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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7.24 00:00

고지도로 보는 창원 17. - 창원부 地乘地圖

▮ 고지도로 보는 창원17. - 창원부 地乘地圖

 

昌原府 지승지도(奎15423)/ 필사본(방안식)

- 지도 개요 : 지승은 군사요지인 일부의 관방처와 전국의 군현을 총 6책으로 나누어 그린 그림식 지도책으로 각 책의 크기는 세로*가로가 27.0*19.0cm이다.

1책에는 경기도, 2책에는 충청도, 3책에는 경상도, 4책에는 전라도, 5책에는 평안도와 황해도, 6책에는 함경도와 강원도가 수록되어 있다.

지도의 전반적인 구도와 내용은 해동지도, 광여도, 여지도와 거의 비슷하여 동일 필사본 계통으로 분류할 수 있다. 지도제작 시기는 빨라도 1776년 이후에 제작된 것으로 보고 있다.

 

 

읍치를 중심으로 부내면, 동면, 서면, 남면, 북면 5면이 나타나 있다.

중심이 되는 읍성을 지도 중심에 크게 배치하고, 주변에 산세, 물길, 도로망을 표현하고 있다.

 

자연지리 조건을 살펴보면

북쪽방향으로 칠원계에 면하여 茂陵山이 있으며, 아래로 철마봉과 백월산, 천주산이 있으며, 북면으로 넘어가는 고개길로 堀峴이 있다.

서쪽 방향으로 산은 두척산과 성황봉 및 고운대가 표기되어 있다. 고개길은 함안방향으로 伊里峴, 구병영성에 내서로 가는 방향에 斗尺峴이 있다.

동쪽 방향으로 전단산과 김해로 넘어가는 고개길로 露峴이 있으며, 남측방향 웅천으로 가는 방향에 장백산이 있다. 읍성 아래 남측에서 반룡산이 합포만에 면하고 있다.

 

읍성의 배치를 살펴보면

동서남북 방향으로 사대문이 설치되고, 굴현에서 내려오는 하천이 성내를 관통하여 남측으로 흐르고 있다. 건물로는 衙舍가 3동, 客舍 1동, 倉舍가 1동이 있으며, 중앙 부분에 方池를 두고 蓮亭과 四美堂이 배치되어 있다.

읍성 주변 건물로는 전단산 아래 봉림사 자여역이, 웅천가는 길목에 안민역이 있다.

향교는 서면 구병영 인근에 있으며, 서원은 고운봉 아래 배치되어 있다.

해안변에 창사 및 선소와 월영대가 있다.

사찰은 무릉산 아래 영암사, 백월산 아래 남백사, 서쪽 두척산 뒤로 광산사가 있다.

봉수는 내포향에 있는 여포봉과 두척산 이래 성황봉 2개소가 나타나고 있다.

주요 나루터로는 밀양으로 향하는 낙동강변에 孫津이 있다.

 

주요 도로망을 살펴 보면

북측방향 도로는 굴현을 지나서 북면 온천으로 가는 길에 우측 방향으로 백월산(420M) 앞 월백리 마을을 통과해 밀양으로 향하는 나루터 孫津으로 향하는 길이 있으며, 조금 더 지나 무릉산(556M)을 끼고 좌측 방향으로 해서 칠원으로 가는 길과 우측으로 철마산(지금의 마금산 280M)을 돌아 영산으로 향하는 나루터로 향하는 길이 있다. 지금의 길에서 그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있다.

동측 방향의 길은 읍성 동문을 통과해 동읍을 지나, 진례로 넘어가는 고개인 露峴을 거쳐서 김해로 가는 길이 나타나 있다.

남측 방향의 길은 현재의 창원 중심지를 통과해서 안민고개를 넘어서 웅천으로 향하는 길이 나타나 있다.

서측 방향으로 가는 길은 대략 두척산을 경계로 내서면으로 향하는 길과 외서면(구 마산 시가지)방향으로 향하는 길로 나누어 진다.

구병영이 있는 합성동을 지나 석전동에서 길이 나누어져 회성동을 지나 중리를 거쳐 칠원으로 가는 길이 있으며, 좌측으로 꺽인 길은 내서읍을 통과해서 마산대학교 앞 신당고개(伊里峴) 넘어 함안 산인으로 가는 길이 있다.

석전동에서 아랫방향으로 나타난 길은 양덕을 지나 어시장을 통과해서 신마산을 거쳐 밤밭고개(栗峴)를 넘어 진동으로 향하는 길이 있다. 또한 중리에서 남측으로 향한 길은 감천을 지나 쌀재고개를 넘어 현동에서 합류되는 길이다.

 

창원부 내의 물길(하천)을 살펴보면

크게 읍성 정문을 중심으로 좌우 2방향에서 흘러내려 봉암만에서 합류하여 마산만으로 연결된다. 당시의 하천은 약간의 선형의 개선은 있었지만, 현재의 하천과 큰 흐름을 같이 하고 있다.

봉암갯벌에서 좌우로 창원천과 남천으로 구분되어 흐르고 있다. 좌측의 창원천은 차상사거리에서 좌측의 내동천과 합류되는 분기점이다. 지도상에서 성곽 좌측에서 발원하여 흐르는 하천이 내동천으로 볼 수 있다. 내동천의 시작점은 소계동 소계천을 기점으로 하고 있다.

창원천이 여기에서 다시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면 파티마 병원을 지나 대원교 지점에서 촤측의 하남천과 창원천 본류가 합류되는 지점으로 볼 수 있다.

하남천의 상류는 현재 도계동을 기점으로 하고 있다.

지도상 성내을 통과하는 하천은 천주산에서 시작하여 두 번째 하천으로 볼 수 있으나, 현재 인 하남천으로 판단되나, 현재 창원초등학교 옆에서 흐르는 하천은 성밖에서 좌측으로 굴절하여 내동천과 합류되는 형태이다.

이것은 신도시를 조성하면서 하천의 선형을 개선하면서 변형된 것으로 판단된다.

다시 동측부분을 하천을 살펴보면 현재의 旃檀山(현재의 정병산)을 기점으로 흐르는 하천이 현재의 창원천으로 볼 수 있다.

우측 하단의 하천은 현재 공단을 가로지르고 있는 南川이며, 바로 위의 하천은 토월천으로 판단된다. 물론 당시의 물길 선형은 도시 조성시 직선화 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지승지도에 포함된 내용을 자연지리와 인문지리로 구분하여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구분

소분류

명 칭

행정

면.리

부내면, 동면, 북면, 서면, 남면

5

자연지리

산천, 고개

두척산, 고운대, 무릉산, 천주산, 백월산, 전단산,반룡산, 장백산

두척현, 이리현, 굴현, 노현

12

島嶼, 나루터

손진

1

인문지리

읍성

아사3동, 객사, 창사, 시미당, 연정, 4대문

11

교육

향교, 서원

2

사찰

광산사, 영암사, 백월사, 봉림사

4

역원, 烽燧

자여역, 안민관,

여포봉, 성황봉

4

기타

倉舍, 船所, 古兵營, 월영대

4

 

전체 지도의 구성의 특징은 타 지도에 비해 부내 도로망을 상세히 표현하였다. 인접 군현으로 향하는 모든 길을 나타내었다. 지금의 도로망과 비교해서 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地圖地志에는 지도상에 표기 하지 못한 지역사회, 경제, 군사에 대한 정보를 담고 있다. 이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구분

소분류

세부 내용

행정

군사

호구

- 호구수 : 7,704호

- 인구 : 28,282명 (남자 11,890명, 여자 16,938명)

 

군병

- 各色軍 : 3,846명

- 京各司諸色軍 : 1,213명

- 監營屬 ; 285명

- 統營續 : 1,627명

- 右兵營屬 : 837명

- 左水營屬 : 9명 반

- 金海鎭屬 : 1,088명

- 烽軍 : 25명

= 합계 8,930명

8

기타시설

- 烽(燧) 合 13庫, 驛 4庫, 寺 4庫, 倉 2庫,

- 邑城周面 2,004尺

  5

경제

元田沓

- 6,292結11負9束,

(전2,670결80부67속, 답3,622결60부6속)

 

實結

- 4,606속62부6속

(案田1,720결80부7속, 案畓2,855결81부9속)

 

곡물

- 別餉米 : 1,104석 14두

- 元會米 : 38석 8두

- 各樣雜穀 : 1,101석 5두

- 監營米 : 44석, 잡곡 2,319석 14두

- 統營米 : 1,551석, 잡곡 2,477석 7두

- 私賑雜穀 : 3,309석 2두

- 帖價雜穀 : 601석 7두

- 備荒租 : 463석

- 浦項雜穀 : 1,791석 8두

- 華山劃付雜穀 : 3,100석

- 儲置米/저치미 : 486석 6두

- 戰舡價價 : 65석 10두

- 除留米 : 169석 5석, 太 : 1석8부

- 各樣軍作米 : 217석 1두

- 射木作米 : 27석 1두

- 作租 : 151석 2두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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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6.26 00:00

고지도로 보는 창원 13. - 창원부 조선지도

▮ 고지도로 보는 창원13. - 창원부 朝鮮地圖

 

창원부 조선지도(奎16030)/ 필사본(방안식)

 

- 지도 개요 : 본 지도는 전라도를 제외한 함경도, 평안도, 강원도, 황해도, 충청도, 경상도의 고을 순서대로 1책에서 7책으로 묶여있는 지도책이다.

목차 부분에 ‘備邊司’라는 도장이 찍혀있어, 비변사에서 보관하며 사용하던 지도였음을 알 수 있다. 지도의 제작시기는 1750년에서 1768년 사이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모든 지도는 4.2cm의 方案 위에 그려져 있다. 이 방안은 縮尺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전국 모든 고을이 동일한 축척 아래 그려져 있는 보기 드문 지도책이다.

동일한 정보는 동일한 기호로 표시하는 범례도 고을의 읍치와 감영·병영·수영,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된 찰방역, 군사시설인 鎭堡와 烽燧, 稅穀의 저장과 운반을 위한 倉庫 등의 7개 부분에서 모든 지도에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다. 일반 고을의 邑治는 붉은색의 큰 동그라미로 표시하였으며, 성곽이 있는 경우는 검은색 테두리의 원을 하나 더 그려 넣었다. 각 고을의 監營은 붉은색의 정사각형으로 표시하였으며, 성곽이 있는 경우에는 성곽 모양을 표시하였다.

兵營과 水營은 파란색 사각형으로 표시하였으며, 성곽이 있는 경우에는 파란색 테두리의 사각형을 하나 더 그려 넣었다.

종6품의 察訪이 파견된 찰방역의 경우는 붉은색의 작은 동그라미로 표시하여, 고을의 읍치와 구별할 수 있도록 하였다. 군사시설인 鎭堡는 푸른 색 마름모(다이아몬드) 모양으로 통일하였으며, 倉庫는 건물 모양으로, 烽燧는 불이 펴져 있는 봉수 모양으로 표시하였다.

 

 

 

읍치를 중심으로 16개 면(運)이 표기되어 있다. 북1,2,3운, 서1,2,3운, 동1운, 동2운 2개, 동3운, 신풍(면), 도하1,3운, 남1,2,3운으로 나뉘어져 16개면이 나타나 있다.

(조선후기에 面 명칭의 다른 표기로 運, 坊, 社 등을 사용하였다.)

중심이 되는 읍성은 읍치를 나타내는 붉은 색 동그라미로 표기되어 있으며, 북측에 주산에 해당되는 檐山이 자리하고 있다.

 

자연지리 조건을 살펴보면

북측방향으로 칠원계에 면하여 茂積山이 있으며, 아래로 철마봉과 백월산이 있다. 북면으로 넘어가는 고개길로 堀峴이 있다.

서측 방향으로 구병영성의 진산에 해당되는 청룡산이 있으려 아래로 두척산과 성황봉대가 연이어 있으며, 서2,3운에 걸쳐 匡山, 生蕫山이 이어져 있다. 생동산을 마주한 해안변에 船頭山이 있으며, 이곳에서 남측방향 진해계와 칠원계에 면하여 고개길 大峙가 있다.

동측 방향으로 진산인 첨산에 이어져 염산, 봉림산, 전단산, 불모산이 남측방향으로 이어져 있다.

섬은 합포에 猪馬島(현재 저도)로 표기되었다.

주요 건조물로 읍성 아래 盤倉, 남측 합포에 면한 곳에 海倉, 漕倉이 건물그림으로 표기되어 있다. 역원으로 자여역은 찰방이 파견된 역을 나타내는 붉은 원이 그려져 있으며, 이 외에 안민역, 근주역이 있다.

이 외에 구병영, 회원서원이 서1,2운 지역에 표기되어 있다.

주요 도로망은 남측으로 웅천으로 향하는 안민령 방향 길고, 자여역을 지나 김해부로 향하는 길, 굴현을 지나 청룡산을 넘어가는 칠원으로 향하는 길, 남서방향으로 진해로 향하는 4방향 길이 표기되어 있다..

주요 나루터로는 북측으로 낙동강 변에는 분2운 지역에 孫哥津이 있다.

봉수는 남측방향 해안변에 떨어져 잇는 내포에 여음포와 두척산 아래 성황산포 2개가 나타나 있다.

 

지도에 포함된 내용을 자연지리와 인문지리로 구분하여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구분

소분류

명 칭

행정

면.리

북1,2,3운, 서1,2,3운, 동 1,2,2,3운, 남1,2,3운, 도하1,3운, 신풍(면)

16

자연지리

산천, 고개

무적산, 철마봉, 백월산, 첨산, 염산, 청룡산, 두척산, 광산, 생동산, 선두산, 봉림산, 전단산, 불모산

대치, 굴현, 안민령

16

島嶼, 나루터

저마도, 손가진

2

인문지리

읍성

읍치

1

교육

회원서원

1

사찰

-

-

역원, 烽燧

자여, 안민역, 근주역,

여음봉, 성황산봉

5

기타

盤倉, 海倉, 漕倉, 古兵營

4

 

전체 지도의 구성이 매우 간결하다.

먼저 수계를 나타내는 형식으로 물길과 해안은 청색으로, 산세는 산형으로 방향성만 묘사하고 청색을 채색하여 산세의 흐름을 나타내었으며, 외방에 면하는 주요 간선도로는 적색으로 표기하였다.

몇가지 범레, 읍치는 큰 붉은원, 찰방파견 역원은 작은 붉은 호를 사용하였으며, 각종 창고는 집그림으로 묘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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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5.29 00:00

고지도로 보는 창원9. - 창원부 輿地圖

▮ 고지도로 보는 창원9. - 창원부 여지도(輿地圖)

 

昌原府 輿地圖(古14709-68)輿地圖》(古4709-68)/ 필사본(회화식)

여지도는 총 6책으로 구성된 전국 군현지도책으로 제1책에 遼薊關防地圖와 盛京輿地全圖, 제6책에 朝鮮女眞兩國國界圖가 첨가되어 있다. 지도는 364장, 주기는 341장으로 총 705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본 지도가 《해동지도》를 필사한 것이지만 동일하게 필사되지는 않았다.

전체 지도의 구성은 해동지도처럼 산계 및 수계를 구성하고 읍성을 중심으로 주변의 건물을 묘사하였다. 읍성을 중심에 크게 표현하고 내부의 관아의 배치를 묘사한 것이 특징이다. 해동지도와 달리 읍성에서 면이나 인접 군으로 향하는 도로의 표기는 생략하였다.

 

창원읍성(도계동 일대)을 중심으로 주변을 표기하였다.

읍성내에 5개의 건물이 있다. 중앙에 사미정, 객사와 아(관아), 그리고 동문, 서문, 남문, 북문이 배치되어 있다.

읍성을 중심으로 읍성 아래측에 부내면, 동면, 서면, 남면, 북면 5개의 행정구역이 표기되어 있다.

읍성의 배치는 북면쪽의 무릉산과 백월산, 천주산을 끼고 있으며 서측에는 두척산, 동측에는 전단산이 남측에는 반룡산이, 동남측에는 장백산이 자리 잡고 있다.

주요 도로는 표기되어 있지 않으며, 수계는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밀양계에 면한 주문연진과 손진이 표기되어 있다.

읍성 밖에 있는 건물로 전단산 인근에 의림사와 자여역이 있으며, 아래에 성주사, 백월산 아래 남백사, 합성동 구병영 자리에 향교가 서원곡 입구에 서원, 해안가에 창과, 선소, 월영대가, 두척현 뒤에 광산사가 표기되어 있다.

통신시설에 해당하는 봉수는 두척산 아래 성황봉과 저도 서측에 한곳이 표기되어 있다.

그리고 구산면 내포리 일대가 내포향으로 표기되어 있다.

 

 지도에 포함된 내용을 자연지리와 인문지리로 구분하여 정리하면 다음 표와 같다.

구분

소분류

명 칭

행정

면.리

부내면, 동며, 서면, 남면, 북면

5

자연지리

산천

무릉산, 반룡산, 백월산, 旃檀山, 長白山, 天柱山,

6

저도

1

고개

두척현, 이리현

2

나루터

孫津, 主勿淵津

2

인문지리

읍성

연당, 사미정, 객사, 아, 동문, 선문, 남문, 북문

8

교육

향교, 서원

2

사찰

광산사, 남백사, 봉림사, 성주사

4

역원 등

자여역, 성황당봉대, 여포봉대, 선소, 창

5

고적

구병영, 월영대,

2

 

 해동지도나 비변사지도에 비해 수록된 내용이 적은 편이다.

 

창원부 여지도 地志

- 地志는 지도 여백에 적어놓은 군현의 인문지리에 관한 내용으로 정리하면 다음의 표와 같다.

 

구분

소분류

세부 내용

행정

군사

호구

- 호구수 : 7,995호

- 인구 : 30,702명

 

군병

- 京各司諸色軍 : 1,352명

- 各營鎭浦分防諸色 : 1,555명

- 束伍雜色軍 : 930명,

- 烽軍 : 25명

4

기타시설

- 城郭存 : 倉2庫,

 1

경제

量付

- 6,293結11負9束,

(전3,670결11부3속, 답3,622결60부6속)

 

還上各穀

- 21,829석 14두

 

곡물

- 元會 및 常賑米 : 439석 7두

皮雜穀 : 1,122석 11두

- 巡營米 : 15석 10두

피잡곡 : 19,070석

- 統營米 : 397석 9두

피잡곡 : 884석

 

해동지도 지지와 비교했을 때 호구수는 7,368호에 비해 약 600호가 늘어난 7,995호로 증가되었으며, 인구도 3천명 정도가 증가됨을 나타내고 있다.

군병 및 곡물 관련 내용은 축소되었으며, 전반적으로 소략하게 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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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2.08 00:00

마산창원 역사 읽기 (29) -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4. 유적으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

4-4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푸른 및 드리운 바위 앞에 문 두드리는 소리, / 날 저문데 그 누가 구름 속 길을 찾느뇨.남암(南庵)이 가까우니 그곳으로 가시지, / 내 앞의 푸른 이끼 밟아 더럽히지 마오.

산골에 해 저무니 어디로 가리, / 남창(南窓) 빈자리에 머물고 가오. / 깊은 밤 백팔염주 세고 있으니, / 길손이 시끄러워 잠 못 들까 두려워라.

 

『삼국유사』권 탑상(塔像)편에는 백월산의 두 성인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의 수도와 성불 과정을 상세히 전하고 있다.

위의 찬문(贊文) 가운데 앞의 것은 백월산 북암(北庵)에서 수도했던 달달박박을, 뒤의 것은 남암(南庵)의 노힐부득을 찬한 것이다.

어두운 밤 백월산 깊은 골짜기를 찾아온 낭자-여인으로 현신한 관음보살-를 맞이하는 두 사람의 태도가 사뭇 대조적이다.

달달박박은 자신의 청정한 자세를 흐트리지 않기 위해 낭자를 한 발자국도 용납하지 않는다.

면 노힐부득은 오갈 곳 없는 낭자를 위해 잠자리를 내주면서 오히려 잠 못들까 걱정까지 하고 있다.

누가 더 진솔한 모습일까?

이 설화는 이러한 대비를 통해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려는 것인가?

<백월산 정상부 전경>

 

-백월산의 전설-

창원시 북면과 동읍 사이에 백월산(白月山)이라 부르는 명산이 자리잡고 있다.

이 산 동쪽으로는 대산평야, 서쪽으로는 북면평야가 펼쳐져 있고, 동쪽 기슭에는 겨울철새 도래지로 유명한 주남저수지가 자리잡고 있다.

해발 400여 미터에 지나지 않는 나지막한 산이지만 산세가 사방 1백여리에 뻗치며, 특히 봉우리가 빼어나 옛부터 명산으로 꼽혀왔다.

『삼국유사』에서도 백월산에 대해 ‘산봉우리가 기이하고 빼어나며 자리잡은 넓이가 수백 리에 뻗쳐서 참으로 큰 진산이라할 만하다’고 하여 찬탄해 마지 않는다.

백월산의 유래는 매우 전설적이다.

옛날 당나라 황제가 일찍이 못을 하나팠는데, 매월 보름 전에 달빛이 밝으면 못 가운데 사자처럼 생긴 바위가 있는 산 그림자가 은은히 화초 사이로 비치면서 나타났다고 한다.

황제가 화공을 시켜 그 모양을 그린 다음 사신을 보내어 온 천하를 돌아다니면서 이 바위를 찾게 하였다.

그 사신은 우리 나라에 와서 백월산에 큰 사자바위가 있는 것을 보게 되었고, 산 서남쪽 2보쯤 되는 곳에 화산(花山)이라 부르는 삼산(三山)이 있는 것을 알게 되었다.

삼산이라 한 것은 몸체는 하나이고 봉우리가 셋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고 한다.

사신은 이 산이 그림과 비슷하다 여겼으나, 진짜인지 아닌지 알 수 없어 신발 한 짝을 사자바위 꼭대기에 걸어두고 돌아와서 황제에게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그 때 신발의 그림자 역시 못에 비쳐 나타나자, 황제가 이를 이상히 여겨 산 이름을 백월산이라 지어주었더니 그 후 못에 그 산의 그림자가 없어졌다고 한다.

백월산이라 한 것은 보름 전인데도 달빛이 환하게 밝았기 때문에 이렇게 이름 붙인 것이다.

<백월산 북사 삼층석탑>

 

-수도의 길에 나선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은 백월산 동남쪽 3천 보쯤에 자리잡고 있는 선천촌(仙川村)에서 태어나 함께 살았다. 두 사람의 이름은 모두 우리말로 지은 것이다.

노힐부득의 아버지는 월장(月藏), 어머니는 미승(味勝)이었으며, 달달박박의 아버지는수범(修梵), 어머니는범마(梵摩)라 하였다.

두 사람은 20세 때 마을 동북쪽의 고개 밖에 있는 법적방(法積房)에서 함께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었다.

 얼마 후 이들은 다시 서남쪽의 치산촌 법종곡(法宗谷) 승도촌(僧道村)으로 옮겨, 노힐부득은 대불전(大佛田)의 회진암(懷眞庵)에, 달달박박은 소불전(小佛田)의 유리광사(琉璃光寺)에 각각 자리잡았다.

이때까지만 해도 모두 처자를 데리고 농사지으면서 수도하였고, 아직 속세를 떠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어느 날 신세의 무상함을 느껴 다음과 같이 서로 말했다.

기름진 땅과 풍년 든 해가 참으로 좋지만, 의식이 생각하는 대로 생기고 절로 배부르고 따뜻함을 얻는 것만 못하고, 부녀와 가옥이 참으로 좋지만, 연화장(蓮花藏)에서 여러 부처님들과 함께 놀고 앵무새, 공작새와 서로 즐기는 것만 못하네.

더군다나 불도를 배우면 마땅히 부처가 돼야 하고 진심을 닦으면 반드시 진리를 얻어야 함에 있어서랴. 지금 우리들은 이미 머리를 깎고 중이 되었으니, 마땅히 몸에 얽매인 것을 벗어버리고 더할 나위 없는 도를 이루어야지, 어찌 풍진(風塵)에 골몰하여 세속의 속된 무리들과 다름이 없어서야 되겠는가?

 

렇게 다짐한 두 사람은 마침내 세속을 등지고 백월산 깊은 산골 무등곡(無等谷)으로 들어갔다.

노힐부득은 남쪽 암자에서 미륵불을 염원하였고, 달달박박은 북쪽 암자에 자리잡아 아미타불을 경건히 염송(念誦)하였다.

 

-부처가 된 두 사람-

두 사람의 행로는 수도한지 3년쯤 되었을 때 갈리기 시작하였다. 신라 성덕왕 8년(709) 48일 밤 그들이 수도하고 있던 깊은 산골에 아리따운 낭자가 찾아오면서부터였다.

낭자는 먼저 달달박박이 수도하고 있던 북암(北庵)을 찾아, 다음과 같은 글을 주면서 하룻밤 재워 주기를 청했다.

 

날저문산속에서갈길이아득하고          行逢日落千山暮

길없고인가머니어찌하리요                路隔城遙絶四隣

오늘밤은이곳에서자려하오니             今日欲投庵下宿

자비하신스님은노하지마오                慈悲和尙莫生嗔

 

달달박박은 낭자의 말을 듣고 단호히 거절하면서 문을 닫고 들어가 버렸다. 암자는 깨끗해야 하니, 여자가 가까이 할 곳이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낭자는 어쩔 수 없이 노힐부득이 수도하고 있는 남암으로 가서 잠재워 주기를 청했다.

낭자는 야밤에 깊은 산골에 온 것을 미심쩍어 하는 노힐부득에게 “어진 선비의 지원(志願)이 깊고 덕행이 높단 말을 듣고 보리(菩提)를 도와 이루어 드리려 할 뿐입니다”라고 하면서 넌지시 자신이 이곳에 온 까닭을 암시하고게송(偈頌) 한수를 지어 바쳤다.

 

첩첩산중에날은저문데                                     日暮千山路

가도가도인가는보이지않소                               行行絶四隣

송죽(松竹)의그늘은한층그윽하고                       竹松陰轉邃

냇물소리는한결더욱새롭소                               溪洞響猶新

길을잃어찾아왔다마오                                     乞宿非迷路

요체(要諦)를지시하려하오                                尊師欲指津

부디이내청만들어주시고                                  願惟從我請

길손이누구인지는묻지마오                               且莫問何人

 

노힐부득은 이 말을 듣고, “이곳은 부녀와 함께 있을 데가 아니지만, 중생의 뜻에 따르는 것도 보살행(菩薩行)의 하나입니다”라고 하면서 낭자를 암자 안으로 맞아들였다.

밤이 깊어가자 노힐부득은 마음을 맑게 하고 지조를 가다듬으면서 쉬지않고 염불하였다.

그런데 밤이 이슥해지자 해괴한 일이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멀쩡했던 낭자가 산기(産氣)가 있다고 하면서 노힐부득에게 출산 준비를 부탁하고, 아이를 낳자 목욕시켜 달라는가 하면, 그에게 들어와서 목욕도 함께 하자는 것이었다.

승려인 노힐부득으로서는 어느 것 하나도 감당키 어려운 일이었다.

러나 그는 낭자의 처지가 가엾고 불쌍하여 출산을 돕고, 물을 끓여 정성껏 목욕까지 시켜 주었다.

낭자가 목욕통 속에 들어가자 물에서 향기가 강렬하게 풍기더니 그 물이 금빛 물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낭자의 권유에 따라 함께 목욕한 노힐부득의 살결도 금빛으로 변했다. 어디서 온 것인지 옆에는 연화대(蓮花臺)도 놓여 있었다.

낭자는 그에게 거기 앉기를 권하면서, “나는 관음보살인데 이곳에 와서 대사를 도와 대보리(大菩提)를 이루어준 것입니다”라고 말하고는 사라져 버렸다.

이렇게 노힐부득은 낭자의 도움으로 성불하게된 것이다.

이튿날 아침 달달박박은 남쪽 암자를 찾았다. 노힐부득이 지난 밤에 계(戒)를 더렵혔을 것으로 생각하고 비웃어주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노힐부득은 연화대에 앉아 미륵존상이 되어 광채를 내뿜고 있었으며, 몸은 금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달달박박은 그제서야 깨달았다. 그는 자신이 마음에 장애가 너무 겹쳐서 부처님을 만나고서도 알지 못했음을 탄식하면서 노힐부득에게 자신도 성불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부탁하였다.

이미 성불한 노힐부득은 목욕통에 아직 남아 있는 금물로 목욕할 것을 권했다. 그래서 달달박박도 무량수불(無量壽佛 아미타불)이 될 수 있었다.

목욕물이 모자랐던지 아미타불은 얼룩진 반점이 남아 있었다.

 

-백월산 남사의 창건-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이 각각 미륵불과 아미타불로 성불했다는 소식은 곧 가까운 곳에서부터 전파되기 시작하였다.

백월산 아래 마을 사람들은 이 소식을 듣고 다투어 와서 우러러보고 감탄하여 마지 않았다.

마침내는 서울에까지 알려져 왕실에서도 관심을 갖기 시작하였다. 경덕왕은 왕 14년(755)에 이 이야기를 듣고, 2년 뒤인 16년(757) 이곳에 사신을 보내어 대가람(大伽藍)을 조성케 하였다.

이 절은 이로부터 7년 뒤 경덕왕 23년(764) 715일에 완성되어 ‘백월산 남사(白月山南寺)’라 이름지었다.

사찰의 완공과 함께 다시 미륵존상(彌勒尊像)을 만들어 금당에 모시고, 액호(額號)를 ‘현신성도미륵지전(現身成道彌勒之殿)’이라 했다.

또 강당에는 아미타불상을 만들어 모시고, 그 액호는 ‘현신성도무량수전(現身成道無量壽殿)’이라 했다.

이렇게 조성된 이 대가람의 전각과 불상은 현재 자취를 찾을 수 없고 절터만 남아 있다.

창원시 북면 백월산 계곡에 들어서면 대나무숲이 우거진 곳에 절터로 보이는 흔적이 드러난다. 이곳에는 옛 기와와 토기조각이 이곳저곳 널려 있어 절터임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 부근에 ‘반야동(般若洞)’, ‘사리터’, ‘중산골’등 불교와 관련된 지명이 다수 있는 것으로 보아도 유명한 절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곳에서 200여 미터 떨어진 곳에 백운암(白雲庵)이 있는데, 이 암자에 있는 석등은 본래 남사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이라 전하고 있다.

또한 이 절터에서‘남사(南寺)’라는 명문이 박힌 기와 조각을 발견했다고 전하는 것으로 보아 이곳이 그 절터였음이 분명하다.

<백월산 남백사지에서 출토된 '南寺’라는 명문이 새겨진 기와 조각  >

 

『삼국유사』가 전하고 있는 백월산, 노힐부득과 달달박박, 남사의 창건 설화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 크다.

백월산을 당나라 황제와 연관시킨 것은 이 지역이 갖는 국제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노힐부득과 달달박박은 농사짓고 살아가는 평범한 지역 주민이었다는 점에서 당시 신앙층이 매우 넓게 확산되었음을 말해주는 것이기도 하다.

또한 초기에는 처자를 거느리고 있었다는 점에서 출가와 승려 문제를 다시 생각해보게 한다.

관음보살이 지닌 여성성을 여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으며, 그녀의 안내에 따라 미륵불과 아미타불로 성불하고 있다는 점, 미륵불은 전신이 금빛으로 남사의 금당에 봉안되었고 아미타불은 얼룩진 반점이 있는 데다 강당에 봉안 되었다는 점도 눈여겨 보아야 할 부분이다.

이는 당시 신앙형태가 관음·미륵·미타신앙 등 여러 신앙이 혼재되어 있기는 하였지만, 시기나 지역에 따라서 조금씩 차별화 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오늘날 창원을 비롯한 신라 남부지역의 불교신앙은 관음신앙과 미륵신앙이 우세한 가운데 미타신앙은 그보다는 부차적이었음을 시사하는 것이 아닐까.<<<

 

김광철 / 동아대학교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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