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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6.08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21. 간판칠갑의 사무소, 22. 철도 이야기

21. 간판칠갑의 사무소

 

마산에 간판 많기로 이름난 점포는 신마산 함흥집 자리의 석견옥(石見屋)이라는 신약 도매상이었다.

간판을 보면 대학목약(大學目藥), 미안수(美顔水) 하루나, 대전위약(大田胃藥) 등을 비롯하여 장방형의 작은 간판이 20여 개나 되었는데,

제내과(諸內科) 자리 건너편 3층 건물로 신축 이전 후에는 없어졌고, 본래 점포에는 ‘고마야’라는 상호의 오복점(吳服店)이 들어 앉았다.

몇해 후에는 민의소 건너편에, 즉 지금의 중앙병원 자리에 노농동우회(勞農同友會)와 조선일보 지국이 자리잡고 난 뒤로는 대소 간판이 십 수개가 붙었는데 기억되는 명칭은 다음과 같다.

노농문고(서적 대부분이 ML당원 김형두의 장서), 무산자신문(日共의 佐野學 主宰), 민중신문(일본의 赤松克磨 주간), 혜성사진(彗星社進, 스스메), 월간전투지(月刊戰鬪誌, 사회주의자이면서 일본 공산당을 打罵하던 福田狂二 주간), 토벌(討閥, 주로 日共의 파벌행동을 공격한 월간지 福田理三郞 주간), 壁新聞.

※ 사진에서 보듯이 함부로 내다거는 간판의 심각성은 지금도 마찬가지다

 

   

22. 철도 이야기

 

마산 본역을 중심점으로 하여 인근 각 역의 해발고차는 다음과 같다.

마산 본역 - 북마산역 38m - 중리역 96.21m - 구마산역 18m - 창원역 47.38m - 창원 현재 터널 56.72m - 창원 구 철도 고개 96.96m,

창원터널이 개통되기 전까지 구 철로 즉, 창원 고개를 오르내리던 증기 기관차는 성능이 여간 강력한 것이라도 고개 중턱 - 포교당과 향교를 지나고부터는 숨길이 가빠서 일단 정지 아니면 뒷걸음을 칠 때에는 승객의 숨길마저 허덕이게 한다.

눈비가 내리는 날은 덕산에서 창원으로 넘어오는 것이나 창원서 넘어가는 차는 몇 미터씩은 저절로 스리퍼하는 것이고, 숨이 차서 차가 허덕거릴 경우에 장난 좋아하는 청년들은 훌쩍 뛰어내려 용변을 보는 일도 허다하여 승객을 웃기기도 하였다. 

 

<삼역용지 총평수(三驛用地 總坪數)>

마산본역 용지 : 106,476평

북마산역 용지 : 7,705평

구마산역 용지 : 11,637평

구마산역 - 본역간 노선 용지 : 6,521평

북마산역 - 본역간 노선 용지 : 3,653평

이상 135,476평(단 불하된 관사 및 기타 부지 제외) 마산 본역 용지를 제외하면 29,516평이다.

※ 지금은 없어진 마산의 세 역 사진

<마산 - 삼랑진 간 터널>

마산 - 삼랑진(舊 松旨)간 ‘터널’은 세 곳이 있는데 길이는 다음과 같다.

창원터널 : 438m

마산(馬沙)터널 : 329m

생림(生林)터널 : 485m<<<

※ 아래는 현재 마산역의 준공식 날 사진. 사진 속 건물은 수년 전 헐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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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20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7) - 강점제2시기

<마산포와 신마산이 연결되다 - 중앙마산의 형성>

1) 중앙마산이 철도용지로 된 원인

마산포와 신마산의 중앙부가 1920년대까지 도시형태를 띠지 못하게 된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이 일대가 러일전쟁 직전인 1904년 일본의 군용철도용지로 수용당한 뒤 1920년대까지 변하지 않고 그 상태로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1904년 2월 10일 일본은 러시아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기 위해서 러시아와 국교를 단절하고 선전포고를 하여 러일전쟁을 시작합니다.

이 전쟁에 앞서 일본은 마산에 있는 우체국과 전보사 및 율구미에 있던 러시아 해군육상사령부의 시설을 압수했습니다. 그리고 1904년 9월 1일, 군용철도 마산선의 건설공작대가 마산에 입항했습니다.
러일전쟁 수행을 위해 한국 조정을 강압하여 의정서를 체결했기 때문입니다.

삼랑진 - 마산 사이의 철도공사는 의정서 제4조의 내용에 준한 사건입니다.

1904년 2월 23일자로 조인된 한일의정서 제4조는

제3국의 침해에 의하여 혹은 내란으로 인하여 대한제국 황실의 안녕과 영토의 보전에 위험이 有할 경우에는 대일본제국정부는 곧 臨機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이며, 대한제국정부는 右 대일본제국정부의 행동이 용이하도록 십분 편의를 공여할 것.
대일본제국정부는 전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수시로 수용할 수 있을 것.

을 규정하고 있습니다.

                             <한일의정서 체결 직후 찍은 사진과 한일의정서>


이 한일의정서는 그 조문 모두가 어처구니없는 구절들이지만 특히 이 제4조는 가장 악랄한 내용입니다.

「․․․․․대한제국 황실의 안녕과 영토의 보전에 위험이」있다, 혹은 없다의 판단이나「臨機 필요한 조치」의 범위,
즉「어느 정도의 행위가 필요한 조처의 범위인가」의 판단,
그리고 수시로 언제나 수용이 가능한「군략상 필요한 지점」의 위치나 범위의 판단도 모두 일본만이 할 수 있는 일방적 규정이었습니다.

또한 이 의정서가 러일전쟁을 전제로 한 것인데,
이 협정 어디에서도 시한에 대해서 규정하지 않고 있어서 일본은 이 의정서 조문만으로 한국 도처에 그들의 군사기지를 무제한으로 주둔시킬 수 있다는 겁니다.

이 뿐만 아니라 같은 해에 이어서 자행된 여러 조치들,
즉 5월 30일과 31일의 「대한방침 및 대한시설강령」, 9월 24일의 「長谷川 훈령」, 6월의 「한국에 있어서의 군사적 경영요령」 등에 의해 몇 해 안 가서 서울 용산에 주둔군사령부와 사단이 설치되었습니다.


그리고 회령․함흥․원산․강계․평양․춘천․대전․대구와 함께 마산에도 이른바 「긴요한 지점」이란 핑계로 대규모의 군사기지가 설치되었던 겁니다.
이 때 진해는 일본 해군의 군항으로 개발되었죠.

1905년 일본군부가 일본육군 군용지로 강제 수용한 마산의 토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용도 면적(평)  수용액(원)  수용일자 
 병영부지 9,000  2,700  1907. 9. 3 
 수도용지  91,376  2,982 1909. 3. 30 

이 표의 토지는 중앙마산지역의 철도용지와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보이지만 수용 동기가 동일하다는 점에서 맥락을 같이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한반도에 대한 군사적 강점의 큰 흐름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 중앙마산의 철도용지 수용입니다.

철도용지로 수용된 중앙마산지역의 범위는, 북으로 원마산의 경계인 몽고정 부근, 남으로 조계지의 경계인 신월천, 서쪽으로 진주가도, 동으로 해안선까지의 전(全) 지역입니다.

철도용지구역을 찾아내기 위해 정부기록보존소의 문서를 확인하는 과정에서 1920년에 펴낸 축척 1/3,000「마산부 시구개정 일부평면도 (馬山府市區改正一部平面圖)」에 표기되어 있는 철도용지의 경계를 찾을 수 있었습니다.
경계를 정확하게 확인하기 위해서 사정지적도에 나타나는 지목과 재확인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최근, 1904년에 발간된 '마산포 군용정차장 부지'라는 제목의 도면을 구했습니다. 마산도시재생TB센터 연구진을 통해 얻은 귀중한 자료입니다.
앞의 「마산부 시구개정 일부평면도 (馬山府市區改正一部平面圖)」와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다음 자료입니다.
아래 것은 현재 지도에 표기한 것입니다.
현재 지도는 해안매립이 많이 진행된 이후라 앞의 것과 많이 다릅니다.<<<



 



2011/10/1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0) - 강점제1시기
2011/10/2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1) - 강점제1시기
2011/10/3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2) - 강점제1시기
2011/11/0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3) - 강점제1시기
2011/11/1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4) - 강점제1시기
2011/11/2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5) - 강점제2시기
2011/11/2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쳔사 (86) - 강점제2시기
2011/12/0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7) - 강점제2시기
2011/12/1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8) - 강점제2시기
2011/12/1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9) - 강점제2시기
2011/12/2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0) - 강점제2시기
2012/01/0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1) - 강점제2시기
2012/01/0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2) - 강점제2시기
2012/01/2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3) - 강점제2시기
2012/01/3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4) - 강점제2시기
2012/02/0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5) - 강점제2시기
2012/02/1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6) - 강점제2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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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13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2) - 강점 제1시기

<전국 최초의 시외버스가 마산에서?>

마산에 전국 최초로 시외버스가 다녔다면 믿어지십니까?
햇수로 100년 전인 1912년 9월 마산-진주간을 달리는 버스가 생겼습니다.
한달 전인 8월에 대구-경주-포항간 버스가 생겼다는 기록이 있습니다만, 마산-진주간 버스가 1911년 12월에 최초로 영업인가를 받았으니 최초라 말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겁니다.

한국자동차역사에 관한 기록을 보면 1911년 진주에 살았던 ‘에가와(繪川)’라는 일본인이 포드 8인승 무개차 1대를 들여와 마산-삼천포간 버스영업을 시작한 것이 한국 최초의 버스였다고 합니다.
하지만 매일신보에 의하면 마산-진주와 진주-삼천포간 버스를 1911년 12월에 인가를 받고 다음 해 9월 마산-진주부터 운행이 시작되었으며 대판에 자동차를 주문했는데 한 대만 도착해 마산-진주를 먼저 운행했다고 합니다.
고성군 기록관리사로 있는 김상민 선생이 확인해주었습니다.

바로 이 차입니다.



이 버스에는 승객이 10명 정도까지 탈 수 있었으며, 낮에는 지붕이 없이 달렸지만 밤이 되면 천막지붕을 치고 가스등도 달고 다녔다고 합니다. 멋졌을 것 같지 않습니까?
요금은 일반인들이 타기에는 상당히 비싼 1인당 3원 80전이었습니다. 당시 쌀 한가마니 값이 4원이었으니 말입니다.

마차로 하루 종일 걸려 다녔던 마산-진주간 70여km 길을 버스로 4시간 만에 주파하였는데, 도로 주변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생전 처음보는 버스를 보기 위해 길가에 나와 넋을 잃고 구경했다고 합니다.
요금은 비쌌지만 하도 빠르고 편리해 그 때까지 이용하던 마차와 인력차는 승객이 없어졌고 급기야 마차는 영업을 중지했다는 '매일신보 1912년 10월17일자 기사'도 있습니다.

당시 유행한 노래 한 구절 소개합니다.
‘낙동강 700리에 공구리(콘크리트) 다리 놓고 신작로에는 자동차 바람에 먼지만 나누나’

우리나라 최초의 자동차는 1903년 고종 황제 즉위 40주년에 미국 공관을 통해 들어온 포드자동차였습니다.
하지만 1901년 봄 미국 시카고대학의 사진학 교수이며 여행가였던 버튼 홈즈가 자동차를 타고 한강을 구경하러 가다가 소달구지를 들이받은 사고가 있었다는 기록을 보면 그 이전에도 우리나라에는 서양 외교관이나 기술자 또는 선교사들이 갖고 온 자동차가 간혹 있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특수한 자동차 외에 일반국민들의 눈에 자동차가 선보기 시작한 것은 일본인들과 국가 대신들이 자가용으로 몰고 다니기 시작했던 1913년경부터였습니다.
같은 해 서울 낙산 부자 이봉래 씨와 일본 청년 곤도 그리고 장사꾼 오리이 3인이 합자해 20만원으로 첫 자동차회사를 세우고 "포드T형" 승용차 2대를 도입해 서울에서 시간제로 임대 영업을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이 우리나라 택시의 시초이며. 이 시기가 우리나라 운송사업의 출발점이라고 주장하는데 마산-진주를 오간 버스가 1912년이면 이보다 일년 전이니 얼마나 빨랐습니까?

1910년대 마산-진주 간 자동차에 관한 기록은 승전이조(勝田伊助)가 1940년 간행한『진주대관』에도 있습니다. 교통사고 기록인데 여기서도 에가와의 버스회사가 1912년 설립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1912년 9월 에가와씨는 진주-마산 간 승합자동차 전기노선 영업을 개시하여 커다란 편의를 제공해 왔으나 얼마 안가서 심한 경영난에 빠졌고 다시 일어나기는 하였으나 불행히도 1917년 6월에 자기가 손수 마산으로부터(진주로) 운전 중 군북고개에서 자동차가 전락하여 승객인 진해 해군기지사령관 동향 해군중장, 그 수행원 붕정 경리중령, 보문 소령 등을 비롯한 승객다수와 더불어 본인도 또한 부상을 입었고 기생 배봉악은 즉사하는 참사를 일으켰다. 에가와씨는 결국 체형처분을 받고 옥창에서 신음하는 신세가 되었다」

『마산시사』를 비롯한 몇몇 자료에서는 마산에서 외부로 연결되는 자동차는 1920년대 중반이 지나서야 시작되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만 오류인 것 같습니다.
도시사학자 손정목 선생의 『일제강점기도시사회상연구』에 의하면 마산 뿐 아니라 1910년대 초반에는 전국적으로 지금의 시외버스가 다투어 생겼다고 합니다. 1912년에는 대구-경주-포항 간 버스가 다니기 시작했고 1913년에서 1914년 사이에 경성-장호원 간, 경성-춘천 간, 경기도 벽란도(碧瀾渡)-황해도 해주 간에도 자동차 영업이 개시되었습니다.
이 기록들을 보아도 마산-진주간 버스가 꽤 일찍 생겼죠?

‘조선및만주사출판부’가 1918년 펴낸『最新朝鮮地誌(中)』에서도 당시 마산의 육상교통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철도를 이용해 삼랑진에서 경부선으로 접속하여 남북 각 도읍과의 교통이 편리하고 도로는 경상남도 도청 소재지인 진주에 통하는 2등도로(현, 국도), 칠원 및 창원으로 통하는 3등도로(현, 지방도)가 있다. 무엇보다도 車馬의 통행이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특히 마산-진주 간에는 매일 자동차편(본 글의 에가와 소유 버스)있는데 거리는 17리(1리 4km) 22정(1丁 109.1m)이며 4시간이 소요된다」는 글입니다. ( )안은 설명용 글입니다.

한편, 1910년대 마산 시내의 교통수단은 29회(2010/10/2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9) - 개항이후)에서 소개한 인력거 외에 승합마차가 있었습니다.

1915년 일본인 강용일(
岡庸一)이 쓰고 마산상업회의소가 펴낸 『마산안내』를 보면, 당시 마산부내를 연결하는 육상 교통으로는 마산승합마차(馬山乘合馬車)가 운행되고 있었다고 합니다. 운임은 1구(區)부터 5구(區)까지 나누어 받았으며 마산포(원마산)에 있는 주차장을 기준으로 마산부 내를 각 5구로 나누었는데 가깝게는 재판소(옛 마산법원)로부터 멀게는 요새사령부의 관사(현 월영동 아파트 단지)였습니다.

마산포에 있었던 주차장의 위치를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마산포에 신설도로가 개설된 이후의 토지형태와 도시공간구성을 보면 현재의 대신증권 건너편에 있는 본초당한의원과 그 뒤쪽 일대였던 것 같습니다.

1912년이니 햇수로 100년 전입니다, 마산에 최초의 버스가 나타난 것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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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가연 2015.08.11 14:00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안녕하세요
    tvn 젠틀맨리그팀 이가연입니다.
    다름이아니라 저희가 택시라는 주제로 자료화면을 찾는 중 선생님이 작성하긴 글을 보게 되었습니다. 저희가 이 사진을 방송 자료화면으로 사용하고싶습니다.
    방송자료 화면으로 사용 허락을 해주셨으면 해서 연락드립니다^^
    댓글 보시면
    이가연 010-9111-0786 번으로 연락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2011.05.23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9) - 강점 제1시기

<개항 종료와 신마산의 정체>



         <1910년대 신마산 전경입니다.
           마산을 소개하는 그림엽서 두장을 연결했으며 사진 속 선착장은 노란표식점에 있었습니다>


1910년대의 마산은 1911년 1월 1일을 기해 진해군항을 일제의 해군요새로 보호한다는 구실로 마산항을 폐쇄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합방 일주일 후인 1910년 8월 29일 일제가 발표한「일한병합에 관한 선언」제4호에서 「종래의 개항장은 마산포를 제외하고는 종전대로 이를 개항으로 하며 다시 신의주도 개항에 추가하여 내외선박의 출입 및 이에 의한 화물의 수출입을 허한다」함으로써 마산의 개항은 종료되었습니다.

이로써 마산개항의 역사는 11년 8개월 만에 끝나고 말았습니다.
합방이후 사실상 형식적으로만 남아있던 각국공동조계지도 해제되고(1914. 3. 31) 마산부(府)로 행정구역이 개편되는 등 제도적으로 많은 변화가 생겼습니다.

하지만 개항이 종료되어 마산항이 대외적으로는 폐쇄되었으나 일제가 필요로 하는 외항선에 대해서는 세관장의 특별허가로 출입항을 허용하였습니다. 때문에 식민지 경제정책을 수행하기 위해 찾아드는 일본 선박은 개항기와 달라진 것이 없었고 오히려 늘었습니다.

1911년부터 1920년까지의 도시변화특징은 '신마산의 정체기'입니다.
개항기 동안 급속하게 형성되었던 신마산의 변화가 갑자기 답보상태에
들어갔기 때문에 '정체기'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변화가 적었습니다.
인구가 줄어들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도로도 개설되지 않았고 개항기에 비해 건물도 많이 짓지 않았습니다.
당시의 이런 상황은 개항기의 급격한 확장과 성장을 겪은 이후였기 때문에 도시 정체에 대한 체감효과는 더욱 심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도시의 정체(停滯)는 신마산 지역에 국한되었을 뿐, 마산포(원마산)에는 대규모 매립이 시작되고 폭 8m의 근대식 도로가 개설되는 등 그때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마산포의 변화에 대해서는 다음에 포스팅하겠습니다.

오늘은 1910년대 전후기, 일본인이 펴낸 두 권의 책에 나오는 마산관련 글을 소개합니다.
내용을 재구성할 수도 있지만 원본 그대로 소개하는 것이 보다 정확하겠다 싶어서 번역만 하여 그대로 올립니다.
일본인에 의해 작성된 자료이기 때문에 조사와 비교의 대상, 그리고 상황을 바라보는 입장과 관점에 일정한 편견이나 한계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시 한국인이 펴낸 책이나 한국인에 의해 직접 만들어진 자료 중 사용할만한 것이 별로 없었습니다.
유일하게 찾은 것이 서울대학교 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던 남궁준의『新朝鮮全誌 (唯一書館, 1913)』였습니다만 마산에 대한 부분이 너무 짧고 평범하여 인용할만한 내용이 아니었습니다.

『朝鮮誌』, 吉田英三郞, 1911년, p.587, 町田文林堂 

마산부(府)
․․․․시가(市街)는 신마산과 구마산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신마산은 순수한 일본풍으로서 가로에 청결한 상점이 즐비하고 모든 관아 및 일본인은 대부분 이곳에 있다.

구마산도 지금은 거의 신마산과 인가가 연접하여 조선인과 일본인이 잡거하면서 거리의 외관은 신마산에 필적하면서 항구의 주변은 번성하여 매월 5일되는 날을 기해 시장을 열고 상업이 매우 활발하다.

산업은 상업을 주로하며 그 다음이 어업이다. 공업은 아직 초보적 단계이며 정미업․비누․금물․기와제조․술․양조 등이다.

일본인이 1,656호에 인구가 6,310명이고 조선인이 1,570호에 7,100여명 거주한다.

주요 산물은 쌀․콩․우피․연초․목죽세공․어류․수산제조물 등이고 부청․진해만사령부방비대․지방재판소․구(區)재판소․헌병분대․경찰서․우편국․감옥분감․소학교․공립보통학교․지방금융조합․세관감시서․조선해수산조합지부․기타회사조합 등이 있고 구마산 및 신마산에 정거장이 있다.

『最新朝鮮地誌(中)』, 1918, pp.19-22, 朝鮮及滿洲社出版部

(1) 교통운수(交通運輸)
마산에는 외국으로 통하는 선박은 없지만 일본과의 항로는 대판상선회사의 대판-인천 간 정기선이 매월 4회 기항하고 있다. 그 외 연안 항로로서는 조선우선(郵船)회사의 부산-여수선, 부산-거제선의 정기선이 매월 2회 발착하는 것과 진해기선조합이 경영하는 마산-진해간의 1일 7회 왕복하는 작은 기선 3척이 있다.

육상운수는 철도를 이용해 삼랑진에서 경부선으로 접속하여 남북 각 도읍과의 교통이 편리하고 도로는 경상남도 도청 소재지인 진주에 통하는 2등도로, 칠원 및 창원으로 통하는 3등도로가 있다. 무엇보다도 차마(車馬)의 통행이 자유로울 뿐만 아니라 특히 마산-진주 간에는 매일 자동차편있는데 거리는 17리(里, 1리 4km) 22정(丁, 1정 109.1m)이며 4시간이 소요된다.

(2) 시가(市街)
신마산과 구마산의 두 구역으로 나누어져 있는데 신마산은 산록이 수려하고 가로의 구획이 정연하면서 시가지에 청결한 상점이 즐비하다. 철도에서 동쪽으로 약 1리의 거리에 구마산으로 연결된다. 개항 후 거류지(신마산)를 설치하였으며 신시가지는 대부분 전부 일본인 상가(商街)로서 이루어져있다.

구마산은 옛날부터 군읍으로 알려진 소위 조선 마을로서 시구(市區)의 체제는 협소하고 불결하다. 그러나 조선인과 일본인이 혼거하면서 일반 상업은 신마산에 비해 번성한 편이다.

(3) 시장
신마산에는 어시장․식료품시장이 있고 구마산에는 잡화시장인 세 개의 시장이 있다.
어시장은 마산수산회사의 경영에 의해 수산물의 위탁 판매를 한다. 식료품시장은 생과(生果)․야채류의 위탁판매를 하지만 무엇보다도 매일 개시하는데 비해 구마산 시장은 매월 음력 5일․10일을 기해 개시하고 시장의 일일 판매고는 어시장 약 200원, 식료품시장 약 70원, 구마산 시장은 약 1,600원이다.

(4) 호수(戶數)
3,490호에 인구는 15,890인이다. 그 중 일본인은 1,135호에 4,497명이며 조선인은 2,341호에 11,351명이고 중국인 11호에 36인, 구미인 3호에 6명이 살고 있다.

(5) 관아 및 학교
마산부청․창원군청․마산경찰서․마산지방헌병분대․마산우체국․부산세관마산지서․부산지방법원마산지청․부산감옥마산분감․진해만중포병대대․조선주차군(駐箚軍)경리부마산파출소․마산지방금융조합․동척마산출장소․마산상업회의소․마산부립병원․마산학교조합․공립보통학교․공립마산심상고등소학교 등이 있다.

마지막 부분의 공립보통학교는 지금의 성호초등학교이며 공립마산심상고등소학교는 지금의 월영초등학교입니다. 그리고 이 학교의 고등부는 지금의 마산중학교 전신입니다.

이 두 자료는 전국규모로 한국을 소개하는 문헌 중 마산부분에 관한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숫자와 금액 등에서 사실과 약간의 차이가 날 수도 있습니다.

본격적인 식민지 시대에 접어든 1910대 마산은 위 책의 짧은 글에서도 알 수 있듯이, 식민지성과 근대성이 혼재되고 있었고 그것이 이 도시의 정체성으로 서서히 굳어가고 있었습니다.<<<



2011/05/1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8) - 강점 제1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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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0.26 07:39

마지막황제 순종의 행차길


경남대 유장근 교수의 「마산도시 탐방대」에 참가하여 20여 일행들과 '진주가도'를 걸었다.

'진주가도'는 근대기 이전에 진주와 창원을 잇는 큰길이었다.
현재의 소답동에 위치했던 창원도호부에서 마산포를 거쳐 자산리 완월리 신월리 월영리를 지나 밤밭 고개를 넘어 진동 양촌을 거쳐 진주로 가던 길이다.
롯데그룹 소유인 구 크리스탈 호텔 앞길인데 장군동 거쳐 중앙동 신월동까지 온전히 보존되어 있다.

가장 좋은 도시는 ‘걷고 싶은 도시’라 했는데, 걷고 싶은 마음이 생길 만큼 좋은 길은 아니었다.



 
-마지막 황제 순종의 행차길-

100년 전인 1909년,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 순종은 즉위 후 몇 차례에 걸쳐
지방 순행에 나섰다.

순종황제의 남부지방 순행은 1909년 1월 7일~13일까지 6박 7일간의 일정으로 진행되었다.

황제의 마산 순행 일정에 대한 『승정원일기』순종 3년 1월 5일자 기록이다.

「…… 9일에는 부산에 머무르고, 10일 오전 9시에 부산정거장에서 기차로 출발하여 11시 25분에 마산에 도착, 하룻밤을 유숙한다. 11일에는 마산에 머무르고, 12일 오전 8시 40분에 마산 정거장에서 기차로 출발하여 11시 45분에 대구에 도착, 하룻밤을 유숙한다.」


원래 통치자의 순행은 지방의 사정을 감찰하고 백성의 고통을 살피는 데 그 일차적인 목적이 있다.
하지만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비롯한 내각과 통감부 관원들을 대거 수행하고 순행에 나선 것은 황제의 권위와 권력을 내세워 지방민들을 통제하려는 일제의 강력한 의지를 표현한 것 아닌가싶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순행의 정치적 해석보다는 융희 황제가 이곳 마산에 왔다는 사건에만 관심을 갖는다.

궁정열차를 탄 황제는 1월 10일 아침 9시에 부산역을 출발하여 9시 59분 삼랑진에 도착하여 마산이사청 이사관과 동래부윤의 알현을 받았다.

11시 25분 마산역(마산중부경찰서 건너 편 벽산 아파트 자리)에 도착하여 역내에 마련된 편전에서 잠시 쉰 후에 12시쯤에 바로 이토통감 이하 수행 관원들을 거느리고 어교를 이용하여 행재소가 마련되어 있는 마산이사청(현 경남대학교 평생교육원 자리)으로 자리를 옮겼다.
거기서 중요한 관민을 만났다. 모두 일제 관리와 군인들이었다.

오후에는 창원부청(지금의 남성동파출소와 제일은행 일대)으로 이동하여 그곳에서 경상남도 각 군 군수, 기타 고등관, 민간인 등을 만났다.

황제는 11일 하루를 마산에 머문 후 12일 화요일 오전 8시 40분에 마산역을 출발하였다.
이때 일본에서 파견한 제1, 2함대에서 예포를 각 21발을 발사하며 경의를 표시했다.

순종황제의 행렬을 보기 위해 마산에 이르는 철도변과 각 역에는 사람들로 넘쳤다.
약 3만 여명의 군중들이 모여 황제의 일행을 맞이하였으며 떠날 때에도 연도의 관민들은 각 역 및 그 부근에서 만세를 외치며 황제와 일행을 봉송하였다.

2박 3일 간의 순종황제 마산순행 중, 행재소와 창원부청 간이 가장 긴 이동거리였다. 지금의 경남대학교 평생교육원에서 남성동 파출소까지의 길이다.

당시에는 신마산 일부에만 근대식 직선도로가 있었기 때문에 신마산에서 장군동 다리까지는 일제가 놓은 근대식도로를 이용했고, 장군동 다리부터는 진주가도라 불렀던 크리스탈호텔(전) 정문 앞길을 통과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바로
「마산도시 탐방대」 일행과 함께 걸었던 길의 일부다.

봉건왕조 시대에 통치자가 마산을 방문한 것은 단 두 번이다.

고려시대 일본정벌을 준비하던 여몽연합군을 격려하기 위해 마산에 왔던 충렬왕과 100년 전인 대한제국 순종, 융희황제이다.
충렬왕이 마산에 머물 때의 기록은 상세하지 않다. 하지만 순종황제는 그렇지 않다.
수행자의 숫자와 직위, 어가 행렬, 궁정열차의 배치까지 상세하게 나와 있다.



국화축제로 온갖 이벤트가 넘치고 있는 마산의 가을, 토요일 오후.

진주가도를 걸으며 이 길을 지났던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래서 생각했다.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이 지났던 길, 그 흔적의 역사 문화적 가치는 없는 것일까?
이 도시에 남겨진 과제는 없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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