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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13 00:00

기억을 찾아가다 - 5

 

5. 한국전쟁기의 봉암동 - 미군들

 

우리들은 예사로 할로를 외치곤 했지만, 어른들이 인식은 많이 달랐었다. 특히 처녀들과 젊은 아녀자들에게 미군은 공포의 대상이었다.

어느 새댁은 야산에 끌려가 윤간당한 후 소나무에 목을 맸다느니, 어떤 처자는 사후에 아예 양색시(미군 상대 매음부)로 변신했다느니, 회원동 난민촌에선 미군의 횡포에 대들던 청년이 총 맞아 죽었다느니 하는 소문들이 참 한참 동안 끊임없이 들려왔던 것으로 기억된다.

실제로 내 큰누님과 육촌형수가 집 앞 우물가에서 나물을 씻다가 둘 앞에 세우는 방구쟁이 차를 보고 혼비백산하여 집안으로 뛰어 들어온 일도 있었고, 언젠가는 그런 두 사람의 뒤로 두 미군병사가 따라 들어와 권총을 빼들고 아버지와 우리 형제들을 질리게 했던 일도 있었다.

 

<6.25전쟁 때 미군부대로 위문공연 온 마럴린 몬로>

 

그들로 인한 폐해는 산과 바다의 사냥질에서도 많이 보였다.

봉암동 양덕동 등의 산전(山田) 두락들은 고라니, 노루, 산돼지 등으로 인한 피해를 많이 입어왔고, 그래서 마을사람들은 짐승들 쫓고 울타리 강화하는데 많은 신경을 써 왔기에, 산짐승은 귀찮기는 해도 항상 같이하는 존재였었다.

그런데 미군들의 사냥질이 있고나서 어느 때인가부터 짐승 구경하기가 어려울 정도가 돼버렸다.

오륙 명씩 무리를 지어 와서 등성이마다 점거하고는 총소리에 놀라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짐승들을 여러 마리 잡아 방구쟁이 차에 싣고 가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아직 핏기가 가시지 않은 노루 배를 목덜미에 걸치고 휘파람을 불며 가는 미군을 보면서는 아직 어린 나이에도 착잡한 감정을 느꼈던 것 같다.

청수 들 둑에선 아주 특이한 사냥 행태도 경이의 눈으로 보았었다.

청수 들 둑에선 적현리나 귀산마을이 가깝게 건너다 보였다. 겨울이 되면 그 앞바다엔 오리 떼가 까맣게 보일만큼 많이 노는 풍경이 으레 연출되었었는데, 그 오리들을 무자비한 방법으로 잡는 광경이었다. 전술한 졸저 상식의 서식처일단이다.

 

그들은 모터보트 두어 척에 두세 명씩 타고서 귀산 쪽 모퉁이를 소리 없이 돌아 나와서는 적현리 쪽으로 방향을 잡는 순간 굉음을 발하며 최고 속도로 오리 떼를 향하여 돌진했다.

놀란 오리들이 비명을 지르며 새까맣게 떠오르는데 그때 미군들의 총구에선 콩 볶듯이 총성이 일었다. 느리게 물을 차고 떠오르는 오리 떼를 향하여 조준 없이 산탄총을 난사하는 것이다.

멀리서도 점점이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바로 맞은 놈은 수직으로 빗맞은 놈은 날갯짓을 하며 비스듬히 떨어졌다.

보통 서너 명이 육칠 초 동안 그렇게 쏘아서 잡는 오리가 많을 때 십여 마리도, 적어도 대여섯 마리는 되는 것 같았다

 

어둑살이 짙어갈 무렵엔 바다 둑에 앉아, 팔룡산으로 자러 가는 오리들을 조준하여 떨어뜨렸다. 좀 멀리 떨어지는 놈은 그들이 데리고 온 개들이 물고 오는 광경도 보았다.

그들의 총의 위력은 어린 내 눈에도 참 놀라워 보였다.

전쟁 전에는 국방경비대 대원들이 간혹 들고 다니던 구구식 장총을 본 것이 고작이었는데, 전쟁 나고부터는 엠원이니 카빈이니 하는 현대식 총들을 무시로 보았다.

 

<카빈소총(위)과 엠원소총(아래)>

심지어 휴가 나온 동네 형도 총을 지니고 온 걸 보았고, 유엔군 따라 다니다 잠시 쉬러 온 당숙도 엠원 소총과 탄알 수십 발을 들고 와 집안에 우스꽝스러운 사고를 남기기도 했다.

아버지께 인사차 들렀을 때 가지고 온 총을 아랫방 구석에 세워두었는데 점심 먹던 머슴이 멋모르고 방아쇠를 건드려 격발시켜 버렸던 것이다.

우레 같은 소리에 큰방에 있던 아버지와 당숙과 우리들이 아랫방 문을 열어젖히니 방안은 먼지로 컴컴한 상태인데, 놀라서 뒤로 눕듯이 허리를 젖히고 있는 머슴 발끝에 놓여있는 총구 앞에 큰 구덩이가 보였다.

그리고 깨어진 구들장 조각도 늘려 있었다. 나는 그 후 종종 친구들한테 그 장면을 들려주며 엠원 총의 위력에 대하여 떠들었었다.

이러한 총 문화의 영향 때문이었을까?

가게에도 화약과 나무총이 많이 있었고,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지만, 총탄의 알을 분리해 추출한 화약과 탄피를 이용하여 목제 장난감 총을 만드는 것도 다반사였다.

그리고 그것을 좀 더 발전시켜 철파이프로 방총(철판의 일본어 てっぱん을 말한 것으로 추정)이란 것도 만들어 오리사냥을 시험해본 기억도 있다. 그런 놀이는 전후에는 더 빈번해졌었다.

그래서 그랬을 것이다. 오랫동안 우리들 대화의 중심엔 미군과 총 이야기가 항상 자리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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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16 00:00

기억을 찾아가다 - 1

오늘부터 연재하는 포스팅은 마산 봉암동(현 창원시 마산회원구 봉암동)에서 태어나 청년기까지 살았던 박호철 선생님의 기억 속에 있는 도시 이야깁니다.

한 개인의 삶에 투영된 도시의 흔적을 통해 이미 사라져 버린 우리의 과거를 찾아가보는 것이 목적입니다.

가치 판단은 후대의 몫이고 기록은 당대의 몫이라 생각하며 소박하게 쓴 글입니다. 어르신 한 분이 떠나시면 도서관 한 개가 사라진다는 말을 믿고 시작합니다.

1941년생이라 일제강점기의 기억은 없을 테지만 60년대 중반까지의 마산 도시를 직접 보았던 분입니다.

갇혀져 있던 기억들을 얼마만큼 끄집어낼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이신 박호철 선생님은 1941년에 태어나 초중고(합포초, 마산중, 마산상고)를 마산에서 마친 후 서울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였습니다. 교육자로 평생을 보냈으며 지금은 창원 사파동에서 살고 있습니다.

연재의 횟수와 게재 일자는 유동적입니다. 글이 준비되는 대로 올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

 

아래 그림은 봉암지역의 1947년과 현재의 항공사진입니다. 함께 보시면 글 이해가 쉬울 것 같아 소개합니다.

 

 

1. 봉암동 형성

 

지금 봉암동은 대부분이 매축지다.

최초의 매축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임의로 했고 해방 후에는 1970년 전후에 걸쳐 재일교포가 하다가 자금난으로 포기하자 정부가 받아 완공했다

원래 봉암은 팔룡산(본명은 반룡산) 최남단 자락에 있었던 작은 어촌마을 이름이었다. 지금 서광아파트와 봉암교까지의 도로 대부분이 경사진 마을 터였다. 그 아래쪽은 모두 1차 매축 때 형성된 매립지다.

창신고등학교가 있는 마을은 일제 땐 봉정으로 불리다가 해방 후에 봉덕이라 불렀다. 그 후 봉암교 쪽 마을과 같은 동이 되었을 때 함께 봉암동이 되었는데, 두 동네는 여러 번 붙였다 뗐다 했다.

나는 봉정에서 태어났는데, 어릴 때 어머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론 바다물결이 지금의 교육청 뒷산자락까지 철썩댔다고 한다. 지금도 오륙십 세 이상의 사람들은 교육청 옆 초등학교 뒤 계곡을 조개골이라고 불렀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아직도 밀물 수위가 높아질 땐 교육청 앞 동네 집들이 수몰 위기를 느끼는 것도 다 이 사실을 증명해 준다.

두 마을에 찻길이 난 건 1차 매립 후였다. 넓은 매립지로 하여 동네 복판으로 한길이 나고, 아랫각단이 조성되고 상당한 넓이의 농토도 생겼다. 이 길이 나면서 나룻배 대신 봉암다리도 놓여 졌고 신촌, 월림, 남면(웅남, 상남) 등지와 교류도 잦아졌다.

이 길로 하여 팔룡산 자락을 정지하여 지은 요정 봉선각(鳳仙閣)하이야(택시의 일본식 영어 발음)’가 올라갈 수 있는 길이 닦였다. 이 요정의 주인 이름이 다나카였는데 위세가 대단했다고 한다.

 

<1937년 마산부가 발행한 '관광의 마산'에 게재된 봉선각>

 

우리 집도 본래 웃각단에 있었는데 30년대 말에 한길 옆에 새집을 지어 이사했다고 들었다. 봉선각과 직선거리로는 백 미터도 채 안 되었다.

그래서 내 다섯 살 때의 기억으론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이 봉선각에서 어떤 사내가 종이나팔을 입에 대고 아래를 향해 구슈게이호~(くうしゅうけいほう, 공습경보空襲警報)’하고 외친 것을 본 기억도 있다.(당시 전국적으로 전시 대피훈련을 했었고 통상 통, 반장이 이 역할을 했으나 봉선각이 마을 위쪽에 있는 관계로 봉선각 주인이나 직원에게 이 역할을 맡기지 않았나 짐작됨)

반장이었던 장씨 아저씨의 인도에 따라 뒷산 중턱에 있는 천연동굴로 올랐던 일, 굴 안이 어두워 나 같은 조무래기들이 굴 앞에 옹기종기 앉아 있었던 기억들이 남아 있다.

봉선각은 해방 후 국유화되어 비어 있었기 때문에 우리 또래들의 놀이터가 되었는데, 어느 날 들어가 본 뒤꼍의 굴은 굉장히 깊었고 서늘했다. 아마 방공호와 식품창고의 구실을 했던 것 같았다.

봉선각 뒤쪽 팔용산 남쪽 끝 마루턱에 일본의 신사가 지어진 것도 삼십년 대였다고 들었다. 내가 신사를 본 건 초등학교 고학년 때였는데, 그 땐 거의 파괴된 모습이었다.

해방 후 좌익들의 야간집회가 이 산에서 열렸을 때 부쉈다는 말을 그 후에 몇 번 들었다.

신사가 있는 산먼뎅이를 야시당먼뎅이라고 불렀는데 야시는 여우의 방언이고 당은 집이란 뜻이니, 왜인들이 모이는 곳을 야유하여 이 동네 사람들이 만든 말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봤다.

한길과 봉암다리가 생긴 후부터 마산부창원과의 교류가 잦아졌다.

마산사람들로부터는 촌놈취급을 받았지만, 창원사람들로부터는 약간 우월적 대접을 받는 반촌이미지가 형성되었던 듯하다.

우리 어릴 때 정겹게 대해주셨던 대방때기·두대때기(대방댁·두대댁, 지금의 창원시 대방동과 두대동) 아지매들이 있었는데, 어머님 말씀에 의하면 창원이 친정이던 그 분들이 시집올 때 고향친구들로부터 시집 잘 간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는 사실이 그걸 보여준다.

1차 매립으로 이 동네 서쪽 들머리에 조그만 고개가 생겼는데 이 마을 사람들은 그것에다 아리랑 고개라는 속칭을 붙여줬다.

이 마을은 팔용산이 삼면으로 싸고 있어 비가 오면 흘러내리는 물의 양이 꽤 많았는데 매립으로 물길이 막히자 인공수로를 만들었다. 지금도 교육청 동쪽 담을 따라 흔적이 있다.

왜 그렇게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수로는 아래로 오면서 평지보다 사오 미터 높게 나 있었다. 그래서 한길도 그곳에 와선 그 높이의 고개를 이루었고, 사람들은 그 고개에 그런 예쁜 이름을 붙여줬고, 옆 동네나 마산부 사람들도 그렇게 불렀었다.

봉정과 서쪽으로 맞 닿아있는 팔용산 자락 따라 길쭉하게 나있는, 100호가 채 안됨직한 동네를 우리는 사기점(사기그릇을 굽는 곳이 있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불렀는데, 지금 양덕오거리에서 봉암 쪽으로 나있는 도로의 일부는 옛날 사기점 동네 앞을 흐르던 개천부지였다.

그 길과 마진도로, 양덕천 사이는 꽤 넓은 농토였었는데, 그 벌도 1차 매립 때 형성된 것이라 했다.

그 근처에 우리 논이 있어 종종 보았는데, 율림동 쪽에서 흘러오는 내와 양덕 쪽에서 흘러오는 내가 합해지는 양덕오거리 근처까지 바닷물이 밀려왔었다.

옛날로 거슬러갈수록 그곳은 더 깊었을 테니, 고려 말 합포첨사 배극렴이 왜구침탈 방어를 목적으로 축조한 합포성지가 그곳에서 직선거리 1.5내외 지역에 있다는 사실도 성지를 본 후에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질 낮은 정부들이 그 성터를 방치함으로써 지금은 거의 소실상태에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부끄럽게 만든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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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09 00:01

일제 강점기 신마산 혼마치(本町)

 

오래된 사진 한 장을 소개한다.

아래 것은 같은 장소에서 찍은 현재 사진이다. 위 사진을 현재와 비교하기 위한 사진이다.

 

 

1910년대에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마산 월남동 1가(현 3.15대로) 사진이다. 당시에는 혼마치(本町)라 불렀던 중심거리였다.

현 경남은행 신마산지점 앞 쯤에서 월영광장 쪽을 바라보고 찍은 사진이다.

두 사진을 비교해보면 지난 100년간 얼마나 도시가 많이 변했는지 알 수 있다.

사진의 길 왼편이 바다인데, 지금의 해바라기 아파트가 앉아있는 블럭이다. 나중에는 일본인들이 저 해안가에 버드나무를 심기도 했다. 저 바다는 1926년 매립되어 사라진다.

오른쪽 도로변의 일본식 건물들은 규모가 상당히 크다. 대부분 목조였고 3층건물도 있다. 도로는 비포장이었다. 길 양쪽을 줄지어 선 나무 전봇대가 인상적이다.

사진의 배경이 되는 뒷산은 무학산과 이어진 대곡산 줄기이다.

옛 사진에서 오른쪽 도로변으로 저 멀리 건물 한채를 자세히 보면 단층인데 층고가 높은 건물이 있다.(왼편 해안이 끝나는 지점 쯤. 벽체가 검게 보임) 지금 월남동 성당이 앉아 있는, 당시 일본제일은행 마산출장소 건물이다. 잘 생긴 건물이었다.

사진의 곳은 '신마산'이다.

조계지로 개항된 땅 신마산은 일본인들이 붙인 지명이었다. 자신들이 새로 건설한 마산이라는 의미였다. 

반면 전통도시 마산포는 구마산이라 불렀다. 낡고 오래되었다는 의미였다.

마산포 주민들은 이를 못마땅해 했다.

하지만 지배자와 피지배자간의 일이었다. 강점기 내내 그렇게 불리었고 그 관습이 지금에 왔다.

·(·) 속에 담긴 뜻은 오래 전에 사라졌지만 생명력 강한 지명은 아직 살아남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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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03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34. 음료수, 35. 사기점의 약수

34. 음료수

 

음료수라고 하면 물론 인류가 상용하는 식수를 제외할 수 없지만, 여기에 특히 음료수라 칭함은 화학적으로 감미료를 가미해서 인체에 해가 없는 것을 말하는 것인데, 설탕에 주석산(酒石酸)과 소다 등을 배합해서 만드는 사이다를 제일 먼저 손꼽을 수 있다.

사이다가 일본에서 처음 나왔을 때는 히라노스이(平野水)라 했고, 이것과 전후해서 나온 것이 미깡스이(蜜柑水)와 라무네가 각광을 뽐냈다.

미깡스이는 밀감의 즙을 낸 것이며 지금은 믹서를 가진 가정에서도 간단하게 만들 수 있다.

그런데 라무네라는 것은 레이몬 혹은 레몬(梠檬)이라는 것을 일인들의 발음이 오전(誤傳)된 것인데 근자에는 그 종적이 없어졌다.

그런데 과거에는 일본서 박재(舶載)하거나 부산서 가져오다가 신마산 헌병분견대 이웃에 살던 일본인 금정(今井)이 제조장을 설치 운영한 일도 있었다.

<1881년 창업한 MITSUYA 사이다 / 平野水라고 불렀다 / 아래 사진은 역대 사이다 병>

 

 

35. 사기(沙器)점의 약수qhdtjsrkr

 

고로(古老)들로부터 전해진 말로는 봉덕동(전 봉암동 2)에 사기그릇을 굽는 곳이 있었다 하여 이곳을 사기점골이란 이름이 남아 있었다.

그러면 과연 그 동네 어느 곳에서 요업(窯業)을 했는지의 여부는 아직 그곳에서 요지(窯址)를 발굴한 사람이 없으니 자연히 연대조차 알 길이 없다.

그런데 이 근방은 옛날부터 약수가 있어서 일반이 이것을 건강수라 하여 그 동네 사람이나 근촌(近村) 사람들은 그 물을 마실 때에 엿을 먹어가면서 사발뜨기로 하였는데,

난데없이 등천(藤川)이라는 일본 사람이 이곳을 불법 점령한 후에 엉터리 분석표를 게시하고 거기다가 불로관(不老館)이란 여관을 짓고 신령광천(神靈鑛泉)이라는 이름으로 약물 한 잔에 얼마씩 돈을 받기도 했다.

이 일본 사람이 이곳에 자리잡은 뒤를 이어 구주관(九州館, 일인 여관)과 한때 유명해진 봉선각(蓬仙閣, 요정이자 여관)도 들어섰으나,

지금은 촌민들이 모여 약수라던 신령광천도 그리고 구주관과 불로관은 흔적도 없어지고 오직 봉선각만이 남아 있을 뿐 이곳은 6·25 후로 공군 요양소로 쓰이다가 지금은 어느 개업의의 소유로 되었다. <<<

<1930년대 봉선각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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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12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5) - 강점제1시기


한가위 즐겁게 보내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강점 제1시기에 시행된 매립에 대해 올리겠습니다.
이 시기에는 봉암동과 남성동 두 번의 매립 밖에 없었습니다.


<마산자유무역지역의 최초 매립>

매립이 시작되기 전, 마산의 해안에는 70m에서 200m에 이르는 간석지가 있었습니다.
그 중 봉암동, 현 마산자유무역지역에는 최고 1㎞에 달할 정도의 대규모 간석지가 있었습니다.
앞서 소개한 지도 중 마산만의 수심이 나타나 있는 것들을 보면 봉암 지역의 넓은 간석지가 잘 나타나 있습니다.
다시 한 번 보시죠.
연두색으로 표시된 지역으로 현재 마산자유무역지역입니다.


이런 간석지는 당시 마산포 주변의 주민들에게는 해산물을 제공하는 보고(寶庫)였지만 일제의 눈에는 얕은 수심이 경제적으로 매력 있는 매립 대상지일 뿐이었습니다. 
그래서인지 합방 직 후 곧장 매립공사가 있었습니다.
합방 후 최초의 마산 앞바다 매립인 셈입니다.

사실 이 봉암동 간석지 매립에 대해서는 아무런 기록을 찾지 못했습니다.
다만 1916년 일본육지측량부에서 측도하여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1 / 50,000 지도에 최초로 매립되어 있는 것이 나타날 뿐인데 매립의 주체가 누구인지 알아낼 방법도 없었습니다.
바로 다음 지도입니다.

 
이 지도 만으로는
매립 시기조차 정확히 알 수 없는 것, 1916년 지도에 나타나니 1910년대 초반이었지 않나? 정도 밖에 추정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라도 추정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 1916년 발행된 1 / 50,000 도면에 나타나는데 지도제작 기간을 고려해보면 1910년대 초반에 매립했을 것이다.
㉯ 도면상 일부는 논으로 이미 표기가 되어 있고 일부는 호안표시는 있지만 아직 논표시가 없는 것으로보아 매립이 진행 중이다. 인력으로 공사를 했던 당시 상황을 고려할 때 공사를 시작한지는 꽤 오래되었을 것이다.
바다 매립은 완공 직후부터 곧 바로 논으로 사용하기가 곤란하다.
㉱ 동척마산출장소가 1909년10월 6일 개설되었다.
㉲ 간석지 매립은 그 주변일대에 사는 주민들의 반대가 있었을 것이어서 일사천리로 공사를 진행하지 못했을 것이다.

이상과 같은 추론을 근거로 한일합방 직후에 바로 매립을 시작하여 1913년-1915년 사이에 이 정도로 공사가 진척되었던 것 아닌가 하는 겁니다.

면적은 지도 비교에서 확인한 결과 약 9만여 평이었으며 위치는 양덕천․산호천․삼호천 하구(河口)입니다.

이 매립지의 영역을 가장 정확하게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1947년 미군이 촬영한 항공사진입니다.
진작 매립이 끝나 농토로 변했습니다.

이 지역의 현 위성사진입니다.


오래동안 봉암동에서 거주했던 분의 증언에 의하면 해방 이후 봉암동 지역에서는 이 매립지를 '청수둑안'이라고 불렀다고 하면서 이 매립지는 일본인 '청수'의 소유였다고 했습니다.

이 시기에
신마산 지역에서는 매립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1910년대에도 마산의 해안매립에 눈독을 들이는 일본 자본가들은 있었습니다.
『매일신문』 1919년 6월 11일자 기사에서 '마산만 매립을 구상하고 있다'는 기사 때문입니다.
현대문으로 약간 바꾸었습니다.

馬山 本町 1丁目에서 同 3丁目에 이르는 海面을 埋築하기로 計劃을 세우고 東京 某 實業家가 不日 技師를 派遣하여 實測을 하고 當局에 出願할 것인데 該 海面埋築의 目的은 五州輕鐵 開通 後 馬山을 豫想한 것인데 同 埋立地에 家屋 及 倉庫를 建築하야 一般의 要求에 應하고자 한다더라

 본정 1정목에서 3정목은 현재의 월남동1가에서 3가 까지를 말하는 것인데 이 지역은 1920년대 중반 이후 일본인 목가전평삼랑(目加田平三郞)과 국종웅일(國宗雄一) 두 사람이 매립한 위치와 꼭 같습니다.
기사에 나오는 동경의 모 실업가가 누구인지는 알 수가 없으며, 이 기사의 매립추진계획이 목가전평삼랑(目加田平三郞)의 매립과 이어진 것인지도 지금으로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이 시기(1910년대)에 이미 마산만의 상업용 매립계획이 세워지고 있었다는 것 정도만 알 수 있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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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22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2) - 강점제1시기

-한일병합 직 후 제작된 마산인근 군사극비 지도-

<마산 (군사극비)>

1916년 / 육지측량부 / 총독부임시토지조사국 / 1 : 50,000 / 1/50,000지형도 / 국립중앙도서관

확대해 보았습니다.


이 지도는 1906년에 측도하고 1921년에 축도제판(縮圖製版)하여 같은 해 11월 25일 발행된 지도입니다.

제작자는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육지측량부․참모본부가 동시에 표기되어있으며, 제목은 「軍事極秘 (戰地ニ限リ極秘)」로 되어 있고 그 아래 진해만요새근방9호(共三十一面), 오만분일지형도 마산5호(共十五面)라고 기재되어있는 것으로 보아 군사용 지도인 것 같습니다

이 지도와 관련된 기록을 소개합니다.
1986년 일본인
청수정부(淸水靖夫)가 쓴 『日本統治機關作製にかかる朝鮮半島地形圖の槪要』라는 책에 나옵니다.

 

조선반도 1/50,000지형도는 한일합방 이전 일본 육군에 의해 제작되어 병합 후 약도(제1차 지형도)로서의 형태로 햇빛을 보게 된다.

합병 후, 약도에 손을 가하여 지형도(제2차 지형도)가 작성되고 삼각측량 ․ 지형 측량 후, 기본도측도(제3차 지형도)가 완성되어 이것이 제2차대전종료까지 사용되었다. 이 지형도는 또 미국육군지도국(Army Map Survice)이 전략 용으로 전쟁 전후에 걸쳐서 복제한 지도이기도 했다.

1/50,000 기본도 측도(지형도)와 동시에 1/25,000와 1/10,000지형도도 주요지역에 제작이 진행되었다 ․․․․․․․

조선의 기본도는 1/50,000지형도(일본도 같음)였었는데 약간씩 내용이 다른 3종류의 1/50,000지도가 제작되어 있었다. 제1차의 지형도는 통칭 약도라고 말하는 한일합방이전에 제작된 지형도이고, 제2차 지형도는 합방 후 약도의 수정 형으로 제작된 지형도로서 내용은 현격한 차이가 있다. 제3차는 삼각측량의 위치의 기준을 둔 기본도이다 ․․․․․․․

기본도(제3차의 지형도)정식 명칭은 「오만분일지형도」라고 한다. 한반도에 삼각점 망이 완성되어 그 결과에 기초를 두고 작성된 지형도이다.

1914년부터 1918년까지의 사이에 전역이 완성되었다. 각 년차의 측량 도면 수는 지형도. 간행목록. 기타에서 조사한즉 전체가 727면이지만 측량․지도백년사에 있는 기재는 722면으로서 5면의 차이가 있다․․․․․․․

1926년 이래 비밀지도 구역 중 특수한 기밀지구에 무관한 지역은 등고선, 표고숫자를 삭제하고 해안 등의 변지형(變地形)의 상세를 생략한 교통도를 간행했다.

 

위의 기록을 읽어보면 이 지도는 1914년부터 1918년까지 완성된 제3차 지형도인 기본도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군사극비’라고 기재된 것은 그 후 일본군에서도 이 지도를 사용한 결과로 보입니다.

1:50,000 지도이기 때문에 세밀한 도시 공간 변화를 알 수는 없지만 1916년 동시에 제작된 1:10,000 지도「馬山」과 동일합니다. 그러나 1:10,000 지도「馬山」에서는 표기할 수 없었던 마산부 범역 밖의 상황을 알 수 있어서 요긴한 자료라고 생각됩니다.

특히 마산부의 북쪽으로 칠원을 거쳐 대구로 가는 길, 함안을 거쳐 진주로 가는 길, 그리고 창원을 지나 부산으로 가는 길이 1905년 개통된 마산선 철도와 함께 표시되어 있으며 중리․칠원․창원․진영지역까지 연결되는 대소 도로망이 나타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들 도로 사이사이로 형성되어 있는 취락도 표기가 잘 되어 있어서 당시 마산 근방의 사정까지 잘 알 수 있는 지도입니다.

도시를 지나는 간선도로, 특히 석전동에서 창원읍 쪽과 줄이 방향으로 나누어지는 삼거리가 명확하게 표기되어 있고, 공사를 막 끝낸 남성동 지역의 매립지도 표기되어 있습니다.

지명으로는 지금도 사용되고 있는 명칭들이 죄다 눈에 보입니다.
교방리, 회원리, 산호리, 상남리, 자산리, 완월리, 신월리, 봉정리(현 봉암동)까지 말입니다.

특이한 것은 봉정리 앞 간석지, 즉 현재의 마산자유무역 지역이 일부가 매립된 표기입니다.
합방 전후에 발간된 다른 자료들과 비교해 보면 이 지역 매립은 합방 직후 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오래 동안 봉암동에서 거주했던 분을 만나 확인했더니 “해방 이후 봉암동 지역에서는 이 매립지를 ‘청수둑안’이라고 불렀다”고 하면서 이 매립지의 소유자는 일본인 ‘청수’였다고 했습니다.

위 지도에 나오는 범위를 현 위성사진으로 한번 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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