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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3.09 00:00

마산 창원 역사 읽기 (42) - 겨울 언덕에 서서, 『마산문화』

5. 삶과 문화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

5-7  겨울 언덕에 서서, 『마산 문화』

 

1979년의 부마항쟁은 10·26을 이끌어 내었고 곧바로 이른바 ‘서울의 봄’으로 이어지면서 민주정부 수립에 대한 기대를 한껏 고양시켰다.

하지만 1980년의 5·18광주학살의 피를 머금고 치솟은 전두환 5공정권의 반동적인 일방통행을 손놓고 지켜 볼 수밖에 없는 무기력함에 모두는 전율하고 절망해야만 했다.

한참 동안의 강요된 침묵과 개인차원으로 분리된 침잠의 시간이 흘러 갔다.

그러다 1982년 언저리로 접어 들면서 새로운 움직임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경남양서보급회 집현전에 관여했던 사람들이 소모임 형태로 모이면서 경제와 한국근대사에 대한 세미나가 진행되었고, 경남대와 창원대, 창원전문대 등에서는 탈춤과 마당극을 통해 시련을 딛고 일어서는 신명과 민중의식을 체현하고자 하는 몸짓도 있었다.

아울러 청년문학도들과 일부 노동현장에서 시문학 동인 활동이 태동하기도 했다.

엄혹한 시대적 상황에서 이같은 움직임의 지속을 위해서는 울타리가 필요했다. 그 역할을 한 곳이 마산YMCA  황주석, 이상익 총무와 요가운동가 신석규 씨가 이끌던 기독교장로회 한교회와 연극인 김종석 씨가 운영하던 맷돌소극장이었다.

종교와 문화를 보호막 삼은 이곳에서 만나 어울리고 이야기하면서 이를 하나의 새로운 운동으로 가꾸어 나가고자 하는 논의가 이루어졌고 그 모델의 하나를 무크지 방식에서 찾았다.

5공 출범과 동시에 상당수의 정기간행물 등록이 취소된 상황에서 그 돌파구로 모색돼 나온 것이 잡지와 단행본의 결합방식인 부정기 간행물 ‘무크(MOOK)’였는데, 당시 자유실천문인협의회의『실천문학』, 광주지역의『남풍』등이 무크지로 나오고 있었다.

마산에서도 무크지 운동을 시도해 보기로 하고 맷돌 소극장에다 ‘도서출판 맷돌’이라는 출판사 등록을 하면서 이를 발행처로 삼기로 하고, 편집인은 박진해, 주대환, 서익진, 강영혜, 박영주, 이재업 등으로 꾸려 ‘마산문화’의 창간 작업에 나섰다.

<발간된 『마산문화>

 

-『마산문화』의 창간과 뜨거운 반향-

갓 군대를 제대했거나 대학에 재학중이기도 한 20대 중후반의 청년층이 주도한『마산문화』의 창간이 가능했던 것은 1970년대 재경 마산학우회의 회지인「남도」와 경남양서보급회의 회보인「집현보」의 발간 경험에 힘입은 바 컸다.

편집과 인쇄에 필요한 비용을 주위의 찬조금으로 십시일반 염출해 충당하는 방식과 공동 토론을 거쳐 발로 뛰어 취재해서 정리한 지역 바로알기를 주요내용으로 하는 원칙을 이어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산문화』1 “겨울언덕에 서서”는 마산시민의 독자적, 지방자치적 문화의 형성을 주창하면서 이에 부합되는 흐름을 찾아 소개하는데 역점을 두었다.

당연하게도 예총이란 관변적이고 중앙집권적 구도에 함몰되어 있는 기성 문화인에게서  이를 찾기란 애시당초 불가능한 것이어서 눈길을 동신제와 지신밟기라는 전통민속문화로 돌려보고 청년문화인의 거칠지만 청신한 몸부림에 초점을 맞추어 보기도 했다.

아울러 장애로 인한 고독 속에서도 거친 현실에 시선을 두고 저항의 몸짓을 마다하지 않았던 이선관 시인을 애정으로 비평하는 글도 실었다.

특히 마산수출자유지역의 노동현실을 카메라를 들이대듯 생생하게 보여주어 사실상 1980년대 최초의 노동소설로 지칭되어 마땅한 최순임(본명은 주식회사 삼미의 고경엽)의 소설 ‘수출자유지역의 하루’를 소개하기도 했다.

이밖에 역사와 시대상황을 바로 보기위해 ‘한국근대사 연구자료’와 ‘알제리 민족해방전쟁’, ‘니카라구아에서의 비밀전쟁’ 등도 실었다.

1,500부를 발간한 창간호는 필진과 발간찬조금 지원자를 대상으로 한 50여부의 기증본을 제외하고는 철저히 인맥을 통해 조직적으로 판매했는데 창간호 거의 전부가 유가로 판매되어 후속발간을 위한 재원확보에 큰 도움이 되었다.

판매가 마산,창원지역 중심으로 이루어졌음에도 예상 밖으로 서울과 부산, 광주 등지에서 뜨거운 반향이 일었다.

이는 다른 지방도시에서 신선한 충격으로 받아 들여졌을 뿐만 아니라 서울의 민족문학운동 진영에게도 지방자치적 새 마산문화의 형성을 기치로 내건 방향성과 그에 부응하는 내용은 일정하게 평가되었기 때문이었다.

지역내에서의 반응은 보다 직접적이었다. 마산문화 후속작업에 동참하고자 하는 청년문화인들의 열망이 크게 고조되었고, 상대적으로 일부 기성문화인 가운데서는 위계질서를 뒤흔든 시도에 불쾌해 하면서 심지어 빨갱이 잡지로 매도하는 언동이 나오기도 했다.

 <중앙일보에 소개된 『마산문』기사, 1984. 10. 4일자>

 

이같은 분위기 속에서 발행인과 편집인은 안기부와 경찰서 정보과에 불려 다니면서 용공성 여부를 취조 당하기도 하고, 문화공보부로부터 정기간행물로 발행하지 말라는 경고를 받기도 했다.

이와 함께『마산문화』의 발간에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받아 부산『토박이』, 대전의 『삶의 문학』, 광주의 『일과 놀이』등 각 지역에서의 무크지 발간이 이어졌다.

이러한 반향은 당초 운동의 새로운 수단으로 무크지에 착안한 『마산문화』진영을 크게 고무시키면서 후속발간 작업에 투지를 불태우게 했다.

<『마산문화』3호에 실린 삽화>

 

-지역민의 삶의 현장을 담아내고-

마산문화는 1985년 연말까지 제목을 바꿔가며 매년 한권씩 4호까지 발간되었다.

2권은 한국근대사 속의 마산을 특집으로 다루었는데, 처음 원고청탁 과정에서는 특집의 무게를 더하기 위해 “일제하 마산의 사회운동”은 원로 언론인 안윤봉 선생에게, 3.15의거는 여진 선생에게 부탁을 했고 실제로 각각 50여 매의 원고가 들어 왔다.

그러나, 사회주의 계열의 운동을 비롯해 역사학계의 최신 연구성과까지 반영하고자 했던 편집방침에는 다소 미치지 못해 고심 끝에 두 분의 원고는 참고자료로 해 편집진이 새로 작성하는 만용을 부리기도 했다.

엄청난 결례이기도 했지만『마산문화』가 당시 신선하게 각인되는 과정에서 원칙고수를 위한 이같은 고충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다.

민중적 세계관을 창조하고 널리 퍼뜨리는 민중문화운동의 일익을 담당하겠다고 선언한 제3권에서는 신기농민회, 삼성라디에타 노조, 관방마을 농민투쟁과 이를 마당극으로 꾸며 공연한 과정 등 지역 민중들의 삶의 현장에서 전개된 투쟁사례들이 많이 소개되고 마산의 문학운동이 민중문학운동의 길로 나아가야 함을 주창하고 있다.

민간언론-민중언론의 역할까지 감당하고자 한 제4권에서는 어용언론들이 외면하고 왜곡한 통일노조, 마산택시노조, 진양 고추재배농들의 생생한 투쟁이 진실하게 담겨 있다. 그리고, 10·18부마항쟁의 과정과 의미를 다루 는기록화 작업에 나서기도 했다.

그렇지만 마산문화는 제4권을 마지막으로 후속작업을 중단했다. 이미 4권이 나온 1985년말, 1986년초 즈음은 5공군사정권에 반대하는 투쟁이 우리 지역의 경우에도 노동, 농민, 청년학생, 문화 등의 영역으로 급격히 분화되어 크게 고양되는 추세에 있어 1년에 한차례 발간되는 마산문화에 이를 모두 담을 수도 없거니와 기동성면에서도 형편없이 떨어지는 처지에 놓여 버렸기 때문이었다.

 이처럼 변화된 상황을 겸허하게 인정하면서 마산문화 진영이 서로의 역량을 능력껏 발휘할 수 있는 영역으로 흩어져 투신하는 방향으로 정리가 되면서 마산문화의 발간작업은 종료되었다.

마산문화의 1권에서 4권까지 시대적 상황 탓으로 많은 필진이 가명과 차명으로 실려 있다. 이 글을 통해 밝히고자 한다.

최순임(고경엽), 박명윤(박진해), 유종영(주대환), 이호민(이태수), 김일산(김영찬), 오민혁(강정근), 조윤돌(한갑현), 김원철(정정화)

 

박진해 / 당시 마산MBC PD(후에 사장 역임), 『마산문화』초대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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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15 00:00

마산·창원 역사 읽기 (17) - 다시 민주성지 입증한 10·18 민중항쟁

2. 청동기시대에서 10·18까지

2-10 다시 민주성지 입증한 10·18 민중항쟁

 

학우여러분! 지금부터 제 말을 잘 들어 주십시오.

지금 우리는 약 1시간 이상을 이렇게 멍청히 앉아만 있습니다. 도대체 지금 이렇게 앉아 무엇을 기다리고 있습니까. 이것이 바로 경남대의 모습입니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 경남대만 과거 유신헌법을 유일하게 전국대학 중에서 지지했다는 치욕적인 이유로 현재 전국대학생연합회에 조차 가입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입니까.

……지금 부산에서는 연 이틀동안 우리의 학우들이 피를 흘리며 유신독재에 맞서 처절히 싸우고 있습니다.

이 사실을익히 알면서도이렇게 앉아만 있다니 기가 찰일 입니다.

 

19791018일 오후 2시가 조금 넘은 시간, 경남대 도서관 앞에 모인 1500여명의 학생들은 어느 대학생의 연설을 듣고 있었다.

 “와 나가자!”는 함성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민주회복’, ‘학원자유’, ‘독재타도’등의 구호가 뒤따랐다.

유신독재에 저항했던 마산지역의 항쟁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1970년대 한국사회 모순의 중심, 마산-

5·16 군사쿠데타로 시작된 박정희 정권은 1972년 영구독재를 위한 유신헌법을 만들었다. 유신헌법은 철저한 사회통제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대통령의 권한은 비약적으로 확대 강화되어 입법, 사법, 행정의 3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대통령 선출은 국민 직선이 아니라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뽑는 간선제로 바뀌었으며,  임기는 6년으로 연장시키는 동시에 중임제한조항을 철폐하여 영구집권을 가능하도록 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배체제의 안정, 정권의 안정이라는 목적은 쉽게 달성되지 않았다.

70년대 박정권의 독재를 가능하게한 것은 긴급조치였다. 9호에 걸친 긴급조치는 각종 민주화 투쟁을 탄압하였다.

긴급조치 9호는 긴급조치라는 이름과 걸맞지 않게 1975년부터 4년간이나 지속되었다.

긴급조치는 온 국민의 생활에 직접적인 제약을 가하면서 침묵하는 공포분위기를 조성하였다.

긴급조치에 해당하는 내용은 광범위하였다.

유언비어의 날조와 유포, 학생들의 불법집회·시위·정치간섭행위, 유신헌법을 부정·반대·왜곡·비방·개정 및 폐기를 주장하는 청원·선동 또는 이를 보도하는 일체의 행위를 금지하는 반민주적인 것이었다.

유신헌법 아래서의 정치질서는 기본적인 민주주의 원리마저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한국적민주주의’라는 말로 합리화했다.

이 개념은 국민대중에게 광범위하게 교육·선전·계몽됨으로써 체제유지를 위한 이데올로기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열악한 상황에서도 민중들의 반독재 투쟁은 끈질기게 계속되었다.

한편 박정희정권의 경제개발계획은 보릿고개로 표현되던 극단적 기아를 추방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고도성장이라는 미명아래 빈부격차는 확대되었고, 한국경제의 대외의존도는 높아만 갔다.

1970년 노동자 전태일의 죽음, 1979년 YH여공들의 신민당사 농성은 최소한의 생존권 조차 보장받지 못한 민중의 불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였다.

마산지역 또한 1970년대의 한국사회가 지닌 모순에서 벗어나 있지 않았다. 오히려 마산·창원지역은 산업화과정에서의 한국경제의 모순이 집약되어 나타난 지역이었다.

1970대 초부터 수출자유지역, 창원기계공업공단 등의 대규모 공단이 조성되면서 상공업도시로 급격하게 팽창하였다.

농촌지역의 노동력이 대량 유입되면서 인구가 폭발적으로 증가하였고, 이것은 상대적으로 저임금구조를 유지하는 원천이 되었으며,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허덕이는 노동자층과 생활의 터전을 확보하지 못한 도시빈민층이 확산되었다.

1979년의 불황은 이 지역에도 치명적인 것이었다. 경기침체에 따라 휴업, 폐업, 노동자 감원, 조업단축, 임금체불 등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임금체불, 실직자들이 증가하는 가운데 노사분규는 급증했다.

이것이 마산지역에서의 항쟁이 노동자가 적극 참여했던 원인이었다.

<항쟁 당시의 신문 보도(1979. 10. 21)>

 

-초기 시위 주도했던 대학생들-

경남대학을 빠져나온 시위대는 경찰의 저지선을 뚫고 시내쪽으로 진출했다.

오후 53·15의거 탑 주위로 수백명의 학생이 모여들었다. 시위 경험이 없던 학생들은경찰의 제지를 뚫을 수 없었다.

오후 7시무렵 시내진출, 수출자유지역 진출과정에서 저지·해산된 200여명의 학생들이 창동네거리로 몰려 들었다.

마산의 중심지인 창동, 부림시장, 오동동, 불종거리 일대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남성동 파출소를 공격하고 최루탄이 터지자 주위의 군중들도 자연스럽게 시위에 가담하기 시작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군중들의 수는 불어나 학생의 비율은 줄어들고 행동의 주도권은 학생에서 시민대중의 손으로 옮겨갔다. 민중봉기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공화당사로 가자”라는 선동에 산호동 공화당사로 밀려가기 시작했다. 공화당사는 파괴되었다.

양덕동파출소, 산호동파출소가 불탔다. 북마산파출소도 마찬가지였다. 이날 시위는 19일 새벽 3시경까지 계속되었다.

<시위대의 습격으로 파괴된 마산 산호파출소>

 

시청, 파출소, 방송국 등의 공공건물에는 착검한 총을 든 군인들이 경비를 서고 있었다.장갑차와 탱크가 시가지를 누비고 다녔다. 살벌한 분위기였다.

정부는 마산지역의 항쟁을 ‘불순분자의 폭동’으로 왜곡하면서 재발방지를 위해 안간힘을 썼다.

언론은 그날 밤의 일을 한마디도 보도하지 않았다. 하지만 항쟁은 끝나지 않았다.

19일 저녁이 되자 많은 사람들이 시내중심가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관제언론의 상징인 MBC방송국과 경남매일신문사를 향해 돌을 던졌다.

시위군중들은 통금시간이 지난 11시까지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며 대치하다가 경찰과 군인의 진압부대가 총공세로 나오자 흩어지기 시작했다. 20일 새벽까지 시위는 산발적으로 계속되었다.

전날과는 달리 대학생들은 거의 참여하지 않았고 주로 10대후반, 20대초반의 실업자, 노동자들이었으며, 고등학생들도 많이 가담했다.

20일 정오 마산시 및 창원 일대에 위수령이 발동되었고 민중들의 의로운 반독재 투쟁은 ‘일부 학생과 불순분자의 난동’으로 왜곡되었다. 그렇게 민중들의 항쟁은 끝이 났다.

하지만 항쟁은 그걸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파국을 향해 치닫던 국내정치에 엄청난 충격을 던져주었다.

1026일 유신독재의 종말을 알리는 총소리가 울렸다. 박정희가 죽었던 것이다.

 

<마산 시위에서 발견된 사제소총. 경찰은 '불순분자'의 소행으로 발표했다>

 

-민중의 참여로 이어지고-

항쟁은 경남대 학생들에 의해 자연발생적으로 시작됐다.

물론 그 전부터 은밀히 시위가 계획되고 있었으나 16·17일 부산에서 먼저 시위가 시작되자 당초 예정됐던 22일의 경남대생 궐기계획이 갑자기 앞당겨진 것이다.

항쟁의 불길은 대학생들이 붙였지만 그 이후의 거리시위는 노동자와 점원, 상인 등 일반시민이 주도했다.

실제로 당시 군법회의에 회부돼 재판을 받46명의 직업을 보면 노동자가 21명으로 가장 많았고, 자영업자 4명, 실업3명, 학생 18명 등으로 나타나고 있다.

물론 민간재판에 회부된 구속 학생 5명을 포함하면 대학생의 수는 23명에 이른다.

그러나 아직 명단이 밝혀지지 않은 나머지 연행자 454명은 대부분 일반시민들로 추정되고 있다.

항쟁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적극적, 공격적인 참여자라 할 수 있는 연행자, 검거자 중 대다수가 민중으로 규정할 수 있는 일반인들이었다는 점은 항쟁의주체가 누구였던가는 명확하다.

노동자들의 적극적 참여는 1979년 상반기에 휘몰아친 제2차 석유파동과 정부당국의 부가가치세제 강행으로 서민들의 생활은 더욱 궁핍해졌으며, YH사건으로 상징되는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한 무자비한 폭력적 탄압이 노동자들에게는 또다른 생존권의 위협으로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항쟁의 주체는‘유신대학’이라는 오명 속에 분노를 삭여온 대학생들, 왜곡된 경제구조 속에 생존을 위해 허덕이던 민중들이었다.

학생들이 앞장서고 노동자를 비롯한 시민들이 적극 호응해 투쟁의 질을 높였다. 

<1999년 부마민주항쟁 20주년을 맞아 마산 서항 근린공원에서 관계자들이 기념조형물을 제막하고 있다>

 

-“마산이 일어서면 정권이 무너진다”-

항쟁은 끝났다. 아쉬움도 컸다.

민주 변혁의 주체가 민중이라는 점은 확인되었지만 변혁운동으로서의 지향으로 정립되지 못한 채 지배집단의 물리적 대응에 쉽게 굴복했다.

어떠한 사회운동도 사회의 민주화와 민중의 생존권을 장악하고 있는 지배집단의 실체와 본질에 대한 이해, 그리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변혁적 전망, 실천적 행위가 통일되지 않을 때 근본적인 문제해결이 어렵다는 것을 알게된 것은 커다란 교훈이었다.

폭발된 민중들의 힘을 지도하고 조직할 수 있는 중심세력이 형성되지 못한 것도 한계였다.

전국 차원의 운동으로 확산되지 못하고 마산·부산 지역에 그쳤다는 것도 아쉬움이었다.

하지만 마산·부산지역에서 일어난 항쟁의 성과는 적지 않았다.

유신체제는 내부 분열로 치달았고 10·26에 의하여 그 막을 내렸다.

10월의 부마항쟁1970년대 민주화 반독재 투쟁의 정점이었으며, 1980년대 5월의 광주항쟁과 함께 한 단계 질적으로 진전된 민족·민주운동의 모태였다.

그리고 항쟁은 마산시민에게는“마산이 일어서면 정권이 무너진다”는 자부심을 다시 한번 심어줬다.

3·15이후 처음으로 민중들의 정치적 진출 가능성을 보여주었으며, 이것은 한국 민중운동사에서 민중이 역사의 주체로서 변화될 수 있는 가능성과 잠재력을 보여 주었다.

한국 민중들의 지향점인 민족적 자주성과 민주주의에 대한 요구가 여전히 극복되지 못하고 현실적인 과제로 남아있다.

10·18마산민중항쟁은 3·15 의거와 함께 우리 마산시민의 가슴 속에 아직 살아있다-휴화산 속에 끓는 마그마가 간직되어 있고, 마른 개천 아래 복류천이 흐르고 있는 것처럼”이라했던 어떤 이의 예측은 19876월항쟁으로 분출됐다.

민주주의가 유린되고 기득권층의 부정과 부패가 사라지지 않는한 저항은 계속될 것이다.<<<

남재우 / 창원대학교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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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임종만 2014.09.16 20:26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가심이 뛰네요.

    • 허정도 2014.09.18 22:41 신고 address edit & del

      방문 감사합니다. 잘 계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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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한국전쟁기의 학교수업 Ⅱ - 떠돌이 수업 초등학교 5학년 때였던 1952년의 학교생활엔 참 변화가 많았다. 담임선생님도 세 번이나 바뀌었고 교실도 다섯 번이나 옮겨 다녔다. 그리고 전입생도 그 해에 갑자기 불어났다. 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