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2018.01.29 00:00

기억을 찾아가다 - 15

15. 정전 후의 체험들 - 공군 요양소

 

우리 동네 대여섯 채의 적산가옥(일본인들이 살던 집)들은 다 불하되어, 동네 사람들이 들어갔지만, '봉선각'은 그 얼안이 커서(500평은 되었을 듯) 동네 사람들은 엄두를 못 내었던 듯 한동안 비어 있었다.

<봉선각 / 1930년대 촬영>

 

그러다 시내의 누군가가 임대하여 영업을 했던지 한때 장구소리를 듣기도 했었는데, 시국이 시끄러워지고 팔룡산 꼭대기에 봉홧불이 오르고, 곧이어 전쟁이 나고 하면서 봉선각은 폐가로 되어갔고, 우리들도 거기 가길 꺼려했었다.

그래선지 내 어렸을 때 거기에 얼킨 이상한 얘기들 밤 되면 말 달리는 소리도 들리고, 여자 울음소리도 들린다는 투의 괴담들 을 많이 들었다.

그러다가 그곳이 부활한 건 공군 병원이 들어오면서다. 정전 직후부터 오륙년 동안 주둔했었는데, 주로 결핵환자들이 많았었다. 그래서 공군 요양소라고 부르기도 했다.

의무병을 비롯해 사병들이 이삼십 명 있었던 것 같고, 장교는 군의관 외엔 준위 한 사람만 보았다.

부대 규모는 그래도 농촌 작은마을이라 그런지 이들의 존재감은 꽤있었다.

장기 복무자 대여섯 명은 동네 집들에 세 들어 살면서 병원 약들과 간단한 주사 등을 동네 아픈 사람들에게 주었고, 여러 친분을 통하여 다른 군용품들도 흘러 나왔다.

당시로선 참 귀했던 소화제나 다이아진, 소독용 알콜 등도 얻을 수 있었고, 디디티나 쥐약도 구할 수 있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기침을 많이 했는데(백일해 후유증이라고 들었다) 우리 집이 공군 병원 바로 아래 있었기에 기침이 심할 때는 병원에 올라가 마이신 주사를 엉덩이에 맞고 오는 혜택도 입었었다.

맞을 때의 아픔과 주무르면서 내려올 때 엉덩이가 뻐근했던 기억이 난다.

의무병 박 하사는 동네 할머니에게 갈 때도 별 필요도 없는 낡은 가방을 들고 다녀 똥가방이라는 별명을 듣기도 했고, 수송부 김석규 하사는 아무나 요청하면 잘 챙겨주어 나이도 좀 들었는데도 우리들까지도 안 듣게는 석규’ ‘석규하기도 했었다.

수송부에는 매일 아침 신마산으로 가는 중형차 한 대가 있었다. 차종 이름을 스리쿼터라 불렀는데, 거의 매일 같이 신마산으로 가서 부대 부식을 실어 온다고 들었다.

그런데, 이 차가 얼마나 고물이었던지 발동이 제대로 걸리는 날이 거의 하루도 없었던 것 같다. 그래서 여러 군인들이 밀어서 발동을 걸곤 했는데, 어느 날인가 부터는 우리가 밀게 되었고, 기다렸다는 듯이 이후로는 거의 우리가 자임했다.

부대 앞에 예닐곱 명이 서 있다가 석규 씨가 차에 오르면 우리는 익숙한 협력으로 땀을 흘리며 스리쿼터를 밀어 아리랑 고개 위에 올려놓고는 모두 탄다.

차가 내려가 가속도가 붙으면 내리막이 다하는 지점쯤에서 부릉부릉 소리를 내며 발동이 걸리는데, 그때부턴 전혀 고물 티가 없이 힘차게 달렸다.

석규 아저씨는 예의 그 청춘고백을 신나게 불러가며 자갈길을 널뛰듯이 달렸고, 떨어질세라 찻전을 꽉 붙잡으면서도 우리도 신이 나서 흥얼거렸다.

합포초등학교는 너무 가까워 아쉬웠고 마산중학교에 진학해서는 승차 재미에 더 빠졌었다. 그래서 하교 시에도 석규 스리쿼터가 지나가지 않는지를 살피러 종종 뒤를 돌아봐가면서 걷는 습관들도 생겼다.

어쩌다 타이밍이 맞아 몇 번 탄 일도 있긴 했었다. 언젠가는 수송부 텐트에서 석규 아저씨와 두세 명의 군인들을 모셔 놓고 연말 파티를 연 기억도 있다.

공군 부대에 대한 또 하나의 뚜렷한 기억이 있다. 천 상사 이야기다.

2 미터 가까이 됨직한 키에 쫙 벌어진 어깨와 가슴, 반쯤 걷어 올린 소매 밑으로 드러난 절굿대 같은 팔에 돌판 같은 손, 거기에 약간 거무스레한 빛이 도는 얼굴에(잘 생긴 편이었다) 반 곱슬머리였으니 그 모습만으로도 보는 사람들 누구나 위압감을 느낄 만 했다. 거기다 당시론 드문 태권도 고단자라 했으니 더 그럴 만 했다.

그래서 그랬을 것이다. 간혹 나가는 외출 때는 여러 사병들이 그를 앞세우고 창동 남성동 거리를 활보한다는 말을 여러 번 들었다.

그럴 땐 주차장 깡패들도 슬슬 피했고, 진해 뿐 아니라 마산 시내까지 휘젓고 다니던 막사 해병들도 감히 시비 걸 엄두도 못 내었다는 이야기들이 우리들 사이에서 신나게 회자되었다.

그러나 그 천 상사(천규덕)가 몇 년 후 한국 최고의 프로 레슬러까지 될 줄은 차마 몰랐다. 레슬링이라는 용어도 몰랐으니까.

그는 배우 천호진의 아버지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역사속 도시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억을 찾아가다 - 17  (0) 2018.02.12
기억을 찾아가다 - 16  (0) 2018.02.05
기억을 찾아가다 - 15  (0) 2018.01.29
기억을 찾아가다 - 14  (0) 2018.01.22
기억을 찾아가다 - 13  (0) 2018.01.15
기억을 찾아가다 - 12  (0) 2018.01.08
Trackback 0 Comment 0
2017.10.16 00:00

기억을 찾아가다 - 1

오늘부터 연재하는 포스팅은 마산 봉암동(현 창원시 마산회원구 봉암동)에서 태어나 청년기까지 살았던 박호철 선생님의 기억 속에 있는 도시 이야깁니다.

한 개인의 삶에 투영된 도시의 흔적을 통해 이미 사라져 버린 우리의 과거를 찾아가보는 것이 목적입니다.

가치 판단은 후대의 몫이고 기록은 당대의 몫이라 생각하며 소박하게 쓴 글입니다. 어르신 한 분이 떠나시면 도서관 한 개가 사라진다는 말을 믿고 시작합니다.

1941년생이라 일제강점기의 기억은 없을 테지만 60년대 중반까지의 마산 도시를 직접 보았던 분입니다.

갇혀져 있던 기억들을 얼마만큼 끄집어낼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이신 박호철 선생님은 1941년에 태어나 초중고(합포초, 마산중, 마산상고)를 마산에서 마친 후 서울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였습니다. 교육자로 평생을 보냈으며 지금은 창원 사파동에서 살고 있습니다.

연재의 횟수와 게재 일자는 유동적입니다. 글이 준비되는 대로 올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

 

아래 그림은 봉암지역의 1947년과 현재의 항공사진입니다. 함께 보시면 글 이해가 쉬울 것 같아 소개합니다.

 

 

1. 봉암동 형성

 

지금 봉암동은 대부분이 매축지다.

최초의 매축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임의로 했고 해방 후에는 1970년 전후에 걸쳐 재일교포가 하다가 자금난으로 포기하자 정부가 받아 완공했다

원래 봉암은 팔룡산(본명은 반룡산) 최남단 자락에 있었던 작은 어촌마을 이름이었다. 지금 서광아파트와 봉암교까지의 도로 대부분이 경사진 마을 터였다. 그 아래쪽은 모두 1차 매축 때 형성된 매립지다.

창신고등학교가 있는 마을은 일제 땐 봉정으로 불리다가 해방 후에 봉덕이라 불렀다. 그 후 봉암교 쪽 마을과 같은 동이 되었을 때 함께 봉암동이 되었는데, 두 동네는 여러 번 붙였다 뗐다 했다.

나는 봉정에서 태어났는데, 어릴 때 어머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론 바다물결이 지금의 교육청 뒷산자락까지 철썩댔다고 한다. 지금도 오륙십 세 이상의 사람들은 교육청 옆 초등학교 뒤 계곡을 조개골이라고 불렀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아직도 밀물 수위가 높아질 땐 교육청 앞 동네 집들이 수몰 위기를 느끼는 것도 다 이 사실을 증명해 준다.

두 마을에 찻길이 난 건 1차 매립 후였다. 넓은 매립지로 하여 동네 복판으로 한길이 나고, 아랫각단이 조성되고 상당한 넓이의 농토도 생겼다. 이 길이 나면서 나룻배 대신 봉암다리도 놓여 졌고 신촌, 월림, 남면(웅남, 상남) 등지와 교류도 잦아졌다.

이 길로 하여 팔룡산 자락을 정지하여 지은 요정 봉선각(鳳仙閣)하이야(택시의 일본식 영어 발음)’가 올라갈 수 있는 길이 닦였다. 이 요정의 주인 이름이 다나카였는데 위세가 대단했다고 한다.

 

<1937년 마산부가 발행한 '관광의 마산'에 게재된 봉선각>

 

우리 집도 본래 웃각단에 있었는데 30년대 말에 한길 옆에 새집을 지어 이사했다고 들었다. 봉선각과 직선거리로는 백 미터도 채 안 되었다.

그래서 내 다섯 살 때의 기억으론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이 봉선각에서 어떤 사내가 종이나팔을 입에 대고 아래를 향해 구슈게이호~(くうしゅうけいほう, 공습경보空襲警報)’하고 외친 것을 본 기억도 있다.(당시 전국적으로 전시 대피훈련을 했었고 통상 통, 반장이 이 역할을 했으나 봉선각이 마을 위쪽에 있는 관계로 봉선각 주인이나 직원에게 이 역할을 맡기지 않았나 짐작됨)

반장이었던 장씨 아저씨의 인도에 따라 뒷산 중턱에 있는 천연동굴로 올랐던 일, 굴 안이 어두워 나 같은 조무래기들이 굴 앞에 옹기종기 앉아 있었던 기억들이 남아 있다.

봉선각은 해방 후 국유화되어 비어 있었기 때문에 우리 또래들의 놀이터가 되었는데, 어느 날 들어가 본 뒤꼍의 굴은 굉장히 깊었고 서늘했다. 아마 방공호와 식품창고의 구실을 했던 것 같았다.

봉선각 뒤쪽 팔용산 남쪽 끝 마루턱에 일본의 신사가 지어진 것도 삼십년 대였다고 들었다. 내가 신사를 본 건 초등학교 고학년 때였는데, 그 땐 거의 파괴된 모습이었다.

해방 후 좌익들의 야간집회가 이 산에서 열렸을 때 부쉈다는 말을 그 후에 몇 번 들었다.

신사가 있는 산먼뎅이를 야시당먼뎅이라고 불렀는데 야시는 여우의 방언이고 당은 집이란 뜻이니, 왜인들이 모이는 곳을 야유하여 이 동네 사람들이 만든 말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봤다.

한길과 봉암다리가 생긴 후부터 마산부창원과의 교류가 잦아졌다.

마산사람들로부터는 촌놈취급을 받았지만, 창원사람들로부터는 약간 우월적 대접을 받는 반촌이미지가 형성되었던 듯하다.

우리 어릴 때 정겹게 대해주셨던 대방때기·두대때기(대방댁·두대댁, 지금의 창원시 대방동과 두대동) 아지매들이 있었는데, 어머님 말씀에 의하면 창원이 친정이던 그 분들이 시집올 때 고향친구들로부터 시집 잘 간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는 사실이 그걸 보여준다.

1차 매립으로 이 동네 서쪽 들머리에 조그만 고개가 생겼는데 이 마을 사람들은 그것에다 아리랑 고개라는 속칭을 붙여줬다.

이 마을은 팔용산이 삼면으로 싸고 있어 비가 오면 흘러내리는 물의 양이 꽤 많았는데 매립으로 물길이 막히자 인공수로를 만들었다. 지금도 교육청 동쪽 담을 따라 흔적이 있다.

왜 그렇게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수로는 아래로 오면서 평지보다 사오 미터 높게 나 있었다. 그래서 한길도 그곳에 와선 그 높이의 고개를 이루었고, 사람들은 그 고개에 그런 예쁜 이름을 붙여줬고, 옆 동네나 마산부 사람들도 그렇게 불렀었다.

봉정과 서쪽으로 맞 닿아있는 팔용산 자락 따라 길쭉하게 나있는, 100호가 채 안됨직한 동네를 우리는 사기점(사기그릇을 굽는 곳이 있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불렀는데, 지금 양덕오거리에서 봉암 쪽으로 나있는 도로의 일부는 옛날 사기점 동네 앞을 흐르던 개천부지였다.

그 길과 마진도로, 양덕천 사이는 꽤 넓은 농토였었는데, 그 벌도 1차 매립 때 형성된 것이라 했다.

그 근처에 우리 논이 있어 종종 보았는데, 율림동 쪽에서 흘러오는 내와 양덕 쪽에서 흘러오는 내가 합해지는 양덕오거리 근처까지 바닷물이 밀려왔었다.

옛날로 거슬러갈수록 그곳은 더 깊었을 테니, 고려 말 합포첨사 배극렴이 왜구침탈 방어를 목적으로 축조한 합포성지가 그곳에서 직선거리 1.5내외 지역에 있다는 사실도 성지를 본 후에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질 낮은 정부들이 그 성터를 방치함으로써 지금은 거의 소실상태에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부끄럽게 만든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Trackback 0 Comment 0
2015.08.03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34. 음료수, 35. 사기점의 약수

34. 음료수

 

음료수라고 하면 물론 인류가 상용하는 식수를 제외할 수 없지만, 여기에 특히 음료수라 칭함은 화학적으로 감미료를 가미해서 인체에 해가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설탕에 주석산(酒石酸)과 소다 등을 배합해서 만드는 사이다를 제일 먼저 손꼽을 수 있다.

사이다가 일본에서 처음 나왔을 때는 히라노스이(平野水)라 했고, 이것과 전후해서 나온 것이 미깡스이(蜜柑水)와 라무네가 각광을 뽐냈다.

미깡스이는 밀감의 즙을 낸 것이며 지금은 믹서를 가진 가정에서도 간단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런데 라무네라는 것은 레이몬 혹은 레몬(梠檬)이라는 것을 일인들의 발음이 오전(誤傳)된 것인데 근자에는 그 종적이 없어졌다.

그런데 과거에는 일본서 박재(舶載)하거나 부산서 가져오다가 신마산 헌병분견대 이웃에 살던 일본인 금정(今井)이 제조장을 설치 운영한 일도 있었다.

<1881년 창업한 MITSUYA 사이다 / 平野水라고 불렀다 / 아래 사진은 역대 사이다 병>

 

 

35. 사기(沙器)점의 약수qhdtjsrkr

 

고로(古老)들로부터 전해진 말로는 봉덕동(전 봉암동 2)에 사기그릇을 굽는 곳이 있었다 하여 이곳을 사기점골이란 이름이 남아 있었다.

그러면 과연 그 동네 어느 곳에서 요업(窯業)을 했는지의 여부는 아직 그곳에서 요지(窯址)를 발굴한 사람이 없으니 자연히 연대조차 알 길이 없다.

그런데 이 근방은 옛날부터 약수가 있어서 일반이 이것을 건강수라 하여 그 동네 사람이나 근촌(近村) 사람들은 그 물을 마실 때에 엿을 먹어가면서 사발뜨기로 하였는데,

난데없이 등천(藤川)이라는 일본 사람이 이곳을 불법 점령한 후에 엉터리 분석표를 게시하고 거기다가 불로관(不老館)이란 여관을 짓고 신령광천(神靈鑛泉)이라는 이름으로 약물 한 잔에 얼마씩 돈을 받기도 했다.

이 일본 사람이 이곳에 자리잡은 뒤를 이어 구주관(九州館, 일인 여관)과 한때 유명해진 봉선각(蓬仙閣, 요정이자 여관)도 들어섰으나,

지금은 촌민들이 모여 약수라던 신령광천도 그리고 구주관과 불로관은 흔적도 없어지고 오직 봉선각만이 남아 있을 뿐 이곳은 6·25 후로 공군 요양소로 쓰이다가 지금은 어느 개업의의 소유로 되었다. <<<

<1930년대 봉선각 전경>

 

 

 

 

 

Trackback 0 Comment 0
2013.10.14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83) - 강점제3시기

'관광 마산'에 소개된 사진 중 마지막 석장입니다.

53. 자안지장(子安地藏)

자안지장에 대해서는 처음 접하는 분이 많을 것 같아서 우선 관련 글 한편 소개합니다. 『약진 마산의 전모』에 실린 글입니다. 

"구강(마산 팔용산 수원지 내지 산호리 일대) 광천 쪽으로 가는 왼쪽으로 상당한 급경사의 산길을 약 1시간 가량 올라가면 자안지장을 안치해놓은 곳에 다다르는데, 거암 아래의 안쪽에 안치된 지장불 근처에는 송송 맑고 정결한 물이 샘솟는다. 전설에는 이 거암을 '상사암'이라 부르는데, 남녀가 서로 연모하였으나 결국은 부부가 되지 못했다면 뱀으로 변하여 연인을 마음대로 희롱하기 때문에 이 바위 위에 앉혀서 주문을 외우게 했고, 그렇게 해보아도 효과가 없을 때에는 두 사람 모두를 공물로 바친다고 전한다. 이곳을 다녀온 사람은 이 바위를 쳐다보고서 당시의 감회를 노래한다고도 전한다."

이 글과 사진의 암벽 형태를 보면 아마 팔용산 상사바위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부산일보(지금의 부산일보와 다른 일본어 신문임) 1934년 9월 28일자「盤龍山 子安地藏の供養」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있는 걸로 보아 상당히 유명한 기도처 였던 것 같습니다. 자안지장은 임산부의 순산이나 아이를 축복하는 불교의 보살인데 일본사람들이 많이 찾습니다.

아래 사진은 팔용산 상사바위와 그곳에서 암벽등반 훈련을 받는 장면입니다.

 

54. 봉암리 온천 봉선각

지금은 잊혀진 일이 되었지만 당시에 마산 봉암동 일대에 광(鑛泉)이 있었고, 몇 채의 여관이 있었습니다. 그 중 가장 유명한 곳이 봉선각이었는데, 이곳에서는 마산만 전경을 훤히 내려다 볼 수 있었다합니다. 해방 이후까지 존속했던 여관니다.

이와 관련한 목발(目拔) 김형윤 선생의 『마산야화』기록입니다.

"오래 전 이곳에 사기그릇을 굽는 곳이 있었다 하여 이곳을 사기점골이라 부르기도 한다. 이 근방에는 옛날부터 약수터가 있어서 동네 사람들이 즐겨 마셨는데, 어느 날 등천(藤川)이라는 일본인이 불법 점령한 후 엉터리 분석표를 제시하며 거기다가 불로관(不老館)이라는 여관을 짓고 신령광천(神靈鑛泉)이라는 이름으로 약물 한 잔에 얼마씩 돈을 받기도 했다. 그후 일본식 여관 구주관(九州館)과 요정이자 여관이기도 했던 선각(蓬仙閣)도 들어섰다. 가장 나중에까지 남아있었던 것은 봉선각이었다."

 

55. 마금산 온천장

지금의 창원 북면 온천장입니다. 이 온천의 경영자는 당시 마산병원 원장이었던 덕영오일(德永吾一)이었습니다. 사진에 나오는 이 건물은 2-30년 전까지 존재했었습니다.

당시 기록에 의하면 마금산 온천수는 류마치스, 신경통, 외상, 피부병, 자궁병 등에 효험이 많았다고 합니다. 수온은 약 42도 였으며 전국에서 이용객들이 많이 왔다고 합니다.

『마산야화』에 의하면, "이곳은 부터 약수온천이라하여 이름있는 온천수가 나왔지만 온천수를 찾는 환자들이 묵을 수 있는 숙박시설 등이 없어서 민박을 하게되었고 이로 인한 민폐 때문에 부득이 온수구를 매몰하였다. 이 사실을 안 한 엿장수가 다시 조그마한 수원을 찾아내 엿을 사는 환자들에게 목욕과 음복수로 제공하였다. 이 소문을 마산 반월동에서 치과의원과 총포화약상을 하던 일본인 여창(與倉)이 전해 듣고 헐 값으로 권리를 인수하여 본격적으로 수원을 발굴하였으며 그 시설 모두를 마산병원 원장 덕영오일이 인수하였다. 1924년 총독부 기술자를 초빙하여 이곳에만 온천수가 나온다는 독점권을 보장 받아 경영하였다."고 합니다.

아래 사진은 난개발된 북면온천의 지금 모습입니다.<<<

Trackback 0 Comment 0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2 / 조선시대 이전

1) 고대에서 조선시대까지 - 2 주거사(住居史)에서 청동기시대와 초기철기시대를 구분하는 또 하나의 지표는 구들의 시작이다. 한국 주거문화의 정체성을 압축적으로 나타내는 구들은 난방기술의 획기적인 발전인 동시에 지상주거로의 변..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1 조선시대 이전

오늘부터는 <경남지역 주거변천사>를 포스팅하겠습니다. 6~7년 전에 『경남도사』에 싣기 위해 간략히 쓴 글인데 출판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 블로그에 올립니다. 어차피 공유하기 위한 글이니 이해하리라 생각합니다. 한반도 동남부에 ..

기억을 찾아가다 - 25 (마지막 회)

25. 3·15의거에 대한 기억 「그날 나는 ‘극장 구경 시켜주겠다’는 주무돈이란 동네친구의 호의에 끌려 10리 가까이 되는 길을 걸어 ‘시민극장’으로 갔다. 그때 나는 대학입시에 낙방한 직후라 의기소침해 있던 상황이었다. 우..

기억을 찾아가다 - 24

24. 이승만 행사 -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 노인잔치...... 내 고등학교시절의 어느날 동회 서기가 들고온 책자를 잠시 훑어본 기억이 남아있다. ‘한국 정치인 99인집’이란 제목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이승만편이 현격히..

기억을 찾아가다 - 23

23. 떠돌이들, 좀도둑 전쟁이 끝나자 대다수의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들갔지만, 상당수의 사람들은 남아있었다. 좌우갈등의 와중에 있었던 몸이라 돌아갈 수 없는 처지였다고 들은 문씨 같은 사람들도 있었는가 하면, 가봤자 땅뙈기 ..

기억을 찾아가다 - 22

22.기합, 주먹자랑, 몸단련 중학교시절에도 조금은 의식되었지만 신경을 곤두세울 정도는 아니었었는데, 고등학교에 들어가자 그 문제들은 신경의 상당부분을 자극하여 행동거지의 상당부분을 조종하고 지배할 정도로까지 작용했다. 소위 ..

공간의 재탄생 - 재생 건축 '선유도' 02

지난주에 이어 녹색 기둥의 정원 에서부터 선유도 이야기를 이어 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 - 녹색 기둥의 정원 정수지의 콘크리트 상판 지붕을 들어내 기둥만을 남겨 만들어진 이 정원은, 선유도 이야기관 의 설명에 의하면 ‘휴식과 ..

기억을 찾아가다 - 21

21. 동(洞) 대항 줄다리기대회 ‘마산시 동 대항 줄다리기대회’가 시작된 건 초등학교 때였던 것 같은데, 내가 몇번 구경한 건 중학교 때였다. 대회 장소는 주로 무학초등학교였다. 마산의 30여 동이 토너먼트로 겨루어 하루에 ..

공간의 재탄생 - 재생 건축 '선유도' 01

서울 한강변의 대표적 공원 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곳 중에 선유도가 빠지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원래 거기에 그렇게 있었던 장소로 기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아직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선유도 공원이 ..

기억을 찾아가다 - 20

20. 아이스케키 아이스크림이나 팥빙수도 있었지만 수요가 많지는 않았었다. 학교 앞이나 시장 입구 등에 리어카를 세워놓고 수제로 만들어 파는 정도였다. 소금 뿌린 얼음 통을 손으로 돌려 냉각시킨 아이스크림은 즉석에서 고깔과자 ..

안상수 시장은 철거민의 눈물 닦아주시라

설 연휴가 끝난 다음 날, 나는 한 언론사의 취재에 동행해 재개발로 철거 중인 마산 회원동 일대를 다녔다. 내가 태어난 곳이고 서른까지 산 곳이었다. 지금도 매일 두 번씩 지나는 곳이기도 하다. 그날 나는 몰상식과 몰염치의 밑..

기억을 찾아가다 - 19

19. 영화, 만화, 잡지 초등학교 6학년 때 단체로 시민극장에 ‘성웅 이순신’을 보러 갔다가 실망했던 기억이 있다. 활동사진이 아니고 정지된 그림(슬라이드)이었기 때문이다. 중1때 문화동 쯤에 있었던 제일극장에서 본 애정(哀..

공간의 재탄생 - 재생 건축 intro.

세 달 가까이 이어져 왔던 '건축의 외형' 에 이어, 세월의 흐름에 따라 방치되고 버림받게 된 건축에 새 삶을 불어넣는 '재생 건축' (regenerative architecture) 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이어 나가볼까 합니..

기억을 찾아가다 - 18

18. 바냇들, 부림시장 정전 다음해 진학한 마산서중(전쟁 중인 1951년 9월 1일 6년제 마산공립중학교가 3년제 마산고와 마산서중으로 분리되었다. 마산서중이 현재의 마산중학교로 교명을 변경한 것은 1955년 5월 7일이었다..

기억을 찾아가다 - 17

17. 공놀이, 헌병사령부 축구팀 우리 어릴 때 겨울 빈 밭에서 새끼로 동여맨 짚 뭉치를 차고 놀던 기억이 있고, 간혹 있은 잔칫집에서 나온 돼지 오줌보에 물을 넣어 차고 놀던 일도 어렴풋이 기억의 한 자락에 남아 있다. 형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