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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4.11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84. 105인 사건의 후환, 85. 역장의 폭행

84. 105인 사건의 후환

 

마산원동회사가 발족하기 훨씬 오래전, 초대 조선총독 사내정의(寺內正毅)가 북한을 초도 순시할 때의 일이다.

조선인 지사(志士)를 탄압하기 위해 조만식 등 1백 수십 명을 타진하고 사내(寺內)암살 음모라는 모략을 조작했다.

이것을 트집하여 지방에 산재한 열혈지사(熱血志士)까지 마수가 뻗쳐졌던 것이다.

원동회사 사옥 자리에서 학부(대한제국 문교부) 편찬교과서를 판매하던 김지관(서울 출신)에게 뜻하지 않던 한 장의 편지가 배달되었다.

발행국 소인은 불명한 것이나 내용을 약기(略記)하면 ‘3년 전에 우리의 원수이며 한국민의 대적인 이등박문을 안중근 의사가 죽였으니 이번엔 사내(寺內)라는 흉적을 처치해야 안되겠냐? 이 글월을 받는 즉시 때를 잃지 말고 거사준비를 하라!’

이 글을 본 김지관은 저들의 음모임을 직감하고 곧 헌병대에 연락, 자기는 전연 관계가 없음을 주장했다.

그러나 도리어 10여 일을 구속당하고 무수한 고문을 면치 못했다. 그 여독으로 장구한 시일을 두고 병상에서 신음한 일이 있었다.

  

 

85. 역장의 폭행

 

1923121일자로 남선 철도가 마산 군북간 열차를 운행하게 하였던 이듬해인 192411일 북마산 역사(驛舍)에서는 역장 이하 역원 전원이 신년 축하회를 열고 연회가 바야흐로 방감(方酣)하였을 때 역장이란 자가 대취명정(酩酊)하여 전후불각(前後不覺) 추태가 이만 저만이 아니었다.

더욱이 신입 조선인 역원에 대한 역장의 언사는 너무도 차별적이고 모욕적이어서, 이 굴욕을 참을 수 없었던 강진종 역원이 흥분을 억누르고 온건하게 이를 만류하였으나 역장은 오히려 격분하여 폭행을 가하는가 하면, 사무실 테이블과 의자를 마구 던지고 주전자와 그릇들이 부서져서 일대 수라장으로 변하였다.

이 춘사(椿事)가 마침 조선일보 지방판 간지(당시는 월 몇 회 타브로이드 간지를 증쇄하고 있었다)에 크게 보도되어 남선철도 개설 한 달 만에 초대 역장의 탈선행위는 극히 불명예스럽다 하여 규탄의 대상이 되었으며,

그 징계로 역장은 함북의 일한촌(一寒村)으로 추방되었고, 피해자인 강은 억울하게도 함안역으로 좌천됨으로써 사건은 일단락되었다.

후일담이지만 공교롭게도 역장의 처가와 취재기자와의 집은 이웃으로 지호지간(指呼之間)이라 역장 처로부터 적지 않은 원성을 들었던 것은 불문가지의 일이며, 탈선 사고 그 자체를 시인하면서도 신문의 위력이란 과연 무서운 것이라는 여론이 당시 분분하였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북마산역 전경. 사진의 건물이 위 사건이 발생했을 때의 건물인지는 명확치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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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08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21. 간판칠갑의 사무소, 22. 철도 이야기

21. 간판칠갑의 사무소

 

마산에 간판 많기로 이름난 점포는 신마산 함흥집 자리의 석견옥(石見屋)이라는 신약 도매상이었다.

간판을 보면 대학목약(大學目藥), 미안수(美顔水) 하루나, 대전위약(大田胃藥) 등을 비롯하여 장방형의 작은 간판이 20여 개나 되었는데,

제내과(諸內科) 자리 건너편 3층 건물로 신축 이전 후에는 없어졌고, 본래 점포에는 ‘고마야’라는 상호의 오복점(吳服店)이 들어 앉았다.

몇해 후에는 민의소 건너편에, 즉 지금의 중앙병원 자리에 노농동우회(勞農同友會)와 조선일보 지국이 자리잡고 난 뒤로는 대소 간판이 십 수개가 붙었는데 기억되는 명칭은 다음과 같다.

노농문고(서적 대부분이 ML당원 김형두의 장서), 무산자신문(日共의 佐野學 主宰), 민중신문(일본의 赤松克磨 주간), 혜성사진(彗星社進, 스스메), 월간전투지(月刊戰鬪誌, 사회주의자이면서 일본 공산당을 打罵하던 福田狂二 주간), 토벌(討閥, 주로 日共의 파벌행동을 공격한 월간지 福田理三郞 주간), 壁新聞.

※ 사진에서 보듯이 함부로 내다거는 간판의 심각성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22. 철도 이야기

 

마산 본역을 중심점으로 하여 인근 각 역의 해발고차는 다음과 같다.

마산 본역 - 북마산역 38m - 중리역 96.21m - 구마산역 18m - 창원역 47.38m - 창원 현재 터널 56.72m - 창원 구 철도 고개 96.96m,

창원터널이 개통되기 전까지 구 철로 즉, 창원 고개를 오르내리던 증기 기관차는 성능이 여간 강력한 것이라도 고개 중턱 - 포교당과 향교를 지나고부터는 숨길이 가빠서 일단 정지 아니면 뒷걸음을 칠 때에는 승객의 숨길마저 허덕이게 한다.

눈비가 내리는 날은 덕산에서 창원으로 넘어오는 것이나 창원서 넘어가는 차는 몇 미터씩은 저절로 스리퍼하는 것이고, 숨이 차서 차가 허덕거릴 경우에 장난 좋아하는 청년들은 훌쩍 뛰어내려 용변을 보는 일도 허다하여 승객을 웃기기도 하였다. 

 

<삼역용지 총평수(三驛用地 總坪數)>

마산본역 용지 : 106,476평

북마산역 용지 : 7,705평

구마산역 용지 : 11,637평

구마산역 - 본역간 노선 용지 : 6,521평

북마산역 - 본역간 노선 용지 : 3,653평

이상 135,476평(단 불하된 관사 및 기타 부지 제외) 마산 본역 용지를 제외하면 29,516평이다.

※ 지금은 없어진 마산의 세 역 사진

<마산 - 삼랑진 간 터널>

마산 - 삼랑진(舊 松旨)간 ‘터널’은 세 곳이 있는데 길이는 다음과 같다.

창원터널 : 438m

마산(馬沙)터널 : 329m

생림(生林)터널 : 485m<<<

※ 아래는 현재 마산역의 준공식 날 사진. 사진 속 건물은 수년 전 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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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19 07:00

새단장한 구름다리가 달갑지 않은 이유


옛 북마산역 자리의 구름다리가 새단장을 하고 있다.


계단과 육교상판에 합성목재를 덧대고, 기존 철재난간도 모두 잘라내어 합성목재로 난간을 설치하고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원래보다 한결 깔끔해졌다.

구름다리를 단장하는 공사가 한창이다.


하지만 나는 새단장한 모습이 그다지 달갑지 않다.

소중히 숨겨두고 간혹 꺼내보는 무언가를 잃어버린듯한 느낌에 마음 한구석이 허전하다.
나에게 이 구름다리는 어쩌다 한번씩 건널때마다 아련한 옛추억을 떠올려주는 고마운 장치 중의 하나였다.

그 추억은 철길로 인해 끊어진 길을 이어주는 '다리'에서 오는것이 아니라 수없이 지나간 사람들의 발길에 닳고 닳아 자갈이 도드라진 계단판과, 시대를 반영해 다양한 구호가 써 있던 녹슨 아치와, 기성품에는 결코 느낄 수 없는 사람의 손길이 담긴 허술한듯 정직한 철재난간 따위에서 온다. 

내 기억속에 남아있을 구름다리의 모습


시대에 따라 다양한 구호가 쓰여있던 아치


여기까지는 지극히 개인적인 감상일 수 있다.
하지만 기존의 것이 못 쓸 정도로 낡은 것이 아니라면 좀 더 필요한 곳에 예산을 쓰는게 효율적이다. 새것도 언젠간 낡는다.
목분과 고분자화합물을 섞어 만든 재료는 얼핏보면 목재와 비슷해 친환경적인 것 처럼 보이지만 친환경적인 인공물이 세상에 있을까?

오히려 덜 반환경적이라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르겠다.
쓸 수 있으면 그대로 쓰는게 가장 친환경적일 것이다.

지난 세월만큼 정겨운 저 계단판을 다시 밟을 수 있을까?


새난간을 세우기 위해 잘려나간 철재난간


또한 이 구름다리는 신세계 백화점 앞이나 석전사거리에 있는 육교와는 분명히 다르다.
삼역 통합으로 삼십여년전에 사라진 북마산역의 유일한 흔적일 뿐 아니라 제대로 된 건널목이 없었던 시절, 임항선으로 단절된 마산의 동과 서를 이어주는 중요한 연결통로로 수십년을 이어왔다.
그리고 상판을 떠받치는 구조물은 철도레일을 휘어만든 보기드문 형식으로 역사적 가치가 충분하다.


어떠한 절차를 거쳐 공사가 진행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다시 생각해도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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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신삼호 2010.01.16 00:07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하부구조는 제대로 남아있는 것 같은데요, 일단 다행인것 같은나,
    암튼 껍데기만 씌워서 미봉책으로 하려는것 같네요,
    정말 반갑지 않은 일이 벌어졌네요

  2. 이윤기 2010.01.19 08:48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정말 기가 막히군요.

    지난번 이주영국회의원 정책 토론회 때도, 마산시 담당 국장님께 제발 육교는 고치지 말고 그냥 두자고 말씀드렸는데... 결국 이렇게 되었군요.

    참 안타깝습니다.

    기차 레일로 만든 저런 육교는 어쩌면 우리나라에 유일한 것일 수도 있는데... 근대문화유산이라는 생각을 전혀 못하는 것이지요.

  3. 이진규 2010.01.19 17:54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옛 정취를 저렇듯 싹뚝 잘라내버리고 그저 눈(目)으로 새것처럼 단장하면 마음으로는 영영 볼 수 없기에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4. 유림 2010.01.19 19:45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언제 그런 작업을 했지요?
    차를 타고 지나다니니 몰랐기도 했겠지만.
    지난번 탐방때 찍어둔 사진이 어쩜 소중한 자료가 될지도 모르겠네요
    안타깝습니다.
    아들하고 한번 둘러볼 생각이였는데..

  5. 최정건 2010.01.20 12:00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결국 마산시를 보니 저 난간이 고물상에 가지 않아도 다행입니다.
    저 난간이라도 박물관에 보관을 해야하는데

  6. woodam 2010.02.19 06:46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어린시절 수없이다녔던 다린데추억이사라져 버릴까 마음이무겁습니다.

  7. 서마지기 2010.05.10 20:02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글 올려 주신분이나 그리고 댓글로써 서운함을 나타 내시는 분들께 먼저 지역민의 한사람으로써 감사의 마음을 전합나다, 북마산역에 있는 육교는 일명 구름다리라고 지금까지 불리고 있습니다. 이 육교는 약 40년 전 만들어졌으며 그때 국회의원으로 출마를 했던 한 태일씨가 사비를 투자했다고 지역민은 그렇게 알고 있으며 육교 윗 동네는 교원동으로써 당시 집없는 서민들과(후생주택) 그리고 수재민들을(남영주택) 위해 대지는 시 부지이며 건축물은 개인으로 등재 되어 있었으나 후에 개인에게 불하되었습니다. 처음 당시 한태일 국회의원 후보가 그곳에 전기 가설을 해 주었으며 역시 일명 구름다리(육교)를 건설하였다고 합니다. 한가지 드릴 말씀은 난간대를 없엤다는 것은 원래 제것이 아니었습니다. 몇번 보수및 높낮이 공사도 했습니다. 그리고 비록 옛것이 정겹고 또 한 그대로 보존 가치고 있다고 하지만 노후되어 녹슬고 한 것을 보수하고 덧칠한 것은 도시 미관상과 공원 숲에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합성수지 목재 같은 것은 좀 그렇지만 어쩔 수 없이 박수를 보낼 수 없어도 지켜 봐 줍시다.

    • 허정도 2010.05.10 22:50 신고 address edit & del

      서마지기님의 말씀을 듣자니 마치 교원동 옛모습이 훤히 보이는 것 같습니다.
      이 육교 하나가 마산도시 전체에서 무슨 큰 의미가 있겠습니까마는 서마지기 님처럼 옛일들을 기억하는 분들께는 육교하나라도 소중하지 아닐까 라는 생각이 드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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