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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3.05 00:00

기억을 찾아가다 - 20

20. 아이스케키

 

아이스크림이나 팥빙수도 있었지만 수요가 많지는 않았었다. 학교 앞이나 시장 입구 등에 리어카를 세워놓고 수제로 만들어 파는 정도였다.

소금 뿌린 얼음 통을 손으로 돌려 냉각시킨 아이스크림은 즉석에서 고깔과자 같은 데에 담아 팔았고 대팻날 같은 데에 얼음덩이를 올려 즉석에서 갈아 팥, 향료, 설탕 등을 얹어 주던 빙수는 접시나 사발에 담아 팔았었다.

거기에 비해 아이스케키는 공장을 두어 제조했고, 보온 질통에 넣어 거리에 다니면서 파는 아이들이 마산에만도 이백 명이 넘을 정도로 판매규모가 방대했었다.

한편으론 어려운 집들의 청소년들이 학업도 포기해가면서 다투어 나섰기 때문에 더 붐이 일었다고도 볼 수 있겠다.

어쨌든, 당시 도심 거리에 나가면 여기서 아이스케키! 저기서 께에끼! 그러다 한 사람이 께끼하고 부르면 여기저기서 두세 명이 달려오고, 반 미터 정도 늦어 돌아서야 하는 소년들의 이마와 목덜미는 땟국 섞인 땀이 더 번들거려 보였다.

그런데 그런 상황을 악용하여 꼴사나운 장면을 연출하는 왈자들도 간혹 보였다. 창동 네거리 같은 데 나타나 께에끼하고 크게 외쳐 네댓 명이 죽어라 달려오면 양손을 주머니에 넣은 채 장사 잘 되냐?’ 따위 말로 느물거리는 것이었다.

가까이 오다가 알아보고는 돌아서는 아이, 앞에 와서는 혀를 차는 아이들이 그러지 말라고 투덜거려도 매일 같이 그런 패들이 나타난다고 들었다.

그런 행태에 전염되었을까, 초등생쯤으로 보이는 몇몇 아이들은 께에끼하고 불러놓고는 아이들이 달려오면 골목길로 도망쳐버리는 일도 종종 목격되었다.

주로 빈농의 자녀들이거나 피난민, 귀환동포들의 자녀들인 그들은 그렇게 해 가면서도 운 없는 날엔 빈손으로 집으로 돌아간다는 사정도 들었다. 아니, 몇 개 못 팔고 아이스케키만 녹여버렸을 땐 빚만 남는 날도 있었다는 얘기를 우리 동네 움막에 살던 친구로부터 들었었다.

당시 마산엔 십여 개 이상의 아이스케키 제조공장(소규모 가내공장이 대부분)이 있었는데 이름난 메이커로는 구마산의 밀림 아이스케키와 신마산의 맘보 아이스케키가 유명했었다. 둘은 모양, 빛깔, 맛 등에서 아주 대조를 보였었는데 그래서 둘이 더 유명했었던 것 같다.

밀림은 지금 코아양과점 북쪽 맞은 편 경남은행 아래쪽에 있었는데, 팥을 넣었기에 초콜릿색이었고 단팥 맛이 아주 진하게 느껴져 입안이 달라붙는 느낌까지 받을 정도였다. 그래서 서너 개 이상 먹으면(창동, 오동동, 남성동 등지의 부잣집 아이들에게만 해당) 단맛으로 인한 역한 현상까지 느껴진다고들 했다.

정비석의 세태풍자소설 자유부인에 나오는 바람난 춤꾼들의 상징 맘보춤에서 따온 듯한 맘보 아이스케키는 그 이름이 풍기듯 맛도 아주 시원하고 향긋했다. 색깔도 연분홍과 연초록을 섞어놓은 것 같았다.

밀림이 앞지름 2.5, 뒷지름 4, 길이 20정도의 동그란 막대형이었다면, 맘보는 두께 1,5, 앞폭 4, 뒷폭 6, 길이 15정도의 두꺼운 판자막대형이었다.

둘은 가격도 비쌌고, 봉암동 같은 농촌은 물론 변두리나 빈민들이 많은 동네에선 잘 볼 수도 없었다. 지금도 창동 황금당 옆에 있는 고급 빵집 고려당에서는 밀림과 맘보 두 아이스케키만 취급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군소의 싸구려 아이스케키들은(지금 돈으로 500원 정도였을 것이다) 변두리 동네나 농촌 등에서도 많이 볼 수 있었는데, 봉암동 서어나무 밑이나 봉선각 입구 등에서 매일같이 외치던 장사치들 중에서 밀림이나 맘보 소리는 한 번도 듣지 못했던 것 같다.

우리 동네에 오는 장사들은 주로 짐자전거에 싣고 다녔는데 리어카를 이용하는 사람도 있었고 간혹 지게에 통을 지고 오는 이도 있었다.

그들은 가까운데 있는 공장에서 받아 왔을 것이었다. 돈이 귀한 농촌이라 주로 곡식과 바꿔 갔는데 대부분 그걸 선호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바가지로 대충 퍼 주었기에 주로 장사들 쪽으로 후하게 가기 마련이었기 때문이다. 우리 동네에 다닌 장사들 대부분이 장정들이나 청년들이었는데 곡식 무게 때문이었던 것 같다.

진동이나 구산면 등지엔 그런 값싼 아이스케키도 없었기에 벌어진 해프닝도 화젯거리에 오르곤 했다.

우리 육촌형수가 구산면에서 시집왔었는데, 집에서 함께 산 아이스케키를 받아 논매러 간 남편이 돌아오면 주려고 등판(시렁의 사투리)에 얹어 두었다가 녹여 버리고는 훔쳐 먹은 사람 찾느라고 눈을 부릅떴던 일이 후일 내내 이야기 거리가 되기도 했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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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05 00:00

기억을 찾아가다 - 16

16. 광복절 행사와 우리들의 영웅

 

초등학교 때도 광복절 기념 체육대회가 있었지만 참여 정도가 미미해서 별로 기억나는 것이 없다.

중학생이 되어 응원군으로 참여하면서 운동경기에 더 관심을 가지게 되고, 그러면서 선수들의 면면이 우리들의 선망대상으로 화제가 되었다.

특히 뛰어난 기량을 보였거나 남다른 재능이나 인기 끌 요소까지 겸비한 선수는 우리들의 영웅으로 부각되어 우리들 의식의 많은 부분을 지배하기도 했다.

매년 815일이 되면 방학 중인데도 모든 학생들은 등교하여 기념식에 참석해야 했다. 식이 끝나면 바로 시가행진으로 들어갔다.

그 당시 마산 인구는 전쟁 피난민이 보태져 10만 명이 조금 넘었을 정도였는데도 도로가의 시민들 참여도도 높고 하여 지금 세태로선 이해하기 힘들 정도로 장관을 연출했던 것으로 기억된다.

마산시내만 사오천 명 되던 중고생들이 학교 위치에 따라 두 시간 정도 행진을 벌였는데, 맨 앞엔 당시 거의 모든 남자고교에 두고 있었던 밴드부가 서고 그 뒤를 학생들이 중대·소대별로 행진했다.

초등학생들은 행진 대열의 앞과 옆을 오가며 잔치 분위기를 돋우었고 구경거리가 별로 없었던 시절이어서 그랬겠지만 시민들도 연도에 몰려나와 성황을 이루었다. 변두리 지역을 제외하곤 시내 전체가 축제분위기에 젖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특히 맨 앞줄에 선 악장들의 지휘봉을 이용한 재주피우기와 멋 내기는 여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아 우리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또 여고로선 유일하게 있었던 제일여고 고적대의 인기도 상당했다. 날씬한 몸매의 고적대가 드럼을 치면서 행진해 갈 때 수많은 조무래기들이 주위를 따르면서 발을 맞추던 장면이 지금도 떠오른다.

<여고 고적대 퍼레이드는 당시 큰 인기였다>

 

행진이 끝나면 오후부터 이틀 반 동안의 체육대회로 들어갔다.

마산시내 모든 중고교들이 그 학교에 두고 있는 체육종목에 참여함은 물론 통제부 팀, 81항공창 팀(공군) 등의 군부대 팀과 초등교사 팀, 신흥방직 팀 같은 직장 팀 등도 종목에 따라 참여해 그야말로 학생들과 시민들이 함께 어우러진 체육축제였다.

그러니 경기 장소도 모든 학교운동장들이 동원되었다. 그 중 인기 있는 종목 경기가 많이 열렸던 마산상업고등학교(용마고 전신), 무학초등학교의 운동장 가장자리에는 국수, 국밥, 비빔밥 등과 막걸리를 파는 천막식당들이 들어차 축제 분위기를 더욱 돋우었다.

마라톤 경기(1962) / 마산시내 수성동 거리를 지나고 있다.

 

그때도 우리 동네 친구들은 대부분 농사일에 동원되었다.

거기서 빠져나올 수 있었던, 조금이나마 여유를 가질 수 있었던 몇몇 친구들은 국수와 아이스케키 값 정도를 어떻게든 마련하여 아침 먹고 만나 경기장으로 갔다.

이 학교 저 학교 관심 가는 데를 골라 다니며 하루 종일 배고픔도 잊고 돌아다니다 해거름 쯤 집으로 돌아오면서 게임이야기와 선수들 잘잘못 이야기로 신났던 기억은 지금도 즐거운 상념을 불러온다.

그때 우리들 입에 가장 많이 오르내렸던 대스타가 잊혀 지지 않는다.

정재문이라는 2년 선배였는데 그는 내가 중학교 들어가기 전부터 동네 형들로부터 이름을 여러 번 들었을 정도로 유명했던 인물이었다.

내가 그를 처음 본 것은 입학식 날 대대장으로서 구령을 붙이던 때였는데, 그때 본 모습은 소문대로 참 훤칠했다. 키 크고 체격도 좋고 얼굴도 준수했다. 대대장으로서의 통솔력도 뛰어나다고 인정을 받았다.

그런 그가 당시 마산시내 중학교 최고의 투수에다 공부도 상대가 없을 정도로 우수했으니 명성이 자자했던 건 당연했다.

특히 8·15경축기념체육대회에 대비하느라 합숙훈련을 하면서도 휴식시간엔 가교사로 된 합숙소 앞 그늘에 책걸상을 내어놓고 공부하던 모습과 무학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벌어진 마산동중과의 야구경기에서 강속구를 뿌려 열 몇 개의 삼진을 잡아 우리를 열광시키던 모습은 워낙 인상이 깊어 지금도 또렷이 생각난다.

그는 그 후 선생님들의 권유로 전국의 수재들이 다 모인다는 경기고등학교에 응시하여 3등으로 합격했다는 소식을 선생님들이 자랑삼아 얘기하여 알았다. 그리고 거기서도 투수로 활약하면서도 2학년 올라갈 때는 수석 했다는 소식도 같은 경로로 들었다.

그 후 40년도 더 지난 뒤 듣게 된 후일담.

그는 육군사관학교로 갔고 장성 계급장을 달지 못했다고 했다.<<<

(편집자 주 ; 1962년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한 정재문 씨는 월남전에 참전(1969~1970)하였고 1985년 대령으로 예편하였다. 그후 쌍용그룹에 입사하여 쌍용건설 전무이사를 지냈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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