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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4.30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7) - 강점제2시기

<목가전평삼랑(目加田平三郞)과 국종웅일(國宗雄一)의 월남동․창포동 매립>

신마산에 오래 동안 살아온 일본인 목재상 목가전평삼랑(目加田平三郞)과 국종웅일(國宗雄一) 두 명이 시행한 매립입니다.
공사는 우리나라 경부선 철도부설공사에 참여한 후 재계에 두각을 나타낸 서울의 토건업자 황정초태랑(荒井初太郞)에게 의뢰하였고,
1926년 해면 매축 사업에 착수하여 1928년 12월 21일에 준공하였습니다.

이 매립에 대해서는 정부기록보존소에서 찾은「공유수면관계서류」의 「문서번호87-193, 필름번호87-560」을 참고하였으며 서류에는 아래와 같은 도면이 첨부되어 있었습니다.

 
위치는 현재 경남은행 신마산지점 남쪽 건너편 일대입니다.
세분해보면 옛 마산도기 및 진일공업사 등이 있던 월남동 1가 5번지에서 46번지의 1에 이르는 4,663평을 비롯해서 전 유원연탄 및 그 주변일대와 전 항등여관 주변인 월남동 2가 13번지에서 2가 60번지까지의 3,425평 그리고 유원산업(당시 昭和酒類) 주변의 창포동 1가 3번지에서 1가 38번지까지의 2,433평 등 총 10,500평의 넓은 땅입니다.

북쪽으로는 철도공사 시 일본군이 매립한 토지의 경계로부터 남쪽으로는 개항 초기에 건설했던 세관 잔교까지에 이르는 방대한 매립이었습니다.

이 땅들은 당시 마산과 진주 간의 사설철도를 운영하던 조선철도회사․소화주류․각 기선회사․그 밖의 일본인들에게 분양되었습니다.

매립 후 해안선은 석축안벽으로 호안되었고 소화주류 앞에는 소규모의 선착장이 들어섰습니다.

서류에 나타나 있는 매립의 목적은 ‘시가지조성’이었으며 매립공사 준공 후 도로․구거․물양장․교량․호안석원(護岸石垣) 및 공유지 100평은 국가에 귀속하는 조건으로 실시되었습니다.

총 매립면적은 13,820여 평이었으며 위의 10,500평은 그 중 대지면적을 만한 것입니다.

이 매립공사는 1928년 2월 사석(捨石)공사가 종료되고 토석채취공사를 할 즈음 자금 조달이 어려워 이 공사의 시공자였던 황정초태랑(荒井初太郞)에게 매립면허권을 양도하였다가 매립 준공 직후 다시 목가전평삼랑(目加田平三郞) 개인에게 소유권을 이전하였습니다.

다음은 이 매립지의 위치를 나타낸 그림입니다. ❽번으로 표기한 곳이 이 매립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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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21 13:00

잊혀진 마산의 청주공장을 찾아서 (2)

잊혀진 마산의 청주공장을 찾아서 (2)

청주는 일제강점기때 지금의 양주못지 않은 고급술로서 주당들의 사랑을 받았던 술이다. 최근들어 젊은층에서 일본수입산 청주, 본토말로 사케를 즐기는 인구가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이런 시기에 마산이 청주 생산의 원조도시로서의 아픈(?) 역사를 찾아보고자 한다. 일제 강점시기에 마산은 청주주조장의 집산지에 해당되었다. 마산에 존재했던 청주공장들을 찾아서 정리하는데 목적이 있다. 

자료의 한계로 내용상 명료하지 않은 부문과 오역된 부분에 대한 지적과, 혹 관련자에 대한 제보를 주시면 내용을 보완해 정리할 계획이다. 블로거님들의 많은 관심을 바란다.

일제 강점기의 주세령
일본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가장 먼저 실시하였던 일이 토지조사와 주류조사였는데. 그 이유는 식민지 수탈을 위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1907년 이전 까지는 우리나라에서는 일곱 집에 한 집꼴로 술을 빚어 마셨다고 하며, 조선조에는 술에 대한 과세나 전매제도가 없었기 때문에 개인 집에서 다양한 술을 빚어 마시는 가양주문화가 그 특징이었다.

일제는 1907년 7월에 조선총독부령에 의한 주세령 공포로 제일 먼저 주세를 세금의 대상으로 삼았다. 주세령이 강제집행이 시작됨과 동시에 전통주는 맥이 끊어지기 시작했다. 1916년 1월에는 주류 단속이 강화되는 가운데 전통주류는 약주, 막걸리, 소주로 획일화시켜 우리의 전통 고급주를 사양시켰고, 1917년부터는 주류제조업체가 정비되면서 자가양조를 전면적으로 금지시켰다.

그러한 반면 일본의 청주는 마산에 개항 후 얼마 지나지 않은 1904년부터 청주공장을 가동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주세법에 의해 가양주의 전통을 전면 금지한 반면 일인들에 의한 청주공장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면서 마산을 청주의 도시로 변경시켰다.

청주의 도시 마산
마산에서 청주산업이 얼마나 유명했는지를 알려면 1924년 경상남도에서 발행한 마산의 공장통계에서 보면 주조공장이 6개, 장유양조장 1개, 정미소 2개, 제면소 1개, 철공소 2개로 나타나 있다. 개항이후 약 10년에 걸쳐 제법 규모 있는 공장을 분류하였을 때 청주 주조장이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일본은 조계지를 설정한 구역 내에 제일먼저 조계지 끝 지점에 해당하는 일성펌프자리에 아즈마 주조장(1905)을 시작으로 하여 원마산까지 청주주주장을 만들었다.이후 설립된 공장은 1920년대에 13개의 공장에서 4천 400석을 생산하였으며, 이후 1928년에는 12개 공장에서 1만 1천석을 생산하여 조선의 지역별 청주생산실적에서 부산업계를 제치고 제1위를 차지하였다고 한다.

 마산 청주 주조장의 변천과정
1900년도에 설립된 청주주조장은(상공회의소 100년사, 마산시사 1996 참조) 최초의 주조장은 신마산 일성펌프자리에 1904년에 설립한 아즈마(東) 酒造場이 있으며, 원마산 서성동에서 1905년에 설립된 이사바시(石橋) 주조장, 장군동에 06년에 설립된 五反田 酒造場, 같은 해에 청계동에 설립된 永武 주조장, 07년 홍문동에 설립된 니시다(西田) 주조장, 08년 상남동의 岡田 주조장, 지시마엔(千島園) 酒造場은 장군동에 09년에 설립되었다.
이미 1900년대에 7개의 청주주조장이 신마산, 중앙마산, 원마산 등지에 설립되었던 것이다.
설립연도가 중복되는 공장이 2개 있는데 이시바시 주조장과 지시마엔 주조장은 다른 자료에 의하면 1914년과 1925년에 설립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러한 경우 년대가 앞선 자료를 기원으로 보아서 정리하였다.
당시 마산의 주조장은 내수용에서 시작하여 만주와 중국대륙에 수출용까지 생산하게 되어서, 1938년 2만석을 넘겼다고 한다. 그러나 1939년 가뭄으로 인한 쌀 수확의 흉작으로 사용량을 제한하여 당초량 보다 20% 즐인 1만 7천 여석만을 제한 생산하였다고 한다.
이후 1941년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전시 통제령에 의해 생산량을 제한받아 생산품도 군수용과 일반용으로 지정하여 생산 공급하였다고 한다.
해방과 한국동란기에 불하를 받은  공장들은 12개의 공장들은 운영부실로 60년대 초반에는 7개의 주조장만 남아 생산을 하다가, 다시 5개의 공장이 없어지고, 3개의 공장이 생겨나서 5개의 공장으로 유지되다가 1973년 지방의 중소주류업체 통합법에 의해 백광청주만 홍문동에 남아 있다가. 70년대 후반에 하나마저도 사라지게 되었다.

마산 청주 주조장의 역사

1. 아즈마(東)주조장(1904) - 하라다(原田)주조장(1923) - 동화주조(정기운)(1946-60? )
 마산에서 최초로 생긴 청주주조장이며 마산의 4대 양조장의 하나이다. 개항기인 1904년 마산에서는 최초로 설립되었던 아즈마(東) 양조장을 1923년 하라다(原田淸一)가 매수하여 이름을 바꾸었다. 연간 양조량은 1천석 내외이고 상호는 명주「한목단」(寒牧丹, 간보단)이었다. 이 공장의 연간 생산량은 1,000석 내외였다. 월남동 5가 1번지에 위치하며 해방이후 구.일성펌프(46.7.1, 최성주)공장이 일부 설립되었으며, 하라다 주조장은 미군정청에 접수된 이후 정기운이 불하를 받아서 동화주조라는 상호로 청주를 생산하였다. 이후 1955년 공장명부에 등재되어 있었으며, 1961년 상공회의소의 공장명부에 없는 점으로 보아, 50년대 후반쯤에 청주생산을 중단한 것으로 보인다. 이 주조장 부지는 일성펌프 공장과 유남상가로 지속되다가 2000년에 신축건물 일성프라자가 공장부지에 들어섰으나, 얼마 후 소유권이 공중분해 되었으며, 현재 상가도 폐가처럼 비어있다. 특이 이 땅은 개항초기에 마산 최초의 러시아 호텔이 있었던 자리로도 알려져 있다. 여러모로 로 유명세를 가진 땅인데, 땅도 주인을 잘만나야지, 옛 명성을 유지할 수 있는것 같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마산최초의 청주 아즈마(東)주조장의 현재의 모습)

 2. 이시바시(石橋) 酒造場 (1905.10)- 대흥주조(문삼찬) (1946-60년대?)
경상남도 통계보고(1924년, 공장표)에 의하면 자본금 1만2천엔으로 1905년 10월 서성동 16번지에서 석교시태랑(石橋市太郞) 설립한 기록이 남아있으며, 다른 자료에 의하면 1914년 이시바시(石橋市太郞)가 설립하여 1926년 아들에게 계승된 이후 마산부 幸町(현 서성동)에 공장을 신축해서 연간 500석 가량의 청주를 생산한 기록이 남아 있다. 상표「大典正宗, 다이덴 마사무라」이었다.
해방이후 이시바시(石橋)주조는 문삼찬이 불하를 받아 상호를 대흥주조로 바꾸었다. 당시 직원은 6명이 소규모 공장이였으며, 1970년의 주류제조업체 현황에 나오지 않은 것으로 봐서 60년대 후반에 폐업한 것으로 보인다. (상호를 芙蓉으로 사용)

*우리가 흔히 정종이라하는 것은 일본의 청주 상호중에 정종(正宗)이라는 이름이 들어가는 유명한 청주가 많아서 고유명사화되어 사용되고 있는데, 사실은 올바른 표현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상호 예 : 대전정종, 학정종 등)
(현재의 위치는 서성동 덕천상가아파트 필지에  합병된 것으로 보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당시 공장의 위치는 덕천상가아파트에 포함됨)

                                                                 
3. 고단다(오반전/
五反田) 酒造場 (1906.10)
장군동에 06년에 자본금 1만엔으로 설립된 청주주조장으로 마산야화에 의하면 사입(仕入)에 부주의한 탓으로 파산하였다고 함. 파산시기는 해방이후 귀속주류업체 현황(1953)에 없으므로 해방 전후 시기로 판단된다.
(위치는 마산야화에 의하면 96년에 관광센터가 있던 '푸른집'자리라고 한다.)

3. 엔무(영무/永武) 주조장(1906.11)
신마산 조계지내 청계동에 자본금 1만엔으로 설립된 주조장으로 인접한 부지에 적문장유양조장(1906)이 있었다. 당시 생산한 정종은 학정종(鶴正宗)이었다. 마산야화에 의하면 종전(52년) 당시까지 정종을 생산하였다고 하였으며, 1953년의 주류제조업체 현황에 나오지 않은 것으로 봐서 그전에 폐업한 것으로 보인다.  정확한 지번은 없지만 청계동이 몇필지 않되는 적은 동임을 감안하여 추정할 때, 공장의 위치는 현재 문화동 주민센터이거나 인접 주택필지로 보인다.

4. 니시다(西田) 주조장 (1907)- 삼성주조(신봉희)(1946) - 백광주조(이우현/이성훈)(60-79?)
마산에서는 가장 오래된 양조장의 하나이다. 창업주 일본인 니시다(西田木摠市)에 의해 자본금 2만엔으로 1907년 11월 설립되어 마산부 영정(榮町: 현 홍문동9)에 공장을 세웠다. 이 공장의 양조량은 1926년에 600석에 불과했으나 3년후인 1929년에는 2배가 넘는 1천300석의 실적을 올렸다. 생산한 청주상표는 「鷄林」(계림, 게이링)이였다. 해방이후 신봉희가 불하를 받아서 삼성주조로 상호를 바꾸어 청주를 생산하였다. 종전(1952년)까지 제품을 생산하였으나 1961년 쥬류제조업체 현황에 의하면 동일 위치에 백광주조장으로 상호가 변경되어 백광청주를 생산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 때 대표자는 이우현이었으나 1973년 주류업체의 통폐합에 따라 73년 10월 18일 백광주조장만이 마산에서 청주를 생산하는 공장이 되었으며, 대표도 이성훈으로 변경되었다. 당시 직원이 33명이었다. 한편 인접한 지역 홍문동 6번지 상의 염록주조장 인수하여 동시에 청주를 생산한 것으로 보인다.

백광양조장은 73년 정부의 군소주류업체 통합조치에 의해 하나만 남아 있다가 연생산량이 3,500kl 내외에 지나지 않아서 70년대를 넘기지 못하고 사라졌다.
마산에서 70년대 후반까지 청주를 생산한 마산 최후의 공장으로 역할을 하였다. 이후 이 공장건물은 80년대 초반까지 남아서 롤러스케이트 연습장으로 사용되었다가. 90년대(?)에 신동아 빌라 공동주택이 들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서전주조장의 조감도사진

 

사용자 삽입 이미지60년대 전경,중앙상단이 서전주조장, 하단의 공장은 녹수주조장

 

사용자 삽입 이미지(서전주주장은 현재 신동아빌라가 들어서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60년대 백광청주 상표)

5. 강전(岡田) 주조장 (1908.9 - ?)
경상남도 통계보고(1924년, 공장표)에 나타나는 공장이다. 상남동에서 자본금 1만2천엔으로 설립된 기록만 남아있으며, 이후의 기록은 없다. 해방 이전 양조장이 폐업했거나 용도변경(탁주, 소주, 장유)가능성이 있다. 현재의 위치확인은 불가능하다.

6. 지시마엔(千島園) 주조장 (1909.10) - 삼광주조장(손삼권)(1946-73)
경상남도 통계보고(1924년, 공장표)에 의하면 자본금 1만5천엔으로 1909년 10월 마산부 통정(通町: 현 장군동)에서 엔도우(遠騰豊吉)에 의해 설립한 기록이 남아있으며, 다른 자료에 의하면 1925년 창립한 기록도 남아있다. 당시 생산한 청주는 명주 「彌生」(미생, 야요이)의 상표로 연간 500석 정도를 생산 판매했다.

해방이후 지시마엔(千島園)주조는 손삼권씨가 불하를 받아서 그대로 천도원주조로 했다가 뒤에 삼광주조로 변경하였다. 이후 손삼권씨는 인접필지에서 염국모가 운영하는 칠성주조장을 인수하여 삼강주조로 변경하고 2개 공장 삼광, 삼강을 동시에 운영하다가. 1973년 정부의 군소주류엽체 통합조치에 의해 폐업하였다. 다행히 공장건물은 현재까지 남아있으며, 창고 및 주택으로 사용되고 있다.  당시 공장의 규모는 삼강주조장이 더 컸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삼광주조장의 60년대모습과 현재의 모습)

 

사용자 삽입 이미지(60년대 삼광청주 상표)

7. 이데(井手) 주조장(1911.10) - 칠성주조장(염국모) - 삼강주조장(손삼권)(1946-1973)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삼강주조장의 현재모습, 삼광주조장과 같이 운영되었다.)

 1911년 10월 井手倬次郞에 의해 창업, 마산부 개정(신흥동)에서 연간 500석 정도의 청주 ‘總督’을 생산.1930년부터 상표를 朝乃灘(조내탄, 아사노나다)으로 바꾸었다. 해방이후 이데(井手)주조는 칠성주조(염국모)로 바뀌어 청주생산을 계속하였으나 1961년 이후 인접필지에 있는 삼광청주의 권삼문에 의해 상호를 삼강으로 바꾸어 유지되다가 73년 폐업된다. 공장건물의 외부원형은 그대로 남아있으며, 현재 다가구 주택으로 개조되어 사용되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60년대 칠성/삼강주조장과 현재의 후면모습)

사용자 삽입 이미지(60년대 생산된 삼광청주, 삼강청주)


8. 미요시(三好) 주조장(1913) - 삼일주조장(이우식-정명갑-문병대)
(1952-196?)
마산부 부정(富町: 현 부림동 103)에서 미요시(三好彌三郞)가 1913년에 설립했다. 연간 생산량은 400석 내외이고 상표는 松乃色. 해방이후 - 미요시(三好)주조는 휴전 이후에 삼일주조(이우식)이후 정명갑으로 바뀜 (三一주조장/ 鄭明甲/ 부림동103/ 7), 당시 생산한 청주의 상호는 觀海였으며, 1961년 이후 폐업되었으며, 위치는 부림시장 아래편쪽에 1969년 설립된 백광소주(문삼찬)과 인접한 공장이었다. 지금은 위치는 부림동 구.화남상사건물이 있던 위치이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삼일주조장의 50년대 모습)



9. 히라이(平井) 주조장(1914.4) - 조해주조(서준보)(1946-196?)
1914년 4월 히라이 (平井政太郞)에 의해 창업되었다. 마산부 도정(都町: 현 중앙동)에 공장을 갖고 명주「취향」(醉香, 스위꼬)을 생산했다. 연간 양조능력 2천석의 대형 양조장이었다.
해방이후 히라이주조는 조해(朝海)주주식회사로 서준보에 의해 불하되어 운영되었다. 위치는 중앙동 2가6번지로 그 터에 현재 주유소가 들어서 있다.
1961년 공장등록이 되어있는 것으로 보아서 이후에 폐업한 것으로 보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60년대 마산역옆의 조해주조)

         

사용자 삽입 이미지(현재의 모습, 마산역은 아파트로 변하였고--)

           
10. 합자회사 시미즈(淸水)
(1927.6) - 대동주조(이병진)(1946-60) - 무학주조(최위승)(1973-84)
마산에서 제일 큰 규모의 양조장이었다. 1921년 시미즈(淸水篤行)에 의해 창업되어 1927년 6월 사원공동 출자15만엔(円)의 법인체로 바꾸었다. 시내 야나기마찌(柳町:신창동13)에 자리한 이 공장의 생산능력은 연간 1만 3천500석 1928년에는 당시의 마산의 양조업계 총생산량인 1만석의 25%에 해당하는 2천500석을 생산했다. 이 회사 생산품인 청주 「대정앵」(大正櫻, 다이쇼 사꾸라)과 <井筒平>은 만주와 중국대륙에까지 판매했다.

해방이후 시미즈 : 종전(52년)까지 출고함(야화)/ 해방이후 대동주조(대표 이병진)로 명의가 변경되었다. 당시 대표 이병진은 중앙동에 마산주조회사를 동시에 운영하면서 청주를 생산한 것으로 나온다. 마산주조는 1945년부터 1960년까지 공장을 가동하였다. 위치는 경남데파트 뒤편 진주 가도변으로 판단되며, 현재 위치는 정확히 나타나지 않는다. 대동주조도 같은 기간 동안 생산을 하였는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이후 1973년에 무학주조가 경남지역 36개 소주회사를 통폐합하여 본 대동주조공장으로 이전하여 무학소주를 생산하는 공장으로 변경되어 사용되었다. 이후 1984년 무학이 봉암동으로 이전함에 따라 무학빌라 공동주택이 건설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시미즈(淸水)주조장의 흔적은 인접한 창원천의 다리이름 청수교(淸水橋)에서 그 기억을 찾을 수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청수주조장, 대동주조장, 무학주조로 변경된 공장의 과거와 현재 전경)

사용자 삽입 이미지(청수주조에 인접한 청수교)


사용자 삽입 이미지(마산주조, 1945-60, 이병진)


11. 하마다(濱田) 주조장 (1923) - 옥포주조(이태익)(1946-60)
마산부 신정(新町 : 현 추산동)에서 하마다(濱田慶治)가 1923년에 설립, 연간 양조량은 500석이다. 이 공장에서 생산된 청주 金盃濱鶴
(금배빈학, 긴빠이 하마쯔루)의 명성은 꽤 높았다.
해방이후
하마다(濱田)주조는 옥포주조(이태익)로가 인수
1961년 당시 공장등록대장에 없으므로 그전에 폐업한 것으로 판단된다.
위치는 중앙극장 우측 내림길에 있다고 전하며, 현재 지번이 없어 찾을길이 없다.
 
    
12. 무라자끼(村崎)주조장(1925) - 염록주조(김상현)(1946-60)
1925년 당시 마산부 도정(都町: 현 중앙동)에 있던 다무라(田村) 주조장을 무라자끼 (村崎仁三郞)가 인수하여 영정(營町: 현 홍문동6)에 새 공장을 세워 이전했다. 옛 상표 摠富士였는데 새로「艶綠」(염녹, 쯔야미도리)으로 바꾸었다.

해방이후 무라자기(村崎)주조는 엽록주조(김상현)로 되었다. 인접한 홍문동 9번지에 백광주조장을 가동하던 이우현에게 인계하여 두 공장에서 백광청주를 1970년대 후반까지 생산하였다. (염록은 종전(52년)까지 출고함(야화)

사용자 삽입 이미지(주조장의 현재모습)

00 녹수(錄水)주조장/ 李雨鉉/ 홍문동3/ 8-(1950?-1965)
녹수주조장은 53년 공장등록명부에는 없으며, 61년 주류업체 현황에 등장하는 것으로 보아서 50년대 중후반에 설립된 것으로 판단된다. 공장위치는 홍문동 3번지로 백광주조장과 인접한 위치에 있다. 이후 1965. 11. 10에 청주공장은 최계정에 의해 백광장유양조장으로 전업하여 영업(마산 홍문동 3-4, 최계정)을 개시하여 간장, 된장, 식초를 생산하였다. 당시 직원은5명이었다. 이후에 공장부지에 배진아파트가 들어서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녹수주조, 백광양조 공장터에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13. 마쯔모도(松本) 주조장 (일제말기 -1945) - 금포주조?(김행도)(1950?-1960)
마산에서는 가장 늦게 생긴 양조장이다. 일제말기 마쯔모도(松本通)가 통정(通町: 현 장군동)에 새 공장을 세우고 명주 月乃浦를 생산했다. 이외 특별한 기록이 없으며, 해방이후 쯔기노우라(月浦)주조가 김행도에게 불하되어 금포주조로 바뀌었다. 둘 다 장군동인 점을 감안하며, 월내포가 월포로 바뀌었을 가능성도 있을 것 같다. 허나, 금포주조 역시 50년대 후반에 폐업한 것으로 보인다. 61년 주류업체현황에 보이지 않는다. 위치는 경남데파트 뒤편으로 추정한다.

00 이 외에 나타나는 주조장은 중앙동에 동성주조(주)가 이만희에 의해 해방이후 설립되어 60년도 이전에 폐업한 것으로 보인다.

14. 야마무라(山邑)주조 마산공장- 동양주정(1952)-무학주정 -유원산업 창업(동양주정과 합병, 1960)
일본에 본사를 두고 청주 櫻正吉」(앵정길, 사꾸라 마샤요시)을 생산하는 야마무라(山邑)주조 주식회사가 1929년 4월 마산부 본정(本町: 현 월남동)에 마산공장을 세워 만주와 중국에 수출할 청주를 생산했다. 해방이후 야마무라(山邑)주조는 무학주정으로 개칭하며 주정과 소주를 생산하였으며, 65년이후 주정만을 생산하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야마무라(산읍)주조, 해방후 유원산업

15. 쇼와(昭和) 주류공업사
일본 야마무라(山邑) 주조의 계열사로 1929년 4월 10일 자본금 50만엔(円)으로 설립된 종합주류회사이다. 1929년 9월부터 본정(本町 :현 월남동) 해안 매립지에 신축한 공장에서 주류생산을 시작했다.
창업 초기에는 년간 청주 1천석정도 생산했으나 1935년부터 청주는 야마무라주조에 넘기고 기타주류(소주, 미린주, 포도주, 기타 위스키, 브랜드 등)을 생산하였다. 이외 합성주인 이연주(理硏酒) 一新과 소주 明月과 양주 등을 생산하였다. 해방이후 유원산업으로 변경, 1952년부터는 증류주만을 생산하였으나 이후 1965년부터 희석식 소주만을 생산하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 해방 직후 주조장 현황
시내 13개 청주양조공장들도 해방과 함께 미군정청에 접수되었다. 미 군정청은 이들 적산 청주공장을 과거 일본인 공장에 종사했던 종업원이나 주류제조에 경험이 있는 자나 그밖에 관리 운영할 능력이 있는 한국인을 선정하여 관리 운영을 맡겼다. 이를 맡은 관리인들은 먼저 일본인들이 사용하던 상호를 새것으로 바꾸었다. 새로이 출발한 청주공장들을 1946년 세무당국으로부터 주류제조면허를 받아서 나름대로 생산을 시작했다. 그러나 해방 후의 극심한 식량난 때문에 청주의 원료인 쌀의 사용이 제한되었고 양조시설 역시 빈약해서 제대로 생산을 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기득한 관리권을 다른 제3자에게 넘겨 버리는 공장도 생겨났다. 이들 청주공장들도 1951년 이후에 연고자들에게 모두 불하 되었다.
6·25사변으로 생산이 거의 중단되었던 마산의 청주업계는 휴전이 되자 새로운 활로를 모색했다. 이 결과 업자들은 서로 합의하여 서울지역에의 진출을 위해 서울지역 출고분에 한해서
銘花라는 한가지 상표로 공동 판매제를 실시하게 되었다. 그러나 업자 서로간의 이해에 얽힌 불신과 갈등으로 공판제 실시 1년을 넘기지 못하고 해체되었다. 이후 업자들의 과잉 경쟁으로 덤핑판매가 시장 질서를 무너뜨리면서 低質酒가 나돌아 소비자로부터 외면당하게 되었고 경영적자가 누적되면서 문을 닫는 업체도 생겨 1961년 겨우 7개 양조장이 조업하고 있었다.

60년대 이후 현황
1971년 마산의 청주생산량은 청주86만2,100L 이고, 합성청주는 17만1,790L였다. 69년의 생산량 청주 125만2천L, 합성청주33만 1,560L에 비하면 크게 감량된 것이었다. 그 후 1974년 생산량은 더욱 감소되어 청주 71만6,470L, 합성청주 29만4,789L를 생산했는데 70년대 하반기에는 더욱 줄어들어 마산 청주의 모습은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60년대 이후 설립된 청주주조장
1. 寒牡円/한목단 양조장 : 하리다 주조장의 상호를 사용(최태수, 산호동 17-3, 62. 11. 28) : 원조격에 해당하는 하라다주조의 '한목단'상호명을 패러디하여 설립되었으나 73년에 통폐합되어 없어졌다.
2. 신광양조장 (최동렬, 산호동 128, 65. 12. 13)
3. 성광주조장 (손정길, 신포동 2, 69. 1. 3)
상기 3개의 공장은 73년 정부의 군소주류업체 통합조치에 의해 백광청주에 의해 통폐합되어서 이름이 사라지게 되었다.
백광청주 역시 70년대 후반에 세태의 기호변화에 의해 공급을 중단하고 말았다.

이외 알아내지 못한 청주공장도 있으리라 생각된다. 아쉬운 것은 생산하였던 청주들의 상표 및 상호라도 수집되어 정리되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혹시 이러한 자료를 가진분이 계시면 협조 보완하여 잘 정리되었으면 한다.

이로서 마산의 청주생산은 1904년 시작하여 1979년(?)까지 75년간 세월의 영욕 속에 사라졌다.
그나마 장군동과 신흥동에 인접해 있는 삼광청주, 삼강청주 2개의 공장은 원형이 점차 삭아져 가고 있다.
세월의 흐름 속에, 우리의 기억속에서 점점 사라져 가고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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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오유림 2010.01.22 11:39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와....
    논문같아요..멋집니다.
    이런 자료들 다 어디서 찾아요 ㅎㅎ
    사진속 건물들이 아직 살아 있는 곳은 정말 신기합니다.
    더 삭아지기전에 어떤 조치(?)를 취하면 좋겠구만..
    잘 보고 갑니다 신선생님 ^^

  2. 옥가실 2010.01.22 17:23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수고했습니다.
    거의 다 찾아낸 셈이네요.
    마산의 술만 연구해도 박사논문은 거뜬하겠는걸요..^^

  3. 삼식 2010.01.22 20:27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불확실한 부분이 아직 많은것 같읍니다.
    지역 어른들의 협조를 받아서
    어찌 해볼까 합니다.
    술을 좋아한 죄로
    시간나는 대로 자료를 보완할 계획입니다.
    성원에 감사드립니다. 꾸벅

  4. 감사 2013.10.09 19:05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저희 할아버님 이름이 보이는군요 잘보았습니다

    • 허정도 2013.10.09 21:01 신고 address edit & del

      방문 감사합니다.
      실례지만 조부님 함자가 어떻게 되시는지요?

2010.01.12 07:30

잊혀진 마산의 소주공장을 찾아서(1)


주도마산 (酒都馬山)
마산은 술의 도시, 주도 마산으로 왕년에 유명한 도시였다.
대략 연세가 50을 넘긴 어른들의 기억 속에 남아있을 것이다.
마산은 개항이후 전국 생산량 1위를 차지한 청주주조장들로 유명했었다.
그러나 80년대 들어서서 청주공장은 흔적도 없이 사라짐에 따라,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가물가물하게 희미해져 가고 있다. 그래서 [유장근 교수의 도시탐방대]에서 탐방시 의문을 남긴 여러 건물들을 찾아서 과거 술공장의 발자취를 따라 가보고자 한다.
순서는 소주, 청주 그리고 막걸리, 맥주 순서로 소개할 계획이다.

일제 강점기의 소주공장
최초의 청주공장이 1904년에 세워진 이후, 일제는 근대식설비를 동원한 대규모 소주공장을 1929년 9월 마산부 본정(本町: 현 창포동 1가 20번지, 현재 창포 한백아파트 위치) 해안 매립지에 일본에 본사를 두고 있는 소화(小和)주류에 의해 시작되었다.

소화주류회사는 일본에 본사를 두고있는 야마무라(山邑)주조의 계열사 형태로 지어졌으며, 인근부지(창포동 1가 1번지, 현재 창포동성아파트 위치)에 소주공장과 거의 동시에 지어졌다. 야마무라 주조는 청주 櫻正宗(앵정종, 사꾸라 마사무네)을 생산하여 만주와 중국에 수출용 청주를 생산할 목적으로 건립되었다. 소화주류는 창업 초기의 소주만 생산한 것이 아니라, 청주, 미린주, 포도주 및 기타 위스키와 브랜드 등을 생산한 종합주류회사 형태였으며, 규모가 상당히 큰 공장이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좌측 창포동성아파트자리가 야마무라주조, 우측 창포한백자리가 소화주류)

사용자 삽입 이미지

(1960년대 전경: 해안가에 큰 굴뚝이 있는 건물과 뒤편에 낮은 굴뚝이 있는 공장 전경)

 당시의 생산량은 청주 1천석, 소주 1만석, 미린주 150석, 포도주 30석, 기타 위스키, 브랜드 등을 생산키로 했다. 1935년 야마무라(山邑) 주조계에서 독립하여 자본금을 150만엔(円)으로 증자했다.
새로이 발족한 이 회사는 합성주인
이연주(理硏酒) 一新과 소주 明月과 양주  등을 생산하고, 청주 양조는 야마무라(山邑) 마산공장에 넘겨 주었다. 당시 사장은 마쯔무라 (松村茂三郞)라는 일본인이었다.

이후에 설립된 소주공장은 1937년 1월 1일 중앙동3가 2-4번지에서 자본금 3만원으로 설립한 합자회사 마산중앙조선소주로 소주를 전문적으로 생산 판매하였으며, 사장은 산근재길(山根才吉)이라는 일본인에 의해서 만들어진 공장이다.
이 공장은 소화주류에 비해 소규모 공장이였다.
마산중앙조선소주공장은 해방이후 탁응조(卓應朝)가 불하를 받아서, (합)마산중앙소주로 상호를 변경하여 운영하다가, 60년대에 문을 닫았다.

일제 강점기에는 청주 및 소주공장은 한국인들에게 허가를 내주지 않았고, 재래식으로 생산하는 막걸리 공장만 허용해 주었다.
한일합방 이후 일제는 세원확보를 위해 1928년부터 개인의 자유 양조를 금지하고, 양조를 허가제로 하여 면허를 발급하였다.
주로 한국인 업자들에 의해 경영되던 탁주, 약주 양조업은 일본인이 독점했던 청주업계에 비해서 규모는 매우 영세했다.
일제 강점시기의 마산의 소주공장은 거의 소화주류에 의한 일사 독점체제로 유지되었다고 볼 수 있다.

해방이후 소주공장
해방과 함께 적산공장들은 미군정청에 의해 접수되었다.
미 군정청은 이들 적산공장을 과거 일본인 공장에 종사했던 종업원이나 주류제조에 경험이 있는 자나 그밖에 관리 운영할 능력이 있는 한국인을 선정하여 관리 운영을 맡겼다.
이를 맡은 관리인들은 먼저 일본인들이 사용하던 상호만 바꿔서 기존을 시설을 이용하여 가동하였다.

새로이 출발한 공장들을 1946년 세무당국으로부터 주류제조면허를 받아서 나름대로 생산을 시작했다. 그러나 해방 후의 극심한 식량난으로 양조시설 역시 빈약해서 제대로 생산을 하지 못했다.
이로 인해 기득한 관리권을 다른 제3자에게 넘겨 버리는 공장도 생겨났다. 이들 공장들도 1951년 이후에 연고자들에게 모두 불하되었다.

한편 해방과 함께 적산공장의 불하에 의해 탄생된 소화주류와 야마무라 주조 외에도 1951년 강남소주(장군동 5가7, 대표 김행윤)가 장군동에서, 1961년 마산양조공업사(장군동 5가1-3,대표 남병주)에서 소주와 약주를 함께 생산하였다.
1961년에 有元, 舞鶴, 마산, 江南 4개의 소주공장에서 소주를 제조하고 있었으나 소주 수요가 늘어나면서 1970년에는 무학, 강남, 백광 삼천리, 永進등 5개 공장으로 늘어 났다.
후발업체인 백광소주(부림동 104-8,대표 문삼찬)가 1969년에, 삼천리와 영진소주는 구순기에 의해 회원동과 오동동에 설립되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부림동 백광소주공장 1973년전경(좌측철길 하단 기와집)

사용자 삽입 이미지

백광소주공장터 현재모습 (원래의 공장부지는 새길이 나면서 분리됨)


백광소주는 당시 유명했던 백광청주와 동일상호로, 공장과 사장은 다른 동명이사로 백광청주의 유명세를 활용하기 위해 상호를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삼천리소주와 영진소주는 구순기가 같이 경영한 공장으로 공장소재지만 달리하고 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영진소주, 삼천리 소주공장터의 현재전경(오동동 4거리 아래편)


(이승기 마산영화자료관장의 말에 의하면 오동동에서 삼천리 소주를 취급했다는 얘기로 보아 상호만 달리하고 소주생산은 같이 했던 것으로 보인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사용자 삽입 이미지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야마무라 주조 해방이후 연고자인 한범석이 맡아 있다가 이병각(삼성 창업자 이병철의 형)에게 넘어갔다. 상호도 무학주정으로 개칭하고 소화주류와 경쟁관계에 들어섰다.
이후 1952년에 이병각은
최재형에게 운영권을 인계하고, 서울의 삼강유업을 인수하여 상경하였다.

원래 청주를 생산한 공장이었으나, 한국동란 중 양조 원료인 미곡의 절대적 부족으로 소주를 생산하게 됨에 따라 소화주류와 경쟁구도가 되어 심각한 대립관계에 들어서게 되었다.
이후 1960년에 동양주정(소화주류의 상호변경)과 합병을 통해
유원산업으로 상호를 변경하였다. 60년대 초반에는 소주 백매(白梅)
를 생산하였다.
1965년부터 유원산업은 주정회사만 운영을 하다가 우여곡절을 겪는 속에 마산항 서항지구매립사업이 완공되어 공장앞 바다는 육지로 변했고 공장주변이 주택지 등으로 변모하자 80년대 후반
함안군의 칠서 지방공단에 이전하여 주정을 생산하였다. 그러나 현재 확인해 본 바로는 공장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다.
70년대 당시만 해도 유원산업은 마산에서 가장 큰 그룹형태의 회사였었다. 유원연료산업에서 유원연탄을 만들기도 하였고, 부산의 대선주조도 인수하고, 경우상호신용금고와 유원개발에서 부곡골프장 건립공사를 하기도 하여 70년대 마산을 주름잡았던 기업인데 지금은 명맥을 찾기도 힘든 지경에 이르렀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야마무라(산읍)주조, 해방후 유원산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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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화주류 해방과 함께 김종신(4대총선 자유당 국회의원)이 관리를 하였다.

 1949년 김종신은 동양주류주식회사로 개칭하고 새로운 법인을 설립하였다. 이후 무학주정과의 경쟁과 경영난 속에 1952년 김상용에게 법인을 넘기면서 상호를 동양주정주식회사로 다시 개칭하였다.
김상용은 당시 대동제모 사장을 역임한 능력있는 경영인이었으나, 이후 경영권이 김봉재(당시 국회의원으로 김상용과는 동서지간), 지달순으로 넘어가는 과정을 거치면서 정치인들의 손아귀에 놀아나게 되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소화주류(1929)

1960. 3. 24일 무학과의 출혈경쟁으로 회사형편이 어렵고, 탈세조사를 받던중 무학 최재형에게 공장을 넘기게 되었다. 이후 동양주정의 운영권은 1959년 민주당에서 변절하여 자유당으로 간 국회의원 허윤수에게 정치자금 수수 댓가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1960년 무학주정에 인수되어 유원산업에 포함되었다가, 1965년. 現 무학그룹 최위승회장이 다시 인수하여 무학양조장으로 이름을 바꾸고 신포동 13번지에서 희석식 소주인 「무학」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1965년 1월부터 시행된 양곡관리법 시행으로 소주의 원료 대체가 불가피하게 됨에 따라 전국의 수많은 증류식소주 업체들이 희석식소주로 전환하여 생산하였다.
그 후 필요이상으로 난립상태였던 소주제조장을 국세청은 1973년 7월부터 본격적인 통합작업에 착수하였다.
각도에 1사씩 전국 10개 업체만 존속하도록 하는 과정에서 무학주조는 경남지역 36개회사를 통폐합,
무학주조주식회사로 상호를 변경하고 신창동으로 이전하였다. 

신창동 무학주조 공장은 원래 일본인이 경영한 淸水라는 청주공장이 있던 자리인데 해방과 함께 대동주조로 상호를 변경한 뒤, 73년 무학이 경남소주공장을 독점하면서 무학주조 공장으로 사용되었다.
1984년 무학공장이 봉암동으로 이전하게 됨에 따라 공장부지는 무학아파트가 지어져 현재에 이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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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년 신창동 무학주조공장)

사용자 삽입 이미지

(84년 봉암동 이전후 현재 무학빌라가 들어서 있다.)

뿐만 아니라 창포동부지와 신포동의 공장부지에도 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소주공장과 아파트,
대체로 공장이 이전한 자리에 아파트가 들어서는 것은
도심내 주거지부족현상에서 비롯되었다고 하지만,
뭔가 허전한 마음, 별 개념없이 지나쳐 온 것 같다

우리는 땅이 가지고 있는 역사에 대하여 너무 무관심하게 지나쳐 왔다.
가급적 보존하는것이 우선이지만, 차선으로 기록이라도 제대로 남겨야 할 것이다. 한일함섬이 있던 자리도 기록관하나 없이 깡그리 아파트만 지어서, 후회막급하다는 얘기를 들은적이 있다.
지역에서 기록에 남길만한 공공시설이나 중요 산업시설에는
반드시 기록표지석을 설치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땅은, 어느 시기에, 어떠한 용도로, 어떤 사람들이 사용 했노라고 -----

사용자 삽입 이미지

60년대 생산한 무학소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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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 무학소주 상표


※ 참고자료 :
- 마산시사 (1996),
- 마산개항 100년사,
- 마산 상공회의소 100년사
- 마산야화 (김형윤),
- 학초 최재형 평전 (김호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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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신삼호 2009.12.14 17:20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옛날 소주는 지금 소주와 비교가 않되죠,
    엄청 독해서 턱 부르르 돌아갈 지경이였죠
    우리 아버지 세대의 사회상과 비슷한 느낌이 드는 군요
    요즘 순한소주는 요즘 세태를 반영하는 듯 하구요!
    됫병을 놔두고 잔술을 구멍가게에서 사 드시던 어른들 생각이 나는군요!

  2. 이진규 2010.01.12 12:21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물좋은 마산의 술 역사가 흥미로웠습니다.
    사진에서 보는 저 술들이 지금도 남아 있다면 한 잔 하고 싶은 생각 간절합니다.^^

    • 삼식 2010.01.12 12:57 신고 address edit & del

      술을 통해 옛추억들이 떠올라
      그런 추억을 한잔하고 싶은 생각이겠죠

    • 이진규 2010.01.14 10:12 신고 address edit & del

      삼식님은 뉘신지요? 혹시 신삼호 선배님 이셔요?

  3. w저팔계 2010.01.12 13:51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저 정도는 하루에 한 2-3병 먹었던 기억이 나네요..지금은 아니지만, 마산의 술 거리를 재현하여 상품화 시키는것도 좋을것 같은데요, 일본의 탄광촌이나, 맥주공장거리,여관촌 등 옛것을 재현시킨 상품들이 세계적인 관광명소로 거듭나는 것을 우리도 배우면 좋겠습니다

    • 삼식 2010.01.12 17:34 신고 address edit & del

      한창때 얘기겠죠,
      지역사의 산업분야에서라도 잘 정리할 필요가 있을것 같읍니다.

  4. 옥가실 2010.01.13 10:16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예전부터 궁금하던 부분이었는데, 명백하게 밝혀지고 있으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수고하셨습니다.

    • 허정도 2010.01.13 11:03 신고 address edit & del

      삼식 씨가 고생했네요.
      평소에 술 좋아하더니만 결국 술에 대한 연구를,,,,

  5. 백은석 2010.01.13 11:57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잘보고갑니다

  6. 허태윤 2010.01.14 15:26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옛날추억에못살든시절이생각이남니다,,

  7. 삼식 2010.01.15 17:32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닉네임이 촌스럽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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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떠돌이들, 좀도둑 전쟁이 끝나자 대다수의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들갔지만, 상당수의 사람들은 남아있었다. 좌우갈등의 와중에 있었던 몸이라 돌아갈 수 없는 처지였다고 들은 문씨 같은 사람들도 있었는가 하면, 가봤자 땅뙈기 ..

기억을 찾아가다 - 22

22.기합, 주먹자랑, 몸단련 중학교시절에도 조금은 의식되었지만 신경을 곤두세울 정도는 아니었었는데, 고등학교에 들어가자 그 문제들은 신경의 상당부분을 자극하여 행동거지의 상당부분을 조종하고 지배할 정도로까지 작용했다. 소위 ..

공간의 재탄생 - 재생 건축 '선유도' 02

지난주에 이어 녹색 기둥의 정원 에서부터 선유도 이야기를 이어 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 - 녹색 기둥의 정원 정수지의 콘크리트 상판 지붕을 들어내 기둥만을 남겨 만들어진 이 정원은, 선유도 이야기관 의 설명에 의하면 ‘휴식과 ..

기억을 찾아가다 - 21

21. 동(洞) 대항 줄다리기대회 ‘마산시 동 대항 줄다리기대회’가 시작된 건 초등학교 때였던 것 같은데, 내가 몇번 구경한 건 중학교 때였다. 대회 장소는 주로 무학초등학교였다. 마산의 30여 동이 토너먼트로 겨루어 하루에 ..

공간의 재탄생 - 재생 건축 '선유도' 01

서울 한강변의 대표적 공원 이라고 하면 떠오르는 곳 중에 선유도가 빠지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원래 거기에 그렇게 있었던 장소로 기억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아직 직접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들도 있을 것입니다. 선유도 공원이 ..

기억을 찾아가다 - 20

20. 아이스케키 아이스크림이나 팥빙수도 있었지만 수요가 많지는 않았었다. 학교 앞이나 시장 입구 등에 리어카를 세워놓고 수제로 만들어 파는 정도였다. 소금 뿌린 얼음 통을 손으로 돌려 냉각시킨 아이스크림은 즉석에서 고깔과자 ..

안상수 시장은 철거민의 눈물 닦아주시라

설 연휴가 끝난 다음 날, 나는 한 언론사의 취재에 동행해 재개발로 철거 중인 마산 회원동 일대를 다녔다. 내가 태어난 곳이고 서른까지 산 곳이었다. 지금도 매일 두 번씩 지나는 곳이기도 하다. 그날 나는 몰상식과 몰염치의 밑..

기억을 찾아가다 - 19

19. 영화, 만화, 잡지 초등학교 6학년 때 단체로 시민극장에 ‘성웅 이순신’을 보러 갔다가 실망했던 기억이 있다. 활동사진이 아니고 정지된 그림(슬라이드)이었기 때문이다. 중1때 문화동 쯤에 있었던 제일극장에서 본 애정(哀..

공간의 재탄생 - 재생 건축 intro.

세 달 가까이 이어져 왔던 '건축의 외형' 에 이어, 세월의 흐름에 따라 방치되고 버림받게 된 건축에 새 삶을 불어넣는 '재생 건축' (regenerative architecture) 이라는 주제로 이야기를 이어 나가볼까 합니..

기억을 찾아가다 - 18

18. 바냇들, 부림시장 정전 다음해 진학한 마산서중(전쟁 중인 1951년 9월 1일 6년제 마산공립중학교가 3년제 마산고와 마산서중으로 분리되었다. 마산서중이 현재의 마산중학교로 교명을 변경한 것은 1955년 5월 7일이었다..

기억을 찾아가다 - 17

17. 공놀이, 헌병사령부 축구팀 우리 어릴 때 겨울 빈 밭에서 새끼로 동여맨 짚 뭉치를 차고 놀던 기억이 있고, 간혹 있은 잔칫집에서 나온 돼지 오줌보에 물을 넣어 차고 놀던 일도 어렴풋이 기억의 한 자락에 남아 있다. 형들..

기억을 찾아가다 - 16

16. 광복절 행사와 우리들의 영웅 초등학교 때도 광복절 기념 체육대회가 있었지만 참여 정도가 미미해서 별로 기억나는 것이 없다. 중학생이 되어 응원군으로 참여하면서 운동경기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러면서 선수들의 면면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