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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09 00:00

기억을 찾아가다 - 25 (마지막 회)

25. 3·15의거에 대한 기억

 

그날 나는 극장 구경 시켜주겠다는 주무돈이란 동네친구의 호의에 끌려 10리 가까이 되는 길을 걸어 시민극장으로 갔다. 그때 나는 대학입시에 낙방한 직후라 의기소침해 있던 상황이었다.

우리가 극장에 들어가서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상영을 기다리는 관객들에게 장내마이크에서 지금 밖이 시끄러우니 빨리 집으로 돌아가라는 말이 들려왔다.

관객들이 욕설 섞어 돈(입장료)내놔라고 고함친 것은 당연한데, 그것도 잠시, 갑자기 극장 전체에 불이 나가버렸다.

그때서야 심상찮은 낌새를 느낀 관객들이 아우성을 치고 밟고 밟히며 밖으로 나왔는데, 손을 꼭 잡고 나온 우리 둘이, 극장 문 앞에서 주로 아래쪽으로 밀려가는 사람들 따라 가다가, 남성동파출소 쪽의 상황을 보고는 대강이나마 사태를 짐작할 수 있었다.

파출소를 에워싸고 투석을 하고 있던 군중들이 극장에서 나온 무리들과 합세하자 힘을 받은 듯 더 격한 고함들을 쏟아 뱉으며 돌질을 하기 시작했다.

<3.15의거 시위 중인 마산 시민들>

 

남성동은 중심지라 당시에도 그 도로들엔 포장이 되어있어 많은 돌 구하기가 쉽지 않았으므로 이상하게 생각되었는데, 우리가 서서 구경했던 이학골목(그 골목 한 곳에 이학이란, 당시로선 고급 일식집이 있었다.)과 맞은편 세신양복점 골목의 상황을 보고는 이해할 수 있었다.

아주머니들이 골목을 다니면서 주운 돌을 치마에 싸서 날라다 주는 것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주머니들이 다투어 앙칼지게 부르짖었던 소리도 지금까지 귀에 쟁쟁한데, 그때 제일 많이 들었던 소리가 야 이 도둑늠들아 내 포 내나라였다. 그날은 그들의 실체를 잘 몰랐는데, 나중에 들은 바에 의하면, 그들은 주로 민주당 여성당원이었다.

‘내 표 내어 놓으라는 말은, 당시 대부분의 유권자들은 자유당원들과 공무원들의 주도 아래 3인조 또는 5인조로 조직되어, 조장의 인솔아래 투표소로 들어가서 종장의 감시 아래 공개투표를 하게 했는데, 이들은 거기에 편입시킬 수 없으니까, 투표통지표를 이들에겐 아예 보내지 않은 데 대한 항의라는 것도 알았다.

돌팔매질은 점점 잦아가고 정문 접근자도 많아져 가던 상황이 한참 진행될 즈음 갑자기 총소리가 들렸다.

놀라 골목 안쪽으로 몸을 피하면서도 소리 나는 쪽을 보니 파출소 옥상에서 화약 불빛이 보였다.

그러자 군중들은 이리 뛰고 저리 흩어지며 일부는 더 흥분되어 날뛰는 모습이 보였는데, 총소리가 난 지 채 일분이나 되었을까? 갑자기 세신양복점 앞에서 사람이 죽었다는 고함소리가 들렸다.

사람들은 띄엄띄엄 나는 총소리를 들으면서도 그쪽으로 왈칵 밀려들었고 이어 파출소 문 쪽으로 사람들이 더 몰려드는 것이 보였다.

총소리는 곧 그쳤다. 친구와 나는 어떤 적극적 행동도 없이 우물거리며 사람들 쪽으로 쓸려 다녔으니 사람이 죽었는 지 어쨌는지는 보지도 못했다. ......

가서 보니 그곳에도 이미 투석전이 벌어져 있었다.

그런데 그쪽엔 남성동에서와는 좀 다른 양상이 있었다. 구마산역 쪽에서 보니 파출소가 높은 곳에 있어, 그리고 주위에 집들이 적어 접근이 쉽지 않아 돌 던지기가 어려웠던지, 좀 색다른 방법을 쓰는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구마산역 입구에서 파출소쪽으로 꺾어져 십여 미터 가는 곳에 돌공장이 있었는데(목재소도 있었는지?) 거기서는 그런 와중에서도 밤일을 하고 있었고, 아직도 추워 불을 피우고 있었는데, 몇 명 청년들이 어디서 깡통을 주워와 밤일 현장에 땔감으로 쌓아둔 톱밥과 대패밥 등을 담아서 불을 붙인 뒤, 그 깡통을 새끼줄에 매어 원을 그리며 휘둘러서는 파출소로 향하여 던지는 장면들이 보였던 것이다.

그리고 몇몇개는 파출소 벽 밑에 떨어지거나 유리창을 깨고 안으로 떨어지는 경우도 있었고, 그것을 안에서 되던지는 장면도 보였다. ......

이튿날 어머님의 만류로 시내에 나가보진 못했으나 대강의 소식은 들을 수 있었다.

사람이 열 명 이상 죽었고, 특히 북마산파출소가 불타면서 안에 있던 경찰들이 마지막 수단으로 총을 난사하며 나오는 통에 그 앞에서 제일 많이 죽었다고 했다.

<3월15일 밤 경찰이 쏜 총에 생명을 잃은 김주열. 사진은 4월11일 중앙부두 앞바다에서 떠오른 열사의 시신>

 

나는 파출소 화재가 어제보았던 그 깡통불 때문은 아니었을까 생각해 보기도 했다.<이상 『상식의 서식처』>

추기 : 민주주의가 국민의 뜻을 따르는 신념이고, 그 신념을 정치로 구현하기 위해 국민의 뜻을 직접 물어보는 제도가 선거다. 그런데, 이땅에 사는 사람들 대부분의 뜻에 반해 나라를 침략자 일제에게 갖다바친 친일파들을 주축으로 결성된 소위 사이비 보수집단이 민의를 따를 리 없고, 따라서 정상적 선거로선 집권할 수 없으니, 그들은 대를 이어 부정선거를 관습으로 삼아왔었다. 3,5인조선거는 박정희에 의해 릴레이선거로 발전해 왔는데, 그건, 앞사람의 기표지를 투표함에 넣고 자기가 기표한 건 가지고 나와 검표자에게 보이고, 다음 사람은 그것을 투표함에 넣고 자기가 기표한 건 또 그렇게 가지고 나오고...... 하는 방법이었다. 그것도 소문이 나 시끄러워지니 박정희 전두환은 아예 체육관에 꼭두각시들 모아놓고 하는 소위 체육관선거로 권력을 찬탈했다. 노태우는 전국 유세장을 투석장으로 만들어 민의를 왜곡하고, 이명박 박근혜는 댓글부대를 만들어 민의를 조작하고......

그래서 역대 소위 보수당 집권자 7명 중 2명은 쫓겨났고, 한명은 심복한테 살해되었고, 한명은 사형 또 한명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두 명은 감옥에 갇혀 있다.

이런 보수가 다른 나라에도 있을까? 참보수(김구, 장준하 등)를 살해하고 보수를 참칭해온 결과다.

그동안 읽어주셔서 고맙습니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작년 10월 16일부터 매주 게재해온 창원미래연구소 박호철 이사장님의 글 「기억을 찾아가다」 25편은 오늘로 끝냅니다.

마산 봉암동에서 보낸 어린시절에서 부터 자유당의 암울했던 혼란기에 보낸 중,고 시절 이야기까지 1950년대 마산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던 글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삶에 투영된 도시의 흔적을 통해 이미 사라져 버린 우리의 과거를 찾아가보는 것이 이 연재의 목적이었습.

박호철 선생님은 1941년에 태어나 초중고(합포초, 마산중, 마산상고)를 마산에서 마친 후 서울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였습니다. 교육자로 평생을 보냈으며 지금은 창원 사파동에서 살고 있는 진보적 지식인입니다.

한 회도 날짜를 어기지 않고 송고해 주신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다음 주 부터는 <경남지역 주거변천사>를 연재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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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26 00:00

기억을 찾아가다 - 19

19. 영화, 만화, 잡지

 

초등학교 6학년 때 단체로 시민극장에 성웅 이순신을 보러 갔다가 실망했던 기억이 있다. 활동사진이 아니고 정지된 그림(슬라이드)이었기 때문이다.

1때 문화동 쯤에 있었던 제일극장에서 본 애정(哀情)이란 영화에서도 큰 흥미는 못 느꼈었다. 영국 명우 로렌스 올리비에감독·주연의 명화였으나 선생님들은 좋았겠지만 중1짜리들이 즐길 수 있는 영화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영화에 대한 흥미와 관심을 폭발시킨 영화는 중2 때 본 셰인(SHANE)’이었다.

 

부림동에 있는 국제극장(1948년 부림극장으로 개관했다가 1950년 국제극장, 1956년 강남극장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2004년 폐관하였고 2008년 건물도 헐려 지금은 오피스텔이 들어서있다)에서 본 그 영화는 그 후 한참동안 그 감동에 필적할 만한 영화가 나오지 않아 거의 독점적으로 회자되었기 때문에 지금까지도 우리들의 머릿속에 깊이 새겨져 있을 것이다.

미남스타 알랜 래드의 고독한 영상(특히 말을 타고 가는 장면에서 극장 안에 울려 퍼진 주제음악과 어우러져), 그러면서도 악당에겐 강한 주먹을 날리는 의협심, 특히 아역 배우의 다급한 외침에 돌아가면서 악당 두목 잭 팰랜스를 단 번에 쓰러뜨리는 극적인 장면 등은 몇 년을 두고 우리들의 화젯거리 1호였다.

권총 발사 시 왼손을 오른손에 든 권총 노리쇠 부분으로 가져가면서 쏘는 흉내를 우리들이 경연할 정도였고, 극중의 어린아이가 셰인하고 정겹게 부르는 음성 흉내도 역시 그 대상이 되곤 했다.

그 이후로 서부활극은 청소년 선호 오락물 1위였다. 그래서 그것이 우리들 생활상에 준 영향도 컸으니, 그것 때문에 부모들에 대한 거짓말 횟수들이 늘었고, 심지어 영화 단체관람이 예고된 후부터 관람까지의 4~5일 동안 부모들에게 관람투쟁을 벌이는 친구들도 있었다.

그리고 그 서부극들 때문에 우리들의 장난 유형이나 싸움 패턴이 달라졌다.

그전엔 대체로 싸움이 시작되면 도리깨질하듯 팔을 원형으로 휘두르다가 몸이 맞닿으면 잡고 쓰러뜨리고, 그래서 위에 올라탄 사람이 대체로 이기게 되고.... 이런 식의 싸움이었는데, 이 영화들 이후 언제부터인지 주먹을 직선으로 내지르는 것이 일반화되었고, 심지어 어느 쪽이 쓰러지면 옆에 있던 입회인 친구들이 일으켜 세워 다시 시작하게 하는....

이렇게 영화 붐이 일자 학생들은 학교에서 관람을 허용하지 않는 영화까지 정학당할 위험도 무릅쓰면서 소위 도독구경을 하기도 했다.

그러다 들키면 다음날 교문 앞 게시판에 학년, , 번호, 이름이 명기된 유기정학 혹은 무기정학(유기정학 3회 이상) 공고가 나붙고.... 그런 중독을 더 부추기는 것은 매일 한낮이 가까워오면 극장 지붕 위에 설치된 대형 스피커에서 울려오는 호객용 유행가소리.... 특히 날씨가 더워져 교실 창문을 열어 놓았을 땐 그 소리에 반해 고개는 선생님 쪽으로 향하고 있어도 발은 그 노래 장단에 맞추고 있어.... (이상 『상식의 서식처에서)

·고등학교 시절 우리들 화제의 중심엔 알랜 래드, 빅터 마추어, 로버트 테일러, 엘리자베스 테일러, 게리 쿠퍼, 룩 허드슨, 제인스 딘 등이 오르내리는 일이 참 많았다. 그러니 서부 사나이들이 정의의 사도로 인식되는 일도 자연스러웠다. 

중학교 때부터 만화도 붐을 일으켰었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밀림의 왕자.

 

아프리카 상공을 지나던 비행기가 추락하면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흑인 부족들 손에서 길러진 한국소년 철민과 미국소녀 케에트의 활약상을 그린 것이었는데, 한두 달에 한권씩 약 2년에 걸쳐 나온 그것은 그 어간에 나온 것으로 기억되는 타잔, 킹콩 시리즈들과 더불어 이국정취를 자극하기에 충분했었다.

철민과 케에트 둘을 아끼고 보호하는 추장 제가’, 추장 자리를 탐내어 둘까지 미워하는 구레’, 둘의 수호천사 뱀 다나’, ‘다나와 라이벌이라 둘까지 헤치려드는 공룡(이름은 생각나지 않는다)들이 어우러져 펼치는 드라마틱한 장면들은 학생들의 폭발적인 인기를 끌었다.

특히, ‘다나와 공룡이 혈전을 벌이다 둘 다 화산분화구로 떨어져 들어가기 직전 분화구 위쪽에 있던 큰 나뭇가지에 다나가 급히 꼬리를 뻗어 감으면서 빠져나오는 장면은 지금도 기억이 선명하다. 

생들이 많이 본 잡지로는 학원이 유명했었는데 특히 거기에 오랫동안 연재된 조흔파의 명랑소설 얄개전은 인기를 많이 끌어 생명력이 긴 유행어를 낳기도 했다.

그때는 물론이었고, 지금도 우리 나이 사람들이 많이 모인 자리에서 심심찮게 키 작은 사람보고는 꺼꾸리’, 키 큰 사람에게는 장다리란 말을 붙이는 일이 있는데, 그 말들은 얄개전의 두 주인공 남학생의 별명이었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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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3.14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9) - 개항이후

<한일병합 전, 마산포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오늘부터 마산포(원마산)의 옛 모습에 대해 7회로 나누어 포스팅하겠습니다.

근대적인 계획도시였던 신마산과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전통도시 원마산의 사정은 사뭇 달랐습니다.

당시 마산포(원마산)의 규모입니다.


1900년-1910년 경 마산포는 인가(人家)가 조밀하고 상점이 번화했으며 2,000여 호의 재래식 건물들이 들어서 있었습니다. 상점가는 주로 해변에 면해 있었습니다.

마산포의 중심부인 현 제일은행 마산지점 자리에는 정사각형의 1,500여 평의 부지에 150여 년 동안 존속해 온 마산창이 개항과 함께 감리서아문(監理署衙門)으로 변해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마산창은 100여년 전까지 존재했던 건물로서 규모․위상․역사성이란 측면에서 가장 상위의 관아였습니다.
마산창에 대해서는   <2010/06/28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 - 조선시대> 에서 이미 소개하였습니다.

마산창 주변은 좁은 길가에 잡화상과 미곡상 등의 상점으로 가득 차있었으며 주위 안팎에 마산창과 관련된 공덕비를 비롯한 석탑들이 많이 있었다고 합니다.
일제기에 창동을 석정(石町)이라고 불렀는데 이 석탑들 때문에 지어진 지명이었던 것 같습니다.

기록으로 당시 마산포 상황을 짐작할 수도 있습니다.
예를 들어 1901년 창동 구 시민극장 뒷골목에 있었던 황영택 장로의 집에서 마산의 기독교가 시작되는 최초의 모임이 있었다는 『문창교회백년사』 기록과
같은 해 마산 최초의 천주교 신자 김달시시오의 집이 오동동에 있었다는 『
天主敎馬山敎區設定10주년기념집』이 그것입니다. 
이 두
기록을 보면 도로변을 제외한 골목 안쪽은 대부분 주거용 건물로 사용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 밖에 창동의 옛 시민극장 자리에 마산민의소가 1908년 건립되어 사용되고 있었으며 1898년 마산창 내에 마산포우편물취급소가 설치된 후 1909년에 구마산우편소로 개칭되어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이 외에 남성동 일대에 마산금융조합과 진주농공은행마산지점 등의 금융시설이 있었으며 1909년에는 수성동에 동양척식주식회사의 출장소가 생겨 사용되고 있었습니다.

1906년 조창부지 서쪽에 일본인 등기공수(藤崎供秀)가 한인가옥 사이에 일본식의 점포를 2-3채 지어 세를 내주고 그 지역이 마치 제 지역인양 등기정(藤崎町)이라 부르기도 했습니다.
 

1908년에 마산포 영역인 서성동에 길천(吉川)이란 일본인이 사는 목조2층의 요정 '명월루'에 화재가 났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등기공수(藤崎供秀)와 길천(吉川)에 대한 두 기록은 을사조약 후 일본인들의 마산이주가 본격화되고부터 원마산에도 일본인들이 건축물도 짓는 등 상당한 진출이 있었던 것을 보여주는데 더 이상 자세한 정황은 알 수가 없습니다.


마산포의 시장은 번화했던 것으로 유명합니다.
당시의 마산포(원마산) 사정을 엿볼 수 있는 사진 두 장을 소개합니다.

조선통감부농상공부수산국에서 1910년 펴낸 『韓國水産誌』에 수록된 사진입니다. 책의 간행연도가 1910년(隆熙4년)이니 사진촬영 시기는 1908-1909년 혹은 그 이전일 수도 있습니다.




「구마산예시의 건염어점(舊馬山例市の乾鹽魚店)」이라는 설명과 함께 소개된 두 사진을 보면 좁은 시장통에 초가의 상점이 늘어서 있는 정경과 사람 수를 보아 상당히 성황을 이룬 거리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목조 흙벽에 초가를 얹었지만 늘어선 품새로 보아 시장이 번성했음을 한 눈에 알 수 있습니다.
아마 마산포 시장의 이런 모습이 조선 후기 내내 이어져 왔을 것입니다.

다음 글은 1908년 일본인 전연우언(田淵友彦)이 쓰고 박문관(博文館)에서 펴낸『한국신지리(韓國新地理)』254쪽에 수록된 마산관련 글입니다. 

**************************************************************************************한인가(韓人街, 마산포)는 마산만 안쪽의 북쪽에 각국거류지로부터 20여 정(丁, 1丁은 109.1m, 町이라고도 함)에 있으며 구마산이라고도 칭한다.

수 천 여 호에 인구가 약 4,500에 이르는데 옛날 조공미를 모은 집산지로서 함경도의 원산, 충청도의 강경과 더불어 팔도 3대 항구 중 하나로 일컬어 온 곳으로서 경상남도에서는 시가(市街)로서 제3위를 점한다.

마산 개항 당시에는 일본 상인들이 모두 여기에서 조선인들과 혼거하여 살았다. 또한 본 항 무역의 대부분을 점하고 있는 미곡은 가을과 겨울, 출하의 계절에 오직 여기에서 모든 것이 이루어지므로 일본인들도 여기서 거주하는 사람이 많은데 1904년 6월 현재 호수는 42호이고 남자89명․여자 56명이다.

구마산의 개시일(開市日)은 매월 3회로 5일․15일․25일에 열리는데 장날에는 부근 10 리 내지 20 리 떨어진 지역으로부터 주민들이 모인다. 특히 쌀이 출하되는 계절에는 조선화폐 취급고가 50,000관(貫, 관은 ‘괘’의 뜻으로 엽전 열 꾸러미, 곧 열 냥을 하나치로 계산하는데 쓰는 말이므로 1관은 10냥(兩)을 말한다) 이상 달하기도 한다.

구마산은 또한 어류집산지로서 염장어(鹽藏漁)를 위시하여 해삼․명태 등의 건어물을 취급하는 상점이 20여 호이며 매년 취급고가 수 십 만원까지 오른다. 어류는 일본어선 및 한국어선으로 공급하고 판로는 경상도․전라도로부터 충청도 방면까지 이른다.

일본인 중에서 구마산에서 일본어 학교를 열어 한국인 자제의 교육에 착수한 사람이 있다. 현재 학생이 수 십 명에 달하며 점차 발전하고 있다.




다음 글은『한국신지리(韓國新地理)』보다 6년 먼저 나온『韓國 案內』의 마산기록 중 마산포의 도시상황을 알 수 있는 부분입니다.
이 책은 일본인이 쓴 근대기 마산관련 최초의 문헌으로, 일본인
香月源太郞이 쓰고 東京 靑木嵩山堂에서 1902년 출간했습니다.

서울대 중앙도서관에서는
『韓國 案內』를 '대한제국기에 한국을 방문하는 일본인 여행객들을 위하여 한국의 개항장 등의 경제발전상황을 통계자료를 이용하여 소개하고 관광할 만한 명승고적과 은행 등의 위치를 기록하고 있는 책자이다'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구 마산포(舊 馬山浦) p.322

각국 거류지를 지나 약 10리 거리의 창원가도(昌原街道)에 있고 인가가 조밀하고 상점이 번화한 곳이다. 호수는 2,000여호이며 감리서(감리는 창원군수가 겸임), 경찰서 등이 있고 시가는 해변에 면하여 선박화물의 폭주가 매우 빈번하다.

옛날에는 이곳이 일본상인(행상)의 근거지였지만 마산개항에 즈음하여 신마산으로 이전하였다. 지금도 20여 호가 있고 대부분 조선가옥에 기거하고 있다.
 
**************************************************************************************

에 나오는 한국인과 일본인의 숫자는 다른 자료와 차이가 많아서 정확도에 의문이 생기지만 당시 마산포가 얼마나 활발했었는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마산포의 세밀한 상황은 복원도를 포스팅할 때 소개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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Ⅱ. 얼음장수의 정체, 증언 및 평가 1. 연구 대상자 프로필 (이 부분은 연구 대상자가 필자의 장인이어서 평소 필자가 그에게 들어서 알고 있는 사항과 그의 사망 후 필자가 이 글을 쓰기로 마음먹은 후 그의 가족, 일가, 지인..

얼음장수의 뜨거웠던 하루 : 3.15의거 한 참여자에 관한 미시사적 분석 - 1

이 글은 1960년 3․15의거 당일 야간 시위에 주도적으로 참가했던 한 개인의 증언을 바탕으로 그의 개인사를 하나의 창으로 삼아 역사적 사건을 재조명한 경남대학교 경제금융학과 서익진 교수의 논문이다. 연구는 사적 기록이나 증..

걸작 - 이집트 룩소르 구르나 마을 - 4

구르나 마을이야기 - 2 《극장》 극장은 아름다운 내부공간과 무대를 가지고 있었다. 햇빛을 가리기 위해 담쟁이가 덥혀있었다는 객석 회랑 목조 파고라 위의 담쟁이는 이미 찾아볼 수 없었지만 흙으로 빚어진 구조물은 모두 원형대로 ..

걸작 - 이집트 룩소르 구르나 마을 - 3

구르나 마을 이야기 - 1 일행이 나일강변에 자리한 경관 좋은 호텔에서 휴식을 취하던 오후. 안내자와 함께 조그만 배를 타고 나일강을 건너 구르나 마을로 향했다. 구르나 마을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현지 안내자 덕분이었다. 그..

걸작 - 이집트 룩소르 구르나 마을 - 2

위대한 건축가 하싼 화티(Hassan Fathy) - 2 하싼 화티가 구르나 마을을 건설할 1940년대 중반, 그 당시 영국의 식민 지배를 받고 있던 이집트는 서양식 건축이 판을 치고 전통적인 이집트 양식의 건물들은 사라져가고..

걸작 - 이집트 룩소르 구르나 마을 - 1

위대한 건축가 하싼 화티(Hassan Fathy) - 1 (이 글은 이집트 여행 중 우연히 만났던 하싼 화티의 구르나 마을 경험담이다. 오래 전 일이다. 지금 생각해도 그 우연은 내게 축복이었다. 울렁이는 감격으로 구르나를 둘..

걸작 - 중국 사천성 도강언(都江堰) - 4

도강언(都江堰)에 올라 이빙(李冰)을 생각하다 저명한 중국의 역사학자 위치우위(余秋雨)는, 중국역사상 가장 감동적인 건축물은 만리장성이 아니라 도강언이라고 했다. 도강언의 외관상 규모가 만리장성처럼 거대한 것은 아니지만, 많은..

걸작 - 중국 사천성 도강언(都江堰) - 3

위대한 목민관 이빙(李冰) 도강언 주변 일대는 성도나 인근 지역 사람들이 쉴 수 있는 아름다운 공원이기도 했다. 울창한 숲 속에서는 특유의 목소리를 내는 사천 매미가 왕왕거리며 울어댔고, 서북쪽의 산록에서는 시원한 고원 바람이..

걸작 - 중국 사천성 도강언(都江堰) - 2

5백 갈래로 나누어진 민강(岷江) 도강언의 시설은 크게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다. 어취(魚嘴)와 비사언(飛沙堰), 보병구(寶甁口)가 그것이다. 이 세 시설은 따로 있으나 서로 긴밀하게 연관되어 결과적으로 하나의 유기체적 결합..

걸작 - 중국 사천성 도강언(都江堰) - 1

천부지국(天府之國) 언젠가 중국 사천성 일대를 여행하였다. 그 동안 십 수차례 중국을 드나들었지만, 보면 볼수록 놀라운 것은 수천수만 겹 녹아있는 역사의 층위다. 대륙은 깊고 넓었으며 언제나 새로운 것을 보여 주었다. 지구상에..

노회찬의 추억
노회찬의 추억 2018.07.30

노회찬 의원과 저의 인연은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매체를 통해 저만 그를 알았을 뿐 그는 저를 몰랐습니다. 노회찬 의원을 직접 만난 것은 2016년 2월쯤이었습니다. 그해 4월 선거를 앞두고 창원에 내려왔을 때였습니다. 처음 만..

북한건축 - 건축은 건축의 눈으로 보아야

(지난 5월 29일 「건축사신문」에 실렸던 글입니다. 글 중 '우리'는 건축사를 말합니다.) 남북 정상이 판문점에서 손을 맞잡은 그 날, 이 나라 모든 국민은 TV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만찬장에서 제주도 소년 오연준의 목소리..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14 - 1980년대 이후

5) 1980년대 이후 - 4 아파트의 대중화는 주거설비의 획기적인 변화를 불러왔다. 아파트 사용자들은 첨단시설에 민감하게 반응했다. 가장 큰 변화는 주방시설에서 비롯되었다. 주부의 가사노동을 줄여줄 뿐 아니라 세련된 디자인과..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13 - 1980년대 이후

5) 1980년대 이후 - 3 2002년 말 우리나라 주택 보급률은 100%를 넘었다. 1인 가구를 포함하는 신주택보급률 역시 2008년에 100%를 상회(100.7%)함에 따라 주택의 양적 공급이 부족한 상태는 아니라고 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