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2017.08.21 00:00

고지도로 보는 창원 21. - 창원부 광여도

▮ 고지도로 보는 창원 21. - 창원부 廣輿圖

 

昌原府 廣輿圖(古4790-58)/ 필사본(회화식)

 

- 지도 개요 : 제작 시기는 19세기 전반 (규격은 36.8 * 28.6cm, 구성: 7책)에 만들어진 전국 군현지도집이다. 광여도 전체의 구성은 비변사 지도와 유사하다. 영조대 중반부터 계속되던 관찬 회화식 전국 군현지도집 편찬의 전통은 19세기에 사라지게 된다. 기호식 지도집의 등장으로 국가가 합리적인 윤곽을 가진 기호식 지도집을 편찬에 활용하게 되면서 과거의 회화식 관찬 군현지도집은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비변사 지도와 비교해 보면

표현방식상 비변사지도는 방안 위에 그려져 축척에 의해 거리를 가늠할 수 있는 방안식지도이다. 광여도의 경우 거의 배치형태가 동일하지만, 방안이 표기되지 않은 이유로 회화식으로 분류하였지만, 사실상 방안식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전체 산의 배치와 읍면의 위치 등은 거의 같으나, 각 면을 연결하는 내방도로와 인접 군현으로 가는 외방도로가 생략된 것이 큰 차이다.

 

< 창원부 비변사지도>

 

- 지도 해제

읍치를 중심으로 16개 면이 표기되어 있다. 북1,2,3면, 서1,2,3면, 동1,2,3면, 부1,2면,상1,2,3면, 하1,2면으로 나뉘어져 있다.

주요건물 표기는 읍성 근처 향교, 남측 아래 향현사, 동측 방향으로 봉림사, 자여역 원해, 우곡사가 있으며 동남측 방향으로 불모산 아래 웅신사와 안민역의 원해가 있다.

북측방향으로 백월산 아래 남백암, 무릉산 아래 영천암, 서측 방향으로 두척 봉산 아래 회원서원과 해창 그리고 전선소가 표기되어 있으며, 밤밭고개(율치) 아래 월영대가, 광려산 아래 광산사가 그려져 있다.

 

주요 나루터로는 북측으로 낙동강 변에는 밀양계에 신촌진, 영산계에 주문진이 있으며 남측 반룡산봉산 아래 孫島津(孫渡津의 오기로 보임)이 웅천계에 면해 있다.

 

통신시설에 해당되는 봉수의 연결망은 웅천계 사현에서 두척산 아래 성황당 봉대와 하단에 餘浦熢 2개소가 나타나 있다.

 

 지도에 포함된 내용을 자연지리와 인문지리로 구분하여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구분

소분류

명 칭

행정

면.리

부1,2면, 상1,2,3면, 하1,2면, 동1,2,3면, 서1,2,3면, 북1,2,3면

16

자연지리

산천 및 고개

광려산, 만월산, 두척봉산, 청룡산, 천주산, 무릉산, 백월산, 구룡산, 첨산, 염산, 전단산, 반룡산 봉산, 불모산

율현, 굴현, 송현, 안민령

18

海,도서

낙동강, 저도,

2

나루터

孫島津, 主勿津, 新村津,

3

인문지리

읍성

읍치

1

교육

향교, 향현사, 회원서원

3

사찰

광산사, 靈泉庵,남백암, 봉림사, 牛谷庵, 熊神寺,

6

역원 등

근주역, 안민역, 자여역, 院廨1,2,

성황당봉대, 여포봉대, 해창,

8

고적

월영대

1

 

 

창원부 광여도 地志

- 별도의 地志에 수록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의 표와 같다.

구분

소분류

세부 내용

행정

군사

호구

- 호구수 : 7,486호

- 인구 : 27,739명 (남자 11,632명, 여자 16,107명)

 

군병

- 京各司諸色軍 : 1,213명

- 監營屬 ; 285명

- 統營續 : 1,627명

- 右兵營屬 : 837명

- 左水營屬 : 9명 반

- 金海鎭屬 : 1,088명

= 합계 5,059명

6

기타시설

- 船材封山 : 斗尺封山, 滿月封山, 社亦封山, 靑龍封山, 盤龍封山

  5

경제

量付

- 6,293結11負9束,

(전2,670결11부3속, 답3,622결60부6속)

 

實結

- 4,724속88부13속

(案田1,691결79부6속, 案沓3,034결9부7속)

 

곡물

- 元會 및 常賑米 : 38석 54석,

- 各樣雜穀 : 3,420석 (잡곡 : 1,101석, 2,319석)

- 別餉米 : 1,104석

- 監營米 : 44석, 잡곡 16,984석

- 統營米 : 1,551석, 잡곡 2,477석

- 私賑雜穀 : 3,309석

- 帖價雜穀 : 601석

- 備荒租 : 463석

- 浦項雜穀 : 1,791석

- 華山劃付雜穀 : 3,100석

- 戰兵舡價 : 65석

- 除留米 : 169석, 잡곡 1석8부

- 各樣軍作米 : 217석

- 射木作米 : 27석

- 作租 : 151석

15 

 

비변사지도에 수록된 지지내용과 동일하다. 1760년 제작된 비변사 지도와 19세기 초반사이에 약 40년의 시간 차이가 있지만, 인구 및 군사, 조세 및 경제 지표의 변동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Trackback 0 Comment 0
2017.05.29 00:00

고지도로 보는 창원9. - 창원부 輿地圖

▮ 고지도로 보는 창원9. - 창원부 여지도(輿地圖)

 

昌原府 輿地圖(古14709-68)輿地圖》(古4709-68)/ 필사본(회화식)

여지도는 총 6책으로 구성된 전국 군현지도책으로 제1책에 遼薊關防地圖와 盛京輿地全圖, 제6책에 朝鮮女眞兩國國界圖가 첨가되어 있다. 지도는 364장, 주기는 341장으로 총 705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본 지도가 《해동지도》를 필사한 것이지만 동일하게 필사되지는 않았다.

전체 지도의 구성은 해동지도처럼 산계 및 수계를 구성하고 읍성을 중심으로 주변의 건물을 묘사하였다. 읍성을 중심에 크게 표현하고 내부의 관아의 배치를 묘사한 것이 특징이다. 해동지도와 달리 읍성에서 면이나 인접 군으로 향하는 도로의 표기는 생략하였다.

 

창원읍성(도계동 일대)을 중심으로 주변을 표기하였다.

읍성내에 5개의 건물이 있다. 중앙에 사미정, 객사와 아(관아), 그리고 동문, 서문, 남문, 북문이 배치되어 있다.

읍성을 중심으로 읍성 아래측에 부내면, 동면, 서면, 남면, 북면 5개의 행정구역이 표기되어 있다.

읍성의 배치는 북면쪽의 무릉산과 백월산, 천주산을 끼고 있으며 서측에는 두척산, 동측에는 전단산이 남측에는 반룡산이, 동남측에는 장백산이 자리 잡고 있다.

주요 도로는 표기되어 있지 않으며, 수계는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밀양계에 면한 주문연진과 손진이 표기되어 있다.

읍성 밖에 있는 건물로 전단산 인근에 의림사와 자여역이 있으며, 아래에 성주사, 백월산 아래 남백사, 합성동 구병영 자리에 향교가 서원곡 입구에 서원, 해안가에 창과, 선소, 월영대가, 두척현 뒤에 광산사가 표기되어 있다.

통신시설에 해당하는 봉수는 두척산 아래 성황봉과 저도 서측에 한곳이 표기되어 있다.

그리고 구산면 내포리 일대가 내포향으로 표기되어 있다.

 

 지도에 포함된 내용을 자연지리와 인문지리로 구분하여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구분

소분류

명 칭

행정

면.리

부내면, 동며, 서면, 남면, 북면

5

자연지리

산천

무릉산, 반룡산, 백월산, 旃檀山, 長白山, 天柱山,

6

저도

1

고개

두척현, 이리현

2

나루터

孫津, 主勿淵津

2

인문지리

읍성

연당, 사미정, 객사, 아, 동문, 선문, 남문, 북문

8

교육

향교, 서원

2

사찰

광산사, 남백사, 봉림사, 성주사

4

역원 등

자여역, 성황당봉대, 여포봉대, 선소, 창

5

고적

구병영, 월영대,

2

 

 해동지도나 비변사지도에 비해 수록된 내용이 적은 편이다.

 

창원부 여지도 地志

- 地志는 지도 여백에 적어놓은 군현의 인문지리에 관한 내용으로 정리하면 다음의 표와 같다.

 

구분

소분류

세부 내용

행정

군사

호구

- 호구수 : 7,995호

- 인구 : 30,702명

 

군병

- 京各司諸色軍 : 1,352명

- 各營鎭浦分防諸色 : 1,555명

- 束伍雜色軍 : 930명,

- 烽軍 : 25명

4

기타시설

- 城郭存 : 倉2庫,

 1

경제

量付

- 6,293結11負9束,

(전3,670결11부3속, 답3,622결60부6속)

 

還上各穀

- 21,829석 14두

 

곡물

- 元會 및 常賑米 : 439석 7두

皮雜穀 : 1,122석 11두

- 巡營米 : 15석 10두

피잡곡 : 19,070석

- 統營米 : 397석 9두

피잡곡 : 884석

 

해동지도 지지와 비교했을 때 호구수는 7,368호에 비해 약 600호가 늘어난 7,995호로 증가되었으며, 인구도 3천명 정도가 증가됨을 나타내고 있다.

군병 및 곡물 관련 내용은 축소되었으며, 전반적으로 소략하게 표현하였다.

Trackback 0 Comment 0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14 - 1980년대 이후

5) 1980년대 이후 - 4 아파트의 대중화는 주거설비의 획기적인 변화를 불러왔다. 아파트 사용자들은 첨단시설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가장 큰 변화는 주방시설에서 비롯되었다. 주부의 가사노동을 줄여줄 뿐 아니라 세련된 디자인과..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13 - 1980년대 이후

5) 1980년대 이후 - 3 2002년 말 우리나라 주택 보급률은 100%를 넘었다. 1인 가구를 포함하는 신주택보급률 역시 2008년에 100%를 상회(100.7%)함에 따라 주택의 양적 공급이 부족한 상태는 아니라고 볼 ..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12 - 1980년대 이후

5) 1980년대 이후 - 2 오늘날 우리나라 도시들을 뒤덮고 있는 아파트 홍수의 시작은 1988년에 시작한 ‘주택 2백만 호 건설’이다. 이 사업은 전년도에 있었던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후보가 내놓은 공약이었다. 2백만 호..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11 - 1980년대 이후

5) 1980년대 이후 - 1 1960년대 이후 계속된 인구의 도시집중은 폭발적으로 늘어난 수요에 비해 택지가 턱 없이 부족한 상황을 낳았다. 이런 현실은 필연적으로 주거의 집단화와 고층화를 요구하였고 그 해답으로 등장한 것이..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10 / 새마을운동의 농촌주택개량사업

4) 새마을운동의 농촌주택개량사업 - 2 농촌 주택개량사업은 새마을운동 시작 다음 해인 1972년부터 전개되었으며 담장이나 지붕 등의 부분적 보수와 개량으로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관리들은 초가지붕이 비위생적이고 아름답지 못..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9 / 새마을운동의 농촌주택개량사업

4) 새마을운동의 농촌주택개량사업 - 1 1960년대 이전까지 우리나라의 농촌은 전쟁으로 입은 농토의 피해와 농촌인구의 감소 등으로 아직 근대화의 영향을 받지 못한 채 재래식 농경생활을 유지하고 있었다. 주거환경 또한 전쟁피해..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8 /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3)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 3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주택 시장은 사회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맞물려 개발과 성장의 논리가 지배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지어진 단독주택은 대부분 도시 한옥과 양식이 가..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7 /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3)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 2 1960년대는 한국사회의 큰 전환기였다. 4·19혁명과 5·16쿠데타에 따른 정치적 격변을 겪었고, 소위 경제개발정책에 따른 제반 개발이 계획적으로 유도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6 /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3)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 1 1945년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면서 비로소 주체적인 주거문화를 창달할 수 있는 계기를 맞게 되지만 경제 사회적 제반 여건이 불비하여 주체적인 역량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5 /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

2)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 2 일제하의 중·상류계층의 주택 유형으로는 양식주택과 절충식(개량식)주택·개량 한옥·문화주택·공동주택·영단주택 등을 들 수 있다. 양식주택은 서양식주택을 말하며, 절충식 주택은 과도기적 상황에..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4 /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

2) 개항기부터 일제시기까지 - 1 구한말(舊韓末)까지도 조선 사람들이 살았던 보편적인 주거 유형은 한옥이었다. 1882년 그리피스(W. E. Griffis)가 쓴 한국에 관한 역사서 『은자의 나라 한국』에는 당시 전통 한옥을..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3 / 조선시대 이전

1) 고대에서 조선시대까지 - 3 조선시대는 우리나라 주거문화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시기이다. 반상(班常)을 철저히 구분한 신분사회였기 때문에 신분에 따라 주택의 크기나 형태를 규제하는 가사규제(家舍規制)가 있었다. 신..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2 / 조선시대 이전

1) 고대에서 조선시대까지 - 2 주거사(住居史)에서 청동기시대와 초기철기시대를 구분하는 또 하나의 지표는 구들의 시작이다. 한국 주거문화의 정체성을 압축적으로 나타내는 구들은 난방기술의 획기적인 발전인 동시에 지상주거로의 변..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1 / 조선시대 이전

오늘부터는 <경남지역 주거변천사>를 포스팅하겠습니다. 6~7년 전에 『경남도사』에 싣기 위해 간략히 쓴 글인데 출판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 블로그에 올립니다. 어차피 공유하기 위한 글이니 이해하리라 생각합니다. 한반도 동남부에 ..

기억을 찾아가다 - 25 (마지막 회)

25. 3·15의거에 대한 기억 「그날 나는 ‘극장 구경 시켜주겠다’는 주무돈이란 동네친구의 호의에 끌려 10리 가까이 되는 길을 걸어 ‘시민극장’으로 갔다. 그때 나는 대학입시에 낙방한 직후라 의기소침해 있던 상황이었다. 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