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2014.09.15 00:00

마산·창원 역사 읽기 (17) - 다시 민주성지 입증한 10·18 민중항쟁

2. 청동기시대에서 10·18까지

2-10 다시 민주성지 입증한 10·18 민중항쟁

 

학우여러분! 지금부터 제 말을 잘 들어 주십시오.

지금 우리는 약 1시간 이상을 이렇게 멍청히 앉아만 있습니다. 도대체 지금 이렇게 앉아 무엇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경남대의 모습입니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 경남대만 과거 유신헌법을 유일하게 전국대학 중에서 지지했다는 치욕적인 이유로 현재 전국대학생연합회에 조차 가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지금 부산에서는 연 이틀동안 우리의 학우들이 피를 흘리며 유신독재에 맞서 처절히 싸우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익히 알면서도이렇게 앉아만 있다니 기가 찰일 입니다.

 

19791018일 오후 2시가 조금 넘은 시간, 경남대 도서관 앞에 모인 1500여명의 학생들은 어느 대학생의 연설을 듣고 있었다.

 “와 나가자!”는 함성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민주회복’, ‘학원자유’, ‘독재타도’등의 구호가 뒤따랐다.

유신독재에 저항했던 마산지역의 항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1970년대 한국사회 모순의 중심, 마산-

5·16 군사쿠데타로 시작된 박정희 정권은 1972년 영구독재를 위한 유신헌법을 만들었다. 유신헌법은 철저한 사회통제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대통령의 권한은 비약적으로 확대 강화되어 입법, 사법, 행정의 3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대통령 선출은 국민 직선이 아니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뽑는 간선제로 바뀌었으며,  임기는 6년으로 연장시키는 동시에 중임제한조항을 철폐하여 영구집권을 가능하도록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배체제의 안정, 정권의 안정이라는 목적은 쉽게 달성되지 않았다.

70년대 박정권의 독재를 가능하게한 것은 긴급조치였다. 9호에 걸친 긴급조치는 각종 민주화 투쟁을 탄압하였다.

긴급조치 9호는 긴급조치라는 이름과 걸맞지 않게 1975년부터 4년간이나 지속되었다.

긴급조치는 온 국민의 생활에 직접적인 제약을 가하면서 침묵하는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였다.

긴급조치에 해당하는 내용은 광범위하였다.

유언비어의 날조와 유포, 학생들의 불법집회·시위·정치간섭행위, 유신헌법을 부정·반대·왜곡·비방·개정 및 폐기를 주장하는 청원·선동 또는 이를 보도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지하는 반민주적인 것이었다.

유신헌법 아래서의 정치질서는 기본적인 민주주의 원리마저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한국적민주주의’라는 말로 합리화했다.

이 개념은 국민대중에게 광범위하게 교육·선전·계몽됨으로써 체제유지를 위한 이데올로기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열악한 상황에서도 민중들의 반독재 투쟁은 끈질기게 계속되었다.

한편 박정희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은 보릿고개로 표현되던 극단적 기아를 추방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고도성장이라는 미명아래 빈부격차는 확대되었고, 한국경제의 대외의존도는 높아만 갔다.

1970년 노동자 전태일의 죽음, 1979년 YH여공들의 신민당사 농성은 최소한의 생존권 조차 보장받지 못한 민중의 불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였다.

마산지역 또한 1970년대의 한국사회가 지닌 모순에서 벗어나 있지 않았다. 오히려 마산·창원지역은 산업화과정에서의 한국경제의 모순이 집약되어 나타난 지역이었다.

1970대 초부터 수출자유지역, 창원기계공업공단 등의 대규모 공단이 조성되면서 상공업도시로 급격하게 팽창하였다.

농촌지역의 노동력이 대량 유입되면서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고, 이것은 상대적으로 저임금구조를 유지하는 원천이 되었으며,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허덕이는 노동자층과 생활의 터전을 확보하지 못한 도시빈민층이 확산되었다.

1979년의 불황은 이 지역에도 치명적인 것이었다. 경기침체에 따라 휴업, 폐업, 노동자 감원, 조업단축, 임금체불 등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임금체불, 실직자들이 증가하는 가운데 노사분규는 급증했다.

이것이 마산지역에서의 항쟁이 노동자가 적극 참여했던 원인이었다.

<항쟁 당시의 신문 보도(1979. 10. 21)>

 

-초기 시위 주도했던 대학생들-

경남대학을 빠져나온 시위대는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시내쪽으로 진출했다.

오후 53·15의거 탑 주위로 수백명의 학생이 모여들었다. 시위 경험이 없던 학생들은경찰의 제지를 뚫을 수 없었다.

오후 7시무렵 시내진출, 수출자유지역 진출과정에서 저지·해산된 200여명의 학생들이 창동네거리로 몰려 들었다.

마산의 중심지인 창동, 부림시장, 오동동, 불종거리 일대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남성동 파출소를 공격하고 최루탄이 터지자 주위의 군중들도 자연스럽게 시위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군중들의 수는 불어나 학생의 비율은 줄어들고 행동의 주도권은 학생에서 시민대중의 손으로 옮겨갔다. 민중봉기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공화당사로 가자”라는 선동에 산호동 공화당사로 밀려가기 시작했다. 공화당사는 파괴되었다.

양덕동파출소, 산호동파출소가 불탔다. 북마산파출소도 마찬가지였다. 이날 시위는 19일 새벽 3시경까지 계속되었다.

<시위대의 습격으로 파괴된 마산 산호파출소>

 

시청, 파출소, 방송국 등의 공공건물에는 착검한 총을 든 군인들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장갑차와 탱크가 시가지를 누비고 다녔다. 살벌한 분위기였다.

정부는 마산지역의 항쟁을 ‘불순분자의 폭동’으로 왜곡하면서 재발방지를 위해 안간힘을 썼다.

언론은 그날 밤의 일을 한마디도 보도하지 않았다. 하지만 항쟁은 끝나지 않았다.

19일 저녁이 되자 많은 사람들이 시내중심가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관제언론의 상징인 MBC방송국과 경남매일신문사를 향해 돌을 던졌다.

시위군중들은 통금시간이 지난 11시까지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며 대치하다가 경찰과 군인의 진압부대가 총공세로 나오자 흩어지기 시작했다. 20일 새벽까지 시위는 산발적으로 계속되었다.

전날과는 달리 대학생들은 거의 참여하지 않았고 주로 10대후반, 20대초반의 실업자, 노동자들이었으며, 고등학생들도 많이 가담했다.

20일 정오 마산시 및 창원 일대에 위수령이 발동되었고 민중들의 의로운 반독재 투쟁은 ‘일부 학생과 불순분자의 난동’으로 왜곡되었다. 그렇게 민중들의 항쟁은 끝이 났다.

하지만 항쟁은 그걸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파국을 향해 치닫던 국내정치에 엄청난 충격을 던져주었다.

1026일 유신독재의 종말을 알리는 총소리가 울렸다. 박정희가 죽었던 것이다.

 

<마산 시위에서 발견된 사제소총. 경찰은 '불순분자'의 소행으로 발표했다>

 

-민중의 참여로 이어지고-

항쟁은 경남대 학생들에 의해 자연발생적으로 시작됐다.

물론 그 전부터 은밀히 시위가 계획되고 있었으나 16·17일 부산에서 먼저 시위가 시작되자 당초 예정됐던 22일의 경남대생 궐기계획이 갑자기 앞당겨진 것이다.

항쟁의 불길은 대학생들이 붙였지만 그 이후의 거리시위는 노동자와 점원, 상인 등 일반시민이 주도했다.

실제로 당시 군법회의에 회부돼 재판을 받46명의 직업을 보면 노동자가 21명으로 가장 많았고, 자영업자 4명, 실업3명, 학생 18명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물론 민간재판에 회부된 구속 학생 5명을 포함하면 대학생의 수는 23명에 이른다.

그러나 아직 명단이 밝혀지지 않은 나머지 연행자 454명은 대부분 일반시민들로 추정되고 있다.

항쟁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적극적, 공격적인 참여자라 할 수 있는 연행자, 검거자 중 대다수가 민중으로 규정할 수 있는 일반인들이었다는 점은 항쟁의주체가 누구였던가는 명확하다.

노동자들의 적극적 참여는 1979년 상반기에 휘몰아친 제2차 석유파동과 정부당국의 부가가치세제 강행으로 서민들의 생활은 더욱 궁핍해졌으며, YH사건으로 상징되는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한 무자비한 폭력적 탄압이 노동자들에게는 또다른 생존권의 위협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항쟁의 주체는‘유신대학’이라는 오명 속에 분노를 삭여온 대학생들, 왜곡된 경제구조 속에 생존을 위해 허덕이던 민중들이었다.

학생들이 앞장서고 노동자를 비롯한 시민들이 적극 호응해 투쟁의 질을 높였다. 

<1999년 부마민주항쟁 20주년을 맞아 마산 서항 근린공원에서 관계자들이 기념조형물을 제막하고 있다>

 

-“마산이 일어서면 정권이 무너진다”-

항쟁은 끝났다. 아쉬움도 컸다.

민주 변혁의 주체가 민중이라는 점은 확인되었지만 변혁운동으로서의 지향으로 정립되지 못한 채 지배집단의 물리적 대응에 쉽게 굴복했다.

어떠한 사회운동도 사회의 민주화와 민중의 생존권을 장악하고 있는 지배집단의 실체와 본질에 대한 이해,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변혁적 전망, 실천적 행위가 통일되지 않을 때 근본적인 문제해결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된 것은 커다란 교훈이었다.

폭발된 민중들의 힘을 지도하고 조직할 수 있는 중심세력이 형성되지 못한 것도 한계였다.

전국 차원의 운동으로 확산되지 못하고 마산·부산 지역에 그쳤다는 것도 아쉬움이었다.

하지만 마산·부산지역에서 일어난 항쟁의 성과는 적지 않았다.

유신체제는 내부 분열로 치달았고 10·26에 의하여 그 막을 내렸다.

10월의 부마항쟁1970년대 민주화 반독재 투쟁의 정점이었으며, 1980년대 5월의 광주항쟁과 함께 한 단계 질적으로 진전된 민족·민주운동의 모태였다.

그리고 항쟁은 마산시민에게는“마산이 일어서면 정권이 무너진다”는 자부심을 다시 한번 심어줬다.

3·15이후 처음으로 민중들의 정치적 진출 가능성을 보여주었으며, 이것은 한국 민중운동사에서 민중이 역사의 주체로서 변화될 수 있는 가능성과 잠재력을 보여 주었다.

한국 민중들의 지향점인 민족적 자주성과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가 여전히 극복되지 못하고 현실적인 과제로 남아있다.

10·18마산민중항쟁은 3·15 의거와 함께 우리 마산시민의 가슴 속에 아직 살아있다-휴화산 속에 끓는 마그마가 간직되어 있고, 마른 개천 아래 복류천이 흐르고 있는 것처럼”이라했던 어떤 이의 예측은 19876월항쟁으로 분출됐다.

민주주의가 유린되고 기득권층의 부정과 부패가 사라지지 않는한 저항은 계속될 것이다.<<<

남재우 / 창원대학교 사학과 교수

 

 

 

 

 

Trackback 0 Comment 2
  1. 임종만 2014.09.16 20:26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가심이 뛰네요.

    • 허정도 2014.09.18 22:41 신고 address edit & del

      방문 감사합니다. 잘 계시죠?

2014.09.01 00:00

마산·창원 역사 읽기 (15) - 해방에서 5·16까지

2. 청동기시대에서 10·18까지

2-8 해방에서 5·16까지

 

한 시대의 사회운동을 살피는 일은 현재 우리사회의 주류 기득권 세력이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지를 규명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게 마련이고, 사회를 바꾸려는 사람들이 있으면,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반대 세력도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사회운동이 궁극적으로 그 사회를 형성하고 있는 낡은 기득권 세력을 교체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때, 이에 맞서 사회운동을 방해하고 탄압함으로써 기득권을 확대 재생산해온 세력의 실체를 파악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우선 1945년 해방 직후의 상황부터보자.

당시 마산 지역사회의 여론주도층 인사들은 대략 세 가지 부류로 나뉜다. 사회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 그리고 친일파 출신인사들이 그들이다.

이들 3파는 해방 이틀 후인 1945817일 마산 창동 공락관(이후 시민극장으로 바뀜)에서 건국준비위원회(건준·위원장 명도석)를 함께 결성해 치안유지를 담당했다.

건준은 해방 후 지역에서 생겨난 최초의 자치기구인 동시에 사회단체였다.

이처럼 3파가 연합한 마산 건준에는 친일혐의가 있는 일제하의 시의원 출신 인사들도 참여하고 있었다.

그러나 위원장은 물론 조직과 서기, 그리고 실질적인 행동대 격인 치안대장 등 핵심요직은 모두 진보적인 사람들이 맡고 있었다.

 

-미군정과 함께 두 갈래로 나뉜 사회운동-

이같은 건준의 진보적 색채에 불만을 품은 친일인사와 무정부주의자들은 9월로 들어서면서 일제히 건준을 탈퇴하게 된다.

이들의 건준 탈퇴는 서울에 진주한 미군이 건준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밝힌 것과때를 같이하고 있다.

이 때부터 마산의 사회운동은 두 갈래로 나눠지게 된다.

<좌우익 분열 / 광복 2주년 기념행사를 따로따로>

 

사회주의자들은 건준을 중심으로 미 군정과 대립적인 관계에 놓이게 되며, 건준을 탈퇴한 이들은 ‘한민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미 군정에 적극 협조하게 된다. 이 단체는 이후 ‘국민회’로 이름을 바꿔 마산지역의 대표적인 우익단체가 된다.

여기서 활동하던 사람들은 또한 각종 우익 청년단체를 결성해 계속 세력을 확장해 나간다.

당시 우익단체의 대표적 인물은 주로 손문기·민영학(국민회), 유석형·손상진(광복청년단·대동청년단), 문삼찬, 조철제, 노병덕·구혜숙(민족청년단), 이인호(서북청년단) 등이었다.

이들은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경찰의 보조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등 초법적인 공권력을 행사하면서 특무대·경찰과 함께 민간인 학살사건을 주도하기도 했다.

19603·15의거 당시 반공청년단으로 이름을 바꾼 이들은 시위대를 향해 폭력테러를 자행하면서 무자비한 진압에 나서기도 했다.

3·15의거 이후에는 잠시 위축된 듯한 모습을 보였으나 19615·16군사쿠데타 이후 박정희 정권 치하에서 반공연맹으로 다시 규합한다.

이 단체는 오늘날 자유총연맹 등 관변단체의 모태가 됐다.

한편 건준에서 우익세력이 탈퇴한 직후 사회주의자들은 인민위원회와 민주주의 민족전선 마산시위원회 등을 결성해 미 군정의 탄압에 대항했다.

들은 특히 194610월 미 군정을 상대로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켜 마산에서 12~17명, 창원군에서 5명 등 많은 희생자를 냈다.

당시 10월 봉기에 참가한 경남 도민은 18개 시·군에서 최소 74000명, 최대 60만 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희생자의 숫자나 시위참여 인원으로만 본다면 19603·15의거나 1979년 부마민주항쟁보다 훨씬 대규모의 항쟁이었던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은 또 194727일에도 일제히 봉기를 일으켰으나 역시 경남·북에서 39명의 사망자를 낸 후 지하로 잠적하거나 월북하고 말았다.

<마산여자중학교 학생들의 휴전반대 시위 / 1953년> 

 

-10월 봉기 이후 저항세력 일소-

그러나 이들이 남긴 후유증은 컸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사회주의자들에게 협조한 혐의가 있는 국민을 상시적으로 감시·관리하기 위해 ‘국민보도연맹’이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여기에는 실적을 채우기 위해 좌익세력과 전혀 무관한 평범한 시민들도 무차별적으로 가입시킨 경우가 많았다.

이승만 정권은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이들이 북한 인민군에게 협조할 것을 우려, 모두 체포·구금한 후 대부분을 재판 절차도 없이 학살해버렸다.

이로 인해 마산에서도 무려 1680여 명이 학살당했다. 이로써 사회주의자는 물론 이승만 정권에 대한 저항세력은 모두 제거되어 버린 것이다.

이승만 정권의 폭압에 숨죽이고 있던 시민들은 19603·15 정선거를 계기로 봉기를 일으키게 된다.

3·15의거는 표면적으로 당시 야당이던 민주당이 주도했으나 민간인 학살 유족들의 한이 폭발한 사건이기도 했다.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물러나자 지역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사회운동은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운동이었다.

524일 노현섭·김용국 두 사람이 ‘정부는6·25 당시의 보련(保聯) 관계자의 행방을 알려라!! 만일 죽였다면 그 진상을 공개하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마산시내에서 침묵시위를 벌이면서 시작된 진상규명운동은 마산유족회와 경남유족회·전국유족회의 창립으로 이어진다.

 

노현섭(우측 사진)씨는 전국유족회장을 맡아 이 운동을 주도하지만 이듬해 5·16데타 직후 유족회 간부들이 모두 구속되면서 좌절되고 만다.

4·19에서 5·16에 이르는 기간은 흔히 혼란기로만 알려져 있다. 많은 운동단체가 생겨났고 연일 시위가 끊이지 않았으니 위정자의 입장에선 혼란기로 볼만하다. 그러나 이는 억눌렸던 요구의 자연스런 분출이었다.

4월혁명 때 민중이 흘린 피의 댓가로 집권한 민주당은 당연히 자유당 독재의 잔재를 일소하고 이승만 장기독재에 억울하게 희생된 피해자들의 복권을 추진했어야 했다.

그러나 민주당 정권은 이같은 국민의 요구와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민주당의 배려하에 이승만은 미국으로 뺑소니를 쳤지만 그 에게 빌붙어 권력을 누리던 국회의원들은 여전히 국회 의석의 과반수를 차지한 채 떵떵거리고 있었다.

국민들이 이들을 단죄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당연했다.

이에 따라 의사당 앞에는 대학생과 혁신세력을 중심으로 한 시위대가 매일같이 몰려가 데모를 하였고 부산에서도 대학생들에 의하여 국회해산 데모가 일어났다.

4·19이후 석방된 정치범의 복권을 요구하는 데모도 발생했다.

과도정부가 자유당 치하에서 정치범으로 복역하던 자들을 모두 석방은 했으나, 그들

에 대한 공민권을 회복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4·19 직후는 과연 혼란기 였나-

이승만 정권의 북진통일론에 눌려 잠재돼 있던 평화통일 논의도 활발하게 일어났다.

민족자주통일협의회와 영세중립화통일추진위원회를 비롯,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라는 유명한 구호를 남긴 남북학생회담 추진이그것이다.

마산의 혁신세력은 196055일 <마산일보>에 ‘한국 혁신세력 집결 마산 촉진회’ 명의의 격문을 발표하면서 활동을 재개하게 된다.

이들은 57일 혁신정당 발기인 46명 중 35명이 참석한 가운데 대회를 열고 한범석을 임시 의장으로, 이상두·김문갑을 부의장으로 선출하고 7개 부차장을 선임했다.

런 과정에 따라 마산의 혁신세력은 김문갑을 위원장으로 하는 사회대중당 마산시당을 중심으로 활동을 벌여나가지만 19615·16군사 쿠데타로 인해 다시 강제 해산되고 주요인물이 투옥되는 등 시련을 겪게 된다.

사회대중당 결성과 비슷한 시기에 발족된 한국영세중립화 통일추진위원회 역시 김문갑을 위원장으로 하고, 부위원장 김성립·김형문, 기획실장 김해용 등을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벌여나간다.

 

<1960년 영세중립화평화통일추진위원회 결정 / 현, 경남은행 창동 지점 앞>

 

특히 이 단체가 116일 무학초등학교 교정에서 개최한 집회에는 수천 명의 시민이 운집해 마산시민의 높은 통일 열망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4월혁명 이전까지 전국의 교사들은 독재정권의 충실한 하수인이었다.

그들은 3·15정선거 때도 어김없이 동원됐을 뿐 아니라 학생들이 궐기했을 때도 정권의 지시에 따라 데모를 막는 데 앞장섰다.

명 이후 자괴감을 느낀 교사들이 앞장서 교원노조를 결성, 교육민주화투쟁에 나선 것은 교사로서 최소한의 자존심을 회복하려는 몸부림이었다.

마산에서511일 교원노조 결성준비위가 발족되고 18일에는 성호초등학교 강당에서 공식 출범식을 갖는다.

초등위원장은 성호초교 교사였던 황낙구씨였고, 중등위원장은 마산고 이봉규씨가 맡게 된다.

그러나 이마저도 민주당 정권은 탄압으로 일관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민주당은 그 태생에서부터 친일파와 수구·반공 우익세력으로 구성된  한민당의 후신이었으니 4월혁명을 제대로 수행할 리가 없었다.

그러다보니 처음엔 기가 죽은채 분위기만 살피고 있던 3·15부정선거 원흉들이 나중에는 오히려 큰소리를 치며 7·29총선에 출마하는 등 반혁명세력의 준동이 되살아났다.

그 대표적인 케이스가 마산 3·15부정선거의 원흉이자 자유당 국회의원인 이용범의 재출마였다.

마산의 3·15청년동지회(회장 강대인)와 한얼동지회(회장 김봉세) 등 단체들은 창원 을구에서 무소속으로 재출마한 이용범을 규탄하며 오동동 자택 앞에서 후보 사퇴를 요구하는 단식농성까지 벌였다.

그러나 이런 활발한 사회운동은 19615·16군사쿠데타로 다시 단절되고 만다.

 

<5·16 군사 쿠테타 / 서울시청 앞 광장에 모습을 드러낸 박정희 소장>

 

영세중립화통일추진위의 김문갑, 피학살자유족회 노현섭, 교원노조 이봉규 씨 등은 모두 구속 수감된다.

모든정당·사회단체의 해산명령을 내린 군사정권은 1963년 다시 활동을 허용하면서 반공연맹 등 관변단체와 예총 등 관변 예술단체를 만들어 이들을 집중 육성한다.

이에 따라 지역사회도 다시 우익단체가 모든 기득권을 되찾게 된다.

3·15의거와 4·19혁명 직전까지 이승만 독재에 빌붙어 그의 선거유세를 다녔던 마산의 문화권력 이은상도 5·16군사쿠데타 이후 박정희 정권의 공화당 창당선언문을 써주면서 화려하게 복귀하게 된다.

또한 쿠데타의 주체세력 중 한명이었던 청와대 경호실장 박종규씨도 지역사회에 또 하나의 권력으로 부상하게된다.

이들 권력자와 각종 관변단체에 의해 장악된 마산의 지역사회는 1979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사실상 무저항의 도시로 전락했다.

다행히 부마민주항쟁이후 ‘민주성지’로서 체면을 되찾았지만, 해방직후와 3·15거 직후의 활발했던 진보적 사회운동의 명성을 회복하기에는 한참 멀어 보인다.<<<

김주완 / 경남도민일보 이사

 

 

 

Trackback 0 Comment 0
2014.07.07 00:00

마산·창원 역사읽기(7) - 민주화의 성지, 마산과 창원

 

1. 한국사 속의 마산·창원

1- 7  민주화의 성지, 마산과 창원

 

일제의 억압에 굴하지 않고 치열한 저항정신을 보여준 지역민들의 역사적 경험은 1960년대와 1970년대 이승만 독재와 박정희 독재정권에 대항하는 민주화운동의 성지로 자리잡았다.

마산에서의 3.15의거는 그 뒤 4.19 항쟁의 기폭제가 되었고, 이로 인하여 이승만 독재정권을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만들었다.

이승만 정권의 부도덕성은 도시의 지식인층이나, 학생들, 중간층들에게 반이승만, 반자유당이라는 성향이 투표로 나타났다.

1960년의 정.부통령 선거는 온갖 부정으로 인하여 2.28 대구에서의 학생시위, 제1.2차 마산봉기, 그리고 서울과 전국에서의 4.19항쟁, 4.26 교수단 시위와 이승만의 하야로 연결되었다.

1960년 3월 15일 오후 3시 30분에 오동동 불종거리의 민주당 마산당사를 뛰쳐나간 민주당 소속 정남규 도의원을 비롯한 간부와 당원 등 20여명은 당사 앞에 모여든 군중을 뚫고 “민주주의 만세”등 구호를 외치면서 해안 쪽으로 달려나갔다.

이렇게 자유와 민주사회 건설을 위한 항쟁은 시작되었다.

4월 11일 오전 11시 30분경 마산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오른쪽 눈에 경찰이 쏜 불발 최루탄이 박힌 마산상고 신입생 김주열군의 시체가 떠오르면서(아래 사진) 항쟁이 다시 시작되었다.

당시 경찰은 김군의 시체에 돌을 달아 바다 속에 던져 버렸던 것이었다. 격분한 시민들은 “살인경찰을 잡아라”고 외치면서 대규모 시위에 들어갔다.

해가 질 무렵 “이승만정권 물러가라”, “정.부통령 선거 다시 하라”등의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시위행진을 계속했다.

마산에서의 1.2차에 걸친 항쟁은 전국민의 항쟁이었던 4.19로 계속되었다. 더 이상 이승만정권은 권력을 유지할 수 없었다.

유신체제를 타도했던 마산항쟁은 부산의 항쟁소식을 접한 경남대생을 선두로 시위는 시작되었다.

아래 사진은 부마민주항쟁 당시 경남대학교 정문 앞 시위 상황으로 경찰과 학생들이 대치하고 있는 장면이다.

 

학생이 중심이었던 시위대들은 1979년 10월 18일 ‘독재타도’ ‘유신철폐’를 외치며 거리로 뛰쳐나왔다. 경찰의 강경진압에도 굴하지 않고 양덕동 공화당사와 관공서, 파출소를 공격했다.

수출자유지역의 노동자와 상당수의 고교생이 참여한 마산시위는 부산지역보다 한층 격렬했다.

유신정권은 민중들의 요구를 거부하고 10월 19일 마산 창원지역에 위수령을 발동하여 항쟁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마산의 항쟁은 이틀만인 20일 새벽에 진압되고 말았다. 조직적인 항쟁의 지도부가 없었던, 다만 민중의 자발적 참여로 이루어진 항쟁은 정권의 무차별 폭력에 의해 진압되고 말았던 것이다.

하지만 박정희 독재정권도 오래가지는 못했다. 10월 26일 박정희의 죽음으로 군부독재도 막을 내리고 말았다.

1979년 10월의 부산지역과 마산지역의 항쟁은 4.19이후 독재정권에 대항하는 학생과 다수 시민이 봉기한 최초의 사건이었다.

유신정권의 억압적 통치구조와 부정부패에 대한 민중의 불만이 자연발생적으로 분출된 항쟁으로 군부독재를 종식하고 민주화를 이루는데 일대 전기를 가져왔다.

그 뒤 1986년 6월 항쟁으로 민주화에 대한 요구로 계속 이어졌다.

마산.창원지역은 한국사회가 산업화되는 과정에서 그 근본적 모순을 안고 있었던 지역이었다. 마산수출자유지역, 창원공단은 한국산업화 과정에서의 사회적 모순을 대변해주고 있었다.

이로 인하여 노동운동 등이 어떤 다른 지역보다 힘차게 계속되었다. 지금도 이 지역은 한국사회의 자주와 평등을 위한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마산.창원지역은 언제나 한국사회발전의 중심에 있었으며, 앞으로도 한국사회의 발전과 함께 할 것이다.<<<

남재우 / 창원대 사학과 교수

 

 

 

Trackback 0 Comment 1
  1. 버크하우스 2014.07.07 00:18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잘 보고 갑니다. 오늘도 보람찬 하루 되세요. ^^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3

Ⅱ. 얼음장수의 정체, 증언 및 평가 2. 녹취와 증언록 다음은 하상칠이 2010년 7월 21일 14시 3 15의거기념사업회 회의실에서 당시 백한기 회장 앞에서 2시간여에 걸쳐 진술한 증언 녹취록을 풀어 그해 말 동 사업회에서..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2

Ⅱ. 얼음장수의 정체, 증언 및 평가 1. 연구 대상자 프로필 (이 부분은 연구 대상자가 필자의 장인이어서 평소 필자가 그에게 들어서 알고 있는 사항과 그의 사망 후 필자가 이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후 그의 가족, 일가, 지인..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1

이 글은 1960년 3․15의거 당일 야간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가했던 한 개인의 증언을 바탕으로 그의 개인사를 하나의 창으로 삼아 역사적 사건을 재조명한 경남대학교 경제금융학과 서익진 교수의 논문이다. 연구는 사적 기록이나 증..

걸작 - 이집트 룩소르 구르나 마을 - 4

구르나 마을이야기 - 2 《극장》 극장은 아름다운 내부공간과 무대를 가지고 있었다. 햇빛을 가리기 위해 담쟁이가 덥혀있었다는 객석 회랑 목조 파고라 위의 담쟁이는 이미 찾아볼 수 없었지만 흙으로 빚어진 구조물은 모두 원형대로 ..

걸작 - 이집트 룩소르 구르나 마을 - 3

구르나 마을 이야기 - 1 일행이 나일강변에 자리한 경관 좋은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던 오후. 안내자와 함께 조그만 배를 타고 나일강을 건너 구르나 마을로 향했다. 구르나 마을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현지 안내자 덕분이었다. 그..

걸작 - 이집트 룩소르 구르나 마을 - 2

위대한 건축가 하싼 화티(Hassan Fathy) - 2 하싼 화티가 구르나 마을을 건설할 1940년대 중반, 그 당시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던 이집트는 서양식 건축이 판을 치고 전통적인 이집트 양식의 건물들은 사라져가고..

걸작 - 이집트 룩소르 구르나 마을 - 1

위대한 건축가 하싼 화티(Hassan Fathy) - 1 (이 글은 이집트 여행 중 우연히 만났던 하싼 화티의 구르나 마을 경험담이다. 오래 전 일이다. 지금 생각해도 그 우연은 내게 축복이었다. 울렁이는 감격으로 구르나를 둘..

걸작 - 중국 사천성 도강언(都江堰) - 4

도강언(都江堰)에 올라 이빙(李冰)을 생각하다 저명한 중국의 역사학자 위치우위(余秋雨)는, 중국역사상 가장 감동적인 건축물은 만리장성이 아니라 도강언이라고 했다. 도강언의 외관상 규모가 만리장성처럼 거대한 것은 아니지만, 많은..

걸작 - 중국 사천성 도강언(都江堰) - 3

위대한 목민관 이빙(李冰) 도강언 주변 일대는 성도나 인근 지역 사람들이 쉴 수 있는 아름다운 공원이기도 했다. 울창한 숲 속에서는 특유의 목소리를 내는 사천 매미가 왕왕거리며 울어댔고, 서북쪽의 산록에서는 시원한 고원 바람이..

걸작 - 중국 사천성 도강언(都江堰) - 2

5백 갈래로 나누어진 민강(岷江) 도강언의 시설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취(魚嘴)와 비사언(飛沙堰), 보병구(寶甁口)가 그것이다. 이 세 시설은 따로 있으나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결과적으로 하나의 유기체적 결합..

걸작 - 중국 사천성 도강언(都江堰) - 1

천부지국(天府之國) 언젠가 중국 사천성 일대를 여행하였다. 그 동안 십 수차례 중국을 드나들었지만, 보면 볼수록 놀라운 것은 수천수만 겹 녹아있는 역사의 층위다. 대륙은 깊고 넓었으며 언제나 새로운 것을 보여 주었다. 지구상에..

노회찬의 추억
노회찬의 추억 2018.07.30

노회찬 의원과 저의 인연은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매체를 통해 저만 그를 알았을 뿐 그는 저를 몰랐습니다. 노회찬 의원을 직접 만난 것은 2016년 2월쯤이었습니다. 그해 4월 선거를 앞두고 창원에 내려왔을 때였습니다. 처음 만..

북한건축 - 건축은 건축의 눈으로 보아야

(지난 5월 29일 「건축사신문」에 실렸던 글입니다. 글 중 '우리'는 건축사를 말합니다.) 남북 정상이 판문점에서 손을 맞잡은 그 날, 이 나라 모든 국민은 TV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만찬장에서 제주도 소년 오연준의 목소리..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14 - 1980년대 이후

5) 1980년대 이후 - 4 아파트의 대중화는 주거설비의 획기적인 변화를 불러왔다. 아파트 사용자들은 첨단시설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가장 큰 변화는 주방시설에서 비롯되었다. 주부의 가사노동을 줄여줄 뿐 아니라 세련된 디자인과..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13 - 1980년대 이후

5) 1980년대 이후 - 3 2002년 말 우리나라 주택 보급률은 100%를 넘었다. 1인 가구를 포함하는 신주택보급률 역시 2008년에 100%를 상회(100.7%)함에 따라 주택의 양적 공급이 부족한 상태는 아니라고 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