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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11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3) - 개항이후

<마산포구의 두 굴강과 네 선창>

마산포가 조선시대 번성했던 포구라고 알려져 있지만 옛 마산포의 해안선이 현재 도시 속 어디였는지 정확하게 밝힌 적은 없었습니다. 시사(市史)를 비롯한 몇몇 자료에서 대충 언급했지만 추측일 뿐이었습니다.

오늘 포스팅에서 밝히는 마산포 해안선(海岸線)은 사정지적도(査正地籍圖)와 그 외의 여러 자료들을 통해 확인한 것입니다. 저는 정확(?)하다고 봅니다만 땅을 파보지 않아서 장담은 못하겠습니다.


마산포에는 일찍이 두 개의 굴강과 네 개의 선창이 있었습니다.

동굴강과 서굴강으로 불렸던 두 굴강에 대해서는 1964년 『마산시사 사료집 제1집』의 「마산축항지」에서 김준이 그 용도를 다음과 같이 말한바 있습니다.

「서굴강(西掘江)은 인공(人工)으로 구축된 듯한 방축(防築)이며 여러 파도를 막고 범선(帆船)들이 정박하는 곳으로서 방축 위에는 수 백년된 포구가 무성해 있었으며 그 위치는 현 남성동 우체국 지점이 된다.

동굴강(東掘江) 역시 서굴강과 같은 부두로서 북선(北鮮)서 온 명태 배가 풍랑을 피하기 위해 정박한 곳이다」

복원도를 놓고 보겠습니다.


복원도에 나타난 굴강의 위치․규모․형태를 보아 마산창 앞에 있으면서 규모가 큰 서굴강은 마산창과 관련한 관용기능을 하던 인공 굴강이었고, 동굴강은 민간인들의 영업과 관련한 민용 기능을 담당했던 자연굴강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관민구분 사용은 조운제도가 폐지된 19세기 후반까지였습니다.

서굴강과 동굴강을 중심으로 직선거리 약 500m의 해안에 걸쳐 네 개의 선창이 있었습니다.
명칭은 서성선창․백일세선창․어선창․오산선창이었고 그 위치와 형태는 위 그림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백일세선창(百一稅船艙)이라는 특이한 명칭에 대해 여러 견해가 있습니다.

어떤 이는 백일세(百一稅)가 아니라 ‘백일세(百日稅)’라고 하면서 이를 2월에서 5월까지 백일(百日) 내에 세(稅)를 서울 선혜청에 수송하기 위한 선창이란 의미라고 해석하고 그렇기 때문에 백일세선창을 조창부두로 판단합니다.

하지만 다른 이는 일반적으로 백일세(百一稅)란 수입의 백분의 일을 세금으로 납부하는 제도를 말한다면서, 예로써 군산항의 객주가 내장원에 백일세를 납부한 일이 있었다고 제시합니다.

여기서는 1907년 11월 1일 창원부윤 이기(李琦)가 일본인 홍청삼(弘淸三)의 매립과 관련해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에게 보낸 보고 제3호에 첨부된 마산 해안도면에 ‘百一稅船艙’이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百一稅라고 적었습니다.

우리나라간척사업과 제방공사의 효시로 고려 고종 35년(1248) 김방경(金方慶)에 의한 평안도의 위도(葦島) 간척사업을 듭니다만, 마산포 복원도를 보면 마산의 해안에도 석축호안(石築護岸)과 방파시설(防波施設)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추정하는 근거는 아래 그림 표에서 알 수 있듯이, 해안 곳곳에 자연발생적 형태라기보다는 인위적인 형태로 만들어졌다고 추정될만한 흔적이 여러 군데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인위적인 석축호안과 방파시설이 있었다고 추정하는 근거는 더 있습니다.
이미 이 시기에 석축돌제(石築突堤)가 있었다는 기록과 『창원군지』등 여러 자료에서 고려시대 석두창(石頭倉)에는 조곡(漕穀) 천석을 싣는 조선(漕船) 여섯 척이, 조선시대 마산창에는 천석을 싣는 조선(漕船) 스무 척과 이 배들을 운행시킬 조군(漕軍) 구백육십 명이 배치되어 있었다는 기록들이 그 가능성을 뒷받침해 줍니다.

물이 들어오면 바다가 되고 물이 빠지면 육지가 되는 갯벌지(간석지역)는 다음 두 그림에서 해안선과 인접해 그려진 점선 부분까지였습니다.
해안에서 가장 근접한 수심선에 1/2m라고 표기되어 있습니다.



동해 원산, 서해 강경과 더불어 조선 3대 포구였던 남해의 마산포 해안은 한일병합 1년 후인 1911년, 일본인 박간방태랑(迫間房太郞)이 착수한 매립공사에 의해 그 모습을 잃게됩니다.

동굴강 서굴강과 서성선창․백일세선창․어선창․오산선창은 바다를 떠나 육지 속으로 서서히 사라져 갔습니다.
그림에서 본 당시 해안의 석축들은 지금도 마산도심 땅밑에서 잠들고 있겠죠.
우리나라에 조선시대 항구가 보존된 도시는 없다는데, 발굴해서 역사문화자원으로 사용할 수는 없을까요? 전혀 불가능한 일일까요?<<<




2010/10/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6) - 개항이후
2010/10/1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7)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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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2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7) - 개항이후
2010/12/2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8)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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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1/2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2)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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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2/2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6) - 개항이후
2011/02/2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7) - 개항이후
2011/03/0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8) - 개항이후
2011/03/1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9)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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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2)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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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28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1) - 개항이후

<조선시대 마산포를 복원하다>

지금부터 소개할 마산포 복원도는 1905년-1910년 시기의 마산포 도시상황입니다. 하지만 시기적으로 보아 이때 상황이 19세기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어서 이 복원을 ‘조선후기의 마산포 복원도’라고 해도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복원도 작성 범위-

복원작업의 범위는 토지의 지목과 형상을 분석하여 주거용지로 사용되었을법한 토지들이 일정한 형태로 집합되어있는 영역으로 결정하였으며, 외곽경계는 가급적 도로로 하였습니다.

설정된 범위는 다른 자료에 나타나는 당시 원마산의 주거용지 경계와 비교하면서 조정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지적도에서 복원한 당시 주거지 영역과 다른 자료에 나타나는 주거지 영역이 거의 일치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복원도 작성 방법-

복원방법은 제가 임의로 착안하였습니다.
사정지적도 복사본을 만들어 이미 분할과 합병으로 변형된 지적도의 원형을 추적 복원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모번(母番)과 자번(子番)의 관계를 이용하여 가능했던 작업입니다.
최초의 사정지적도는 모번(母番) 밖에 없었고, 모번 만 있던 땅이 분할되면 자번(子番)이 생기게 됩니다.
이 점을 착안하여 사정지적도 상에 모번으로 구획되어진 원래의 경계선을 모두 찾아내어 복원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1-1과 1-2와 1-3번지가 있으면 이 세 필지를 합한 외곽선을 이어서 원래의 1번지를 찾는 방법입니다.

복원된 사정지적도는 컴퓨터(AUTO-CAD)를 이용해 모사(模寫)한 후, 각 필지의 사정토지대장(査定土地臺帳)과 비교 확인하여 사정(査定) 당시에 존재했던 최초의 지적도를 복원했습니다.

이렇게 작성된 사정지적도를 관련문헌자료 등을 이용하여 보정(補正)하여 복원도의 정확성을 기했습니다.

이상의 과정을 거쳐 최종 작성한 1910년 경의 마산포 복원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정지적도에 나타나지 않았던 서굴강 방파제-

복원도를 작성하고 난 뒤 사정지적도에서 나타난 도면과 그 외의 다른 자료에서 나타나는 형태가 다른 부분이 한군데 있었습니다. 서굴강 앞의 방파제였습니다.
서굴강 앞 방파제는 사정지적도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토지이용도의 작성과정 중 별도의 판단을 요하는 부분이었습니다.

옆 그림은 이미 소개한 김경덕의 매축청원도(2010/09/2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4) - 개항기)를 활용하여

1960년대에 김용욱 부산대 교수를 비롯한 몇몇연구자들이 마산포 해안 도면을 작성하였는데, 이를 토지이용도와 대조하기 쉽도록 재구성한 것입니다.
그림의 오산동은 지금의 오동동입니다.

 
이 도면은 이른바 변현되기 전의 마산포 해안선 원형을 가장 확실하게 알게 해주는 소중한 자료입니다.

이 그림과 사정지적도를 비교해본 결과 해안형태가 대부분 일치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서굴강을 막아주는 방파제 부분만이 서로 다를 뿐이었습니다. 김경덕의 도면 등에는 서굴강을 감싸고 있는 방파제가 있었지만 사정지적도에서는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백일세선창 부분도 이와 유사하게 돌출된 형태이지만 김경덕과 사정지적도 두 도면에 모두 나타나 있었습니다.

김경덕의 도면과 사정지적도 중 어느 것이 당시의 사실과 동일한가 하는 문제는 단정적으로 밝힐 수가 없습니다만 김경덕의 도면에 나타나 있는 것과 같이 서굴강의 방파제가 존재했을 것이라고 가정(假定)하면서 다음과 같이 추정하였습니다.

① 옆의 다른 지도(2010/08/2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0) - 개항기)에 나타나는 원마산 부분에도 김경덕과 창원부윤이 그

린 매축청원도와 같은 모양의 방파제가 뚜렷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지도를 통해 당시 해안의 형태를 비교적 소상히 알 수 있습니다. 시장이 열렸던 지역은 건물이 없으며 중앙에 비어있는 부분이 조창부지다. 海岸線에서 點線까지가 창탄(漲灘), 즉 간석지입니다.

② 굴강(掘江)이라는 명칭을 통해서도 방파시설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였습니다. 굴강이란 개천․도랑못․ 해자(垓字) 등의 뜻이 있지만 여기서는 인위적으로 만든 포구를 의미합니다.

③ 조창과 서굴강의 위치를 볼 때 서굴강은 조운선 전용 굴강이었을 것이라고 가정(假定)이 가능합니다. 서굴강이 조운선 전용굴강이었다고 가정하는 이유는 (가) 조창에서 가장 가까운 해안이라는 것과 (나) 굴강의 형태가 규모 있게 의도적으로 잘 만들어져 있으며 (다) 그림3-36에서 보면 서굴강이 선창으로 사용하기에 적합한 형태를 갖추고 있지만 김경덕의 도면 등에는 선창이란 이름을 갖고 있지 않고 (라) 당시 오산진(현, 산호동)에서 많이 사용했던 오산선창을 제외하면 세 개의 선창이 서굴강을 중심으로 발달해 있다는 점 등입니다.

④ 위 ③의 가정 하에서 보면 사정지적도 작성을 위한 측량이 시행될 시점에는 이미 조운이 폐지된 지 십 수 년이 지난 뒤라서 조운 전용이던 서굴강은 그 기능이 약화되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곳의 방파시설은 관리 소홀로 인해 손상을 입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근대적 토목 기술이 없었던 시대에 인위적으로 조성된 방파제가 유지보수를 하지 않으니 빠른 속도로 훼손되었을 것이고 훼손이 심한 방파제를 측량에서 제외하였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⑤ 만약에 방파제가 있었다 하더라도 이미 일본인에 의해 매축이 곧 시행될 시점이었거나 이미 매축공사가 시행되고 있었던 시점에서 도로나 대지도 아닌 보잘 것 없는 시설물이었던 방파제를 측량에서 제외시켰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마산포 항만매축공사는 한일병합 이듬해인 1911년(월일미상) 착공되어 총공사비 13,700원을 들여 1914년 7월 14일 준공을 보았습니다.

⑥ 방파제가 시작되는 부분을 확대하여 그린 오른쪽 그림에서

보듯이 방파제와 육지가 연결되는 지점으로 추정되는 「가」부분의 형태가 뾰족이 나와 있어서 대단히 어색합니다. 그리고 방파제가 시작되는 위치로 추정해 볼만한 곳까지 도로가 연결되어 있는 「나」부분 등이 「다」의 점선처럼 계속 이어지는 길, 즉 방파제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합니다.

이상과 같은 여섯 가지의 이유를 근거로 서굴강을 감싸고 있는 방파제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하고, 다른 자료를 통하여 추정되는 위치와 형태를 결정한 후 복원도에 추가 삽입하였습니다.


이 외에 사정지적도 만으로 1910년 당시의 토지이용도를 정확하게 작성할 수 없었던 다른 한 가지는 1905년 개통되면서 이미 형태조차 없어진 마산선 철도부지 내의 도로와 대지였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떠한 자료로도 정확한 복원이 불가능합니다.
복원도에 그려진 이 부분의 형태는 주위에 형성되어 있는 도로 및 대지의 모양을 참고하여 추정 복원한 것이기 때문에 사실과 같지 않습니다.

이상과 같은 과정을 거쳐 완성된 복원도를 현재의 도시 도면과 오버랩(over-lap)시킨 것과 항공사진에 비교시킨 그림입니다. 항공사진은 1999년에 촬영한 것인데 해안의 원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길고 복잡한 작업을 통해 얻은 이 복원도를 통해 20세기 초, 더 멀리 조선시대 마산포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2010/10/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6)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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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옥가실 2011.03.28 09:35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잘 보고 갑니다. 참으로 애쓴 결과입니다.
    이걸 바탕으로 당시의 마산포를 복원하면 아주 멋진 작품이 될 터인데..
    가능한 일이지요?

2011.03.21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0) - 개항이후

<일제가 만든 최초의 지적도>


지적학자 리진호에 따르면 우리나라 최초의 지적도는 1908년 탁지부 임시재산정리국 측량과 명의로 발행된 서울의 지적도입니다.
하지만 이 지적도는 명목상으로 남아있던 대한제국 탁지부의 첫 시도라는 의미만 있을 뿐, 전국토를 정식으로 도면화 시킨 최초의 지적도는 1912년 일제가 제작하였습니다.

토지의 소유관계를 조사하고 심사하여 확정지었다는 의미에서 이 지적도를 사정지적도(査定地籍圖), 함께 제작된 토지대장은 사정토지대장(査定土地臺帳)이라고 부릅니다.

일제기 마산에 살았던 일본지식인 추방사랑(諏方史郞)의 『마산항지』에 의하면 마산에서 토지조사가 시작된 것은 1909년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마산의 사정지적도(査定地籍圖)는 착수 후 3년이라는 제작시간을 거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적도 제작과정에 3년 정도가 소요되었다면 사정지적도가 완성되어 공포한 1912년 기준의 지적도는 사실상 1910년 혹은 그 이전의 상황이었을 것 같습니다.

다음 그림은 당시 조선총독부 임시토지조사국이 사용한 '토지조사부'입니다.


다음은 수정(壽町, 수성동) 21번지 사정토지대장입니다. 붉은 원 안에 사정(査定) 이라고 적혀 있습니다.


다음은 사정지적도입니다.
마산부 외서면으로 시작한 토지 위치에 빈정(濱町), 경정() 등의 지역명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해방 후 이를 창포동, 두월동으로 고친 기록까지 그대로 남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땅을 일제가 어떤 방법으로 정리하여 관리했을까요?

그들은 우선 토지의 용도, 즉 지목 분류부터 했습니다. 
지목을 3종류로 크게 나눈 후 이를 18종으로 세분해 다음과 같이 나누었습니다.

① 직접적인 수익(收益)이 있고 현재 과세(課稅) 중에 있으며 또는 장래 과세의 목적이 될 수 있는 토지 (6종류) : 전․답․대지․지소(池沼)․임야․잡종지

② 직접적인 수익은 없으나 대부분 공공용에 속하여 지세(地稅)를 면제한 토지 (5종류) : 사사지(社寺地)․분묘지․공원지․철도용지․수도용지

③ 개인소유를 인정할 성질이 못되고 또한 전혀 과세의 목적으로 하지 않는 토지 (7종류) : 도로․하천․구거(溝渠)․제방․성첩․철도선로․수도선로

그리고 각 땅의 번호, 즉 지번의 결정은 다음 세 가지 원칙을 적용하였습니다.

① 같은 동리에 같은 지번이 중복되거나 또는 공번(空番, 缺番)이 생기지 않도록 하고

② 토지대장이나 지적도에서 손쉽게 찾아낼 수 있도록 하며

③ 특히 시가지 등에서는 주민의 주소로 사용하기 때문에 부근의 지번으로 미루어 찾고자 하는 위치를 알 수 있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지번 부여는 이런 원칙에 준하여 지적도 제1호의 동북모퉁이(東北隅, 도면에서 보면 우측 상단)에서 출발하여 지적도 1도엽(一圖葉)에 들어있는 토지는 되도록 지번을 연속시키고 다음 도엽에 옮길 때 역시 이를 연속시켰습니다.
주요한 도로․하천․구거 등에 의하여 구획된 부분은 한 덩어리로 지번을 붙인 후 다음 구역으로 옮기도록 하였습니다.

이런 방침에 의해 결정된 마산의 토지는 사정 당시 민유과세지는 모두 3,739필지로 738,903평이었으며 1평당 지가는 최고 27원, 최하 5전, 평균 1.1675원이었다고 지적학의 원로 원영희 선생이 『한국지적사』에서 밝혔습니다.

위의 글처럼 빈틈 없고 치밀한 토지조사사업을 거쳐 우리 땅이 일제의 손아귀에 들어갔습니다.
최근에 전산정보시스템으로 토지관리방법이 많이 달라졌지만 100년 전 일본인들이 만든 지적도와 토지대장이 이 땅 모든 토지정보의 근간이 되고 있습니다.

아래 사진들은 1) 임시토지조사국 제도과 남자부, 2) 임시토지조사국 제도과 여자부, 3) 면적계적기를 사용하는 장면입니다.<<<



2010/10/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6)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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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1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2) - 개항이후
2010/11/2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3) - 개항이후
2010/11/2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4) - 개항이후
2010/12/0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5) - 개항이후
2010/12/1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6) - 개항이후
2010/12/2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7) - 개항이후
2010/12/2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8) - 개항이후
2011/01/0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9) - 개항이후
2011/01/1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0) - 개항이후
2011/01/1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1) - 개항이후
2011/01/2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2) - 개항이후
2011/01/3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3) - 개항이후
2011/02/0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4) - 개항이후
2011/02/1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5) - 개항이후
2011/02/2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6) - 개항이후
2011/02/2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7) - 개항이후
2011/03/0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8) - 개항이후
2011/03/1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9)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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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2 / 조선시대 이전

1) 고대에서 조선시대까지 - 2 주거사(住居史)에서 청동기시대와 초기철기시대를 구분하는 또 하나의 지표는 구들의 시작이다. 한국 주거문화의 정체성을 압축적으로 나타내는 구들은 난방기술의 획기적인 발전인 동시에 지상주거로의 변..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1 조선시대 이전

오늘부터는 <경남지역 주거변천사>를 포스팅하겠습니다. 6~7년 전에 『경남도사』에 싣기 위해 간략히 쓴 글인데 출판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 블로그에 올립니다. 어차피 공유하기 위한 글이니 이해하리라 생각합니다. 한반도 동남부에 ..

기억을 찾아가다 - 25 (마지막 회)

25. 3·15의거에 대한 기억 「그날 나는 ‘극장 구경 시켜주겠다’는 주무돈이란 동네친구의 호의에 끌려 10리 가까이 되는 길을 걸어 ‘시민극장’으로 갔다. 그때 나는 대학입시에 낙방한 직후라 의기소침해 있던 상황이었다. 우..

기억을 찾아가다 - 24

24. 이승만 행사 -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 노인잔치...... 내 고등학교시절의 어느날 동회 서기가 들고온 책자를 잠시 훑어본 기억이 남아있다. ‘한국 정치인 99인집’이란 제목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이승만편이 현격히..

기억을 찾아가다 - 23

23. 떠돌이들, 좀도둑 전쟁이 끝나자 대다수의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들갔지만, 상당수의 사람들은 남아있었다. 좌우갈등의 와중에 있었던 몸이라 돌아갈 수 없는 처지였다고 들은 문씨 같은 사람들도 있었는가 하면, 가봤자 땅뙈기 ..

기억을 찾아가다 - 22

22.기합, 주먹자랑, 몸단련 중학교시절에도 조금은 의식되었지만 신경을 곤두세울 정도는 아니었었는데, 고등학교에 들어가자 그 문제들은 신경의 상당부분을 자극하여 행동거지의 상당부분을 조종하고 지배할 정도로까지 작용했다. 소위 ..

공간의 재탄생 - 재생 건축 '선유도' 02

지난주에 이어 녹색 기둥의 정원 에서부터 선유도 이야기를 이어 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 - 녹색 기둥의 정원 정수지의 콘크리트 상판 지붕을 들어내 기둥만을 남겨 만들어진 이 정원은, 선유도 이야기관 의 설명에 의하면 ‘휴식과 ..

기억을 찾아가다 - 21

21. 동(洞) 대항 줄다리기대회 ‘마산시 동 대항 줄다리기대회’가 시작된 건 초등학교 때였던 것 같은데, 내가 몇번 구경한 건 중학교 때였다. 대회 장소는 주로 무학초등학교였다. 마산의 30여 동이 토너먼트로 겨루어 하루에 ..

공간의 재탄생 - 재생 건축 '선유도' 01

서울 한강변의 대표적 공원 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곳 중에 선유도가 빠지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원래 거기에 그렇게 있었던 장소로 기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아직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선유도 공원이 ..

기억을 찾아가다 - 20

20. 아이스케키 아이스크림이나 팥빙수도 있었지만 수요가 많지는 않았었다. 학교 앞이나 시장 입구 등에 리어카를 세워놓고 수제로 만들어 파는 정도였다. 소금 뿌린 얼음 통을 손으로 돌려 냉각시킨 아이스크림은 즉석에서 고깔과자 ..

안상수 시장은 철거민의 눈물 닦아주시라

설 연휴가 끝난 다음 날, 나는 한 언론사의 취재에 동행해 재개발로 철거 중인 마산 회원동 일대를 다녔다. 내가 태어난 곳이고 서른까지 산 곳이었다. 지금도 매일 두 번씩 지나는 곳이기도 하다. 그날 나는 몰상식과 몰염치의 밑..

기억을 찾아가다 - 19

19. 영화, 만화, 잡지 초등학교 6학년 때 단체로 시민극장에 ‘성웅 이순신’을 보러 갔다가 실망했던 기억이 있다. 활동사진이 아니고 정지된 그림(슬라이드)이었기 때문이다. 중1때 문화동 쯤에 있었던 제일극장에서 본 애정(哀..

공간의 재탄생 - 재생 건축 intro.

세 달 가까이 이어져 왔던 '건축의 외형' 에 이어, 세월의 흐름에 따라 방치되고 버림받게 된 건축에 새 삶을 불어넣는 '재생 건축' (regenerative architecture) 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이어 나가볼까 합니..

기억을 찾아가다 - 18

18. 바냇들, 부림시장 정전 다음해 진학한 마산서중(전쟁 중인 1951년 9월 1일 6년제 마산공립중학교가 3년제 마산고와 마산서중으로 분리되었다. 마산서중이 현재의 마산중학교로 교명을 변경한 것은 1955년 5월 7일이었다..

기억을 찾아가다 - 17

17. 공놀이, 헌병사령부 축구팀 우리 어릴 때 겨울 빈 밭에서 새끼로 동여맨 짚 뭉치를 차고 놀던 기억이 있고, 간혹 있은 잔칫집에서 나온 돼지 오줌보에 물을 넣어 차고 놀던 일도 어렴풋이 기억의 한 자락에 남아 있다. 형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