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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19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9) - 강점제2시기

<1920년대 마산의 산업>

1920년대 마산항의 물동량은 일본 국내의 불황과는 달리 오히려 더 늘어만 갔습니다. 주요 수출품은 여전히 미곡이었으며 전체 수․이출액의 80%를 차지했습니다.
1925년 마산항에서 일본으로 반출된 미곡은 약 15만석이었는데 1928년에는 65%가 증가한 25만석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미곡 수․이출의 증가는 수치상으로는 무역의 증대였지만 사실은 일제에 의한 미곡의 약탈적 반출이 점점 증대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정미업은 1911년 하목철삼(夏目哲三)에 의해 전기모터를 설치한 것이 기계화된 정미소의 시작인데 그 후 많이 늘어나 1924년 현재 25개소였습니다.
그 중 한국인의 것이 12개소, 일본인의 것은 13개소였습니다.

섬유공업은 회사령 폐지 이후부터 마산에 유치되기 시작한 업종입니다.
특히 1923년 6월 일본 오사카의 본전안오랑(本田安五郞)이 전 조선면화 마산공장을 매수하여 그 해 10월부터 작업을 시작한 주식회사 마산조면공장이 1924년 1,300평의 부지에 280평의 공장과 50평의 하치장을 신축하여 운영하였습니다.
그 후 1927년에는 태전성일(太田誠一)에 의해 창립된 태전마사(太田麻糸) 공장이 부지 5,000평에 건평 1,000평의 공장을 세우고 가동에 들어갔습니다.

1920년대는 마산-진주 간 철도가 개설됨으로써 서부 경남과의 교역이 활발해지자 북마산 역 주변에 역세권이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그 영향으로 제법 규모 있는 점포들이 원마산에 들어서게 되면서 상가지역이 두드러지게 발전하기 시작했습니다.

원마산은 창동․남성동․중성동․동성동 일부 지역에 걸쳐 상가가 조성되어 있었으며 부정공설시장(현 부림시장)부근과 남성동 해안 매축지에서 곡물상․해산물상․식료품상․포목상․잡화상들의 점포와 노점상이 즐비했습니다.
제조업 분야에 손을 뻗지 못한 한국 상인들은 주로 이 지역 상가에서 도․소매업을 경영했던 것입니다.

신마산의 상가는 京町(두월동) 거리의 양쪽에 형성되었지만 일본인조차도 값이 싼 원마산에서 구매를 하였으니 상거래가 그다지 많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일본 상인들은 판매업보다는 여관․요식업․대금업 등으로 업종을 바꾸거나 대상(大商) 중에는 원마산으로 자리를 옮기는 이도 있었습니다.

금융기관으로는 조선식산은행 마산지점(지방 농공은행이 통합하여 창설되어 전 경상농공은행이 있던 자리에 1918년 10월 개설되었다)이 현 제일은행 자리에 있었으며 이 외에 마산금융조합이 신마산에, 구마산 금융조합이 척산천 이동(以東)으로 구역을 분할하여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이 밖에 농민을 대상으로 한 내서금융조합과 사금융(私金融)인 마산금융회사 등도 있었다.

1910년 신설된 구마산 역은 도시 범역의 확산과 함께 이 지역의 교통 및 상업의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구마산 역 부근 시장통에는 상업조사자가 40%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승객의 숫자도 마산 역보다 많아 부산 대구에 이어 번성했던 역이었습니다.
화물은 경부선․호남선․경의선․진해선 등과 연결되었으며 1년간의 승차인원이 176,104명, 하차인원은 153,495명이었습니다.
부근에는 상업학교․형무소지소․보통학교․식은지점․내서와 구마산 양 금융조합․금융회사․기업전습소․조면공장․정미소 2개․양조장 4개 등이 있었습니다.
이 외에 구마산 역에는 신마산과 다니는 승합차가 27대 있었으며 부외(府外)와 연결되는 자동차가 준행되고 있었다.

마산의 대표산업이었던 양조산업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산전 장유양조장 / 현 몽고간장 / 1950년대 촬영>

                                     <마산의 일본인 양조장 / 1920년대>

 

                                  <소화주류주식회사 / 무학주조 전신>

1926년에는 약 7,450석을 생산했으나 역시 부산의 생산량을 따르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1928년에는 당시의 조합원 12개 공장에서 세운 계획량 9,853석 보다도 1,200석이 더 많은 11,000석을 생산하여 10,000여석을 생산한 부산업계를 제치고 한국의 지역별 주조생산량에서 제1위의 자리를 차지했습니다.
이후 마산의 청주업계는 호황을 지속했고 생산량은 해마다 증가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마산의 청주는 국내 시장에 이어 만주와 중국 대륙까지 팔려 나갔습니다.

1920년대에 설립된 마산의 양조회사는 합자회사淸水양조장(1921년), 濱田주조장(1923년), 村崎주조장(1923년), 千島園주조장(1925년), 山邑주조주식회사마산공장(1929년), 昭和주류주식회사(1929년, 현 무학주조) 등입니다.

이 중 천도원주조장이 최근 철거된 삼광청주의 전신입니다.
아래 사진입니다.



일제는 1928년부터 개인의 자유 양조를 금지하고 양조를 허가제로 전환하면서 면허를 발급했습니다.
주로 한국인 업자들에 의해 경영되던 탁주와 약주 양조업은 일본인이 독점했던 청주업계에 비해서 규모는 영세했습니다.
한 예로 1928년 마산의 탁주 생산량은 불과 1,500석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한편, 마산에서 생산된 장유는 그 품질이 우수하여 경남 일원뿐만 아니라 멀리 원산과 청진에 까지 판매되었습니다.
장유업은 일본인들이 독점하고 있었는데 마산의 장유 생산량은 1928년 기준으로 평균 5,000석 정도였습니다.

일제시대 마산의 대표산업이었던 술과 간장 된장 제조업은 지금까지 무학주조와 몽고장유로 이어지고 있습니다.<<<



2011/11/2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5) - 강점제2시기
2011/11/2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쳔사 (86) - 강점제2시기
2011/12/0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7) - 강점제2시기
2011/12/1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8) - 강점제2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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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0.05 10:46

'삼광청주' 못다한 이야기들

 ● 지금 사라지고 있는 장군동 '삼강청주' 주조장에 대한 못다한 이야기와 그림들을 정리하면서 사라지는 것에 대한 기억과 추억들을 되새겨 보고자 한다.

- 이 사진은 1930년대 '천도원주조장'(삼강청주 전신)의 풍경이다.
- 지금의 사진(아래 전경사진)과 비교해 보면 '사택'이 있던 곳은 술통을 놓아두었던 마당으로 사용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마지막 탐방시 마당에 방치된 술통(직경 1.8미터에 높이 2미터)의 크기와 비슷한 것으로 보이는 술통들이 마당에 널려져 있다. 우리가 보았던 술통은 철제로 되어있었던 것과 달리, 당시에는 나무 판재를 세로로 겹쳐서 수평밴드로 감싼 목제형태의 술통이 사용되었던것 같다.
- 당시의 흔적을 네모난 굴뚝이 말해주고 있으며, 이 건물의 형태는 아래 전경사진에서 보면 원형이 그대로 남아있음을 알 수 있다.
즉, 지금처럼 주변에 있는 주택들은 30년대 이후에 지어진 것이다.

(50년대 삼강청주 주조장의 모습이다.) (철거 전의 공장 전경 : 이 공장이 30년대 사진에 나타난 그 모습그대로이다.)
(50년대 아래에 위치한 신흥동 '삼강청주' 주조장의 모습이다.) (철거 전 삼강청주 주조장 모습이다.)


(사진: 도민일보 김구연기자)

● 사진 좌측의 네모난 굴뚝이 있는 공장이 1909년에 설립된 천도원(삼광청주 공장의 전신) 청주 주조장이었으며, 우측의 원형굴뚝이 있는 공장이 1911년 설림된 이데(井手주조장 : 칠성주조장으로 변경후 삼강청주로 바뀌었음)청주 주조장의 마지막 모습이다.
 
●이 두공장의 기원이 되는 대지의 조성과정과 소유주의 변천과정을 통해 공장의 생성사를 파악하기 위하여 토지대장 사정지적도(査定地籍圖)를 조사해 보았다.
지번의 분화 및 소유주의 변경과정을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 장군동 공장 : 장군동 13번지는 1912년 토지사정지적도의 작성에 의해 지금 사용하고 있는 필지의 원본이 마련되었다. 사정 당시에는 13-1번지 한 필지였으며, 면적은 537평이었다. 1912년 국가소유로 되어있다고, 이후 1941년 상송태(常松泰)의 소유로 1942년에 원등군동(遠藤軍同)의 소유로 변경되었다고, 해방이후 1952년 손삼권씨에게 소유권이 넘어갔다가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필지의 변경은 사정지적도 이후 1978년 13-1번지와 13-4번지로 분할되었으며 분할된 13-4번지는 손삼권씨와 그의 아들 손정필씨의 명의로 변경되었다.
- 삼광청주 주조장은 13-4번지에 박공형태의 장방형 건물(폭 8미터에 길이 33미터) 후면에 1층과 2층 규모의 숙소와 공장이 혼재하는 형태로 연결되어 있으며, 굴뚝은 후면 건물 중간쯤에 솟아있다.
- 지붕은 시멘트기와로 되어있으며, 목조 트러스 구조로 되어있으며 외벽은 조적조로 박공부분의 다락층 형태는 주조장의 기능상 맞지 않는 것으로 보이며, 아마 후대에 용도가 변경되면서 만들어진 것으로 판단된다.
- 후면에 있는 건물은 부분적으로 1층이 굴뚝이 있는 2층 부분으로 되어있으며, 단층부분은 스래브 구조의 형태로 보아서 후대에 증축된 부분으로 판단되며, 2층 부분은 당시에 공장의 일부분으로 사용되어졌을 것으로 판단되며 슬레이트 지붕마감은 이후에 재료변경된 것으로 판단된다.
- 장군동 공장의 건축개요 : 각지에 있는 2층 양옥식 건물은 공장의 관사로 사용되었을 것을 보이며, 서측 도로면에 면한 건물은 박공면을 가진 장방형의 건물로 동일한 주거형태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관사(철도 관사?)의 형태로 보아지며 이것은 규모로 보아 초기에 주조장의 관사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으며, 철도관련 관사로 판단된다.
- 현재 건물의 구조는 공장동과 주거동 사이가 중정을 겸한 통로의 기능을 하고 있으며, 중앙부에 양조에 관련된 철제 탱크(직경 1.8미터에 높이 2미처 정도)는 하단에 목제 후레임에 의해 수직면에 부착되는 방열면의 기능을 가지는 기능과 세로바를 잡아주는 철제 밴드가 현재 4개 남아있으며, 뚜껑은 판재로 현재 원형을 유지한채 남아있다.
- 인접지의 13번지는 현재 12번지의 공장과 혼재된 상태로 되어있어서 그 관련성을 찾기에 상당한 어려움이 예상된다. 그러나 필지상의 소유자와 필지의 분할과정을 통해서 상관관계를 밝혀줄 뭔가가 나올거라는 기대를 가지고 토지사정대장상의 변화를 살펴보았다.
- 13번지는 토지대장 사정시 1필지였으나,
- 12-9번지는 1945년 2월 16일 12-8번지에서 분할되었으며, 마산부 소유에서 1955년 복정증차랑(福井增次郞)에게 소유권 이전, 이후 1972년에 손정웅에서 소유권 이전하였으며, 복정은 인접지 중앙동의 후꾸이 장유의 대표이기도 하였다.
-12-10번지 1945년 궁본원삼(宮本원三)에게 소유권이 이전, 1962년 金味黙, 김영기에서 이전, 이후 1970년 이상대에게 이전, 1971년 金貞黙에게 이전되었다.
- 12-11번지는 마산부에서 1945년 平田和大에게 이전, 1956년 이희선에게, 1956년 손삼권에게 이전되었다.
- 12-13번지는 12-8번지에서 분할되어 1946년 國本彸助, 김학무에게 이전, 1961년 박재학에게 이전되었다.
- 12-14번지는 12-9번지에서 분할되어 1954년 福井增次郞, 손정웅에게 이전되었다.
- 12-15번지는 12-10번지에서 분할되어 1971년 김영기, 황수찬에게, 1972년 윤경순에게 이전되었다.

* 건물은 사라지더라도 이러한 기록은 남게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건물의 보존가치를 무시하고 철거해버린 사람들의 기록도 남게될 것이다.
'사고와 진리에서 태어나는 도시'가 아니라
'사고와 진리가 부족했던 도시'였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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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옥가실 2011.10.05 13:20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와... 사진과 기록물 잘 보았습니다.
    매우 어려운 자료를 구했군요. 수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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