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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23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134. 매축권과 대일 투쟁

134. 매축권(埋築權)과 대일(對日) 투쟁

 

 

구마산포는 옛날부터 농수산물의 집산지로서 중부 경남의 인후(咽喉)에 해당되는 기능을 가진 요지로 발달해 온 곳이었다.

 

망국의 낌새가 스며들던 한말, 마산의 토지소유권을 비롯한 모든 이권이 노·일 양국의 각축과정에서 외인(外人)의 손아귀로 넘어가는 가운데서도 구마산 항민(港民)들은 꾸준히 그들의 상권을 투쟁으로 수호 유지해 왔다.

 

이러한 투쟁의 현실적인 뒷받침은 물론 축적된 상업자본의 힘에서 온 것이지만, 이러한 것이 인()이 되고 과()가 되어 더욱 상업자본이 축적되어 갔고 그 결과 일본 상인들에 대해서도 투쟁의 현실적인 실력을 갖추어 가게 되었던 것이다.

 

외인(外人)이 본격적으로 도래하기 시작한 개항 이후 그들이 노리는 중요한 이권 가운데 하나가 창탄(漲灘, Water frontage)의 매축권이었다.

 

원래 우리나라의 창탄은 매매가 허락되지 않았고, 외국인이 소유할 수도 없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노·일 양국은 이 창탄의 탈취를 둘러싸고 무섭게 대립하였던 것이니, 이는 매축권과 밀접하게 결부되는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마산의 본거지인 구마산의 해안지 즉 서성리, 중성리, 동성리, 오산리 지선(地先)의 창탄지는 구마산 항민들로 보아서는 그들의 상권, 어업권과 밀접한 관계가 있어 그들에게는 생존권과도 결부되는 중요한 터전이기도 했다.

 

구마산의 시장권을 빼앗으려다가 실패한 일본인들은 그 후 다시 이곳 창탄지 매축권을 빼앗으려고 시도했다. 이 낌새를 알게 된 구마산 항민들은 분연히 궐기, 꾸준한 항소 투쟁을 벌여 끝까지 이를 수호했던 것이니, 이 사실은 구마산 항민들의 근대적 투쟁으로서 높이 평가됨직한 것이었다.

 

마산포 개항 후 이를 둘러싼 노·일의 각축은 날로 치열해 가고 이에 따라 외국 선박의 마산항 출입도 빈번해 갈 무렵, 1899(광무3) 51, 구마산 동성리에 살던 김경덕은 만국의 통상이 성해지고 앞으로 구마산포에 있어서도 상여(商旅)의 집회와 화물의 풍비(豐備)가 예측되므로 구마산 서성리로부터 오산리에 이르는 창탄의 매축권을 창원감리서에 신청하여 감리의 인허를 받게 되었다.(189910)

 

 

<아래 그림은 김경덕이 매축청원서에 첨부한 도면. 이 도면을 현 도시공간에 표시한 것이 두번째 그림이다>

 

 

 

그 후 김경덕은 당시 일본육군성 자금으로 노국의 정책을 방해하기 위해 방간방태랑(부산을 거점으로 암약暗躍하던 일본인 식민재벌-편자주)과 같이 마산포 투지 매수에 혈안이 되어 있던 일본인 홍청삼(弘淸三, 오백정五百井 상점 마산 지배인)으로부터 15,000냥을 매삭 매양두 삼분식(每朔 每兩頭 參分式)의 이자로 광무 6(1902) 정월 회내(晦內)’를 기한으로 본전과 이자를 환부한다는 조건 밑에 매축 인허문권(認許文券)을 전집(典執)하고 빌렸던 것이다.

 

그리고 만일 기한이 지날 때는 매축인허문권을 영원히 허급(許給)한다는 차용증을 작성해 주었던 것이다.(홍청삼 주장)

 

그 후 얼마 안 되어(1902년 정월 회일晦日 ) 김경덕이 사망하게 되자 홍청삼은 서성리로부터 오산리에 이르는 창탄지에 표목(標木)을 세우고 장차 이곳을 매축하려 하게 되자 비로소 일본인의 야망은 백일하에 드러나게 되었다.

 

이에 대한 감리서의 의정부 앞 보고를 보면 다음과 같다.

 

주본항일본이사관(駐本港日本理事官) 삼증구미길조회(三增久米吉照會)를 접준(接准)하온즉 내개(內開)에 본방(本邦) 상인(商人) 홍청삼이가 별지(別紙)에 통()한 마산포서성(馬山浦西城)으로 오산(午山)에 지()하와 해면매축권리이전(海面埋築權利移轉)할 양() 인원서(認願書)를 제출하니 사실(事實)을 조사(調査)하여 정당(正當)하거든 별지원서(別紙願書)대로 인허(認許)하기로 부속(附屬) 서류첨부(書類添附) 차단(此段) 조회등인(照會等因)이옵기 거차사(據此査)하온즉 광무 310월에 본항(本港) 동성거(東城居) 김경덕(金敬悳) 위명인(爲名人)이 자본항서성리전(自本港西城里前)으로 오산리전지창탄(午山里前至漲灘)을 한오십파(限五十把) 퇴축(退築)하오면 무해어공(無害於公) 이위이어상민(而爲利於商民)이라 청원(請願)하자 승인허(承認許)하야 음력(陰曆) 경자(庚子) 2월 초삼일에 해() 인허장(認許狀)을 전집어일상인홍청삼(典執於日商人弘淸三)하옵고 득임(得賃) 일만오천양미보(壹萬五千兩未報)하옵고 급위신사(伋爲身死)하였사오며 해() 전집급채지홍청삼(典執給債之弘淸三)하옵고 칙척빙인허(則尺憑認許)하옵고 견립표목(堅立標木)에 장영직축(將營直築)이온바 당초(當初) 인허성급(認許成給)하온 우시감리(于時監理)는 수위상무지흥왕(雖爲商務之興旺)이오나 지금매축권리(至今埋築權利)가 이전우외(移轉于外)이온 고()로 해() 청원(請願)에 승인(承認)하옵고 김경덕(金敬悳) 청원서(請願書) () 전집표(典執票)를 등서(謄書)하와 병기매축처도회(倂其埋築處圖繪)를 자()에 첨부보고(添附報告)하오니 사조처분(査照處分)하심을 복망(伏望).

광무(光武) 10411

 

창원감리서(昌原監理署) 주사(主事) 김병철(金炳哲)

 

의정부참정대신(議政府參政大臣) 각하(閣下)

 

 

그리고 위 보고서에 첨부된 김경덕의 청원서와 전집문기(典執文記)를 보면 다음과 같다.

 

청원서(請願書)

 

본항(本港) 동성거(東城居) 김경덕(金敬悳)

 

우청원단(右請願段)은 제자만국통상지회(際玆萬國通商之會)하야 초범오장(楚帆吳檣)이 차제래박(次第來泊)일세 본포(本浦)를 금기설항(今旣設港)즉 상여지회집(商旅之會集)과 물화지풍비(物貨之豐備)는 이소필연(理所必然)이라 자서성(自西城)으로 이지오산(以至午山)에 방축제창탄(防築際漲灘)을 한오십파퇴축성언(限五十把退築成堰)하와 주즙왕래(舟楫往來)에 무천착지려(無淺窄之慮)하고 시전포열(市廛布列)에 면분환지폐(免粉還之弊) 칙무해어공(則無害於公) 이위이어상민자성대의(而爲利於商民者誠大矣) ()로 회성형지(繪成形址)하와 자감점연앙청(玆敢粘連仰請)하오니 참상교시후(參商敎是後) 특위인허(特爲認許)하오셔 비위상판흥왕지지(俾爲商販興旺之地) 복망(伏望)

 

광무(光武) 310월 일

 

감리(監理) 각하(閣下)

 

指令

퇴축성언(退築成堰)이 상판(商販)에 여이(與利)함인즉 특념(特念) 인준(認准)할 사() 십월

대한(大韓) 광무(光武) 4년 경자(庚子) 2월 초삼일 홍공전표(弘公前票) 우표위사단(右票爲事段) 당차지시(當此之時) 긴유급용처(緊有急用處) 마산포양자서성(馬山浦洋自西城), 오산지방축제(午山至防築際) 창탄(漲灘) 한오십파퇴축성언차(限五十把退築成堰次) 감리서인준문기(監理署認准文記) 전집시유한전일만오천양우전출채(典執是遺韓錢壹萬五千兩右前出債) 이변칙매삭매양두(而邊則每朔每兩頭) 삼분식위정(參分式爲定) 이한칙광무(而限則光武) 6년 정월 회내(晦內) 구본이준보시의(俱本利準報是矣) 약과한불보(若過限不報) 칙우인허문기(則右認許文記) 영위허급(永爲許給) 이이차문기(而以此文記) 병위방매문기(倂爲放賣文記) 퇴축성언(退築成堰) 귀공자유(貴公自由) 임의(任意) 이일후약유잡담지폐(而日後若有雜談之弊) 칙이차표빙고사(則以此標憑考事).

 

標主 김경덕(金敬悳)

 

 

구마산 창탄을 일상인(日商人) 홍청삼(弘淸三)이 매축하려는 이 사실은 구마산 항민(港民)에게는 청천의 벽력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중대사였다.

 

당시 마산의 형편을 보면 구마산포에서 각국 조계지(신마산-편자 주)에 이르는 해안 십리는 일본 철도감부(鐵道監部)입표정계(立標定界)’하여 매축 예정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구마산 서성리(西城里)로부터 오산리(午山里)에 이르는 매축권이 홍청삼(弘淸三)의 손아귀로 들어가게 되면 마산 창탄전역이 일본의 손아귀로 들어가게 되는 셈이 된다.

 

구마산 서성리에서 오산리에 이르는 지선(地先) 해면(海面)은 넓을 뿐만 아니라 또한 인가(人家) 천호(千戶)가 나락일처(羅絡一處)’에 군집(群集)하여 있어 물화기사(物貨起卸)의 상전시사(商廛市肆)’를 설립코자 하여도 땅이 없으므로 이곳을 매축하면 상업이 크게 흥할 수 있는, 그야말로 상업발전의 최대 관건이 되는 곳이었다.

 

또 이때 구마산포의 배후 일대의 토지는 일본이 철도 부지로서 강제 점령하고 있었으므로 구마산 창탄 매축권을 일본인 홍청삼(弘淸三)이 차지하게 되면 구마산 항민들의 처지는 장차 목이 졸려 질식하게 되는 형편에 몰릴 것이 뻔했다.

 

따라서 구마산 항민들로서는 생존권에 관계되는 중대사가 아닐 수 없었다.

 

이때 감리서는 상부의 명도 있고 해서 홍청삼을 불러 누누이 타일렀으나 그는 전집문기(典執文記)를 빙자하여 응하지 않았다.

 

또한 김경덕은 이미 사망하였고, 원근 친척도 없었으므로 문제의 증빙서류를 고증해 볼 수도 없었고, 따라서 그 진실을 캐어 보기가 실로 어려웠던 것이다.

 

이에 대한 감리의 보고를 보면 다음과 같다

 

향이본항해면(向以本港海面)에 일상(日商) 홍청삼(弘淸三)이 통위매축일사(統爲埋築一事)로 보명본부(報明本府)하였삽더니 시승지령내개(施承指令內開)에 차단사항(此段事項)이 관계비경(關係非輕)이거늘 초불보명(初不報明)하고 체선인허우외인(遞先認許于外人)이 수속가아(殊屬可訝)함도격소(函圖繳消)하야 비무자안(俾無滋案)케 할 사등인(事等因)이시온바 차()를 준사(遵査)하온즉 항해매축(港海埋築)이 원계중요(原係重要)이온바 개이본항형편(槪以本港形便)으로 언지(言之)하오면 자구마산포(自舊馬山浦)로 지마산각국거류지(至馬山各國居留地)하여 연해일대(沿海一帶)에 장근십리(長近十里)는 기자철도감부(己自鐵道監部)로 입표정계고(立標定界故)로 향여십사호(向旅十四號) 보고(報告)에 회도점상(繪圖粘上)이옵고 사차이외(捨此以外)에 사합매축자(司合埋築者)는 서자서성리(西自西城里)로 동지오산(東至午山)토록 전인어총청삼(全人於弘淸三) 영축지도(營築地圖)하였삽는데 관기지형(觀其地形) 칙수미수리(則首尾數里)에 해면(海面)이 초활(稍闊)하고 해수(海水)가 초천(稍淺)하여 불비거력(不費巨力)이라도 가득실효(可得實效)이옵고 논기지리(論其地利) 칙인가천호(則人家千戶)가 나락일처(羅絡一處) 이총잡착박(而叢雜窄迫)하와 선박출입(船舶出入)에 물화기각(物貨起却)의 급부상전시사(及夫商廛市肆)를 욕설무타(欲設無他)이온즉 차약증축(此若增築)이오면 상유흥왕(商裕興旺)에 최대관건(最大關鍵)이옵거늘 조속지외인(朝屬之外人)이 극계완석(極係惋惜)일뿐더러 황승엄절(況承嚴節)에 불용유홀(不容琉忽)이옵기 해홍청삼(該弘淸三)을 루경초유(屢經招諭)에 혹완혹준(或婉或峻)하야 명기불연(明其不然)하오되 업사신사(業巳身死)에 겸무원근족친(兼無遠近族親)이라 하오며 소유일절서류(所有一切書類)를 참 수제존당(漱諸存檔)에 역무가고(亦無可考)이오니 사심아감(事甚訝感)이오나 역난사핵(亦難査覈)이온바 기존거행(其存擧行)에 귀각시민(晷刻是悶)이옵기 자()에 보고하오니 사조(査照)하심을 복망(伏望).

 

광무(光武) 1062

 

창원감리(昌原監理) 이 기 (李 琦)

 

의정부(議政府) 대신(大臣) 각하(閣下)

 

 

당초에 구마산 창탄의 매축권을 감리로부터 인허 받은 김경덕이 이때는 이미 사망한 뒤였으므로 일상인(日商人) 홍청삼(弘淸三)의 주장으로 보아 이 무렵 일본인들이 악랄한 갖은 수법을 상습적으로 저지르고 있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전기(前記) 감리의 보고에서 사심아감(事甚訝感)이오나 역난사핵(亦難査覈)’이라 한 바와 같이 실로 허위 날조의 가능성이 짙은 것이다.

 

홍청삼은 현지 마산에서 구마산 항민들을 비롯한 감리의 반대로 자기의 뜻을 관철할 수 없게 되자 일본인 이권 옹호기관의 본산(本山)인 통감부로 하여금 조선정부에 압력을 가하여 매축을 허가하도록 강요했다.

 

통감부의 통첩을 받은 당시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은 창원부윤에게 다음과 같은 훈령을 통하여 창탄 매축예정기지(埋築豫定基址)의 장광평수(長廣坪數)와 인허시(認許時) 혹 타인에게 방해가 되지 않는지를 상세히 보고케 하였다.

 

수사안당(漱査案檔)한 즉 광무 310월에 귀부동성거민(貴府東城居民) 김경덕이 자본항서성리전(自本港西城里前)으로 지오산리전(至午山里前) 창탄(漲灘)을 한오십파퇴축(限五十把退築)함을 이시감리(伊時監理)에게 승인(承認)한 후() 일인 홍청삼에게 이전(移轉)한 사()로 광무 104월에 전() 의정부(議政府)에서 전() 감리서(監理署), 김병철(金炳哲)의 보고를 거()하야 해인허(駭認許)함도격소(函圖繳消)할 사()로 지절재안(指節在案)인바 현접통감부내문(現接統監府來文)한즉 마산포(馬山浦) 재유홍청삼(在留弘淸三)으로부터 구마산포(舊馬山浦) 해면매축(海面埋築)할 사()로 청원(請願)하온바 우()는 통상무역(通商貿易)의 편리(便利)를 기()하기 위()하야 항구(港口)를 수축(修築)하야 신()히 선박격류장공동물화상륙소(船舶擊溜場共同物貨上陸所) ()을 설()하고 차매축지(且埋築地)는 창고및공동시장(倉庫及共同市場)에 소용(所用)할 목적(目的)으로써 차()에 기공(起工)할 계획(計劃)이오니 동지방산업(同地方産業)의 발전상(發展上) 유익(有益)한 사업(事業)뿐 부시(不是)라 기매축구역및설계(其埋築區域及設計) ()이 적당(適當)하므로 인()하오니 청원(請願)을 의()하야 허가등인(許可等因)이라 차()를 준사(准査)한즉 해() 창탄(漲灘)을 이시감리(伊時監理)가 불유상부(不由上部)하고 천행인허(擅行認許)가 실소아혹(實所訝惑)인지라 김씨(金氏)에게 인허(認許)한 기지(基址)의 장광평수(長廣坪數)와 해기지(該基址)를 인허(認許)함에 대하야 공동이익(共同利益)과 혹타인소유권(或他人所有權)에 구무방해(俱無妨害)인지 병상세보명(並詳細報明)할 사()로 자()에 훈령(訓令)하니 조량준변(照諒遵辨)함이 위가(爲可)

 

융희원년(隆熙元年) 105

 

內閣總理大臣 이 완 용(李 完 用)

 

창원부윤(昌原府尹) 이 기(李 琦)

 

 

이 훈령(訓令)에 대하여 창원부윤 이기(李琦)는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현승제삼십호(現承第三十號) 훈령내개(訓令內開)에 수사안당(漱査案檔)한즉 광무 2310일에 귀부동성거민(貴府東城居民) 김경덕이 자본항서성리전(自本港西城里前)으로 지오산리전(至午山里前) 창탄(漲灘)을 한오십파퇴축(限五十把退築)함을 이시감리(伊時監理)에게 승인(承認)한 후() 일인 홍청삼에게 이전(移轉)한 사()로 광무 104월에 전의정부(前議政府)에서 전감리서(前監理署) 김병철(金炳哲)의 보고를 거()하야 인허(認許)를 함도격소(函圖繳消)할 사()로 지절재안(指節在案)인바 현접통감부내문(現接統監府來文)한 즉 마산포(馬山浦) 재유 홍청삼(在留弘淸三)으로부터 구마산포(舊馬山浦) 해면매축(海面埋築)할 사()로 청원(請願)하온바 우()는 통상무역(通商貿易)의 편리(便利)를 기()하기 위()하야 항구(港口)를 수축(修築)하야 신()히 선박격류장(船舶擊溜場) 공동물화(共同物貨) 상륙소(上陸所) ()을 설()하고 차매축지(且埋築地)는 창고및공동시장(倉庫及共同市場)에 소용(所用)할 목적(目的)으로써 차()에 기공(起工)할 계획(計劃)이오니 동지방산업(同地方産業)의 발전상(發展上) 유익(有益)한 사업(事業)뿐 부시(不是)라 기매축구역및설계등(其埋築區域及設計等)이 적당(適當)하므로 인()하오니 청원(請願)을 의()하야 허가등인(許可等因)이라 차()를 준사(准査)한즉 해() 창탄(漲灘)을 이시감리(伊時監理)가 불유상부(不由上部)하고 천행인허(擅行認許)가 실소아혹(實所訝惑)인지라 김씨(金氏)에게 인허(認許)한 기지(基址)의 장광평수(長廣坪數)와 해기지(該基址)를 인허(認許)함에 대하야 공동이익(共同利益)과 혹타인소유권(或他人所有權)에 구무방해(俱無妨害)인지 병상세보명(並詳細報明)할 사()로 자()에 훈령(訓令)하니 조량준변(照諒遵辨)함이 위가등인(爲可等因)이시온바 훈사(訓辭)를 늠준凜准하와 해안건(該案件)을 심사(審査)하온즉 김씨에게 인허(認許)한 사()가 초무존당(初無存檔)이오며 설유전질권(設有典質券)이라도 사재광무(事在光武) 삼년도(三年度)뿐 부시(不是)오라 광무(光武) 101016일 칙령(勅令) 62호 난내(欄內)에 각종인허(各種認許)에 대()하야 일개년내실시혹착수(一箇年內實施或着手)치 못한 시()는 해인허(該認許)를 무효(無效)로 함이라 하셨사오니 해인(該人)에 차이전권(此移轉權)은 자귀무효(自歸無效)이온지라 이무경론(理無更論)이옵고 해창탄매축(該漲灘埋築)할 기지(基址)로 논()하와도 상년(上年) 62일 의정부(議政府) 지령(指令)을 승준(承准)하와 보명(報明)하였사온즉 자가동촉(自可洞燭)이 살건바 해안일대(海岸一帶)에 공동이익(共同利益)과 타인소유권(他人所有權)에 방해(妨害) 유무(有無)에 대()하야 동서(東西) 굴강(掘江)은 포칠리거민소용지지(浦七里居民所用之地) 위기선박지피풍우(爲其船舶之避風雨)이 수축처야(修築處也), 동성어선(東城魚船) 창여(艙與) 오산선창(午山船艙)은 각어물판매설점소(各魚物販賣設店所)이온즉 해창탄지긴요(該漲灘之緊要)가 기어상민(其於商民)에 최유관계(最有關係)이옵기 해기지(該基址)의 장광파수(長廣把數)를 회성도본(繪成圖本)하와 점부상송(粘付上送)하오며 자()에 보고(報告)하오니 사조처분(査照處分)하심을 복망(伏望).

 

융희원년(隆熙元年) 1029

 

창원부윤(昌原府尹) 이 기(李 琦)

 

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 각하(閣下)

 

 

즉 이 안건을 심사한즉 김경덕에게 사실이 초무존당(初無存檔)’하고 설혹 전질권(典質券)이 있다 하더라도 그 일은 광무 3년도(1899)의 일로 광무 10(1906) 1016일 칙령 제62호에 의해 무효화된 것이며, 타인 소유권에 대한 방해 유무에 관하여는 동서굴강(東西掘江)’포칠리(浦七里)’에 거주하는 항민(港民)의 소용지로서 선박의 대피지로 수축한 곳이요, 동성어물(東城魚物)선창은 오산(午山)선창과 더불어 각 어물 판매를 위해 설점(設店)을 하고 있는 터이므로 이곳 창탄(漲灘)은 구마산 상민들에게는 가장 긴요한 곳이라 보고하였던 것이다.

 

일상인(日商人) 홍청삼(弘淸三)이 통감부에 청원한 결과 통감부가 조선내각에 압력을 가하여 그에게 매축의 인허(認許)를 주도록 획책한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구마산 항민(商漁民)들은 분연히 궐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리하여 항민 박기수, 김하수 등은 서성 선창에 이르는 일대의 창탄을 합력투자(合力投資)하여 매축할 것을 결의한 후 조약(條約)을 준성(峻成)’하고 구마산 항민을 대표하여 다음과 같은 청원서를 창원부윤에게 제출했다. 이 일은 구마산 항민들이 경제적으로 실력 대항하려는 거사로서 실로 주목할 만한 사실이었다.

 

본항(本港) 소재(所在) 자서성동선창(自西城洞船艙)으로 지오산선창(至午山船艙)은 즉() 포칠리수천호거민(浦七里數千戶居民) 영업자생지신지(營業資生之信地)이거늘 일인(日人) 홍청삼(弘淸三)이 해기지해안전면(該基地海岸前面)을 통위매축(統爲埋築)할 양()으로 통감부(統監府)에 청원(請願)하야 자내각(自內閣)으로 해기지매축(該基地埋築)에 대()하여 공동이익(共同利益)과 혹타인(或他人) 소유권(所有權)에 구무방해(俱無妨害)인지 상세보명(詳細報明)하라신 훈령(訓領)이 내도(來到)하오니 차()에 대()하와 항민(港民)에 정장(情壯)을 추구(推究)하온즉 여간전토(如干田土)는 진입어철도및군용지(盡入於鐵道及軍用地)하옵고 자생여지(資生餘地)가 지시(只是) 자서성선창(自西城船艙)으로 지오산선창(至午山船艙)까지 내유서굴강여선창(內有西掘江與船艙)이라 차약양어타인매축(此若讓於他人埋築) 하오면 편동한구지인후(便同寒口之咽喉)요 폐호지문비(閉戶之門扉)라 본항기천호거민(本港其千戶居民)은 세장실업비산내사(勢將失業俾散乃巳)옵기 민등순의동일(民等循議同一)하와 자서성선창(自西城船艙)으로 지오산선창(至午山船艙)까지 일대(一帶) 창탄(漲灘)을 합력(合力) 구재(鳩財)하와 매축(埋築) 영업(營業)할 차()준성조약(峻成條約)하옵고 자()에 청원(請願)하오니 보내각승인(報內閣承認)하시와 사차무고기만생영(使此無辜幾萬生靈)으로 비보천식(俾保喘息)케 하심을 복망(伏望).

 

이 청원서에는 당시 구마산이 놓여있는 어려운 형편이 실로 잘 반영되어 있는 것이다.

 

즉 당시 구마산 배후 일대의 전토(田土)가 모두 철도와 군용 부지로 일본에게 강제 수용을 당하고 구마산 항민이 자생(資生)할 수 있는 곳은 오직 구마산 해안 일대 뿐인데, 이곳 매축을 일인(日人)이 하게 되면 목을 조르고 문을 닫게 하는 것과 같아 이곳에 사는 수천호거민(數千戶居民)’은 장차 실업으로 산산이 흩어질 뿐이라 하여 이곳 매축권은 구마산 항민들의 생존권에 관계된다는 것을 환기시키면서 항민의 자체 매축을 청원하였던 것이다.

 

이 청원서에 접한 부윤은 1907111일 내각총리대신 앞으로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이본항매축사(以本港埋築事)로 낭승(曩承) 제삼십호(第三十號) 훈령(訓令)하와 축조보명(逐條報明)이삽던바, 현접항민(現接港民) 박기수(朴基洙), 김하수(金河守) 등 청원서(請願書) 내개(內開)에 본항(本港) 소재(所在) 자서성선창(自西城船艙)으로 지오산선창(至午山船艙)은 즉() 포칠리수천호거민(浦七里數千戶居民) 영업자생지신지(營業資生之信地)어늘 일인(日人) 홍청삼(弘淸三)이 해기지(該基地) 해안전면(海岸前面)을 통위매축(統爲埋築)할 양()으로 통감부(統監府)에 청원(請願)하야 자내각(自內閣)으로 해기지매축(該基地埋築)에 대()하여 공동이익(共同利益)과 혹타인(或他人) 소유권(所有權)에 구무방해(俱無妨害)인지 상세보명(詳細報明)하라신 훈령(訓領)이 내도(來到)하오니 차()에 대()하와 항민(港民)에 정장(情壯)을 추구(推究)하온즉 여간전토(如干田土)는 진입어철도및군용지(盡入於鐵道及軍用地)하옵고 자생여지(資生餘地)가 지시(只是) 자서성선창(自西城船艙)으로 지오산선창(至午山船艙)까지 내유서굴강여선창(內有西掘江與船艙)이라 차약양어타인매축(此若讓於他人埋築) 하오면 편동한구지인후(便同寒口之咽喉), 폐호지문비(閉戶之門扉)라 본항기천호거민(本港其千戶居民)은 세장실업비산내사(勢將失業俾散乃巳)옵기 민등순의동일(民等循議同一)하와 자서성선창(自西城船艙)으로 지오산선창(至午山船艙)까지 일대(一帶) 창탄(漲灘)을 합력(合力) 구재(鳩財)하와 매축영업(埋築營業)할 차()로 준성조약(峻成條約)하옵고 자()에 청원(請願)하오니 보내각승인(報內閣承認)하시와 사차무고기만생영(使此無辜幾萬生靈)으로 비보천식(俾保喘息)케 하심을 복망등인(伏望等因)이온바 차()를 사()하오니 해기지(該基址)가 항민(港民)에게 관계누중(關係累重)뿐 불시(不啻)오라 이항민공동소유지지(以港民共同所有之地)로 허항민매축업(許港民埋築業)이 식계여거(寔係與擧)옵기 자()에 보고(報告)하오니 사조(査照)하신 후 항민(港民)에 정장(情壯)을 특념(特念)하시와 의원매축(依願埋築)케 하심을 복망(伏望).

 

융희원년(隆熙元年) 111

 

창원부윤(昌原府尹) 이 기(李 琦)

 

내각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 각하(閣下)

 

이 같은 부윤의 보고를 받은 내각에서는 매축할 평수와 자본액수와 매축기한 등을 세밀히 검토한 다음 일후(日後) 어긋나는 일이 없도록 후에 인허(認許)하고 그것을 보고할 것을 창원부윤에게 훈령하였다.

 

이에 부윤은 항민들로부터 제출된 창원 마산항 탄지매축(灘址埋築) 명세서를 첨부하여 내각총리대신에게 다음과 같이 보고하였다.

 

현승제오십삼호(現承第五十三號) 훈령내개(訓令內開)에 내보거실(來報據悉)인바 해탄지(該灘址)를 항민등(港民等)이 매축영업(埋築營業)할 사()로 준성조약(峻成條約)이라 하였으니 매축(埋築)할 평수(坪數)는 기하(幾何)이며 소인자본(所人資本)은 기하(幾何)인데 하이변비(何以辨備)이며 매축필역(埋築畢役)할 기한(期限)은 이기허간약정(以幾許間約定)하였는지 차등각건(此等各件)을 일일확세정지(一一確細定之)하야 보무일후위오연후(保無日後違誤然後)에 내가준시(乃可准施)이니 축저보명사등인(築底報明事等因)이온바 차()를 늠준(凜准)하와 항민등(港民等)이 해탄지매축(該灘址埋築)할 사()로 예산(豫算)하온 명세서(明細書)를 수취(受取)하와 점부상송(粘付上送)하오며 자()에 보고(報告)하오니 사조(査照)하심을 복망(伏望).

 

융희원년(隆熙元年) 1229

 

창원부윤(昌原府尹) 이 기(李 琦)

 

태자소사내각총리대신(太子小師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 각하(閣下)

 

창원(昌原) 마산항(馬山港) 탄지매축(灘址埋築) 명세서(明細書)

 

1. 평수(坪數)는 자서성선창(自西城船艙)으로 지오산선창(至午山船艙)까지 통계일만일천오백십사평(統計壹萬壹千五百十四坪)

2. 필역기한(畢役期限)은 십이개월(十二個月)로 예정사(豫定事)

3. 소인자본(所人資本)은 사만환(四萬圜) 예산(豫算)인데 항민중(港民中) 자본가(資本家)에서 합력구취사(合力鳩聚事)

4. 자본인성명(資本人姓名)을 우개날장(右開捺章)하야 지방관청(地方官廳)에 보관사(保管事)

 

左開

이규철(李圭哲) 오천환 이상소(李相召) 오천환 손양손(孫梁損) 오천환

강홍규(姜洪奎) 오천환 김지관(金志觀) 오천환 권태창(權泰昌) 오천환

최병두(崔炳斗) 이천환 김창제(金昌濟) 이천환 김정기(金正基) 일천환

정인섭(鄭仁燮) 일천환 박기수(朴基洙) 일천환 김하수(金河守) 일천환

강성도(姜成度) 일천환 이장환(李章煥) 오백환 송치권(宋致權) 오백환

                                                                                계() 사만원(四萬圜)

    

실로 이때 사만환(四萬圜)이라는 돈은 막대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구마산 항민들은 그들의 생존권에 관계되는 구마산 매축권을 수호하기 위해 일인과의 투쟁에서 단결력에 의해 또한 꾸준한 항소(抗訴) 투쟁을 전개하여 드디어는 항민 자본가들의 합력(合力) 투자한 사만(四萬)의 자본으로 매축 인허를 받게 됨으로써 통감부의 압력을 뚫고 주권의 수호에 성공했던 것이다.

 

융기(隆起)해 오르는 이러한 구마산 항민들의 저항의식의 물결을 타고 1908년 자주적 이권 옹호의 자치 기관인 마산민의소가 탄생하였다.

 

이는 국내 봉건지배층과 외세(外勢)에 대항하여 구마산 항민들의 이권을 옹호하는 대변 기관이었다.

 

그 성격은 서울에 생겨났던 독립협회와 같은 성격을 띤 것으로 마산민의소는 항민의 의사를 집결하여 마산항의 주권을 옹호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조선의 일본에의 병합을 계기로 마산민의소도 강제 해산된 것은 나라의 운명과 궤를 같이 한 것이다.

 

이 같은 마산 항민들의 저항을 뒷받침한 현실적인 힘은 축적된 항민 자본이었고 이러한 자본은 상술(上述)한 바와 같은 투쟁을 통하여 민족 주체성 가운데 발달할 수 있었던 것이다.

 

() 상인 홍청삼(弘淸三)은 그 목적한 바가 실패로 돌아가자 구마산 서성선창(西城船艙)에서 동성선창(東城船艙)까지의 서굴(西掘)을 재내(在內)로 하는 일부분의 매축권이라도 얻어 보려고 노력하였으나 역시 실패하였다.

 

이 결과 현지 일인 이사관과 감리 사이까지에도 금이 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같은 사실은 다음과 같은 당시 부윤의 보고를 통하여 잘 알 수 있다.

 

본부(本府) 마산항소재(馬山港所在) 창탄기지(漲灘基址) 자서성지오산선창(自西城至午山船艙)까지 매축(埋築)할 사()에 대()하여 무역항안(貿易港岸)에 공익상(公益上) 미거(美擧)됨은 본() 부윤(府尹)이오나 일이사관(日理事官)이오나 동일(同一) 사상(思想)이온데 단() 매축권(埋築權)에 재()하여는 다민(多民)에 원()을 불가부종(不可不從)하와 업사보명(業巳報明)이옵거니와 현거이사관호담(現據理事官哠談)하온즉 일상민(日商民) 홍청삼(弘淸三) 청원(請願)이 단서성선창(但西城船艙)으로 동성선창(東城船艙)까지 서굴강(西掘江)만 내재(內在)한 일부분(一部分)에 불과(不過)하다 하오니 해기지(該基址)가 항민(港民)에 청원(請願)한 기지내(基址內)에 포함기내(包含其內)하와 기어오십삼호지령(旣於五十三號指令)을 봉시(奉示)하와 갱보(更報)하온즉 해기지(該基址)에 매축권(埋築權)을 수모(誰某)에게든지 인허(認許)하심은 유재내각처분(惟在內閣處分)이옵거니와 항민(港民) 청원(請願) () 실업비산구어(失業俾散句語)로 통감부(統監府)에서 이사관(理事官)이 본부윤(本府尹)과 동의(同意)를 득()치 못한 양으로 해이사관(該理事官) 본부윤(本府尹)에게 유감(遺憾)이 불무(不無)이온바 대저(大抵) 본부윤(本府尹)의 보사(報辭)가 해기지매축(該基址埋築)이 불가(不可)로 성언(成言)함이 아니고, 해사업지권(該事業之權) 찬성(贊成)에 관()하여 인민(人民)의 청원사의(請願辭意)를 거보(據報)한 사()이오며 이사관(理事官)의 본의(本意)도 무론(無論) 수모(誰某)가 매축권(埋築權)을 득()하던지 내두공동이익(來頭共同利益)의 흥왕(興旺)함을 위함이온즉 본래(本來) 해안건(該案件)의 기이(岐異)한 의견소무(意見小無)하옵기 자()에 보고(報告)하오니 사조(査照)하신 후 지조통감부(知照統監府)하오셔 이사관(理事官)과 본부윤(本府尹)의 동일(同一)한 본의(本意)를 변명(卞明)케 하심을 복망(伏望). 地 呼 遽(지 호 거)

 

융희(隆熙) 217

 

창원부윤(昌原府尹) 이 기(李 琦)

 

내각총리대신(內閣總理大臣) 이완용(李完用) 각하(閣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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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11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3) - 개항이후

<마산포구의 두 굴강과 네 선창>

마산포가 조선시대 번성했던 포구라고 알려져 있지만 옛 마산포의 해안선이 현재 도시 속 어디였는지 정확하게 밝힌 적은 없었습니다. 시사(市史)를 비롯한 몇몇 자료에서 대충 언급했지만 추측일 뿐이었습니다.

오늘 포스팅에서 밝히는 마산포 해안선(海岸線)은 사정지적도(査正地籍圖)와 그 외의 여러 자료들을 통해 확인한 것입니다. 저는 정확(?)하다고 봅니다만 땅을 파보지 않아서 장담은 못하겠습니다.


마산포에는 일찍이 두 개의 굴강과 네 개의 선창이 있었습니다.

동굴강과 서굴강으로 불렸던 두 굴강에 대해서는 1964년 『마산시사 사료집 제1집』의 「마산축항지」에서 김준이 그 용도를 다음과 같이 말한바 있습니다.

「서굴강(西掘江)은 인공(人工)으로 구축된 듯한 방축(防築)이며 여러 파도를 막고 범선(帆船)들이 정박하는 곳으로서 방축 위에는 수 백년된 포구가 무성해 있었으며 그 위치는 현 남성동 우체국 지점이 된다.

동굴강(東掘江) 역시 서굴강과 같은 부두로서 북선(北鮮)서 온 명태 배가 풍랑을 피하기 위해 정박한 곳이다」

복원도를 놓고 보겠습니다.


복원도에 나타난 굴강의 위치․규모․형태를 보아 마산창 앞에 있으면서 규모가 큰 서굴강은 마산창과 관련한 관용기능을 하던 인공 굴강이었고, 동굴강은 민간인들의 영업과 관련한 민용 기능을 담당했던 자연굴강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런 관민구분 사용은 조운제도가 폐지된 19세기 후반까지였습니다.

서굴강과 동굴강을 중심으로 직선거리 약 500m의 해안에 걸쳐 네 개의 선창이 있었습니다.
명칭은 서성선창․백일세선창․어선창․오산선창이었고 그 위치와 형태는 위 그림을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백일세선창(百一稅船艙)이라는 특이한 명칭에 대해 여러 견해가 있습니다.

어떤 이는 백일세(百一稅)가 아니라 ‘백일세(百日稅)’라고 하면서 이를 2월에서 5월까지 백일(百日) 내에 세(稅)를 서울 선혜청에 수송하기 위한 선창이란 의미라고 해석하고 그렇기 때문에 백일세선창을 조창부두로 판단합니다.

하지만 다른 이는 일반적으로 백일세(百一稅)란 수입의 백분의 일을 세금으로 납부하는 제도를 말한다면서, 예로써 군산항의 객주가 내장원에 백일세를 납부한 일이 있었다고 제시합니다.

여기서는 1907년 11월 1일 창원부윤 이기(李琦)가 일본인 홍청삼(弘淸三)의 매립과 관련해 내각총리대신 이완용에게 보낸 보고 제3호에 첨부된 마산 해안도면에 ‘百一稅船艙’이라고 기록되어 있어서 百一稅라고 적었습니다.

우리나라간척사업과 제방공사의 효시로 고려 고종 35년(1248) 김방경(金方慶)에 의한 평안도의 위도(葦島) 간척사업을 듭니다만, 마산포 복원도를 보면 마산의 해안에도 석축호안(石築護岸)과 방파시설(防波施設)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추정하는 근거는 아래 그림 표에서 알 수 있듯이, 해안 곳곳에 자연발생적 형태라기보다는 인위적인 형태로 만들어졌다고 추정될만한 흔적이 여러 군데 발견되었기 때문입니다.



인위적인 석축호안과 방파시설이 있었다고 추정하는 근거는 더 있습니다.
이미 이 시기에 석축돌제(石築突堤)가 있었다는 기록과 『창원군지』등 여러 자료에서 고려시대 석두창(石頭倉)에는 조곡(漕穀) 천석을 싣는 조선(漕船) 여섯 척이, 조선시대 마산창에는 천석을 싣는 조선(漕船) 스무 척과 이 배들을 운행시킬 조군(漕軍) 구백육십 명이 배치되어 있었다는 기록들이 그 가능성을 뒷받침해 줍니다.

물이 들어오면 바다가 되고 물이 빠지면 육지가 되는 갯벌지(간석지역)는 다음 두 그림에서 해안선과 인접해 그려진 점선 부분까지였습니다.
해안에서 가장 근접한 수심선에 1/2m라고 표기되어 있습니다.



동해 원산, 서해 강경과 더불어 조선 3대 포구였던 남해의 마산포 해안은 한일병합 1년 후인 1911년, 일본인 박간방태랑(迫間房太郞)이 착수한 매립공사에 의해 그 모습을 잃게됩니다.

동굴강 서굴강과 서성선창․백일세선창․어선창․오산선창은 바다를 떠나 육지 속으로 서서히 사라져 갔습니다.
그림에서 본 당시 해안의 석축들은 지금도 마산도심 땅밑에서 잠들고 있겠죠.
우리나라에 조선시대 항구가 보존된 도시는 없다는데, 발굴해서 역사문화자원으로 사용할 수는 없을까요? 전혀 불가능한 일일까요?<<<




2010/10/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6) - 개항이후
2010/10/1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7) - 개항이후
2010/10/1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8) - 개항이후
2010/10/2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9) - 개항이후
2010/11/0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0) - 개항이후
2010/11/0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1) - 개항이후
2010/11/1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2)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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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0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5)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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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2)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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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28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1) - 개항이후

<조선시대 마산포를 복원하다>

지금부터 소개할 마산포 복원도는 1905년-1910년 시기의 마산포 도시상황입니다. 하지만 시기적으로 보아 이때 상황이 19세기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어서 이 복원을 ‘조선후기의 마산포 복원도’라고 해도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습니다.


-복원도 작성 범위-

복원작업의 범위는 토지의 지목과 형상을 분석하여 주거용지로 사용되었을법한 토지들이 일정한 형태로 집합되어있는 영역으로 결정하였으며, 외곽경계는 가급적 도로로 하였습니다.

설정된 범위는 다른 자료에 나타나는 당시 원마산의 주거용지 경계와 비교하면서 조정하였습니다. 이 과정에서 지적도에서 복원한 당시 주거지 영역과 다른 자료에 나타나는 주거지 영역이 거의 일치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복원도 작성 방법-

복원방법은 제가 임의로 착안하였습니다.
사정지적도 복사본을 만들어 이미 분할과 합병으로 변형된 지적도의 원형을 추적 복원하는 방식이었습니다.

모번(母番)과 자번(子番)의 관계를 이용하여 가능했던 작업입니다.
최초의 사정지적도는 모번(母番) 밖에 없었고, 모번 만 있던 땅이 분할되면 자번(子番)이 생기게 됩니다.
이 점을 착안하여 사정지적도 상에 모번으로 구획되어진 원래의 경계선을 모두 찾아내어 복원하였습니다.
예를 들어 1-1과 1-2와 1-3번지가 있으면 이 세 필지를 합한 외곽선을 이어서 원래의 1번지를 찾는 방법입니다.

복원된 사정지적도는 컴퓨터(AUTO-CAD)를 이용해 모사(模寫)한 후, 각 필지의 사정토지대장(査定土地臺帳)과 비교 확인하여 사정(査定) 당시에 존재했던 최초의 지적도를 복원했습니다.

이렇게 작성된 사정지적도를 관련문헌자료 등을 이용하여 보정(補正)하여 복원도의 정확성을 기했습니다.

이상의 과정을 거쳐 최종 작성한 1910년 경의 마산포 복원도는 다음과 같습니다.

 

 

-사정지적도에 나타나지 않았던 서굴강 방파제-

복원도를 작성하고 난 뒤 사정지적도에서 나타난 도면과 그 외의 다른 자료에서 나타나는 형태가 다른 부분이 한군데 있었습니다. 서굴강 앞의 방파제였습니다.
서굴강 앞 방파제는 사정지적도에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토지이용도의 작성과정 중 별도의 판단을 요하는 부분이었습니다.

옆 그림은 이미 소개한 김경덕의 매축청원도(2010/09/2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4) - 개항기)를 활용하여

1960년대에 김용욱 부산대 교수를 비롯한 몇몇연구자들이 마산포 해안 도면을 작성하였는데, 이를 토지이용도와 대조하기 쉽도록 재구성한 것입니다.
그림의 오산동은 지금의 오동동입니다.

 
이 도면은 이른바 변현되기 전의 마산포 해안선 원형을 가장 확실하게 알게 해주는 소중한 자료입니다.

이 그림과 사정지적도를 비교해본 결과 해안형태가 대부분 일치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다만 서굴강을 막아주는 방파제 부분만이 서로 다를 뿐이었습니다. 김경덕의 도면 등에는 서굴강을 감싸고 있는 방파제가 있었지만 사정지적도에서는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백일세선창 부분도 이와 유사하게 돌출된 형태이지만 김경덕과 사정지적도 두 도면에 모두 나타나 있었습니다.

김경덕의 도면과 사정지적도 중 어느 것이 당시의 사실과 동일한가 하는 문제는 단정적으로 밝힐 수가 없습니다만 김경덕의 도면에 나타나 있는 것과 같이 서굴강의 방파제가 존재했을 것이라고 가정(假定)하면서 다음과 같이 추정하였습니다.

① 옆의 다른 지도(2010/08/2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0) - 개항기)에 나타나는 원마산 부분에도 김경덕과 창원부윤이 그

린 매축청원도와 같은 모양의 방파제가 뚜렷이 그려져 있습니다. 이 지도를 통해 당시 해안의 형태를 비교적 소상히 알 수 있습니다. 시장이 열렸던 지역은 건물이 없으며 중앙에 비어있는 부분이 조창부지다. 海岸線에서 點線까지가 창탄(漲灘), 즉 간석지입니다.

② 굴강(掘江)이라는 명칭을 통해서도 방파시설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였습니다. 굴강이란 개천․도랑못․ 해자(垓字) 등의 뜻이 있지만 여기서는 인위적으로 만든 포구를 의미합니다.

③ 조창과 서굴강의 위치를 볼 때 서굴강은 조운선 전용 굴강이었을 것이라고 가정(假定)이 가능합니다. 서굴강이 조운선 전용굴강이었다고 가정하는 이유는 (가) 조창에서 가장 가까운 해안이라는 것과 (나) 굴강의 형태가 규모 있게 의도적으로 잘 만들어져 있으며 (다) 그림3-36에서 보면 서굴강이 선창으로 사용하기에 적합한 형태를 갖추고 있지만 김경덕의 도면 등에는 선창이란 이름을 갖고 있지 않고 (라) 당시 오산진(현, 산호동)에서 많이 사용했던 오산선창을 제외하면 세 개의 선창이 서굴강을 중심으로 발달해 있다는 점 등입니다.

④ 위 ③의 가정 하에서 보면 사정지적도 작성을 위한 측량이 시행될 시점에는 이미 조운이 폐지된 지 십 수 년이 지난 뒤라서 조운 전용이던 서굴강은 그 기능이 약화되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이곳의 방파시설은 관리 소홀로 인해 손상을 입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근대적 토목 기술이 없었던 시대에 인위적으로 조성된 방파제가 유지보수를 하지 않으니 빠른 속도로 훼손되었을 것이고 훼손이 심한 방파제를 측량에서 제외하였다고 추정할 수 있습니다.

⑤ 만약에 방파제가 있었다 하더라도 이미 일본인에 의해 매축이 곧 시행될 시점이었거나 이미 매축공사가 시행되고 있었던 시점에서 도로나 대지도 아닌 보잘 것 없는 시설물이었던 방파제를 측량에서 제외시켰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마산포 항만매축공사는 한일병합 이듬해인 1911년(월일미상) 착공되어 총공사비 13,700원을 들여 1914년 7월 14일 준공을 보았습니다.

⑥ 방파제가 시작되는 부분을 확대하여 그린 오른쪽 그림에서

보듯이 방파제와 육지가 연결되는 지점으로 추정되는 「가」부분의 형태가 뾰족이 나와 있어서 대단히 어색합니다. 그리고 방파제가 시작되는 위치로 추정해 볼만한 곳까지 도로가 연결되어 있는 「나」부분 등이 「다」의 점선처럼 계속 이어지는 길, 즉 방파제가 있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합니다.

이상과 같은 여섯 가지의 이유를 근거로 서굴강을 감싸고 있는 방파제가 있었던 것으로 판단하고, 다른 자료를 통하여 추정되는 위치와 형태를 결정한 후 복원도에 추가 삽입하였습니다.


이 외에 사정지적도 만으로 1910년 당시의 토지이용도를 정확하게 작성할 수 없었던 다른 한 가지는 1905년 개통되면서 이미 형태조차 없어진 마산선 철도부지 내의 도로와 대지였습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어떠한 자료로도 정확한 복원이 불가능합니다.
복원도에 그려진 이 부분의 형태는 주위에 형성되어 있는 도로 및 대지의 모양을 참고하여 추정 복원한 것이기 때문에 사실과 같지 않습니다.

이상과 같은 과정을 거쳐 완성된 복원도를 현재의 도시 도면과 오버랩(over-lap)시킨 것과 항공사진에 비교시킨 그림입니다. 항공사진은 1999년에 촬영한 것인데 해안의 원래 위치를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습니다.

 

길고 복잡한 작업을 통해 얻은 이 복원도를 통해 20세기 초, 더 멀리 조선시대 마산포를 정확히 파악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2010/10/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6) - 개항이후
2010/10/1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7) - 개항이후
2010/10/1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8)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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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옥가실 2011.03.28 09:35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잘 보고 갑니다. 참으로 애쓴 결과입니다.
    이걸 바탕으로 당시의 마산포를 복원하면 아주 멋진 작품이 될 터인데..
    가능한 일이지요?

2010.07.05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 - 조선후기


<동해 원산, 서해 강경, 남해 마산>

18세기 후반부터 조창과 더불어 발달하기 시작한 마산포는 중서부 경남의 곡물과 남해안 수산물의 대표적 집산지로서, 화폐경제와 함께 성장한 굴지의 시장이었습니다.

아래 그림처럼 마산포구에는 두 개의 굴강, 곧 조운선 전용 선착장인 서굴강과 민간전용인 동굴강이 있었으며 이를 중심으로 오산선창(午山船艙)․어선창(漁船艙-東城漁船艙)․백일세선창(百一稅船艙)․서성선창(西城船艙) 등 4개의 선창이 펼쳐진 유수한 어항이었습니다.


당시 경상도의 중심포구는 왜관이 있었던 동래와 부산포, 창원의 마산포, 김해의 칠성포였습니다.
창원에는 마산포 뿐만 아니라 지이포(只耳浦, 창원시 상복동 지귀상가 부근), 사화포(沙火浦, 창원시 팔용동 홈플러스 부근), 합포(合浦), 여음포(餘音浦, 귀산부근)가 있었습니다만 이 중에서 중심포구는 마산포였습니다.

마산포 선창은 어선과 상인들로 항상 붐볐고 ‘일창원(一昌原) 이강경(二江景)’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전국적으로 유명했습니다.
'동해 원산, 서해 강경, 남해 마산'이라고 하여 전국 3대 수산물 집산지이기도 했습니다.

아래 그림처럼 19세기 이후에는 동북산 북어(北魚)가 원산포에 집하되었다가 마산포를 거쳐 은진(恩津)과 강경포(江景浦)까지 선운되기도 하는 등, 동해와 서해를 연결하는 원격지(遠隔地) 수산물 중개항구로 발전하여 경상도 시장권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마산포 시장을 전국에서 손꼽힐만한 규모라는 주장과 달리 어류에 국한하여 시장의 규모를 설명하는 학자도 있습니다만 어쨌든 마산포 시장의 규모가 대단했였던 것은 사실입니다. 19세기 후반에 이미 일본인 상인들도 진출해 있었습니다.

당시 마산포의 정황을 말해주는 문헌들을 소개합니다.

『일성록』순조 33년(1833년) 기록에 의하면 마산포 선창은 객주가 130여 호에 달할 정도로 번성했다고 합니다.

고종 때 4년 간 함안군수로 재임한 오횡묵의 『경상도 함안군 총쇄록』에는 마산포에 어물과 곡물을 실은 수백 척의 상선이 출입하여 해안에 빈 곳이 거의 없을 정도로 상업이 발달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순조 8년(1808년)에 편찬된『만기요람(萬機要覽)』의 재용편(財用編)에서는 전국 각 도 1,061개의 향시(鄕市) 중 국내 최대의 장시(場市) 15개를 소개하면서 경상도에 있는 276개 향시 중 최대 장시(場市)로 창원 마산포장(馬山浦場) 하나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래 사진은 1893년부터 세곡운송을 위해 마산만을 드나들던 기선 현익호입니다.
현익호는 444톤 2범(帆) 기선으로 당시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배였습니다.



갑오경장에 의해 지세가 현물에서 금납으로 개정되어 마산창의 기능은 중지되었습니다. 1895년의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경남의 중심상권으로 자리잡은 마산포 시장은 조금도 위축되지 않았습니다.

전국에 위세를 떨쳤던 마산포 시장,,,,
19세기 이 도시 마산은 조선에서 이름 높았던 상업도시였습니다.
개항으로 도시가 커지고, 해방 후 귀한동포와 6.25전쟁 후 피난민으로 도시가 커졌습니다.
1960년대 후반 부터는 자유무역지역과 한일합섬으로 공업도시가 되어 '전국 7대 도시'라는 이름까지 붙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도시의 위상에서는 '20세기 마산'이 '19세기 마산포'보다 낮았던 것 같습니다. <<<



2010/04/0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여는 글)
2010/04/1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 - 통일신라 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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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팬저 2010.07.05 07:45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http://panzercho.egloos.com/2767221 마산시립박물관에 있는 마산포 전경 디오드라마의 모습입니다. 위에 있는 마산포구의 동굴강과 서굴강의 경우 예전 합포진성의 전선을 정박시키던 것 같은 느낌을 받습니다.

    • 허정도 2010.07.05 08:14 신고 address edit & del

      그럴 수도 있겠습니다.
      지난 토요일 팬저님 덕분에 공부 많이 했습니다.
      주워온 도편은 거실에 잘 모셔놓았습니다.
      저 도편을 구웠던 도공도 가족을 뒤로 하고 일본에 끌려갔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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