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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07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 - 고려시대


<'마산' 지명은 언제 어떻게 생겼을까?> *작년 11월 9일 포스팅했던 글인데 연재라서 또 올립니다

'마산' 지명의 기원에 대한 몇 가지 설이 있지만 아직 정립된 주장은 없습니다.
이 글에서는 지금까지 제기된 마산지명 기원설들을 모아 보았습니다.
구전으로 전해내려온 이야기에서부터 고려시대 여원연합군 일본원정 때 이곳에 몽고군들이 주둔한 사실과 관련이 있다는 주장까지 있습니다.

먼저,
일본인 추방사랑(
諏方史郞)의 주장입니다. 
그는 1926년에 간행한『마산항지』에서 '구전으로 내려오던 이야기'라고 전제하며
임진왜란(1592-1598년) 이후, 각 지역에 전염병이 창궐하여 창원 소재 오산진(현 산호동 용마고 부근)에도 매일 시체가 산을 이루어 50구, 30구 혹은 20구의 시체가 동시에 묻히는 등 참혹한 상황이 되었다.
살아남은 이 지역의 고로(古老)들이 서로 상의하여 유명한 풍수사에게 그 연유와 대책을 묻자 오산(午山)의 오(午)자에 문제가 많아 이런 일이 일어났으니 오(午)자 대신 같은 의미인 마(馬)자를 사용하라고 하여 오산(午山)을 마산(馬山)이라 개명하게 되고 이때부터 마산이란 지명이 생겼다
고 하였습니다.
이 주장은『마산시사』를 비롯한 관찬자료와 마산과 관련한 많은 문헌에서 인용하였으며 사실상 지금까지 가장 널리 알려진 마산의 지명 기원설입니다.

그러나
주장은 옳지 않습니다.
임진왜란 이전에 간행된 자료에서 마산이란 지명이 여러 군데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근거 없이 구전으로 전해오던 이야기를 한 일본지식인이 활자화한 것으로 보입니다.

또 하나,
일제강점기 조선운송주식회사가 펴낸『조선항만지사정』에서는 마산지명의 기원에 대해
조선 제18대 현종(1660년-1674년 재위) 때부터 마산포라고 칭했다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현종의 재위기 이전에 이미 마산이란 지명이 기록에 등장한다는 점에서 잘못된 주장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최초로 마산이란 용어가 등장한다며 그 기원을 주장한 학자도 있습니다.
하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이 간행된 중종 25년(1530년)보다 100여 년 전인 세종7년(1425년)에 편찬된『경상도지리지』(오른쪽 그림이 표지 제목) 내상조에
(경상)우도내상은 창원부에 있는데 바다입구인 마산포와 4리 317보 떨어져있다 (右道內廂 在昌原府 去海口馬山浦 四里三百十七步所屬)
라는 마산포에 관한 기록이 있고,

『조선왕조실록』세종10년(1428년) 8월 기록에
경상도 마산포의 바닷물이 붉게 물들었는데 물고기가 죽은 놈이 있었다 (그 당시 마산만에 적조현상이 발생했던 것으로 보이는 기록이다)
는 마산포 기록이 있으니 이 주장도 타당성이 없습니다.

음차현상으로 마산 지명의 기원에 대해 설명하기도 했으나 근거가 불명확합니다.

그러던 중, 몇 년 전에 새로운 주장이 나왔습니다.
고려시대 몽고군이 합포에 진주한 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한 박희윤의 주장입니다.

박희윤은 와세다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마친 후 현재 일본굴지의 도시개발회사 간부로 근무하는 마산사람입니다. 마산도시사연구는 국내에서 공부할 때 했습니다.
작년 추석에 고향이라고 마산와서 쇠락해가는 도시모습을 보며 많이도 안타까워하더군요.

박희윤은 몽고군이 일본을 침략하기 위해 합포(마산일대의 당시 지명)에 진주할 때
몽고군 1인당 말 4필로 보면 4만 필인데 이를 먹일만한 장소로 산호동 지역 바냇들 뿐이어서 이곳에 몽고군의 목마장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이로 인해 「용마산」「큰 말굿」「작은 말죽통」 등의 말(馬)과 관련된 지명이 생겨났을 것이다.
또한 용마산 아래에 있는 포구라는 의미와 일본원정당시 말들을 실어 나르던 포구라는 의미에서 「마산포」라는 지명이 생겼을 것이다
라고 하면서 그 시기를 고려후기로 추정했습니다.

아래 그림은 현재 지도 위에 당시의 지리적 상황과 박희윤의 추정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목마장으로 사용하였다고 추정한 바냇들의 면적은 약 25만여 평입니다.


그의 주장이 맞다면,
원나라 세조가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이 곳 합포의 자산성에 정동행성을 둔 것이 1274년이고, 두 번째 원정이 1281년이니 지금으로부터 700년도 더된 시기에 마산이라는 지명이 생긴 셈입니다.

600여년 전에 간행된 사료에 마산이라는 지명이 수록되어 있으니 앞의 주장들 처럼 시기적으로 오류가 있지는 않습니다.
몽고군-말-목마장-용마산-마산포로 이어지는 연결이 그리 어색하지도 않습니다.
몽고군이 ‘몽고정’만 남긴 것이 아니라 ‘마산’이라는 이름까지 남겼다는 주장, 참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창원'이라는 지명은 조선 제3대 왕 태종이 재위하던1408년에 탄생하였습니다.
'마산'이라는 지명은 1425년 세종이 편찬한 『경상도지리지』에 최초로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창원'과 '마산' 중 어느 지명이 먼저 생겼을까요?

확인 되지도 않았고 확인할 수도 없는 ‘마산’ 지명의 정확한 기원은 무엇일까요?
이 오래된 지명은 언제 무슨 사연을 담고 만들어졌을까요?<<<


2010/04/08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여는 글
2010/04/12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1
2010/04/19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2
2010/04/26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3
2010/05/03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쳔사 - 4
2010/05/17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5
2010/05/24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6
2010/05/31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7
2010/06/07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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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따옥따옥 2010.06.09 14:58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지역에 관한 좋은 자료네요 ...
    마산이 왜 마산일까 가끔 별생각없이 궁금해 한 적이 있었던것 같은데...
    잘 보고 갑니다 ^^

    • 허정도 2010.06.11 15:12 신고 address edit & del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글이 오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2. 골드 2010.06.11 10:56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어제 KNN 다큐"마산"에 나오시더군요. 박사님의 글을 보고 마산의 근대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읍니다.

    • 허정도 2010.06.11 15:11 신고 address edit & del

      관심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통합시의 미래에 기대를 걸어야 되겠지만, 마산시가 없어지는게 저는 참 서운합니다.

2010.05.10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 - 고려시대


<마산에 있었던 석두창의 위치는?>

조선시대 조창인 마산창은 위치와 규모 등 관련 내용들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마산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고려 석두창(石頭倉)의 중요성도 결코 조선시대 마산창 못지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두창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으며, 아직 그 위치도 밝히지 못한 채 몇 가지 가설만 나와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지금까지 주장된 석두창 위치에 대한 가설들을 소개하겠습니다.

석두창 위치 비정은 모두 세 가지인데 모두 그 근거와 논리가 좀 복잡합니다.
천 년 전에 있었던 석두창의 위치를 찾는 일이니 그도 그럴 것입니다.

세 주장의 결론만 간략하게 정리하겠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만 읽어볼 수 있도록 자세한 내용은 이 글 뒤에 별도로 붙여 놓았습니다)

첫 번째는,
몇몇 문헌(마산시사, 창원군지, 박희윤, 이지우 경남대 교수)에서「당시 마산포라 불렀던 현재의 용마산과 자유무역지역 후문까지의 어느 지점, 현 산호동 어딘가에 있다가 조선조에 현 어시장 해변으로 옮겼다」라고 추정한 것입니다.
이 주장에서 사용한 근거자료는,
세종7년(1425년)에 간행한『경상도지리지』, 중종 25년(1530년)에 간행한『신증동국여지승람』, 영조 때(1757년-1765년)에 편찬된 『여지도서』, 1895년에 간행한 『영남읍지』 등 입니다.

두 번째는 저의 주장입니다.
저는 앞의 주장이 문헌 해석방법에 무리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석두창이 현재의 남성동 해안으로 옮겨온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남성동 해안에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였습니다.
근거자료로는 지명과 자연조건 그리고 지형을 제시했고 사용한 자료는 『고려사』,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1899년 일본에서 제작한 근대식 지도, 조선시대 마산포 복원도 등 입니다.

세 번째는 부산대학교 사학과 한정훈 교수의 주장입니다.
한 교수는 석두창의 위치가 「산호동 일대이지만 반월산(무학여고 뒷산)을 중심으로 해서 그 앞 해안가에 위치하였을 것」이라고 추정했습니다.
추정근거로 지명의 의미 및 고려시대 조창의 입지조건과 인근의 교통망 등을 들었습니다.

위 세 주장에서 제시된 위치를 세 종류의 지도에 표기해 보았습니다.
첫 번째 주장 '산호동'은 청색,
두 번째 주장 '남성동'은 적색,
세 번째 주장 '반월산에서 해안가'는 녹색
입니다.
정확하지는 않습니다만 대충이나마 그 위치를 가늠할 수 있을 겁니다.

 <1833년에 제작된 고지도에 그려보았습니다>

<현재 마산지도에 백여년전 해안선을 복원한 후 비교해보았습니다>

<현재 마산지도상에 위치를 표시해보았습니다.
세 곳 모두 도시한복판이지만 당시에는 배가 정박할 수 있는 해안이었습니다. 세 번째 주장인 녹색부분은 삼호천과 산호천이 합해진 하류인데 지금은 복개되었습니다>

셋 중 어느 주장이 맞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아직 논의가 종결되지도 않았습니다.
본격적으로 연구하여 천 년 전 합포의 최대 최고시설이었던 석두창의 위치를 찾는다면 통합 창원시 최고의 문화유산이 될 것 같습니다.

도대체 어디쯤 있었을까요?
고려시대 마산에 있었던 석두창은,,,,



<석두창 위치비정에 대한 세 주장의 상세 글>   - 길어서 읽기 지겹습니다 -
 

첫 번째,
‘산호동 일대’라는 주장의 근거자료로 사용되었던 문헌의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세종7년(1425년)에 간행한『경상도지리지』 조세(租稅)조에서「이전에는 도내(道內)에서 세(稅)를 거둬 실어다 바치는 곳이 세 군데 있었다.
김해 불암창, 창원 마산창(옛 석두창), 사천 통양창」이라는 기록.

② 『경상도지리지』 내상조(內廂條)에서「우도내상(右道內廂)은 창원부에 있는데, 바다입구(海口) 마산포와 4리317보 떨어져있다」는 기록.
'병영성(兵營城)과 내상성(內廂城)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여기서 말하는 내상(內廂)은 현 합성동의 당시 ‘우도병마절제사영성(右道兵馬節制使營城)을 말함'

③ 중종 25년(1530년)에 간행한『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창원도호부 산천조(山川條)에「馬山浦 在會原縣 猪島在月影臺南 合浦在府西十里․․․․․․」라고 하여 마산포는 회원현에 있고 합포는 부(府) 서쪽 10리에 있다는 기록

④ 영조(英祖) 때(1757년-1765년)에 편찬된 『여지도서(與地圖書)』의 창원대도호부조(昌原大都護府條)에 수록되어 있는 창원부의 지도에서 석두창의 위치가 반룡산(盤龍山, 현 팔용산)밑인 지금의 산호동 일대(팔용산과 월영대 중간지점)에 도시(圖示)되어 있다는 것

⑤ 1895년 간행한 『嶺南邑誌』 창원대도호부(昌原大都護府)조에서「조창은 해창 부근에 있는데 새로 지은 것이다」라는 기록 등 입니다.

이 문헌들에 근거하여 내린 결론은

①「마산에 두 개의 포구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현재의 용마산과 자유무역지역 후문까지(산호동 일대)의 마산포이고 다른 하나는 현 어시장 쪽의 합포였다」고 규정하여

②「마산포에 석두창이 있었으니 현 산호동 어딘가에 석두창이 있었다」라고 결론짓고

③ 그러다가 조선 영․정조시기에 자연충적(自然沖積)으로 마산포에 선박출입이 어려워지자「현 어시장 해변인 해창 부근, 즉 합포로 옮겼다」는 주장입니다.

그리고 박희윤은 마산포에서 합포로 옮겨 간 사실을 두고 「산호동 일대는 구강이라고 부르던 곳으로 여기서 열리던 장을 ‘구강장’이라고 하였고 어시장 쪽에서 열리는 장을 ‘새강장’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예로 들었습니다.
즉 마산포에 있던 석두창이 퇴적물로 인해 조선 후기에 합포 지역으로 조창을 이전했기 때문에 원래의 지역을 ‘구강’, 새로운 지역을 ‘새강’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마산포라는 지명은 기존의 산호동 일대만 지칭하다가 현재의 남성동 일대인 합포 지역까지 확대되어 사용되었다고 비교적 소상히 설명하였습니다.

두 번째,
‘남성동 어시장 일대’라는 제 주장입니다.
위 석두창 위치비정 논리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시작합니다.

① 마산포와 합포의 위치를 규명하는 방법에서「마산포는 회원현에 있고 합포는 부(府)의 서쪽 10리에 있다」는 기록을 이용하면서, 마치 자로 잰 듯이 당시 행정구역인 회원현의 범역과 창원대도호부의 위치를 자구(字句) 그대로 적용하여 현 산호동 일대가 마산포이고 남성동 일대가 합포인데 석두창이 마산포에 있다고 한 점입니다.
따라서 산호동의 용마산에서 자유무역지역 후문까지의 어딘가 그것이 있었을 것이라는 논리가 석연치 않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아래의「대동여지도」입니다.
이 지도에는 위의 주장과 정반대의 위치에 마산포와 합포가 표기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만으로도 마산포와 합포의 위치를 비정하는데 활용한 문헌의 해석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동여지도」의 표기 범례에는 ■은 倉庫, ●은 古縣이라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合浦●」의 표기는 신라 35대 경덕왕 16년(757년)에 시행한 행정구역 정비 때 의안군에 영속되었던 합포현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서, 과거에 현(縣)이었는데 성(城)은 없다는 뜻입니다.

지도에 표기된 양상을 보아도 마산포는 기존의 연구처럼 산호동 일대를 지칭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②『여지도서(與地圖書)』의 창원부 지도에 도시(圖示)된 석두창의 위치에 대한 문제제기입니다.
우리나라의 각종 고지도(古地圖)에 나타나는 시설물들을 보면 축척과 거리의 개념보다는 존재 유무의 개념으로 표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지도에 나타나는 석두창의 위치를 사실로 연결시키면서 논거로 제시하는 것은 무리가 많습니다.

또한 석두창이 산호동 부근의 마산포에 있었다고 하는 주장은 시기와 명칭과의 관련성에서도 문제가 있습니다.

③ 조선 영․정조에 석두창을 현 어시장 쪽인 합포로 이전했다는 내용에 대한 주장의 타당성입니다.
이 주장은 석두창을 현재의 산호동 쪽에 있었다는 것을 결정해 놓고, 『영남읍지』의 ‘조창이 합포에 있던 해창 쪽에 있다’는 기록과 연결짓다보니「이전」이라는 해석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에 중요한 관아였던 조창이 이전되었다는 기록은 어느 문헌에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석두창이 이전했다면 영조 때 개창한 마산창의 위치로 이전한 것인지, 혹은 그렇지 않고 마산창은 별도로 신설한 것인지 정확한 설명이 없습니다. 석두창 이전 설은 현재로서는 논리적으로 납득할만한 어떤 근거도 없는 셈입니다.

④ 석두창이 오래 동안 사용되다가 자연충적 때문에 이전했다고 한 점에 대해 검토해 볼 필요도 있습니다.
석두창이 있었다는 산호동 해안의 지형지세를 보면 원래부터 퇴적물이 많았던
곳이지 석두창이 생긴 후 언제인가부터 퇴적물이 생기기 시작한 곳은 아닙니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 제시한 「1899년 산호동 일대의 해안지도」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지도는 1899년 일본 해군에 의해 작성된 근대식 지도로서 마산만의 간조선이 표시된 지도로서는 최초의 것입니다.


이 지도를 보면 지금까지 석두창이 있었다고 주장한 해안은 팔용산에서 내려오는 하천를 비롯하여 양덕천․산호천․삼호천 등의 하천 때문에 간석지의 폭이 무려 1㎞나 되는 곳이 있을 정도입니다.
조창부지로서는 매우 부적절한 자연조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위의 네 가지 이유를 보더라도 석두창이 현 산호동 일대에 있었다는 주장은 무리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석두창이 처음부터 현재의 남성동 해안에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 비정이 합리적이라고 봅니다.
이것은 저의 주장인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①『고려사』권79 조운, 성종 11년 수경가조(輸京價條)에 「나포 전호골포 합포현석두창 재언(螺浦 前號骨浦 合浦縣石頭倉 在焉)」이라고 하여「나포는 전에 골포라 하였고 합포현의 석두창이 여기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이 기록은 석두창의 위치를 확인하는데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
즉 螺(라, 소라)라고 불렀던 포구라면 그 형상이 소라의 형태와 관련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는 버드나무가 많다고 해서 유호(柳湖)라는 지명을 사용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오른쪽 그림은 제가 복원한 원마산 지형도입니다.
이 그림에서 나타나는 동굴강의 형태가 나포(螺浦)라는 명칭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특이한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② 조창의 명칭이 석두창(石頭倉)이라는 점입니다.
중국어에서는 ‘석두(石頭)’라는 단어를 곧 돌(石)을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이를 근거로 생각해 보면 대부분 갈대밭이었으며 간석지였던 해안에 소라 모양을 띤 움푹 들어간 포구 한 곳을 돌로서 호안(護岸)하여 굴강을 조성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합니다.
그 형상으로 보아 사실상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것이라기보다는 자연발생적인 포구를 인공으로 호안(護岸)하여 조성한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합니다.

③ 앞에서 말했듯이 현재의 용마산과 자유무역지역 후문 사이에는 여러 개의 하천 때문에 생기는 퇴적물로 인해 간석지가 매우 넓었을 뿐만 아니라 해안선의 형태가 밋밋하여 작은 풍랑도 피하지 못할 조건이었습니다.

반면 위의 두 그림에서 알 수 있듯이 ▲표의 동굴강은 간석지가 좁고 해안선의 형태도 항만으로 사용하기에 적합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인근에 이렇게 좋은 조건을 놔두고 산호동 쪽에 조창을 설치할 이유가 없었다고 봅니다.

이상과 같은 추정을 근거로 석두창의 위치는 애초부터 남성동해안의 동굴강에 있었던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또한 동굴강을 끼고 몽고군의 일본 정벌 때 사용된 전선소(戰船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기존의 굴강을 전선소 굴강으로 적절히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동굴강은 그 규모로 보아 당시 900여 척에 달했던 전함의 수리를 모두 맡기에는 부족했을 것이지만 기왕에 존재했던 굴강이었기 때문에 일부라도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 이 추정이 적절하다면 그 위치는 현재의 어시장 입구에 있는 속칭「너른 마당」의 북쪽 인접대지 일대입니다.

이 사실을 전제로 할 때,

조선시대의 마산창은 고려시대의 석두창을 이전한 것이 아니라 석두창으로 사용하다가 폐허가 되어버린 창지(倉址) 옆에 새로 건립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이 주장에 반론이 나왔습니다.

세 번째,

부산대학교 사학과 한정훈 교수의 주장입니다.

한 교수는 고려시대 조창의 입지조건과 인근의 교통망 등을 근거로 하여 석두창의 위치를 비정한 것입니다.

다음과 같은 논리입니다.

① 석두창은 합포현 내에 있는 골포(=螺浦)에 위치하였다.
골포의 골(骨)자는 우리만 의미에서 골짜기 깊숙이 들어간 곳의 의미가 있으므로 마산만 깊숙이 들어간 어느 지점에 형성된 포구를 지칭할 가능성이 높다.
그런 점에서 현재의 남성동 보다는 더 내륙으로 들어간 산호동 일대일 가능성이 높다.

② 고려시대 조창의 입지조건을 검토한 결과, 만(灣)의 입구보다는 내륙으로 들어간 해안이나 만의 깊숙한 지점에 위치하였다.
바다로 부터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였는데 그 역시 산호동 일대가 타당한 조건이었다.

③ 조창의 운반 조건을 볼 때 수운 이용이나 하천을 따라 형성된 소로의 이용이란 측면에서 내륙하천과 마산 앞 바다의 결절지점에 석두창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것을 근거로 볼 때, 석두창의 위치를 용마산 아래의 산호동 앞 바닷가 일대로 보는 것이 옳다고 하면서, 나아가 조창의 입지조건이나 교통망 그리고 당시 해수면의 변화까지 고려한다면 용마산 일대보다 내륙으로 더 들어간 지점일 수 있다고했습니다.
그 결과 내린 결론은,
석두창이 지금의 반월산(무학여고 뒷산, 이산, 이살미산, 와우산이라고도 불린다)을 중심으로 해서 그 앞 해안가에 위치하였을 것이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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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기합, 주먹자랑, 몸단련 중학교시절에도 조금은 의식되었지만 신경을 곤두세울 정도는 아니었었는데, 고등학교에 들어가자 그 문제들은 신경의 상당부분을 자극하여 행동거지의 상당부분을 조종하고 지배할 정도로까지 작용했다. 소위 ..

공간의 재탄생 - 재생 건축 '선유도' 02

지난주에 이어 녹색 기둥의 정원 에서부터 선유도 이야기를 이어 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 - 녹색 기둥의 정원 정수지의 콘크리트 상판 지붕을 들어내 기둥만을 남겨 만들어진 이 정원은, 선유도 이야기관 의 설명에 의하면 ‘휴식과 ..

기억을 찾아가다 - 21

21. 동(洞) 대항 줄다리기대회 ‘마산시 동 대항 줄다리기대회’가 시작된 건 초등학교 때였던 것 같은데, 내가 몇번 구경한 건 중학교 때였다. 대회 장소는 주로 무학초등학교였다. 마산의 30여 동이 토너먼트로 겨루어 하루에 ..

공간의 재탄생 - 재생 건축 '선유도' 01

서울 한강변의 대표적 공원 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곳 중에 선유도가 빠지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원래 거기에 그렇게 있었던 장소로 기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아직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선유도 공원이 ..

기억을 찾아가다 - 20

20. 아이스케키 아이스크림이나 팥빙수도 있었지만 수요가 많지는 않았었다. 학교 앞이나 시장 입구 등에 리어카를 세워놓고 수제로 만들어 파는 정도였다. 소금 뿌린 얼음 통을 손으로 돌려 냉각시킨 아이스크림은 즉석에서 고깔과자 ..

안상수 시장은 철거민의 눈물 닦아주시라

설 연휴가 끝난 다음 날, 나는 한 언론사의 취재에 동행해 재개발로 철거 중인 마산 회원동 일대를 다녔다. 내가 태어난 곳이고 서른까지 산 곳이었다. 지금도 매일 두 번씩 지나는 곳이기도 하다. 그날 나는 몰상식과 몰염치의 밑..

기억을 찾아가다 - 19

19. 영화, 만화, 잡지 초등학교 6학년 때 단체로 시민극장에 ‘성웅 이순신’을 보러 갔다가 실망했던 기억이 있다. 활동사진이 아니고 정지된 그림(슬라이드)이었기 때문이다. 중1때 문화동 쯤에 있었던 제일극장에서 본 애정(哀..

공간의 재탄생 - 재생 건축 intro.

세 달 가까이 이어져 왔던 '건축의 외형' 에 이어, 세월의 흐름에 따라 방치되고 버림받게 된 건축에 새 삶을 불어넣는 '재생 건축' (regenerative architecture) 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이어 나가볼까 합니..

기억을 찾아가다 - 18

18. 바냇들, 부림시장 정전 다음해 진학한 마산서중(전쟁 중인 1951년 9월 1일 6년제 마산공립중학교가 3년제 마산고와 마산서중으로 분리되었다. 마산서중이 현재의 마산중학교로 교명을 변경한 것은 1955년 5월 7일이었다..

기억을 찾아가다 - 17

17. 공놀이, 헌병사령부 축구팀 우리 어릴 때 겨울 빈 밭에서 새끼로 동여맨 짚 뭉치를 차고 놀던 기억이 있고, 간혹 있은 잔칫집에서 나온 돼지 오줌보에 물을 넣어 차고 놀던 일도 어렴풋이 기억의 한 자락에 남아 있다. 형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