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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16 00:00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1 / 조선시대 이전

오늘부터는 <경남지역 주거변천사>를  포스팅하겠습니다.

6~7년 전에 경남도사』에 싣기 위해 간략히 쓴 글인데 출판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 블로그에 올립니다. 어차피 공유하기 위한 글이니 이해하리라 생각합니다.

 

반도 동남부에 위치한 경남은 서북쪽은 소백산맥, 동남쪽은 바다에 면합니. 기후는 전반적으로 대륙성기후라고 볼 수 있지만 바다와 가까운 지역은 해양의 영향도 많이 받습니. 기온은 동남 해안에서 서북 내륙으로 가면서 낮아지며 연 평균 강수량도 이와 비슷합니.

경남 주거문화의 형성과 발전은 이와 같은 자연적 특성의 산물이며 그 궤적은 경남지역의 역사 및 문화 발전과 같이 해왔습니.

글은 시기에 따라 다섯 항목으로 나누었습니다.

1) 고대부터 조선시대까지

2) 개항기부터 일제시기까지

3) 해방이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4) 새마을운동의 농촌주택개량사업

5) 1980년대 이후

--------------------------------------------------------------------------------------------

 

1) 고대부터 조선시대까지 - 1

주거의 원초적 목적은 생존과 번식이었다. 이를 위해 초기 한반도에 정착한 인류는 큰 나무그늘이나 바위그늘, 동굴 등 자연적인 은신처를 찾아 거처로 사용하였다.

지금까지 발굴된 최초의 집자리 유적은 공주 석장리 등의 구석기유적에서 나타나는데, 지표면에 천막처럼 지었기 때문에 평지 천막형 주거라고 한다. 하지만 이 유적들은 일상적인 생활 근거지로서의 주거라기보다는 임시 순환 거처에 가까웠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신석기시대 집자리 유적은 기원전 5,000~6,000년경의 것으로 확인된 강원도 양양의 오산리 집터이다. 형식상 구석기시대 집자리와 유사하지만 보다 정연한 평면과 구조를 가지고 있어서 도구의 발달과 함께 건축술이 발전했음을 보여준다.

양양 오산리의 집자리를 제외한 신석기 집자리의 대부분은 움집 형태이다. 수직으로 50~100깊이로 땅을 파고 그 위에 지붕을 덮는 구조였다. 평면 형태는 원형 또는 원형에 가까운 말각 방형이 많았으며, 신석기 후기에는 간혹 장방형도 사용되었다.

움집은 형태와 구조상 추위를 견디기 유리했고, 집 높이가 낮아 풍압 등 외력의 영향도 적게 받을 수 있었다.

당시 움집의 규모는 지름 6m 정도의 면적 30내외가 많았으며, 대략 대여섯 명의 가족이 함께 생활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내부에 기둥과 보를 엮어 기본 뼈대를 세우고, 거기에 지붕을 형성하는 서까래 모양의 부재를 경사지게 땅에 박아 만든 제법 튼튼한 구조였다. 견고한 구조체가 필요했다는 것은 이동생활에서 정착생활로 점차 변화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농경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신석기 후기(B.C 2,000~1,000년경)에는 작은 마을을 이루어 살기 시작했다. 주거 공간 내에 성별 또는 용도에 따른 공간분화가 있었으며 경험과 기술의 축적과 도구의 발달로 다양한 형태의 움집이 나타났다.

이 시기에 나타난 경남의 유적은 합천 봉계리(1987~88)와 거창 임불리 유적(1988)이다.

한반도의 청동기 문화는 기원전 1,000년경부터 시작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청동기 문화에서 가장 중요한 사실은 원시적 농경에서 벗어나 본격적인 농경과 정착생활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농경의 시작은 주거문화에도 혁명적 변화를 가져왔다. 농사가 잘 되는 토지를 찾아 거처를 마련했고, 파종부터 수확 때까지 기다리는 정착생활이 유도되었다. 생산 증대를 위한 협업의 이점 때문에 취락의 규모가 점차 커지면서 마을단위의 영역계획이 이루어졌고, 장기간의 정착 생활을 위해 내구적인 주거시설이 필요하게 되었다.

지금까지 발견된 주거 유적만으로 당시의 마을계획을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경남지역인 울산 검단리 유적에서 발견된 환호(環濠)를 통해 마을 단위의 주거계획이 이루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청동기시대에도 움집의 형태가 지속되었으나 규모나 평면·구조 등에서 신석기시대와 큰 차이를 보여준다.

청동기시대 움집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초기에는 평면적이 40㎡ 이상으로 확대되지만 후기에는 오히려 20㎡ 내외로 소형화되었다는 것이다. 이는 주거형태가 세대공동주거에서 사적공간이 보장되는 개별주거형태로 변화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움의 깊이는 30정도로 얕아지고 수직 벽체가 생기며 지붕 서까래가 지면에서 떨어지는 등 지상주거로 발전하는 과도기 모습을 보여 주는데 이를 반움집이라 한다.

이런 변화는 집을 짓는 도구의 발전, 즉 청동기로 만든 도끼··대패의 발명과도 관계가 깊다.

이처럼 수직의 기둥과 수평의 보가 직각으로 연결되는 구조형식은 벽과 지붕이 따로 구분되는 집의 외형을 낳게 하였다. 벽과 지붕이 구분되는 집의 출현은 원시건축의 발전에서 가장 큰 성과였다.

경남지역의 청동기 주거지는 진양 대평리 유적(1976, 1980), 울주 양동 유적(1984), 거창 대야리 유적(1986, 1988)과 무릉리 유적(1986, 1988), 울주 검단리 유적 등에서 발굴되었다.

특히 진주 대평리는 대규모의 밭과 주거지, 환호, 야외노지(爐址), 토기 가마, 구덩이, 무덤 등이 발굴되어 선사시대의 도시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번창했던 곳이었다.

<진주 청동기문화 박물관 경내에 복원된 청동기시대 주거지 / 아래는 위치>

초기철기시대에 들어서도 대부분의 주거형태는 움집 또는 반움집에 머물러 있었으나 일부 지배층의 가옥들은 지상주거로 발전했다. 지상주거는 바람의 영향을 많이 받기 때문에 이에 대응할만한 견고한 구조체를 만들 수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초기철기시대에는 철기를 이용한 건축도구의 발달로 목재 가공 능력이 획기적으로 발전했으며, 비록 지배계층의 주거로 추정되는 소수의 사례이지만 지상주거가 출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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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12 07: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 - 통일신라 이전


<무학여고 뒷산에서 나온 붉은 항아리>


마산인근에는 언제부터 사람이 살기 시작했을까요?

선사시대(先史時代)부터 이 지역에 사람들이 살았다는 사실은 그 동안의 다양한 연구와 유적 발굴을 통해 이미 증명되었습니다.

대표적인 사례로,
창원시 반계동 선사유적지 발굴현장에서 빙하기에 형성된 토층 발굴과 창원 동면 덕산의 합산패총,
그리고 진해 안골포 패총에서 출토된 '신석기시대'의 토기(土器)를 들 수 있겠습니다.
 
청동기시대 유적으로는,
마산의 현동․구산면․진동․진북 등지에 분포된 고인돌과 고대취락지가 있습니다.




마산 도시 한복판
에서도
청동기시대유적
이 나왔습니다.
바로 위 사진입니다.
마산 회원동의 무학여고 뒤 이산미산에서 1972년 출토된 붉은 채색간토기(紅陶)입니다.

채색간토기는 고운 흙을 사용하여 형태를 만든 뒤 표면을 갈아 반들거리게 하고 그 위에 산화철을 바른 토기입니다.
회원동에서 멀지않은 자산동 환주산성에서도 이와 같은 토기가 출토된 적이 있습니다.

이 균형미 좋고 아름다운 곡선을 가진 항아리는 마산무학여자고등학교에 소장되어 있습니다.

청동기시대,,,,
3,000년이라는 그 아득한 과거의 시간에 누군가가 남긴 이 작은 항아리 한 개가 마산이라는 도시에 얼마나 오래 전부터 사람들이 살고 있었는지 온 몸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일찍이 언론인이자 역사학자였던 천관우 선생은 마산·창원·칠원지역을 일러 삼한시대의 변한 13부족 중 변진구야국(弁辰狗邪國, 김해)과 변진안야국(弁辰安邪國, 함안)의 사이에 있었던 변진주조마국(弁辰走漕馬國)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창원대 남재우 교수는 주조마국이라고 단정 짓기는 어렵다면서,
창원 다호리와 덕천리에서 발견된 묘와 그 부장물로 보아 이 지역이 변한제국(弁韓諸國) 중 하나의 나라였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학자들의 추정은 이러하지만,
기록에서 최초로 등장하는 마산지역의 정치집단은『삼국사기(三國史記)』에 나타나는 '포상팔국(浦上八國)'이라는 원시적 부족국가 '골포국(骨浦國)'입니다.

포상팔국은 글의 뜻처럼 바닷가에 자리한 여덟 개 나라였습니다.
그 중 골포(骨浦)는 마산과 창원을 중심으로 한 국가였으며, 칠포(柒浦)는 진동만을 중심으로, 고사포(固史浦)는 현재의 고성지방을 중심으로 한 국가였습니다.
이 외에도 사천지방을 중심으로 한 사물국(泗勿國)과 위치를 알 수 없는 보라국(保羅國)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나머지 세 국가는 기록에 조차 나타나지 않습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포상팔국의 침입을 받은 가라(加羅=阿羅, 함안)가 신라에 구원을 요청하였는데 이에 응한 신라에 의해 포상팔국이 패퇴합니다.
3년 후,
절치부심(切齒腐心) 복수를 준비한 골포(骨浦)․칠포(柒浦)․고사포(固史浦) 세 나라가 다시 전쟁을 일으킵니다만 또 다시 신라에게 철저히 괴멸 당하고 맙니다.

이 처절한 전사(戰史)를 통해,
비록 패하긴 했으나 강대국 신라를 상대로 보복 전쟁까지 일으킬 수 있었던 골포, 칠포, 고사포 3국도 상당한 세력을 갖춘 나라였다는 추정은 가능한 것 같습니다.

3세기말에 발생한 이 '포상팔국 전쟁' 이후 마산지역에는 새로운 정치집단이 재편되었고,
4세기 이후에는 '탁순국(卓淳國)'이라는 정치집단이 마산 창원일대를 중심으로 세워집니다.

이 국가는 진해의 웅천지역과 칠원의 일부지역을 포함하고 있었으며,
당시 한반도 남부지역을 통하여 선진문물을 수입하고자 하였던 일본과의 관계도 활발했습니다.

탁순국은 신라와 백제의 가야지역 침략과정에서 정치적 독자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하지만 신라의 끝임 없는 세력 확장정책에 밀려 금관국(金官國)이 신라에 멸망됨으로써 탁순국은 스스로 더 이상 세력을 유지하지 못하고 신라에 자진투항하고 말았습니다.
시기는 신라가 김해의 금관국을 복속시킨 532년 이후에서 541년 이전이었습니다.

이 도시에 있었던 포상팔국의 '골포국'과 뒤를 이은 '탁순국',,,,
그 나라는 어떤 나라였으며,
우리보다 이곳에 먼저 살았던 그들은 어떤 사람들이었을까요? <<<


<이전 글>
  2010/04/08 - 그림으로 보는 마산 도시변천사 - 여는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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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후배유림 2010.04.13 12:07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이제 시작이네요..
    흥미진진합니다.
    마산의 과거...다음편을 기다립니다

    • 허정도 2010.04.13 14:30 신고 address edit & del

      반갑습니다.
      지겨운 글을 기꺼이 '흥미진진'이라는 용어로 포장해 주어 고맙습니다.
      가능하면 쉽고 재미있게 올려볼 생각입니다.
      후배님, 봄꽃맞이 안가세요?

  2. 이진규 2010.04.13 17:21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한국의 고대사는 수많은 가능성의 시대이자 다양성의 시대로 재해석 될 수 있다고 봅니다. 특히 가야를 비롯한 포상팔국은 그 건국과정에서부터 개방성과 포용성을 보이는듯 합니다. 위치적으로도 한반도 남단에서 바다와 접해 있었던 것을 보면 그러한 해석은 충분히 가능성 있는 것이라 사료됩니다. 지금 제가 컴터를 두들기고 있는 이곳 용마산 도서관 언덕은 저 아득한 선사시대를 거쳐 골포국의 누군가가 마산만을 바라보며 한세월 하지는 않았는지 모르겠습니다.^^ 허정도 회장님의 건필을 기원합니다. 충성!

    • 허정도 2010.04.13 18:10 신고 address edit & del

      반가워.
      용마산 도서관에는 왠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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