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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03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5) - 강점제3시기

<강점 제3시기 마산의 양조산업>

1904년에 한목단(寒牧丹)이라는 상표를 가졌던 아즈마(東)주조장을 시작으로 마산에는 일찌감치 양조산업이 들어왔습니다.

한목단(寒牧丹)이라는 상표를 가졌던 아즈마주조장은 나중에 원전(原田)주조장으로 회사명을 바꿨는데 경남대 정문 앞, 옛 일성펌프 자리에 있었습니다.

아래 사진 1930년대 중반의 원전(原田)주조장입니다. 

 

성장에 성장을 거듭한 마산양조산업은 1928년 그 생산량이 11,000석으로 늘어 10,000여석을 생산한 부산업계를 제치고 드디어 국내 지역별 술 생산량에서 제1위를 차지했습니다.

마산청주업계의 호황은 이후에도 계속되면서 생산량이 해마다 증가하여 국내뿐만 아니라 만주와 중국에 까지 그 이름을 떨쳤고, 1938년에는 양조량이 20,000석을 넘었습니다.

마산의 청주업자 조합에서 현 제일여고 자리에 있던 신사(神社)에 천조대신(天照大神)을 모신 본전 외에 자신들의 주호신(酒護神)을 모신 송미신사(松尾神社)를 두고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냈을 정도로 주류산업은 마산의 대표적인 산업이었습니다.

아래사진은 마산 중앙동에 있던 양조공장(해방 후 삼광청주)입니다. 좌측 네모안 굴뚝 쪽이 천도원 주조장, 우측 원형 굴뚝 쪽이 나중에 삼광청주가 인수한 이데(井手)주조장입니다.

1930년대 건축된 건물로 보존 가치가 충분했지만 아깝게 철거되고 말았습니다. 그 아래 또 다른 사진은 미생(彌生)이라는 이름으로 제조했던 천도원 주조장의 술통과 마쯔모도주조장의 술통입니다. 

 

대규모 양조장은 대부분 1930년 이전에 설립되어 활발하게 운영되었기 때문에 1930년대 이후에 신설된 양조회사는 많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전통주인 청주회사 외의 주조회사 설립은 약간 있었습니다.

먼저, 1937년 중앙동에 소주전문회사로 설립한 합자회사 마산중앙조선소주공장이 있습니다. 이 공장은 자본금 3만원으로 1937년 1월 1일 중앙동 3가 2-4번지에 설립한 회사로, 소주를 전문으로 생산 판매하였으며 사장은 일본인 산근재길(山根才吉)이었습니다.

이 밖에 한국인들이 즐겨 마셨던 탁주양조회사로 낙동양조소(1932년)과 동일양조장(1938년)이 설립되었습니다.

낙동양조소(대표 한국인 이달영)는 중성동 130번지에서 1932년 1월 28일 자본금 5천엔으로 설립되었으며, 동일양조장(대표 한국인 탁응조)은 1938년 1월 1일 오동동 149-28번지에 자본금 6천엔으로 설립된 회사였습니다.

그러나 1941년 태평양 전쟁 발발 후에 양조업계도 생산에서 판로에 이르기까지 전시 통제령의 구속을 받게 됩니다.

이 때문에 각 양조회사는 생산능력에 따라 배정된 원료로 한정된 양만을 생산했고 생산품은 군수용과 일반용으로 그 양이 지정 구분되어 공급되었습니다. 당연히 마산의 양조산업에도 그 영향이 미쳤습니다.

마산과 술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다시 포스팅하겠습니다.

간장 된장 등을 생산하는 장유산업도 마산을 대표하는 산업이어서 1928년 기준으로 평균 5,000석 정도를 생산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942년 초 신포동 해안 매축지에 6,000평 규모의 부지를 확보하여 건립한 대형공장인 환금장유주식회사가 들어섰습니다. 이 거대한 회사 때문에 마산의 장유산업은 그 규모가 크게 늘어났습니다. 생산량이 무려 3만 석이나 되었습니다.

환금장유(주)는 공장․건물․기계기구 일체를 일본의 유휴설비와 건물 등을 이전하여 설립한 회사로, 이곳에서 생산한 물품은 대부분 군수용이었습니다.

일제에 의해 시작된 마산의 장유산업은, 전국에서 명성이 높은 몽고간장을 통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외 식품가공업으로 1941년 3월 자본금 19만 5천원으로 마산에 있던 일본인들이 마산햄제조주식회사(1941년, 사장 常松泰)를 설립하여 월 평균 600마리의 돼지로 햄과 소시지를 생산하기 시작했고, 원식품공업소(1931년)가 남성동에 85평 규모로 설립되었습니다.

일본인 원자부(原紫部)가 설립한 원식품공업소는 어류통조림회사로 1936년 3,980상자, 1937년 4,796상자, 1938년 7,121상자, 1940년 6,828상자를 생산했습니다.<<<

 

 

2012/07/3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0) - 강점제3시기

2012/08/0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1) - 강점제3시기

2012/08/1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2) - 강점제3시기

2012/08/2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3) - 강점제3시기

2012/08/2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4) - 강점제3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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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19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9) - 강점제2시기

<1920년대 마산의 산업>

1920년대 마산항의 물동량은 일본 국내의 불황과는 달리 오히려 더 늘어만 갔습니다. 주요 수출품은 여전히 미곡이었으며 전체 수․이출액의 80%를 차지했습니다.
1925년 마산항에서 일본으로 반출된 미곡은 약 15만석이었는데 1928년에는 65%가 증가한 25만석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미곡 수․이출의 증가는 수치상으로는 무역의 증대였지만 사실은 일제에 의한 미곡의 약탈적 반출이 점점 증대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정미업은 1911년 하목철삼(夏目哲三)에 의해 전기모터를 설치한 것이 기계화된 정미소의 시작인데 그 후 많이 늘어나 1924년 현재 25개소였습니다.
그 중 한국인의 것이 12개소, 일본인의 것은 13개소였습니다.

섬유공업은 회사령 폐지 이후부터 마산에 유치되기 시작한 업종입니다.
특히 1923년 6월 일본 오사카의 본전안오랑(本田安五郞)이 전 조선면화 마산공장을 매수하여 그 해 10월부터 작업을 시작한 주식회사 마산조면공장이 1924년 1,300평의 부지에 280평의 공장과 50평의 하치장을 신축하여 운영하였습니다.
그 후 1927년에는 태전성일(太田誠一)에 의해 창립된 태전마사(太田麻糸) 공장이 부지 5,000평에 건평 1,000평의 공장을 세우고 가동에 들어갔습니다.

1920년대는 마산-진주 간 철도가 개설됨으로써 서부 경남과의 교역이 활발해지자 북마산 역 주변에 역세권이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영향으로 제법 규모 있는 점포들이 원마산에 들어서게 되면서 상가지역이 두드러지게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원마산은 창동․남성동․중성동․동성동 일부 지역에 걸쳐 상가가 조성되어 있었으며 부정공설시장(현 부림시장)부근과 남성동 해안 매축지에서 곡물상․해산물상․식료품상․포목상․잡화상들의 점포와 노점상이 즐비했습니다.
제조업 분야에 손을 뻗지 못한 한국 상인들은 주로 이 지역 상가에서 도․소매업을 경영했던 것입니다.

신마산의 상가는 京町(두월동) 거리의 양쪽에 형성되었지만 일본인조차도 값이 싼 원마산에서 구매를 하였으니 상거래가 그다지 많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일본 상인들은 판매업보다는 여관․요식업․대금업 등으로 업종을 바꾸거나 대상(大商) 중에는 원마산으로 자리를 옮기는 이도 있었습니다.

금융기관으로는 조선식산은행 마산지점(지방 농공은행이 통합하여 창설되어 전 경상농공은행이 있던 자리에 1918년 10월 개설되었다)이 현 제일은행 자리에 있었으며 이 외에 마산금융조합이 신마산에, 구마산 금융조합이 척산천 이동(以東)으로 구역을 분할하여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 밖에 농민을 대상으로 한 내서금융조합과 사금융(私金融)인 마산금융회사 등도 있었다.

1910년 신설된 구마산 역은 도시 범역의 확산과 함께 이 지역의 교통 및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구마산 역 부근 시장통에는 상업조사자가 40%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승객의 숫자도 마산 역보다 많아 부산 대구에 이어 번성했던 역이었습니다.
화물은 경부선․호남선․경의선․진해선 등과 연결되었으며 1년간의 승차인원이 176,104명, 하차인원은 153,495명이었습니다.
부근에는 상업학교․형무소지소․보통학교․식은지점․내서와 구마산 양 금융조합․금융회사․기업전습소․조면공장․정미소 2개․양조장 4개 등이 있었습니다.
이 외에 구마산 역에는 신마산과 다니는 승합차가 27대 있었으며 부외(府外)와 연결되는 자동차가 준행되고 있었다.

마산의 대표산업이었던 양조산업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산전 장유양조장 / 현 몽고간장 / 1950년대 촬영>

                                     <마산의 일본인 양조장 / 1920년대>

 

                                  <소화주류주식회사 / 무학주조 전신>

1926년에는 약 7,450석을 생산했으나 역시 부산의 생산량을 따르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1928년에는 당시의 조합원 12개 공장에서 세운 계획량 9,853석 보다도 1,200석이 더 많은 11,000석을 생산하여 10,000여석을 생산한 부산업계를 제치고 한국의 지역별 주조생산량에서 제1위의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이후 마산의 청주업계는 호황을 지속했고 생산량은 해마다 증가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산의 청주는 국내 시장에 이어 만주와 중국 대륙까지 팔려 나갔습니다.

1920년대에 설립된 마산의 양조회사는 합자회사淸水양조장(1921년), 濱田주조장(1923년), 村崎주조장(1923년), 千島園주조장(1925년), 山邑주조주식회사마산공장(1929년), 昭和주류주식회사(1929년, 현 무학주조) 등입니다.

이 중 천도원주조장이 최근 철거된 삼광청주의 전신입니다.
아래 사진입니다.



일제는 1928년부터 개인의 자유 양조를 금지하고 양조를 허가제로 전환하면서 면허를 발급했습니다.
주로 한국인 업자들에 의해 경영되던 탁주와 약주 양조업은 일본인이 독점했던 청주업계에 비해서 규모는 영세했습니다.
한 예로 1928년 마산의 탁주 생산량은 불과 1,500석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한편, 마산에서 생산된 장유는 그 품질이 우수하여 경남 일원뿐만 아니라 멀리 원산과 청진에 까지 판매되었습니다.
장유업은 일본인들이 독점하고 있었는데 마산의 장유 생산량은 1928년 기준으로 평균 5,000석 정도였습니다.

일제시대 마산의 대표산업이었던 술과 간장 된장 제조업은 지금까지 무학주조와 몽고장유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2011/11/2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5) - 강점제2시기
2011/11/2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쳔사 (86) - 강점제2시기
2011/12/0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7) - 강점제2시기
2011/12/1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8) - 강점제2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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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10 00:00

100년된 '근대산업유산'이 철거 된다고 !


'삼광청주 주조장'이 개발업자의 의해 사라질 지경이라 합니다.
재작년 가을 장군동의 진주가도를 탐방하다가 삭아져가는 공장을 발견하고서


그 공장의 정체가 일제 강점기에 일본인이 세운 '시시마엔(千島園)청주 주조장'(이후 삼광청주로 바뀜)사실을 확인하고 환호성을 지른적이 있다.
개인적인 관심에 의해서 이를 계기로 마산지역에 존재했던 청주주조장의 계보를 정리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다.
마산에 있었던 13개의 청주공장 중에서 유일하게 원형이 그대로 보존된 건물이어서, 근대산업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도 손색이 없는 건물로 세인들의 관심을 받고 있던중에 개발업자가 본 공장부지를 매입하여 공동주택사업을 하겠다는 소문이 사실로 밝혀지면서 장군동 주민들 뿐만아리나 지역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어른들의 걱정거리로 노심초사하게 만들고 있는 지경이다.
다른 지역에서 이와 같은 경우에 추진되고 있는 유사한 대처사례들을 보면서 어떠한 대책을 강구하는 계기가 되길 바라는 마음이다.

 



● 대구의 이상화선생과 서상돈선생 고택 살리기 시민운동

 
※ 대구시민이 지켜낸 상화고택
- 2003년 주상복합건물 신축예정으로 고택이 사라질 위기에 처함
- 고택보존운동분부가 설립되어 모급을 통해 상화고택 인근의 서상돈, 이상정 고택까지 보존키로 운동전개
- 대구광역시에서 건물신축시 상화고택 보존 조건부 가결
- 2005년 고택보본운동본부 모금액과 시집 시에 기증결의
- 2007년 상화고택 보수공사 착공 연내 공사완공
- 2008년 8월 12일 상화고택 개관식

서상돈과 국채보상운동>

(고택 앞마당에서 토요일마다 열리는 '국채보상운동' 당시의 상황을 연극으로 보여주고 있다.)



● 군산의 근대산업유산 살리기 운동
군산는 마산과 동시에 개항된 도시로 일제감점기때 지어진 근대문화 유산들이 많이 남아 있는 도시입니다.
그러한 자산들을 현재 리모델링을 통해 활용하는 방법으로 현재 공사중인 모습을 사진에 담아 보았읍니다.


아울러 '근대역사 박물관'을 만들어 역사도시로 발돋음하려는 노력들이 현재진행 중에 있읍니다.
한편. 부럽기 그지없읍니다.





● 우리지역 문화유산은 우리 손으로 지켜야 ---
마산지역은 군산과 비슷한 여건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근대유산들을 지키려는 노력이 부족한 탓에 이미 많이 소실된 상태라서 아쉽습니다.
그나마 하나 남은 삼강청주 주조장마저  
개발업자의 손에 의해 깡그리 사라질 위기에 처해있읍니다.
현재의 모습이 남루하고 하더라도 100년의 시간이 곁들여진 장소적 의미와  건축적 원본의 가치는 어떠한 비용을 들여서도 재생할 수 없는 소중한 자산임에는 틀림이 없을 것입니다.
가장 좋은 방법은 시에서 매입하여 적절한 용도로 활용하는 것이 좋겠으나,
현재 창원시의 입장에서는 매입할 계획이 없는 것으로 신문지상을 통해 보도된 바 있습니다.
대구의 경우처럼 시민들이 손수 모금을 하여 보존하는 방법도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우선 보존만 된다면 활용할 방안은 시간을 두고 연구를 하면 될 것 같구요.
우리들의 지혜를 모아서,
우리 지역의 문화자산을 지키는 방법이 도출되길 기원합니다.

* 관련 블로그 보기

2009/11/26 - [감춰진 도시이야기] - 마산 청주 주조장의 마지막 모습: 장군동 주조장의 정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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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21 13:00

잊혀진 마산의 청주공장을 찾아서 (2)

잊혀진 마산의 청주공장을 찾아서 (2)

청주는 일제강점기때 지금의 양주못지 않은 고급술로서 주당들의 사랑을 받았던 술이다. 최근들어 젊은층에서 일본수입산 청주, 본토말로 사케를 즐기는 인구가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시기에 마산이 청주 생산의 원조도시로서의 아픈(?) 역사를 찾아보고자 한다. 일제 강점시기에 마산은 청주주조장의 집산지에 해당되었다. 마산에 존재했던 청주공장들을 찾아서 정리하는데 목적이 있다. 

자료의 한계로 내용상 명료하지 않은 부문과 오역된 부분에 대한 지적과, 혹 관련자에 대한 제보를 주시면 내용을 보완해 정리할 계획이다. 블로거님들의 많은 관심을 바란다.

일제 강점기의 주세령
일본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가장 먼저 실시하였던 일이 토지조사와 주류조사였는데. 그 이유는 식민지 수탈을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1907년 이전 까지는 우리나라에서는 일곱 집에 한 집꼴로 술을 빚어 마셨다고 하며, 조선조에는 술에 대한 과세나 전매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개인 집에서 다양한 술을 빚어 마시는 가양주문화가 그 특징이었다.

일제는 1907년 7월에 조선총독부령에 의한 주세령 공포로 제일 먼저 주세를 세금의 대상으로 삼았다. 주세령이 강제집행이 시작됨과 동시에 전통주는 맥이 끊어지기 시작했다. 1916년 1월에는 주류 단속이 강화되는 가운데 전통주류는 약주, 막걸리, 소주로 획일화시켜 우리의 전통 고급주를 사양시켰고, 1917년부터는 주류제조업체가 정비되면서 자가양조를 전면적으로 금지시켰다.

그러한 반면 일본의 청주는 마산에 개항 후 얼마 지나지 않은 1904년부터 청주공장을 가동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주세법에 의해 가양주의 전통을 전면 금지한 반면 일인들에 의한 청주공장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마산을 청주의 도시로 변경시켰다.

청주의 도시 마산
마산에서 청주산업이 얼마나 유명했는지를 알려면 1924년 경상남도에서 발행한 마산의 공장통계에서 보면 주조공장이 6개, 장유양조장 1개, 정미소 2개, 제면소 1개, 철공소 2개로 나타나 있다. 개항이후 약 10년에 걸쳐 제법 규모 있는 공장을 분류하였을 때 청주 주조장이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일본은 조계지를 설정한 구역 내에 제일먼저 조계지 끝 지점에 해당하는 일성펌프자리에 아즈마 주조장(1905)을 시작으로 하여 원마산까지 청주주주장을 만들었다.이후 설립된 공장은 1920년대에 13개의 공장에서 4천 400석을 생산하였으며, 이후 1928년에는 12개 공장에서 1만 1천석을 생산하여 조선의 지역별 청주생산실적에서 부산업계를 제치고 제1위를 차지하였다고 한다.

 마산 청주 주조장의 변천과정
1900년도에 설립된 청주주조장은(상공회의소 100년사, 마산시사 1996 참조) 최초의 주조장은 신마산 일성펌프자리에 1904년에 설립한 아즈마(東) 酒造場이 있으며, 원마산 서성동에서 1905년에 설립된 이사바시(石橋) 주조장, 장군동에 06년에 설립된 五反田 酒造場, 같은 해에 청계동에 설립된 永武 주조장, 07년 홍문동에 설립된 니시다(西田) 주조장, 08년 상남동의 岡田 주조장, 지시마엔(千島園) 酒造場은 장군동에 09년에 설립되었다.
이미 1900년대에 7개의 청주주조장이 신마산, 중앙마산, 원마산 등지에 설립되었던 것이다.
설립연도가 중복되는 공장이 2개 있는데 이시바시 주조장과 지시마엔 주조장은 다른 자료에 의하면 1914년과 1925년에 설립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러한 경우 년대가 앞선 자료를 기원으로 보아서 정리하였다.
당시 마산의 주조장은 내수용에서 시작하여 만주와 중국대륙에 수출용까지 생산하게 되어서, 1938년 2만석을 넘겼다고 한다. 그러나 1939년 가뭄으로 인한 쌀 수확의 흉작으로 사용량을 제한하여 당초량 보다 20% 즐인 1만 7천 여석만을 제한 생산하였다고 한다.
이후 1941년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전시 통제령에 의해 생산량을 제한받아 생산품도 군수용과 일반용으로 지정하여 생산 공급하였다고 한다.
해방과 한국동란기에 불하를 받은  공장들은 12개의 공장들은 운영부실로 60년대 초반에는 7개의 주조장만 남아 생산을 하다가, 다시 5개의 공장이 없어지고, 3개의 공장이 생겨나서 5개의 공장으로 유지되다가 1973년 지방의 중소주류업체 통합법에 의해 백광청주만 홍문동에 남아 있다가. 70년대 후반에 하나마저도 사라지게 되었다.

마산 청주 주조장의 역사

1. 아즈마(東)주조장(1904) - 하라다(原田)주조장(1923) - 동화주조(정기운)(1946-60? )
 마산에서 최초로 생긴 청주주조장이며 마산의 4대 양조장의 하나이다. 개항기인 1904년 마산에서는 최초로 설립되었던 아즈마(東) 양조장을 1923년 하라다(原田淸一)가 매수하여 이름을 바꾸었다. 연간 양조량은 1천석 내외이고 상호는 명주「한목단」(寒牧丹, 간보단)이었다. 이 공장의 연간 생산량은 1,000석 내외였다. 월남동 5가 1번지에 위치하며 해방이후 구.일성펌프(46.7.1, 최성주)공장이 일부 설립되었으며, 하라다 주조장은 미군정청에 접수된 이후 정기운이 불하를 받아서 동화주조라는 상호로 청주를 생산하였다. 이후 1955년 공장명부에 등재되어 있었으며, 1961년 상공회의소의 공장명부에 없는 점으로 보아, 50년대 후반쯤에 청주생산을 중단한 것으로 보인다. 이 주조장 부지는 일성펌프 공장과 유남상가로 지속되다가 2000년에 신축건물 일성프라자가 공장부지에 들어섰으나, 얼마 후 소유권이 공중분해 되었으며, 현재 상가도 폐가처럼 비어있다. 특이 이 땅은 개항초기에 마산 최초의 러시아 호텔이 있었던 자리로도 알려져 있다. 여러모로 로 유명세를 가진 땅인데, 땅도 주인을 잘만나야지, 옛 명성을 유지할 수 있는것 같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마산최초의 청주 아즈마(東)주조장의 현재의 모습)

 2. 이시바시(石橋) 酒造場 (1905.10)- 대흥주조(문삼찬) (1946-60년대?)
경상남도 통계보고(1924년, 공장표)에 의하면 자본금 1만2천엔으로 1905년 10월 서성동 16번지에서 석교시태랑(石橋市太郞) 설립한 기록이 남아있으며, 다른 자료에 의하면 1914년 이시바시(石橋市太郞)가 설립하여 1926년 아들에게 계승된 이후 마산부 幸町(현 서성동)에 공장을 신축해서 연간 500석 가량의 청주를 생산한 기록이 남아 있다. 상표「大典正宗, 다이덴 마사무라」이었다.
해방이후 이시바시(石橋)주조는 문삼찬이 불하를 받아 상호를 대흥주조로 바꾸었다. 당시 직원은 6명이 소규모 공장이였으며, 1970년의 주류제조업체 현황에 나오지 않은 것으로 봐서 60년대 후반에 폐업한 것으로 보인다. (상호를 芙蓉으로 사용)

*우리가 흔히 정종이라하는 것은 일본의 청주 상호중에 정종(正宗)이라는 이름이 들어가는 유명한 청주가 많아서 고유명사화되어 사용되고 있는데, 사실은 올바른 표현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상호 예 : 대전정종, 학정종 등)
(현재의 위치는 서성동 덕천상가아파트 필지에  합병된 것으로 보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당시 공장의 위치는 덕천상가아파트에 포함됨)

                                                                 
3. 고단다(오반전/
五反田) 酒造場 (1906.10)
장군동에 06년에 자본금 1만엔으로 설립된 청주주조장으로 마산야화에 의하면 사입(仕入)에 부주의한 탓으로 파산하였다고 함. 파산시기는 해방이후 귀속주류업체 현황(1953)에 없으므로 해방 전후 시기로 판단된다.
(위치는 마산야화에 의하면 96년에 관광센터가 있던 '푸른집'자리라고 한다.)

3. 엔무(영무/永武) 주조장(1906.11)
신마산 조계지내 청계동에 자본금 1만엔으로 설립된 주조장으로 인접한 부지에 적문장유양조장(1906)이 있었다. 당시 생산한 정종은 학정종(鶴正宗)이었다. 마산야화에 의하면 종전(52년) 당시까지 정종을 생산하였다고 하였으며, 1953년의 주류제조업체 현황에 나오지 않은 것으로 봐서 그전에 폐업한 것으로 보인다.  정확한 지번은 없지만 청계동이 몇필지 않되는 적은 동임을 감안하여 추정할 때, 공장의 위치는 현재 문화동 주민센터이거나 인접 주택필지로 보인다.

4. 니시다(西田) 주조장 (1907)- 삼성주조(신봉희)(1946) - 백광주조(이우현/이성훈)(60-79?)
마산에서는 가장 오래된 양조장의 하나이다. 창업주 일본인 니시다(西田木摠市)에 의해 자본금 2만엔으로 1907년 11월 설립되어 마산부 영정(榮町: 현 홍문동9)에 공장을 세웠다. 이 공장의 양조량은 1926년에 600석에 불과했으나 3년후인 1929년에는 2배가 넘는 1천300석의 실적을 올렸다. 생산한 청주상표는 「鷄林」(계림, 게이링)이였다. 해방이후 신봉희가 불하를 받아서 삼성주조로 상호를 바꾸어 청주를 생산하였다. 종전(1952년)까지 제품을 생산하였으나 1961년 쥬류제조업체 현황에 의하면 동일 위치에 백광주조장으로 상호가 변경되어 백광청주를 생산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 때 대표자는 이우현이었으나 1973년 주류업체의 통폐합에 따라 73년 10월 18일 백광주조장만이 마산에서 청주를 생산하는 공장이 되었으며, 대표도 이성훈으로 변경되었다. 당시 직원이 33명이었다. 한편 인접한 지역 홍문동 6번지 상의 염록주조장 인수하여 동시에 청주를 생산한 것으로 보인다.

백광양조장은 73년 정부의 군소주류업체 통합조치에 의해 하나만 남아 있다가 연생산량이 3,500kl 내외에 지나지 않아서 70년대를 넘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마산에서 70년대 후반까지 청주를 생산한 마산 최후의 공장으로 역할을 하였다. 이후 이 공장건물은 80년대 초반까지 남아서 롤러스케이트 연습장으로 사용되었다가. 90년대(?)에 신동아 빌라 공동주택이 들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서전주조장의 조감도사진

 

사용자 삽입 이미지60년대 전경,중앙상단이 서전주조장, 하단의 공장은 녹수주조장

 

사용자 삽입 이미지(서전주주장은 현재 신동아빌라가 들어서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60년대 백광청주 상표)

5. 강전(岡田) 주조장 (1908.9 - ?)
경상남도 통계보고(1924년, 공장표)에 나타나는 공장이다. 상남동에서 자본금 1만2천엔으로 설립된 기록만 남아있으며, 이후의 기록은 없다. 해방 이전 양조장이 폐업했거나 용도변경(탁주, 소주, 장유)가능성이 있다. 현재의 위치확인은 불가능하다.

6. 지시마엔(千島園) 주조장 (1909.10) - 삼광주조장(손삼권)(1946-73)
경상남도 통계보고(1924년, 공장표)에 의하면 자본금 1만5천엔으로 1909년 10월 마산부 통정(通町: 현 장군동)에서 엔도우(遠騰豊吉)에 의해 설립한 기록이 남아있으며, 다른 자료에 의하면 1925년 창립한 기록도 남아있다. 당시 생산한 청주는 명주 「彌生」(미생, 야요이)의 상표로 연간 500석 정도를 생산 판매했다.

해방이후 지시마엔(千島園)주조는 손삼권씨가 불하를 받아서 그대로 천도원주조로 했다가 뒤에 삼광주조로 변경하였다. 이후 손삼권씨는 인접필지에서 염국모가 운영하는 칠성주조장을 인수하여 삼강주조로 변경하고 2개 공장 삼광, 삼강을 동시에 운영하다가. 1973년 정부의 군소주류엽체 통합조치에 의해 폐업하였다. 다행히 공장건물은 현재까지 남아있으며, 창고 및 주택으로 사용되고 있다.  당시 공장의 규모는 삼강주조장이 더 컸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삼광주조장의 60년대모습과 현재의 모습)

 

사용자 삽입 이미지(60년대 삼광청주 상표)

7. 이데(井手) 주조장(1911.10) - 칠성주조장(염국모) - 삼강주조장(손삼권)(1946-1973)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삼강주조장의 현재모습, 삼광주조장과 같이 운영되었다.)

 1911년 10월 井手倬次郞에 의해 창업, 마산부 개정(신흥동)에서 연간 500석 정도의 청주 ‘總督’을 생산.1930년부터 상표를 朝乃灘(조내탄, 아사노나다)으로 바꾸었다. 해방이후 이데(井手)주조는 칠성주조(염국모)로 바뀌어 청주생산을 계속하였으나 1961년 이후 인접필지에 있는 삼광청주의 권삼문에 의해 상호를 삼강으로 바꾸어 유지되다가 73년 폐업된다. 공장건물의 외부원형은 그대로 남아있으며, 현재 다가구 주택으로 개조되어 사용되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60년대 칠성/삼강주조장과 현재의 후면모습)

사용자 삽입 이미지(60년대 생산된 삼광청주, 삼강청주)


8. 미요시(三好) 주조장(1913) - 삼일주조장(이우식-정명갑-문병대)
(1952-196?)
마산부 부정(富町: 현 부림동 103)에서 미요시(三好彌三郞)가 1913년에 설립했다. 연간 생산량은 400석 내외이고 상표는 松乃色. 해방이후 - 미요시(三好)주조는 휴전 이후에 삼일주조(이우식)이후 정명갑으로 바뀜 (三一주조장/ 鄭明甲/ 부림동103/ 7), 당시 생산한 청주의 상호는 觀海였으며, 1961년 이후 폐업되었으며, 위치는 부림시장 아래편쪽에 1969년 설립된 백광소주(문삼찬)과 인접한 공장이었다. 지금은 위치는 부림동 구.화남상사건물이 있던 위치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삼일주조장의 50년대 모습)



9. 히라이(平井) 주조장(1914.4) - 조해주조(서준보)(1946-196?)
1914년 4월 히라이 (平井政太郞)에 의해 창업되었다. 마산부 도정(都町: 현 중앙동)에 공장을 갖고 명주「취향」(醉香, 스위꼬)을 생산했다. 연간 양조능력 2천석의 대형 양조장이었다.
해방이후 히라이주조는 조해(朝海)주주식회사로 서준보에 의해 불하되어 운영되었다. 위치는 중앙동 2가6번지로 그 터에 현재 주유소가 들어서 있다.
1961년 공장등록이 되어있는 것으로 보아서 이후에 폐업한 것으로 보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60년대 마산역옆의 조해주조)

         

사용자 삽입 이미지(현재의 모습, 마산역은 아파트로 변하였고--)

           
10. 합자회사 시미즈(淸水)
(1927.6) - 대동주조(이병진)(1946-60) - 무학주조(최위승)(1973-84)
마산에서 제일 큰 규모의 양조장이었다. 1921년 시미즈(淸水篤行)에 의해 창업되어 1927년 6월 사원공동 출자15만엔(円)의 법인체로 바꾸었다. 시내 야나기마찌(柳町:신창동13)에 자리한 이 공장의 생산능력은 연간 1만 3천500석 1928년에는 당시의 마산의 양조업계 총생산량인 1만석의 25%에 해당하는 2천500석을 생산했다. 이 회사 생산품인 청주 「대정앵」(大正櫻, 다이쇼 사꾸라)과 <井筒平>은 만주와 중국대륙에까지 판매했다.

해방이후 시미즈 : 종전(52년)까지 출고함(야화)/ 해방이후 대동주조(대표 이병진)로 명의가 변경되었다. 당시 대표 이병진은 중앙동에 마산주조회사를 동시에 운영하면서 청주를 생산한 것으로 나온다. 마산주조는 1945년부터 1960년까지 공장을 가동하였다. 위치는 경남데파트 뒤편 진주 가도변으로 판단되며, 현재 위치는 정확히 나타나지 않는다. 대동주조도 같은 기간 동안 생산을 하였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이후 1973년에 무학주조가 경남지역 36개 소주회사를 통폐합하여 본 대동주조공장으로 이전하여 무학소주를 생산하는 공장으로 변경되어 사용되었다. 이후 1984년 무학이 봉암동으로 이전함에 따라 무학빌라 공동주택이 건설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시미즈(淸水)주조장의 흔적은 인접한 창원천의 다리이름 청수교(淸水橋)에서 그 기억을 찾을 수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청수주조장, 대동주조장, 무학주조로 변경된 공장의 과거와 현재 전경)

사용자 삽입 이미지(청수주조에 인접한 청수교)


사용자 삽입 이미지(마산주조, 1945-60, 이병진)


11. 하마다(濱田) 주조장 (1923) - 옥포주조(이태익)(1946-60)
마산부 신정(新町 : 현 추산동)에서 하마다(濱田慶治)가 1923년에 설립, 연간 양조량은 500석이다. 이 공장에서 생산된 청주 金盃濱鶴
(금배빈학, 긴빠이 하마쯔루)의 명성은 꽤 높았다.
해방이후
하마다(濱田)주조는 옥포주조(이태익)로가 인수
1961년 당시 공장등록대장에 없으므로 그전에 폐업한 것으로 판단된다.
위치는 중앙극장 우측 내림길에 있다고 전하며, 현재 지번이 없어 찾을길이 없다.
 
    
12. 무라자끼(村崎)주조장(1925) - 염록주조(김상현)(1946-60)
1925년 당시 마산부 도정(都町: 현 중앙동)에 있던 다무라(田村) 주조장을 무라자끼 (村崎仁三郞)가 인수하여 영정(營町: 현 홍문동6)에 새 공장을 세워 이전했다. 옛 상표 摠富士였는데 새로「艶綠」(염녹, 쯔야미도리)으로 바꾸었다.

해방이후 무라자기(村崎)주조는 엽록주조(김상현)로 되었다. 인접한 홍문동 9번지에 백광주조장을 가동하던 이우현에게 인계하여 두 공장에서 백광청주를 1970년대 후반까지 생산하였다. (염록은 종전(52년)까지 출고함(야화)

사용자 삽입 이미지(주조장의 현재모습)

00 녹수(錄水)주조장/ 李雨鉉/ 홍문동3/ 8-(1950?-1965)
녹수주조장은 53년 공장등록명부에는 없으며, 61년 주류업체 현황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서 50년대 중후반에 설립된 것으로 판단된다. 공장위치는 홍문동 3번지로 백광주조장과 인접한 위치에 있다. 이후 1965. 11. 10에 청주공장은 최계정에 의해 백광장유양조장으로 전업하여 영업(마산 홍문동 3-4, 최계정)을 개시하여 간장, 된장, 식초를 생산하였다. 당시 직원은5명이었다. 이후에 공장부지에 배진아파트가 들어서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녹수주조, 백광양조 공장터에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13. 마쯔모도(松本) 주조장 (일제말기 -1945) - 금포주조?(김행도)(1950?-1960)
마산에서는 가장 늦게 생긴 양조장이다. 일제말기 마쯔모도(松本通)가 통정(通町: 현 장군동)에 새 공장을 세우고 명주 月乃浦를 생산했다. 이외 특별한 기록이 없으며, 해방이후 쯔기노우라(月浦)주조가 김행도에게 불하되어 금포주조로 바뀌었다. 둘 다 장군동인 점을 감안하며, 월내포가 월포로 바뀌었을 가능성도 있을 것 같다. 허나, 금포주조 역시 50년대 후반에 폐업한 것으로 보인다. 61년 주류업체현황에 보이지 않는다. 위치는 경남데파트 뒤편으로 추정한다.

00 이 외에 나타나는 주조장은 중앙동에 동성주조(주)가 이만희에 의해 해방이후 설립되어 60년도 이전에 폐업한 것으로 보인다.

14. 야마무라(山邑)주조 마산공장- 동양주정(1952)-무학주정 -유원산업 창업(동양주정과 합병, 1960)
일본에 본사를 두고 청주 櫻正吉」(앵정길, 사꾸라 마샤요시)을 생산하는 야마무라(山邑)주조 주식회사가 1929년 4월 마산부 본정(本町: 현 월남동)에 마산공장을 세워 만주와 중국에 수출할 청주를 생산했다. 해방이후 야마무라(山邑)주조는 무학주정으로 개칭하며 주정과 소주를 생산하였으며, 65년이후 주정만을 생산하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야마무라(산읍)주조, 해방후 유원산업

15. 쇼와(昭和) 주류공업사
일본 야마무라(山邑) 주조의 계열사로 1929년 4월 10일 자본금 50만엔(円)으로 설립된 종합주류회사이다. 1929년 9월부터 본정(本町 :현 월남동) 해안 매립지에 신축한 공장에서 주류생산을 시작했다.
창업 초기에는 년간 청주 1천석정도 생산했으나 1935년부터 청주는 야마무라주조에 넘기고 기타주류(소주, 미린주, 포도주, 기타 위스키, 브랜드 등)을 생산하였다. 이외 합성주인 이연주(理硏酒) 一新과 소주 明月과 양주 등을 생산하였다. 해방이후 유원산업으로 변경, 1952년부터는 증류주만을 생산하였으나 이후 1965년부터 희석식 소주만을 생산하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해방 직후 주조장 현황
시내 13개 청주양조공장들도 해방과 함께 미군정청에 접수되었다. 미 군정청은 이들 적산 청주공장을 과거 일본인 공장에 종사했던 종업원이나 주류제조에 경험이 있는 자나 그밖에 관리 운영할 능력이 있는 한국인을 선정하여 관리 운영을 맡겼다. 이를 맡은 관리인들은 먼저 일본인들이 사용하던 상호를 새것으로 바꾸었다. 새로이 출발한 청주공장들을 1946년 세무당국으로부터 주류제조면허를 받아서 나름대로 생산을 시작했다. 그러나 해방 후의 극심한 식량난 때문에 청주의 원료인 쌀의 사용이 제한되었고 양조시설 역시 빈약해서 제대로 생산을 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기득한 관리권을 다른 제3자에게 넘겨 버리는 공장도 생겨났다. 이들 청주공장들도 1951년 이후에 연고자들에게 모두 불하 되었다.
6·25사변으로 생산이 거의 중단되었던 마산의 청주업계는 휴전이 되자 새로운 활로를 모색했다. 이 결과 업자들은 서로 합의하여 서울지역에의 진출을 위해 서울지역 출고분에 한해서
銘花라는 한가지 상표로 공동 판매제를 실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업자 서로간의 이해에 얽힌 불신과 갈등으로 공판제 실시 1년을 넘기지 못하고 해체되었다. 이후 업자들의 과잉 경쟁으로 덤핑판매가 시장 질서를 무너뜨리면서 低質酒가 나돌아 소비자로부터 외면당하게 되었고 경영적자가 누적되면서 문을 닫는 업체도 생겨 1961년 겨우 7개 양조장이 조업하고 있었다.

60년대 이후 현황
1971년 마산의 청주생산량은 청주86만2,100L 이고, 합성청주는 17만1,790L였다. 69년의 생산량 청주 125만2천L, 합성청주33만 1,560L에 비하면 크게 감량된 것이었다. 그 후 1974년 생산량은 더욱 감소되어 청주 71만6,470L, 합성청주 29만4,789L를 생산했는데 70년대 하반기에는 더욱 줄어들어 마산 청주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60년대 이후 설립된 청주주조장
1. 寒牡円/한목단 양조장 : 하리다 주조장의 상호를 사용(최태수, 산호동 17-3, 62. 11. 28) : 원조격에 해당하는 하라다주조의 '한목단'상호명을 패러디하여 설립되었으나 73년에 통폐합되어 없어졌다.
2. 신광양조장 (최동렬, 산호동 128, 65. 12. 13)
3. 성광주조장 (손정길, 신포동 2, 69. 1. 3)
상기 3개의 공장은 73년 정부의 군소주류업체 통합조치에 의해 백광청주에 의해 통폐합되어서 이름이 사라지게 되었다.
백광청주 역시 70년대 후반에 세태의 기호변화에 의해 공급을 중단하고 말았다.

이외 알아내지 못한 청주공장도 있으리라 생각된다. 아쉬운 것은 생산하였던 청주들의 상표 및 상호라도 수집되어 정리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혹시 이러한 자료를 가진분이 계시면 협조 보완하여 잘 정리되었으면 한다.

이로서 마산의 청주생산은 1904년 시작하여 1979년(?)까지 75년간 세월의 영욕 속에 사라졌다.
그나마 장군동과 신흥동에 인접해 있는 삼광청주, 삼강청주 2개의 공장은 원형이 점차 삭아져 가고 있다.
세월의 흐름 속에, 우리의 기억속에서 점점 사라져 가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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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오유림 2010.01.22 11:39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와....
    논문같아요..멋집니다.
    이런 자료들 다 어디서 찾아요 ㅎㅎ
    사진속 건물들이 아직 살아 있는 곳은 정말 신기합니다.
    더 삭아지기전에 어떤 조치(?)를 취하면 좋겠구만..
    잘 보고 갑니다 신선생님 ^^

  2. 옥가실 2010.01.22 17:23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수고했습니다.
    거의 다 찾아낸 셈이네요.
    마산의 술만 연구해도 박사논문은 거뜬하겠는걸요..^^

  3. 삼식 2010.01.22 20:27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불확실한 부분이 아직 많은것 같읍니다.
    지역 어른들의 협조를 받아서
    어찌 해볼까 합니다.
    술을 좋아한 죄로
    시간나는 대로 자료를 보완할 계획입니다.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꾸벅

  4. 감사 2013.10.09 19:05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저희 할아버님 이름이 보이는군요 잘보았습니다

    • 허정도 2013.10.09 21:01 신고 address edit & del

      방문 감사합니다.
      실례지만 조부님 함자가 어떻게 되시는지요?

2009.11.26 07:30

마산 청주 주조장의 마지막 모습: 장군동 주조장의 정체 ?

사용자 삽입 이미지삼광청주 공장전경 (출처 : 마산시청 포토자료실/역사)

- [유장근 교수의 도시탐방대]가 1차 탐방시 장군동 양조장의 실체를 몰라서 답답해 하다가,  유대장님이 저에게 조사를 한번 해보라는 말씀을 하셨는데 듣고 그냥 지나쳤었다.
그후 마산 역사사진을 정리하다가 혹시나 해서,
대조해보니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 확인되었다.

굴뚝과 건물의 지붕선을 보면 정확히 동일 건물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순간 '빙고', 짜릿한 기분이 들었다.

(위 사진에서 모서리 가로수를 지우면 정확히 같은 각도에서 본 사진이 된다. )

사용자 삽입 이미지유장근대장 촬영 (09.10.24)


- 이건물은 1925년에 청주양조면허를 얻어 마산부 통정(장군동)에서 창립한 千島園 주조장으로, 창업주는 遠勝豊吉, 명주 彌生의 생산량은 연간 500석 내외였다고 한다.
(마산상공회의소 100년사)

- 천도원 주조장은 옛 상호를 그대로 사용하다가 삼광청주로 바뀌었으며,  해방이후 적산 청주공장들은 연고자들에게 불하하였는데, 손삼권씨가 인수하여 운영하였었다.
삼광 청주는1962년 기존 업체들이 문을 닫아 삼광과 백광 2개 양조장만이 마산에서 청주을 생산하였던 양조장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삼광청주 상호 (사진출처 : 마산문화원 전시사진)


- 1971년도에 청주 제조업체는 백광, 신광, 삼광 등을 비롯한 5개의 양조장이 향토 명산의 청주를 제조하였으나,
1973년 정부의 군소 주조업체의 통합조치 이후 삼광주조장은 문을 닫게 되었다.
당시 백광 양조장 하나만 생산을 계속 하다가 이마저 생산을 중단하고 문을 닫게 되어 酒都馬山의 명성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1999년 경남신문에 인터뷰한 손삼권씨는 45년 10월 지시마엔 양조장을 당시 일본인 사장이던 엔도(遠藤豊吉)로부터 인수, 합포구 장군동 3-13번지 공장에서 삼강(三江)양조장을 운영하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일본공장 이름을 그대로 쓰고 술 이름도 「무궁화」로 정했으나 「나라 꽃을 마시면 되느냐」는 주변의 지적에 따라 공장은 「三江」(대동강 한강 압록강), 술 이름은 「三光」(해 달 별)으로 바꿨다. 45년 11월부터 청주를 만들기 시작했으니 광복이후 한국사람으로서는 가장 먼저 청주를 만들었다 한다.



- 근대문화유산 목록화사업 (경상남도. 2004)자료에 의하면,
이 건물은 1945년에 건축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공장은 블록조 단층건물로 중앙에 벽돌조 굴뚝이 높이 솟아있다.
주변의 주택은 2층 목구조로 되어 있으며,  내부에는 중정으로 열린 마당과 그 둘레에 2층의 주택들이 있다. 고 기록되어 있다.
경남신문 인터뷰 시기인 1999년 에서 경남의 근대문화유산리스트 정리시기인 2004년 사이에 유명을 달리한 것 같다. 그래서 목록화리스트에서 건물의 소유는 작고한 손삼권씨 앞으로 되어있었다.
건물이 지어진 시기는 손삼권씨가 해방이후 적산가옥을 인수한 것을 감안할 경우,
1925년 천도원주조장 설립시 지어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 현재 이건물은 개축되어 다가구 형태의 주택들이 들어서 있다.
원형이 많이 훼손되어 있으나, 그나마 외관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 신기할 뿐이다.
이건물의 용도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경남의 근대문화유산 자료에서도 확인되지 않은 것을,
 이번 도시탐방대를 통해 밝혀지게 된 것이다. 

건물은 없어지더라고 기록은 남겨져야 된다.
물론 이 건물에 관한 이야기들이 한 개인의 기억에 남아있기도 하고
어느 신문 한켠에 남아있을 뿐이다.

지역사에서 이러한 양조 변천사와 근대 건축물에 대한 자료를 정리할 필요가 있을것 같다.
소홀히 취급하기 쉬운 미시사 부분의 정리를 통해,
지역에 대한 자부심과 함께 문화시설 인프라로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과정이 문화도시로 나아가는 첫 걸음이 될 것이다
.


본 건물은 진주가도변에 있는 건물로 주소는 장군동3가 13번지에 위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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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옥가실 2009.11.26 12:57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정말로 수고하셨습니다.
    좋은 자료입니다.

    또 그 당시에 사진을 찍던 이와 최근에 사진을 찍은 이의 생각과 구도가 같다는 것도 놀랍습니다. 그게 누구라고는 말 못하겠구요^^

    한가지, 좀 이상한 점이 있습니다.

    1974년 마산상공회의소 인명록에 보니, 백광(이성훈, 마산시 홍문동 9, 1973.10월 설립, 종업원 33명), 신광(최동연, 마산 산호동 128, 1965.12.13일 설립, 종업원 10))은 있는데, 삼광은 없어요.

  2. 삼식이 2009.11.26 13:32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삼광이 73년에 문들 닫고, 백광만이 남았다가 곧 없어졌다고 합니다.
    한번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차 탐방사진은 우리카페에서 복사를 했는데, 촬영자는 미처 확인을 못했읍니다. 확인후 수정하겠읍니다.)
    가능하면 개항이후 주조장의 위치 및 흔적들을 한번 정리하다보면
    그 실마리가 풀릴것 같습니다.

    • 옥가실 2009.11.26 20:23 신고 address edit & del

      아고고... 괜히 찍사 이야기를 했네. 농담인 것을..^^
      (제가 찍어 올린 것이라우)

  3. 이은진 2009.11.26 13:33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노고에 감사드리고,
    이 사이트를 통해 지역의 역사를 배우는 재미가 솔솔합니다.

    기대합니다.

    • 신삼호 2009.11.26 13:42 신고 address edit & del

      관심가져 주셔서 감사합니다.
      류장근대장님 명령을 따르다 보니 ㅅㅅ
      이런 내용까지 나오게 되었읍니다.

  4. 허정도 2009.11.26 13:59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어때요?
    이 건물은 원형도 크게훼손된 것 같지 않은데 '마산주류박물관'으로 하는 것이.
    즉석에서 청주 만들어 판매도 하면 수입금도 꽤 짭짤할 것 같은데.

    • 옥가실 2009.11.26 20:20 신고 address edit & del

      좋은 아이디어입니다.
      짭잘 정도를 넘어서야 할 텐데...^^

  5. 유림 2009.11.26 18:17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긴 시간은 많은 것을 지워버린다고만 생각했는데..
    흔적은 어디에도 남게 되는 모양입니다.

    신기합니다.

    • 삼식 2009.11.26 19:11 신고 address edit & del

      그 흔적을 찾아서 정리하는 일이 누군가 해야할 일이겠지요, 도시탐방대를 하는 큰 목적중에 하나이지요!

  6. 노치환 2009.12.01 14:06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회장님,,,
    요사이 지역 특산물로 곡주가 많은 인기를 얻는 것 같은데
    정말 말씀처럼 주류 박물관 너무 괜찮을 듯 합니다...

    • 허정도 2009.12.01 16:19 신고 address edit & del

      반갑네요.
      곡주라니 술 한잔 생각나네.
      언제 함께 한잔합시다.

  7. 최정건 2010.01.13 01:04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허정도 님 제가 그 건물 근처에 살고 있습니다.

    지나가면서 들은 이야기인데, 어르신들이 하신 말씀이

    예전에 철도청 관사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 허정도 2010.01.13 11:05 신고 address edit & del

      반갑습니다.
      예, 저도 얼핏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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