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2017.03.27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마지막회, 저자를 회고하면서

 

2015323일 시작해 이번 회까지 만 2년 동안 포스팅한 목발(目拔) 김형윤 선생의 마산야화(馬山野話)」143꼭지가 이번 회로 끝납니다.

지나간 시절 마산사회와 마산 사람들을 추억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되었습니다.

 

다음 주부터 연재될 포스팅은 신삼호 건축사가 준비합니다.

(주)유에이건축사사무소 대표 신삼호 건축사는 건축작품활동도 활발하지만 도시와 건축의 역사에도 관심이 많아 부산대 대학원 건축학과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현재 논문 준비 중입니다.

블로그에 포스팅하게 될 내용은 논문 준비과정에서 접하게된 여러가지 자료들을 소개하고 해석하는 형식이 될 것이며 분량은 약 20여 회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산야화> 마지막 회, 저자를 회고하면서-

 

조병기(趙秉基)

 

김형윤 공은 1903년 마산시 서성동에서 김양수 씨의 3남으로 출생하였다.

공의 성장과 수학 과정에 대하여서는 소상하지 않으나, 일생을 통하여 소년기에 돈을 번 일이 꼭 두 번 있었다 하는데 18세 때 진영 대목장에서 조장수를 한 일이 있었고, 또 한 번은 창원산업조합에 가마니 검사원으로 취업을 하여 월봉 10원이란 대금을 벌어 쓴 일이 있었다고 자랑삼아 얘기하곤 하였었다.

 

20대에 손문기 씨가 경영하던 조선일보 기자를, 30대에 고교(高橋) 씨가 사장이던 남선일보 기자를, 40대에는 창산(蒼山) 이형재(李瀅宰) 씨가 경영하던 동아일보 기자를 역임하였으며, 1947년에는 김종신 씨가 경영하던 남조선민보를 인수하여 마산일보로 개제(改題)한 후 현 경남매일(경남신문)로 넘어가기까지 최근 20여 년간을 경영하였으니 공의 일생은 그야말로 언론에 모조리 몸을 바친 거나 다를 바 없다.

 

그러나 공의 진면목은 유우머와 해박한 풍자에 있는 것이며, 가지가지의 기행과 괴벽(怪癖)은 김립(金笠)이나 정수동(鄭壽銅)을 방불케 하였고, 특히 방랑벽이 있어 국내는 물론, 일본 만주 등지를 바람처럼 편력(遍歷)하다가 서울에 돌아와서 조국 해방을 맞았다.

 

해방 그 해 1230일 신탁통치 반대시위에 선봉으로 나섰다가 검거되어 1947년 봄에 석방, 마산으로 돌아왔던 것이다. 공의 모든 언행의 근원이 되는 인생관이나 사회관을 이해하려면 먼저 공의 사상적(무정부주의) 배경을 알아야 한다.

 

공은 끝까지 부정, 불의를 증오하였고, 자유와 정의를 위하여 투쟁하였고, 권력에 굴하지 않았고, 부귀를 탐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많은 곤욕과 박해가 노상 뒤를 따랐으며 일정 때는 옥고도 수없이 치렀다. 3년 전 봄에 공은 필자에게 말하기를 우리가 이제 죽을 날이 멀지 않았으니 미력이나마 마산 사회를 위하여 뭔가를 기여하고 가야 하지 않겠나?” 하면서 마산시사를 편찬하는 일을 시작하자고 하기에 쾌락(快諾)를 하고 발족하였던 것이나 오늘날까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 것을 오직 죄스럽게 생각할 뿐이다.

 

끝으로 공을 애칭 또는 별명으로 목발(目拔)’이라 부르게 된 일화를 여기 소개하면서 공의 약전(略傳) 겸 회고담을 공을 추모하는 유우머로써 맺을까 한다.

 

우금(于今) 50년 전 마산 앵정(櫻町)의 벚꽃이 만개(滿開)일 때 일인 요정에서는 가설무대를 지어놓고 일인 게이샤(기생)’들이 삼미선(악기)을 통기며 일남(日男)들과 어울려 가무가 한찬 무르녹고 있었다.

 

한 조선인 지게꾼이 흥에 겨워 관중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일() 헌병이 민족적 모역을 주며 그를 끄집어 내었다. 이를 본 김 공은 의분을 참지 못하여 비호 같이 일() 헌병에게 달려들어 그의 한쪽 눈을 뽑아 버렸던 것이다. 공의 용기도 용기려니와 당시 힘이 또한 장사였었다.

 

목발(目拔)’이란 이 무용담에서 비롯한 것이나 유래를 모르는 사람들은 절름발이로 오단(誤斷)을 하여 빚어지는 희화(戲話)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끝

 

  <마산야화 초판본(1973)과 재판본(1996)>

 

 

-김형윤 선생을 회고한 조병기(趙秉基) 선생은 창원의 대표적인 아나키스트였다.

 

창원공립보통학교 훈도였던 조병기 선생은 1928년 핵심회원 6명과 비밀결사체 흑우연맹(黑友聯盟)’을 조직하였다.

흑우연맹은 창원.마산의 열혈청년들로 구성되었다. 면면을 보면 창원공립보통학교 동료교원이었던 손조동(23), 창원 북동출신 박창오(朴昌午.20)와 박순오(朴順五.19), 창원 북면의 김두봉(金斗鳳.20), 창원 동면의 김상대(金相大.20), 창원 북동의 김두석(金斗錫.21)이었다.

이들은 나라사랑과 겨레번창의 유일한 길은 민중계몽과 혁명적 투쟁에 진력하는데 있다고 굳게 믿었다. 그리고 이러한 애국심도 강력한 정신적 기반이 없으면 뜻을 이룰 수 없다고 생각했다.

이런 입장에 따라 조병기 선생은 청년.학생들이 민족의식과 항일사상을 고취하는데는 오로지 민중계몽밖에 없다고 본 것이었다.

1927<청년에게 고함(크로포드킨 저)>이란 책자를 비밀리에 출판 보급하려다 일경에게 발각, 체포되었다. 이 때문에 출판법 위반으로 부산지방법원 마산지원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3년의 언도를 받기도 하였다.<<<

 

 

 

 

 

 

 

 

Trackback 0 Comment 2
  1. 박진섭 2017.03.29 13:20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수고하셨습니다. 고향 마산의 숨은 역사를 이렇게 조감해 주시니 평범한 독자의 한사람으로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언젠가는 많은 마산 시민들이 역사의 깊음을 음미하면서 인생의 깊이를 더하는 날이 오겠지요. 지금은 일부 일급 교양인들만이 음미하는 듯합니다. 이상하게도 날이 갈수록 왜 물질적 풍요와는 정반대로 정신은 황폐해지는지 모를 일입니다.

2016.09.12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112. 포시의 명 강연

112. ‘포시(布施)’의 명 강연

 

포시진치(布施辰治)라고 하면 50대 이상의 조신인 사회주의자나 민족운동가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사람이다.

 

수많은 자유주의자 혹은 좌경 변호사 중에도 상촌진(上村進), 산기금조미(山崎今朝彌) 포시(布施) 등은 학의 존재라고 할 수 있으며 하천풍언(賀川豊彦)을 종교가라기보다는 사상가로 보는 것처럼 포시(布施)도 급진 사상가로서 일반은 간주하였다.

 

사법성과 내무성에서는 기회를 노리고 있던 차인데, 일본 공산당 사건의 변론공판 변론 중 당국을 신랄하게 비판한 것이 정부 당국의 비위를 거슬리게 되어 치안 유지법을 적용하여 4년 형의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피고인 포시(布施)는 판에 박은 주소, 성명을 묻는 판사에게 무직이라고 하기는 싫었던지 법률 기술자라고 비꼬아 답변을 해서 화제거리가 된 일도 있다.

 

布施辰治(후세 다쓰지, ふせ たつじ) ; 18801113~ 1953913, 미야기 현 이시노마키 시 출신의 일본의 인권변호사, 사회운동가이다. 2004년 일본인으로서는 최초로 대한민국 건국훈장(애족장)을 수여받았다.(옮긴 이)

 

 

그가 사회운동이나 약소 민족운동에 대해서는 발분망식(發奮忘食)으로 활약하였으며, 정의를 위하여 사자후(獅子吼)하는 것은 그의 성격이요 생리하고 할 수 있겠으나,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가장 인상 깊은 큰 사건 몇 가지를 들어보기로 하겠다.

 

총독부 폭파 미수로 끝난 의열단의 김시현 사건(1923), 상해부두에서 전중의일(田中義一) 대장 암살 미수사건(1921)으로 검거되어 장기(長崎)로 이감된 의열단의 김익상 씨(당시 동지 오성륜 씨는 일본 영사관 유치장을 파옥 탈출하였음), 세칭 백단일명(百單一名)의 제2차 조선 공산당 사건(1925), 충주의 흑기(黑旗)연맹사건(1922), 동경 흑우(黑友)연맹의 재경학우회 습격사건(1928), 대구 무정부주의자의 진반(眞反) 연맹사건(1926), 일본 궁성(宮城) 이중교(二重橋) 폭파 미수의 의열단 김지섭 사건(1924) 등등인데 김지섭 씨의 옥사가 타살이 아닌가를 형무 당국에 맹추궁 후 시체를 인수하여 흑우연맹에 인도하였으며, 대역죄의 김자문자(金子文子)의 옥사도 추궁 후 흔구연맹에 인도한 것은 특기할 사실이다.

 

이 대역죄는 대정(大正) 천황과 황태자 유인(裕仁, 현 천황)을 암살 음모 사건이라 했는데, 연루자 10여 명이 예심 면소(免訴)되고 그 주동으로 박열과 그의 애인 김자문자(金子文子) 2명의 특별 재판 때 포시(布施) 변호사는 장장 다섯 시간을 물 한 모금 마시지 않고 열변을 토했던 것은 법조계를 경탄케 하였으며 자신도 통쾌하였다고 술회한 바 있었다.

 

포시(布施)가 전기(前記) 김시현 사건 변론 차 내조(來朝)하여 그때 마침 김해읍에서 일어났던 농민대 형평(衡平)사원간의 충돌 사건을 현지 답사하고 마산에 들렀을 때이다.

 

19238월 그를 연사로서 초청한 사람은 재마 신진 청년들이었지만 이 가운데는 그를 평소 사숙(私淑)하고 무상 접촉해 왔던 명대(明大) 재학 중 동경에서 변호사 시험에 합격하였던 김형두이다.

 

손문기의 개회사에 김형두 통역으로 개최된 강연 장소는 민의소였으며 임관(臨官)은 가등환일(加藤歡一) 즉 서장과 김 모라는 조선인 고등계 형사 주임이다.

 

연제(演題)무산 계급의 정신이었는데 연사가 일본 굴지의 변호사이며 쟁쟁한 학자 투사인데 비하여 임관(臨官)은 일개 미미한 시골 서장이었으므로 그에 대한 예의는 매우 경건하였고 또 긴장하고 있었다.

 

연설은 약 한 시간이었는데 연설 중에 무산 계급의 정신 운동을 여하히 하느냐? 그 방법은…………하는 대목에 임관석에서 주의 소리가 있자 연사는 이내 주의가 있으니 그러면 화제를 바꾼다고 멋있는 화술로 이어 가다가

 

제군! 동방에 여명이 트면 우주의 암흑은 무산하는 것과 같이 우리 무산계급의 정신운동도 단결이 이루어지는 날에는 전 사회의 비밀 정치와 권력 계급은 여지없이 분쇄되고 말 것을 확신한다고 끝을 맺었다.

 

이때 임관들은 당황하여 중지를 시킬 양으로 기립하였으나 연사는 이미 결론을 내리고 난 뒤라 마치 그 광경은 닭 쫓던 개 지붕 쳐다보는 격이 되었던 것이다.<<<

 

 

Trackback 0 Comment 0
2016.08.08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105. 국내 최초의 노동제

105. 국내 최초의 노동제

 

19231월 당시 동경서 유학한 몇몇 청년 김형두(明大 법과 재학 중, 변호사 시험 합격)를 필두로 손문기, 이주만 등이 연휴(連携)하여 신인회(新人會)를 조직하였다.

 

이것이 모체가 되어 그 해 여름에는 노농동우회(勞農同友會)’라는 것을 조직 발족하였다.

명칭은 노농으로 있으나 그 대상은 공장 노동자가 아니고 부두에서 일하는 하루살이 자유노동자들로서 그 숫자는 극히 적었다.

 

최초에는 오월절이란 이름 아래 프랑스를 위시하여 세계 남녀 노동자들은 하루의 행락을 마음껏 즐기는 극히 평화로운 날이었다.

 

호주 멜본 시에서는 시위 행렬을 하는 노동자들에게 시장은 정중하게 경의를 표하였지마는 그 반대로 미주 시카고에서는 헤이 마켓에 이르는 평화시위 군중과 경찰이 충돌함으로써 발포까지 하여 다수 노동자가 부상하고 또 검거되었다.

 

 

<헤이 마켓 사건을 묘사한 삽화>

 

 

재판 결과 시위자 중 평소 극렬분자로 지목되어 오던 무정부주의 노동자 5명을 사형에 처한 것이 발단이 되어 이듬해 188651일을 기하여 전 세계 노동자가 총궐기하는 메이데이로 발전, 오늘에 이르른 것이다.

 

일본에서는 1911년 인쇄공연합회 주최로 옥내서 기념식을 거행한 기록이 있으나 192051일은 제34회 세계 메이데이(일본은 제1회가 됨)로서 큰 행사가 있었으므로 한국도 여기에 영향을 입어 1923년 제37회 메이데이에는 마산 노농동우회 주최로 노농회 외 당시 초기 사회주의 운동자들과 합세하여 시가시위 행렬과 더불어 최초의 행사가 벌어졌는데,

 

이때 마침 추산공원에서는 마산 인근 군부(郡部)에서 모인 한문 선비들이 백일장을 열고 시회(詩會)가 한창 때였는데 이것을 주최한 자가 평소 때 친일파로 비난과 지탄을 받아 오던 매일신보 마산지국장 서상환이란 자라,

 

시위 군중들은 갑자기 흥분을 참지 못하고 백일장을 습격하자 서상환과 유학도들은 삽시에 불뿔이 흩어져 백일장은 완전한 백지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것을 보고 마산부민들은 시위자들에게 열렬한 박수를 보내주었다.

 

여기에는 선동자도 선창자도 아무도 없었지만 한 마음으로 친일파를 증오하는 울분이 동시에 폭발한 자연발생적인 결과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행동파 명단을 기록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정찬, 김명규, 김기호, 여병섭, 김형두, 손문기, 김계호

노농관계자 ; 오학선, 강덕보(이상 무순) <<<

 

 

 

 

 

 

Trackback 0 Comment 0
2015.09.28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48, 일류 요정들

48. 일류 요정들

 

국치병합 전만해도 요정이란 이름은 없고 오직 점잖은 측에서 한담이다 혹은 밀담을 하려면 소위 들어앉은 집이란 곳을 찾는다.

그런 곳은 거의 은군자(隱君子)나 노기(老妓)라는 중년층 여자가 손님을 영접하고 손님의 청에 의해서 기녀를 불러 주효(酒肴)를 벌이며 여기에 북, 장고, 가야금, 거문고 등이 따른다.

말하자면 매우 우아한 현상이다.

차차 세월이 흐르고 시대가 변함에 따라 화류의 격조가 저질로 흐르기 시작했다. 인육을 현금과 직접 거래하는 청루(靑樓)가 생기고, 게다가 격을 조금 올린 니마이모찌(이중이란 말인데 연회장 작부도 되고 매춘도 할 수 있다는 의미) 감찰제도도 있었다. 이것은 기녀의 자유 여하로 행할 수 있는 일이다.

그것이 권번이니 조합으로 일본 화류계 풍습이 반도 산하로 물려 닥쳐 도시란 도시에는 기생권번이 없는 곳이 별로 없었으니 자연 요정이라 것도 생기게 되었다.

<신윤복의 청루소일>

 

마산을 말하면 신마산에는 개인 위주의 망월루, 탄월, 이예옥(伊豫屋), 동운과 구마산 시장 입구에는 지금은 상포(商鋪)가 즐비해 있어 석일(昔日)의 면모는 없어졌으나 일인 요정(목조 2) 기미노도(君乃都)가 상당히 광역(廣域)을 점하고 있었고 전 남선인쇄소 자리에 일복(一福)이라는 한소(閑少)한 곳도 있었다.

한편 구마산의 조선인이 경영하는 요정은 현재 오동동의 춘추원 자리에 1914년경부터 여관 겸업을 하던 목조 2층의 산해관이 있었을 뿐이다.

8,9년 뒤 1921년경에는 서울 이영석이라는 사람이 행정(幸町, 수성동) 해안에 초가를 세 얻어 한양관이라는 옥호로 영엄을 개시한 것이 손수 서울 요리점의 최초인 것이다.

숙수(熟手, 지금의 쿠크)의 솜씨가 좋았던 관계로 손님이 일약 성시를 이루어, 중성동 손 삼찰 댁(고 손문기 先考 직명) 2층 집으로 이전하였다가 영업이 은진(殷賑)함에 따라 해방 후까지 계속하던 현 반도여관 자리로 이전한 것이 한 때 유명한 한양관이다.

현재 제일은행 담 뒤 고무신 도매상 근처에 강옥진이란 여자가 경영하던 고급 요정이 있어 인기는 한양관과 쌍립되었으나 불행히도 변태적 성생활에 탐닉되어 축적한 재산은 그 남자에게 사기당하고 파산하고 말았다.

한양관주(漢陽館主) 이씨도 사망하고 강옥진 여사도 없어졌으나 한양관은 성업이고 요정 이용도가 늘어지니 동성동 건너편에는 장춘관, 그리고 현 동양여관 자리에는 천해장이, 그리고 현재 오동동 해동의원 자리에 대동관을 이어 군소 요정이 우후죽순 격으로 생겼다.

중화요정은 전 일본 요정 기미노도가 서방(緖方)여관과 대도(大渡)여관으로 변한 자리에 아세루(亞細樓)가 생기고 오동동에 봉래관(蓬萊館), 시민극장 건너편에 삼합루(三合樓) 그리고 대유루(大有樓) 등이 있었다.

아세루 주인은 중국무술 18괘에 능숙했던 인격자이며 붕래관 주인은 마산서 사망, 시체는 본국으로 송장(送葬)했으며, 두 형제는 일중전쟁 발발 직전 국민당 정부 소환으로 귀국했는데 그 후 풍문에 들리는 말에는 왕조명(汪兆銘) 정권의 반대파에 가담, 활약하더란 것이다.

아세루는 없어지고 봉래관은 박삼조가 194610월 폭동 때까지 경영하였다는 것이다.<<<

 

 

 

 

 

Trackback 0 Comment 0
2014.09.01 00:00

마산·창원 역사 읽기 (15) - 해방에서 5·16까지

2. 청동기시대에서 10·18까지

2-8 해방에서 5·16까지

 

한 시대의 사회운동을 살피는 일은 현재 우리사회의 주류 기득권 세력이 어떻게 형성되어 왔는지를 규명하는 중요한 단서가 된다.

작용이 있으면 반작용이 있게 마련이고, 사회를 바꾸려는 사람들이 있으면,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반대 세력도 있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사회운동이 궁극적으로 그 사회를 형성하고 있는 낡은 기득권 세력을 교체하기 위한 것이라고 볼 때, 이에 맞서 사회운동을 방해하고 탄압함으로써 기득권을 확대 재생산해온 세력의 실체를 파악해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우선 1945년 해방 직후의 상황부터보자.

당시 마산 지역사회의 여론주도층 인사들은 대략 세 가지 부류로 나뉜다. 사회주의자와 무정부주의자, 그리고 친일파 출신인사들이 그들이다.

이들 3파는 해방 이틀 후인 1945817일 마산 창동 공락관(이후 시민극장으로 바뀜)에서 건국준비위원회(건준·위원장 명도석)를 함께 결성해 치안유지를 담당했다.

건준은 해방 후 지역에서 생겨난 최초의 자치기구인 동시에 사회단체였다.

이처럼 3파가 연합한 마산 건준에는 친일혐의가 있는 일제하의 시의원 출신 인사들도 참여하고 있었다.

그러나 위원장은 물론 조직과 서기, 그리고 실질적인 행동대 격인 치안대장 등 핵심요직은 모두 진보적인 사람들이 맡고 있었다.

 

-미군정과 함께 두 갈래로 나뉜 사회운동-

이같은 건준의 진보적 색채에 불만을 품은 친일인사와 무정부주의자들은 9월로 들어서면서 일제히 건준을 탈퇴하게 된다.

이들의 건준 탈퇴는 서울에 진주한 미군이 건준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방침을 밝힌 것과때를 같이하고 있다.

이 때부터 마산의 사회운동은 두 갈래로 나눠지게 된다.

<좌우익 분열 / 광복 2주년 기념행사를 따로따로>

 

사회주의자들은 건준을 중심으로 미 군정과 대립적인 관계에 놓이게 되며, 건준을 탈퇴한 이들은 ‘한민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미 군정에 적극 협조하게 된다. 이 단체는 이후 ‘국민회’로 이름을 바꿔 마산지역의 대표적인 우익단체가 된다.

여기서 활동하던 사람들은 또한 각종 우익 청년단체를 결성해 계속 세력을 확장해 나간다.

당시 우익단체의 대표적 인물은 주로 손문기·민영학(국민회), 유석형·손상진(광복청년단·대동청년단), 문삼찬, 조철제, 노병덕·구혜숙(민족청년단), 이인호(서북청년단) 등이었다.

이들은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경찰의 보조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등 초법적인 공권력을 행사하면서 특무대·경찰과 함께 민간인 학살사건을 주도하기도 했다.

19603·15의거 당시 반공청년단으로 이름을 바꾼 이들은 시위대를 향해 폭력테러를 자행하면서 무자비한 진압에 나서기도 했다.

3·15의거 이후에는 잠시 위축된 듯한 모습을 보였으나 19615·16군사쿠데타 이후 박정희 정권 치하에서 반공연맹으로 다시 규합한다.

이 단체는 오늘날 자유총연맹 등 관변단체의 모태가 됐다.

한편 건준에서 우익세력이 탈퇴한 직후 사회주의자들은 인민위원회와 민주주의 민족전선 마산시위원회 등을 결성해 미 군정의 탄압에 대항했다.

들은 특히 194610월 미 군정을 상대로 대대적인 봉기를 일으켜 마산에서 12~17명, 창원군에서 5명 등 많은 희생자를 냈다.

당시 10월 봉기에 참가한 경남 도민은 18개 시·군에서 최소 74000명, 최대 60만 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희생자의 숫자나 시위참여 인원으로만 본다면 19603·15의거나 1979년 부마민주항쟁보다 훨씬 대규모의 항쟁이었던 것이다.

사회주의자들은 또 194727일에도 일제히 봉기를 일으켰으나 역시 경남·북에서 39명의 사망자를 낸 후 지하로 잠적하거나 월북하고 말았다.

<마산여자중학교 학생들의 휴전반대 시위 / 1953년> 

 

-10월 봉기 이후 저항세력 일소-

그러나 이들이 남긴 후유증은 컸다.

당시 이승만 정권은 사회주의자들에게 협조한 혐의가 있는 국민을 상시적으로 감시·관리하기 위해 ‘국민보도연맹’이라는 조직을 만들었다.

여기에는 실적을 채우기 위해 좌익세력과 전혀 무관한 평범한 시민들도 무차별적으로 가입시킨 경우가 많았다.

이승만 정권은 한국전쟁이 일어나자 이들이 북한 인민군에게 협조할 것을 우려, 모두 체포·구금한 후 대부분을 재판 절차도 없이 학살해버렸다.

이로 인해 마산에서도 무려 1680여 명이 학살당했다. 이로써 사회주의자는 물론 이승만 정권에 대한 저항세력은 모두 제거되어 버린 것이다.

이승만 정권의 폭압에 숨죽이고 있던 시민들은 19603·15 정선거를 계기로 봉기를 일으키게 된다.

3·15의거는 표면적으로 당시 야당이던 민주당이 주도했으나 민간인 학살 유족들의 한이 폭발한 사건이기도 했다.

4·19혁명으로 이승만 정권이 물러나자 지역에서 가장 먼저 일어난 사회운동은 민간인학살 진상규명 운동이었다.

524일 노현섭·김용국 두 사람이 ‘정부는6·25 당시의 보련(保聯) 관계자의 행방을 알려라!! 만일 죽였다면 그 진상을 공개하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마산시내에서 침묵시위를 벌이면서 시작된 진상규명운동은 마산유족회와 경남유족회·전국유족회의 창립으로 이어진다.

 

노현섭(우측 사진)씨는 전국유족회장을 맡아 이 운동을 주도하지만 이듬해 5·16데타 직후 유족회 간부들이 모두 구속되면서 좌절되고 만다.

4·19에서 5·16에 이르는 기간은 흔히 혼란기로만 알려져 있다. 많은 운동단체가 생겨났고 연일 시위가 끊이지 않았으니 위정자의 입장에선 혼란기로 볼만하다. 그러나 이는 억눌렸던 요구의 자연스런 분출이었다.

4월혁명 때 민중이 흘린 피의 댓가로 집권한 민주당은 당연히 자유당 독재의 잔재를 일소하고 이승만 장기독재에 억울하게 희생된 피해자들의 복권을 추진했어야 했다.

그러나 민주당 정권은 이같은 국민의 요구와 정반대의 방향으로 나아갔다.

민주당의 배려하에 이승만은 미국으로 뺑소니를 쳤지만 그 에게 빌붙어 권력을 누리던 국회의원들은 여전히 국회 의석의 과반수를 차지한 채 떵떵거리고 있었다.

국민들이 이들을 단죄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당연했다.

이에 따라 의사당 앞에는 대학생과 혁신세력을 중심으로 한 시위대가 매일같이 몰려가 데모를 하였고 부산에서도 대학생들에 의하여 국회해산 데모가 일어났다.

4·19이후 석방된 정치범의 복권을 요구하는 데모도 발생했다.

과도정부가 자유당 치하에서 정치범으로 복역하던 자들을 모두 석방은 했으나, 그들

에 대한 공민권을 회복해 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4·19 직후는 과연 혼란기 였나-

이승만 정권의 북진통일론에 눌려 잠재돼 있던 평화통일 논의도 활발하게 일어났다.

민족자주통일협의회와 영세중립화통일추진위원회를 비롯,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 만나자 판문점에서!’라는 유명한 구호를 남긴 남북학생회담 추진이그것이다.

마산의 혁신세력은 196055일 <마산일보>에 ‘한국 혁신세력 집결 마산 촉진회’ 명의의 격문을 발표하면서 활동을 재개하게 된다.

이들은 57일 혁신정당 발기인 46명 중 35명이 참석한 가운데 대회를 열고 한범석을 임시 의장으로, 이상두·김문갑을 부의장으로 선출하고 7개 부차장을 선임했다.

런 과정에 따라 마산의 혁신세력은 김문갑을 위원장으로 하는 사회대중당 마산시당을 중심으로 활동을 벌여나가지만 19615·16군사 쿠데타로 인해 다시 강제 해산되고 주요인물이 투옥되는 등 시련을 겪게 된다.

사회대중당 결성과 비슷한 시기에 발족된 한국영세중립화 통일추진위원회 역시 김문갑을 위원장으로 하고, 부위원장 김성립·김형문, 기획실장 김해용 등을 중심으로 활발한 활동을 벌여나간다.

 

<1960년 영세중립화평화통일추진위원회 결정 / 현, 경남은행 창동 지점 앞>

 

특히 이 단체가 116일 무학초등학교 교정에서 개최한 집회에는 수천 명의 시민이 운집해 마산시민의 높은 통일 열망을 보여주었다고 한다.

4월혁명 이전까지 전국의 교사들은 독재정권의 충실한 하수인이었다.

그들은 3·15정선거 때도 어김없이 동원됐을 뿐 아니라 학생들이 궐기했을 때도 정권의 지시에 따라 데모를 막는 데 앞장섰다.

명 이후 자괴감을 느낀 교사들이 앞장서 교원노조를 결성, 교육민주화투쟁에 나선 것은 교사로서 최소한의 자존심을 회복하려는 몸부림이었다.

마산에서511일 교원노조 결성준비위가 발족되고 18일에는 성호초등학교 강당에서 공식 출범식을 갖는다.

초등위원장은 성호초교 교사였던 황낙구씨였고, 중등위원장은 마산고 이봉규씨가 맡게 된다.

그러나 이마저도 민주당 정권은 탄압으로 일관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민주당은 그 태생에서부터 친일파와 수구·반공 우익세력으로 구성된  한민당의 후신이었으니 4월혁명을 제대로 수행할 리가 없었다.

그러다보니 처음엔 기가 죽은채 분위기만 살피고 있던 3·15부정선거 원흉들이 나중에는 오히려 큰소리를 치며 7·29총선에 출마하는 등 반혁명세력의 준동이 되살아났다.

그 대표적인 케이스가 마산 3·15부정선거의 원흉이자 자유당 국회의원인 이용범의 재출마였다.

마산의 3·15청년동지회(회장 강대인)와 한얼동지회(회장 김봉세) 등 단체들은 창원 을구에서 무소속으로 재출마한 이용범을 규탄하며 오동동 자택 앞에서 후보 사퇴를 요구하는 단식농성까지 벌였다.

그러나 이런 활발한 사회운동은 19615·16군사쿠데타로 다시 단절되고 만다.

 

<5·16 군사 쿠테타 / 서울시청 앞 광장에 모습을 드러낸 박정희 소장>

 

영세중립화통일추진위의 김문갑, 피학살자유족회 노현섭, 교원노조 이봉규 씨 등은 모두 구속 수감된다.

모든정당·사회단체의 해산명령을 내린 군사정권은 1963년 다시 활동을 허용하면서 반공연맹 등 관변단체와 예총 등 관변 예술단체를 만들어 이들을 집중 육성한다.

이에 따라 지역사회도 다시 우익단체가 모든 기득권을 되찾게 된다.

3·15의거와 4·19혁명 직전까지 이승만 독재에 빌붙어 그의 선거유세를 다녔던 마산의 문화권력 이은상도 5·16군사쿠데타 이후 박정희 정권의 공화당 창당선언문을 써주면서 화려하게 복귀하게 된다.

또한 쿠데타의 주체세력 중 한명이었던 청와대 경호실장 박종규씨도 지역사회에 또 하나의 권력으로 부상하게된다.

이들 권력자와 각종 관변단체에 의해 장악된 마산의 지역사회는 1979부마민주항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사실상 무저항의 도시로 전락했다.

다행히 부마민주항쟁이후 ‘민주성지’로서 체면을 되찾았지만, 해방직후와 3·15거 직후의 활발했던 진보적 사회운동의 명성을 회복하기에는 한참 멀어 보인다.<<<

김주완 / 경남도민일보 이사

 

 

 

Trackback 0 Comment 0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10 / 새마을운동의 농촌주택개량사업

4) 새마을운동의 농촌주택개량사업 - 2 농촌 주택개량사업은 새마을운동 시작 다음 해인 1972년부터 전개되었으며 담장이나 지붕 등의 부분적 보수와 개량으로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관리들은 초가지붕이 비위생적이고 아름답지 못..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9 / 새마을운동의 농촌주택개량사업

4) 새마을운동의 농촌주택개량사업 - 1 1960년대 이전까지 우리나라의 농촌은 전쟁으로 입은 농토의 피해와 농촌인구의 감소 등으로 아직 근대화의 영향을 받지 못한 채 재래식 농경생활을 유지하고 있었다. 주거환경 또한 전쟁피해..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8 /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3)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 3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주택 시장은 사회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맞물려 개발과 성장의 논리가 지배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지어진 단독주택은 대부분 도시 한옥과 양식이 가..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7 /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3)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 2 1960년대는 한국사회의 큰 전환기였다. 4·19혁명과 5·16쿠데타에 따른 정치적 격변을 겪었고, 소위 경제개발정책에 따른 제반 개발이 계획적으로 유도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6 /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3)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 1 1945년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면서 비로소 주체적인 주거문화를 창달할 수 있는 계기를 맞게 되지만 경제 사회적 제반 여건이 불비하여 주체적인 역량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5 /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

2)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 2 일제하의 중·상류계층의 주택 유형으로는 양식주택과 절충식(개량식)주택·개량 한옥·문화주택·공동주택·영단주택 등을 들 수 있다. 양식주택은 서양식주택을 말하며, 절충식 주택은 과도기적 상황에..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4 /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

2) 개항기부터 일제시기까지 - 1 구한말(舊韓末)까지도 조선 사람들이 살았던 보편적인 주거 유형은 한옥이었다. 1882년 그리피스(W. E. Griffis)가 쓴 한국에 관한 역사서 『은자의 나라 한국』에는 당시 전통 한옥을..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3 / 조선시대 이전

1) 고대에서 조선시대까지 - 3 조선시대는 우리나라 주거문화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시기이다. 반상(班常)을 철저히 구분한 신분사회였기 때문에 신분에 따라 주택의 크기나 형태를 규제하는 가사규제(家舍規制)가 있었다. 신..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2 / 조선시대 이전

1) 고대에서 조선시대까지 - 2 주거사(住居史)에서 청동기시대와 초기철기시대를 구분하는 또 하나의 지표는 구들의 시작이다. 한국 주거문화의 정체성을 압축적으로 나타내는 구들은 난방기술의 획기적인 발전인 동시에 지상주거로의 변..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1 / 조선시대 이전

오늘부터는 <경남지역 주거변천사>를 포스팅하겠습니다. 6~7년 전에 『경남도사』에 싣기 위해 간략히 쓴 글인데 출판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 블로그에 올립니다. 어차피 공유하기 위한 글이니 이해하리라 생각합니다. 한반도 동남부에 ..

기억을 찾아가다 - 25 (마지막 회)

25. 3·15의거에 대한 기억 「그날 나는 ‘극장 구경 시켜주겠다’는 주무돈이란 동네친구의 호의에 끌려 10리 가까이 되는 길을 걸어 ‘시민극장’으로 갔다. 그때 나는 대학입시에 낙방한 직후라 의기소침해 있던 상황이었다. 우..

기억을 찾아가다 - 24

24. 이승만 행사 -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 노인잔치...... 내 고등학교시절의 어느날 동회 서기가 들고온 책자를 잠시 훑어본 기억이 남아있다. ‘한국 정치인 99인집’이란 제목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이승만편이 현격히..

기억을 찾아가다 - 23

23. 떠돌이들, 좀도둑 전쟁이 끝나자 대다수의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들갔지만, 상당수의 사람들은 남아있었다. 좌우갈등의 와중에 있었던 몸이라 돌아갈 수 없는 처지였다고 들은 문씨 같은 사람들도 있었는가 하면, 가봤자 땅뙈기 ..

기억을 찾아가다 - 22

22.기합, 주먹자랑, 몸단련 중학교시절에도 조금은 의식되었지만 신경을 곤두세울 정도는 아니었었는데, 고등학교에 들어가자 그 문제들은 신경의 상당부분을 자극하여 행동거지의 상당부분을 조종하고 지배할 정도로까지 작용했다. 소위 ..

공간의 재탄생 - 재생 건축 '선유도' 02

지난주에 이어 녹색 기둥의 정원 에서부터 선유도 이야기를 이어 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 - 녹색 기둥의 정원 정수지의 콘크리트 상판 지붕을 들어내 기둥만을 남겨 만들어진 이 정원은, 선유도 이야기관 의 설명에 의하면 ‘휴식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