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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1.16 00:00

스페인 도시이야기 6. 똘레도, 500년전 중세도시 카톨릭수도

똘레도를 보기전에 스페인을 이야기 하지마라 : 전성기의 스페인, 컬럼버스의 신대륙 발견과 함께 남미정벌에 가장 열을 올렸던 스페인은 신대륙에서 광산이 개발된 후 17세기까지를 가장 전성기로 보고있습니다. 그래서 축구에서 스페인 축구를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단어로 '무적함대'라는 사용하는 것도 이 시기 스페인의 왕성했음을 비유적으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시기에, 가장 잘 나가던 시절의 수도였던 '똘레도'가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채 관광객을 불러모으고 있습니다. 위치상으로는 스페인 대륙의 정 중앙부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현재의수도인 마드리드에서 남서쪽으로 약 70키로키터 정도 떨어진 도시입니다. 마드리드로 수도를 옮긴것이 1560년도 이니까 지금으로 부터 450년보다 훨씬 이전의 도시형태가 고스란히 남아있다니 상상이 되십니까?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500년 전으로 돌아간 느낌 들 정도입니다. 그래서 일찌기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기도 하였답니다.  (구도시 전경 : 중세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있다.)

- 중앙부에 대성당이, 오른편에 성채, 그리고 중세 주택들이 즐비한 경관

- 똘레도의 역사 : 스페인에서 똘레도는 카스티야 라만차지역이며, 중부내륙의 중심지에 해당된다. 도시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기원전 2세기에서 부터 비롯된다. 로마제국이 라만차지방을 점령하였을 때 현지인의 저항이 얼마나 세었는지, 로마의 정복자들은 이 저항의 중심지를 '참고 견디고 항복하지 않는다'는 뜻의 톨레라룸(Toerarum)이라 불렀다. 지금의 톨레도(Toledo)는 여기에서 나온 말이다. 5세기경 서고트족이 똘레도를 수도로 하는 서고트 왕국을 세웠으며, 톨레도는 자연스럽게 이베리아 반도의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분야의 중심지가 되었다. 종교적인 면에서도 톨레도 대주교가 이베리아반도를 대표하는 카톨릭의 본부이기도 하다. 톨레도 대주교가 이베리아 반도를 대표하는 교회의 수장으로 간주되고있다. 그러나 711년, 이슬람 교도들이 서고트왕국을 멸망시키고 톨레도의 새 지배자가 되면서 이슬람 세력이 물러나는 1492년까지 국토회복 운동의 거점이 되었다. 1085년 국토회복운동과정에 카스티야 왕국의 알폰소 6세때에 똘레도를 다시 탈환하였다. 카톨릭 교도들에 의해 탈환되었지만 13세기 까지 톨레도는 스페인에 살던 유대인의 문화를 꽃피운 곳으로도 유명하다. 유대교회당을 서양의 예루살렘으로 부를 정도로 스페인 사람들의 포용성이 발현된 곳이다. 이처럼 똘레도는 현재에도 이슬람문화 뿐만 아니라, 기톨릭 문화와 유대 문화의 모습이 함께 존재하는 도서 문화의 보고로 남아있다. 중세스페인의 수도였던 똘레도는 1850년 펠리세2세 때 수도를 마드리드로 옮기기까지 스페인 역사를 압축시켜 보여주는 '역사의 나이테'같은 곳이다.

 - 도시정경 : 하회마을 처럼 성곽 외부에 해자기능을 가진 타오강이 흐르고, 중심부에 성당, 오른편 중정형 건물이 알카사르(Alcazar)라는 왕궁이 있다. 주택을 비롯한 대부분의 건물이 중정을 가지고 있는 것이 중세건축의 특징이다.

- 강 외곽에서본 주요 건물 마을의 전경

* 알카사르(Alcazar): 도시에서 가장 높은 세르반테스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궁전으로 원래는 이슬람교도의 요새를 개축하여 카를로스 5세가 궁전으로 리모델링하여 사용한 건물이다.

* 대성당 : 원래 이슬람 사원이 있던 자리에 이슬람세력을 물리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지어진 성당이다. 1226년에 건축을 시작하여1493년에 완성된 성당으로 톨레도의 상징이랄 수 있습니다. )는 도시에서 가장 높은 세르반테스 언덕에 자리잡고 있는 궁전으로 원래는 이슬람교도의 요새를 개축하여 카를로스 5세가 궁전으로 리모델링하여 사용한 건물이다.

* Seminario de Toledo(신학교,수도원) : 타오강을 마주하고 있는 수도원으로 도시 경관을 형성하는 주요건물 중의 하나이다.

* 도심지 부분전경 : 도로선형과 대지가 부정형 임에도 불구하고 자연스럽게 조화를 이루고 있다. 이러한 이미지는 지붕의 형태 및 재료에 의해 형성되는 것 같다.

* 경사면의 주택가 전경 : 남측 완경사면에면한 주택들의 아기자기한 모습

- 알칸타라 다리 :  톨레도를 U자형으로 감싸고 있는 타오강에 놓인 다리중에 가장 오래된 다리이다. 중앙의 반원형 아치가 인상적이며, 다리 좌우에는 출입을 통제하기 위한 게이트가 설치되어 있다.

* 성채 외곽 : 다리를 지나서 또 다시 맞이하는 성곽, 외곽에서 주차를 하고 성곽으로 오르게 되어있다.

* 성곽을 향하는 에스카레이터 : 단시간에 많은 이동량이 요구되었던 것 같다.

경사면 사이로 도시를 전망할 수 있다.

외부노출형태이지만 주변지형을 고려한 듯

- 골목 및 가로풍경(골목이 좁은 것은 중세도시의 공통점)

(벽면에 세월의 흔적이 박혀있는 박혀 있는것 같다.)

(그나마 넓은 포장길 : 견치석과 강자갈의 조화)

- 대성당 건물(중세성당 대부분이 대칭형태인것에반해 비대칭 형태를 이루고 있다.)

(중앙문은 용서의문, 오른쪽은 심판의 문, 왼쪽은 지옥의 문)

(우측면의 조적벽은 후대에 덧되어진듯하다.)

(종탑은 하단부는 벽돌을 상층부는 화강석을 사용하였다.)

- 실내 전경(내부의 크기는 길이 120미터에 폭 60미터에 이른다. 중앙천정높이만 해도 33미터에 이른다고 한다.)

(금은세공에 의한 성물 : 당시 톨레도는 도검제작술이 발달하였다고 한다. )

(독특한 표정의 성모마리아: 약간 섹시한 표정의^^)

(당시 수석주교좌성당의 위용 : 의자의 목각장식이 의자마다 다른 디자인으로 마감되어있다.)

- 500년 된 도시의 흔적들(자세히 살펴보면 벽에 금이 간 모습이 너무도 당연하게 보이기도 하다.)

(오백년 세월동안 여러 장인들의 손길과 숨결이 베어있는 외벽)

(독특한 디자인의 방법망과 창호, 그리고 외벽디테일)

- 중세도시에서 현대도시가 나아갈 방향을 배우다! : 개발이 난무한 현대도시들은 인간이 살기 좋은 도시가 아니라 자본의 논리에 의한 투자의 대상으로 개발되기 쉽상이다.  결과로 일부사람들은 투자의 이익을 맛볼수 있겠지만, 그러하지 못한사람들이 대부분인 어디론가 가야하는 실정이다. 현대도시들은 더 이상 사람을 위한 터전이 아니라 자본이 활개치는 황량한 도시로 변모해 가고있는 것 같다. 오백년 전의 도시를 돌아보면서 오늘의 도시와 비교했을 때, 세월의 손때가 묻은 오랜도시가 더욱 살만한 매력이 있다고 느끼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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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0.06 00:00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양동마을'을 찾아서

여름의 끝자락인 9월 초에 경남건축가협회 회원들과 경북에 있는 양동마을에 다녀왔습니다.
양동마을은 건축을 하는 사람들은 꼭 한번씩 답사를 하는 필수코스일 정도로, 고건축과 전통마을의 원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마을로서, 학창시절 한번 다녀온 적이 있는 마을인데,
금년 8월에 유네스코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확인하고자,
경남과학기술대의 김화봉교수의 인솔하에 반가운 마음으로 마을을 방문하였습니다.

< 양동마을의 내력 >
- 양동마을은 마을 전체가 국가지정문화재로 1984년 지정된 마을로서, 약 500년간 마을의 원형을 잘보존하고 있는 전통마을이다.
- 양동마을은 경주 손씨와 여강 이씨가 처가와 결혼한 뒤 정착한 처가입향의 사례로 유명한 마을이다.
손중돈(1463-1529). 이언적(1491-1553)선생을 배출하며, 손씨와 이씨 두 씨족에 의해 오늘과 같은 씨족 마을이 형성되었다.
: 이언적 선생은 당시 유학자로서 동방오현중의 한 사람일 정도로 유명한 학자였다고 한다.
- 이언적 선생은 어려서 외가인 월성 손씨가 있는 양동마을에서 교육을 받아 큰 인물이 됨에 따라 명문가로서 500년간 그 원형을 잘 유지해온 이유중 하나인 것 같았다.

(마을전경: 사진출전은 양동마을 홈페이지http://yangdong.invil.org/)


< 마을의 구성 > 


- 마을 전경에서 보듯이 집들이 골자기에 면한 여러 언덕면에 지어져있다.
- 마을 위치별 골짜기 이름이 내곡(內谷), 물봉골(勿峰谷), 거림(居林), 하촌(下村)으로 되어있고, 가장 낮은 면은 논과 습지로 조성되어있다.
- 이런 골짜기와 능선마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을 포함하여 500여년이 넘는  54호의 한옥과 110여호의 초가가 둘러싸고 전통의 향기를 품은 우거진 숲과 함께 펼쳐져 있는 큰 마을이다.
- 마을의 진입로 쪽은 경사가 급한 산에 시선이 차단되고, 골짜기 밖에서는 마을의 모습이 드러나지 않아 마을 입구에서는 그 규모를 짐작하기가 어렵운 조건들이 여러번의 전란에도 온전하게 마을의 모습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인 것 같다.
- 마을 중앙부분에 해당하는 논이 있던 자리에 교회가 있었으나, 다행이 협의가 잘 이루어져 남측면에 초등학교 자리 옆에 이전하여서, 현재 중앙부는 논과 습지로 개방된 공간을 남아있다.
- 중요 건물로 무첨당(보물 411호), 향단(보물 412호), 관가정(보물 442호)등 각종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다.

(교회는 민속마을의 정서를 감안하여, 노출을 원하기 보다는 자연의 일부처럼 숲속에 거대한 암반처럼 웅크리고 있는 모습이다.)

* 이교회의 설계자는 건축가 김헌이다.
- 평면구조는 중정을 통해 사택과 교회당으로 구성되어있었다.
- 아쉽게도 무분별하게 증축이 되어서 설계자의 원래 의도와는 달리 변형되어있었다.

(마을 중앙에 조성된 습지 뒤로 드문 드문 보이는 한옥들)



● 유네스코는 인류의 소중한 문화 및 자연유산을 보호하기 위해 1978년 만들어진 기관이다. 
* 목적 :  자연재해나 전쟁 등으로 파괴의 위험에 처한 유산의 복구 및 보호활동 등을 통하여 보편적 인류 유산의 파괴를 근본적으로 방지하고, 문화유산 및 자연유산의 보호를 위한 국제적 협력 및 각 나라별 유산 보호활동을 고무하기 위함.
* 문화유산의 구분 : 『세계유산협약』에 따라 세계유산위원회가 인류전체를 위해 보호되어야 할 현저한 보편적 가치가 있다고 인정하여 UNESCO 세계유산일람표에 등재한 문화재로 문화유산, 자연유산, 복합유산으로 분류한다.
(문화유산)
- 유적
: 역사와 예술, 과학적인 관점에서 세계적인 가치를 지닌 비명(碑銘), 동굴생활의 흔적, 고고학적 특징을 지닌 건축물, 조각, 그림이나 이들의 복합물
건축물 : 건축술이나 그 동질성, 주변경관으로 역사, 과학, 예술적 관점에서 세계적 가치를 지닌 독립적 건물이나 연속된 건물
장소 : 인간 작업의 소산물이나 인간과 자연의 공동 노력의 소산물, 역사적, 심미적, 민족학적, 인류학적 관점에서 세계적 가치를 지닌 고고학적 장소를 포함한 지역
(자연유산)
- 무기적 또는 생물학적 생성물로 이루어진 자연의 형태이거나 그러한 생성물의 일군으로 이루어진 미적 또는 과학적 관점에서 탁월한 가치를 지닌 것
- 과학적 보존의 관점에서 탁월한 세계적 가치를 지닌 지질학적, 지문학(地文學) 생성물과 멸종위기에 처한 동식물의 서식지
- 과학, 보존 또는 자연미의 관점에서 탁월한 세계적 가치를 지닌 지점이나 구체적으로 지어진 자연지역
(복합유산)
-  문화유산과 자연유산의 특징을 동시에 충족하는 유산 
* 안동 하회마을과 경주 양동마을의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는 한국의 역사마을이 세계유산적 가치를 인정받았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 보물로 지정된 한옥건축들>
1) 향단 (香壇)

(건물전경 : 박공면(삼각형 부분)이 지붕면에 즐비하여 동적인 이미지를 보여준다.)


마을에서 가장 눈에 띄는 건물이다. 회재 선생이 경상감사로 재직시 지어진 살림집이다.
- 집의 구성이 파격적이다. 행랑채인 -자형 건물과 본채건물은 日자형 건물이 경사지에 붙어있는 형태이다.

(평면은 전면 ㅡ자형 행랑채와 후면에 日자형태가 눕혀져 있는 구조이다.)

: 집의 형태가 복잡한 이유는 단면에서 처럼 여러 칸이 각각 지면에 따라 놓여져서 낳은 결과이다.
단순한 결과가 아니라 각 실의 서열에 따른 위계를 고려한 고도의 전략에 의해 만들어진 결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 가장 낮은곳은 행랑채로 마굿간과 곳간 하인방이 있으며, 다음은 대청마루, 안방, 사랑방 순으로 배열되어있다.
- 외관은 맞배기와지붕(人자형)이 여러겹 중첩되면서 생기는 처마의 구성미가 마을에서 가장 주목을 받고있다.

2) 관가정 (觀稼亭)
- 마을 초입부 언덕에 지어진 주택으로 우재 손종돈선생의 종가집이다.
- 주택임에도 불구하고 전면에 누각이 설치되어서 정(亭)이라는 이름이 붙은것 같다.

(외관 전경/ 사진출전 : 최선호(崔善鎬) www.choisunho.com)

(마을 전경을 바라볼 수 있는 누각)

(대청마루에서 대문을 바라본 모습: 대청과 상부 서까레가 액자처럼 한옥을 전경을 담아내고 있다.)

(평면에서 마루가 차지하는 비중은 절반가량된다. : 즉 자연환경을 조망하기 위한 중성적인 공간이 한옥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단면에서 건물의 위계를 높이차를 통해 표현하였다.)

- 건물의 평면은 ㅁ자형 배치에 전면 양측에 누마루와 방이 2칸씩 돌출된 구조이다.
- 출입구진입시 대청마루를 통해 좌우측으로 기능이 구분된 구조이다.
- 좌측은 남성의 공간으로 사랑방, 누마루, 건넌방으로 이루어져 있고, 우측은 여성의 공간으로 안방, 작은대청, 부엌, 행랑방으로 연결되는 구조이다.
- 단면에서 특기할 것은 대청마루의 후면 들어열개 문을 펼치면 앞뒤가 시원하게 관통되는 구조이다.
: 중정의 환기를 위한 바람길을 조성하고, 뒷마당의 자연풍경을 조망할 수 있는 구조이다.
: 기능적으로, 풍경을 즐기기 위한 조망창을 통해 내외부가 상호 연결되는 전통 한옥만의 장점이다. 

< 양동마을이 왜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을까?>
1. 한국의 유교정신을 잘 표현하고 있기 때문이다.
 : 이번에 문화유산 인근의 옥산서원과 함께 등재하게 되었다. 회재 선생의 서원과 성장한 마을을 동시에 문화유산으로 인정함으로써 유교정신을 나타내는 건축물과 마을의 상징성을 인정한 것으로 생각된다.
2. 전통사상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외형적인 고택들만 전시되어있다면, 용인 민속촌과 다를바가 없을 것이다.
: 주택내 사당에 아직도 제사를 모시면서 선조들의 정신을 이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3. 전통적인 형태를 잘 보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 아직 까지 후손들이 살고 있다. 종가집의 장자가 종택을 지켜야 하는 의무가 아직도 존재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아직도 전체 가옥의 약 30%이상이 아직 손씨와 이씨 후손들이 살고 있다고 한다.

<< 양동마을이 시사하는 것들>>
- 도시화율이 90%에 육박하는 우리나라의 현실에서 이러한 마을에서 사는 사람들의 사고는 정말 존경할 만하다.  도시에 비해 불편한 생활을 감당해서가 아니라, 전통사상을 계승하면서 사는 모습이 존경의 대상이다.
- 그래서 
한옥 구조의 생활양식은 바쁘게 생활하는 현대인이 원하는 웰빙의 전형이 될것 같다.
- 전통이 관광자원이 되는 세상이다. 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서 관광객의 숫자가 기하학적으로 늘어날 것을 예상하고 있다.(현재 체험농촌마을로 지정되어 민박시설이 잘되어 있다.)

'시원한 가을밤,
양동마을 평상에 앉아서
막걸리 한사발하면서
시간여행을 즐겨보시기를 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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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16 09:35

도강언(都江堰)에 올라 이빙(李冰)을 흠모하다


중국 사천성 일대를 여행하였다.
십 수차례 드나든 중국이지만, 보면 볼수록 놀라운 것은 수천수만 겹 녹아있는 역사의 층위다. 대륙은 깊고 넓었으며 언제나 새로운 것을 보여 주었다.

지구상에 유수한 역사를 가진 나라와 민족이 많지만 중국만큼 볼거리가 많은 나라도 없다. 기기형형한 자연은 물론이고 추측하기 조차 힘든 거석과 미금의 조형품에 이르기까지.
하지만 천하제일이라는 만리장성도, 인간의 상상력을 뛰어 넘었다는 병마용도, 사천성 여행의 도강언처럼 가슴 요동치는 감동을 내게 주지는 못했다.

근대의 힘으로도 상상하기 어려운 위대한 수리시설 도강언이 역사에 그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은 기원전 250년대이다.
지금으로부터 2천수백 년 전,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기 수십 년 전의 일이다.

황무지였던 성도평원을 일거에 옥토로 만든 이 수리시설은 진(秦)나라의 지방 관료에 불과했던 촉군 태수 이빙(李冰)에 의해 건설되었다.

도강언은 사천성 서북 고산지에서 발원하여 양자강 상류로 흐르는 민강의 물을 농업용수로 이용하기 위한 수리시설이다.
사천을 일러 흔히 천부지국(天府之國)이라 부르지만 도강언이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그런 말이 사용되지 않았다.

사천지방은 서북이 높고 동남이 낮은 지리적 조건을 가지고 있다. 고산지대에서 시작되는 민강은 심산협곡을 지나면서 점차 수량이 증가해 사천의 성도분지에 이르러서는 물결이 세지면서 강의 규모도 커진다.
포악해진 강물은 낮고 약한 제방을 무너뜨렸고 범람한 물은 성도 평원을 불모의 땅으로 만들었다. 상류로부터 내려 온 흙과 모래가 강 곬을 높인 탓에 강물이 제방을 넘었던 것이다.

아직 미개했던 백성들은, 민강에 탐욕스럽고 독한 용이 살고 있어서 수마가 생긴다고 믿었다.
하여 독룡의 마음을 풀기 위해 매년 몸에 상처 나지 않은 깨끗한 처녀 둘을 산채로 물속에 떠밀어 희생시켰다.
사천 백성들에게 민강의 홍수는 하늘이 내리는 재앙이었다.

                    <도강언으로 강물이 수백 갈래로 나누어지는 모습>

천형(天刑)처럼 피할 수 없던 자연의 섭리, 그 숙명 앞에, 민강의 물길을 조절하여 수해를 막아 성도평원을 옥토로 만들겠다고 태수 이빙이 나섰다.
백성들의 목숨과 재산을 송두리째 빼았던 거대한 폭류를 잘게잘게 갈래를 나눠 순하고 유익한 농업용수로 바꾸는 대(大) 토목공사.
이것이 역사적인 도강언 프로젝트의 시작이었다.

도강언의 시설은 분수제(分水堤)의 역할을 하는 어취(魚嘴)와 수량과 토사를 조절하는 비사언(飛沙堰), 암산을 뚫어 물길을 돌린 보병구(寶甁口)가 있다. 이 세 시설은 따로 있으나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취수와 배수, 토사배출 등 강물의 곡류현상과 침식, 운반, 퇴적의 원리를 고스란히 적용하였다.

물고기 주둥이를 닮은 어취에서 내강과 외강으로 나누어진 강물은 네 갈래 여덟 갈래 식으로 총 5백여 갈래의 인공 강으로 변했다. 물은 성도 대평원을 옥토로 관개하였으며 내륙수운용으로도 사용되었다.

도강언 주변 일대는 성도나 인근 지역 사람들이 쉴 수 있는 아름다운 공원이기도 했다. 울창한 숲 속에서는 특유의 목소리를 내는 사천 매미가 왕왕거리며 울어댔고, 서북쪽의 산록에서는 시원한 고원 바람이 강을 따라 내려왔다.
또한 경내에는 이 수리시설에 공을 세운 이빙에서부터 삼국시대 이곳을 지키기 위해 언졸(堰卒)을 두었던 제갈량을 비롯하여 현대의 인물, 예컨대 모택동, 등소평, 강택민 등도 자신의 자취를 남기고 있었다.
도강언은 단지 수리시설만이 아니라 고대부터 현대까지의 중국역사가 압축된 현장이었다.

한 공간 속에 자연과 역사와 과학이 공존한다는 점에서 도강언은 중화민족문화의 깊이는 물론, 인간과 자연이 조화롭게 공존해야 한다는 진리를 사실로서 증명해 주고 있었다.

이 수리시설은 2천 2백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사천백성의 풍부한 농작물 생산을 가능케 해주고 있다. 실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도강언 때문에 얻은 사천성 민초들의 물질적 이익은 말로 헤아리기 어렵다.
이곳 사천성을 이른바 천부지국(天府之國)으로 만든 것이다.

이빙이 관운장과 더불어 신앙의 대상으로 까지 추앙받는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처럼 전대미문의 대 수리시설을 설계 시공한 이빙은 누구인가?

그는 자신의 평생에 관한 어떤 자료도 남긴 바 없다. 단지 견고한 제방만 남겨두어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그의 삶을 추측케 할 뿐이다.
2천 수백 년이 지난 지금, 이 위대한 수리시설은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까지 지정되었지만 정작 이를 만든 이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별로 없다.

다만, 진(秦)이 촉(蜀)을 멸하여 이곳에 촉군(蜀郡)을 설치한지 60년 되던 해, 곧 기원전 256년 그가 촉군 태수로 임명되었으며 천문지리에 능하였고 실지 고찰을 중시하였다는 사실과 수맥에도 밝아 염정을 파서 촉군의 소금문제를 해결하였다는 정도가 알려져 있을 뿐이다.

저명한 중국의 역사학자 위치우위(余秋雨)는 중국역사상 가장 감동적인 건축물은 만리장성이 아니라 도강언이라고 했다.
도강언의 외관상 규모가 만리장성처럼 거대한 것은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에게 천년의 복락을 제공하고 있기 때문이다.
만리장성이 드넓은 공간을 차지했다고 말한다면 이곳은 아득한 시간을 차지했다고 말할 수 있다. 만리장성은 이미 그 사회적 기능을 상실한지 오래되었지만 이곳은 지금까지도 수많은 민중을 위해 맑은 물을 보내주고 있다.
이곳이 존재했기 때문에 가뭄과 장마가 끊일 새 없던 사천 평원은 천혜의 조건을 가진 땅이 될 수 있었다.

중국민족에게 극심한 재난이 닥쳐올 때마다 이곳은 안온하게 민족을 보호하고 포근하게 적셔주었다. 그렇기 때문에 전혀 과장됨이 없이 이곳은 영원히 중국 민족에게 생명의 물을 대어 주는 원천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곳이 존재했기 때문에 제갈량과 유비의 지략이 꽃필 수 있었고 이백과 두보의 시문이 존재할 수 있었다.
시기적으로 가깝게는 이곳으로 인해 중국이 항일전쟁의 와중에서도 안정된 후방을 지닐 수 있었다.

이곳의 물줄기는 만리장성같이 화려하지 않지만 촉촉이 대지를 적시고 살며시 땅 속으로 스며들어 끝없이 이어진다. 따라서 그 길이로 보면 결코 만리장성보다 짧다고 할 수 없을 만큼 이어진다.
만리장성의 문명이 딱딱하기 이를 데 없는 조소(彫塑)라고 한다면, 이곳 도강언의 문명은 살아 숨 쉬는 생활 그 자체이다.

만리장성은 마치 오래된 자격증을 내걸고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 듯한데, 이곳은 구석 한 모퉁이에 자리 잡아 마치 전혀 빛나지 않고 아무 것도 바라는 것이 없는 고향의 어머니처럼 그저 무엇인가를 베풀기만 할 뿐이다.
이곳이 바로 도강언이다.

자연의 법칙에 대한 해박한 지식, 물리적 원리를 응용하여 완벽한 수리시설을 만든 공학적 능력, 자연재난을 극복하기 위한 강인한 도전정신, 목민관으로서의 신념.

귀국한 후 한참까지 이빙은 내 주위를 서성거렸다.
새벽녘, 불모의 땅을 바라보며 한숨 토하는 이빙의 모습이 눈에 어른거렸다.
어느덧 그는 내게 큰 스승이 되어 있었다.

내 딴에는 눈 넓힌다고 이곳저곳을 다녀 보았지만 어떤 건축물 어떤 구조물에서도 이처럼 가슴 뛰는 경이로움을 맛보지는 못했다.
얼굴도 모르는 한 인간에게 이만한 찬사를 보낸 적은 더더욱 없었다.
소중한 경험이었다. 짧았지만 긴 여행이었다.

누가 내게 ‘한 인간의 열정이 역사에 얼마만큼 기여할 수 있는가’ 라고 묻는다면, 나는 서슴없이 답할 것이다.
‘도강언에 올라 이빙을 보라’

                                <첫 갈래의 시작점인 어취>
                      <도강언, 하나의 민강이 두 갈래로 나누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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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임종만 2010.02.18 20:43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설은 잘 쉬셨는지요.
    여러가지로 도움도 못드리고 심려만 끼쳐드려 지송합니다.
    참, 여행을 즐기시네요.
    좋은 결실 있길 바랍니다.

    • 허정도 2010.02.19 10:34 신고 address edit & del

      방문 감사합니다.
      설 잘 보냈습니까?
      경인년에는 좋은 일이 많이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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