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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1.19 00:00

마산 창원 역사 읽기 (35) - 제일여고 터에 일본 신사가 있었다

4. 유적으로 보는 마산·창원의 역사

4-9  제일여고 터에 일본 신사가 있었다

 

일제가 우리 민족을 무력으로 위압한 것이 군대와 경찰이었다면 정신적으로 위압한 것은 신사(神社)였다.

마산 제일여고 터가 신사였다.

<마산 시사 / 현 제일여고 터>

 

지금은 제일여고 뒤에 큰 도로가 나있지만 신사의 뒤쪽은 산이었다. 바다에서 보면 산을 향해 일직선으로 급하게 상승하는 길의 끝이다.

길 양옆에는 벚꽃나무가 즐비했고 길바닥은 조약돌이 깔려 있었으며 신사의 신주문에 이르기까지 층층이 돌계단을 밟고 올라가야 했다.

조선인이 거주했던 구마산 지역 산제당 가는 길의 꾸불꾸불하고 아기자기한 산길과는 몹시 대조적인 길이었다.

신주문 앞의 왼켠 마당에는 큰 대포 하나가 있었는데, 그 대포도 신사와 함께 동향으로 서서 마산 시가지를 내려다 보았다.

마산시의 지붕에 일본의 식민정책을 상징하는 두 쌍벽이 나란히 있었던 셈이다.

대포는 고 김형윤씨의 글에 의하면 일본 조병창에서 건조된 것으로, 일본의 군사력을

과시하기위해 마산만 중포병대대 입구의 산정에 두었다가 대대장이 1935년 마산부에 기증했고, 마산부는 이것을 신사 앞에 거치시킨 것이다.

광복 후에도 대포는 공터에 그대로 있었는데, 어느 날 「진일철공소」라는 고철공장이 마산시의 허가를 받아 망치로 두들겨 분해해서 뜯어 갔다고 한다.

일제침략을 증언하는 역사적 유물이 안타깝게도 고철로써 처분되어버린 것이다.

신사 주변과 신사로 올라가는 길가에 즐비했던 수많은 벚꽃나무들은 6·25 전쟁을 전후해서 주민들에 의해 모조리 베어져 땔감이 되었다.

배일감정도 있었지만 광복 후의 심각했던 물자난이 큰몫을 했다. 건축자재를 구한다는 것도 몹시 어려워서 집을 새로 짓기보다는 일본인들이 쓰던 건물을 가급적 그대로 고쳐 썼다.

마산 신사건물은「신마산교회」에 의해 잠시 예배당으로 사용되었다가, 1947년 제일여고의 전신인 마산 가정여학교가 이 자리에 들어서면서 교사(校舍)로 썼다.

가정여학교는 신사의 본전 건물을 교무실과 교장실로 썼고 부속건물을 교실로 사용했다.

부속건물은 그 후로도 오랫동안 남아서 몇년 전 허물 당시까지 학교 민속관으로 사용해 왔다.

학교와 학교주변에 아직도 신사의 흔적이 몇몇 남아 있다.

학교 안과 바깥에 있는 길고 넓은 돌계단이 옛 신사계단이다. 돌계단은 일제하 마산 부민의 근로봉사 작업이라는 명목의 강제노역에 의해 조성된 것이었다.

근로봉사 작업은 여러 차례에 걸쳐서 이루어졌다.

지금도 제일여고에 가면 입구의 돌기둥을 받쳤던 주춧돌이 교정의 정원석으로 남아 있고 담벼락에는 축조발기인이라고 밝힌 일본인의 이름을 음각한 돌도 박혀있다.

그리고 마산제일여고의 정문이 신사의 신주문을 닮았다고 하는 사람이 더러 있다.

물론 의도적으로 신주문을 모방하지는 않았겠지만, 보기에 따라서 그럴싸하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아마 계단 아래에서 바라본 육중한 문이 보는 사람을 제압하고 있다는 사실과 옛 신사에 대한 기분 나쁜 기억이 엉키어서 불러낸 느낌 때문이 아닌가 생각한다.

설립자 이형규씨에 의하면 이 문은 전주 체육관의 정문을 보고와서 그대로 설계해 지은 것이라고 한다.

 

<제일여고 정문과 신사 입구 계단으로 사용되었던 돌계단>

 

-왜 마산에 신사를 세웠나-

원래 신사는 일본의 토착신앙을 믿는 사람들이 참배하는 곳이었다.

이 토착신앙을 신토(神道)라고 하는데, 신토는 일본인들의 악령에 대한 두려움과 초자연적인 힘에 대한 참배로부터 생겨났다.

그러므로 신토는 뚜렷한 교리도 없이 취락별 민간신앙의 범주에만 머물러 있었다. 그래서 마을마다 도시마다 그들이 받드는 주제신(主祭神)도 다양했다.

주제신은 천황가의 조상신이라고 생각하는 천조대신(天照大神)이 가장 많고, 역대의 천황, 유명한 귀족들, 무사나 문신, 각 씨족의 조상신을 마을의 수호신으로 신사에 모셔 놓고 있다.

이와 같은 공식화된 신사 이외에 일본에는 별별 희한한 귀신들을 모시는 곳이 많다.

여우를 제신으로 모시는 신사가 있는가 하면, 개를 모시는 신사, 술신을 모신 신사, 된장신을 받드는 신사, 김치를 받드는 신사, 만두를 섬기는 신사, 부뚜막신을 받드는 신사, 젓가락을 받드는 신사, 냄비를 받드는 신사, 굴뚝신을 받드는 신사, 쌀을 받드는 신사, 물을 받드는 신사, 곳에 따라서 남근(男根)이나 여음(女陰)을 제신으로 하는 신사도 있다.

여우를 제신으로 모시는 신사를 도하신사(稻荷神社)라고 하는데, 광복 이전의 한반도에도 마산을 포함해서, 서울 남산, 인천, 목포, 부산, 진해, 진남포, 신의주, 용천, 성진 등지에 있었다.

마산신사의 본전에는 천조대신을 봉안했지만, 경내 오른쪽에 여우를 모신 도하신사(稻荷神社)와 주호신(酒護神)을 모신 송미신사(松尾神社)를 병설했다.

마산에 송미신사를 특별히 세운 것은 마산이 술의 고장이기 때문이다.

산의 기후와 수질이 양조에 적합해서, 일제 당시에 우리나라 청주의 6할이 마산에서 생산되었다고 한다.

마산의 일본인 양조업자들은 일년에 한차례씩 송미신사 앞에서 성대한 제를 올렸다.

일본인은 원시신앙에 머물러 있던 신토를 일본 천황의 가계에 맞추어 조직화하고 제도화하면서 그들의 세속적 지배에 유리하게 변질시켜 왔다.

그들의 논리는 이렇다.

일본황실의 조상은 천조대신(天照大神)이다. 천조대신의 직계종손인 역대의 천황은 만세를 일계로 이어나가는 현인신이다. 천조대신은 그의 직계손인 천황이 통치하는 일본국을 항상 보살펴 주고 보호해 준다는 것이고, 일본은 신국이고 황국이며 유신의 대도가 존귀한 모습으로 나타난 것이 신사라는 이야기이다.

한반도에 가장 먼저 들어온 신사는 부산신사인데 이미 17세기에 일본인이 부산에 상주하면서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그 후 1876년 한일수호조약이 체결된 후 각 지역의 각국 공동 조계(租界)에 일본 거류민의 수가 많아지면서 거류민들은 그 조계에 신사를 세우기 시작했다.

마산조계에도 일본인들이 꽤 많은 집단을 이루고 살았는데, 이 곳에 마산신사가 세워진 것은 1909년의 일이다.

마산신사는 일본상인 히로시 세이죠(弘淸三)의 창도로 건립되었다.

「마산항지」가 신사 건립에 대해 자세히 기록하고 있다.

세이죠는 마산에 사는 일본인 유지들과 신사 창건의 필요성에 대해 공감하고, 이사청을 방문해서 이사관으로부터 마산해관장 사택 예정지에 신사조성을 할 수 있도록 허가를 받는다.

마산신사는 세이죠의 말에 의하면 ‘거류민으로서의 조상신을 애호하는 염원과 진충보국 정신을 발양할 목적’으로 세워진 것이다. 1909년의 일이다.

이 때는 조선총독부가 한반도에 본격적인 신사정책을 펴기 전이고, 마산신사는 거류민들의 신앙적 차원에서 자발적으로 세워진 것이었다.

 

-일제는 신사참배를 통해 순종을 요구했다-

1915년에 들어서 조선총독부는 신사설립 기준과 그 인가절차를 정한「신사사원규칙」을 발표하고, 일본거류민들에 의해 세워졌던 각지의 대부분 신사들이 총독부로 부터 공인되고 정리된다.

1925년은 일제가 한반도 내에서 신사정책을 본격화하게 된 획기적인 분수령이 된다.

그해 서울 남산에 5년여의 공사기간에 걸쳐 조영한 조선신궁이 완성된 것이다.

조선신궁은 한반도에 거류하고 있는 일본인뿐만 아니라 한국인의 정신과 신앙심까지도 교화할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조선신궁의 건립을 계기로 신사는 조선인을 소위 황국신민(皇國臣民)으로서의 충성을 강요하여 일본화(日本化)시키려는 방법으로 원용(援用)되었고, 혹독한 기독교 탄압으로 이어졌다.

1930년대의 일제는 중국 대륙 침략의 첫 발로 만주사변을 일으켜 만주국을 세우고, 뒤이어 국제연맹에서 탈퇴하고, 드디어 노구교 사건을 유발하여 본격적으로 중국 본토를 침략하는 전쟁을 수행한다.

그들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 가장 절실한 것이 바로 한민족의 정신적 통일과 순종의 자세였다.

일제는 이러한 정신적인 지주를 신사 참배에서 찾으려고 했다.

조선총독부가 각 기관, 학교, 민간유지, 종교단체로 하여금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한 것은 1937년의 일이다.

그 이듬해「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이 조직되었고 이 운동의 말단 기관으로 애국반이란 것이 있었는데, 애국반원과 경찰은 신사참배를 강요하고, 또 매일 아침 시민들이 참배를 하고 있는지 감시하는 역할을 했다.

일제말기에 이르러 애국반이 460만명에 이르렀다고 하니 그 당시 신사참배의 광풍이 얼마나 참담했는가를 짐작할 수가 있다.

대부분의 조선민족이 신사참배에 굴복한 가운데 기독교인이 가장 강하게 거부했다. 끝까지 신사참배에 항거한 교회가 평양의 산정현교회였다.

산정현교회에는 민족의 거두라고 할만한 많은 인물들이 모여 있었는데, 당시 산정현교회의 장로는 한국의 간디로 통하는 고당 조만식 선생이었다.

고당 조만식 선생이 마산의 문창교회를 찾아와서 주기철(18971944) 목사를 산정현교회로 초빙한 것은 1936년의 일이었다.

주기철 목사는 진해 사람인데, 오산학교와 평양 장로회 신학교를 졸업하고 경남노회에서 목사안수를 받고 부산 초량교회에서 첫 목회활동을 했다.

그는 이 때 이미 “신사참배가 기독교 교리상 어긋난다”며 ‘신사참배 반대 결의안’을 경남노회에 제출하여 정식 가결을 받아 내기도 했다.

그가 산정현 교회에 부임해 가기 전에는 마산 문창교회에서 목회활동을 하고 있었다.

이즈음 일제는 신사참배에 반대하는 교인들을 모조리 구속하고 고문하는 잔악성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주 목사가 산정현교회에 부임해서 새 교회당을 완공하고 설교를 할 때, “우리 교회는 일본 우상에 대항하여 신사참배를 절대로 아니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로 인해 주목사는 1938년 부터 1944년 마지막 순교를 할 때까지 모두 5차례에 걸쳐 총54개월 간의 투옥생활을 하게 된다.

그는 옥중에서 몽둥이찜질, 채찍질, 쇠못 밟기, 거꾸로 매달아 코에 고추가루 뿌리기, 발바닥 때리기 등 상상도 할 수 없는 갖은 고문을 당하면서도 끝내 신앙적 변심을 하지않았다.

5번째로 구속돼 형무소에 갇히기 직전 자택에서 늙은 노모와 처자, 20명의 평양 산정현교회 교인들이 모인 가운데 그는 생애 마지막 설교를 남긴다.

“… 나는 바야흐로 사망에 직면하고 있습니다. 나는 저들의 손에 몇 번째 체포되었다가  나와서 이 강단에 다시 섰으나 나의 목숨을 빼앗으려는 검은 손은 시시각각으로 닥쳐오고 있습니다. 이제 나는 ‘사망 권세를 이기게 하여 주시옵소서’라고 기도 아니할 수 없습니다. 무릇 생명 있는 만물은 다 죽음 앞에서 탄식하며 무릇 숨쉬는 인생은 다 죽음 앞에서 떨고 슬퍼합니다. 사망 권세는 마귀가 사람을 위협하는 최대의 무기인가 봅니다. 죽음을 두려워 의를 버리며 죽음을 면하려고 믿음을 버린 사람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

숱한 고문으로 만신창이가 된 그는 평양형무소의 한 귀퉁이에서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주기철 목사의 장례>

 

-일본 귀신은 승신식을 통해 일본으로 갔다-

일본의 침략전쟁이 끝난 1945815일 현인신으로 군림하던 천황은 보통 인간으로 돌아왔다.

조선총독부는 종전과 동시에 조선신궁에 안치해 두었던 어령대를 동경 궁내성으로 돌려 보내고 각 지역의 신사에서는 승신식을 일제히 실시하게 했다.

승신식이란 신사관계자들이 참석한 가운데 신관이 엄숙하게 주문을 읽고 위패를 불태우면 신령이 하늘로 해서 본국으로 돌아간다는 의식이다.

마산신사의 승신식은 총독부의 지시에 따라 94일 집행되었다.

광복과 함께 한반도에서 광기를 부리던 일본의 군국주의 망령이 비로소 제 고향으로 되돌아가게 된 것이다.<<<

이현도 / 당시 창원대학교 독문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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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양만춘 2015.01.22 10:42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그런 귀신을 받들었으니 사람을 그렇게 탄압한 게 아니겠어요?
    아직도 잘못한 걸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귀신에 씌여도 단단히 씌인 게 이닐지...

    • 허정도 2015.01.22 17:54 신고 address edit & del

      그러게 말입니다.

2012.12.10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9) - 강점제3시기

<향토의 교통도(鄕土の交通圖)>

1932년 / 마산공립보통학교 / / / 鄕土の硏究 / 경남대학교 박물관

 

 

마산공립보통학교에서 필사본으로 당시 마산상황을 정리하여 간행한『향토의 연구(鄕土の硏究)』에 수록되어있는 지도입니다.

입체형식으로 그린 일종의 조감도인데 당시 마산의 도로가 잘 그려져 있습니다. 특히 일제기 마산 이야기 중 많이 등장하는 월포해수욕장의 위치가 정확하게 표기되어 있는 것이 이 지도의 자랑입니다.

월포해수욕장의 위치에 대해 이런 저런 주장이 많습니다만 이 지도를 보면 해수욕장의 위치가 신포동 매립지 쪽이 아니라 제2부두에서 중앙부두 쪽(현, 쌍용 시멘트 사일로 부근)에 있었다는 것을 정확히 확인할 수 있습니다.

두어 달 전, 제일여자고등학교 교장을 지내신 배두이 선생님에게서 월포해수욕장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께서 아주 어렸을 때, 흐릿한 기억으로 너덧 살 때였을 거라 했습니다. 현 장군교 인근에 집이 있었는데 가끔 해수욕장에 나간 기억이 난다고 하면서 위치는 전 마산시의회 바로 아래였다고 했습니다. 교장 선생님의 기억과 이 지도에 나타난 위치도 동일합니다. 맑은 물에 반짝이는 금빛모래의 잔상이 지금도 선생님의 기억에 남아 있다고 했습니다.

월포해수욕장과 관련한 동아일보의 기사를 소개합니다.

먼저 1931년 7월 19일 자 3면입니다. 아래 기사가 당시 신문의 원본입니다.

『마산 월포의 해수욕장 개시』라는 큰 제목 아래 「욕객에겐 긔차임도 할인, 아동 수영소도 별설」이라는 작은 제목이 있으며 기사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기후와 공기가 온화하고 명미하며 경치가 좋기로 유명한 마산 월포해수욕장이 개시되었다. 지난 10일 오후 1시 마산신사(현 제일여고)에서 부윤(현, 시장)을 비롯한 5-60명의 관민이 모여 월포해수욕장의 개장식을 마쳤는바 연일 비가 계속되었으므로 해수욕장은 자못 한산하여 있던바 지난 15일부터는 욕객이 모여들어 번창한 중에 있다. 특별히 아동수영소를 별립하였으며 각지의 욕객을 흡인하기 위하여 욕객에게는 기차임금까지도 할인하는 동시에 시내버스를 욕장 입구에 까지 운전하는 중인바 마산 월포해수욕장은 수질과 모래 및 공기 모두 해수욕장으로서의 조건을 구비하여 있으므로 금년 하긔(여름)에도 자못 번창할 것을 예측한다고 한다」

해수욕장의 개장식을 신사(神社)에서 했다는 점이 특이합니다.

다른 기사는 1934년 7월 5일 자 5면에 실린 기사입니다. 당시 기사의 원본입니다.

 

『때 만난 마산월포해수욕장』이라는 제목의 사진기사인데, 내용은 「여름의 바다는 젊은 남녀들의 마음을 떠들썩거리는 판인데 마산 진해 해수욕장에도 벌써부터 남조선 각지에서 욕객이 모여드는 판이다. 마산 월포해수욕장은 남조선 지방에서도 물이 맑고 모래가 하여 풍광이 명미하기로 이름이 높아 각 여관업자들은 이 때 한목을 보게 된다고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위 두 기사를 보아 월포해수욕장은 당시 최고의 여름 휴양지 아니었던가 싶습니다. 월포해수욕장은 중앙부두 건설이 시작된 1936년까지 존속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이 외에 이 지도에는 각 동(당시는 町)과 주요 건물이 표기되어 있습니다만 약도 형식이기 때문에 상세하게 도시를 파악할 수 있는 지도는 아닙니다.

신마산 부두에서는 대판과 고베 등 일본으로 가는 항로가 있고 마산포(원마산) 부두에서는 진해와 부산으로 연결되는 항로가 표시되어 있습니다.<<<

 

 

2012/07/3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0) - 강점제3시기

2012/08/0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1) - 강점제3시기 

2012/08/1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2) - 강점제3시기 

2012/08/2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3) - 강점제3시기

2012/08/2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4) - 강점제3시기

2012/09/0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5) - 강점제3시기 

2012/09/1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6) - 강점제3시기 

2012/09/1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7) - 강점제3시기

2012/09/2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8) - 강점제3시기 

2012/10/0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9) - 강점제3시기 

2012/10/0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0) - 강점제3시기 

2012/10/1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1) - 강점제3시기 

2012/10/2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2) - 강점제3시기

2012/10/2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3) - 강점제3시기

2012/11/0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4) - 강점제3시기 

2012/11/1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5) - 강점제3시기 

2012/11/1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6) - 강점제3시기 

2012/11/2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7) - 강점제3시기

2012/12/0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8) - 강점제3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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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03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5) - 강점제3시기

<강점 제3시기 마산의 양조산업>

1904년에 한목단(寒牧丹)이라는 상표를 가졌던 아즈마(東)주조장을 시작으로 마산에는 일찌감치 양조산업이 들어왔습니다.

한목단(寒牧丹)이라는 상표를 가졌던 아즈마주조장은 나중에 원전(原田)주조장으로 회사명을 바꿨는데 경남대 정문 앞, 옛 일성펌프 자리에 있었습니다.

아래 사진 1930년대 중반의 원전(原田)주조장입니다. 

 

성장에 성장을 거듭한 마산양조산업은 1928년 그 생산량이 11,000석으로 늘어 10,000여석을 생산한 부산업계를 제치고 드디어 국내 지역별 술 생산량에서 제1위를 차지했습니다.

마산청주업계의 호황은 이후에도 계속되면서 생산량이 해마다 증가하여 국내뿐만 아니라 만주와 중국에 까지 그 이름을 떨쳤고, 1938년에는 양조량이 20,000석을 넘었습니다.

마산의 청주업자 조합에서 현 제일여고 자리에 있던 신사(神社)에 천조대신(天照大神)을 모신 본전 외에 자신들의 주호신(酒護神)을 모신 송미신사(松尾神社)를 두고 정기적으로 제사를 지냈을 정도로 주류산업은 마산의 대표적인 산업이었습니다.

아래사진은 마산 중앙동에 있던 양조공장(해방 후 삼광청주)입니다. 좌측 네모안 굴뚝 쪽이 천도원 주조장, 우측 원형 굴뚝 쪽이 나중에 삼광청주가 인수한 이데(井手)주조장입니다.

1930년대 건축된 건물로 보존 가치가 충분했지만 아깝게 철거되고 말았습니다. 그 아래 또 다른 사진은 미생(彌生)이라는 이름으로 제조했던 천도원 주조장의 술통과 마쯔모도주조장의 술통입니다. 

 

대규모 양조장은 대부분 1930년 이전에 설립되어 활발하게 운영되었기 때문에 1930년대 이후에 신설된 양조회사는 많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전통주인 청주회사 외의 주조회사 설립은 약간 있었습니다.

먼저, 1937년 중앙동에 소주전문회사로 설립한 합자회사 마산중앙조선소주공장이 있습니다. 이 공장은 자본금 3만원으로 1937년 1월 1일 중앙동 3가 2-4번지에 설립한 회사로, 소주를 전문으로 생산 판매하였으며 사장은 일본인 산근재길(山根才吉)이었습니다.

이 밖에 한국인들이 즐겨 마셨던 탁주양조회사로 낙동양조소(1932년)과 동일양조장(1938년)이 설립되었습니다.

낙동양조소(대표 한국인 이달영)는 중성동 130번지에서 1932년 1월 28일 자본금 5천엔으로 설립되었으며, 동일양조장(대표 한국인 탁응조)은 1938년 1월 1일 오동동 149-28번지에 자본금 6천엔으로 설립된 회사였습니다.

그러나 1941년 태평양 전쟁 발발 후에 양조업계도 생산에서 판로에 이르기까지 전시 통제령의 구속을 받게 됩니다.

이 때문에 각 양조회사는 생산능력에 따라 배정된 원료로 한정된 양만을 생산했고 생산품은 군수용과 일반용으로 그 양이 지정 구분되어 공급되었습니다. 당연히 마산의 양조산업에도 그 영향이 미쳤습니다.

마산과 술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기회에 다시 포스팅하겠습니다.

간장 된장 등을 생산하는 장유산업도 마산을 대표하는 산업이어서 1928년 기준으로 평균 5,000석 정도를 생산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942년 초 신포동 해안 매축지에 6,000평 규모의 부지를 확보하여 건립한 대형공장인 환금장유주식회사가 들어섰습니다. 이 거대한 회사 때문에 마산의 장유산업은 그 규모가 크게 늘어났습니다. 생산량이 무려 3만 석이나 되었습니다.

환금장유(주)는 공장․건물․기계기구 일체를 일본의 유휴설비와 건물 등을 이전하여 설립한 회사로, 이곳에서 생산한 물품은 대부분 군수용이었습니다.

일제에 의해 시작된 마산의 장유산업은, 전국에서 명성이 높은 몽고간장을 통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 외 식품가공업으로 1941년 3월 자본금 19만 5천원으로 마산에 있던 일본인들이 마산햄제조주식회사(1941년, 사장 常松泰)를 설립하여 월 평균 600마리의 돼지로 햄과 소시지를 생산하기 시작했고, 원식품공업소(1931년)가 남성동에 85평 규모로 설립되었습니다.

일본인 원자부(原紫部)가 설립한 원식품공업소는 어류통조림회사로 1936년 3,980상자, 1937년 4,796상자, 1938년 7,121상자, 1940년 6,828상자를 생산했습니다.<<<

 

 

2012/07/3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0) - 강점제3시기

2012/08/0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1) - 강점제3시기

2012/08/1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2) - 강점제3시기

2012/08/2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3) - 강점제3시기

2012/08/2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4) - 강점제3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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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7.09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17) - 강점제2시기

<1920년대 마산역 광장, 신사, 월영대 사진>

오늘은 1920년대 초에 마산의 사진 몇 장을 소개합니다. 엽서에 소개된 사진입니다.

우선 이 엽서들이 들어 있었던 봉투를 보겠습니다. 반도의 낙토, 마산명소 그림엽서, 동경당 발행(半島の樂土 馬山名所繪葉書, 東京堂發行)이라고 적혀있고, 벗나무와 마산만과 마산 전경이 그려져있습니다.

 

다음은 마산역이 있었던 역전광장 사진입니다.

광장 제일 안쪽에 있는 단층 건물이 역 청사인데, 중부경찰서 앞에 있는 지금의 벽산 블루밍 아파트 자리입니다.

오른쪽 건물은 우체국입니다. 건물은 다시 지었지만 지금도 저 자리에는 합포우체국이 있습니다.

다음은 마산신사입니다.

제일여자고등학교 부지 내에 있었는데, 마산공원 안에 있었기 때문에 ‘마산공원 마산신사’라고 적어 놓았습니다.

건물은 사라진지 오랩니다만, 제일여고 교정에는 신사가 있었을 당시에 심어 놓은 나무 몇 그루가 아직 남아 있습니다.

 

다음은 고운 최치원 선생이 세운 월영대 터입니다.

왼쪽에 돌비석에 月影臺라고 새긴 글은 고운 선생 친필이라고 전해집니다. 지금도 남아 있습니다.

 

위 세 사진을 찍었던 자리의 현재 위치입니다. 역전광장이 뿕은 색, 마산신사가 푸른 색, 월영대는 노란 색입니다.<<<

 

 

2011/11/2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5) - 강점제2시기

2011/11/2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쳔사 (86) - 강점제2시기

2011/12/0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7) - 강점제2시기

2011/12/1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8) - 강점제2시기

2011/12/1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9) - 강점제2시기

2011/12/2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0) - 강점제2시기

2012/01/0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1) - 강점제2시기

2012/01/0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2) - 강점제2시기

2012/01/2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3) - 강점제2시기

2012/01/3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4) - 강점제2시기

2012/02/0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5) - 강점제2시기

2012/02/1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6) - 강점제2시기

2012/02/2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7) - 강점제2시기

2012/02/2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8) - 강점제2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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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3/1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0) - 강점제2시기

2012/03/1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1) - 강점제2시기

2012/03/2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2) - 강점제2시기

2012/04/0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3) - 강점제2시기

2012/04/0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4) - 강점제2시기

2012/04/1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5) - 강점제2시기

2012/04/2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쳔사 (106) - 강점제2시기

2012/04/3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7) - 강점제2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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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옥가실 2012.07.09 10:27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참으로 귀한 사진 건졌구려.
    진품을 함 봅시다. ^^

  2. 스튜던트 2012.08.10 10:35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엽서 봉투에 그려진 마산만만 봐도 마산인걸 알것 같아요/

2011.09.19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6) - 강점제1시기

<마산 최초의 상업용 매립>

한일병합 직후 마산 최초의 상업용 매립이 남성동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위치는 어시장의 진동골목과 대풍골목 등 오래전부터 마산어시장 상권의 핵을 이루고 있는 지역입니다.

이 매립의 규모와 형태는 매립 전 마산포 지도(1899년)와 매립이 시작되려던 시점의 지도(1910년 초반), 그리고 매립이 끝난 후 마산포 지도(1919년)를 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다음과 같습니다.


1920년대 이후의 매립에 관해서는 국가기록원에서 그 경위와 내용을 찾을 수 있지만 합방직후에 시행된 이 매립공사에 관해서는 기록을 찾기가 어려웠습니다.
어쩔 수 없이 매립의 규모와 위치 및 일자 등은 사정토지대장과 사정지적도를 보면서 낱낱이 확인하였습니다.

확인 결과, 이 매립은 대지 8,078평 도로 3,560여 평으로 모두 11,640여 평에 이를 정도의 대규모였습니다. (도로면적은 정확한 것이 아니고 각종 자료에 나오는 것을 인용하였습니다)

마산지방해운항만청이 발간한 『마산항백서』에 의하면 이 매립공사는 1911년 착공되어 1914년 7월 준공되었다고 합니다.
『마산항지』에서는 1910년 착공하여 1913년 준공되었다고 기술하고 있기도 합니다.


이 매립공사는 부산에 살았던 일본인 박간방태랑(迫間房太郞)에 의해 시행되었습니다.

박간방태랑(迫間房太郞)은 일본 화가산현(和歌山縣) 출신으로 대판 오백정장평(五百井長平)상점에 들어갔다가 21세가 되던 해 한국으로 왔습니다.
무역업으로 일을 시작한 박간은 1905년부터는 독립하여 수산업․창고업․목물무역업․토지매매중개업 등에 종사했습니다.

유명한 동래별장의 주인이며 당시 부산 제일의 땅 부자였습니다.
부산상공회의소 특별위원․경상남도회부의장․부산번영회장을 역임하였고 부산토지주식회사사장․부산상업은행과 조선저축은행 이사를 지내며 부산경제를 쥐락펴락한 인물입니다.

1923년 부산을 현지 르뽀한 잡지 개벽(開闢)의 기자는
「․․․․迫間方太郞 같은 사람은 그 한사람의 부력(富力)이 10,031호 조선인의 전 부력을 당하고도 남음이 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도시사학자 손정목은
‘그가 개인적으로 한반도 전체 일본인 중 최고의 자산가였다’
라고 했습니다.
실제로 그는 한국에 나온 일본인 중 최고부자였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 지역과도 인연이 깊습니다.
경남 도내 소작지의 3.5%를 소유하였고 소작농이 2,000여 호가 될 정도의 대지주였으며 김해 진영면과 창원 대산면 동면 등 3개면에 걸친 진영농장의 주인이기도 했으니 옛 창원시의 땅도 많이 가졌던 셈입니다.

그런가하면 1896년 11월에는 부산에서 자본금 2만 5천원으로 부산창고주식회사를 설립하기도 했는데 이 회사가 우리나라에 세운 일본인 회사의 효시입니다.

유명한 '마산포 사건' 때는 러시아의 진출을 막기 위해 조선인 지주들을 꾀어 토지를 매수하도록 하였고, 그 공로로 일본정부로부터 서훈을 받기도 했으니 마산과도 인연이 깊은 셈입니다.

유장근 교수와 함께 걸었던 도시탐방대 답사 때 무학산 어느 능선에서 그의 땅이었다는 표지석이 서있는 것을 발견한 적이 있습니다. 아무리 짧게 잡아도 7-80년은 되었을 돌이었습니다.
후에 생길지도 모를 ‘마산근대사 박물관’에 전시하기 딱 좋은 유물이라, 보관해 놓을 생각도 했는데 무거워서 옮기지를 못했습니다.

이 사진입니다.
‘박간소유지(迫間所有地)’라고 뚜렷이 음각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박간의 ‘마산과의 인연’은 바로 남성동 매립에서 극명히 드러납니다.

개항 초부터 한국인과 일본인 사이에 매립 때문에 생긴 충돌, 즉 앞서 포스팅한 김경덕 매축권에 대한 홍청삼(弘淸三)의 권한 계승 시비 사건(2011/01/2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42) - 개항이후)이 있었던 이곳을 그가 매립한 것입니다.

매립의 실제 전주(錢主)는 박간방태랑이었지만 이 사업을 마산에서 직접 시행한 이는 바로 홍청삼(弘淸三)이었습니다.
홍청삼은 당시 마산거주 일본인의 거물로 현 제일여고에 있었던 신사건립을 주도한 사람이기도 합니다.(2010/11/2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4) - 개항이후)

다음 그림은 제가 복원한 당시 지도인데 이 그림을 보면 쉽게 매립전후를 비교할 수 있습니다.
먼저 것은 매립 전인 1910년 경 도면이고 뒤것은 매립이 끝난 1920년 도면입니다.
 

 

이 때 매립된 토지의 지번과 소유자를 구체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토지는 총 52필지로 수성동115, 116, 117번지와 남성동 172번지부터 221번지까지였습니다. 수성동에 3필지가 있지만 이 글에서는 편의상 이 지역의 명칭을 ‘남성동 매립지’라고 부르겠습니다.

매립된 52필지 중 수성동 116번지 374평과 117번지 34평, 합408평은 일본인 송원조장(松原早藏)의 소유(■부분)로, 남성동 200번지는 국유지(●부분)가 되었고, 나머지는 모두 매립주 박간의 소유가 되었습니다.

항만의 요지(要地), 즉 초록색으로 표시한 ●부분의 남성동 200번지, 102평의 대지가 국유지로 된 사유는 알 수가 없습니다.
박간이 너무 넓은 대지를 매립을 통해 일거에 소유하게 되자 그 답례로 부두용지 혹은 공공건물 부지로 총독부에 헌납했던지, 아니면 공공의 목적으로 그 땅을 정부가 매입했는지, 그저 추정만 해볼 뿐입니다.

박간 소유의 대지 49필지 7,568평은 아무런 변화 없이 전부 1936년 2월 22일 그의 아들로 추정되는 박간수웅(迫間秀雄)에게 이전되었고, 그런 상태로 해방까지 갑니다.

박간수웅(迫間秀雄)이 박간방태랑(迫間房太郞)의 아들이라고 했지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추정입니다.
성이 같다는 점과 당시의 사회적 관습에 미루어 자신의 재산 소유권을 승계 시켰다면 아들아닌가 라고 추정했을 뿐입니다.

다른 기록인 「19세기 후반․20세기 초 경남지역 일본인 지주의 형성과정과 투자 사례, 1999, p.68, 한국민족문화 제14집」에 의하면 박간의 아들로 박간일남(迫間一男)이 등장하고, 그의 가계 중 박간무웅(迫間武雄)이라는 이름이 나옵니다.
그런 점에서 보면 박간수웅은 혹 박간의 집안 조카일 수도 있습니다.

어쨌든 일제강점기가 끝날 때까지 이 많은 토지를 한 필지도 매매하지 않고 소유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은 대지 혹은 건물을 전부 임대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동안 지역에서 발간된 자료에서는 ‘
새로 매립된 토지의 가격이 최저 7원 50전에서 최고 22원까지 토지의 위치에 따라 상당한 격차가 있었는데 이를 박간이 분양하였다’라고 했습니다만 이는 사실과 다릅니다.

이 매립지가 해방 때까지 소유자 변경이 없었다는 것을 토지대장에서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馬山港誌』의「馬山浦 埋立地」편에서도 추방사랑(諏方史郞)은 매립지에 대해「․․․유감스러운 것은․․․․․․차지료(借地料)가 비교적 고율이라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기도 합니다.

박간이라는 일본인 단 한 사람에게 마산포에서 생업을 이어 가던 모든 사람들이 대지와 혹은 건물을 임대하여 영업을 했다는 사실은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아무튼 매립 후부터 이곳은 원마산 상권의 요충지가 되었습니다.

앞서 포스팅한 것처럼 마산만에는 박간 매립 전부터 여러 차례 매립이 있었습니다만 모두 군부 혹은 공공기관에서 시행했거나 임의의 매립이었습니다.
이에 반해 박간의 매립은 민간인이 이윤을 목적으로 법적허가를 득하여 매립한 사례로 최초의 것입니다.

또 한가지,
이미 포스팅한 1910년경 마산포 토지소유상태를 통해 이미 일본인의 원마산 진출은 확인했습니만 본 매립사업 이후 일제의 원마산 상권 장악이 더욱 심화되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입니다.

그런 점에서 이 매립은 일제가 항만도시 마산의 경제권을 장악하기 위한 식민정책 중 가장 직접적이고도 적극적인 수탈 사례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기도 합니다.

이 때 매립된 남성동 해안에는 석축안벽(石築岸壁)과 석축돌제(石築突堤) 등의 항만시설이 조성되었고 소형 선박이 접안할 수 있는 시설과 물량장을 갖추었습니다.
이 부두는 어선과 소형 화물선들의 정박지로서의 기능뿐만 아니라 통영․거제 등 남해안 일대를 운항하는 연안 여객선 부두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리고 매립지에 신설된 도로 사이에는 원정우편소(元町郵便所, 현 남성동우체국)를 시작으로 건축물들이 들어서기 시작했습니다.

매립하고 10년 쯤 지난 1924년, 이곳에 다음과 같은 길이 63.6m의 사석방파제가 설치되었습니다.

제 나이 열 두세살 쯤,
이 방파제 위에서 낚시를 했는데 팔뚝만한 뽀드라치를 한마리 낚아 올린 추억을 가지고 있습니다.<<<







2011/05/1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8) - 강점 제1시기
2011/05/2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9) - 강점 제1시기
2011/05/3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0) - 강점 제1시기
2011/06/0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1) - 강점 제1시기
2011/06/1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2) - 강점 제1시기
2011/06/2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3) - 강점제1시기
2011/06/2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4) - 강점제1시기
2011/07/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5) - 강점제1시기
2011/07/1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6) - 강점제1시기
2011/07/1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7) - 강점제1시기
2011/07/2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8) - 강점제1시기
2011/08/0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9) - 강점 제1시기
2011/08/0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0) - 강점제1시기
2011/08/1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1) - 강점제1시기
2011/08/2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2) - 강점제1시기
2011/08/2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3) - 강점제1시기
2011/09/0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4) - 강점제1시기
2011/09/1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5) - 강점제1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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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29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4) - 개항이후



<합포만 내려다 본 일본 신사(神社)>

일제가 우리 민족을 무력으로 위협한 것이 군대와 경찰이었다면 정신적으로 위압한 것이 신사(神社)였습니다.
한반도에 가장 먼저 들어온 일본신사는 부산신사인데 이미 17세기에 일본인들이 부산에 상주하면서 세워졌다고 합니다.
그 후 1876년 한일수호조약(강화도조약)이 체결된 후 개항된 도시에 각국공동조계지가 설치되면서 일본거류민들이 조계지에 신사를 세웠습니다.

마산의 일본 신사(神社)건립계획은 순종이 마산을 방문했을 때 쯤 (1909년 초) 홍청삼(弘淸三)에 의해 주도되었습니다.
그 이전부터 마산경제회 등 일본인 유지들이 모인 자리에서 여러 차례 신사의 필요성이 제기되었지만 아무도 그 일을 맡아서 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어느 날 홍씨가 마산의 일본인 유지 27명을 요정 ‘망월’에 초대하여 신사 창건을 호소하면서 시작되었습니다.

『마산항지』의 기록에 의하면 홍청삼은 ‘거류민으로서 조상신을 애호하는 염원과 진충보국 정신을 발양할 목적’ 으로 신사의 필요성을 역설했다고 합니다.

당시 마산이사관이던 삼증(三增)이 해관장의 사택 예정지를 신사 부지로 내놓았습니다. 바로 지금의 제일여고 교정입니다.

도시공간적 측면에서 볼 때 가장 위계가 높았던 자리로 아래 그림의 위치입니다.
밑의 사진은 1910년대에 발간된 마산지도에 나타난 '마산신사'입니다.

 

 

 


일제기 마산신사 전경입니다.


 

 

신사건립을 위해 1909년(명치 42) 2월 8일 마산소학교(현 월영초등학교)에서 일본인 유지 백여 명이 모여 마산신사 창건위원 10명을 선출하였습니다. 그 중 전전(前田) 민장이 위원장에, 뒷날 『마산항지』를 펴낸 추방사랑(諏方史郞)이 지진제(地鎭祭)의 신관(神官)으로 추대되었습니다.

지진제는 3월 3일 삼증 이사관, 전전 민장, 홍청삼 민회의장, 민회의원, 상업회의소의원 등 7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거행하였으며 전전 위원장은 신사 창건기부금 5천원의 모금계획을 이사관에게 신청, 인가를 얻어 즉각 활동을 전개했습니다.

아래 사진은 마산신사 지진제를 거행하는 장면입니다.

 

 


공사는 마산에 거주하던 말광기오랑(末光磯五郞)이라는 장인이 맡았습니다.
공사장에는 욕조를 두어 직공들과 함께 매일 아침 몸을 깨끗이 씻은 후 일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마산신사에는 천조대신(天照大神)을 봉안한 본전 외에 술 만드는 신 주호신(酒護神)을 모신 송미신사(松尾神社)도 있었습니다. 송미신사는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고 1936년에 증설하였습니다.
1920년 대 이후 번성했던 마산의 주류산업이 원인이었던 것 같습니다. 마산의 일본인 양조업자들은 일 년에 한차례씩 송미신사 앞에서 성대한 제를 올렸다고 합니다.

지금도 제일여고 주변에는 당시의 신사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교문 안과 바깥 돌계단이 옛 신사입구 계단입니다. 이 돌계단은 일제기 마산포 주민들이 근로봉사작업이라는 명목으로 강제노역에 의해 만들어진 것입니다.

교정의 정원석으로도 신사의 흔적이 남아 사용되고있으며, 담벼락에는 축조발기인이라고 밝힌 일본인의 이름이 음각된 돌도 박혀있다고 합니다.

아래 사진은 일제기 마산신사 입구 모습과 현 제일여고 정문 사진입니다.

 



정문 앞 계단은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제일여고 교문이 신사의 신주문을 모방했다는 설도 있지만 그것은 사실과 다른 것 같습니다.
『마산 창원 역사읽기』에서 설립자인 이형규 이사장이 제일여고 교문은 전주종합경기장 정문(수당문)을 모방한 것이라고 밝힌 적이 있습니다.

아래 사진이 전주종합경기장 정문입니다.<<<

 





2010/10/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6) - 개항이후
2010/10/1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7) - 개항이후
2010/10/1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8)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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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1/0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0) - 개항이후
2010/11/0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1) - 개항이후
2010/11/1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2) - 개항이후
2010/11/2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3)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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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옥가실 2010.11.29 20:31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아, 못보던 사진도 올라왔군요. 특히 지진제 사진....
    어디서 구하셨나, 저 진귀한 사진을.....
    그리고 추방사랑의 일본훈은 '수와(Suwa)입디다.

    • 허정도 2010.11.29 21:37 신고 address edit & del

      우리가 몰랐던 자료도 참 많네요.

2010.10.25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9) - 개항이후

 

<상공회의소, 인력거, 매춘,,,,>


개항 이후 하루가 다르게 밀려오는 외국자본의 경제 침식에 맞서 지역 상권을 지키려는 노력이 있었습니다. 전국개항장의 객주와 여각 등 상인들이 자위적으로 상인 단체들을 조직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조선 정부는 갑오개혁 이후 자연발생적으로 생긴 이러한 조직체를 통괄하여 외세로부터 민족 상권을 옹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1895년 11월 10일「상무회의소 규례」를 제정하였습니다. 이 규례가 우리나라에서 제정된 근대적 상공회의소에 관한 최초의 법령입니다.

대한제국기인 1899년 5월 12일에는 칙령 제19호로 전 조항을 개정했는데 이로써 근대적 면모를 갖춘 상무회의소가 설립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날을 기념해 정부에서는
1962년부터 이 개정규례가 발포된 5월 12일을「상공의 날」로 정해 지금까지 기념하고 있습니다.

이런 흐름 속에서 마산도 1900년 5월 마산포 객주를 중심으로 「마산상호회」를 조직했습니다.
「마산상호회」는 당시 마산포 시장의 주도권을 잡고 있던 이규철, 이상태 등이 참여했으며 상호회의 운영자금은 어선창에 입항하는 모든 선박 화물 1뭉치 당 엽전 1원씩을 징수하여 충당했다고 합니다.
원산(1882년)․한성(1884년)․부산(1889년)․인천(1896년)․목포(1898년)에 이어 전국 여섯 번째로 비교적 빠른 편이었습니다. 마산에 이어서 북청․대구․평양․김천․군산․개성․수원에도 ‘상호회’가 조직되었습니다.

「마산상호회」는 1906년 「조선인상업회의소」로 바꾸어 운영했으나 경술국치 후 일제의 압력 때문에 갈등을 빚다가 1914년 8월 28일 해산 총회를 가졌습니다. 이 때 운영비 잔액 500원을 민족학교였던 사립창신학교의 육영사업비로 기증하였습니다.
이런 정황을 미루어 볼 때 당시 「마산상호회」에는 마산의 양심적인 민족자본가들이 참여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1900년「마산상호회」의 출범이 현재 마산상공회의소의 기원입니다. 올 해로 마산상공회의소가 110주년이 된 까닭도 바로 이 때문입니다.
마창진 도시통합으로 마산상공회의소는 없어지지만 '통합창원시 상공회의소'의 역사는 마산상공회의소 것을 이어받는다고 합니다.

아래 사진은 1939년부터 일본인들이 사용하다가 해방 이후 1958년까지 사용되었던 마산상공회의소 회관입니다. 마산 중앙동 1가에 있었습니다.



〈개항 후 사회변화〉

일제가 우리나라를 삼키니 마산사회도 급격히 변해갔습니다. 몇 가지 살펴보겠습니다.

○ 인력거

갑오경장을 전후하여 우리나라에는 세 가지 교통수단이 등장하

였습니다.
자전거와 하마차(荷馬車) 그리고 인력거였습니다.
그 중 인력거는 일본사람들이 발명한 것으로서 1894년에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전국에서 인력거를 가장 먼저 공식 교통기구로 인정하여 운행했던 곳이 마산입니다.

「인력차영업취체규칙」이 마산 이사청에 의해 제정 공포되어 시행한 것이 1908년 5월 22일이었습니다.
서울 및 경기도 일원은 같은 해 8월 15일자 경무청 령으로 「인력차영업단속규칙」이 공포되어 인력거 영업과 관련된 사항을 규정하였습니다.

요즘 말로 하면 '마산에서 전국 최초로 교통법을 만들어 적용' 한 셈입니다.
마산에서 인력거 사용과 조치가 이처럼 빨랐던 것은 '한국인들의 원마산'과 '일본인들의 신마산'이라는 두 지역이 도시 내에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매춘

이 시기에 일본인들에 의해 사창(私娼)도 생겼습니다.

한국 땅에 공인된 창기업(娼妓業)의 집단지역, 즉 유곽(遊廓)이라는 것이 최초로 생긴 것은 1900년 10월에 재부산 일본영사관에서 허가한 부산 일본전관거류지 바로 동쪽 부평동 1가입니다.
부산에 이어 1902년 12월에는 인천에도 유곽(遊廓)이 허가되었습니다.


이런 유곽이 마산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그 직후로,
1904년
마산선 철도공사 때 들어온 건설노동자와 함께 일본 매춘부가 들어왔습니다.

김형윤 선생의 『마산야화』에 의하면 1907년경 현 자산동 몽고간장 뒤편에 일본인에 의해 조선인 창녀 7-8명이 기거하며 영업을 하였고 1910년경에는 전 미도식당 동쪽입구(제일은행마산지점 뒷골묵) 골목에 조선인 창녀 5-6명이 있었다고 합니다.

○ 가포에 들어선 일본마을 지바무라

한편 일본의 한국이주 정책의 일환으로 1905년 2월 율구미 남쪽 해변에 일본 지바껜(千葉縣) 수산연합회의 어민 20명이 어업이민으로 정착하여 마을 이름을 지바무라(千葉村)라 부르면서 거주하기 시작했습니다.
장어구이 식당이 많이 들어서있는 가포마을이 바로 그곳입니다.

지금도 이 마을에는 당시 일본인들이 거주하던 집을 개조한 ‘소나무집’이라는 장어구이 식당이 있습니다.
당시 일본인 주택 정원에 있던 소나무가 남아 상호가 되었습니다.

○ 여관, 병원, 신문, 극장 그리고 동척,,,,

당시 마산에는 여관이 30여 개소있었는데 그 중 3개가 원마산에 있었습니다.


하루에 이용하는 투숙객이 150여 명으로 연인원 56,000여 명이었으니 마산에 출입하던 일본인들의 숫자가 대략 짐작됩니다.

그런가하면 1904년에는 마산 최초의 병원이 1904년 가을 창포동 3가에 덕영오일(德永吾一)이란 일본인이 「마산병원」이란 이름으로 개업했습니다.
오른쪽 사진은 1911년에 편찬된 『마산과 진해만』에 실린 이 병원의 광고입니다.

1906년 2월에는 마산 최초의 언론, 「마산신보」가 창간되었고,
1910년경에는 5-600명의 수용이 가능한 일본식 목조 2층 회전무대식 극장 환서좌(丸西座)가 건립되었
습니다.

같은 시기인 1909년 10월 6일에는 경제수탈의 첨병 동양척식주식회사 마산출장소가 수성동에 설치되었습니다.

그런가하면 전중 손(田中 遜) 외 일본인 29명이 발기하여 1908년 5월 「마산상업회의소」를 창립하는 등 본격적인 식민통치도시의 길을 걷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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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9.06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2) - 개항기

사람 손 닿기 전의 신마산 옛 모습

<마산포 각국조계도>

1899년 / 네델란드인 스태든으로 추정 / 각국정부 / 막대추정 / 군산 마산포 성진 각국조계장정 / 규장각

이 지도는 외부대신 박제순과 각국 대표들이 맺은「군산․마산포․성진 각국조계장정」에 첨부된 설계도면입니다.
개항기 마산관련 자료 가운데 비교적 널리 알려진 지도로 근대적인 측량기법으로 작성된 마산시내 최초의 지형도라는 점에서 가치가 높습니다.

등고선으로 표시된 지도라 지형의 고저(高低)와 기복(起伏)을 잘 알 수 있으며 해안의 간조선과 만조선 그리고 하천까지, 사람 손이 닿기 전의 조계지(신마산) 옛 모습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있는 자료입니다.


등고선의 단위(고저차)가 표기되지 않아 아쉽습니다만 현재의 지형과 비교해보면 등고선의 고저차가 크지는 않은 것 같습니다.
지도에 나타난 자연지형 및 관련자료들을 종합해보면, 마산포에서 진주로 가던 '진주가도'는 해안에서 5-6번째 등고선 정도 아닐까 싶습니다.

각국공동조계지의 범역(Settlement Boundary)이 그려져 있으며 주도로(Main Road)의 동쪽(도면의 방위표에는 착오로 W와 E가 바뀌어 있습니다) 해변에 세관을 비롯한 개별 필지들이 표기되어 있습니다. 조계지 최초로 조성할 부지로 계획했던 것 같습니다.
주도로는 지금의 월남동 성당 정문 앞의 간선도로이며 짙게 표기된 도로가 사잇길인데 이 지도에서 계획된대로 길이 뚫렸고 모두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습니다.

북쪽 신월천 중간 쯤에 급경사로 인한 폭포(Bluff)가 있습니다.
이미 오래 전에 복개되었기 때문에 지금 저 위치에 폭포가 보이지 않습니다만 이 주위에서 살고 있는 주민들의 말에 의하면 요즈음도 비가  많이 오면 지하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제법 크게 들린다고 합니다.

지도 중간에 표기된 하천이 옛 마산시장 관사 앞의 창원천(대곡천)이며, 아래 쪽 하천이 월영천인데 지금은 복개되어 경남대 정문앞 월영광장 지하에 흐르고 있습니다.

폭포 윗부분에 해관장 관사(Grounds Reserved for a Commissioner's Residence)가 표기되어있습니다.
지금의 제일여고 자리입니다.
해관장 관사는 계획만 했을 뿐 지어지지는 않았습니다. 나중에 마산 신사(神社)가 들어섰고 일제기 내내 마산공원으로 사용된 곳입니다.

지금의 월포초등학교와 경남아파트, 마산종합복지관 터는 봉곳하게 틔어오른 작은 봉우리라 조계지와 마산 앞바다를 내다 볼 수 있는 곳이었습니다.
지금도 이곳에 가면 솟아 올랐던 당시의 지형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전체 지형을 보면 조계지는 마산 앞바다와 무학산 사이의 좁은 경사지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런 지형적 조건은 지난 100년간 이 도시에 매립이 끊이지 않았던 이유이기도 합니다.

평지가 별로 없었는 당시 지형을 보면,
이곳 월영리와 신월리에 살았던 마산의 옛 사람들은 다랑이논 몇 뼘 외에 합포만과 갯벌, 그리고 무학산록에 기대어 생업을 이었던 것 같습니다.

이 지도에 표기된 조계지의 범역을 현재로 옮겨 보았습니다.
속칭 깡통골목에서 경남대 정문 앞 월영광장까지, 뒤로는 제일여고 뒷경계 까지가 조계지였습니다.
두 개의 해안선은 간조선과 만조선입니다.<<<




2010/04/08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여는 글)
2010/04/12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 - 통일신라 이전
2010/04/19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 - 통일신라시대
2010/04/26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 - 통일신라말기
2010/05/03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쳔사 (4) - 고려시대
2010/05/10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 - 고려시대
2010/05/17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 - 고려시대
2010/05/24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7) - 고려시대
2010/05/31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 - 고려시대
2010/06/07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 - 고려시대
2010/06/14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 - 조선시대
2010/06/21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1) - 조선시대
2010/06/28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 - 조선시대
2010/07/05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 - 조선후기
2010/07/12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4) - 개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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