의 전재민이 3,935,152명, 이 중 구호가 필요한 사람은 3,040,389명, 그러나 구호시설에 수용된 사람은 겨우 399,739명이라고 적혀있다.

<전쟁 초기 전투 상황도>

 

이승만 정권은 전재민들 구호보다 권력 유지에 더 몰두했다.

전쟁 초엔 ‘정부는 서울에 머물겠다’고 속이고, 한강다리조차 끊어버린 뒤 권력 수뇌부들만 후방으로 피신하더니, 부산 임시 수도에선 온갖 권력 연장 음모를 자행했다.

‘발췌개헌안 (대통령 직선제안)’ 통과와, 이승만의 삼선을 위한 ‘사사오입’ 파동이 그것이다.

한편으론 거창 양민 학살사건 등을 일으켜 공포분위기를 조성했다.

미군의 양민 학살과 짝을 이루었다. 이런 정국에서 전재민들은 피난민 임시 수용배치법(1950.8 제정) 이 있긴 했으나 제대로 보호받을 리 없었다.

구호 위원회가 조성되어 한국 공무원과 UN 민사원조처 직원들이 활동했으나 여러 나라에서 온 구호품들도 힘있는 사람들이 마음대로 함으로써 전재민들에게 돌아가는 것은 쥐꼬리 만큼의 배급에 불과했다.

 

-귀환동포, 그들은 우환(憂患)동포였다-

8·15 후 해외로부터 귀환하여 마산에 온 전재민의 수는 약 25천으로 추산된다.

그들은 대부분 일본에서 귀국한 사람들로 마산 인근의 농촌인 창원군, 함안군, 의령군 등의 출신들이었다.

귀국 직후엔 연고지로 갔으나 가난한 농촌 현실 때문에 도시지역으로 나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대부분 신포동과 월포동, 중앙동 등에 있었던 일본군 창고와 노동자들의 숙소, 그리고 회원동에 있었던 일본군 말 사육장의 마구간에 들어갔다.

처음엔 한 창고 안 15~20가구가 칸막이도 없이 살았다. 밑바닥엔 헌 가마니나 짚, 판자조각 등을 깔았고, 비가 새는 지붕 밑에서 누더기 같은 이불이나 담요를 덮고 잤다.

조금 지나면서 판자를 주워다 칸을 막으니 그 모양이 하모니카 같다 하여 회원동 하모니카촌이라 불렀다.

<하모니카촌의 모습>

 

어른들은 주로 막일품을 팔았고, 아이들은 아이스크림 장사나 구두닦이, 심지어 넝마주이를 하거나 구걸하러 나서기까지 했다.

선창에는 생선내장이라도 주워가려는 귀환동포들이 많았으며 심지어 소금장수의 빈 가마니를 사서 그 속에 붙어있는 소금을 털어 모아 내다 팔고 가마니는 방앗간에 팔아 돈을 만들었다고 월포동에서 회원동으로 옮겨가 살았던 김순두 (80세. 여) 씨는 증언했다.

“회원 뒷산 (무학산, 봉화산)엔 하루 3,4백명씩 나무꾼들이 깔려있었지,” 귀환동포가 아니면서 30년 가까이 그들속에서 살았던, 회원동 토박이 정덕현 (65세)씨의 말이다.

여자들은 운이 좋으면 방직공장이나 제지회사, 성냥공장 등에 취업했고, 아니면 빈 논밭이나 산과 들로 다니며 이삭도 줍고 나물도 캐고 했다. “솔직하게 말해서 귀환동포 치고 얻어먹거나 도둑질해보지 않은 사람 별로 없을거요” 신포동 주공아파트 노인정에서 만난 이순환 (67세)씨의 말이다.

월포동 창고에서 살았다는 전판수(66세, 창원시신월동), 조용기(66세, 마산시신월동) 씨 등은 창고 건너편 역 근처의 소나무밭에서 목을 맨 시체들을 몇 번 봤다고 한다.

이런 역경 속에서도 그들은 지혜를 발휘했다.

창고의 콘크리트 바닥 한 부분을 깨고 그 밑 부분의 흙을 넓게 파낸 다음 솥을 걸고 불을 때어 잠을 자니 콘크리트를 구들로 활용했고 큰 깡통을 주워다 모서리 부분을 잘라내고 편 것 여러 장으로 견고한 지붕을 만들고, 시멘트 부대나 비료부대, 그리고 콜탈을 주워와서 루핑을 만들어 창고 처마에 덧대어서 집을 늘리기도 했다.

마산에도 건준이 결성되었다가 인민위원회로 개편되었으나 전국 상황과 같이 곧 군정관이 들어오면서 활동이 중지되었다.

뒤이어 마산군정청이 서고, 고문역이지만 한국인 시장도 선임했으나, 미군정의 통치목표는 미국의 이익 실현에 있었기 때문에 전재민들 구호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역설적이게도 이들은 한국전쟁을 맞아 오히려 살기가 나아졌다.

구호식량이 전보다 많이 나왔고, 전쟁물자 하역작업으로 일거리도 많아졌다. 그리고 미군부대에서 나오는 음식찌꺼기를 끓여 만든 소위 ‘꿀꿀이죽’이 싸서 빈민들의 배를 채우기가 좀 나아졌다. 또, 군복이나 군화 같은 것도 시중으로 흘러나와 빈민들에게 싼값으로 제공되었다.

그러나 그들에게 새 고통이 생겼다. 담장 하나 사이인 월포국민학교에 미군들이 들어왔는데 이들이 밤만 되면 전재민 촌의 부녀자들에게 접근해오는 것이었다.

그들은 자위책으로 부녀자들을 창고 가운데 눕히고 남자들이 가쪽에 둘러 누워 차례로 지키다가 미군이 나타나면 깡통을 두들겨 온 마을사람을 깨웠다.

그런 일은 회원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창고마다 연결된 줄에 깡통을 매달아 미군이 접근할 때 줄을 흔들어 마을 사람들을 모았다.

<회원동 판자촌>

 

그래도 술 취한 미군들은 심지어 총질까지 해가면서 행패를 부리기도 했다. 대부분은 공포였지만 언젠가는 흥분하여 대드는 청년을 월포동에서 사살하기까지 했고, 회원동에서는 항의하는 마산일보 기자에게 총상을 입히기도 했다.

그나마 월포동 전재민들은 미군부대가 불어나면서 거기에서도 쫓겨나 다른 난민촌으로 이주해 갔다.

이런 상황은 오히려 그들을 단결시켰고, 인정의 나눔은 형제애 이상이었다. 48년 총선 때는 귀환 전재민들만 똘똘 뭉쳐 큰 표 차로 같은 전재민 출신인 권태욱을 당선시켰고, 상이 나거나 사고가 생기면 마을 사람들이 모두 나섰다.

“하루는 어둑어둑한데 한잔 얼큰히 된 옆집 아저씨가 손에 든 간칼치를 흔들며 타령을흥얼거리고 옵디다. 그날 운이 좋아 돈을 많이 벌었던가 보지요. 그날 저녁 우리집 저녁 반찬에도 간칼치구이 두어 토막이 있었지요”

고기냄새 못 맡아 소증 걸린 비위를 함께 달래자는 마음 씀씀이를 읽을 수있다.

아이들은 학교가면 한국말을 잘못한다고 친구들로 부터 ‘우환동포’로 불리며 따돌림당하고, 또 수업료도 못 내어 쫓겨오기 일쑤였다.

그래도 학교라도 다닐 수 있었던 사람들은 다행이었다.

50년대까지도 회원동을 통틀어 고등학생이 한 학년에 10명 미만이었다 하니 그들의 고난은 대부분 대물림될 수밖에 없었다.

“못살아 외국까지 가서 발버둥치다 해방이 되어 희망을 안고 왔는데 왜 우릴 푸대접합니까. 군대가고 보국대가고 할 일은 다했는데. 고관들은 잘먹고 흥청거리면서......” 윤대권 (79세, 신포주공아파트) 씨의 항변이다.

귀국을 후회한 적은 없었느냐는 물음에 모든 증언자들은 하나같이 “귀환동포치고 귀환을 후회하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전쟁과 전재민들-

1951년에 들면서, 안전지대로 인식되어 있던 마산에도 무려 4만의 전재민들이 밀려드니 9만 인구였던 마산 시내가 전재민들로 북적대는 것 같았다.

그들은 주로 러시아 조차지로서 비어있던 대내동일대로 들어가고 일부는 중앙동, 회원동 등의 판자촌으로 들어갔다. 그 외엔 상남동 개천변이나 반월산 자락 등에 움막 같은 판자집을 짓고 살았다.

한편, 패물이나 돈을 많이 지녔던 전재민들은 그 와중에서도 좋은 처소를 세 얻거나 심지어 집을 사기도 했다. 또, 어떤 부자들은 부림시장 상권의 상당부분을 장악하기도 했다.

판자촌 사람들의 생활은 앞서 말한 귀환동포들 보다는 조금 나았다. 배급이 조금 더 나오고, 군수품 하역에 따른 일거리가 많아졌으며, 일용품이나 식량 등이 군으로부터 많이 유출되어 부림시장도 활성화되었다.

그러나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는 없었다.

시에서 준 군용천막 속에서 여러 가족이 함께 지냈다. 바닥엔 짚이나 헌 가마니를 각자 주워다 깔았다. 시에선 강냉이 같은 구호물자를, 그것도 가끔 조금씩 줄뿐이었다.

“일요일이나 방학 때면 나무하러 다니고, 평일에도 학교 파하면 빈 고구마밭에 가서 이삭줍고 잔뿌리 캐고 가을에는 도토리 줍고……” 한창열 (62세, 대내동, 황해도 출신) 씨의 증언이다.

런 형편이니 중고등학교 나온 사람도 많지 않았다고 한씨는 말했다.

또, 변소는 수십 가구에 하나밖에 없는지라 아침마다 변소 앞에 줄서는 것이 일과가 되었고, 심지어 그것 때문에 잠까지 설쳤다고 한다.

함경남도 출신의 한철준(87세, 문화동) 씨는 이렇게 증언했다. “낮엔 학생들이 들어가 공부하고 밤엔 피난민들이 들어가 잠자고 그랬지요. 그러니 칸막이도 할 수 없어 밤에 부부의 속삭이는 소리까지도 옆 사람들에게 들렸지요. 그래서 다음날 그걸 가지고 이웃끼리 농담도 했지요.

”시일이 좀 지난 뒤의 일이지만, 흙을 파고 부엌을 만들어 연탄을 피웠지만 판자집들이라 통풍이 잘 되니 연탄중독 사고는없었다고 한씨는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남자들은 주로 부두노동이나 어시장, 공사장 등의 막일을 하고 부인들은 군복 개조나 순대국장사 등을 하여 악착같이 돈을 모았다. 이 지역을 벗어나는 것이 이들의 소원이었기에 전쟁 당시부터 지금까지 여기에 살고 있었던 사람은 10% 미만일 것이라고 두한씨는 말했다.

종전 후 대부분 고향으로 돌아가고 (마산 인구: 194991천, 51133천, 53105천), 그 자리엔 다른 난민들이 바뀌어들기를 반복하면서 근래까지 난민촌으로 불려왔다.

<귀환동포 아이들 (1946년, 남기섭 작, 대한통운 앞거리)>

 

-아직도 국민의 삶은 여전하다.-

미국의 이익을 먼저 생각할 수밖에 없는 미군정치하에서, 그리고 미군정의 정치노선을 계승한 이승만 정권 하에서 우리민족, 특히 민중들의 고통은 어쩌면 필연적이라 하겠다. 정치권력의 성향이 그 국민의 생활의 질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것은 뚜렷한 현실로 나타나고 있다. ‘IMF사태’라는 국가재난을 기회로 IMF와 이 땅의 부자들은 높은 이자로 큰 이익을 챙겼지만 가난한 민중들은 정리해고 당하거나 임시직으로 내몰리고, 심지어 노숙자 신세로 전락되기까지 하는 현실이 바로 그것이다.

정치발전이 시급한 이유를 다시 확인한다.

신포동과 중앙동엔 고층아파트가 섰고, 대내동 (문화동에 포함)엔 아파트 신축공사가  한창이다. 그러나 거기에 살던 난민들 중 다수는 또 다른 빈민촌이나 단간 셋방으로 밀려났다.

회원동도 마찬가지다. 단지, 회원동 하모니카촌엔 아파트가 들어서지 않았기 때문에 쓰러져가는 집이 (창고의 일부) 몇 군데 남아있다. 그리고 일자집 덩이가 옛날 창고의 넓이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고, 창고와 창고 사이의 길이 지금도 골목길이 되어있어 옛날 위치만을 나타내주고 있다.

<증언자들 ; 김순두, 윤대권, 박수권, 박노오, 이순환, 전판수, 조용기, 정덕현, 한철준, 한창열>

 

박호철 / 당시 마산학원 국어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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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한국전쟁기의 봉암동 Ⅲ - 미군들 우리들은 예사로 ‘할로’를 외치곤 했지만, 어른들이 인식은 많이 달랐었다. 특히 처녀들과 젊은 아녀자들에게 미군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어느 새댁은 야산에 끌려가 윤간당한 후 소나무에 목을..

건축의 외형 - '나선' (Helix or Spiral)

지난주의 주제였던 '구' (sphere) 에 이어 또 다른 3차원 형태 인 '나선' (Helix or Spiral) 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해 볼까 합니다. 나선 형태는 자연 속에서 규모와 종류를 가리지 않고 등장하며, 직,간..

기억을 찾아가다 - 4

4. 한국전쟁기의 봉암동 Ⅱ - 미군들 미군들에 대한 이야기의 상당 부분은 필자의 졸저 『상식의 서식처』에서 빌어 오고자한다. 「피난처에서 돌아온 날부터 나는 참 신기한 것들을 많이 보았다. 귀를 막아야 할 정도의 굉음을 내며..

건축의 외형 - '구' (sphere)

<오늘부터 매주 목요일은 재미있게 디자인된 건축물들을 포스팅해볼 계획입니다> 건축을 이루는 요소라고 말할 수 있는 것들은, 건축 교육을 받지 않은 사람이라도 쉽게 여러 가지를 떠올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중에서도 '외형'에 ..

기억을 찾아가다 - 3

3. 한국전쟁기의 봉암동 Ⅰ- 좌익과 피난 내 초등학교 일이학년 때 팔룡산 상사바위 근처나 불암사 근처 산먼뎅이들에 봉홧불이 올라 있는 광경을 종종 보았다. 그리고 새벽에 한길에서 붉고 푸른 삐라들도 주워보았다. <팔룡산 ..

기억을 찾아가다 - 2

2. 봉암동 형성 Ⅱ 팔용산에 수원지가 건설된 것은 1930년이었다. 처음 만들었을 때는 일인 1일 급수량 170리터 기준으로 인구 16,000명을 예상하고 만들었다가 증축을 하기도 했다. 광역상수도 확장사업이 완료된 1984..

기억을 찾아가다 - 1

오늘부터 연재하는 포스팅은 마산 봉암동(현 창원시 마산회원구 봉암동)에서 태어나 청년기까지 살았던 박호철 선생님의 기억 속에 있는 도시 이야깁니다. 한 개인의 삶에 투영된 도시의 흔적을 통해 이미 사라져 버린 우리의 과거를 찾..

핵발전소 이대로 좋은가? - 9. 신고리 5,6호기 시민참여단에게 드리는 글

원자력발전의 경제성을 이야기하면 사용후핵연료 처리비용 과소계상, 원전 해체비용과 환경 복구 비용 과소 계상 등을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숨겨진 이야기가 있습니다. 바로 사고 보험 문제입니다. 자동차를 운행하면 ..

일제 강점기 신마산 혼마치(本町)

오래된 사진 한 장을 소개한다. 아래 것은 같은 장소에서 찍은 현재 사진이다. 위 사진을 현재와 비교하기 위한 사진이다. 1910년대에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마산 월남동 1가(현 3.15대로) 사진이다. 당시에는 혼마치(..

마산해양신도시, 대통령 말씀대로

계륵 꼴이 된 가포신항이 구체화된 것은 2001년이었다. ‘마산항 제2차 무역항기본계획’에서 20년 후 마산항 물동량이 54만 TEU가 될 것으로 예측해 성사된 사업이었다. 환경문제를 걱정하며 매립을 반대했던 시민들에게는 ‘일..

고지도로 보는 창원 27. - 칠원현 지방지도

▮ 고지도로 보는 창원 27. - 칠원현 지방지도 ● 칠원현 地方地圖/ 필사본(회화식)/ 1872 - 19세기 중반 이후 집권한 흥선대원군에 의해 1872년 제작된 지도이다. 흥선대원군은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

고지도로 보는 창원 26. - 진해현 지방지도

▮ 고지도로 보는 창원 26. - 진해현 지방지도 ● 진해현 地方地圖/ 필사본(회화식)/ 1872 - 19세기 중반 이후 집권한 흥선대원군에 의해 1872년 제작된 지도이다. 흥선대원군은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

고지도로 보는 창원 25. - 웅천현 지방지도

▮ 고지도로 보는 창원 25. - 웅천현 지방지도 ● 웅천현 地方地圖/ 필사본(회화식)/ 1882 - 19세기 중반 이후 집권한 흥선대원군에 의해 1882년 제작된 지도이다. 흥선대원군은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

고지도로 보는 창원 24. - 칠원현 광여도

▮ 고지도로 보는 창원 24. - 칠원현 廣輿圖 ● 漆原縣 廣輿圖(古4790-58)/ 필사본(회화식) - 지도 개요 : 제작 시기는 19세기 전반 (규격은 36.8 * 28.6cm, 구성: 7책)에 만들어진 전국 군현지도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