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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1.24 00:00

마산 창원 역사읽기 (27) - 옛사람들의 쓰레기장, 성산패총

4. 유적으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

4-1  옛사람들의 쓰래기장, 성산패총

 

직선길이 12.5km로 전국 시가지 도로 중 가장 긴 창원대로를 따라 자동차로 20여분 달리다 보면 광활한 창원공단 한 복판에 야트막한 야산이 시야에 들어온다. 거기에 성산패총이 있다.

성산패총은 공단도시 창원시민들에게 특별한 의미가 있다.

창원공단은 기계생산이 주류이다. 지금의 창원모습이 될 것이라고 예견하듯 성산패총에는 조개껍질과 토기류 외에 철을 생산했던 흔적이 발견돼 야철지(冶鐵地)로도 명성이 높다.

오늘날 창원공단을 이룬 요람인 셈이다. 지금 성산패총은 사적 240호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지금도 유적지가 발굴되어 보존되는 경우는 드물다. 개발이 항상 우선이었기 때문이다. 성산패총이 발굴된 1970년대 초는‘산업근대화’를 부르짖던 시기였으므로 두 말할 필요 조차 없었다.

청와대 비서관들은 성산패총을 보존할 경80여억원의 추가 예산이 필요한데다 무엇보다 대통령의 특명사업인 자주국방을 위한 공단조성의 공정이 1년 이상 지연되는 문제가 발생한다고 주장하며 보존을 반대했다.

즉, 발굴조사에는 지장이 없도록 예산 등 모든 지원을 하겠지만 보존만큼은 피해야 한다는 것이 요지였다.

하지만 당시의 관련학자들은 차라리 발굴조사를 하지 않는 한이 있더라도 유적만큼은 보존돼야 한다고 맞섰다.

결국 성산패총의 보존 문제는 대통령에게로 넘어갔다.

현장에서 브리핑 받고 발굴현장을 보고 나서도 아무런 언급이 없었던 박정희 대통령은 만찬장에서 “공단을조성하게 되면 조망할 수 있는 위치로는 그 곳 밖에 없지 않느냐”고 말했다.

이 한 마디로 보존은 결정되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성산패총은 살아 남게된 것이다.

<성산패총 유물전시관과 전시관 내 야철지 유>

 

-성산에서 보이는 것들-

성산패총은 창원분지의 남측에 형성된 구릉에 자리하고 있는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에 이르는 마을유적이다.

유적이 분포하는 구릉을 성산(城山)이라 부르는데, 이 곳에 돌로 쌓은 삼국시대의 성곽이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지금의 성산은 벌판 가운데 홀로 솟은 구릉이다. 원래는 그 북동쪽의 가음정동 당산(堂山)과 이어져 있었으나 창원공단의 중심도로인 산업대로의 개설로 그 줄기가 잘리고 지금의 모습으로 남게된 것이다.

옛 사람들이 먹거리를 구해 먹고 그 찌꺼기를 내다 버린 쓰레기터로서 조개껍질이 집중적으로 쌓여 있어 그 모양이 얕은 언덕이나 무덤과 비슷하여 조개무지[貝塚]라 불리기도 한다.

이 곳에는 조개껍질에 함유된 알칼로이드화 성분으로 인해 많은 유기질 유물이 원래의 모습으로 보존되므로 당시의 물질문화와 식량자원, 자연환경에 대한 이해를 가능하게 해 준다.

또한 해안선의 변화에 기인하는 패각의 구성인자 분석과 패총의 분포권을 토대로 해안선 추정에도 중요한 근거를 제공한다.

성산패총에서는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 삼국시대에 이르는 문화층이 확인되었다. 성산패총의 중심 유적은 패총과 야철지로서 철기시대에 해당된다.

무엇보다도 당시의 쇠부리터가 확인된 점은 획기적인 발견이랄 수 있다. 지금도 이 유구는 이전 복원되어 시민들이 관람할 수 있다.

성산산성은 삼국시대에 조성된 것이다. 조사된 유물들을 구역별로 살펴보면, 동쪽 패총구역은 지금은 없어진 성산마을 배후 사면의 해발 약 20m 정도되는 곳에 정남향으로 입지해 있었다.

<성산패총 발굴광경>

 

패총의 규모10×15m 정도의 소규모이다. 조개껍데기는 굴이 대부분이며, 전복·대합·소라 등이 섞여 있다.

유물은 연질도기 위주이고, 경질도기와 골각기도 출토된다.

이 구역에서의 가장 두드러진 성과는 청동기시대 문화층의 확인이다. 즉 무문토기들이 출토되었다.

이외에도 반월형석도를 비롯한 석기와 수정제곡옥, 각종 골각기, 두형토기, 시루 등의 연질도기류가 출토되었다.

서남쪽 패총구역에서는 유구석부와 지석, 마제석촉, 석부 등의 석기류와 각종 골각기가 출토된 것을 비롯하여 다양한 도기류가 검출되었다.

중국화폐인 오수전(五銖錢)이 출토되어 패총이 어느 시기부터 사용되었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갖가지 조개껍질과 짐승뼈가 출토되어 당시인의 생계유형을 보여주기도 한다. 패류는 굴·방갑·고동 위주였다.

재첩도 보였는데 이 성산부근이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곳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짐승뼈는 사슴·노루·멧돼지·말 등을 비롯하여 개·닭·쥐 등이 포함되어 있다.

어류로는 참돔·농어·다랑어·새치다래 등이 있는데 다랑어 등의 존재로 미루어 당시의 어업이 연안에만 한정된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성산패총 출토유물>

 

패각층 아래에서 야철지가 조사되었다. 야철지는 굴뚝의 하부로 여겨지는 소형의 원형유구와 쇳물을 흘러내린 것으로 보이는 홈통 등의 유구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야철송풍관이 출토되어 이 곳이 야철유적임을 증명하고 있다.

야철지의 조성시기는 출토된 오수전으로 볼 때 기원을 전후한 시기로 추정된다.

구역의 가장 중요한 성과는 쇠부리터의 발견이다.

이 곳에서 발견된 오수전은 중국 한나라 선제때 주로 사용된 것이므로 성산패총의 연대가 기원전 1세기 경이었을 가능성을 보여 준다.

북쪽 패총구역에서는 마제석검, 유구석부, 지석 등의 석기류와 각종 골각기 및 도기류가 출토된 것을 비롯해 다른 패총 구역에 비해 철기가 많이 출토된 것이 특징이랄 수 있다.

이 곳에서 출토된 철기 중 특기할 만한 것은 철기의 제작시 이용되었던 망치가 출토된 점이다.

성곽은 자연석으로 축조하였는데, 성곽의 형태는 성산 정상부위의 외곽을 따라 구축한 테뫼식이다.

서벽의 경우에는 성내에 성곽과 관련된 생활유적이 확인되어 성곽 내에 일정한 규모의 병력이 주둔하였음을 알 수 있다.

성곽의 서남쪽 구간에서 당나라 고종 무4년( 621)에 처음 주조되어 당나라에서 널리 사용되었던 개원통보(開元通寶)가 발견된 것으로 보아 성의 축조 시기는 7세기였을 가능성이있으나, 삼국시대 전기의 도기류 출토에 근거하여 3세기 대로 추정하기도 한다.

 

-옛사람들의 삶을 쓰레기장에서 알 수 있고-

성산패총의 발굴조사를 통해 혹은 그 존재로써 우리는 많은 사실을 알 수 있다.

우선 이 패총의 존재로써 당시의 환경을 헤아려 볼 수 있다. 패총의 분포 사실로써 이곳과 가까이에 바다가 있었음을 쉽게 생각할 수 있다.

따라서 패총의 분포권을 잇게 되면 옛날의 해안선에 대한 대체적인 이해가 가능하다.

실제 창원분지내에는 성산패총과 비슷한 시기에 형성된 많은 수의 패총이 분포한다.

가장 북쪽의 소답패총 및 남산패총, 가장 남쪽의 성산패총과 가음정동 패총으로 이어지는 그 가운데의 낮은 곳이 당시의 해역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추정은 조선시대의 지리지에 등재된 포구와 염전 등의 분포를 통해 방증된다.

그 범위는 지금의 시외주차장을 중심으로 한 사화동(조선시대에 사화포가 있었음, 북측 외곽에는 반계동패총과 남산패총, 소답동패총이 있음)과 명서동(한마음병원 일대에 염전 및 염창이 있었음), 대원동, 지귀동(조선시대의 지이포가 있었음) 반림동, 내동(내동패총이 있음), 외동(외동패총 및 성산패총이 있음), 가음정동(가음정동패총이있음) 부근으로추정된다.

또한 패총에서 출토된 다종다양한 자연유물의 분석을 통해 당시의 생계경제와 이를 위해 활동한 자원영역 등을 알 수 있다.

발굴보고서에 의하면, 육지와 바다의 각종 동물유체가 출토되어 이들이 식료로 사용되고 그 부산물은 도구로 혹은 장신구로 이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육지동물은 사슴, 돼지, 노루 등이 잡혔다. 이는 지금의 동물상과 크게 다를 바 없다.

하지만 해수산 어패류 중 다랑어의 존재는 당시의 자원영역이 연안어로에 한정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게 해 준다.

또한 민물조개인 재첩의 존재는 성산 부근이 민물과 바닷물이 섞이는 지역임을 알게 해 준다.

청동기시대의 구조물은 세 차례의 조사에서 한 번도 확인되지 않았지만 동쪽과 서남쪽 패총구역에서 출토된 청동기시대의 유물들은 이 시기에도 성산 구릉에서 사람이 생활하였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특히 다른 곳에서의 유적 발굴 예를 비교해 보면 청동기시대의 유적은 구릉지에 입지하는 경향이 많은데 가까운 곳의 남산유적에서는 구릉의 정상부에 입지한 청동기시대 마을의 한 형태로서 구릉의 꼭대기나 그 비탈에 형성된 마을의 바깥에 둥근 고리 모양의 고랑(환호 環濠)을 파서 외적을 막는 방어적 성격을 가진 마을 즉, 환호취락이 조사되었다.

이러한 예를 통해 볼 때, 성산의 정상부에도 청동기시대의 취락이 입지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나 조사의 손길이 미치지 못하였다.

조사 전의 성산 일대는 북측사면을 제외한 삼면은 경사가 완만하였고, 그 남쪽사면에는 약 30여호의 민가로 구성된 외동마을이 조성되어 있었다.

조사 전의 상황을 볼 수 있는 사진에 의하면 성산의 정상부는 주위 사면과 구분되는 봉우리가 있었다.

바로 이 부분이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에 이르는 취락이 조성된 곳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 곳은 주변 사면부의 야철지와 패총에 대한 조사만 진행된 채 삭토가 진행되어 조사의 손길조차 미치지 못하였다.

조사당시의 상황이야 여러 모로 보아 이해가 되지 않는 바는 아니지만 취락 전반에 대한 조사로 진행되지 못한 것은 못내 아쉽다.

성산패총에서의 야철지 발견은 고대 창원지역사회의 발전정도를 보여주는 것이다. 철을 매개로 인근지역과 교역했고, 선진문화를 받아들였을 것이다.

지금 창원지역이 기계생산의 메카로 자리잡았던 것은 고대사회의 철생산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먼 옛날의 철제련 역사는 오늘날 야철제(冶鐵祭)로 이어지고 있다.

이 행사는 창원시로 승격된 날을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진 시민의 날에 선보이는 향토 고유의 축제이다. 광활한 시청 광장 가운데 마련된 제단에 인조 용광로에 불을 지펴 창원시의 번영을 기원하고 있다.

공단 내의 용광로 기술자들이 성산패총 야철지에서 부싯돌로 불씨를 만들고 성화에 불을 붙여 시청앞 광장까지 봉송한다. 창원시장은 이 불씨를 받아 용광로에 불을 지핀다.<<<

최현섭 / 당시 경남발전연구원 역사문화센터 조사연구부장

이 글은 창원시가 마산 진해와 통합되기 이전에 쓴 글이기 때문에 현재 상황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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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21 00:00

마산·창원 역사 읽기(9) - 마산만에 자리잡은 해상왕국 골포국, 그리고 포상팔국 전쟁

2. 청동기 시대에서 10·18까지

2-2 마산에 자리잡은 해상왕국, 그리고 포상팔국 전쟁

 

비옥하여 오곡과 벼를 심기에 적합하다. 누에치기와 뽕나무 가꾸기를 알아 비단과 짤 줄 알았으며, 소와 말을 탈 줄 알았다. 혼인하는 예법은 남녀의 분별이 있었다. 큰 새의 깃털을 사용하여 장례를 지내는데 그것은 죽은 사람이 새처럼 날아 다니라는 뜻이다. 나라에서는 철이 생산되는데 한. 예. 왜인 들이 모두 와서 사간다. 시장에서의 모든 매매는 철로 이루어져서 마치 중국에서 돈을 쓰는 것과 같다. 또 두 군에도 공급하였다. 풍습은 노래하고 춤추며 술마시기를 좋아한다. (삼국지. 위지동이전 변한조)

 

삼한시기 마산・창원지역이 속했던 변한의 생활모습을 적은 글이다.

변한은 삼한 중의 하나이다. 흔히들 한국의 고대사회를 고구려, 백제, 신라를 중심으로 하는 삼국시대로 이해하고 있지만, 기원을 전후로 한 시기부터 한강의 남쪽 지역에는 많은 나라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중국의 역사책인 『삼국지』에 의하면 지금의 경기도, 충청도, 전남지역에서는 마한이, 낙동강을 경계로 동쪽에는 진한이, 서남부지역에는 변한이 있었다.

마한, 진한, 변한에는 여러 나라들이 있었다. 마한에는 백제국을 비롯한 54개국이, 진한에는 사로국을 비롯한 12개국이, 변한에는 구야국, 안야국을 비롯한 12개의 나라가 있었다.

이들 나라 외에도 다른 이름을 가진 나라들이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등장하고 있다. 대표적인 것이 포상팔국인데 그 중의 하나가 골포국이다. 골포국은 변한지역에 자리잡고 있었다.

골포국은 『삼국유사』에 합포로 기록되고 있지만 유적과 유물의 분포로 보아, 고대사회의 마산.창원 지역에서 정치집단이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지역은 성산패총 일대의 창원시 지역, 다호리를 중심으로 하는 창원 동읍일대와 마산의 진동만 일대로 볼 수 있다.

따라서 합포는 마산만을 가리키므로 마산의 중심지 보다는 마산만을 끼고 있는 창원시 지역일 가능성이 높다.

이 지역에는 청동기시대 이후부터 가야시기까지의 유적이 골고루 분포하고 있다. 가음정동유적(지석묘,청동기시대주거지.패총.고분군.수전지), 성산패총, 내동패총, 삼동동고분군, 외동패총 등이다.

이들 유적을 통해서 볼 때 골포국이었던 이 지역은 생활모습도 변한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교역의 중심, 골포국-

 

골포국은 마산만을 끼고 있는 바닷가에 자리잡은 나라였다. 이 당시 대부분의 정치집단들은 중국이나 인근 이역과의 교역을 통하여 발전하고 있었다. 특히 위만조선의 멸망 이후 만들어진 낙랑군은 중국 한 나라의 한반도 진출을 위한 전진기지였으므로, 한나라는 낙랑을 통하여 한반도를 통제하고자 하였다.

낙랑은 한반도 지역에 대한 통제의 수단으로 중국의 선진문물을 가지고 각 정치집단의 지배세력을 회유하였다. 마산만을 끼고 있었던 골포국 또한 자연지리적 조건으로 보아 교역을 통하여 성장 발전하였던 것이다.

 

<1997년 창원대 박물관에 의해 발굴된 창원 서상동 남산 청동기시대 주거지 유적>

 

왕망의 지황연간(A.D 20-23년)에 염사치가 진한의 우거수였는데 낙랑의 토지가 비옥하여 사람들의 생활이 풍요롭고 안락하다는 소식을 듣고 도망가서 항복하기로 하였다. 살던 부락을 나오다가 밭에서 참새를 쫓고 있는 남자 한 사람을 만났는데 그 사람의 말은 한인의 말이 아니었다. 그 남자는, “우리들은 한나라 사람으로 이름은 호래이다. 우리들 천 오백명은 목재를 벌채하다가 한의 습격을 받아 포로가 되어 모두 머리를 깎이고 노예가 된 지 3년이나 되었다”고 하였다. 염사치가, “나는 한 나라의 낙랑에 항복하려고 하는데 너도 가지 않겠는가?” 하니 호래는 ‘좋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염사치는 호래를 데리고 출발하여 함자현으로 갔다. 함자현에서 낙랑군에 연락하자 낙랑군은 염사치를 통역으로 삼아 금중으로부터 큰 배를 타고 진한에 들어가서 호래 등을 맞이하여 데려갔다. 함께 항복한 무리 천 여명을 얻었는데, 다른 5백명은 벌써 죽은 뒤였다. 염사치가 이때 진한에게 따지기를 “너희는 5백명을 돌려보내라. 만약 그렇지 않으면 낙랑이 만명의 군사를 파견하여 배를 타고 와서 너희를 공격할 것이다”라고 하니, 진ᄒᆞᆫ은 “5백명은 이미 죽었으니, 우리가 마ᄄᆞᆼ히 그에 대한 보상을 치르겠다‘ 하고는 진한인 만 오천명과 변한포 만 오천 필을 내놓았다. 염사치는 그것을 거두어 가지고 곧바로 돌아갔다. 낙랑군에서 염사치의 공로와 의리를 표창하고, 관모와 땅, 집을 주었다.(『삼국지』위서동이전 한전에 인용되어 있는 『위략』의 기록임)

 

이 글은 진.변한의 여러 나라들이 낙랑과의 교류가 활발했음을 잘 보여 주고 있다.

진한의 우거수가 낙랑으로 망명하려 했다든지, 중국 한인이 한의 포로가 되었다든지, 변한포를 낙랑에 보냈다는 것은 그 증거이다.

이 외에도 “변한의 나라에서는 철이 생산되는데 한. 예. 왜인 들이 모두 와서 사간다”, “왜와 가까운 지역이므로 남녀가 문신을 하기도 한다.”등의 기록은 중국 뿐만 아니라 왜,예와의 교류도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마산회원구 무학여고 뒷편삼한시대 성지로 추정되는 이산성지>

 

골포국으로 추정되는 창원지역에도 중국, 일본과의 교류를 보여주는 유물이 조사되고 있다.

성산패총에서는 중국 한나라에서 주조하기 시작한 오수전과 일본계의 토기들이 출토되었으며, 도계동에서는 일본계인 철로 된 창, 삼동동에서는 일본계인 청동화살촉이 조사되기도 하였다.

이를 보아 골포국은 남해안과 같은 교통로를 따라 중국의 군현이나 일본과 교역했던 것이다. 수입품은 주로 옷과 책, 거울, 칠기, 유리제 장신구 등과 같은 신분과 부를 상징하는 물건이었을 것이고, 수출품은 철, 포, 생구 등이었다.

철은 성산패총에서 철을 제련. 생산하는 야철지가 조사됨으로써 철이 생산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신증동국여지승람』 창원도호부 토산조에 “불모산에서 철이 생산된다‘는 기록으로 증명된다.

따라서 창원지역의 정치집단인 골포국은 철을 한나라의 군현이나 일본 그리고 인근 한의 여러 나라에 수출하였을 것이다.

 

-골포국이 주도했던 포상팔국전쟁-

 

전쟁은 인간이 집단을 만들면서 끊임없이 행해져 왔다. 전쟁은 개개인의 복수나 싸움과는 분명히 다르다. 전쟁은 “집단적으로 그리고 조직적으로 싸우는 행위”를 말한다.

전쟁은 고통이다. 사랑하는 가족과 연인에게 생이별을 강요하고 무수한 인간의 갊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인류가 이룩한 모든 성과를 하루아침에 잿더미로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전쟁을 입에 올리기조차 꺼려한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국가는 전쟁으로 성장하고, 망하기도 하였고, 각 지역이나 세계질서도 전쟁을 통해 끊임없이 재편되었다. 전쟁과정에서 문화가 교류되고 과학기술이 발전하기도 하였다. 전쟁에서 사용되었던 나무몽둥이에서 핵무기에 이르는 온갖 물질문명은 당시 사회의 최첨단 기술을 반영하는 것이다.

지금도 전쟁은 계속되고 있다. 9.11 테러 이후 아프가니스탄 지역에서의 전쟁 그리고 미국의 이라크에 대한 침략은 전쟁이 여전히 강대국이 그들의 의사를 표현하는 가장 중요한 수단임을 증명해 주고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한반도도 전쟁의 위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전 미국 대통령 부시가 북한에 대하여 ‘악의 축’ 이라 규정한 것은 전 지구에서 유일한 분단국으로 남아있는 한반도에 대한 전쟁의 가능성을 높여주고 있다. 이라크와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둔 미국은 그 자신감으로 인하여 북한 핵개발을 빌미로 전쟁을 일으킬 가능성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다.

전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청동기시대부터이다. 농경의 발달로 일여 생산물이 늘어나고 빈부의 차도 커졌다. 단 한차례의 약탈로 일년치 식량을 마련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이처럼 전쟁은 약탈로부터 시작되었다. 특히 여러 나라가 병립하여 전쟁을 통해 세력과 영역을 확장하던 고대의 역사는 전쟁으로 점철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총이나 대포가 없던 그 시절 병사들은 자신의 힘으로만 싸워야 했고, 군량미를 운반할 트럭이나 성을 쌓을 중장비도 없었기 때문에 수많은 민간인이 동원되어야 했다. 전쟁과 전쟁터는 고대인의 또 다른 삶의 현장이었던 것이다.

고조선과 삼국시대를 거치면서 전쟁목적이 약탈에서 영토확장으로 바뀌면서 전쟁은 더욱 치열해졌다. 농업이 발전하면서 농지를 확대하고, 농업생산력을 증대할 수 있는 인간의 노동력을 확보하는 것이 국가의 안정적인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바탕이었기 때문이었다.

고구려, 백제, 신라는 영토확장의 승리자로서 수많은 여러나라를 병합하여 만주와 한반도 일대를 나누어 가졌던 것이다.

포상팔국은 삼한시기에 변한지역에서 자리잡고 있었으며, 바닷가와 접해 있었던 여덟 개의 나라였다. 확인이 가능한 나라는 다섯인데 지금의 위치로 비정이 가능한 것이 창원의 골포국을 비롯하여, 사천의 사물국, 고성의 고사포국, 칠원의 칠포국이다. 이외에 보라국이 있지만 지금의 위치는 알 수 없다.

나머지는 알 수 없지만, 유적이나 유물의 분포로 보아서 진해의 웅천, 마산의 진동 일대, 삼천포, 거제 등지에는 정치집단이 형성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이들 지역이 포상팔국에 포함된 나라였을 가능성이 높다.

포상팔국전쟁은 왜 일어났을까?

포상팔국전쟁에 대해서는 가야와 관계되는 어떤 사건보다도 비교적 상세하게 『삼국사기』,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다.

포상팔국은 가라 또는 아라와 갈화성을 공략하였다. 전쟁의 원인은 포상팔국이 당시 해상교역권을 장악하고 있는 김해지역을 대상으로 교역권을 뺏으려했던 전쟁이라는 입장과 해안가에 위치해 있던 포상팔국이 안정적인 발전의 기반인 농경지 확보를 위하여 내륙지역으로 진출하려고 함안지역과 전쟁을 벌였다는 입장이 있다.

포상팔국이 바닷가에 자리잡았기 때문에 바닷길을 따라 선진 문화를 받아 들일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갖추었지만, 이러한 자연환경이 바다로부터의 외부세력의 침입에 대비할 수 밖에 없는 불리한 조건이 되기도 하였다.

또한 당시의 선진문화의 수입은 대부분이 지배층의 권위를 강조하는 물품이 대부분을 차지했기 때문에 피지배층의 삶을 보장해 주지는 못하였다. 일반민들의 삶이 보장되지 못하고서는 나라의 안정적인 발전은 기대하기 어렵다. 나라의 지배층들이 그들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백성들이 안정적인 삶을 유지 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당시로써 백성들의 삶을 보장해주는 가장 중요한 산업은 농업이었다. 천재지변이 없는 한 농사를 지음으로써 그 땅이 붙박혀 생계를 유지할 수 있으며, 그들의 생산물은 나라에 세금으로 바쳐지고, 그들의 노동력 또한 나라 발전의 기반시설이 되는 도로건설, 성곽축조 등에 활용될 수 있으며, 군사력이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조건이 나라를 안정적으로 발전시키고, 지배층은 그들의 지위를 계속적으로 확대할 수 있다.

함안지역과 울산지역은 내륙으로 진출할 수 있는 중요한 지역이었다. 함안지역으로의 진출은 함안의 북쪽에 있는 의령, 진주, 고령, 산청, 합천, 거창 등지로 뻗어갈 수 있으며, 울산은 넒은 뜰을 가진 경주로의 진출이 가능한 관문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골포국을 비롯한 포상팔국은 전쟁에서 패배했다.

4세기 이후가 되면 가야의 여러나라들 중에서 급격하게 성장했던 함안의 안라국의 영역으로 편입되거나, 영향력 아래 놓이기도 하고, 또 다른 가야의 나라로 바뀌었다. 창원지역은 『일본서기』에 등장하는 가야의 탁순국이 되었던 것이다.

<함안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안라국 유물>

 남재우 / 창원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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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7.14 00:00

마산·창원 역사 읽기(8) - 창원 다호리에 있었던 '갈대밭 속의 나라'

2. 청동기 시대에서 10·18까지

2-1 창원 다호리에 있었던 「갈대밭 속의 나라」

 

연일 계속되는 고성과 난투장을 방불케 하는 몸싸움. 언제 그랬냐는 듯 품위와 위엄으로 재무장(?)하고 마치 일월의 야누스인 양, 두 얼굴로 웃고 화내고, 타협하고 뒤돌아 서고...........

누구의 일상일까? 아마도 현재만이 아닌 이러한 조직이 만들어진 이래 계속되어 온 평상의 모습은 아닐까. “정치집단” 혹은 “정치제”하고 명명되는 이러난 조직의 역할과 기능은 무엇일까? 왜, 그리고 어떻게 생겨났으며, 유지되어야 하는 것일까?

이러한 물음은 이들의 역할이 아주 긍정적으로 평가받거나, 혹은 그 존재 필요성에 의문이 제기 될 때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후자의 경우에 더욱 절실하게 대두될 수 있을 것이다.

흔히 원시 공동체사회라고 얘기하는 집단과 “정치집단”과는 어떤 차이가 있을까?

우선 가장 먼저 언급될수 있는 것이 그 사회 내에서의 계급의 유무이다. 즉, 한 사회 조직에서 지배하는 자와 지배받는 자가 뚜렷하게 구분될 수 있느냐를 규명해야 할 것이다.

이들을 판단하는 기준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문헌기록이 거의 없던 시기에 대해서는 그들이 남겨놓은 물질자료를 통해서 이루어 질 수밖에 없다.

물질자료는 무의식적으로 남겨지는 경우도 있지만 의도적으로 전래된 사례도 적지 않다.

즉, 어떤 집단이 한 지역에 살다가 이동하였거나 화재나 홍수 등의 자연재해나 외부침입등과 같은 불가피한 사정으로 더 이상 원래의 터전에 머물지 못하였을 때 그곳에 남겨진 흔적들이 전자에 해당될 것이다. 반면, 무덤이나 제단 등에 바쳐진 물건들은 후자의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물질자료는 생산물의 잉여가 가능해지면서 더욱 증가하였을 것이다. 특히, 타인에 대한 위협수단으로서의 도구, 즉 무기의 본격적인 생산과 그 기능의 증대는 한 지역 내에서의 우월세력의 등장을 가능케 하는 데 큰 역할을 담담하였을 것이다.

우월세력들은 자신들의 권익과 더 많은 부의 추구를 위해 그 조직을 공고화시켰을 것이고, 그러한 모습의 일부가 발굴이라는 행위를 통하여 우리에게 알려지고 있는 유적과 유물인 것이다.

유적과 유물은 무덤이나, 사람들의 주거, 생산과 관련된 삶의 터전을 보여주며, 이들을 통하여 그들의 경제적 수준, 사회적 위치, 문화적 맥락이나 계통 등 삶의 상태를 추론하고 복원할 수 있다.

 

- 나라가 들어서다 -

마산과 창원지역에서 정치집단의 형성을 보여주는 유적은 어디에서 확인 될 수 있을까?

한두 사람의 힘으로는 세울 수 없었던 고인돌을 통하여 정치집단의 형성을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의 존재양태가 너무 개별적이어서 어떤 정치적인 목적이나 의식을 위한 본격적인 이익집단으로서의 기능을 수행하기에는 부족하기 때문에 정치집단의 모습을 추론하기는 쉽지 않다.

1988년 우연한 기회에 알려지게 된 주남저수지 인근의 창원시 동읍 다호리 무덤군(사적 327호)은 정치집단 형성의 모습을 보여주기에 충분하다.

다호리 유적을 통해서 우리는 무엇을 확인할 수 있을까? 남긴 이들은 누구이며, 어떠한 모습이었을까?

이러한 물음에 대한 해답을 찾기 위해서는 다호리유적에서 발견된 유구가 거의 무덤이기 때문에 무덤이라고 하는 매개물이 지니는 특징을 알아 볼 필요가 있다.

생전의 삶의 일부를 옮겨 놓기를 희망하던 고대인들의 습속으로 인해 그들의 마지막 안식처인 무덤을 통해 우리는 훌륭한 물증을 찾을 수 있다.

영생의 관념은 각 개인 무덤의 규모나 부장품들을 통해 생전과 같은 경제적, 사회적 우열의 차이를 보여주게 하였다.

무덤의 크기나 축조방법의 차이, 그 안에 매납된 유물의 질적,양적 차이는 거의 그대로 묻힌 사람들의 생전의 사회적, 경제적 위치를 반영하고 있다고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수많은 노동력과 물자가 동원되어야만 하는 거대한 구조에, 당시로서는 고도의 기술을 요구하는 축조방법, 그리고 휘황찬란한 고급의 부장유물들을 간직한 무덤들. 이에 반해 간단한 구조에 껴묻거리가 거의 없는 초라한 무덤들.

이러한 인위적 등급차를 지닌 무덤들은 같은 무덤구역 내에서 뒤섞여서 존재하기도 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같은 부류의 것들끼리만 무리 지어 분포하기도 한다.

같은 시기에 여러 등급의 무덤들이 존재하였던 사회라면 그 사회적 분화 정도가 상당히 고도화된 경우일 것이다. 반면, 단순히 상급과 하급 등으로 단순 분류될 수 있는 무덤들을 양산해 낸 사회라면 그 분화정도가 미약한 상태라고 판단할 수 있을 것이다.

마산.창원지역의 고인돌 자료를 통해서는 후자의 면이 강한 반면, 경주지역의 신라고분이나. 공주.부여지역의 백제고분을 비롯하여, 저 유명한 장군총을 간직하고 있는 집안지역의 고구려 고분들에서 전자의 모습을 유추해 내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

<창원 다호리 일대>

 

창원 다호리 유적 1호묘에서 1988년 출토된 통나무 목관. 20년간의 보존처리 및 복원과정을 마치고 2008년 11월 24일 공개됐다. 다호리 1호묘는 기원전 1세기 전후 한반도 남부 철기시대 생활상을 보여주는 고분으로 이 통나무 관은 국내에서 가장 오래된 목관이다. 참나무로 만든 관이 2000년 넘게 썩지 않은 것은 저습지 토양에 묻혀 있어 밀봉 상태를 유지했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7차에 걸쳐 조사된 다호리유적은 불과 너비 약 30〜40m, 길이 약 150m의 범위인데도 불구하고, 목관묘, 옹관묘 등 70여기의 무덤이 확인되었다.

상당부분 도굴과 경작 등으로 훼손되었으며, 또한 한정된 지역만이 정식조사가 진행되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원래의 모습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다양하였을 것이라고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 유적은 구룡산(433) 북서 줄기에서 이어지는 약 20m 정도의 야산에서 뻗어 내린 구릉지대로 조사 당시에는 논으로 경작되던 곳이었다.

입지조건과 발견된 유구의 모습에서 보듯이 이 곳은 인근에 있었을 정치집단의 공동무덤구역이며, 당시로서는 지배계층의 무덤들이 주로 조성된 구역 이였다.

아직까지 이들 무덤을 축조한 집단들의 생활근거지(주거지, 생산유적 등)와 또 다른 등급의 무덤유적을 찾지 못하여 당시 정치제의 명확한 모습을 복원할 수 없다는 것이 아쉽다고 하겠다.

그러나 앞서 말한 바와 같이, 무덤자료가 지니는 장점으로 인해 이들만으로도 상당히 많은 당시의 모습을 추론해 낼 수 있다.

이 곳에서 주로 확인된 목관묘는 우리나라 고대의 무덤양식 변천과정에서 본다면 고인돌이나 석관묘보다 조금 늦은 시기에 등장하여 다음 단계의 목곽묘로 이어지는 중간단계의 무덤형식이다.

이 곳에서 함께 출토되는 토기에서도 전시기의 무문토기와 그를 뒤이은 이른바 고식와질토기가 동시에 수습되고 있는 것은 이 유적을 남긴 집단의 발전 단계상의 위치를 짐작케 하는 자료이다.

특히, 통나무를 반쪽으로 쪼개어 만든 관의 형태는 이채롭다. 또 관 밑바닥 아래 중앙에 구덩이를 파고 그 안에 많은 유물을 넣은 대나무상자를 둔 것은 다른 곳에서는 찾기 힘든 예이다.

다호리유적에서 수습된 유물은 재질에 따라 칠기류, 목기류, 청동기류, 철기류 및 토기류 등 다양하다. 칠초동검을 비롯하여 동검, 철검 등 다양한 무기류와 철제의 따비, 철부 등의 농공구, 우리가 박물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훗날 가야 고배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칠기 제기, 그리고 붓 등의 존재는 이들이 상당한 문화적 수준에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조금 뒷 시기에 등장하는 목곽묘는 구조가 훨씬 복잡. 고도화되고 부장유물도 대량화되어 그 피장자가 상당한 세력을 지닌 대군장 또는 왕이라 할 만한 지배층으로 추정되고 있다.

그렇다면 다호리유적과 같이 보다 이른 시기의 목관묘를 조성하면서, 철기와 더불어 아직도 청동제품을 쓰던 사람들은 흔히 ‘소국’이라고 알려진 초기단계 정치제의 지배자들일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무덤구조와 그 부장유물들로 보아 이들 다호리유적의 피장자들이 활동한 시기를 주로 기원전 1세기에서 기원후 2세기까지로 파악하고 있다. 이는 이른바 남부지방에 존재한 ‘삼한시대’의 전반기에 해당한다. 

 

- 갈대밭 속의 나라, 그 모습은? - 

삼한시대의 전반기에 활동하였을 이들의 모습은 어떠하였을까? 유감스럽게도 우리에게 그 당시의 모습을 알려줄 수 있는 옛 기록이 없어 부득이 중국의 기록을 참고할 수밖에 없다.

중국의 역사서인 『삼국지』에는 지금의 경상도 일원지역에 변한.진한 24국이 존재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이 책에서 얘기하는 삼한사회의 모습은 대부분이 이 책이 편찬되었던 무렵의 상황, 즉 기원 후 3세기만 전후의 모습을 전하는 것이라 생각되고 있다.

따라서, 다호리유적의 중심시기보다는 다소 늦은 시기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삼국지』에서 전하는 사회단계보다 약간 덜 발달한 모습을 상정해 보면 다소나마 다호리유적 조성 당시의 모습을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삼국지』에서는 변한과 진한의 소국 안에는 여러 작은 별읍이 있어 그 우두머리를 거수라 했다. 그 중 세력이 큰 사람을 신지, 그 다음으로 험측, 번예, 살해, 그리고 읍차가 있었다고 한다.

큰 나라는 4,000〜5,000가, 작은 나라는 600〜700가였으며, 변한. 진한에 총 4〜5만가가 있었다고 한다. 변한만을 생각한다면 약 2만여가 정도였을 것이다.

고대의 인구변동은 그리 크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되어 아마도 전단계인 다호리유적 조성시에도 비슷한 인구였을 것이라고 추정된다.

그렇다면, 아마도 다호리에 있었던 정치집단의 규모는 위에서 얘기하는 작은 나라의 정도, 혹은 그보다 약간 작지 않았을까 한다. 왜냐하면, 위에서 말하는 3세기말의 변한의 정치집단은 주변 지역에 흩어져 있던 작은 정치체를 통합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그 안에 있다는 여러 작은 별읍들이 바로 전시기의 개별 정치집단이었을 것이라고 추정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가구를 5인기준으로 계산한다면, 작은 나라의 경우 약 3,000〜3,500명의 인구가 있었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러므로 다호리에 있었던 정치체는, 시기에 따라 변동이 있었겠지만, 대략 인구 3,000명 내외의 규모를 가지고 다호리를 중심지로 하여 인근을 지배하면서 존재하였다가 나중에 목곽묘를 주 묘제로 하는, 보다 큰 인근의 정치집단으로 발전하였거나, 혹은 그러한 집단에 통합되었다고 추정된다.

이 다호리의 정치집단은 그들이 남긴 유물들에서 살펴보건대, 당시 북쪽에 존재하였던 낙랑군 등 다른 나라와도 밀접한 관계를 지니고 있었을 것으로 쉽게 짐작할 수 있다.

특히, 중국의 화폐인 오수전이나 중국제 거울과 같은 유물의 존재는 이들이 중국문화와 밀접한 교류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거나 또 다른 연관관계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추정케 한다.

다호리 유적 1호분에서 출토된 중국 한나라시대 화폐 오수전. 오수전(五銖錢)은 동전의 앞면에 ‘오수(五銖)’라는 글자가 표기된 화폐이다. 수(銖)는 무게 단위이며, 1수(銖)의 무게는 약 0.65g으로 오수(五銖)는 3.25g이다. 오수전은 B.C. 118년 중국 한(漢) 무제(武帝) 원수(元狩) 5년에 주조되기 시작하여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와 수대(隋代)를 거쳐 621년 당(唐) 고조(高祖) 무덕(武德) 4년까지 널리 유통되었다. 오수전은 무늬의 위치에 따라 천상·천하·천방으로 분류되고, 무늬의 형태는 월아문·일성문·사결문 등으로 분류된다.

다호리 유적 1호분에서 출토된 중국 전한시대 청동거울인 성운문경. 중국 전한경(前漢鏡) 가운데 성운문경은 전한시대 중기를 대표하는 청동거울이다. 성운문경은 한국에서 평양 정백동 3호묘·토성동 4호묘, 창원 다호리 1호묘, 밀양 교동 3호묘, 경산 임당 E-58호묘 등에서 출토되었다. 거울 뒷면의 중앙에 연꽃봉오리 모양의 꼭지가 있고, 그 바깥으로 16개의 연호문(連弧文)이 시문되어 있다. 그 바깥의 주문양대에는 4개의 유(乳)가 배치되어 있으며, 그 사이에 원추형의 소형 유가 7개씩 서로 연결된 성운문이 시문되어 있다. 외곽 테두리 주연부는 16개의 연호문으로 장식되어 있다.

삼국지』의 기록처럼, 변한에서 철이 많이 생산되어 이것을 낙랑이나 왜 등지로 수출하였다고 한다. 또한, 이를 재료로 하여 만든 다량의 철기 유물, 그리고 그 원료인 철광석 등이 이 다호리유적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인근의 성산패총은 당시 이 지역에서 직접 철을 다루었던 것을 보여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다. 훗날 가야라는 대규모 정치집단의 형성은 바로 이러한 다호리 일대를 중심으로 하여 존재하였던 초기 정치집단들이 그 기반을 이루게 되었던 것이다.

지병목 / 당시 문화재청 학예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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