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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7.28 00:00

'오동동 아케이드'가 철거된다고 ?

오동동 아케이드가 철거된다고?
- 얼마전에 오동동 아케이드가 철거될거라는 얘기를  듣고서,
 갑자기 철거되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 시청에 알아보니 자유상가아파트는 보상이 끝나서 조만간 철거될 예정이고, 오동동 아케이드는 아직 보상이 끝나지 않아서 시간이 조금 남아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 그래서 지역사에 관심이 많은 박영주선생과 의논한 바, 우리라도 한번 기록을 남겨보자는 거사(?)를 치를것을 결의하고 박선생과, 김주완 국장과 함께  지난 6월 12일 토요일오후에 방문을 하였었다.
 
(게을러서 글 정리가 조금 늦었음)
사전에 간단한 자료를 준비하고 현장을 방문했다. 

▲ 건물전경 (2010년 6월 12일 촬영)



● ‘오동동 아케이드’와 '자유상가아파트'의 기록
- ‘오동동 아케이드’로 잘 알려져 있지만 정식 명칭은 '마산 자유시장’ 이다.
이것은 시장개설허가를 득한 건물에 붙여지는 공식명칭이고 '아케이드'는 우리가 부르는 애칭에 해당된다. (이 글에서는 '오동동 아케이드'로 칭함)
- 이 건물이 약 40년 가까이 되어가면서 주변환경의 변화와 시설의 노후화로 철거 명분을 찾지 못하다가, 도시환경 개선사업의 일환인 ‘생태하천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철거될 상황이다. 
도면 관련 자료를 시청에 확인해보니 별도의 자료는 없다고 하였다.
- 단편적인 기록들을 찾아보니
‘오동동 아케이트’ 는 지난 70년 9월에 오동동 일대 회원천을 복개하여, 74년 1월에 ‘마산 자유시장’으로 문을 연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
- 하천 상류쪽의 '자유상가 아파트'는 1층 상가, 2층에 27세대의 아파트로 구성된, 요즘 말로 '주상복합 아파트'의 원조격이라고 할 수 있다.
- 이 건물은 1977년 지어졌으나 ‘하천터’라는 이유로 2년동안 준공검사를 받지 못하다가, 2년이 지난 79년에야 준공필증이 난 것으로 알려졌다
- 당시로서 흔치 않은 건물 상호로 '아케이드'라는 이름을 붙인 것을 볼 때,
근대적 상가를 지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아케이드'라는 용어의 의미는 쇼핑을 위한 보행로에 지붕이 있는 구조를 나타내지만,
'발터벤야민'이라는 사람이 근대성의 상징을 '아케이드 프로젝트'라는 책을 통해 소개하는 것을 보았을 때, '오동동 아케이드'라는 명칭도 당시로서는 첨단의, 근대화된 시설을 지향하였으리라 생각된다.
-  당시로서 이만한 규모에 다양한 용도가 어울러진 건물은 없었기 때문에 작명부터 상당한 의지를 내포한 건물이라고 생각되었다.

● 수출자유지역과 함께한 ‘오동동 아케이드’의 역사
- '오동동 아케이드'의 건설 배경은 수출자유지역의 역사와 같이한다고 할 수 있다.
'수출자유지역'의 시작 당시 산호동은 주거지역으로 구획정리되어 개발되는 과정이었기에, 상권의 중심지는 수출 정문앞과 가장 가까운 기존의 중심상권인 오동동으로 향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
- 당시에 워낙 오동동 상권이 부흥했었던 터라, 기존 대지에는 손을 못되고, 가장 용이하게 개발할 수 있는 곳이 공유부지에 해당되는 오동동 하천의 복개를 통해 쉽게 해결할 수 있었을 것이다.
- 70년대에 수출자유지역에 근무하는 근로자는 꾸준히 늘어서 70년대 말에는 3만 6천여명에 이를 정도로 엄청난 소비층이 생기면서 '오동동 아케이드'는  청춘 남녀들의 해방구로서의 역할을 수행해 왔다.
- 수출자유지역이 마산을 산업도시로서의 성장 동력 역할을 하였다면 ‘오동동아케이드’는 그 동력원이 되는 근로자들의 휴게, 오락 및 거주시설로서 그 역할을 묵묵히 수행해왔던 것이다.
이러한 상권도 '수출자유지역'의 경기와 부침을 같이 하면서 현재에 이르고 있다.

▲ 위에서 보면 건물이 하천을 따라 휘어진 것을 알 수 있다.

* 건축물의 공간 구조
도면도 없이 건물을 조사한다는 것이  정말 어려운 일이지만,
건축하는 전공을 살려서 대략적으로 조사해 보았다. (상당한 오차가 있을 수 있음을 전제로 한다.)

● '오동동 아케이드' 건물 규모는?
- 대략 40미터 되는 건물 3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전체 건물의 길이는 120미터에 이른다, 길이로서는 최근의 건물도 이만한 것이 없을 것이다.
- 건물을 3동으로 붙여서 지은 이유를 살펴보니
하천 상류쪽으로 갈수록 지대가 높아지는 것을 건물이 연결되는 부분에서 계단 처리를 하여 자연스럽게 보행동선이 연결되도록 되어있었다.
- 그리고 구조적으로 건물은 일정길이 이상이 되면 구조적으로 신축이 될 수 있도록 하여야 하는 구조적인 안정을 고려하여 3동으로 구분하여 지어진 것 같았다.
- 건물의 폭은 약간의 차이은 있지만 대략 21미터 정도 였다.
정면에서 양단부에 폭 5미터의 점포와 각 2미터 복도를 설치하고 내부 점포는 7미터 정도로 칸을 구획해 놓았다.
- 건물의 측면폭은
 1칸이 5미터로 건물에 따라 7.5칸에서 8칸으로 길이는 약 40미터 내외로 되어있었다.
- 점포의 크기는
외부 상가 정면폭과 측면폭을 계산하면 약 25평방미터, 평수로 환산하면 7.5평 정도였다.

● '자유 상가아파트' 건물 규모는?

- 상가아파는 2층 아파트 세대당 폭이 6미터 13칸과 발코니 길이가 합쳐서 약 80미터에 이른다.
- 상가는 2층 아파트 폭에 의해 정면 6미터로 되어 있다.
- 단위세대 면적은 외부에서 추산해 보았을 때 정면 6미터에 깊이가 약8미터로 전용면적 48평방미터, 평수로 14.5평 규모 아파트 27세대로 지어졌다.
- 일단의 하천위에 약 200미터에 이른는 초대형 상가건물과 주상복합건물이 있었다는 것과 약 400여개의 점포와 27세대의 아파트가 공존했던 흔적은 건축사적으로는 상당한 의미를 가진다고 볼 수 있다.

▲ 아케이드는 3동의 건물이 이어져 있다.(총길이 120미터)

▲ 3개의 동으로 분리된 이유는 구조적인 이유와 높이차를 처리하기 위해서이다.

▲ 분홍색 건물이 오동동 상가 아파트 이다. 이건물은 직선형태임.


▲ 상가내부 : 소규모 사무실들이 아직 남아있다.

▲ 외부 상가와는 달리 여러 업종들이 많이 남아 있다.



● ‘오동동 아케이드’의 추억
- 수출자유지역 근로자들의 애환과 이곳을 생업의 터전으로 삼았던 우리 어머니, 아버지들의 애환이 고스란히 배어있으며, 마산의 근대화와 영욕을 같이 한 상징성이 있는 건물임에는 틀림이 없다.

- 탐방 중에, 철거를 기다리며 아직도 막걸리 장사를 하는 집을 들러 간단하게 목을 축였다.
주모인 할머니는 처녀시절인 70년대 초반부터 여기서 장사를 하면서, 딸 아들 키워서 시집장가 보내고 지금껏 여기에서 장사를 하고 계신다 하였다.
- 올해 70을 넘긴 할머니는 해병대 출신 할아버지가 젊었을 때 애를 먹였던 이야기를 하며 ‘오동동 아케이드’와 함께한 자신의 애환을 늘어 놓았다.
- 얼마지 않아 철거될 '자유상가 아파트'에는 장사를 하는 사람이 아닌, 도시빈민들의 주거지로서 역할을 하고 있었다. 찌짐도 부쳐먹으면서, 카드놀이도 하는 노인분들이 많이 보였다.
공터에 텃밭도 가꾸면서 도심형 빈민가를 형성하고 있는듯 하였다.
철거가 되면 이들은 어디로 갈런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 당시 수출에 근무하면서 '오동동 아케이드'와 함께 청춘 시절을 보낸 사람들과 이 외에도 많은 마산사람들이 ‘오동동 아케이드’에 대한 얽힌 사연 한가지쯤은 가지고 있을 것이다.

▲ 우측면 : 복개한 부분을 아케이트의 진입로 겸 주차장으로 사용되고 있다.

▲ 상가 후면 모습 : 지금도 성인텍이 영업중에 있다.

▲ 건물 좌측면 전경 : 1층 점포는 영업중에 있다.

▲ 좌측면 전경 : 셔터가 내려진 점포도 더러 보인다.

▲ 우측 하천변에 지어진 무허가 건물들도 거의 문을 닫았다.

▲ 하천변의 우측면 상가는 문닫은 곳이 많다.


<<< 여기서 부터는 '자유상가 아파트' 풍경입니다.>>>
 

▲ 자유상가 아파트의 출입구 : 현재 보상이 되어 철거 직전의 상태이다.

▲ 오동동 '방석집(?)'에 면한 상가 모습.

▲ '방석집(?)'- 왕년의 흥청거림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 복개천에서 본 오동동 상가아파트 : 1층은 상가이고, 2층은 아파트이다.

▲ 자유상가아파트 전경 : 도시빈민들의 주거지로 변해 있다.(텃밭을 가꾸면서)

▲ 편안한 주말 오후 풍경: 전도 부치고 카드놀이도 하면서

▲ 아파트 1층 입구 통닭집 : 학생들의 아지트로-

▲ 수천마리의 통닭을 꾸었을 화로의 마지막 모습


●  '도시 기록화 작업' 누구의 몫인가?
- 우리가 사는 도시는 단순한 구조물로 형성되어지는 것처럼 보이지만, 거대한 생명체 처럼 성장하고 소멸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이것은 주로 개발을 통해서 이루어지고 있다.
- 최근 재개발이 이루어지는 도시들은 재개발전에 의무적으로 도시기록화 작업을 요구 하고 있다.
그간 무시되었던 도시 기록화 작업에 대한 인식이 전환되어, 도시역사의 보존차원에서 일어나고 있다.
- 인근 지역 부산시는 이러한 사업의 일환으로 ‘정비사업 도시기록화’ 프로젝트를 2008년 7월에 시작, 금년 5월에 마무리 하여 과거 도시의 사진 자료들을 시민들에게 제공해 주는 좋은 선례를 보여주고  있다.
- 도시기록화 작업’은 잃어버린 과거의 모습을 수집하고, 현대를 충실하게 기록하면서, 미래의 변화를 앞서 확보해 놓는 작업이다. 단순한 역사적인 기록 보존의 역할 뿐만 아니라 도시정책 수립과 경관 관리를 위한 기초자료로서도 활용될 수 있기에 서둘러 해야 할 작업이다.
- 지금 '오동동 아케이드' 건물에 대하여 어떤 조사를 하여야 하는가?
: 건축물의 도면화 작업과, 과거사진 및 현재 사진의 보존, 경제적인 역할에 관한 기록자료, 거기에 있었던 사람들의 생활사 등을 정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오동동 아케이드'
- 근사하고 멋진 풍경은 아니지만, 어둡고 지저분한 모습을 통해 과거의 어려운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건물이었기에, 마치 그 건물과 함께한 추억도 사라지는듯하여 아쉬움을 남기게 한다.
-
우리가 사는 이 도시는 과거 살았던 사람들의 삶이 축적되어 우리에게 전해진 결과물이며, 우리 역시 살다가 후손들에게 물려줘야 할 대상이다.
- 이 도시에 남아있는 도시의 흔적들을 역사적 기록으로 남기는 ‘도시 기록화작업’은 현재의 도시를 꾸려가는 도시행정가들의 중요한 역할임을 잊지 말았으면 한다.


Trackback 0 Comment 11
  1. 괴나리봇짐 2010.07.28 15:33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철거된다니 많이 아쉽네요. 저런 공간이라면 도심의 '아트 레지던스'로 활용해봄직한 데 말이죠. 경남도립미술관 등과 협의해서 일정한 프로그램을 만들고, 전국의 예술가들의 입주를 지원해서 성공적인 이벤트를 만들어낸다면, 새로운 지역의 명소로 태어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그런 아이디어를 누가 좀 내주시면 안 될까요?

    • 허정도 2010.07.28 16:25 신고 address edit & del

      반갑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부림동 시장 쪽을 아트레지던스로 활용하자는 이야기도 있었습니다.
      오동동아케이드는 밑에 흐르는 하천에 햇빛 넣는 것이 더 시급한 것 같습니다.

  2. 최정건 2010.07.28 17:57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한 달 전에 마산시립도서관에 걸어 가면서 한 번 돌아 보왔습니다.

    안타깝웠습니다.

    저는 마산 상권이 몰락한 이유는 시민극장, 중앙극장, 연흥극장의 몰락과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그리고 마산 상권의 특징이 주차공간이 없다는 겁니다.

    시민극장과 중앙극장은 오래된 건물이라 어쩔 수가 없었도

    연흥극장은 시에서 인수하면 좋았을 것인데.....

    제가 한 번 마산 골목길을 구석구석 다녀 보았는데

    이외의 풍경이 많았습니다.

    우리나라 근대화와 초기산업사회의 오욕의 길

    마산골목길 그곳을 촬영하고 싶은데

    지금은 아직 해결해야 하는 일이 있었어요

    • 허정도 2010.07.28 22:38 신고 address edit & del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마산에는 지켜야할 것, 살려내야할 것, 키워야할 것 들이 참 많거든요.
      흘러가는 시간과 함께 우리 기억에서 잊혀져만가는 이 도시의 수많은 이야기들이 아쉽고 안타깝습니다.

  3. 옥가실 2010.07.29 16:01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부산의 기록화 작업은 좋은 사례군요.
    마산에도 급히 도입해야 할 것 같습니다.
    창원시에 좀 건의를 해야겠군요.

    • 허정도 2010.07.29 16:23 신고 address edit & del

      '기록'이라는 말만 나오면 눈이 번쩍 떠이는 분이라 다르군요.
      좋은 생각이십니다.

    • 옥가실 2010.07.30 14:36 신고 address edit & del

      흐....
      기록없이 인간없다?
      혹은
      인간과 동물의 차이는 기록 뿐이다?

  4. 이원정 2010.09.29 12:29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의미있는 글, 재미있게 잘 읽었습니다.

  5. 숨은별 2011.12.07 14:19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안녕하세요. 오동동 아케이트에 대한 포스팅을 준비중에 선생님의 글을 읽게 되었습니다.
    소중한 자료, 의미있게 읽고 갑니다.
    저의 경우는 20대가 알고 있는 아케이트의 추억에 대해서 쓰고자 하는데... 아케이트가 건재할 때의 사진이 없어서 안타까워하던 중에 선생님의 사진을 보게 됐습니다.
    실례가 되지 않으신다면 윗 첨부 사진을 사용해도 될까요?
    출처는 정확하게 밝히도록 하겠습니다. ^^

    • 허정도 2011.12.07 21:21 신고 address edit & del

      사용해도 아무 상관 없습니다.
      우리 블로그는 완전 개방입니다.
      저도 젊은 날 오동동 아케이트에서 많은 시간 보냈습니다.
      좋은 결과 기대합니다.

  6. 숨은별 2011.12.08 10:45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흔쾌히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알차게 쓸 수 있었습니다.
    오동동 아케이트에 대한 제 글은 <창동 오동동 이야기>에 만날 수 있어요 :)

2010.05.10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 - 고려시대


<마산에 있었던 석두창의 위치는?>

조선시대 조창인 마산창은 위치와 규모 등 관련 내용들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마산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고려 석두창(石頭倉)의 중요성도 결코 조선시대 마산창 못지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두창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으며, 아직 그 위치도 밝히지 못한 채 몇 가지 가설만 나와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지금까지 주장된 석두창 위치에 대한 가설들을 소개하겠습니다.

석두창 위치 비정은 모두 세 가지인데 모두 그 근거와 논리가 좀 복잡합니다.
천 년 전에 있었던 석두창의 위치를 찾는 일이니 그도 그럴 것입니다.

세 주장의 결론만 간략하게 정리하겠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만 읽어볼 수 있도록 자세한 내용은 이 글 뒤에 별도로 붙여 놓았습니다)

첫 번째는,
몇몇 문헌(마산시사, 창원군지, 박희윤, 이지우 경남대 교수)에서「당시 마산포라 불렀던 현재의 용마산과 자유무역지역 후문까지의 어느 지점, 현 산호동 어딘가에 있다가 조선조에 현 어시장 해변으로 옮겼다」라고 추정한 것입니다.
이 주장에서 사용한 근거자료는,
세종7년(1425년)에 간행한『경상도지리지』, 중종 25년(1530년)에 간행한『신증동국여지승람』, 영조 때(1757년-1765년)에 편찬된 『여지도서』, 1895년에 간행한 『영남읍지』 등 입니다.

두 번째는 저의 주장입니다.
저는 앞의 주장이 문헌 해석방법에 무리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석두창이 현재의 남성동 해안으로 옮겨온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남성동 해안에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였습니다.
근거자료로는 지명과 자연조건 그리고 지형을 제시했고 사용한 자료는 『고려사』,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1899년 일본에서 제작한 근대식 지도, 조선시대 마산포 복원도 등 입니다.

세 번째는 부산대학교 사학과 한정훈 교수의 주장입니다.
한 교수는 석두창의 위치가 「산호동 일대이지만 반월산(무학여고 뒷산)을 중심으로 해서 그 앞 해안가에 위치하였을 것」이라고 추정했습니다.
추정근거로 지명의 의미 및 고려시대 조창의 입지조건과 인근의 교통망 등을 들었습니다.

위 세 주장에서 제시된 위치를 세 종류의 지도에 표기해 보았습니다.
첫 번째 주장 '산호동'은 청색,
두 번째 주장 '남성동'은 적색,
세 번째 주장 '반월산에서 해안가'는 녹색
입니다.
정확하지는 않습니다만 대충이나마 그 위치를 가늠할 수 있을 겁니다.

 <1833년에 제작된 고지도에 그려보았습니다>

<현재 마산지도에 백여년전 해안선을 복원한 후 비교해보았습니다>

<현재 마산지도상에 위치를 표시해보았습니다.
세 곳 모두 도시한복판이지만 당시에는 배가 정박할 수 있는 해안이었습니다. 세 번째 주장인 녹색부분은 삼호천과 산호천이 합해진 하류인데 지금은 복개되었습니다>

셋 중 어느 주장이 맞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아직 논의가 종결되지도 않았습니다.
본격적으로 연구하여 천 년 전 합포의 최대 최고시설이었던 석두창의 위치를 찾는다면 통합 창원시 최고의 문화유산이 될 것 같습니다.

도대체 어디쯤 있었을까요?
고려시대 마산에 있었던 석두창은,,,,



<석두창 위치비정에 대한 세 주장의 상세 글>   - 길어서 읽기 지겹습니다 -
 

첫 번째,
‘산호동 일대’라는 주장의 근거자료로 사용되었던 문헌의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세종7년(1425년)에 간행한『경상도지리지』 조세(租稅)조에서「이전에는 도내(道內)에서 세(稅)를 거둬 실어다 바치는 곳이 세 군데 있었다.
김해 불암창, 창원 마산창(옛 석두창), 사천 통양창」이라는 기록.

② 『경상도지리지』 내상조(內廂條)에서「우도내상(右道內廂)은 창원부에 있는데, 바다입구(海口) 마산포와 4리317보 떨어져있다」는 기록.
'병영성(兵營城)과 내상성(內廂城)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여기서 말하는 내상(內廂)은 현 합성동의 당시 ‘우도병마절제사영성(右道兵馬節制使營城)을 말함'

③ 중종 25년(1530년)에 간행한『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창원도호부 산천조(山川條)에「馬山浦 在會原縣 猪島在月影臺南 合浦在府西十里․․․․․․」라고 하여 마산포는 회원현에 있고 합포는 부(府) 서쪽 10리에 있다는 기록

④ 영조(英祖) 때(1757년-1765년)에 편찬된 『여지도서(與地圖書)』의 창원대도호부조(昌原大都護府條)에 수록되어 있는 창원부의 지도에서 석두창의 위치가 반룡산(盤龍山, 현 팔용산)밑인 지금의 산호동 일대(팔용산과 월영대 중간지점)에 도시(圖示)되어 있다는 것

⑤ 1895년 간행한 『嶺南邑誌』 창원대도호부(昌原大都護府)조에서「조창은 해창 부근에 있는데 새로 지은 것이다」라는 기록 등 입니다.

이 문헌들에 근거하여 내린 결론은

①「마산에 두 개의 포구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현재의 용마산과 자유무역지역 후문까지(산호동 일대)의 마산포이고 다른 하나는 현 어시장 쪽의 합포였다」고 규정하여

②「마산포에 석두창이 있었으니 현 산호동 어딘가에 석두창이 있었다」라고 결론짓고

③ 그러다가 조선 영․정조시기에 자연충적(自然沖積)으로 마산포에 선박출입이 어려워지자「현 어시장 해변인 해창 부근, 즉 합포로 옮겼다」는 주장입니다.

그리고 박희윤은 마산포에서 합포로 옮겨 간 사실을 두고 「산호동 일대는 구강이라고 부르던 곳으로 여기서 열리던 장을 ‘구강장’이라고 하였고 어시장 쪽에서 열리는 장을 ‘새강장’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예로 들었습니다.
즉 마산포에 있던 석두창이 퇴적물로 인해 조선 후기에 합포 지역으로 조창을 이전했기 때문에 원래의 지역을 ‘구강’, 새로운 지역을 ‘새강’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마산포라는 지명은 기존의 산호동 일대만 지칭하다가 현재의 남성동 일대인 합포 지역까지 확대되어 사용되었다고 비교적 소상히 설명하였습니다.

두 번째,
‘남성동 어시장 일대’라는 제 주장입니다.
위 석두창 위치비정 논리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시작합니다.

① 마산포와 합포의 위치를 규명하는 방법에서「마산포는 회원현에 있고 합포는 부(府)의 서쪽 10리에 있다」는 기록을 이용하면서, 마치 자로 잰 듯이 당시 행정구역인 회원현의 범역과 창원대도호부의 위치를 자구(字句) 그대로 적용하여 현 산호동 일대가 마산포이고 남성동 일대가 합포인데 석두창이 마산포에 있다고 한 점입니다.
따라서 산호동의 용마산에서 자유무역지역 후문까지의 어딘가 그것이 있었을 것이라는 논리가 석연치 않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아래의「대동여지도」입니다.
이 지도에는 위의 주장과 정반대의 위치에 마산포와 합포가 표기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만으로도 마산포와 합포의 위치를 비정하는데 활용한 문헌의 해석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동여지도」의 표기 범례에는 ■은 倉庫, ●은 古縣이라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合浦●」의 표기는 신라 35대 경덕왕 16년(757년)에 시행한 행정구역 정비 때 의안군에 영속되었던 합포현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서, 과거에 현(縣)이었는데 성(城)은 없다는 뜻입니다.

지도에 표기된 양상을 보아도 마산포는 기존의 연구처럼 산호동 일대를 지칭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②『여지도서(與地圖書)』의 창원부 지도에 도시(圖示)된 석두창의 위치에 대한 문제제기입니다.
우리나라의 각종 고지도(古地圖)에 나타나는 시설물들을 보면 축척과 거리의 개념보다는 존재 유무의 개념으로 표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지도에 나타나는 석두창의 위치를 사실로 연결시키면서 논거로 제시하는 것은 무리가 많습니다.

또한 석두창이 산호동 부근의 마산포에 있었다고 하는 주장은 시기와 명칭과의 관련성에서도 문제가 있습니다.

③ 조선 영․정조에 석두창을 현 어시장 쪽인 합포로 이전했다는 내용에 대한 주장의 타당성입니다.
이 주장은 석두창을 현재의 산호동 쪽에 있었다는 것을 결정해 놓고, 『영남읍지』의 ‘조창이 합포에 있던 해창 쪽에 있다’는 기록과 연결짓다보니「이전」이라는 해석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에 중요한 관아였던 조창이 이전되었다는 기록은 어느 문헌에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석두창이 이전했다면 영조 때 개창한 마산창의 위치로 이전한 것인지, 혹은 그렇지 않고 마산창은 별도로 신설한 것인지 정확한 설명이 없습니다. 석두창 이전 설은 현재로서는 논리적으로 납득할만한 어떤 근거도 없는 셈입니다.

④ 석두창이 오래 동안 사용되다가 자연충적 때문에 이전했다고 한 점에 대해 검토해 볼 필요도 있습니다.
석두창이 있었다는 산호동 해안의 지형지세를 보면 원래부터 퇴적물이 많았던
곳이지 석두창이 생긴 후 언제인가부터 퇴적물이 생기기 시작한 곳은 아닙니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 제시한 「1899년 산호동 일대의 해안지도」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지도는 1899년 일본 해군에 의해 작성된 근대식 지도로서 마산만의 간조선이 표시된 지도로서는 최초의 것입니다.


이 지도를 보면 지금까지 석두창이 있었다고 주장한 해안은 팔용산에서 내려오는 하천를 비롯하여 양덕천․산호천․삼호천 등의 하천 때문에 간석지의 폭이 무려 1㎞나 되는 곳이 있을 정도입니다.
조창부지로서는 매우 부적절한 자연조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위의 네 가지 이유를 보더라도 석두창이 현 산호동 일대에 있었다는 주장은 무리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석두창이 처음부터 현재의 남성동 해안에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 비정이 합리적이라고 봅니다.
이것은 저의 주장인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①『고려사』권79 조운, 성종 11년 수경가조(輸京價條)에 「나포 전호골포 합포현석두창 재언(螺浦 前號骨浦 合浦縣石頭倉 在焉)」이라고 하여「나포는 전에 골포라 하였고 합포현의 석두창이 여기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이 기록은 석두창의 위치를 확인하는데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
즉 螺(라, 소라)라고 불렀던 포구라면 그 형상이 소라의 형태와 관련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는 버드나무가 많다고 해서 유호(柳湖)라는 지명을 사용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오른쪽 그림은 제가 복원한 원마산 지형도입니다.
이 그림에서 나타나는 동굴강의 형태가 나포(螺浦)라는 명칭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특이한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② 조창의 명칭이 석두창(石頭倉)이라는 점입니다.
중국어에서는 ‘석두(石頭)’라는 단어를 곧 돌(石)을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이를 근거로 생각해 보면 대부분 갈대밭이었으며 간석지였던 해안에 소라 모양을 띤 움푹 들어간 포구 한 곳을 돌로서 호안(護岸)하여 굴강을 조성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합니다.
그 형상으로 보아 사실상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것이라기보다는 자연발생적인 포구를 인공으로 호안(護岸)하여 조성한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합니다.

③ 앞에서 말했듯이 현재의 용마산과 자유무역지역 후문 사이에는 여러 개의 하천 때문에 생기는 퇴적물로 인해 간석지가 매우 넓었을 뿐만 아니라 해안선의 형태가 밋밋하여 작은 풍랑도 피하지 못할 조건이었습니다.

반면 위의 두 그림에서 알 수 있듯이 ▲표의 동굴강은 간석지가 좁고 해안선의 형태도 항만으로 사용하기에 적합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인근에 이렇게 좋은 조건을 놔두고 산호동 쪽에 조창을 설치할 이유가 없었다고 봅니다.

이상과 같은 추정을 근거로 석두창의 위치는 애초부터 남성동해안의 동굴강에 있었던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또한 동굴강을 끼고 몽고군의 일본 정벌 때 사용된 전선소(戰船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기존의 굴강을 전선소 굴강으로 적절히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동굴강은 그 규모로 보아 당시 900여 척에 달했던 전함의 수리를 모두 맡기에는 부족했을 것이지만 기왕에 존재했던 굴강이었기 때문에 일부라도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 이 추정이 적절하다면 그 위치는 현재의 어시장 입구에 있는 속칭「너른 마당」의 북쪽 인접대지 일대입니다.

이 사실을 전제로 할 때,

조선시대의 마산창은 고려시대의 석두창을 이전한 것이 아니라 석두창으로 사용하다가 폐허가 되어버린 창지(倉址) 옆에 새로 건립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이 주장에 반론이 나왔습니다.

세 번째,

부산대학교 사학과 한정훈 교수의 주장입니다.

한 교수는 고려시대 조창의 입지조건과 인근의 교통망 등을 근거로 하여 석두창의 위치를 비정한 것입니다.

다음과 같은 논리입니다.

① 석두창은 합포현 내에 있는 골포(=螺浦)에 위치하였다.
골포의 골(骨)자는 우리만 의미에서 골짜기 깊숙이 들어간 곳의 의미가 있으므로 마산만 깊숙이 들어간 어느 지점에 형성된 포구를 지칭할 가능성이 높다.
그런 점에서 현재의 남성동 보다는 더 내륙으로 들어간 산호동 일대일 가능성이 높다.

② 고려시대 조창의 입지조건을 검토한 결과, 만(灣)의 입구보다는 내륙으로 들어간 해안이나 만의 깊숙한 지점에 위치하였다.
바다로 부터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였는데 그 역시 산호동 일대가 타당한 조건이었다.

③ 조창의 운반 조건을 볼 때 수운 이용이나 하천을 따라 형성된 소로의 이용이란 측면에서 내륙하천과 마산 앞 바다의 결절지점에 석두창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것을 근거로 볼 때, 석두창의 위치를 용마산 아래의 산호동 앞 바닷가 일대로 보는 것이 옳다고 하면서, 나아가 조창의 입지조건이나 교통망 그리고 당시 해수면의 변화까지 고려한다면 용마산 일대보다 내륙으로 더 들어간 지점일 수 있다고했습니다.
그 결과 내린 결론은,
석두창이 지금의 반월산(무학여고 뒷산, 이산, 이살미산, 와우산이라고도 불린다)을 중심으로 해서 그 앞 해안가에 위치하였을 것이라는 겁니다.<<<



2010/04/08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여는 글
2010/04/12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1
2010/04/19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2
2010/04/26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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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24 14:30

‘구(舊) 마산형무소 터’ 의 추억


‘유장근 교수의 도시탐방대’ 일곱 번째 길에 나섰다.
1월 9일 토요일 오후 1시 반, 코아 양과점 앞, 30여명이었다.
바람은 없었지만 짙게 흐렸고 기온이 낮았다.
코스는 오동동 문화의 거리에 있는 ‘3.15의거 발원지’에서 시작하여→구 마산형무소 터→오동동 일대→오동동 아케이드→용마고등학교→지하련 거주지→산호동 효자각→용마산→구강포구까지였다.

오동동 문화의 거리에 있는 3.15의거 발원지에서는 특별손님으로 3.15의거기념사업회 백한기 회장님이 직접 나와 의거에 대해 설명해주어 의미가 더했다.
한때 화려했던 오동동의 밤 문화에 대한 설명은 이승기 선생님께서 맡았는데 두 분은 마산상고 동기생이시다.

가는 곳곳마다 새로운 걸 느꼈고 배웠지만, 여기서는 나와 특별한 인연이 있는 ‘구(舊) 마산형무소 터’에 관한 글을 올린다.

                                    <일곱번째 탐방 코스>

     <3.15의거 발원지 표시동판과 의거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백한기 회장님>


8년 전 2002년 벽두,
이 터를 공원으로 만들자는 시민운동을 벌였다.
마산YMCA를 주축으로 ‘한국은행터 공원만들기 마산시민행동’을 조직하고 상임대표를 맡아 운동의 중심에 섰다.
달포 만에 무려 10만 여명의 서명을 받았고, 그것을 마산시의회에 제출 청원하였다.
하지만 부결되었다.

우리들이 이 터를 공원으로 만들려했던 까닭은 ‘도시환경’이라는 측면과 ‘터의 역사성’ 때문이었다.

             <공원만들기 운동의 발대식과 거리서명 캠페인 장면, 2002년>

돌이켜 보자.
마산은 1899년 개항이후 일제 강점기의 무차별한 개발과 매립, 해방 후 귀환동포 정착, 6.25 피난민 정착, 60년대 한일합섬과 수출자유지역에 의한 산업화 등 다른 도시가 경험하지 못한 격랑의 세월을 겪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언제 한 번도 도시를 균형 잡힌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도시의 미래에 대해서도 깊은 성찰을 하지 않았다. 천혜의 자연이 있었지만 활용하지도 않았다.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임기응변으로만 해결했다.

도시의 질이 급격히 낮아졌고, 시민들도 도시환경에 불만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에서 ‘구(舊) 마산형무소 터’를 공원으로 만들자고 나선 것이다.
공원으로 하기에 충분한 땅은 아니었지만, 도심에 나온 시민들에게 짧은 여유라도 즐기게 해주고 싶었던 하나의 작은 몸짓이었다.

이야기를 먼 곳으로 돌려보자.
건강한 사회는 시민 스스로 생활의 제반 문제를 대응한데서 시작되었다.

유명한 런던의 하이드파크는 원래 왕이 사냥을 즐기던 숲이었다. 하지만 도심공원이 없었던 런던시민들의 헌신적 노력으로 세계최고의 공원이 되었다.
협상이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런던시민들이 울타리를 헐어버렸던 것이다.
이른바 오픈스페이스운동, 하이드파크는 이런 격동의 과정을 거쳐 탄생되었다.
영국에서 시작된 '내셔널트러스트운동’도 바로 이 경험을 바탕으로 출발하였다.
지켜야할 가치가 있는 자연적 문화적 유산을 시민 스스로 보존하기 위한 '내셔널트러스트운동’은 1895년 영국에서 시작되었다.
현재 영국 전 국토의 1.5%, 해안의 17% 가량을 소유하여 공익을 위해 사용되고 있다.

                                 <런던 하이드 파크>

이야기 하나가 더 있다.
사람살기 가장 좋다는 밴쿠버 이야기이다.

1886년 5월 12일 오후 7시 30분, 밴쿠버 최초의 시의회가 열렸다.
당시 밴쿠버 시민은 2,600명이었다.
이  첫 회의에서 의원들은 영국해군기지였던 땅 120만 평을 공원부지로 결정하였다. 민간에 매각되어 주택지나 산업단지로 개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 공원이 밴쿠버가 세계에 자랑하고 있는 ‘스탠리파크’다.
124년 전, 인구 2,600명 도시에 120만 평의 공원을 만든 밴쿠버의 결정.
이 결정과 이 비전이 오늘날 밴쿠버를 세계최고의 도시로 만든 주춧돌이었다.

                                         <밴쿠버 스탠리 파크>

밴쿠버 시의회 최초의 결정이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깊고도 넓다.
몇년 전, 인구 42만 도시의 마산시장은 1,500평 한국은행 터에 1/3은 건물을 짓고 나머지 천 평만 공원으로 하자는 계획을 발표한바있다.
40만 인구에 1,500평과 2천6백명 인구에 1,200,000평.
왜 마산은 날로 쇠락해가고 밴쿠버는 왜 오늘날 세계최고의 도시가 되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본래 이야기로 돌리자.
마산형무소 터의 지난 세월은 질곡의 역사 그 자체였다.
일제통감정치시절이었던 1909년에 부산감옥소 마산분감으로 사용된 후 무려 60여 년 간 감옥으로 사용되었던 자리다.
일제 때는 독립 운동가들이, 해방 후에는 좌우이념갈등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갇혔던 곳이다.
3.1운동 때에는 유명한 삼진의거를 비롯하여 마산, 함안, 창원, 웅동 등 인근지역에서 만세를 불렀던 모든 선조들이 이곳에 갇혔다.
아동문학가 이원수, 여성 정치인 박순천도 갇혔던 곳이다.


           <일제기 마산 형무소>            <'마산형무소 터'였음을 알리는 표지석>


정부가 수립되었던 1948년,
마산의 시인 월초 정진업은 이 형무소에 갇힌 친구를 생각하며 갇히지 않았던 시인의 아픔을 토했다. 「골목길」이라는 시(詩)다.

가치운 몸은 달라도
창살 틈으로 보내는 눈초리는
오직 한마음이라                     

네 손발의 사슬이 풀렸기로
오히려 억압은
첩으로 쌓이는데
아직도 무릎 꿇고
무료히 앉아 있을
벗의 닫혀진 억울한 세월을
너는 어이 잠시라도
잊어보는 것이냐?

고문에 항시 못 이겨        
이를 갈던
공포와 저주는
그래도 잊혀지지 않아                         


총을 멘 보초들 서있는
돌문 앞을 지날 때마다
죄 없이 조라드는
겁 많은 마음이

나무 가지 사이로
철창을 노리고
이룩할 민주의 나라                        
이리 더딤을 한탄하면서                              
밖에서 내 다만 참답게
일 하겠노라
인욕(忍辱)의 벗에게
머리 숙이며 가는
밤마다 정이 드는
나의 골목길이 있다.

식민지시대의 감옥은 단지 신체를 속박시킨다는 의미 외에 폭력적인 통치권력의 상징이다. 공원은 근대 시민들이 공유하는 도시의 열린 공간이다.
그러므로 이 터가 공원으로 변한다는 것은 「폭력적인 통치권력의 상징」이 「근대시민의 자유공간」으로 바뀐다는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여기에 의미를 부여했다.

       <당시 제시했던 자료 / 왼쪽은 당시 현장상황, 오른쪽은 공원조감도>

이제 세 도시가 통합되면 도시의 큰 그림은 다시 그려질 것이다.
따라서 이 터를 공원으로 하는 문제를 두고 ‘옳다 혹은 그르다’ 식의 논의는 뒤로 미루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이 터를 보니 마산의 도심공원 문제가 다시 떠올라 몇 자 적는다.

공원문제가 이 도시의 쟁점이 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이 터 외에도 신포동 매립지를 아파트만 지을 게 아니라 일부를 공원으로 하자는 운동도 있었다.
모두 실패하였다. 마산시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현재 지정된 마산시의 공원의 면적은 자그마치 240여만 평이다. 이 면적은 마산 인구 일인당 약 6평 가까이 되는 규모다.
도쿄와 오사카의 공원 면적이 1인당 고작 1평 내외, 세계적인 도시 파리가 3평 반, 몬트리올이 4평, 뉴욕이 5평반인 것을 생각해보면 엄청 큰 규모다.
1인당 9평이나 되는 런던보다는 작지만 어쨌든 통계상으로 마산은 공원의 도시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건 말 그대로 통계일 뿐, 현실은 전혀 아니다.
이미 멀쩡하게 존재하고 있던 산과 계곡을 공원이라 이름 붙여 통계로 잡은 것이다.

이 도시에는 시민들이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공원이 제대로 없다.
해변공원은 아예 없고 만날재 공원은 주로 행사용으로 쓰인다. 양덕동 삼각공원은 접근성이 나쁘다.
서항매립이다, 구항매립이다 하면서 20여 만 평의 해면을 매립하고서도 그럴듯한 도심공원 하나 마련하지 못했다.
오히려 시민들과 바다를 단절시켰고 수변공간계획은커녕 해안 전부를 자동차가 씽씽 다니는 길과 수입 원목들이 차지해 버렸다.

지금 계획되고 있는 ‘마산비전 2020’에 중앙공원, 산호공원, 추산공원 개발을 비롯하여 돝섬유원지개발, 구산해양관광단지개발, 팔용유원지개발 등 공원개발 계획이 다양하게 세워져 있지만 어디 한군데 도심공원은 없다.
엄청난 시설비를 요하거나 이미 존재하고 있는 산을 공원화하는 것뿐이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이토록 철저하게 도심공원이 없는 도시는 별로 보지 못했다.

이래서는 안 된다.
생활 속에서 이용할 수 있는 공원계획이 시급하다.
화려한 언어로 미래를 말하기에 앞서, 도심 속에서 생활 속에서 쉬기도 하고 걷기도 할 수 있는 공원을 시급히 만들어야 한다.
시민 1인당 공원 6평이라는 허구를 현실화시켜야 한다.

해안도시라면,
적어도 바닷가에서 가족이나 친구와 30분 정도는 편안히 걸을 수 있는 공원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키 큰 나무 아래 잔디 깔린 바닷가에, 사람들이 걷고 자전거가 달리고 벤치에서 연인의 속삭임이 들려야 해안도시 아닌가?

도심공원이 전무한 도시,
바다가 있지만 바다와 차단된 도시,
역사의 가치에 관심 없는 도시,
그리하여 성장 동력조차 상실한 채 인근도시와의 통합 외에 다른 길을 찾지 못하게 된 도시......

이 도시의 '희망찾기'는 어떻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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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유림 2010.01.25 11:40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선배님 저도 찬성입니다.
    그 곳이 공원이 되면 아마도 오동동 창동 거리도 조금 북적이지 않을까 생각을 합니다
    창동에서의 추억이 많은 세대로서 늘 아쉬운 부분이지요
    어차피 구 상권일바에야 추억을 찾아오는 이들이 많이 오는 곳으로 만드는 것도
    참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황량한 그 곳의 모습은 지날때만다 늘 안타깝게 다가옵니다.

    통합 새도시에선 ...잘~ 되길 바랍니다.

    가포탐방때 뵐께요 ^^

    • 허정도 2010.01.25 16:38 신고 address edit & del

      반갑습니다.
      도심공원이 없는 게 마산의 걱정인데 딱히 이곳이 아니더라도 도심에 좋은 공원하나 들어서면 참 좋겠습니다.

  2. 조원문 2010.01.27 11:11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허정도 회장님 정말좋은 마산의 역사를 배우고갑니다
    저도 마산 토박이인데,,,,죄송 합니다,,너무 모르고 있었읍니다,

    지속적인 마산의 미래와 발전을 위해많은 자료보도록 하겠읍니다.
    정말 수고 많이 했읍니다...

    • 허정도 2010.01.27 16:11 신고 address edit & del

      반갑소.
      마산과 관련해 좋은 이야기 많이 해주세요.

2009.10.20 06:00

제안, <신(新) 7대 도시 마산>



마산을 염려하는 분들이 늘 하시는 말입니다.

‘한 때 전국 7대 도시였던 우리 마산이 이제는 경남 7대 도시가 될 판이다’

‘전국 7대 도시의 영광을 되찾자’

슴 아픈 호소입니다.
이 말을 들을 때마다 마산을 고향으로 둔 내 마음도 무척 안타까웠습니다.

마산뿐 아닙니다.
한 때 잘나갔던 도시라면 어디 할 것 없이 이런 식의 한탄 한마디는 다 있습니다.
몇 년 전에 목포시의회 부의장에게 들은 말인데, 목포 사람들은 지금도 ‘전국 6대 도시의 영광을 되찾자’ 한답니다.

전국 7대 도시 마산········.
어릴 때부터 많이도 들었던 말입니다.

하지만 나는 그 의미에 대해 깊이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인구가 전국에서 일곱 번째였다는 것을 모르지는 않았지만, 그것이 이 도시에 어떤 조건과 결과를 주었는지 깊이 생각해보지 못했습니다.
어른들로부터 ‘전국 7대 도시’란 말을 들으면서 어린 기분에 약간의 자부심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나이가 든 후,
건축가로서, 대학에서 도시학을 강의하면서, 언론사 대표로 이런저런 정보를 접하면서, 내 고향 마산이 ‘전국 7대 도시’였다는 사실에 대해 자주 생각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지난 세월 동안 이 도시가 겪었던 영광과 좌절의 부침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도시의 미래를 전망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전국 7대 도시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 성찰해보았습니다.


이 글은 마산에서 태어나 지금까지 살아온 사람으로서 내가 던지는 ‘전국 7대 도시 마산’에 대한 질문과 답입니다.
행정구역을 통합하는 마당에 이런 글이 무슨 소용이냐고 할지 모르지만, 통합이 되던 안 되던 마산의 문제는 마산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해결해야 된다고 생각하며 이 글을 씁니다. 


  <마산도시 한복판을 관통하는 임항선 / 남루하게 방치되어 있다>

 
       <남성동 해안 / 시민들의 접근을 철저히 거부하고 있다>

            <회원천 / 부패된 물이 도시 복판을 흐르고 있다>


-마산이 '전국 7대 도시'가 된 까닭-


마산은 근대기라 일컫는 지난 백여 년 동안 엄청난 변화를 겪었습니다.

개항이라는 외세의 파도가 이 도시를 뒤덮으면서 시작된 변화였습니다.
우리나라 근대도시사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굵직굵직한 궤적들이 이 도시를 관통했으며, 그 흔적들은 지금도 도시 곳곳에 배어있습니다.

도시변화의 주역은 물론 일본인들이었습니다.
이 도시의 변화는 일본인들의 욕구를 채워주는 그들만의 잔치였습니다. 따라서 오직 경제적 이익을 얻기 위했을 뿐 다른 노력은 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시기 어느 곳에서든 단 한 번도 공익적 관점에서 이 도시를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바라볼 필요도 없었습니다.
이 도시는 단지 그들에게 이익을 퍼주는 식민의 땅이었기 때문입니다.

해방이 되자 그들은 떠났고, 일본으로 건너갔던 동포들이 대거 밀려들었습니다.
부산 목포와 더불어 귀환동포들이 이 도시에 넘쳤습니다.
갑자기 도시가 커진 겁니다. 
내 부모님께서도 그 때 마산부두에 내려 이 도시에 자리를 잡았습니다.
일시에 들이닥친 '귀환동포'가 얼마나 많은 문제를 야기했던지 이를 패러디하여 '우환동포'라고도 불렀습니다.

해방 5년 후 전쟁이 나자 피난 내려 온 동포들이 또 한 번 대거 밀려들었습니다. 부산과 더불어 피난민들이 이 도시에 넘쳤고, 도시가 또 한 번 커졌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그 때 피난민들을 상대로 행상을 하며 호구를 연명했습니다.
나는 일본군이 군용 마구간으로 사용하던 회원동 500번지에서 전쟁이 끝나갈 즈음 태어났습니다.

해방과 전쟁이라는 두 번의 격랑을 거치면서 마산에 사람이 들끓었습니다.
내 노라 하는 문화예술인들도 마산거리에 허다했습니다.
오래된 이야기지만 그 덕분에 얻은 도시 이미지 중 하나가 ‘문화예술의 도시’입니다.
그러나 사람만 많았을 뿐 사람들을 받아드릴 도시기반시설은 전무했습니다. 단지 생존에 대한 욕구와 열정으로만 살았던 시기였습니다.

이 도시의 결정적인 변화는 60년대 후반부터 생겼습니다.
한일합섬, 수출자유지역, 한국철강 등 굵직한 산업시설들이 다투어 이 도시에 들어왔습니다.
전국의 젊은이들이 일자리를 찾아 마산으로 마산으로 몰려들었습니다.
다시 한 번 이 도시에 사람들이 넘실거렸습니다.
도시가 젊어졌고, 또 한 번 커졌습니다.

동마산이라는 새로운 지역이 생겼으며 버스가 다닐 수 있는 간선도로가 여기저기 뚫렸습니다. 전세방 달세방이 동이 나자 너도나도 집을 지었습니다.
온 도시가 공사판처럼 되었습니다.
그 때 나는 조그만 설계사무소 직원이었습니다. 제도판 위에서 밤늦게까지 쉬지않고 설계도를 생산해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도시의 팽창으로 남성동 창동 오동동 일대에만 모여 있던 중심상권이 분화되어 월영동과 합성동에 두 부심이 생겼습니다. 소비를 원하는 사람들을 중심상권이 모두 받아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 도시의 규모와 소비수준이 일약 전국 어디에 내놔도 손색이 없게 되었습니다.

‘전국 7대 도시’는 지금까지 말한, 해방이후 이 도시가 겪었던 격랑과 성장의 과정에서 나온 마산의 압축된 표현입니다.


     <마산이 번성했던 7-80년대 당시 마산수출자유지역 후문>


-다시 생각해야될 전국 7대 도시-


나는 생각합니다, 이 도시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해.
‘7대 도시’가 무엇을 남겨 놓았는지, 그리고 지금에 와서 ‘7대 도시’의 영광과 저력이 이 도시에 어떤 의미였는지.

뚜렷한 것이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도 손에 잡히는 것도 없습니다.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습니다.

사람 숫자가 아니라 사람이 사는데 필요한 조건들이 7대였다면, 그리고 그것을 지켰더라면, 비록 사람 수는 수십대로 밀렸지만 자부심은 있을 텐데 참 안타깝습니다.


이 도시를 생각합니다.
지금은 도시수준이 경제력과 도시발전을 이끄는 시대입니다.
생활의 질을 따지는 시대이기 때문입니다. 배고픈 시절에는 밥공기의 크기를 보지만 배가 불러지면 쌀밥 보리밥을 따지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세계의 여러 도시들이 도시를 확장보다는 삶의 질을 우선하는 까닭도 이 때문입니다.
오두막에서 맑은 물만 바라보고 살자는 말이 아니라 맑은 물이 돈이 되는 시대라는 말입니다.

흔히 말하기를 마산에 생산시설이 적어 인근 도시로 인구가 유출되었다고 합니다. 일견 맞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생산시설만으로 마산사람들이 떠났다고만 보면 정확한 진단이 아닙니다. 그것은 2만 달러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들의 라이프스타일을 충분히 이해 못한 탓입니다.
미국의 자동차도시 디트로이트의 쇠퇴가 이를 잘 보여줍니다.
도시적 상황은 방치한 채 생산시설만 있으면 발전된다는 주장은 한국사회에서 적어도 80년대 쯤 주장해야 맞는 말입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지금은 산업시설과 도시환경이 동반되어야하는 시대입니다.

도시환경에 대한 대책 없이 생산시설만 유치하면, 그것 때문에 인구 100명 늘어날 때 살기 좋은 곳을 찾아 떠나는 사람이 110명이 될 수 있는 사회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산업이 도시를 만드는 시대에서 도시가 산업을 만드는 시대라는 사실을 입증한 일본의 가나자와를 비롯해 영국의 밀턴케인스, 브라질의 꾸리찌바, 이태리 볼로냐와 라벤나, 네덜란드의 그로닝겐 등 세계의 유수한 도시들이 이를 증명해주고 있습니다.


이 도시를 다시 생각합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도시가 다시 ‘전국 7대 도시’가 되지는 못할 것 같습니다.
나 역시 그렇게만 되면 한없이 기쁘겠지만 그러기에는 수도권으로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몰린 것 같고 중앙과 지방의 격차가 심해진 것 같습니다.


-제안, 신(新) 7대 도시 마산-


그래서, 이 글을 빌어 ‘신(新) 7대 도시’를 감히 제안합니다.

양이 아니라 질적인 ‘7대 도시’로 가자는 제안입니다.

사람 수가 ‘전국 7대’가 되기는 불가능하지만 도시수준을 ‘전국 7대’로 높이는 일은 가능한 일입니다.
교육, 문화, 예술, 환경은 물론이고 공기, 인심, 물맛, 거리와 가로수, 공원, 경치 등 사람 사는데 정작 필요한 ‘도시수준이 7대’가 되도록 만들자는 말입니다.

임항선을 그린웨이로 만들어 키 큰 나무 아래로 사람들이 걷고,
파란 물 바닷가 잔디 위에 벤치가 놓이고 자전거가 달리고,
유모차를 밀고 나갈 꽃 가득한 공원이 도시 곳곳에 들어서고,
곧 추진될 생태하천으로 시내 곳곳에 맑은 물이 흐른다면········.
첨단의 로봇랜드가 머지않아 들어온다니 금상첨화일 테지요.

이렇게만 된다면 이 도시를 떠난 사람 중 다시 돌아 올 분도 적지 않을 겁니다. 좋은 도시에 좋은 산업이 들어온다는 사실은 이미 많은 도시에서 입증된 사실이니까요.


               <해안도시의 특성을 잘 살려 개발한 벤쿠버>


‘도시수준 전국 7대’
얼마나 행복하고 희망 가득한 미래입니까.
불가능한 일이 아닙니다. 못해낼 만큼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불가능한 일이라고 가슴아파말고 가능한 일을 이야기하며 희망을 찾아야합니다.
해낼 수 있는 일을 목표로 삼으면 흩어진 힘도 모을 수 있습니다.

‘전국 7대 도시의 영광을 되찾자’는 뼈아픈 호소가,
‘양의 7대 도시에서 질의 7대 도시로 가자’라는 희망찬 외침으로 바뀌면 좋겠습니다.

이 도시에 살았던 선인들이 양적인 ‘7대 도시’를 물려주었으니, 우리는 질적인 ‘7대 도시’를 후손에게 물려주면 되지 않겠습니까.

‘도시수준 7대’는 ‘경제수준 7대’로 이어지고, 그것은 곧 ‘행복수준 7대’로 이어집니다.
구호 속의 일류도시가 아니라 피부에 와 닿는 일류도시로 이어질 것입니다.

소년 시절, 청년시절, 어른이 되어서까지········,
이 도시에서 수 없이 들었던 ‘전국 7대 도시’라는 말이 우리 다음 세대에게 똑 같이 전해지기를 바라며 드리는 간절한 제안입니다.

인구는 ‘7대 도시’가 불가능하지만,
도시수준은 ‘7대 도시’만이 아니라 힘을 모아 ‘1대 도시’까지 갈 수 있는 가능한 목표이기 때문입니다.



     (이 글은 ‘마산사랑모임’에서 낸 『마산의 희망 마산의 꿈』에도 실렸습니다)

 

 

Trackback 0 Comment 8
  1. 송순호 2009.10.20 11:31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선생님의 의견에 적극 동감합니다.
    그런 새로운 도시가 될 수 있도록 다 함께 노력했으면 합니다.
    수고하십시오.

    • 허정도 2009.10.20 14:44 신고 address edit & del

      감사합니다.
      꼭 그렇게 되도록 노력해야죠.

  2. 박력 2009.10.21 13:29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허정도님의 의견에 공감합니다.
    지금은 수원에 살고 있지만 바다를 보고 살았던 그때의 감동이 살아지지 않는군요..

    • 허정도 2009.10.21 14:30 신고 address edit & del

      방문 감사합니다.
      좋은 계절, 즐겁게 보내십시오.

  3. 유림 2009.11.17 19:38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선생님의 글을 따라 왔지만..
    마산을 생각했던 저의 마음 같습니다.

    너무 이상하게 변하고 있는...
    마산을 지켜낼 방법은 없을까...생각만 했는데..

    정겨운 도시 마산을 꿈꿉니다.

    • 허정도 2009.11.18 08:39 신고 address edit & del

      반갑습니다.
      리더의 생각과 판단도 중요하지만
      시민들의 각성도 필요하다고 봅니다.
      시민 참여 없이 좋아진 도시는 없거든요

  4. 2010.05.24 01:24 address edit & del reply

    비밀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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