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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7.18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101. 독립교회의 탄생 102.제약회사의 선전 경쟁

101. 독립교회의 탄생

 

19271127일 마산 문창 장로교회에서 벗어나온 교인 일단이 신앙의 자유와 자활적 정신에 입각하여 모든 교파를 초월하고 그리스도에게로, 인위적 조직과 제도를 더나 성서중심으로 돌아가자는 이념을 내어 걸고 독립 마산예수교회를 창설했다.

 

당시 교인 총수는 손덕우 장로를 비롯하여 남녀 200여명, 초대 교역자로는 김산(金山) 목사(중국 남경 금릉대학 출신)를 추대하니 교회 초창기에 희생적인 노력이 많았다.

 

19281127일에 헌당식을 거행했다. 당시 김 목사를 중심으로 교회에 희생적으로 봉사한 교인은 다음과 같다.

 

손덕우(장로)

한좌건, 김주봉, 박덕우, 박채우, 김은수, 최종안, 이창우, 최원칙, 유진구, 정대근, 박덕근, 황덕수, 문덕중, 이일래, 서상삼, 설반옥, 김달필, 홍삼시, 정외희, 구봉남

 

192945일 예배당 뒤 대지 54평을 추가 매수하고 교회 부대사업으로 중앙유치원을 신설, 보모 김현경 씨를 초빙하여 많은 어린니들을 기독교 정신으로 보육했다.

(역대 원장-박성칙, 이봉수, 김은수)

 

 

<1919년 건축한 문창교회. 이 교회에서 독립교회가 분리되었다 - 옮긴 이>

 

 

 

 

102. 제약회사의 선전 경쟁

 

지금은 옛날 같고 거짓말 같이 들릴지 모르지만 종전(終戰) 전까지만 해도 제약도시라는 별칭이 있었던 일본 부산시(富山市)에서는 수만 명의 선전원을 일본, 조선, 만주에 파견하여 15종입(種入)-1(, 가정 상비 구급약)를 집집마다 비치시켜 매월 1회 수금원이 순방하는데 약대는 복용한 봉투에 넣어 두기만 하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다.

 

또 각 열차마다 이 구급약을 서비스하여 승객의 만일의 경우에 대비하였고, 철도당국도 이 약을 상비해 두기도 하였으나 지금은 이런 일은 눈을 닦고 볼래야 볼 수가 없다.

 

이것은 가정상비약에 대한 얘기지만 제약회사에서는 각 병원에 어느 정도 후대를 하였던가?

 

마산도립병원에 오래 근무한 생존자의 한 사람인 동인의원 조석환 원장의 회고담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내가 일본서 돌아와서 마산도립병원에 봉직한 것은 1927년부터였지만 각 가정에다 상비약을 비치했던 사실은 나도 잘 알고 있다. 그것보다 각 관공립 혹은 개업의들이 경험한바 제약회사들의 서비스란 특수한 것이었다.”

 

단순한 선전용이나 광고용이 아닌 고급 약을 대량으로 병원에 무료 제공해 주는 것이다.

 

회사도 무명회사가 아니라 현재도 일본 국내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제일(第一), 산내(山內), 염야(鹽野), 무전(武田), 삼정(三井), 전변(田邊) 등의 제약회사에서 필요한 약은 매월 빼지 않고 우송해 왔으므로 각 병원에서 약품 구입에 신경을 별로 쓰지 않았으며,

 

더욱이 도립병원 같은 곳에서는 사무 감사 때 변명하기가 오히려 귀찮았을 뿐 아니라 처치 곤란해서 당시 사체 안치소 옆에다가 암거(暗渠)를 파고 많은 약품들을 소각 처리한 일까지 있었다고 하였다.<<<

 

 

<1927년 건축한 도립마산병원, 현 도립마산의료원 위치 - 옮긴 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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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25 00:00

마산·창원 역사 읽기 (14) - 일제하 치열했던 민족해방운동

2. 청동기시대에서 10·18까지

2-7 일제하 치열했던 민족해방운동

 

1876년 조선이 강제적으로 세계자본주의체제에 편입된 이후 마산지역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일본인들과 친일 조선인들에 의해 잠식당하였다.

원래 마산은 개항 이후 러시아와 일본의 조차지 경쟁이 치열했던 까닭으로 개항 초기부터 외세에 의한 피해가 컸던 지역이었다.

특히 마산은 항구를 끼고 있었기 때문에 해상운송부문 및 어항과 관련한 상업부분을 잠식하기 위한 일본 상인들의 침략이 노골적으로 진행되어 마산은 일본인의 소굴로 변해 갔다.

1911년 일제는 마산항의 개항(開港)을 폐쇄하고 일본과의 단독무역만을 허락하였다. 그 결과 마산은 조선의 쌀을 비롯한 각종 물자를 일본으로 실어나르는 전초기지 역할을 하였고 동시에 일본의 소비재를 수입하는 창구로 변질되어 갔다.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해 쌓아둔 인천항의 쌀가마니>

 

또한 일제는 과거 일본인 조계지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식민도시를 건설하기시작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에 대응하는 마산사람들의 저항도 점차 그 강도를 더해가게 되었는데, 시장권과 매축권을 수호하기 위한 운동과 어용단체 신상회사(紳商會社) 철폐 및 국채보상운동 등이 그 한 예이다.

또한 마산의 토착 상인들은 일본상인들과 대결하기 위해 민의소와 조선인 상업회의소를 만들어 일본의 경제적 침략에 대응하기도 하였다.

 

-‘천황만세’를 거부한 창신학교 학생들-

1910년 조선을 완전식민지로 만든 일제는 조선인의 저항을 막고 영구적인 지배를 위해 무단통치라는 극악무도한 지배방식을 택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에 대한 조선인들의 저항은 의병전쟁의 패배로 그 힘이 약화되어 본격적인 투쟁을 하기에는 역부족이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점차 독립에의 꿈을 버리고 일제에 굴복하는 경우가 많았다.

마산의 민의소와 조선인상업회의소에 관계하였던 많은 조선인 자본가들도 자신들의 입지를 위하여 일제에 굴복하였으며, 일제를 칭송하였다.

나아가 그들은 대표적 친일단체 마산교풍회를 설립하고 민중들을 통제하는 앞잡이 역할을 하였는데, 김병선, 손덕우, 김선집, 옥기환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들은 한말 이후 교육과 계몽을 통해 마산의 근대화에 앞장선 점도 있지만, 또한 친일의 길을 걸어갔던 것도 사실이었다.

이들에 비해 같은 자본가였지만, 비밀결사를 조직해 일제에 저항한 조선인 상인들도 있었다.

1910년대의 대표적인 민족해방운동 비밀결사조직인 ‘조선국권회복단 마산지부’의 지부장 안확, 이형재, 김기성, 배중세 등이 그러하였다.

뿐만 아니라 창신학교와 의신여학교 그리고 마산노동야학교에 관계했던 많은 사람들도 1910년대의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독립에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1911년에 일어난 창신학교 학생들의 항거사건은 그 좋은 예라고 할 수있다.

1911년 조선침략의 우두머리였던 일본국왕 명치(明治)가 죽고 대정(大正)이 즉위하자 일제는 이를 기념한다는 명목 하에 각급 기관과 학생들을 동원하여 시가행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천황만세를 소리 높이 외칠 것을 주문한 일제에 대해 당시 행사에 동원되었던 창신학교 학생들은 호응하지 않고 일제에 저항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제의 기마경찰과 충돌한 학생들은 일제 경찰들을 공격하여 자산천(지금의 무학초등학교 옆 개울)에 밀어넣어 버렸다. 이 일로 창신학교는 많은 곤욕을 치룬 것으로 알려졌다.

일제에 강점당한 이후 국내에서는 일제에 반대하는 투쟁이 계속되었지만, 대부분의 투쟁은 일회적인 것이었고 조직적으로는 전개되지 못하였다.

그러19193월 만세시위는 그 사정이 달랐다. 그 시위는 일제를 놀라게 하였고 독립을 위한 조선인의 기개를 만방에 드높인 것이었다.

당연히 마산에서도 시위는 조직되고 시도되었다. 마산의 3·1운동은 기독교 계열과 연계되어 있던 이갑성(민족대표 33가운데 1인)과 임학찬 등이 중심이 되어 시작되었지만, 비밀결사 대동청년단 세력과 연결이 되고 있었던 김용환, 이형재 등 전투적 민족주의자들도 큰 역할을 하였다.

이 밖에 창신학교와 의신학교의 교사였던 이상소와 박순천 등도시위를 계획하거나 주도하였다.

만세 시위의 주 참가자는 창신학교와 의신여학교, 마산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마산 시민과 인근 지역의 농민 등 광범위한 대중들이 참가하였다.

특히 마산의 시위는 33일 두척산(무학산) 시위를 필두로 321일, 325일, 331일 등 4차례 이상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으며, 4월에는공립보통학교의 학생들도 만세시위를 감행하는 등 어느 지역 못지 않게 그 열기가 뜨거웠다.

그러나 일제는 김용환, 이상소, 박순천 등 48명을 감옥살이를 시켰으며, 특히 김용환은 일제의 심한 고문으로 감옥에서 옥사할 정도로 그 기개가높았다.

3·1 운동 이후 국내외를 막론하고 전민족적인 민족해방과 독립에의 열기가 고조되고 있었지만, 민족해방운동 진영에서는 운동의 방법론을 둘러싸고 운동세력들이 나뉘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대개 실력양성을 통해 점진적인 독립을 추구하는 세력과 일제에 대한 전면적인 항쟁을 통해 즉각적인 독립을 추구하는 세력으로 나뉘어졌다.

그러한 상황은 마산지역도 마찬가지였다. 마산지역에서도 3·1동 이후 실력양성론을 추구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른바 ‘문화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이들은 19206월경 마산지역 문화운동의 구심점으로‘마산구락부’를 창립하고 교육·체육·계몽·교류활동 등을 활발하게 벌여 나갔다.

마산구락부를 만든 사람들은 과거 마산 민의소의 회원들이 많았으며, 손덕우, 옥기환, 김치수 등 대개가 상인을 비롯한 지주 출신의 자본가들이었다.

이들은 마산학원과 마산여자야학을 설립하여 정규학교에 가지 못한 아이들을 교육하였다.

또한 조선인 전용의 운동장을 만들어 각종 체육행사를 열었으며, 강연회, 토론회 등도 개최하는 등 적극적으로 문화운동에 나섰다.

밖에도 마산지역의 문화운동을 이끌었던 단체로 기독교 계통의 면려청년회와 면려청년회를 지원하던 문창예배당(교회)도 큰 역할을 하였다.

 

<1901년 설립된 마산문창교회의 1919년 모습>

 

그러나 마산지역의 문화운동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1922년 이후에는 극심한 침체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것은 1920년 이후의 경제공황과 더불어 조선인 자본가들의 자금력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며, 또 일반 대중을 조직과 사상면에서 이끌어 갈 수 있는 힘이 부족하여 더 이상의 발전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마산지역 문화운동의 집회장소로 자주 이용되던 문창예배당을 교회측이 더 이상 집회장소로 사용하지 못하게 한 것은 문화운동이 대중과 분리될 수 밖에 없었던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것이다.

 

-사회주의가 주도한 노동·농민 운동-

한편 문화운동을 주도하던 민족주의 계열의 인사들이 민족해방운동전선에서 이탈할 즈음 마산지역에서는 사회주의사상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새롭게 등장하고 있었다.

김명규, 김형두, 손문기, 이주만, 이근우 등은 19221111일 ‘신인회’라는 사상단체를 조직하였다.

사상단체란 1920년대 전반기 사회주의 사상을 중심으로 한 진보적 사상을 연구하며 노동운동과 농민운동 등 대중운동을 지도했던 단체로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에서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신인회는 19238월 조직을 확대하여 혜성사(살별회)로 개편되었는데, 신인회와 혜성사의 초기 회원 중에는 민족해방과 새로운 사회 건설이라는 1920년대 사회주의 운동의고유한 목표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혜성사의 조직 이후 혜성사의 주요 조직원들은 사회주의 사상의 본격적 연구와 전파, 그리고 성장하는 노동·농민운동을 비롯한 민중운동을 지도하려고 하였다.

 

<1921년 준공된 마산 경찰서>

 

1924년 마산노동 동우회를 통하여 경남지방의 노동·농민운동 단체를 ‘조선 노동 총동맹’에 가입시킨 것은 이들의 활약에 힘입은 바가 컸다.

또한 노동자를 대상으로 하는 각종 강습회를 개최하였으며, 동경대지진 학살 동포에 대한 추도 및 기근 구제활동 그리고 지역내부의 파업활동에 대한 지원 등 여러가지 사회활동을 전개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1925년 건설되는‘조선공산당’에도 적극 참여하여 조선공산당 마산 야체이카(세포 -당원)가 되었다.

특히 김영규와 김형선은 1926년 조선공산당의 경상남도 집행위원회의 당과 공산청년회의 책임자가 되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신인회와 혜성사 출신의 민족해방운동가들이 경남지역에서 어떤 위상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알게 해준다.

그러나 1926년 조선공산당이 계획하고 주도한 6·10만세운동의 준비과정에서 김명규, 김기호 등 10명이 검거되고 김형선은 상해로 탈출을 하게 되는데, 지도부가 검거되자 마산지역의 조선공산당 활동은 사실상 중단되게 되었다.

이것은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 따른 결과이기도 하겠지만, 당원의 대부분이 일제에 쉽게 노출될 수 있는 대중단체의 간부직에 있었던 그들 자신들의 잘못된 활동 때문이기도 하였다.

일제하 마산지역에서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계열 외에도 아나키즘(무정부주의)계열의운동도 존재하였다. ‘마산 아나키스트 그룹’이 바로 그들이다.

마산 아나키스트 그룹은 1925년 김형윤을 중심으로 조한응, 김계홍 등이 최초로 시작하였는데, 본격적 활동은 1927년 서울에서 ‘김산’이라는 무정부주의자(직업은 목사)가 내려오면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외국인 선교사나 일제로부터 벗어난 자주적인 독립교회 활동을 전개하여 대중들의 지지를 많이 받았다.

대중의 지지를 확보한 마산의 무정부주의자들은 창원의 무정부주의 단체인 ‘창원 흑우연맹’과 연계하여 무정부주의에 관한 서적을 탐독하면서 일제에 저항하는 반제국주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1928년 상해에서 개최된‘동방 무정부주의자 연맹 결성대회’에 회원인 이석주를 파견하여 국제단체와 연계하기도했다.

그러나 마산과 창원에서 활동하던 이석주가 일제에 체포되면서 김형윤 등 다른 조직원들도 검거되어 마산아나키스트 그룹의 활동은 현저히 약화되었다.

일제하 마산지역에서는 이후에도 일제에 대한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1929년 조선전역을 강타한 광주학생운동의 여진 속에서 발생한 ‘친일교사 배척운동’ 시위사건과 1937년 신사참배거부를 주도했던 마산 창신학교의 학생들은 폐교가 될 때까지 일제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였다.

이외에도 수없이 많은 노동자·농민 등 생산대중의 일제에 대한 투쟁도 일제하 마산지역의 민족해방운동에서 당당히 그 역할을 다했다고 할 것이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이승만 독재와 박정희 독재정권에 대항하는 민주화운동의 성지로자리잡은 마산의 역사적 위상은 바로 일제의 억압에 굴하지 않고 치열한 저항정신을 보여준 마산인들의 역사적 경험에서 이미 예고되었다고 해야할 것이다.<<<

신춘식 / 당시 동아대학교 사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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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2.27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8) - 강점제2시기

<마산포와 신마산이 연결되다 - 중앙마산의 형성>

 2) 중앙마산이 철도용지로 강점되는 과정

철도용지를 둘러싼 일제의 공공연한 토지약탈은 마산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경계 측량을 할 때 경계를 속인다든지, 원래 정해진 경계보다 턱없이 많게 토지를 점령한다든지, 군용지라고 속여 민간의 토지를 침범한다든지, 일본군의 군용도로를 만든다면서 민가를 헐어버린다든지, 개인 사유지를 일본정부에서 내려준 것이라면서 팻말을 박아 자기 땅으로 만들어버린다든지 하는 등 일본인들의 횡포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았습니다.

마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마산의 철도용지도 지난 주 포스팅에서 언급한 한일의정서 제4조를 적용시켰던 겁니다.            
2012/02/2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번천사 (97) - 강점제2시기
 
철도용지 확보과정에서 마산의 일본 세력은 급속도로 확대되었고, 그 과정에서 도시도 중대한 전환기를 맞았습니다. 조약체결 직후부터 마산에는 일본군인과 군량 및 마량(馬糧)을 실은 일본군함이 무시(無時)로 드나들면서 유린했는데 이 시기에 철도용지 명목으로 토지를 압수했던 겁니다.

압수 면적은 일본인 대지주 박간(迫間)의 개인사유지를 제외하고도 12만평(1,210斗落)이나 되었습니다. 지금은 마산합포구청이 된 옛 마산시청 일대의 중앙마산지역이었습니다.

토지강탈에 대한 구체적인 사례 하나를 소개합니다.

1904년 7월 일제는 점찍어둔 철도부지에 입표(立標)하고, 마산포 내 한국인 소유의 토지를 아무런 보상도 없이 강제 점용하는 폭거를 저질렀습니다.

이런 사정에 대하여 마산포 주민의 안녕을 책임진 감리가 도면을 그려가면서까지 그 부당성을 외부대신에게 보고하기도 했지만 달라진 것은 없었습니다.

마산포 주민들의 생활근거지를 박탈한 일제는 그 보상은 외면한 채 오히려 철도규칙을 만들어 한국인과 한국의 관리들을 우롱하였습니다.

창원보첩 四, 광무 9년(1905년) 2월 5일자 감리보고 제8호에 나와있는 철도규칙의 내영은 다음과 같습니다.

㉮ 철도 위를 보행하는 자 및 전선을 손대는 자는 그 자리에서 체포하여 엄벌에 처하고
㉯ 군용철도와 전선을 파괴하는 자 또는 그 모의를 꾀하는 자는 사형에 처하며
㉰ 범행자가 속한 군수와 촌리도 엄벌에 처한다

이런 악랄한 규정 때문에 억울하게 재산 뺏기고 심지어 목숨까지 잃는 사례도 많았습니다.
다음 사진은  당시 철도용지 수용 방해자 학살장면입니다. 1906년 찍은 사진인데 마산에서 촬영한 것은 아닙니다.


토지주였지만 토지의 매매와 경작은 물론 심지어 출입까지 통제 당했던 마산포 주민들은 이 악랄한 일제의 탈취에 격분하여 창원감리에게 사정을 호소하였고, 창원감리 현학표는 이런 사실을 외부대신에게 보고하였습니다.

이 보고에 대해 외부대신은 지령을 통해 간섭 의사를 밝혔으며 이때부터 이 문제가 확대되었습니다.

정부의 지령에 따라 감리는 뒤늦게 철도부지에 대해 조사를 착수하였습니다.

조사과정에서 새로운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일인(日人)들이 토지를 강탈하면서 당시 일본영사와 철도감부반장이 일본인 박간(迫間)의 하수인 홍청장(弘淸藏,)
과 공모하여 한국인 손덕우를 앞 세워 한국인 토지주들을 회유했던 겁니다.  철도부지와 관련된 기록에는 모두 홍청장으로 되어 있었습니다.
(이 弘淸藏은 후에 남성동 매립 때 박간의 하수인 역할을 하는 당시 마산의 유지 일본인 홍청삼입니다
)

한국인 손덕우는 구한말 창원 감영의 감찰사 역임한 지역 유지로, 마산민의소 의장, 마산구락부 초대부장, 마산정미소 중역, 창신학교 부교장, 기독교 장로, 한말 박영효의 지인으로 창신학교 설립자 중 한 사람입니다.
1910년대에는 마산부 참사와 학무위원을 지낸 사람입니다. 마산포 사건 때도 박간(迫間)의 요구에 응해 박간이 원하는 토지를 구입하기 위해 지주를 찾아 통영까지 가기도 했던 인물입니다.
지역에서 덕망은 높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손덕우와 관련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처음에는 일본인들이 손덕우를 통해 토지 가격은 얼마든지 지불하겠다고 약속하여 토지주의 서명날인을 받아 표목까지 박았지만, 뒤에 가서 이 약속을 부인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손덕우만 구금되는 수모를 겪고 일본영사와 철도감부반장은 그 책임을 서로 전가시키며 발뺌을 했다 합니다.

여기까지가 일본군(日本軍)의 마산철도용지 강점 과정에 대한 개략적인 내용입니다.
김용욱과 김준의 연구에서 밝혀진 내용을 옮겼습니다.

이 이후의 전개과정에 대해서는 더 이상 기록을 발견하기가 어려웠습니다. 
하지만 을사조약 체결로 통감정치가 시작되었기 때문에 철도용지 강점 계획이 일본의 의도대로 쉽게 시행되었을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1911년 간행된『馬山と鎭海灣(마산과 진해만)』에서 나오는 통계와 다른 여러 자료에서도 중앙마산지역의 철도용지에 관한 기록이 있습니다.
거기에 보아도 을사조약 직전에 일본군부의 의도대로 마산의 철도용지가 결정된 것으로 짐작되었습니다만, 그후 제작된 사정지적도와 사정토지대장을 확인해본 결과, 사실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단, 원래 그들이 계획했던 규모와 형태와는 조금 달랐던 것 같았습니다.

아무튼 이렇게 탈취한 토지 중 일부는 나중에 마산 거주 일본인들의 자녀 교육비 충당을 위한다는 명복으로 일본거류민단의 손에 넘어갔습니다.

1908년 일본거류민단은 예산의 상당부분을 점하는 교육비 부담을 경감시키기 위해 철도용지를 싸게 대부 받아 원하는 사람에게 전대(轉貸)함으로써 연간 10,000원의 이익을 얻었습니다. 당시 백미가 1石當 19원이었으니 적은 돈은 아니었습니다.
강제로 빼았은 땅을 임대하여 후세교육비로 사용했던 셈이죠.

강압적으로 무상 탈취한 토지를 철도용지란 이름으로 20여 년간 소유한 일본 군부는 1920년대에 들어서 입장이 바뀝니다.

1920년대 들어서자 마산부민들이 마산포와 신마산의 중앙부에 자리잡고 있는 철도용지가 마산의 도시발전을 저해한다고 주장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신마산에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거리상 불편했던 관아건물의 위치에 대하여 불만 때문에 관아건물을 중앙지역으로 옮기자는 요구가 일었습니다.

이런 여론에 따라 일제는 철도용지를 마산부에 불하하게 되었고 마산부는 이 토지 중 상당 부분을 기업과 개인에게 불하하는 한편 마산의 중요한 광공서를 이곳으로 이전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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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 1 1945년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면서 비로소 주체적인 주거문화를 창달할 수 있는 계기를 맞게 되지만 경제 사회적 제반 여건이 불비하여 주체적인 역량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5 /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

2)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 2 일제하의 중·상류계층의 주택 유형으로는 양식주택과 절충식(개량식)주택·개량 한옥·문화주택·공동주택·영단주택 등을 들 수 있다. 양식주택은 서양식주택을 말하며, 절충식 주택은 과도기적 상황에..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4 /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

2) 개항기부터 일제시기까지 - 1 구한말(舊韓末)까지도 조선 사람들이 살았던 보편적인 주거 유형은 한옥이었다. 1882년 그리피스(W. E. Griffis)가 쓴 한국에 관한 역사서 『은자의 나라 한국』에는 당시 전통 한옥을..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3 / 조선시대 이전

1) 고대에서 조선시대까지 - 3 조선시대는 우리나라 주거문화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시기이다. 반상(班常)을 철저히 구분한 신분사회였기 때문에 신분에 따라 주택의 크기나 형태를 규제하는 가사규제(家舍規制)가 있었다. 신..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2 / 조선시대 이전

1) 고대에서 조선시대까지 - 2 주거사(住居史)에서 청동기시대와 초기철기시대를 구분하는 또 하나의 지표는 구들의 시작이다. 한국 주거문화의 정체성을 압축적으로 나타내는 구들은 난방기술의 획기적인 발전인 동시에 지상주거로의 변..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1 / 조선시대 이전

오늘부터는 <경남지역 주거변천사>를 포스팅하겠습니다. 6~7년 전에 『경남도사』에 싣기 위해 간략히 쓴 글인데 출판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 블로그에 올립니다. 어차피 공유하기 위한 글이니 이해하리라 생각합니다. 한반도 동남부에 ..

기억을 찾아가다 - 25 (마지막 회)

25. 3·15의거에 대한 기억 「그날 나는 ‘극장 구경 시켜주겠다’는 주무돈이란 동네친구의 호의에 끌려 10리 가까이 되는 길을 걸어 ‘시민극장’으로 갔다. 그때 나는 대학입시에 낙방한 직후라 의기소침해 있던 상황이었다. 우..

기억을 찾아가다 - 24

24. 이승만 행사 -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 노인잔치...... 내 고등학교시절의 어느날 동회 서기가 들고온 책자를 잠시 훑어본 기억이 남아있다. ‘한국 정치인 99인집’이란 제목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이승만편이 현격히..

기억을 찾아가다 - 23

23. 떠돌이들, 좀도둑 전쟁이 끝나자 대다수의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들갔지만, 상당수의 사람들은 남아있었다. 좌우갈등의 와중에 있었던 몸이라 돌아갈 수 없는 처지였다고 들은 문씨 같은 사람들도 있었는가 하면, 가봤자 땅뙈기 ..

기억을 찾아가다 - 22

22.기합, 주먹자랑, 몸단련 중학교시절에도 조금은 의식되었지만 신경을 곤두세울 정도는 아니었었는데, 고등학교에 들어가자 그 문제들은 신경의 상당부분을 자극하여 행동거지의 상당부분을 조종하고 지배할 정도로까지 작용했다. 소위 ..

공간의 재탄생 - 재생 건축 '선유도' 02

지난주에 이어 녹색 기둥의 정원 에서부터 선유도 이야기를 이어 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 - 녹색 기둥의 정원 정수지의 콘크리트 상판 지붕을 들어내 기둥만을 남겨 만들어진 이 정원은, 선유도 이야기관 의 설명에 의하면 ‘휴식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