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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2.13 00:00

스페인 도시이야기 9.검은 성모상 '라모레네타'의 몬세라트

몬세라트는 바르셀로나에서 북서쪽으로 약 50키로미터 떨어진 곳입니다. 뭉실 뭉실한 바위산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이름에서 나타나듯이 몬(Mont)+세라트(serrat), 굳이 해석하자면 '나누어진 산'이라는 의미처럼 바위산 전체가 울퉁불퉁한 기암괴석으로 형성된 자연경관이 빼어난 곳입니다. 그런데 이 곳에 사람들이 몰리는 이유는 이러한 자연경관을 보러오는 것이 아니라 그 곳에 협곡에 자리잡고 있는 모세라트 수도원과 성당을 보기 위해서랍니다. 또한 성당내에 있는 '라모레네타'라고 하는 검은 성모상을 보기 위한 순례자들의 발길도 끊이지 않고 있읍니다. 그럼 주변경관부터 둘러보실까요!

- 투어버스에서 내려 아래쪽을 바라본 모습입니다. 조각물 하나가 눈길을 끕니다. 마치 바람이 불면 휘이 돌아갈 듯한 긴장감이 듭니다. 달리 생각해보면 천국으로 올라가기 위한 계단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 돌아서서 몬세라트 산정산을 바라보았습니다. 정말 보기 드문 산의 형상입니다. 응회암이 흘러내려도 저런 형태는 나오기 힘들터인데---, 암튼 골을 따라 녹음이 우거져 있는 모습도 특이하군요

- 옆으로 눈을 돌려보니 아래쪽 계곡에 걸터앉아 있는 건물이 하나있습니다. 휴게식당 및 공중화장실이 있는 관리시설인 것 같습니다. 기존의 바위를 최대한 살려서 건물이 자리하고 있는 모습이 보기 좋습니다.

- 수도원으로 향하는 길입니다. 바위봉우리에서 흘러내려온 녹음이 건물을 타고 도로가 있는 곳까지 연결된 모습입니다.

- 수도원과 성당 앞에 있는 광장입니다. 주변에 성물판매소 및 부대시설들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오른편에 연필을 꽂아 놓은듯한 키프러스 나무가 있는 곳은 숙박시설인 것 같습니다.

- 광장에서 우회전 하여 중정에 당도했습니다. 성당의 출입구가 보입니다. 성당은 12세기에서 14세기에 걸쳐 지어졌다고 합니다.

- 관광객들이 사진을 찍느라 북적되는 모습입니다. 성당 주출입구 상단의 조각상은 가운데 예수님을 중심으로 열두제자의 모습인 것 같습니다.

- 상당 좌측면 외벽면과 암벽사이 공간에 설치된 양초 봉헌대입니다.

- 성당내부 전경입니다. 외관은 소박하지만, 내부장식은 금박, 은박으로 화려하게 되어있습니다. 관광객들이 좌석에 앉아 설레는 여행의 흥분을 잠시 내려놓은것 같습니다.

- 유럽 성당의 볼거리 중 하나인 '파이프 오르간'입니다. 설계당시 파이프오르간을 놓을 위치를 먼저 정하고 건물의 공간설계를 한다고 합니다. 즉 주문형 오르간이 놓여진 모습입니다. 그 유명한 '라모레네타'라고 하는 검은 성모상은 제대 상단의 2층 회랑에 전시되어 있었는데, 관람객이 너무 많은 관계로 실물을 보지 못하고 패스하였습니다.

- 본당 외에 별도의 조그마한 기도소입니다. 간단하게 미사도 올릴 수 있는 소규모 미사공간이기도 합니다. 적은것이 아름답다라는 말이 생각납니다. 기도가 저절로 될것 같은 분위기입니다.

- 외벽면의 감실에 놓여진 마리아상입니다. 독특한 형태의 조각입니다. 스페인 현대 조각가 '수비라치'라는 작가의 작품입니다. 이 조각의 특징은 조각이 양각화된 조형물임에도 불구하고, 음각화된 형상과 양각화된 이미지를 동시에 나타냈다는 것입니다. 아주 독특한 유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 관람을 마치고 협곡아래로 향하는 케이블카를 탔읍니다. 미리 투어버스가 아래에 대기하고 있는 관계로---

● 검은 성모상의 사진모습입니다. 실물은 아니지만 큰 사진으로 본 모습입니다. 검은성모상이 단지 검은색이어서 유명한 것은 아니라고 합니다. 12세기쯤 대성당 근처의 산타코바 동굴에서 발견되어 현재의 성당에 모셔졌다고 합니다. 몬세라트가 카탈루니아 사람들에게 신앙의 중심지가 된 열할을 이 검은마리아상이 하게 되었다는 겁니다.

- 특히 이곳은 안토니오 가우디의 대표작인 성가족 성당의 조형적 모티브가 된 곳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정확한 사실여부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다음에 소개될 성당을 보면서 그 여부를 확인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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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23 00:00

스페인 도시이야기 1. 코르도바, 알 안달루스의 신부

정열의 나라. 스페인을 가다.

금번 여름휴가 때 스페인의 주요도시를 탐방할 기회가 있었읍니다.

스페인하면 연상되는 것은 참 다양한 것 같습니다.

우선 투우의 나라, 그리고 열정적인 집시들의 춤사위인 플라멩고, 그리고 소설이나 영화를 통해 생각나는 것은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와 중세기사와 충성의 상징인 '엘시드' 라는 로드리고 장군도 생각날 것입니다.

예술가로는 천재화가 피카소, 초현실주의 화가인 살바도르 달리, 성가족 성당을 설계한 건축가 안토니오 가우디를 꼽을 수 있읍니다.

특히 스포츠에서는 유럽의 축구명문가인 레알 마드리드 구단, 바르셀로나의 메시를 다들 기억할 것입니다. 특히 20세기 들어 36년간 군사 독재정치를 한 프랑코 역시 기억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

스페인의 이미지를 종합해 보건데, 유럽에 속하기는 하지만 유럽과 또 다른 에너지가 넘치는 반도적 기질이 자리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배경에는 이베리아 반도의 지정학적인 요인과 시대별로 다양한 문화가 섭렵되어진 다양성에 있는 것 같습니다.

도시의 소개는 지역별, 문화별로 나뉘어 소개할까 합니다. 우선 이슬람도시부터 둘러보겠습니다.

● 스페인 속의 이슬람세계 : 코르도바, 세비야, 그라나다는 이슬람교도 지배 하의 스페인은 세도시가 중심을 이루었다. 711년에서 1010년까지는 코르도바, 1010년부터 1248년까지는 세비야, 그리고 1248년에서 1492년까지는 그라나다에서 이슬람 문화가 꽃을 피웠다.

'알 안달루스의 신부' : 코르도바

- 안달루시아 : 코르도바는 스페인 남부 해안지역에 면해있는 안달루시아 지방의 도시이다. 안달루시아는 지정학적으로 북아프리카의모로코와 가장 근거리에 접한 지역으로 이슬람교도들이 북아프리카를 통해 이베리아반도(스페인)로 접근하기 좋은 교두보와 같은 역할을 하는 곳이다. 안달루시아비방의 이름은 '알 안달루스'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알 안달루스'는 '반달족이 건너온 곳'이라는 뜻의 '반달루스(vandalus)'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al)'은 아랍어 관사이다. 즉 안달루시아는 반달족이 건너온 곳이라는 의미에서 유래된 것이다.

- '알 안달루스의 신부' 라는 말은 코르도바의 아름다움을 두고 이슬람의 작가는 ‘알 안달루스의 신부’라고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다. “ 그녀는 모든 아름다움을 다 갖추고 있다. 왕후로서의 오랜 가계가 그녀의 영광된 관을 만들고 있다. 그녀의 목걸이는 시인이 언어의 바다에서 채취한 진주를 이어 놓은 것이며, 그녀의 이상은 학자들이 교모하게 짠 학문으로 지어져 있다.”

● 스페인 역사 :

- 기원전4500년경 동부연안에 최초의 집단부락이 출연, 이후 기원전 1천년경 아프리카에서 동부연안에 진출한 햄족 기원의 이베로족과 기원전 600년경 피레네 산맥을 넘어와 반도 중앙부와 서북부에 정착한 켈트족이 합쳐져셔 셀티베로족이라는 새로운 종족으로 변해 스페인의 직계조상

- 켈트족은 기원전 2천년부터 기원전 1세기까지 유럽 대부분의 지역에 살았던 인도-유럽어를 사용하던 종족으로 매우 호전적인 종족으로 현재 스페인 북서부 갈리시아지역에 아일랜드인과 유사

- 페니키아와 그리스인들(기원전11-3세기) : 기원전 11세기 무렵 이베리아반도 남부 연안에 카디스를 건설하여 식민거점으로 활용하였다. 오늘날 베이루트 북쪽 20마일에에 있는 페니키아는 도매상의 교역로로 아프리카 북부와 이베리아 반도 남부지역에 공장을 건설하여 방해한 해상교역망을 구축, 이후 카르타고의 번영으로 쇠토

- 카르타고인들은 페니키아인들의 뒤를 이어 식민도시를 건설, 그 거점이 바르셀로나로 기원전 3세기 이후, 로마제국과 1세기 이상 치렀던 포에니 전쟁에서 패함으로 지중해 패권을 로마제국에 양도

- 이베로라는 말은 오늘날 에브로(Ebro)강의 옛 이름인 이베르 강지역에 살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

- 기원전 1200년에서 서기 400년(로마제국 지배)까지 스페인의 많은 문명이 발달, 기원전 19년 카르타고와의 전쟁에서 승리한 로마인들은 이베리아 반도를 완전히 점령 이때 반도에 카톨릭과 라틴어가 도입

- 게르만족의 대이동(서고트족의 침입409년) : 북방인종으로 키가 크고 금발에 파란눈이 특징으로 원래 거주지는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남부에서 지금의 북독일에 걸친 지역이다. 이들의 이동은 훈족이 볼가강을 건너 동고트 족을 정복함으로써 376년 로마 영토안으로 이주, 476년 로마는 게르만족의 오토아케르에 의해 폐위되엇으며 그로서 로마는 멸망

- 이베리아 반도에서 서고트족은 전체 약 400만의 주민 중 10만명 정도로 세고비아 지역을 중심으로 한정된 지역에 거주했고, 나머지는 중요한 각 지방의 도시에 군대와 관리들만 주둔시켰다. 711년 이슬람의 침공으로 붕괴되었다

- 이슬람교도의 반도 침입(711년) : 서고트의 왕 위티사가 710년 죽자 로드리고가 왕위에 오르자 아들의 추도세력은 북아프리카의 회교 통치자 무사에게 용병을 요청, 타리크를 보냈다. 그의 부대는 스페인 남부 코달레테 강가에서 싸워 이겼다. 이것이 이슬람교도들의 이베리아 반도 침입의 시초가 되었다. 이후 7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북서쪽의 고산 지대를 제외하고 반도 전체를 점령하여 서고트 왕국을 멸망시켰다.

- 11세기부터 이슬람교도 사이의 분쟁으로 여러 왕국으로 분열되었으며, 이로 인해 카톨릭 왕국의 재정복(레콘키스타)이 달성되어 1492년 이슬람 왕국은 사라지고 카톨릭으로 통일된 강력한 국가가 형성

이슬람도시 코르도바의 탄생 :아랍 본토의 다마스쿠스를 거점으로 지배하던 '옴마아드' 왕조의 '압데라만 1세'가 바그다드를 거점으로 하는 '아바스 왕족'의 학살을 피신하여 칼리프령인 스페인에 피신해 있다가 새로운 독립 이슬람 왕국을 세웠다. 국호를 알 안달루스 (Al Andalus)라고 칭하고 도읍지로 결정괸 곳이 코르도바이다. '압데라만 2세'는 코르도바를 바그다드보다 훌륭한 도시로 만들려고 두 번에 걸쳐 증축한 대모스크의 1,200개나 되는 석조기둥에는 스페인을 거쳐간 지중해의 모든 문명(그리스, 카르타고, 로마, 비진틴)의 양식들이 표현되었다.

당시 유럽에는 인구 3만의 도시가 적었던 반면 코르도바 인구는 50만 이었으므로 당시 콘스탄티노플 외에는 없었다. 압데라만 3세는 코르도바를 독립된 카리프로서 바그다드로부터 분리시켜 정치적 종속관계를 벗어나 알 안달루스 왕국은 독립적인 황금시대를 구가할 수 있었다.

코르도바는 그리스 철학이나, 로마의 법률, 비잔틴과 페르시아의 예술을 받아들였고, 유대교와 카톨릭 신학까지 연구했다.  코르도바의 멸망은 1031년 마지막 와인 힉셈3세가 사망함으로써 왕국의 동요와 반란이 일어나 한 군주가 통치하는 칼리프 왕국이 사리지고, 왕국은 주요 도시로 분활되어 각 도시마다 군주들이 난립하는 군웅할거 시대인 타이파(소왕국)왕욱 시대로 넘어갔다.(1036-1081) 이후 1085년에 이슬람교도의 핍박을 받던 톨레도가 카톨릭교도로 넘어가자 코르도바 왕국은 북아프리카의 알모라비데족에게 도움을 청했다. 그러나 이들은 카톨릭교도들을 물리치지만 동시에 코르도바 왕국도 정복하는 바람에 안달루스의 신부 코르도바의 영광은 사라지고 말았다.

*코르도바(cordoba)는 페니키아어로 '풍요롭고 귀한도시'라는 뜻의 Kartuba에서 유래했다.

코르도바 대성당 : 대성당이라는  명칭은 현재에 사용되는 용도를 일컬어 사용하는 건물명이다. 당초 건립당시에는 이슬람 사원으로 건립되어 모스크(Mosque)라고 부르며, 스페인어로 'Mezquita(매즈퀴타)'라고 사용되고 있다. 이 사원은 스페인에 남은 유일한 회교사원이며,세계에서 규모면으로 몇번째 해당되는 큰규모의 사원이다.

- 건물의 연혁은 786년에 공사가 시작되었으며, 규모는 22,400평방미터로 남북길이 175미터, 동서로 128미터의 규모로 동시에 2만5천명 예배를 드릴수 있도록 되어있다.  평면의 구성은 사원과 중정(세정의 정원) 그리고 미나렛(Minaret, 광탑)으로 구성되어있다.

- 사원은 최초에 노랑색(9번)부분이었으나, 색상에 따라 증축되는 과정을 볼 수 있다. 하단이 중정이며, 실내의 중앙부분이 성당으로 개조하면서 만들어진 중앙예배당이다. (16,17,18번)

 - 종탑에 해당되는 미나렛은 하루 5번 기도시간을 알리기 위해 종탑기능을 하며 내부에는 계단이 설치되어 있으며, 최초의 종탑은 소실되고 현재의 종탑은 47.5미터로 1617년 성당으로 용도변경되면서 새로이 건립된 것이다.- 현재의 종탑은 카톨릭성당으로 사용되면서 세원진 것이다. 중정 외곽에 설치된 회랑에 접해있다.

- 중정은 5개의 분수와 함께 올리브나무, 오렌지나무, 종려나무, 사이프러스 나무 등으로 장시되어있다. 중정 외곽으로는 성소에 들어가기 전에 행하는 수세의식을 위한 세례소가 있었을 것이나, 현재는 카톨릭 성당으로 변경되어서 그러한 모습은 남아있지 않다.- 중정은 예배보러 들어가기 전에 마음을 가다듬게 하는 정화공간이다.- 중정 외곽에 면한 회랑은 원래 세례소가 설치되었으나, 현재는 전시회랑의 역할을 하고 있다.

- 사원은 19개의 아케이브 주열로 형성되어 있다. 쉽게 표현하면 19칸의 기둥주령릉 형성하고 있으며, 매 칸은 상부 세모난 박공지붕으로 형성된 지붕으로 채광을 삼각형의 한면을 채광창으로 사용했다고 한다. 그래서 지붕은 톱날 지붕형태의 반복형태로 지어졌다.- 아치구조를 받치는 기둥이 하단에는 원기둥으로 마감하고 상부는 네모난 기둥으로 되어있다. 원기둥과 네모기둥의 접합부를 고대 로마시대에 기둥 상단을 장식하는 꽃잎문양으로 장신한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기둥을 칼리프 기둥으로 불리면서 코르도바의 대표적 예술품으로 후세에 알려졌다.

- 당초 회교사원으로 사용될 당시의 지붕모습이다. 19개의 아치 상부 톱날 지붕의 단순한 형태로 마감되어있다.

- 카톨릭 대성당으로의 용도변경 :  1236년 성페르난도 3세에 의해 코르도바가 함락당하면서 회교사원은 '산타마리아 마드레 데 디오스'라는 대성당으로 바꾸게 되었다. 회교사원과 성당은 내부 기능이 다르므로 당시에는 이것을 해체시키고고 했으나 재차 협의를 한 결과, 주 제대와 성가대석의 십자가형 평면을 중앙부에 삽입하는 형태로 정리되었다. 그래한 형태로 나온 결과가 삼각형 박공형 평면의 중심에 우뚝 솟은 고딕식 지붕이 성당의 중심공간을 상징하는 형태로 변경되게 되었다.

- 그림의 지붕은 카톨릭 성당으로 용도변경하면서 중앙부에 제대와 예배석을 설치하면서 고딕식으로 장식하기 위해 높은 천장을 만들기 위해 지붕이 솟아 있으며, 주변부는 높은 벽면을 지지하기 위한 부축벽이다.

실내상세 설명- 여러차레 증축되는 과정에 시대별 다양한 아치의 장식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이 건물을 거대한 고고학 박물관으로 여기고 있다.

- 내벽면에 아치로 통하는 감실을 '미르합'이라고 한다. 대리석으로 장식된 팔각형의 공간으로 아치 주변은 자연을 상징하는 식물모양과 주변에는 코란 경구를 금박으로 장식하고 있다.

- 성가대석에 조각은 중앙부에 예수님의 부활장면을 양측에 시빈를 상징하는 아빌라의 성녀 테레사와, 고행을 상징하는 막달라 말아가 조각되어있다. 조각은바로크를 대표하는 조각가 페드로에 의해 마호가니 나무로 제작되었다.- 회랑부분은 반원형 아치로 되어 있으며, 반대열은 얼룩무늬 2단 아치의 동일한 공간이 반복되고 있다.

사원 주변풍경

-사원주변은 유태인지역이었다고 한다. 현재는 비좁은 골목길에 조그만한 기념품 코너가로로 형성되있다.-벽면의 아기자기한 화분 장식들- 기념품티가 가지런히 정열된 모습- 주변광장에서 그림을 그리는 동네 노인들- 노천카페에서 강변을 바로보다.- 다리위에서 바라본 사원모습, 중앙의 돌출부분이 제대에 해당된다.

현재의 코르도바 -지붕의 중앙부 라틴크로스 부분이 제단 및 예배당으로 변경되었다.

- 코르도바는 8세기에서 11세기 사이에 '서구의 콘스탄티노플', '서양속의 동양'이라고 불리웠던 이슬람 제국의 영화를 간직한 도시이다. 카톨릭교도에 의해 멸망한지 10세기가 지났지만, 회교도들이 남긴 건축술에 대한 독창성을 보여주는 공간으로 남아있다. 사원 실내에 도열한 얼룩무늬 아치에 남겨져 있는 회교도 장인들의 야무진 손맵시는 코란속의 경구를 실천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카톨릭 국가 스페인의 한켠에서 세계 여라나라의 사람들을 불러 모아 이슬람교의 의미를 생각하도록 예상했을 수도 있을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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