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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1.08 00:00

기억을 찾아가다 - 12

12. 정전 후의 체험들 - 귀환, 상이군인들

 

정전 얼마 후에 전장에 갔던 아저씨들이 속속 돌아왔다.

함께 끌려가서(그땐 그렇게들 표현했다) 내내 한 부대에 있다가 함께 돌아온 우용 아저씨와 내 당숙은 상이용사가 되어 돌아왔고, 다른 두 분은 정전 한참 후 제대하고 돌아왔다.

그런데, 우용 아저씨는 볼에 큰 흉터를 가지고 왔는데, 내 당숙은 손끝 하나 다친데 없었다.

부대가 후퇴할 때 열차를 타고 남쪽으로 이동하다 열차탈선으로 부대원 전체가 부상 혹은 사망을 당하여 모두 상이용사로 제대되었는데, 집결지에 늦게 가 열차를 못 탄 당숙도 함께 상이제대 되었다는 이야기는 당시 동네사람들의 화제 거리가 되기도 했었다.

그런데, 한참동안 소식이 없어 죽은 줄만 알았던 남규 아저씨의 귀환은 우리들에게 상당한 인상을 남겨주었다.

정전 후 우리 집에도 두어 명 다녀갔던 것으로 기억된다. 허름한 복장에 단봇짐을 지고 나타난 청년들에게 음식을 주고 여비도 쥐어주는 걸 보았는데, 아버님 말씀으로 그들은 거제도에서 나온반공포로라고 했다.

그들에게 협조하라는 공문까지 시와 동에 왔더라고 했다.

 

<거제 포로수용소에 집결한 반공포로>

 

그걸 본 얼마 후에 그 청년들 보다 훨씬 남루한 누비옷차림의 남규 아저씨가 아리랑고개를 넘어왔고, 가족들의 울음과 동네사람들의 놀라움과 감탄을 받던 광경을 나도 본 기억이 난다.

북한수용소에 이 년 넘게 있다가포로교환으로 왔다고 했다.

다른 부대와의 교신이 끊긴 상태에서 막무가내로 계곡 따라 올라가라고 몰아치던 소대장, 결국 반 이상의 병사와 소대장도 전사하여 저항도 못하고 엎드려 있는데 총성이 그치고 누구에게 엉덩이를 거칠게 채여, 그 길로 수 일 동안 타고 걷고 하며 어딘지도 모르고 끌려간 이야기, 포로수용소에서 반공포로와 친공포로가 다투던 이야기, 친공포로들의 협박과 회유에 얼버무리곤 하다가 결국 심사관 앞에서고향가고 싶다는 한마디로써 풀려나게 되었다는 이야기 등등은 그때 우리들 사이에서도 꽤 오랫동안 인기화제 감이었다.

그런데, 그즈음 하여 여러 번 보았던 상이군인들의 횡포는 매우 충격적이어서 지금까지도 이해하기 어려운 장면으로 남아있다.

의족이나 의수를 한 상이용사들이 몇 명씩 몰려다니면서 민폐를 일삼았던 일이다.

 

상이군인들이 무리를 지어 다니면서 상가나 민가에 들어가 곡식이나 돈을 요구하다 여의치 않으면 시비를 붙고 행패를 부리는 일이었는데, 그런 광경을 등하교 길에서도 여러 번 목격했다.

쌀이나 보리쌀 반 되 혹은 돈 몇 푼이면 순순히 받아가는 경우도 있긴 했지만, 더 많은 경우 이걸 누구 코에 붙이느냐며 떼를 쓰기 일쑤였다. 심지어 구멍가게 과자 통을 비우는 일도 있고 주막집 막걸리 독을 비워 버리는 일도 있었다.

항의하는 주모의 저고리 소매를 쇠갈고리로 된 의수로 꽉 집어 질려버리게 했고, 저만치 서있는 남정네의 복장을 향해 창 던지듯 목발을 날리기도 했다.

자꾸 던지면 그것도 단련이 되나 보았다. 목발이 일직선을 그으며 날아가서 상대의 가슴이나 배, 옆구리 등을 정확하게 맞혀 그를 헉하고 엎드리게 하는 장면도 두어 번 목격했다.

이렇게 행패를 부리고는, “누구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됐는데” “너그들이 이렇게라도 살아있는 게 누구 덕인데”, 저주 섞인 목소리로 고함치기 일쑤였다. <전술한 졸저에서>

 

같은 상이용사였던 9촌 아저씨의 말이 기억난다.

집도 가족도 잃고 몸 때문에 취업도 못하는 저들이 저 짓 말고는 뭘 하고 살아 가겠냐

<전쟁 후의 상이군인>

 

이승만 정부는 자신들 배불리기에 바빠 그들을 방기하고 있었는데도 그들의 분노는 엉뚱하게도 애먼 양민들, 아니, 비슷한 희생자들을 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역리는 형태를 달리하면서 그 후에도,, 아니 지금까지도 지속되고 있으니, 분단의 부작용이 언제까지 이 사회 역리의 원천으로 작용할 지, 종종 암담한 생각이 들기도 해왔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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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0.16 00:00

기억을 찾아가다 - 1

오늘부터 연재하는 포스팅은 마산 봉암동(현 창원시 마산회원구 봉암동)에서 태어나 청년기까지 살았던 박호철 선생님의 기억 속에 있는 도시 이야깁니다.

한 개인의 삶에 투영된 도시의 흔적을 통해 이미 사라져 버린 우리의 과거를 찾아가보는 것이 목적입니다.

가치 판단은 후대의 몫이고 기록은 당대의 몫이라 생각하며 소박하게 쓴 글입니다. 어르신 한 분이 떠나시면 도서관 한 개가 사라진다는 말을 믿고 시작합니다.

1941년생이라 일제강점기의 기억은 없을 테지만 60년대 중반까지의 마산 도시를 직접 보았던 분입니다.

갇혀져 있던 기억들을 얼마만큼 끄집어낼 수 있을지 궁금합니다.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이신 박호철 선생님은 1941년에 태어나 초중고(합포초, 마산중, 마산상고)를 마산에서 마친 후 서울대학교 국문학과를 졸업하였습니다. 교육자로 평생을 보냈으며 지금은 창원 사파동에서 살고 있습니다.

연재의 횟수와 게재 일자는 유동적입니다. 글이 준비되는 대로 올릴 수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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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래 그림은 봉암지역의 1947년과 현재의 항공사진입니다. 함께 보시면 글 이해가 쉬울 것 같아 소개합니다.

 

 

1. 봉암동 형성

 

지금 봉암동은 대부분이 매축지다.

최초의 매축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임의로 했고 해방 후에는 1970년 전후에 걸쳐 재일교포가 하다가 자금난으로 포기하자 정부가 받아 완공했다

원래 봉암은 팔룡산(본명은 반룡산) 최남단 자락에 있었던 작은 어촌마을 이름이었다. 지금 서광아파트와 봉암교까지의 도로 대부분이 경사진 마을 터였다. 그 아래쪽은 모두 1차 매축 때 형성된 매립지다.

창신고등학교가 있는 마을은 일제 땐 봉정으로 불리다가 해방 후에 봉덕이라 불렀다. 그 후 봉암교 쪽 마을과 같은 동이 되었을 때 함께 봉암동이 되었는데, 두 동네는 여러 번 붙였다 뗐다 했다.

나는 봉정에서 태어났는데, 어릴 때 어머님으로부터 들은 이야기론 바다물결이 지금의 교육청 뒷산자락까지 철썩댔다고 한다. 지금도 오륙십 세 이상의 사람들은 교육청 옆 초등학교 뒤 계곡을 조개골이라고 불렀던 사실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아직도 밀물 수위가 높아질 땐 교육청 앞 동네 집들이 수몰 위기를 느끼는 것도 다 이 사실을 증명해 준다.

두 마을에 찻길이 난 건 1차 매립 후였다. 넓은 매립지로 하여 동네 복판으로 한길이 나고, 아랫각단이 조성되고 상당한 넓이의 농토도 생겼다. 이 길이 나면서 나룻배 대신 봉암다리도 놓여 졌고 신촌, 월림, 남면(웅남, 상남) 등지와 교류도 잦아졌다.

이 길로 하여 팔룡산 자락을 정지하여 지은 요정 봉선각(鳳仙閣)하이야(택시의 일본식 영어 발음)’가 올라갈 수 있는 길이 닦였다. 이 요정의 주인 이름이 다나카였는데 위세가 대단했다고 한다.

 

<1937년 마산부가 발행한 '관광의 마산'에 게재된 봉선각>

 

우리 집도 본래 웃각단에 있었는데 30년대 말에 한길 옆에 새집을 지어 이사했다고 들었다. 봉선각과 직선거리로는 백 미터도 채 안 되었다.

그래서 내 다섯 살 때의 기억으론 유일하게 남아 있는 것이 봉선각에서 어떤 사내가 종이나팔을 입에 대고 아래를 향해 구슈게이호~(くうしゅうけいほう, 공습경보空襲警報)’하고 외친 것을 본 기억도 있다.(당시 전국적으로 전시 대피훈련을 했었고 통상 통, 반장이 이 역할을 했으나 봉선각이 마을 위쪽에 있는 관계로 봉선각 주인이나 직원에게 이 역할을 맡기지 않았나 짐작됨)

반장이었던 장씨 아저씨의 인도에 따라 뒷산 중턱에 있는 천연동굴로 올랐던 일, 굴 안이 어두워 나 같은 조무래기들이 굴 앞에 옹기종기 앉아 있었던 기억들이 남아 있다.

봉선각은 해방 후 국유화되어 비어 있었기 때문에 우리 또래들의 놀이터가 되었는데, 어느 날 들어가 본 뒤꼍의 굴은 굉장히 깊었고 서늘했다. 아마 방공호와 식품창고의 구실을 했던 것 같았다.

봉선각 뒤쪽 팔용산 남쪽 끝 마루턱에 일본의 신사가 지어진 것도 삼십년 대였다고 들었다. 내가 신사를 본 건 초등학교 고학년 때였는데, 그 땐 거의 파괴된 모습이었다.

해방 후 좌익들의 야간집회가 이 산에서 열렸을 때 부쉈다는 말을 그 후에 몇 번 들었다.

신사가 있는 산먼뎅이를 야시당먼뎅이라고 불렀는데 야시는 여우의 방언이고 당은 집이란 뜻이니, 왜인들이 모이는 곳을 야유하여 이 동네 사람들이 만든 말이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해 봤다.

한길과 봉암다리가 생긴 후부터 마산부창원과의 교류가 잦아졌다.

마산사람들로부터는 촌놈취급을 받았지만, 창원사람들로부터는 약간 우월적 대접을 받는 반촌이미지가 형성되었던 듯하다.

우리 어릴 때 정겹게 대해주셨던 대방때기·두대때기(대방댁·두대댁, 지금의 창원시 대방동과 두대동) 아지매들이 있었는데, 어머님 말씀에 의하면 창원이 친정이던 그 분들이 시집올 때 고향친구들로부터 시집 잘 간다는 말을 들었다고 했다는 사실이 그걸 보여준다.

1차 매립으로 이 동네 서쪽 들머리에 조그만 고개가 생겼는데 이 마을 사람들은 그것에다 아리랑 고개라는 속칭을 붙여줬다.

이 마을은 팔용산이 삼면으로 싸고 있어 비가 오면 흘러내리는 물의 양이 꽤 많았는데 매립으로 물길이 막히자 인공수로를 만들었다. 지금도 교육청 동쪽 담을 따라 흔적이 있다.

왜 그렇게 만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 수로는 아래로 오면서 평지보다 사오 미터 높게 나 있었다. 그래서 한길도 그곳에 와선 그 높이의 고개를 이루었고, 사람들은 그 고개에 그런 예쁜 이름을 붙여줬고, 옆 동네나 마산부 사람들도 그렇게 불렀었다.

봉정과 서쪽으로 맞 닿아있는 팔용산 자락 따라 길쭉하게 나있는, 100호가 채 안됨직한 동네를 우리는 사기점(사기그릇을 굽는 곳이 있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불렀는데, 지금 양덕오거리에서 봉암 쪽으로 나있는 도로의 일부는 옛날 사기점 동네 앞을 흐르던 개천부지였다.

그 길과 마진도로, 양덕천 사이는 꽤 넓은 농토였었는데, 그 벌도 1차 매립 때 형성된 것이라 했다.

그 근처에 우리 논이 있어 종종 보았는데, 율림동 쪽에서 흘러오는 내와 양덕 쪽에서 흘러오는 내가 합해지는 양덕오거리 근처까지 바닷물이 밀려왔었다.

옛날로 거슬러갈수록 그곳은 더 깊었을 테니, 고려 말 합포첨사 배극렴이 왜구침탈 방어를 목적으로 축조한 합포성지가 그곳에서 직선거리 1.5내외 지역에 있다는 사실도 성지를 본 후에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질 낮은 정부들이 그 성터를 방치함으로써 지금은 거의 소실상태에 있다는 사실이 우리를 부끄럽게 만든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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