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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1.07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3) - 강점제1시기

<1910년 말 신마산 벚나무>

일본인들이 신마산에 벚나무를 심은 것이 한일병합 직전이니 여기 나오는 벚나무는 심은지 약 10년 쯤 지난 사진입니다.

이것들이 아직 남아있었다면,,, 하는 아쉬움이 없지 않습니다.

창원천변 벚나무입니다.



지금은 월영동 아파트 단지로 변한 육군중포병대대 벚나무입니다.




신마산의 창원천변 야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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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28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7) - 개항이후

<행정구역 명칭이 바뀌다 - 정명변경(町名變更)>


일제는 그들의 편의에 따라 도시지역의 행정구역 최소단위를 ‘정(町, 마찌)’이라는 일본식 명칭으로 바꾸었습니다.

그 과정에서 마산창(馬山倉) 설치 후 생겼던 마산포의 6개리도 명칭이 바뀌었습니다.
이 글은 마산의 행정구역 명칭이 바뀌는 과정과 결과에 대한 내용입니다.


조선총독부를 개청한 1910년 10월 1일 하루 전날인 9월 30일, 일제는 식민지 통치를 위한 과도기적 지방통치기구를 확립하였는데 거기에 동리명의 변경에 관한 지침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변경방법은 그 때까지 사용되던 행정구역의 최소단위인 ‘동’과 ‘리’의 명칭을 일본식이나 한국식 중 어느 것이나 택하라는 식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일본인이 행정책임자가 되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온통 일본 세상이었던 때라 종래의 한식(韓式) 동리명이 채택되는 일은 찾기 어려웠습니다.

그런데 이런 조치가 있기 전부터 일본식 지명이 사용되고 있는 곳이 있었습니다.
개항기에 설치된 일본전관거류지와 각국조계가 설치되었던 곳, 그리고 통감부 치하에서 일본거류민단이 설치된 지역을 두고하는 말입니다.
그곳에는 종래의 한국식 동리명과 병행하여 본정(本町, 혼마찌)이니 경정(京町, 쿄마찌)이니 하는 일본식 동리명이 이미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마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지난 1월 3일자 포스팅에서 소개한 1907년 간행된 「馬山全圖*」를 보면 이런 사실을 잘 알 수 있습니다. 신마산(조계지)에서는 이미 일본식 지명이 사용되었던 겁니다.
2011/01/0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9) - 개항이후
 
그러나 그 때 사용했던 신마산 지명은 공식적인 명칭이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일제기 마산에 살았던 일본지식인 추방사랑의『마산항지』에 의하면,
1908년 4월 23일 거류지회 회두인 삼증(三增) 이사관(지금의 시장 역할)이 궁천(宮川)경찰서장, 동조원태랑(東條源太郞)우편국장, 전전(前田)민장을 비롯한 거류지회 유지들과 신마산 조계지 내의 행정구역 명칭에 대해 협의했다고 합니다.

그 협의에서 본정(本町, 월남동)․경정(京町, 두월동)․빈정(濱町, 창포동)․서정(曙町, 청계동)․대정(臺町, 대내동)․파정(巴町, 대외동)․녹정(綠町, 유록동)․영정(榮町, 홍문동)․유정(柳町, 신창동)․욱정(旭町, 평화동)․앵정(櫻町, 문화동)이라는 일본식 이름으로 정리 확정하였습니다.

그 중 간선도로를 끼고 있던 본정과 경정과 빈정은 각각 정목(丁目, 죠메)을 두었습니다. 본정은 1-5정목, 경정과 빈정은 1-3정목까지였습니다.

정목(丁目)은 지금 우리가 사용하는 가(街)를 뜻하는 말로 ‘본정1정목’은 지금의 ‘월남동1가’입니다.

다음 그림은 정명 결정 후 몇년이 지난 1916년 신마산지도에 표기된 지명들입니다.
원형 내의 마산신사는 지금의 제일여고 자리입니다.


마산포(원마산) 쪽의 지명도 아래처럼 바뀌었습니다.
남성동파출소 위 쪽의 정() 지금의 창동입니다.



이사관(지금의 시장 역할)이 나서서 한 일이라 이 때 결정한 정명(町名)은 결정 후 곧바로 실행되었습니다.
거류민단에서 각 정 및 정목의 경계에 나무패를 박아 표시하고, 어린 벚나무 5천 그루를 구입하여 각 가로에 4칸(7.2m) 간격으로 심었습니다.

이처럼 마산의 조계지(신마산)에는 1910년 조선총독부가 전국행정구역명칭을 변경하기 훨씬 전부터 자기들 임의로 지명을 지어 부르다가, 1908년 이사관의 주도로 확정하여 뒷날 총독부가 시행한 정명변경(町名變更) 때는 바꿀 필요도 없이 그대로 사용하였습니다.

『마산항지』에 의하면 이러한 신마산 조계지의 정명변경에 뒤이어 1909년 원마산(마산포)의 6개리 명칭도 바뀌었습니다.

같은 시기에 조계지 인근 지역도 선정(扇町, 반월동)․고정(高町, 대창동)․영정(英町, 화영동) 및 금정(錦町, 해운동)이라는 명칭으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정(町)의 경계를 결정하는 구획방법은 신마산과 원마산이 완전히 달랐습니다.
신마산은 길을 중심에 두고 지역을 구획한 반면, 원마산은 길을 경계로 해서 지역을 나누었습니다.

특별한 의도가 있어 보이지는 않습니다.
길을 중심으로 지역을 구획할 때는 반드시 가로가 일정한 규격과 형태로 정돈되어 있어야하는데 꾸불꾸불하고 좁은 골목길뿐이었던 원마산은 도로를 중심으로 구획할 수 없었기 때문에 내린 부득이한 조치였던 것 같습니다.

이렇게 시행된 조선 전국의 행정구역명칭변경 결과를 1917년 일본인  ‘월지유칠(越智唯七)’이  『신구대조 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新舊對照 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이라는 책으로 엮었습니다.




다음 표는
『신구대조 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新舊對照 朝鮮全道府郡面里洞名稱一覽)』에서 발췌한 마산의 정명변경 이전과 이후 명칭비교입니다.<<<


변경 전 명칭

변경 후 명칭, ( )내는 현재 동명

月影里 一部

錦町(해운동), 英町(화영동), 高町(대창동), 월영리

新月里 一部

신월리,
扇町(반월동), 弓町1․2丁目(대성동1․2가)
通町1․2丁目(장군동1․2가),湊町(월포동)
都町1․2丁目(중앙동1․2가), 仲町(신흥동)

玩月里 一部

通町3․4․5丁目(장군동3․4․5가),都町3丁目(중앙동3가)

玆山里

玆山里

西城里, 城湖里, 城山里 各 一部

新町(추산동), 幸町(서성동)

西城里 一部

富町(부림동), 壽町(수성동)

東城里, 西城里, 中城里 各 一部

元町(남성동)

城湖里, 中城里 各 一部

石町(창동)

東城里, 城山里 各 一部

俵町(중성동)

東城里, 中城里, 午山里 各 一部

萬町(동성동)

東城里, 午山里, 上南里 各 一部

午東里

上南里 一部

上南里

城湖里 一部

城湖里

校坊洞, 檜原洞 各 一部

校原里

新月里, 玩月里 各 一部

玩月里


‘通町’은 원래 구마산 역(지금의 육호광장)까지 지역을 길게 할애하여 ‘長町’이라 부르고 11町目으로 나누었다가 나중에 尺山橋(자산동 경남데파트 앞)까지 단축하여 ‘通町’으로 고쳤습니다.


현재 우리
가 사용하는 동(洞)의 명칭은 해방 후 우리 식으로 바꾼 것이지만 토지의 지번과 동(洞)의 경계는 100여 전 일본인이 만든 지번과 정(町) 경계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나라 도처에 남아있는 식민지 시대 흔적 중 하나입니다.<<<





2010/10/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6) - 개항이후
2010/10/1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7) - 개항이후
2010/10/1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8) - 개항이후
2010/10/2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9) - 개항이후
2010/11/0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0) - 개항이후
2010/11/0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1) - 개항이후
2010/11/1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2) - 개항이후
2010/11/2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3) - 개항이후
2010/11/2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4) - 개항이후
2010/12/0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5) - 개항이후
2010/12/1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6) - 개항이후
2010/12/2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7) - 개항이후
2010/12/2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8) - 개항이후
2011/01/0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9) - 개항이후
2011/01/1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0)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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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2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2) - 개항이후
2011/01/3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3) - 개항이후
2011/02/0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4) - 개항이후
2011/02/1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5) - 개항이후
2011/02/2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6)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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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06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5) - 개항이후


<마산에 들어온 일본군대>

일본 신사(神社)가 우리 민족을 정신적으로 위압했다면, 물리력으로 우리를 억누른 것은 일본의 군대와 경찰이었습니다.

일본군대의 마산진출은 1905년 마산선 철도가 건설될 때 쯤 시작되었습니다.
하지만 본격적인 진출은 1909년 7월 일본육군의 중포병대대(重砲兵大隊)가 진해에서 마산 월영동(현 월영동아파트단지)로 이전한 것과 같은 해 12월 대구헌병분유소(大邱憲兵分遺所)을 신마산에 설립한 일입니다.
이 글은 월영동에 주둔했던 「육군중포병대대」에 대한 내용입니다.

러시아와의 각축기에 일제는 율구미와 자복포 일대(현, 월영동 아파트 단지 및 구 한국철강 부근 일대)를 그들의 전관거류지로 확정했다가 1905년 러일전쟁이 끝나고 을사조약이 체결될 즈음 이 지역은 군용지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다가 1908년부터 본격적인 병영 건설에 착수하여 1909년 7월 완공, ‘진해만 요새사령부’와 ‘진해만 중포병대대’가 이곳으로 옮겨왔습니다.
그후 1913년 '진해만 요새사령부'는 진해 좌천리로 이전해 가고 중포병대대는 해방 때까지 이곳에 주둔합니다.

아래 사진이 당시의 중포병대대 전경입니다.
첫째 사진은 앞면, 둘째는 뒷면, 셋째는 정문입니다.

두번 째 사진의 산은 지금의 해운동 주공아파트단지이고 산 왼쪽에 일렬로 선 건물은 군용관사인데 관사 앞 길이 지금의 월영동 아파트단지 입구 도로입니다.

 




저 사진 속에 보이는 벚나무들이 잘 자라 현재의 월영아파트단지를 조성할 무렵에는 둥치가 아름드리였고 꽃도 그렇게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남아 있었다면 장관일텐데,,,,
기계톱에 잘려나간 고목들을 생각하니 가슴이 아픕니다.

현재 사진입니다.
뒤에서 찍었습니다.



다음 그림은 중포병대대가 들어오기전인 1899년의 이 지역 지도와 들어온 후인 1910년대에 제작된 1/20,000 지도를 비교입니다.
구 한국철강 부지의 일부가 그 당시 이미 일부 매립되어 군용지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916에 일본 조선총독부가 제작한 1/10,000 지도에 표시된 같은 위치의 지도와 현재의 위성사진입니다.
붉은 점이 동일한 위치인데 자세히 보면 당시의 해안선 따라 도로가 나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군대 주둔은 식민지 무단통치수단이었던 터라 월영동에 똬리를 튼 중포병대대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1919년 3월 독립운동 때 이 부대는 마산인근의 만세시위현장 곳곳에 투입해 시위 군중을 진압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가 3월 19일 함안군 함안읍 장날 의거, 3월 20일 함안군 군북면 의거, 3월 28일 마산의 진동 고현시장 의거 등입니다.

마산중포병대대병들의 훈련 장면입니다.


 

해방 후에도 이곳은 군사용지로 이용되었습니다.
해방 2개월 후인 1945년 10월 8일, 미 40사단 산하 2개 대대병력이 이곳에 들어와 일본군의 무장을 해제시키고 주둔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군정 말기인 1948년 5월 20일 조선경비대 제15연대가 이곳에서 창설되었고 5월 30일에는 제1차 모병이 여기서 있었습니다.

당시 모병을 위한 마산지역의 실력자 간담회가 열렸는데, 장소는 일본인이 운영했던 요정 ‘망월루’였고 15연대장, 미군사고문, 경찰서장, 부윤(지금의 시장)대리, 마산지역의 각 청년단장 등이 참석하였다고 합니다.

15연대의 주요임무 중 하나가 ‘폭동진압’이었습니다.
1948년 10월에 발발한 여순사건 진압에 출동하여 열다섯 명이 전사했으며 1949년 4월 거제민중봉기에도 투입되었습니다.

일본군과 미군을 거친 이곳은 한국전쟁 중 대한민국 국군의 의무부대로 변신합니다.
그 시작은 1950년 12월 수도육군병원이 서울에서 옮겨오면서 부터였지만 본격적인 변신은1952년 9월 27일 부산 동래에서 육군군의학교가 이곳에 옮겨오면서 부터였습니다.

육군군의학교는 11월에 완월초등학교, 다음 해인 1953년 5월에 마산중학교를 인수하여 3천명 규모의 본격적인 의무교육을 시작하여 1963년까지 11년간 총 84,969명의 의무관련 교육수료자(군의관, 간호장교, 위생병)를 배출하였습니다.
육군병원과 공군병원 마산분원 등 많은 군 관련 병원들도 이곳을 거쳐 갔습니다.

지금은 조용한 아파트 단지로 변했지만,
수도육군병원(1950년, 1952년부터 1963년까지는 육군군의학교도 함께 운영)→36육군병원(1953년, 1954년 육군의무기지사령부가 이곳에서 창설되어 9년간 활동)→26육군병원(1968년)→국군마산통합병원(1971년)→국군마산병원(1984년)을 거쳐 1993년 진전면 임곡리로 이 병원이 이전되기까지 이 터는 우리나라 국군의무사에 큰 족적을 남겼습니다.

아파트 단지 한쪽에 국군의무병과요람지지(國軍醫務兵科搖籃之址)라고 새겨진 국군의무사 기념비석이 남아 있습니다. 수치스러워 그랬는지 식민지 시대의 역사는 적어 놓지 않았습니다.

기념하는 글 마지막 부분에는
“지금은 붉은 벽돌로 지어진 옛 병영물은 보이지 않지만 국군의무부대의 역사가 서려있는 이곳이 온 국민의 가슴 속에 오래토록 기억되기를 바랍니다”
라고 적혀 있습니다.
 


100년 전 일본군 중포병대대로 시작된 월영동 아파트단지 터,,,,
해방 후에는 미군이 점령했고 정부수립 뒤에는 국군병원을 거쳐 지금은 아파트단지로 변했습니다.

기구했던 자신의 궤적을 아는지 모르는지,,,,
일본중포병대대가 판 연못과 그들이 심은 듯한 고목 몇 그루, 그리고 이 땅이 군용지였음을 보여주는 표지석만 남아 저 터의 역사를 말하고 있습니다.


                                              표지석 손의 주인은 경남대 유장근 교수입니다.<<<



2010/10/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6)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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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팬저 2010.12.21 22:54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잘보았습니다. 마산중포병대대병들의 훈련 장면에 나오는 포의 경우 280미리 유탄포로 러일전쟁 당시 뤼순항 전투에서 유력을 발휘하여 일본이 승리하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는 포입니다. 280미리 유탄포는 1884년 이탈리아 군사고문의 의견을 듣고 개발을 시작하여 1887년에 제식화가 된 화포라고 하는데 주로 해안포로 사용되었는데 1940년 이후까지 사용했던 것으로 나와 있습니다. 1920년대가 접어들면서 280미리 유탄포의 경우 구식이라 천대를 받게 됩니다.

    이 유탄포의 경우 진해로 들어오는 길목인 가덕도 외양포에도 설치되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 이놈을 마산에도 설치했다고 하니 놀라운데요. 외해가 아닌 내해에 설치를 했다고 하니까요?

    러일전쟁 직후 유탄포를 설치했을 것이기 때문에 적어도 1904년 이후 마산에 부대가 설치된 후 사진을 찍었다고 보았을때 1910~12년 사이로 보입니다.

  2. 팬저 2010.12.21 22:57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모형으로는 보았는데 중포병대의 모습의 사진은 처음봅니다. 마산중포병대대의 포기지의 경우 사방으로 높게 쌓은 흙이 보이는데 저런 방식의 경우 가덕도 외양포에도 있더군요. 방식이 비슷한 것으로 보입니다.

    외양포뿐만 아니라 부산에도 포부대가 있었다고 하는데 똑 같은 280미리 유탄포이고 조선뿐 아니라 일본 전역에도 이런식으로 포부대를 건설했다고 합니다.

    일본의 훗가이도 하코다테에도 280미리 유탄포를 설치하였는데 포기지가 외양포와 같네요.

    일본이 요새를 건설한 것을 보면 1차대전후 도쿄만, 대마도, 이키, 진해만이고
    2차대전시 도쿄만, 시모노세키, 유라, 마이즈루, 츠가루, 사세보, 나가사키, 진해만, 대마도, 이키, 풍예, 뤼순, 대련, 료고 만, 나진, 모토타카, 법호도, 고웅, 아미미오시마, 치치지마 인데 1, 2차 대전 모두 진해만이 포함됩니다. 얼마나 일본이 진해만을 공들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 허정도 2010.12.22 00:22 신고 address edit & del

      반갑습니다.
      저는 군사문제에 대해 문외한이라 드릴 말씀은 없습니다만 팬저님의 박식함에 대해서는 혀가 내둘러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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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영화, 만화, 잡지 초등학교 6학년 때 단체로 시민극장에 ‘성웅 이순신’을 보러 갔다가 실망했던 기억이 있다. 활동사진이 아니고 정지된 그림(슬라이드)이었기 때문이다. 중1때 문화동 쯤에 있었던 제일극장에서 본 애정(哀..

공간의 재탄생 - 재생 건축 intro.

세 달 가까이 이어져 왔던 '건축의 외형' 에 이어, 세월의 흐름에 따라 방치되고 버림받게 된 건축에 새 삶을 불어넣는 '재생 건축' (regenerative architecture) 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이어 나가볼까 합니..

기억을 찾아가다 - 18

18. 바냇들, 부림시장 정전 다음해 진학한 마산서중(전쟁 중인 1951년 9월 1일 6년제 마산공립중학교가 3년제 마산고와 마산서중으로 분리되었다. 마산서중이 현재의 마산중학교로 교명을 변경한 것은 1955년 5월 7일이었다..

기억을 찾아가다 - 17

17. 공놀이, 헌병사령부 축구팀 우리 어릴 때 겨울 빈 밭에서 새끼로 동여맨 짚 뭉치를 차고 놀던 기억이 있고, 간혹 있은 잔칫집에서 나온 돼지 오줌보에 물을 넣어 차고 놀던 일도 어렴풋이 기억의 한 자락에 남아 있다. 형들..

기억을 찾아가다 - 16

16. 광복절 행사와 우리들의 영웅 초등학교 때도 광복절 기념 체육대회가 있었지만 참여 정도가 미미해서 별로 기억나는 것이 없다. 중학생이 되어 응원군으로 참여하면서 운동경기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러면서 선수들의 면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