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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2.01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71. 변심 여자의 참수사건

71. 변심(變心) 여자의 참수(斬首) 사건

 

()

통칭 살로매란 이름이 세계에 세 가지로 알려져 있다.

첫째 예수가 십자가에서 숨지는 광경을 멀리서 바라본 여인 막달라 마리아와 둘째 작은 야곱’,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와 그리고 살로매(마가 1540)’로 되어 있다.

독일의 음악가 리히알트 스트라우스의 악극 살로매의 내용을 약술하면 헬롬 대왕의 생신 축하에 춤을 춘 살로매에게 감격한 헬롬 대왕은 살로매가 원하는 것은 무언이든지 들어 주겠다고 하니 살로매는 자기의 불타는 사랑을 거절한 요카난(세례 요한을 말함)의 목을 베어 달라고 했다.

헬롬 대왕은 즉시 요카난의 목을 베어 쟁반에 담아 가지고 왔다. 살로매는 피투성이의 요카난의 목에 키스함으로써 실연의 복수는 하였지만 이 꼴을 본 헬롬 대왕은 질투의 불길을 참지 못하여 살로매를 압살(壓殺)하고 마는 것인데 이와 비슷한 얘기를 마태 전에서도 볼 수가 있다.

즉 헬롬 대왕이 그 아우의 처 헬로디아와 간통함을 의()가 아니라고 직간한 세례 요한을 옥에 가둔다(중략).

헬롬의 생신일, 헬로디아의 딸 살로매에게 축하의 춤을 추게 하여 헬롬을 기쁘게 해주므로 헬롬은 그 조카 딸 살로매에게 원하는 것은 모조리 들어주겠다는 말에 살로매의 모() 헬로디아는 남편의 형 헬롬과 간통한 것을 직간한 요한에게 복수하리라 결심하고 요한의 목을 베어 오도록 딸 살로매에게 말하라 한다.

살로매의 말대로 헬롬은 옥중에 있는 요한의 목을 베어 쟁반에 받쳐 오도록 한다(143-11).

이와 같이 요한은 살로매의 사랑을 거절한 때문에, 또 요한은 헬로디아가 남편의 형인 헬롬과의 사연(邪戀)을 반대했기 때문에 여자의 함원(含怨)으로 하여 두 사나이가 참혹한 최후를 마쳤지마는,

다음 얘기의 두 사나이는 여자의 변심에 격분하여 여자의 목을 벤, 말하자면 현대판 남자 살로매의 사건인데 여기에서는 사건 발생 순서를 편의상 바꾸어 놓기로 한다.

 

1

193228일 일본 명고옥시(名古屋市) 중도미야정(中島米野町) 호기(戶崎) 교외(郊外) 밭 가운데 있는 계분(鷄糞) 창고에 길전송강(吉田松江)이라는 19세의 처녀가 피어나지 못한 꽃 봉오리인채 무참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범인은 처녀보다 25세 위인 제과직공(製菓職工) 증연음길(增淵音吉)이라는 자였는데 3,4년 전 상처를 하고 고독하게 지내는 증연(增淵)을 동정한 송강(松江)은 아비뻘 되는 그와 깊은 사랑에 빠졌던 것이며,

양인(兩人)은 가정을 가질 수도 없는 형편이라 밀회 때마다 고민을 거듭해 오다가 전기(前記) 밭 가운데 있는 계분창고에서 만났을 때 서로 정사(情死)를 하기로 결심을 했던 것이다.

그러나 여자를 죽인 뒤 별안간 공포에 질린 사나이는 도망을 치려 하다가 지극히 사랑하던 여자를 그냥 두고 갈 수가 없어 목과 유방과 음부를 시체에서 도려내어 행방을 감추었던 것이다.

수개월 후 모발을 뽑아낸 여자의 목과 사나이의 시체가 바다에서 떠올랐는데, 그 후 증연(增淵)은 양심의 가책으로 목을 안고 투신자살한 것으로 판명이 되었던 것이다.

이 사건은 꼭 마산 사건보다 20일 후에 발생하였다.

 

2

마산 산제당(山祭堂) 참수(斬首) 사건

인물

가해자 ; 경북 청도군 동창면(동명 미상) 방랑승 배성룡(일명 배중) 37, 자 익해(益海)가 있음

피살자 ; 경북 대구부 남산동(번지 미상) 기녀 박순덕(일명 월순) 27, 자 노분교가 있음

수사관 ; 강상(江上) (, 마산 검사국 상석검사), 소도효(小島孝, 마산 경찰서장 경부), 강보형(姜寶馨, 마산경찰서 사법주임) , 외근 형사 수십명

도의(道醫, 마산 公醫) ; 시체 검안자 한규상(의사)

범행일시 ; 1932121일 하오 8시경

범행 장소 ; 공신당산(貢神堂山) 서편 산복(山腹)

 

마산 서북부에 용립(聳立)하고 있는 두척산 좌편에 제3지산(支山)인 정신산당(貞神山堂) 산제당(山祭堂) 중심, 완월폭포, 척산동, 약수암, 서원골 등은 공기가 맑아 일출 전 등산객들이 운집하는 곳이다.

음력 섣달 보름 아침 등산을 갔다 온 소년(김모군)이 갑자기 발열을 하였고, 익일도 다른 소년이 다녀온 후로 원인 모를 열병을 앓았는데 그 결과가 두려워 이웃에도 말을 하지 않았다. 다음 날 세 번째의 등산객으로부터 중대한 신고가 경찰에 입수되었다.

신고를 접한 수사관들은 아연 긴장하여 부내(府內) 전역에 삼엄한 경계망을 치고 한규상 공의(公醫)를 대동, 현장에 당도하니 목 없는 여자의 하반신이 산제당 위 바위 밑에 노출되어 있지 않은가?

검시 결과 하복부는 배꼽에서 음부에까지 선이 그어져 있음을 보아 상당히 반항한 흔적이 있다고 하였고, 목은 예리한 단도로 절단되었으며 범행은 10시간이 경과했다고 하여 범인 체포에 중대한 차질을 가져왔었다.

공의가 발표한 시간이 그 후 범인의 진술대로 하면 마산을 탈출하여 함양 방면에서 호남 지방으로 도피하던 시간과 부합되었던 것이다.

<피살 사건 기사 / 마산야화>

 

범행 경위

범인 배승(裵僧)과 피살자 순덕 여인은 19308월 경 대구부 모처에서 동서(同棲)하다가 그해 1월 마산으로 이주, 중성동 대구여관에 투숙하면서 상남동 모처에 전세방을 얻어 음식점 개업을 계획 중, ()가 가졌던 자금이 날로 소비됨을 보자 여자는 고향인 대구로 다니러 가게 되었으며 전과 달리 냉정하게 마음이 변해 있었다.

이것을 눈치 챈 배승(裵僧)은 살의를 품고 구마산 시장 입구 일본인 좌좌목철물상(佐佐木鐵物商)에서 단도 1정을 입수하고 그의 아들 익해와 병약한 순덕의 딸 분교와 그녀의 모 순덕 여인을 대동하고 분교의 병을 고치기 위한 치성을 구실로 산제당으로 올라갔다.

배승(裵僧)은 순덕 여인의 마음이 돌아서도록 분향 축원하였으나 여인을 아랑곳없이 이내 그 자리를 떠나려 하였으며, 아이들의 말이 엄마는 집을 나간다고 하더라 하자 배승(裵僧)은 여인에게 덤벼들어 격투가 벌어진 끝에 칼로 여인의 복부를 찔러 숨지게 한 뒤 목을 베어 산제당 근처 바위 밑에 묻어 두고 지리산 대원사에 일박한 뒤 아들을 데리고 함양 방면으로 떠나면서 순덕의 딸 분교는 산청군 시천면 사리 백영기 주조장(酒造場)에 맡겨 둔 것이 단서가 되어 배()를 추격하는 수사진은 마산을 필두로 경남, 전남북 삼도 경찰의 총동원으로 전주, 장수, 남원, 담양 등지에 치열한 범인 체포의 경쟁까지 벌어졌다.

범인 배승(裵僧)은 주지사(住智寺), 실상사(實相寺), 금원사(金院寺)로 탁발 방랑타가 정세를 살피고자 귀정사(歸政寺)2박하고 죽림사(竹林寺)에서 3박 아침에 탈출하고자 문전으로 나왔다가 함양서(咸陽署) 형사대에 검거, 개가를 올렸다.

범행 후 실로 15일 만에 범인은 체포되었던 것이다.

부기해 둘 것은 공의(公醫)의 검안 착오로 범인 체포 일보 직전에서 마산서 형사대가 체포를 놓친 것을 두고 한으로 삼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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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8.17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37. 산왕대신, 38. 세 가지의 기형상

37. 산왕대신(山王大神)

 

구마산 추산동 공신당산(公神堂山) 산정직하(山頂直下)에는 거대한 고목이 있고 그 고목 밑에 산제당(山祭堂)이라는 조그마한 사당이 있다.

이 사당이 언제부터 생겼는지 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약 2,3백년쯤 될 것이라고한 고로(古老)들 말이 기억된다.

이곳은 부녀자들이 장수식재(長壽息災)를 산신에게 제사하는 곳으로 무당들의 돈벌이에 가장 적지라고 했다.

대개 보면 제당(祭堂) 밑 조그마한 정화수 옆에서 제()에 필요한 재료를 요리하는데, 솥은 흙으로 만든 지괴솥을 사용하며 제 올리기 전에 제 나이대로 대잎(竹葉)을 따서 제단 앞에 놓고는, 무당의 지시대로 몇 번이고 예배를 올림으로써 복을 받으며, 화를 면하게 된다는 것이다.

오랜 전통을 이어 왔던 것인데 뜻밖에도 수성동에 거주하는 지학삼(池鶴三)이라는 사람이 제멋대로 점유하고는 산왕대신(山王大神)이라는 큰 글을 써 붙여 놓고 알 수 없는 주문을 읽으면서 어리석은 부녀자 신도를 모으고 있다.

이 사람은 어떠한 종파에 속한 교인이 아니라 그 실교(實敎)와는 극히 거리가 먼 사람이며, 직업은 착실한 재목(材木) 상인인데 밤 사이 궁리 끝에 미신에 심취하기 쉬운 유사 샤머니즘에 눈을 뜬 것이,

즉 공짜로 산제당을 점유하여 왈() 산왕대신을 만들어 놓고 축재할 꿈을 설계하고 있었으나 이것마저 출발 수개월 만에 청년들의 미신 타파의 회오리 바람에 휩쓸려서 세인의 기억에서 사라지고 만 것이다.

<1930년대 산제당>

   

 

38. 세 가지의 기형상(畸型相)

 

마산은 세 가지의 자랑거리와 세 가지의 기형상(畸型相)이 있었다.

세 가지의 자랑거리란 것은, 신마산 천변(川邊) 벚꽃과 마산의 청주(정종)이며 화재사건이다.

다음 세 가지의 기형상은 공동묘지이며, 각 주택 틈틈이 점재(点在)한 청루이며, 시가지 중심지에 용립(聳立)붉은 장벽의 형무소라는 것이다.

셋째로 유명했던 화재, 특히 구마산 한인상가에는 일주일이 멀다하고 화재가 연발했는데 이유인즉 화재보험에 가입한 사람들이 방화한 소행이라는 것이 나중에사 발로된 것이다.

다음 세 가지 기형상은 각종 상선들이 마산만으로 입항할 때 제일 먼저 눈에 뜨이는 것이 공동묘지로서 불쾌감을 준다.

당초에 일인들은 이곳에 형무소를 건립코자 하다가 오동동 703번지를 택한 것인데 대단한 애국자들은 일인들이 고의로 조선인 밀집처에다 그 음산한 건물을 둔 것이라 하여 불평도 한 것이었다.

<붉은 벽돌 담의 마산교도소 정문>

 

사실은 그 당시 마산의 현황을 돌이켜 볼 때 그 근처에는 인가가 없는 돌자갈 뿐으로 일인 당국자들로 그 방면의 발전 전망을 참작한 점에서 선견지명이 결여되었던 때문이 아니었을까?

이리하여 1924412일에는 추산정 근처에서 상기한 공동묘지, 형무소, 유곽 아닌 집창가(集娼街) 이전을 촉구하는 부민대회를 열고 취지서를 당국에 전달하였으나 예상했던 그대로 예산 사정 운운하며 간단명료한 답만 있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해방 덕으로 청루는 자연 없어지고 형무소는 내서면 벽지로 이전했고, 공동묘지도 시대 진전의 추세로 교외로 물색되어 불원장래(不遠將來)에 이장될 것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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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9.30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81) - 강점제3시기

그림 석장입니다.

47. 마산수도배수지

팔용산 저수지에서 공급된 물을 정수하고 배수하던 곳입니다. 위치는 추산동 마산박물관 일대였습니다.

1930년, 정수장이 준공되어 통수식을 할 때, 도지사와 진해요항사령부 사령관까지 참석하여 성대하게 기념식을 하기도 했습니다.

아래 사진은 준공식 당시 마산부윤 판원지이(板垣只二 / 제5대부윤 / 1928.3-1930.10 재임)의 글을 석각해 놓은 「水德無疆(수덕무강)」이라는 넉자 글입니다. 한반도 조선을 영원히 지배할 줄로 알았던 일제관료의 확신과 힘센자의 너그러움까지 서려있는 글입니다.

 

48. 산제당

당시 마산 사람들의 종교적 근원지였던 환주산에 있었습니다. 사진의 건물은 없어졌지만 지금도 성덕암이라는 자그마한 암자로 남아 있습니다. 언제부터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경내의 서어나무 수령을 보면 꽤 오래 되었을 것 같다고 경남대 유장근 교수가 추정하기도 했습니다. 구전에 따르면 약 1,300년 쯤 되었다고 하는데 식물학자도 동의했다 합니다.

 

49. 마산천의 벚꽃

한일병합 전 일본인들은 그들의 조계지인 신마산 중심을 흐르는 마산천(창원천 혹은 대곡천이라고도 부름)변에 벚나무를 많이 심었습니다. 바로 그 나무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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