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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5.16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8) - 강점 제1시기

오늘부터는 1911년부터 1920년까지 10년간을 다루겠습니다.
'일제강점 제1시기'로 분류되는 이 시기의 마산은 어떤 모습이었으며 어떤 변화를 겪었을까요?

<식민지.... 국토가 변하다>


1910년 8월 22일, 우리나라는 소위 「한국 병합에 관한 조약」에 강제 조인하고 일주일 후인 8월 29일 이를 전 세계에 알림으로써 일본의 식민통치를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조약은 “한국 황제폐하는 한국정부에 관한 일체의 통치권을 완전 또는 영구히 일본국 황제폐하에게 양여함····」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에 따라 ‘대한제국’이었던 우리나라의 이름은「한국의 국호를 앞으로는 조선으로 칭함」이라는 칙령 제318호에 의해 다시 ‘조선’이라 불렸고 통치권은 조선총독부가 가졌습니다.


                                                <일한병합 조약문>

이 조약문이 실효를 발한 1910년 8월 29일 일제는 '일한병합축가'와 '일한병합기념가'라는 노래가 실린 國民唱歌 日韓倂合(국민창가 일한병합)이라는 노래책을 인쇄해 나흘 후인 9월 2일 발행 보급하였습니다.

              <'국민창가 일한병합' 소책자와 책 안에 실린 '일한병합축가' 악보>

이처럼 이 땅을 식민지로 만든 일제는 합방하던 해인 1910년 식민학회(植民學會)를 만들고 대학에 식민정책강좌를 설치했습니다.
교과서 수준의 저작이 출판되고 전문적인 식민정책학자가 배출되는 등 식민정책학이 하나의 학문으로 자리 잡으면서 사회적으로도 인정을 받기 시작하였습니다.
한반도 지배의 당위성이 정립된 식민학은 학자는 물론 저널리스트․정치가․관료․실업가 등 사회지배계층을 필두로 널리 확산되었고 이에 동조하는 국내세력도 점차 늘어 본격적인 식민지 시대가 열려갔습니다.

한반도 식민통치를 원할히 하기 위한 기반구축도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이미 통감부 시대에 착수한 식민화 기초사업, 즉 식민지 지배의 기반구축사업을 본격 추진하였습니다.
토지조사사업을 비롯하여 교통․운수․통신 등의 사회기반시설 및 식민지적 재정․금융체계를 정비하였습니다.
산업에 대해서는 식량 및 원료공급을 위해 원시산업은 육성하고 공업에 대해서는 억제정책을 폈습니다.

한국 내 공업정책은 1910년 12월 조선총독부령으로 발표한 조선회사령에 집약되었습니다.
한국을 일본자본주의를 위한 원료생산지와 상품판매시장으로 육성한다는 의도로 조선총독부가 만든 이 법은 1910년 12월 공포하여 1911년 1월 1일부터 시행하였습니다.
분문 및 부칙 20개조로 되어 있는 조선회사령의 주요 내용은 한국에서의 회사설립 및 한국 외에 설립된 회사가 한국 내에 지점을 설치코자 할 때는 조선총독부의 허가를 받아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회사령에서 허가제를 채택한 표면상의 이유는 한국의 산업을 위한다는 것이었으나 그 본질은 식민지인 한국에 일본 국내공업과 경합되는 근대공업을 억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이 법령 때문에 1910년에서 1920년 사이 10년 동안은 공업발전의 지표로 삼을 수 있는 도시인구증가율이 연평균 1.6%로 총인구 증가율 2.6%보다 1% 정도 낮았습니다.

'지배는 길에서 시작된다'고 일제는 이 땅에 길부터 뚫었습니다.
우리나라의 자원과 농산물을 손쉽게 가져가고 그들의 상품을 반입하기 위한 목적이었고, 의병운동을 비롯한 항일투쟁을 진압하기 위한 정치군사적 목적도 있었던 긴요한 사업이었습니다. 대륙침략 의도도 숨겨져 있었습니다.

철도건설은 그들이 내심 한반도 식민지화를 결정했을 때부터 시작되었으니 병합 이전부터였고 적극적이었습니다.
경의선 일부를 1899년 최초로 개통한 이후 경부선(1905)․마산선(1905)․경의선과 경인선(1906)․평남선(1910)이 설치되었고, 병합 후인 강점 제1시기(1911-1920)에는 호남선(1914)․함경선(1914)․평양탄광선(1918)․박천선(1919) 등이 건설되었습니다.
그 결과 1919년 철도총연장이 무려 2,197㎞에 달했습니다.

철도 건설과정에서 조선인 소유의 사유지를 철도용지라는 명목으로 약탈하였고, 또한 철도건설공사에는 농민들을 무보수에 가까운 저임금으로 혹사시켰습니다.
일제 자신의 침략과 수탈목적으로 건설된 철도가 피해 당사자인 한국인의 토지와 노동력과 자금에 의해 건설되었던 것입니다.

철도부설과 함께 도로건설공사도 착수하였습니다.
도로 건설에 투입된 자금은 한국 민중의 혈세로 이루어진 총독부의 예산과 지방관청의 예산으로 충당하였고 도로에 사용된 토지(도로용지)는 무상으로 몰수하였습니다.
도로공사에는 민중의 부역노동이 투입되었는데 부역은 도로가 건설된 후에 까지 이어져 매년 봄가을에 도로수선공사의 명목으로 매 호당 수십 명의 부역노동이 부과되었습니다.
병합 전에 14개 노선 1,993㎞의 도로를 뚫었지만 합방 후 더욱 박차를 가하여 1911년에서 1917년까지 7년 동안 공사비 1천만 원을 투입하여 1․2등 도로 34개선, 총 연장 2,600㎞의 도로를 추가 건설하였습니다.

도로 관리를 원할히 하기 위해 병합 직후인 1911년 4월 17일자로 조선총독부령 제51호로 ‘도로기본법’이라고 할 수 있는「도로규칙」을 발포․시행하였습니다.
이 「도로규칙」에서 전국의 모든 도로를 다음과 같이 1․2․3등과 등외의 4개 등급으로 구분하였습니다.

① 1등 도로
구간 :
㉮ 경성을 기점으로 각 도청소재지, 각 사단사령부․여단사령부․요새사령부 ․ 진수부(鎭守府)․요항부(要港部)소재지, 주요 개항장 또는 주요 정거장에 달하는 도로
㉯ 군사상 또는 경제상 특히 중요한 도로
규격 및 관리 :
폭 7m이상, 구배 30분의 1 이하, 곡선부 반경 15m 이상, 총독이 관리함

② 2등 도로
구간 : 
㉮ 도청 상호간 및 도청과 관내 부․군청 소재지간
㉯ 도청 소재지에서 도내 중요지점, 항진(港津) 또는 철도정거장에 달하는 도로
㉰ 도내 또는 인접 도내의 중요지점 및 한진(港津)․정거장 상호를 연결하는 도로
규격 및 관리 :
폭 5.5m 이상, 구배 25분의 1 이하, 곡선부 반경 15m 이상, 총독이 관리함

③ 3등 도로
구간 :
㉮ 부․군․도(島)청 소재지 상호간을 경결하는 도로
㉯ 부․군․도(島)청과 관내 중요지점․항진(港津)․정거장을 연결하는 도로
㉰ 부․군․도(島)내 또는 인접 부․군․도(島)내의 중요지점, 항진(港津)․정거장을 연결
규격 및 관리 :
폭 4m 이상, 구배 20분의 1 이하, 곡선부 반경 11m 이상, 도지사가 관리함

④ 등외 도로 : 상기 이외의 것

이 ‘도로규칙’은 1938년 4월 4일자로 제령 제15호로 발포한 「조선도로령」에 의해 종전의 1․2등 도로를 ‘국도’, 3등 도로를 ‘지방도’, 시가지내 도로 및 등외 도로는 ‘부도(府道, 현 시도)’ 또는 ‘읍면도’로 구분 변경됩니다.
바로,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도로구분방법입니다.

                    <파란색에 숫자를 적어 놓은 도로가 국도표시입니다>

이와 같이 강점 제1시기(1911년-1920년)에 일제는 매년 총독부 예산 중 20-30%를 교통부문에 지속적으로 투입하였고, 그 결과 1919년에는 도로 및 철도의 연장거리가 1910년에 비해 각각 2.1배와 1.6배로 늘어났습니다.

일제는 철도와 도로의 육상교통 뿐만 아니라 해운 관리를 위해 항만을 축조하거나 개수하였고 세관 건립을 포함한 항만관련시설도 정비하였습니다.
이미 1906년에 마산을 비롯하여 부산․인천․성진 등 개항장의 항만과 세관의 설비공사를 시작하여 병합 후에도 계속되었고 이 밖의 여러 항구의 항만시설을 정비하였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1910년부터 1918년까지 8년이라는 장구한 세월과 막대한 경비를 들여「토지조사사업」도 실시합니다.
토지조사사업은 식민지의 재편성을 위한 기초 작업이었습니다.
사업의 내용은 토지소유권조사와 토지가격 및 지형조사를 통해 전국토의 지적도를 작성하고 등기제도를 정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미 점진적으로 성장하고 있던 토지사유권을 법적으로 인정한다는 것이지만, 시행 과정에서 엄청난 토지가 저들의 손으로 들어갔습니다.

이처럼 병합 후의 국토변화는 전국에 걸쳐 일어났습니다.
이 변화는 일본의 상품 및 자본의 수출과 원료의 확보를 위한 이른바 시장조건의 정비인 동시에 그 자체가 자본의 본원적 축적과정이기도 했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일한병합 직후인 1911년부터 1920년까지를 「일제 강점 제1시기」 혹은 「식민 지배를 위한 기반구축기」로 보는 것입니다.

이 시기 마산의 도시이야기는 다음 포스팅부터 시작됩니다.<<<




2010/10/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6) - 개항이후
2010/10/1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7) - 개항이후
2010/10/1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8) - 개항이후
2010/10/2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9) - 개항이후
2010/11/0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0) - 개항이후
2010/11/0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1) - 개항이후
2010/11/1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2) - 개항이후
2010/11/2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3) - 개항이후
2010/11/2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4) - 개항이후
2010/12/0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5) - 개항이후
2010/12/1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6) - 개항이후
2010/12/2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7) - 개항이후
2010/12/2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8) - 개항이후
2011/01/0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9) - 개항이후
2011/01/1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0) - 개항이후
2011/01/1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1) - 개항이후
2011/01/2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2) - 개항이후
2011/01/3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3) - 개항이후
2011/02/0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4) - 개항이후
2011/02/1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5) - 개항이후
2011/02/2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6) - 개항이후
2011/02/2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7) - 개항이후
2011/03/0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8) - 개항이후
2011/03/1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9) - 개항이후
2011/03/2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0) - 개항이후
2011/03/2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1) - 개항이후
2011/04/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2) - 개항이후
2011/04/1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3) - 개항이후
2011/04/1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4) - 개항이후
2011/04/2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5) - 개항이후
2011/05/0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6) - 개항이후
2011/05/0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7)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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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15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2) - 개항이후

<마산 최초의 근대 건축>

개항 당시 각국거류지에는 러·일 영사관 건물 외에 러시아와 일본 민간인의 건물 몇 채만 있었을 뿐, 일본인 대부분은 한인거주지인 마산포에 살고 있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1899년에 건축한 러시아 영사관 건물입니다.
마산이사청과 함께 지은 마산 최초의 2층 건물로 조계지 언덕에 걸터 앉은 모습이 위용 당당합니다. 경남대 평생교육원(구 창원군청) 옆에 있었습니다.


 

조계지 내에서 경제활동을 했던 러시아인들은 조계지내의 대지주이면서 무역업과 러시아군함에 대한 잡화용달업을 하였습니다. 그들은 함석이나 기와로 된 주택을 직접 지어 살았습니다.
1900년 연말 현재 조계지 내 러시아인 건물은 모두 6동이었으며 그 중 한 채는 건평 80평으로 호텔업을 목적으로 건축 중이었는데 조계지에서 가장 규모가 컸고 위치는 조계지 남단 해변의 전망 좋은 곳이었다고 합니다. 현 경남대학교 정문 앞 광장 부근으로 추정됩니다.

경술국치 전인 이 시기에 식민 지배를 위한 법원 등 관아와 교육시설․금융시설을 비롯하여 요정․상점 등의 상업용 시설들이 일본에 의해 들어섰으며 이 외에 서양선교사들에 의해서 종교시설과 교육시설들도 지어졌습니다.
건물의 양식은 대부분 의양풍(서양식과 유사한 형식) 혹은 일본식의 단층 건물이었습니다.
 
다음 사진은 대표적인 관아건물로 1908년에 지어 마산이사청으로 사용됩니다. 목조2층으로 지금의 경남대학교 평생교육원(구 창원군청) 자리에 있었습니다.
1899년 지은 일본영사관 건물을 헐고 지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1910년 건축한 부산법원 마산출장소 건물입니다.
목조2층 양식으로 마산시청 앞에 있는 현 마산법원 자리에 있었습니다.


다음은 개항기(1899년-1910년) 마산의 근대건축을 정리한 것입니다. 한상술의 논문자료입니다.
 

 

No

건 물 명

현 위 치

건축연대

有無

구조 및 규모

양식

면적

비고

1

일본영사관

대내동

1899

목조2층

르네상스풍

 

1906년 마산이사청

2

러시아영사관

대내동

1899

목조2층

식민지양식

 

현 월포초등교 내

3

마산우편국

월남동4가

1902

목조1층

의양풍

42평

1930.2.24중앙동이전

4

마산포교회

성호동

1903

벽돌조1층

개량한식

 

문창교회전신

5

심상고등소학교

장군동3가

1904

목조1층

의양풍

384평

일본인학교, 후 이전

6

마산공립소학교

 

1904

 

 

 

1901開校,성호초등교

7

마산병원

중앙동철도용지

1905

목조1층

의양풍

75평

도립병원전신

8

마산 역사(驛舍)

중앙동철도용지

1905

목조1층

일식

 

 

9

제일은행출장소

월남동3가

1907

벽돌조1층

의양풍

 

 

10

서전(西田)주조장

홍문동

1907

 

 

112평

마산最古酒造場

11

마산이사청

대내동

1908

목조2층

의양풍

 

1914년 마산부청

12

망월루

두월동1가

1908

목조3층

일식

96평

여관, 요정

13

심상고등소학교

중앙동

1908

양풍 平家

 

612평

이전하여 신축

14

창신학교

상남동87번지

1909

목조1층

의양풍

56평

호주선교사(신교)

15

마산신사(神社)

문화동

1909

 

 

 

 

16

마산헌병분대

월남동3가

1909

 

 

 

현건물은1926년신축

17

육군중포병대대

월영동

1909

기와

 

 

여러 채가 있었음

18

환서좌(丸西座)

신마산

1909

목조2층

 

 

5-600명 수용

19

마산 세관

월남동4가

1910

목조1층

의양풍

 

 

20

지방법원마산지청

중앙동4가

1910

목조2층

양식

 

 

21

성지학교

완월동206번지

1910

벽돌조1층

양식

 

프랑스선교사(구교)

22

부산감옥마산분감

장군동

1910

 

 

 

 


여기서 소개한 건물들은 그 시기를 대표할만한 것들만 대상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이 외의 건물에 대한 자세한 사정은 알 수가 없습니다.
다만 이전 글에서 밝힌 대로 보험회사․목재상․정미소․양조장등의 공업시설과 마산청과물 시장 등의 유통시설, 여러 개의 유곽과 30여 개소의 여관이 있었다는 사실을 통해서 이 시기에 매우 다양한 시설물이 들어서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위 표의 세번 째에 적힌 마산우편국(1902) 사진입니다. 의양풍으로 목조1층이었습니다.


여관과 요정으로 사용되었던 망월루 사진입니다.
목조 3층 일본식 건물로 창원천변에 있었는데 사진을 보아 알 수 있는 것처럼 영업규모가 대단했다고 합니다. 



 

한편, 일제는 1906년부터 부산․인천․성진과 함께 마산에도 항만 및 세관 설비공사에 착수하였습니다.
1908년에서 1910년까지 신마산 세관에 종래의 부두연장 84.5m에 돌제(突堤)의 연장 10m를 보강해서 등대를 설치하고 계단이 딸린 목조잔교를 설치했습니다.
다음 사진이 그 때 설치한 마산세관의 목조잔교입니다.


 

세관 구내에 목조 단충의 파상형(波狀形) 철판지붕으로 된 50평 규모 창고 1동을 건설했으며, 세관 주위에 철책을 두르고 세관지서장 관사(목조 23여 평) 1동도 이 시기에 신축하였습니다.<<<

 


2010/10/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6) - 개항이후
2010/10/1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7) - 개항이후
2010/10/1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8) - 개항이후
2010/10/2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9) - 개항이후
2010/11/0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0) - 개항이후
2010/11/0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1)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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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16 13:42

옛 마산세관의 발자취를 따라서

옛 마산세관의 발자취를 따라서

사진과 지도를 통해서 무엇을 찾아낼 수 있을까?

유장근교수의 도시탐방대에서는 신마산의 조계지에 설치된 신작로를 따라서 유서 있는 건물들을 찾아보는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현재 건물이 사라졌다고 하더라도 당시의 건물사진과 지도를 통해서 시간속의 여행을 체험하는 색다른 의미가 있을것 같았다.

특히 조계지내에 설치된 세관은 개항과 함께 설치된 시설로서 그 위치가 변천하는 과정과  건축의 이력을  알아보는 것을 통해서, 땅에 숨겨진 이야기들을 들추어 보고자 한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조계지 지도 : 중앙하단부가 해관부지임(1907)

 

남성동 해관업무개시

해관은 110년 전 구한말인 1899년 5월 1일 마산항이 개항장으로 발족됨과 동시에 마산해관지서로로 창설되었다..
해관세무사는 조선말기 관세의 징수업무를 담당하기 위하여 개항장에 창설하였던 해관의 제반업무를 관정한 기관이다. 이후 해관이란 명칭은 1907.12.16부터 세관으로 개칭되었다.

마산해관지서가 처음으로 그 업무를 개시한 곳은 현재 남성동 제일은행 2층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당시 창원감리서가 있던 곳,조선식산은행(이후 제일은행, 1918)

 

마산항 개항에 앞서 1898년 5월에 외부대신 박제순을 통해 마산포 개항사실을 조선 주재 각국공사에게 통고하고 마산포에 있는 유정당에 창원감리서를 설치하였다.
  창원부윤 안길수가 개항을 위한 감리업무를 담당하였으며, 그 별방에 마산해관지서가 남성동에 설치되었던 것이다
.

창포동 세관 이야기

이후 조계지내 가로가 형성됨에 따라 창포동 2가-31에서 1901년부터 업무를 보다가 1910년에 마산세관지서 건물을 지어 1946년까지 업무를 본 곳이다.

현재 수협이 있는 자리이며, 접안시설로 목조 잔교가 설치된 위치는 현재 창포경남맨션과 한백아파트 사이 길에 해당되는 곳이다. 당시 조계지 지도를 보면 이 두아파트는 바닷가였던 것을 알 수 있다.

초기 해관이 있는 창포동은 조계지내에서 당시 영사관(현 경남대 평생교육원)에서 해안으로 향하는 길에 접하는 위치로 맞은편에 우체국(1902년 설립)과 함께 영사관과 업무연락의 편의성을 고려하여 입지를 고려한 것으로 판단된다. 

06년에 정부는세관의 해륙설비공사를 하기로 의결하고 08년에 추진하게 된다. 당시 공사예산액은 1만 천원으로 부두의 길이84.5M 돌제부 길이10M를 보완하여 등대를 설치하고 여기에 폭이 3.4M 길이9M의 목조잔교를 가설하고 해안의 세관구내를 간조면 위로 3.79M 와 5.76 높이로 땅을 정리하여  창고 1동을 세웠다. 해관 주위는 철조망을 두르고 세관지서장 관사 1동도 신축했다. 마산항 최초의 항만시설이 완성된 것이다.


목조 잔교가 있는 해안 구내의 좌측에 목조 단층건물로서 아연도칠을 한 골함석을 지붕의 50평규모의 창고 한동이 있으며, 건평23평의 2층 목조건물인 세관지서장 관사 1동이 사진 우측에 나타나고 있다. 부두에 전신주가 있는 것으로 보아 사진은 1911년 이후에 촬영한 듯 하다.            
(마산에는 한일와사전기회사에 의해 1911년에 시작됨)

사용자 삽입 이미지마산해관 목조잔교(1908-1910)

 

창포동에 소재했던 세관지서는 러시아식 단층 목조건물로서 외벽은 목제 비늘판벽으로 되어 있다. 정면은 포치(현관부분)를 두어서 박공부분을 강조하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부산해관 마산지서전경(1910)

 

현재의 건물은 영생아파트와 1층에 수협이 자리하고 있다.
당시 영사관에서 바로 보이는 교차로에 위치하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창포동 해관위치의 현모습

 

사용자 삽입 이미지해관에서 영사관(경남대 평생교육원)을 바라본 모습

당시 세관과 영사관은 상당히 힘있는 사람들이 지나치던 길이었을 것이다.
오늘도 수많은 사람이 이 거리를 지나건만 그 때의 이야기를 아는 사람들이 얼마나 될런지-----

월남동 부두국 이야기

 

세관은 1943.12.18 폐청되고 조선총독부 교통국 산하에 부두국 소속됨에 따라 월남동에 월남동 46-4번지에 소재하는 부두국을 설치하였다.
그런데 창포동 세관이 이 곳으로 이전한 기록이 없다.
세관은 폐쇄되어도 마산항을 출입하는 모든 외항선들은 입출항은 일본인 마산세관장의 출입을 받아야 했던 것으로 보아, 양측에서 업무를 나누어서 보았던 것으로 보인다.

월남동 부두국 건물은 목조2층 구조로, 외벽은 목제 비늘판벽으로 되어 있으며 90년대까지 사용되었으나 해안도로 확장으로 인하여 철거되었다.
 현재 타이어상점이 들어서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월남동 부두국, 1943

사용자 삽입 이미지부두국 위치의 현재의 모습

 

해안도로의 확장에 의해 필지가 짤려지고 일부에 건물이 남은 모습이다.
이마저도 주변 아파트 재개발계획에 포함되어 있어 땅의 흔적도 없어질 지경이다.

월남동 세관이야기

해방이후 1946.08.19 세관은 월남동2가 47번지(현재 마산식당)로 이전하였다. 여기로 세관을 옮긴 이유는 해방까지 해안의 매립에 부두가 현재의 해안도로변까지 확장됨에 따라 업무기능상 동선의 편의를 고려하여 옮긴 것으로 판단된다.
월남동 마산식당 청사는 해방후 마산교회로 사용하던 것을 미군정청과 마산세관이 임대차 계약을 체결하여 사용하였고 한다.
그리고 원래의 창포동 해관자리가 59년에 마산교회의 자리였다는 기록으로 보아 마산교회와 임대차 계약이후 창포동 건물과 교환하였을 가능성이 있을 것 같다.

그리고 마산식당의 건물은 다행히 당시의 구조가 원형을 잘 보존하고 있는 건물이다.
건물의 이력을 알아본 바 [근대문화유산 목록화사업] 경상남도, 2004에 의하면 건축물 관리대장상은 1939년 등재되어 있으나 건물은 1905년에 지어진 것을 추정하고 있다.
기록에 의하면 일본인 개인영업(1939년 기준)에서 이 건물은 일이삼식당이란 상호로 古本露라는 사람이 요리집을 경영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상공회의소 100년사)

사용자 삽입 이미지현재의 마산식당 모습

당시 두월동에 여관이 유명한 곳으로서 그 중 하나였을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 여관은 요리와 숙박을 같이하는 지금의 호텔같은 기능을 하였기에 지어질 당시는 세관과 같은 업무기능은 아니었지만, 부두가 있는 해안으로 접근하기 가장 좋은 위치에 있는 건물이었기 때문에 옮겨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건물은 원형이 잘보존 된 상태라서 누가 관심을 가지지 않으면 주변개발에 포함되어 곧 없어질 가능성이 크다.  안타까울 뿐이다.

 


월포동 세관이야기

55년 8월 현재의 세관자리로 이전하게 되었다. 당시 1부두, 2부두, 중앙부두가 확장된 상태이었으며, 현 청사 부지는 당시에 보세지역으로 1951년 3월 2일 고시되었으나, 보세구역 및 창고는 조국해방에 따른 귀환동포 임시거처로 사용되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임시세관으로 사용된 월포공립초등학교(1955)



 

당시 임시청사로 사용된 건물은 월포공립국민학교로 사용중이던 건물을 미군이 보급창으로 사용하기 위하여 1955년 4월 19일 징발한 것을 임시청사로 사용하게 되었다.
건물을 보수해 사용하다 57년 사라호 태풍으로 넘어지자 1958.4.1.에 붉은 벽돌의 2층 건물을 신축했다. 지금의 청사는 1995년 1월에 신축한 건물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58년 건축한 벽돌조 2층청사

 

사용자 삽입 이미지95년 신축한 현재의 마산세관

 

그나마 현재의 청사마저도 지방합동청사 추진계획에 의해 옮겨질 신세에 놓여 있다.

신포동 2만㎡ 부지 이달 입찰 공고·내년 6월 착공
2012년 완공…세관·검역소 등 6개 정부기관 입주
마산 서항 지구 해양신도시 조성 예정지에 산재해 있는 6개 정부 기관을 한 곳으로 이전시키기 위한 지방합동청사가 신포동 1가 78 일대 2만6155㎡에 2012년까지 들어선다. 마산시는 3일 국비 482억원을 투입해 건물 연면적 2만4600㎡ 규모의 지방합동청사를 내년 6월 착공, 오는 2012년 3월 준공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건물은 가만히 있으려 하나, 사람이 가만히 두지 않는 꼴이다.
 
건물과 땅의 흔적들을 생각하며

한 건축물의 110년간의 이동과정을 추적해 보았다.

사람과 같이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이동을 하게 되고 다양한 건물의 형식을 통해 변모하는 것을 보았다.
세관건물은 물리적인 위치의 변경을 가지게 된 특수한 경우이긴 하지만, 한 장소에서 지어지는 건물의 수많은 흔적들도 누군가는 정리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화산재에 묻혀있던 폼페이라는 도시를 우리가 볼 수 있었던 것은 18세기 독일의 요한 빙켈만 같은 고고학자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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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용팔 2009.11.16 08:49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시간이 지나고 그 발자취들이 희미해지는것을 보니 왠지 마음이 허 하네요.

    • 삼식이 2009.11.16 10:55 신고 address edit & del

      혹시 내 친구 용팔인지요?
      우리 지역에서 사라져간 것들을 하나씩 챙겨 놓으면, 다음에 허전함이 덜하겠지요!

  2. 2009.11.16 11:31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그날 따라 신종플루도 아닌 것이 몸살기운이 심해 참석하지 못했네요. 아쉽군요. 그래도 이렇게 전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삼식이 2009.11.16 11:55 신고 address edit & del

      몸관리 잘하시죠, 이번주는 이승기 선생을 섭외중입니다. 아마 창동, 오동동의 숨어있는 많은 이야기를 들을수 있을것 같습니다.
      저도 기대가 됩니다.

  3. 임민규 2009.11.23 18:32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좋은내용 감사합니다.퍼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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