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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13 00:00

마산·창원 역사 읽기 (21) - 최초의 마산시장 옥기환

3. 지역의 인물을 찾아서

3-4 최초의 마산시장 옥기환

 

“마산의 역사 속에서 전후를 막론하고 옥기환(玉麒煥 1875∼1953) 선생을 능가할 사람은 찾기 힘들다.”

이 말은 평생을 언론인으로 살며 마산의 역사연구에 몰두하였던 향토사학자 이학렬(李學烈) 선생의말이다.

옥기환은 마산에서 태어났다.

민족이 가장 고통스러웠던 암울한 시기, 제국주의가 지배하는 세계질서 속에 조선이 강제적으로 편입되고, 식민지 시기를 거쳐서 분단이 고착화되는 한국전쟁이 끝나는 시기를 살았다.

집안에 대해알려진 것은 별로 없지만, 4대째 마산에 정착하며 살았던지주집안이었으며, 어시장에서 객주(客主)로 활동했다고 전해진다. 그도 지주였으며, 사업가였다.

그는 마산지역 교육발전의 버팀목이었다. 한국 최초의 야학인 마산노동야학교를 설립하고, 성호초등학교, 마산공립상업학교, 마산중학교 등 오늘날 마산의 유서 깊은 학교의 육성에 적극 관여했다.

민족자본가이기도 했다. 경제인으로서 한국인 최초로 마산에 무역회사이자 주식회사를 설립하여 마산경제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얻어진 수익을 교육에 투자하여 새로운 인재를 양성하고, 민족의 독립을 위해 사용하였던 민족자산가였다.

 

-마산 교육의 버팀목-

옥기환에 대한 기억은 일제시기 민족의 각성을 촉진하고 지역의 발전을 꾀하기 위해 교육방면에 열정을 쏟은 교육지사로서의 모습이 가장 뚜렷하다.

“인재양성이 나라와 민족의 장래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임을 인식하고 선생이 교육사업에 뛰어들게 된 것은1907년이다.

선생은 구성전(具聖傳) 등과 함께 재원을 마련하여 한국 최초의 노동야학인 ‘마산노동야학교’를 개설하고 스스로 교장에 취임하였다.

마산노동야학은 처음에는 지금의 남성동 69번지에 있는 창고 하나를 수리하여 교실로 사용하였다. 학생 수도 20∼30명에 불과하였다. 학생들은 주로 선창 어물상의 고용원이나 공장근로자, 농민, 도시빈민의 아이들이었으며 수업연한은 1년이었다.

교과목은 조선어, 일본어, 한문 등이었는데, 당시의 일반 공립보통학교가 일본어로 된 교과서에다 일본어로 수업하였던 것에 비해, 노동야학은 조선어를 첫째 과목으로 가르쳤다.

시간이 지날수록 학생과 교사 수는 늘어갔다. 교사들은 대부분 창신학교의 교사들이었으나 김철두, 명도석, 김용환 등과 같은 청년지식인도 노동야학의 교사로 참여했다.

이들은 민중의 각성과 계몽이 우리 민족을 강력하게 만드는 첫걸음이라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기에 아무런 보수 없이 무료로 교육을 담당하였다.

노동야학은 수업료를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교재 등도 무료로 학생들에게 지급하였다. 때문에 재정적 어려움은 컸다. 경영에 참여하던 사람들이 하나 둘 떨어져 나가면서 급기야 운영비 자체를 선생이 혼자서 부담해야 했다.

191410월에는 기존의 교사(校舍)를 대신하여 마산시 창동에 교실 여섯 개의 새로운 교사를 신축하였는데, 이 때도 선생이 주도적으로 나서 1,300의 거금을 조달하여 보다 많은 학생이 신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하였다.

노동야학이 번창할수록 일제의 견제도심해졌다. 일제는 ‘노동’이라는 학교명에 대해 사상적인 트집을 잡았다. 때문에‘노동야학’은 학교 이름을 마산중앙야학교로 바꿀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의 마산중앙중학교와 마산공업고등학교는여기에서 출발하였다.

 

<중앙야학교 졸업식(1939년) / 앞줄 가운데가 옥기환 선생>

 

한편 그는 야학 하나만으로는 일반의 교육수요를 충족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야학이나 일반 보통학교를 졸업한 조선인이 더 높은 수준의 교육을 위해서라도 보다 상급의 학교가 필요함을 인식하였다.

때마침 3·1민족운동 이후 일본의 조선지배 정책도 일방적인 탄압과 수탈로부터 이른바 ‘문화정책’으로 그 방향이 바뀌면서 뜻있는 조선인들 사이에서는 고등교육의 필요성과함께 그 설립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다.

마산에서도 선생을 중심으로 지역의 유지들이 뜻을 모아 마산에 실업학교를 설립하기로 하고 기성회를 조직하였다.

이때 선생은 기성회의 회장을 맡았으며, 19211228일에 3제 마산공립상업학교를 설립하게 된다.

이는 훗날 5년제의 정식 상업학교(지금의 마산용마고등학교)로 승격하게 된다. 이 때도 선생은 기성회장을 맡았다.

그밖에도 선생은 19215월 마산구락부 평의장으로 있을 때, 마산구락부에서 운영하던 마산학원과 마산여자야학교에 당해 년의 운영비로 200원을 기부하였고, 1924년에는 북간도에 있던 민족학교인 동흥중학교(東興中學校)의 확장을 위한 모금운동을 전개할 때 마산지방을 방문한 김홍선 등에게 지역인사들과 함께 약300원에 가까운 자금을 제공하였다.

1927년 신마산을 근거지로 삼은 조선인들이 중심이 되어 마산고등보통학교 창립기성동맹회를 조직하여 그 설립 준비운동을 진행하였는데, 이때도 이우식, 구성전 등과 함께 각각 1만원을 기부하기로 하였다.

결국 일제의 방해로 설립되지는 못했지만, 이후 일제가 마산중학교(현재 마산고)를 설립하는데 있어 커다란 자극제가 되었다.

특히 마산중학교의 설립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일본인이 60%, 한국인이 40%의 설립비를 부담하기로 하고 그 기성회가 결성되었을때, 선생은 한국인을 대표하여 부회장을 맡음으로써 그 실현에 기여했다.

그리고 193561일에는 선생의 회갑연 비용으로 쓸 작정이던 1,300원이라는 거금을 마산부 내의 각 공사립학교와 유치원에 극빈자 구제비로 기부하기도 하였다.

 

-성공한 사업가-

그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과 자신이 이룩한 사업 등으로 많은 부를 축적함으로써 마산을 대표하는 부자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부를 바탕으로 선생은 교육사업에 자신의 열정을 투자할 수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민족주의 진영과도 연결될 수 있었다.

19199월 당시 원동상회(元東商會)를 운영하고 있던 선생은 명도석, 김철두 등과 함께 경제적 자주성을 확립하기 위해 자본금 50만원으로 주식회사를 설립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이듬해에 주식회사 원동무역을 정식으로 출범시키게 된다. 이 회사는 마산에서 한국인이 설립한 대표적인 주식회사이며 무역회사로 성장하게 되며, 마산 경제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주식회사의 모태가 된 원동상회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는 없다. 다만 1915115일 경북 달성군 수성면의 안일암에서 윤상태·서상일·이시영 등이 조직한 ‘조선국권회복단’의  자금원으로서 이들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고한다.

조선국권회복단과 원동상회가 관계를 맺게된 것은 마산을 근거로 활동하였던 민족주의자이자 국학자였던 안확(安廓)에 의해서였다.

안확과 원동상회간의 연결고리를 찾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안확이 일찍이 창신학교의

교사를 지낸 경험이 있는데다가, 이 학교 교사들이 ‘마산노동야학’에 참여하였던 것이 인연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원동상회 운영자인 옥기환은 일찍부터 노동야학을 개설하는 등 지역사회에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데 힘쓰고 있었기 때문에 이 노동야학을 중심으로 안확과 옥기환과의 연결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원동상회가 조선국권회복단의 ‘자금원’으로서 기능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원동상회와 조선 민족주의자들과의 관계는 원동무역회사가 성립된 이후에도 계속된 듯 하다.

그 구체적이고 명확한 관계는 현재의 상태로는 밝히기 어렵지만, 태평양전쟁의 발발과 함께 전시경제통제의 강화로 이 회사가 문을 닫기 전까지 해외의 독립운동단체에 회사의 이익금 중 일부를 꾸준히 독립운동 자금으로 보내왔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초대 마산시장으로-

일제시기 교육과 경제인으로서의 옥기환의 업적은 마산의 역사에서 길이 남을 만한 것이었다.

그와 같은 선생의 업적은 마산의 지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기에도 충분했다. 그것은 선생이 미군정의 초대 부윤으로 추천되었다는 것에서도알수있다.

194512월에 마산에도 미군정청이 정식 발족되었다. 당시 미군정은 미군이 맡은 미군정 부윤 외에 한국인 부윤을 임명하여 양두체제를 갖추었는데 이 체제는 19473월 군정이 2선으로 물러날 때까지 계속됐다.

이 시기로부1949621일까지 마산부엔 4명의 부윤이 있었다. 그 초대 부윤으로옥기환 선생이 임명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선생은 약 5개월 간(19451215일부터 1946514일까지) 군정의 부윤직을 맡았다.

당시 군정 부윤은 행정이야 별문제로 여기지 않았으나 어수선한 당시 사회분위기의 안정을 위해서는 덕망있고 지역민으로부터 신임을 얻고 있는 지역 인사의 도움이 필수적이었다.

군정부는 여러 사람의 추천으로 선생을 한국인 부윤에 임명하였다. 그렇지만 선생은 군정부윤을 비롯한 부내 유지와 부청관계자들의 집요한 요청에도 수락을 완강히 거절하였다.

이에 군정청에서는 7번째로 선생을 찾아가 “당신에게 당신 나라 일과 당신이 사는 사회의 일을 해달라는데 거절할 수 있느냐”고 강하게 다그치며 민족감정을 자극하자 선생은 마침내 그 직을 수락하였다. 그나마 그것도 마땅한 인물이 나타날 때까지 몇 개월만 맡겠다는 조건부 수락이었다.

또한 초대 마산시장으로 추천되기도 했다. 주위의 요구를 뿌리칠 수 없었던 그는 시장직을 맡기도 했다. 그 역시 다음을 위해 스스로 물러날 줄 아는 아름다운 미덕을 갖고 있었다

그에게도 일제에 협력했던 발자취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민족자본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일제에 대해 굴신(屈身)의 모습을 보였다는 점이다.

1911년 마산경찰서장이 조선인의 풍기교정과 공익증진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전국 최초로 발기한 교풍회(矯風會)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일이나, 명치신궁(明治神宮) 봉찬회(奉讚會)에 많은 성금을 기탁하고 부협의원(府協議員)으로활동하였다는점등이그것이다.

이러한 점들은 분명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문제이다.

역사 인물의 평가에서 지나치게 공만을 드러내고 허물을 감춘다면 그 또한 일종의 역사왜곡이다. 또한 너무 허물만을 강조하여 그 사람의 역사적 평가마저 부정한다면 그 역시옳지 않다.

옥기환 선생은 일제의 억압 속에서 살았던 인물이다. 그런 와중에서도 그는 교육과 경제계에 큰 업적을 남겼다.

특히 교육계에서 그의 활동은 당대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 마산지역이 민주성지로 우뚝 서는 데 깊은 영향을 미치었다.

그가 세웠던 노동야학의 교사들과 졸업생들은 일제시기 마산지역의 민족운동과 해방 후 3·15, 4·19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사회의 행복은 그 사회가 존경할만한 인물을 얼마나 많이 보유하고 있는가에 따라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마산의 역사 인물 발굴은 더없이 중요한 사업의 하나라 생각되며, 선생에 대한 공과의 연구도 그런 차원에서 보다 심도있게 이루어져야할 것이다.<<<

김원규 / 당시 경남대학교 박물관 학예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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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오동추 2014.11.08 10:20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마산이 그나마 민족정기를 이어받은 유서깊은 도시가 되는데는 이와같은 인물들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아무 특징없는 지리멸렬한 도시중의 하나였을 것입니다.

2014.09.29 00:00

마산·창원 역사 읽기 (19) - 나라 잃은 시기, 우리 지역의 민족교육자들

3. 지역의 인물을 찾아서

3-2 나라 잃은 시기, 우리 지역의 민족교육자들

 

나라 잃은 시기 우리 지역의 민족교육을 말하고자 할 때 ‘창신학교’는 마땅히 맨 앞자리에 놓을 만하다.

왜냐하면 창신학교는 우리 지역에서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근대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을 담당하였고, 그곳에서 배웠거나 가르친 이들이 뒷날 우리 지역의 크고 작은 민족운동을 주도하였기 때문이다.

나라 잃은 시기 창신학교가 경제적으로 운영이 어려웠을 때 지역민들이 뜻을 모아 학교를 살리고자 했던 노력은 바로 이런 까닭에 있을 것이다.

이글에서는 나라 잃은 시기의 민족교육활동가들 가운데 창신학교에서 삶의 중요한 한 때를 서로 부대낀 이들을 가려 뽑아 우리 지역의 정신맥락 하나를 가다듬고자 한다.

 

-민족 교육자이자 광복 투사였던 안확과 이극로-

창신학교에서 민족교육을 펼친 이 가운데 비교적 앞자리에 놓이는 이는 바로 안확(호는 자산, 1886-1946)이다.

<안확(1886~1946)>

 

우리나라 근대 학문의 기초를 마련한 이로 평가되는 안확이 창신학교에 처음 부임한 때는 1910년이다.

2뒤 그는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가 1916년 다시 창신학교로 돌아와 역사와 한글을 가르쳤고, 이듬해인 1917에는 그의 첫 저술서인『조선문법』을 펴냈다.

이 때 창신학교에는 주시경의 제자로서 일찍이 한글운동에 힘을 쏟고 있던 김윤경이 함께 일하고 있었고, 역시 주시경의 제자로서 평생을 한글교육과 보급에 힘을 쏟은 이윤재가 가까이 의신여학교에 교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안확은 비록 우리말에 대한 주시경의 연구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갖기도 했지만, 나라잃은시기에 ‘우리말이 곧 우리얼’이라는 언어민족주의적 교육관에 있어서는 김윤경이나 이윤재와 다르지 않았다.

마산에서의 안확은 단순한 민족교육가로서의 면모만 갖춘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1916년에 조선국권회복단 마산지부장을 맡아 일하면서, 일제에 대한 적극적 투쟁을 실천해 보인 광복투사이기도했다.

1919년에 조선국권회복단 마산지부가 주도한‘4·3 진동의거’가 있은 뒤 그는 곧바로 마산을 떠났는데, 창신학교 시절 이은상의 스승이기도 했던 그에 대해 이은상은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선생이 교단에 올라서면 글을 가르치기 전에, ‘너희들은 대한제국의 국민이다’하고 우리들의 가슴에 불을질렀다. 이미 대한제국은 무너졌었다. 그러나 마산 창신학교의 교단 아래 앉았던 우리들의 가슴 속에는 대한제국이 살아 있었다.

 

안확이 교사로 일하고 있던 1910년에 창신학교에서 공부한 이 가운데 눈여겨보아야 할 이가 이극로이다.

 

<이극로 (1893~1978), 국어학자, 정치인>

 

이극로(호는 고루, 1893-1978)는 경남 의령 사람이다.

넉넉치 못한 농군의 살림이 싫어 나이 열 여섯에 집을 뛰쳐나와 길렀던 머리를 깎고 창신학교에서 2년 동안 신학문을 배웠다.

이극로는 이은상의 창신학교 선배이기도 하다.

가족의 아무런 지원 없이 가난한 고학생으로 스스로 벌어 공부를 하던 그를 두고 이은상의 아버지는 수 차례 이은상의 생활 태도를 나무랐다고 한다.

창신학교에서 공부를 마친 그는 곧 멀고 험한 유학의 길에 오른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그저 의기만 드높았던 시골 소년의 유학길이었다.

불가능해 보일 것 같던 그의 유학은 갖은 고생과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겨 결국 현실이되었다.

첫 유학지였던 중국 동제대학에서 그는 한글학자 김두봉을 만나 함께 한글 자모체계를 연구했다.

그리고 192310월, 독일 유학 시절에는 베를린대학에 마련된‘조선어과’에서 강사로 일하면서, 김두봉이 만든 한글 자모분할본 활자판을 이용해 <허생전>을 외국에서 최초로 인쇄, 배포하여 조선어를가르쳤다.

베를린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던 해(1927)에는 벨기에에서 열린 ‘세계약소민족대회’에  조선대표단 단장으로 참석하기도 했다.

그 이듬해 부터 영국과 프랑스에서 정치, 경제, 음성학 등을 배워 1929년 귀국했고, 곧이어 ‘조선어연구회’ 회원으로 일하다가 1929년에‘조선어사전편찬회’를 결성하였다.

1931년에는 ‘조선어학회’로 이름을 바꾸어 본격적인 한글사전편찬 사업에 힘을 쏟게 된다.

194210월에는 ‘조선어학회 박해 사건’으로 함흥형무소에 구금되어 관련자 가운데 최고형인 6년형을 선고받았다.

광복 뒤1946년엔 교육계에 몸담고 있으면서 초등학교 의무교육제도를 정부에 건의하여 통과시켰고, 다음해인 1947년엔 민주독립당 의장으로 선출되어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1948년에 건민회 대표로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였다가 평양에 그대로 남게 되었다.

이후 북한에서 김두봉과 함께 우리말 연구에 계속 힘쓰다가 1978913일에 숨을 거두었다.

 

-김윤경과 이윤재, 그외 한글운동에 헌신한 사람들-

이극로가 창신학교에서 공부하던 때에 학생들에게 민족정신을 심어준 이 가운데에는 김윤경도 있었다.

김윤경(호는 한결, 1894-1969)은 경기도 광주에서 나고 서울에서 공부했다.

1911년 주시경을 만나 처음으로 한글교육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고, 19114월에 창신학교 고등과 교원으로 부임해 1917년까지 일했다.

이때에 그의 첫 논문이랄 수 있는 <조선어학연구의 기초>라는 글을썼다.

이후 1921123에는 ‘조선어학회’의 전신이랄 수 있는 ‘조선어연구회’의 창립 회원이 되어 우리말 연구와 교육에 힘을 쏟다가, 1942101일에‘조선어학회 박해 사건’으로 구금되어 옥고를 치렀다.

<창신학교의 모습 (1909년)>

<창신학교 설립인가서(1909년)>

 

창신학교에서 김윤경을 만나 처음 한글에 대한 깊은 뜻을 배우고, 그 뒤 평생을 한글교육과 보급에 힘쓰게 된 이가 이윤재이다.

이윤재(호는 환산, 1888-1943)는 경남 김해 사람이다.

김해공립보통학교를 마친 뒤 김해·대구 등지에서 교직생활을 하다가, 마산으로 내려와 창신학교(1911-1913)와 의신여학교(1913-1917)에서 역사를 가르쳤다.

충무공 이순신을 우리나라의 가장 위대한 애국자로 여겼던 그가 나라를 빼앗긴 식민지 교단에서 어린 학생들에게 가르친 것이 무엇이었는지는 능히 짐작할 만한 일이다.

이윤재는 1919년에 평안북도 영변에 있는 숭덕학교에 교사로 일하였는데, 기미만세의거가 일어나자 학교 안에서 만세 운동을 주동하여 옥고를 치르기도했다.

1925년에는 서울의 협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이 학교는 안확이 교사로 일했던 곳이기도 하다.

‘조선 사람에게 조선말 사전 한 권도 없음’을 통탄한 이윤재는 1927년에 최남선, 정인보 등과 힘을 모아 ‘조선어사전 편찬’에 힘을 쏟았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하다가, 1929년 독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이극로와 동래 출신의 한글학자 최현배 등과 뜻을 모아 본격적인 사전편찬사업에 힘을 쏟았다.

이처럼 한글교육을 통해 민족의 얼을 오롯이 지켜내고자 애썼던 그는 옥중에서 숨을 거둘 때까지 한글교육과 우리말사전편찬 사업에서 잠시도 손을 떼지 않았다.

‘조선어학회 박해’사건으로 투옥되어 그가 겪은 고초가 어떠했는가는 경남 언양 출신의 한글학자인 정인섭의 회고를 통해 알 수 있다.

거기에는 긴 나무 걸상에 이윤재씨를 온통 맨몸으로 홀딱 벗겨 걸상에다 눕히고는, 몸과 허리와 두 발목의 세 군데를 노끈으로 걸상에 매어놓고, 순사 부장과 한국 순사 한 사람이 옆에 서서 그 일본놈이 주전자에서 찬물을 이윤재씨의 코와 입언저리에다가 부으면서 “상해 임시정부 문교부장 김두봉에게 독립운동 지령을 받았지”라고 물었다.

 

결국 이윤재는 이러한 일제의 잔혹한 고문에 의해 1943128일 함흥감옥소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56세 때의 일이었다.

나라 잃은 시기에 남녘의 조그마한 갯가에서 나라 잃은 울분을 어금니로 깨물며 어린 영혼들을 조용히 일깨우던 이들과, 그 뜻을 이어 받아 뒷날 나랏말을 다듬고 지키는 일에 평생을 바친 이들이 있었다.

안확, 이극로, 김윤경, 이윤재 등이 그들이다. 그리고 여기에 다 옮겨 알리진 못했으나, 김두봉(기장), 안호상(의령), 안희제(의령), 윤병호(남해), 이우식(의령), 정인섭(언양), 최현배(동래) 등도 모두 이 시기 나랏말을 다듬고 지키는 일에 온힘을 쏟거나 보태신 우리 지역 분들이다.

일제의 가혹한 탄압과 삶의 곤궁함 속에서도 꼿꼿이 몸을 세워 평생 나랏말글 다듬기에 힘을 쏟고 보탬을 주신 분들이기에 나랏말이 헝클어지고, 민족 얼이 흐트러지는 이 때에 더욱 그분들의 삶을 돌이켜 그 뜻을 새겨야 할 필요가 있으리라 여긴다.

아울러 한때 그런 민족정신의 한 바탕이 되었던 우리 지역에 대한 정신사를 제대로 짚어 앞으로 올바른 지역사랑의 나아갈 바를 분명히해야 할 일이다.<<<

차민기 / 창신대학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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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젤리 2015.10.20 20:15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좋은글 잘보았습니다. 정말 이분들덕분에 우리가 있는것임을 뼈져리게 느낍니다.

  2. 젤리 2015.10.20 20:15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좋은글 잘보았습니다. 정말 이분들덕분에 우리가 있는것임을 뼈져리게 느낍니다.

  3. 젤리 2015.10.20 20:15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좋은글 잘보았습니다. 정말 이분들덕분에 우리가 있는것임을 뼈져리게 느낍니다.

2011.07.04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5) - 강점제1시기

<요보?>

<한 시기의 마산사회상황을 짧은 글로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만 1910년대 마산상황 중 종교와 교육 그리고 당시 사회분위기의 일편을 간략히 포스팅합니다>

합방 2년 후인 1912년 4월 8일 당시 양산 통도사 주지인 천보(天輔) 김구하(金九河) 큰 스님이 마산지역의 포교를 위해 사답(寺畓)을 팔아 현 추산동 포교당(정법사) 터에 설법전(說法殿)을 창설한 것이 근대 마산불교의 시초입니다.

1년 후인 1913년 서울 각황사에서 전국 30본사(本寺) 주지들이 조직한 ‘불교진흥회’의 발기 간사인 위암(韋庵) 장지연(張志淵, 1864년-1921년)이 진주에서 마산으로 이주하여 8년 동안 살았습니다.
이 때 위암은 마산불교진흥회를 조직하여 불교 발전에 진력을 다했으며 천보(天輔)스님과 자주 교류하였습니다.

아래 사진이 1912년에 건축한 추산동 포교당입니다.
 

새 건물을 짓는다고 최근 헐었습니다.
 마산에서 가장 오래된 불교건축이 사라진 겁니다. 우리 지역 불교사의 상징적인 유산이 없어진다고 일각에서 안타까움을 표하기도 했지만 소리가 너무 작았습니다.

1901년 조선예수교 장로교회 공의회가 조직되면서 마산교회를 태동시킨 기독교는 이후 노산 이은상의 부친 이승규 등이 입교하는 등 교세를 넓히다가 1903년에는 마산포교회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1919년에는 추산동에 신축예배당을 준공하고 명칭을 문창교회로 고쳤습니다.
아래 사진이 당시 신축한 문창교회의 사진입니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석조 건물입니다.

 20세기 벽두에 들어온 가톨릭은 완월동에서 천천히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고 개항직후 들어온 일본불교도 확장되어 갔습니다.

그 시절 마산의 교육기관으로는 합방 이전부터 있던 마산공립보통학교(현 성호초등학교), 마산공립심상고등소학교(현 월영초등학교), 사립 창신학교, 노동야학을 비롯해 1910년에 설립해 1911년 학생 50명으로 인가를 받은 외서면 완월리의 사립성지학교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1913년에는 창신학교의 여학생들로 구성된 의신여학교가 독립하여 개교하였고, 1915년에는 장군동 2가에 마산공립실과여학교가 개교하였습니다.
사립여학교는 의신과 성지가 있었지만 공립으로는 마산실과고등여학교가 최초였습니다. 이 학교는 1921년 실과여학교에서 고등여학교로 바뀌었는데 현재 마산여자고등학교의 전신입니다.
 

이 중 사립창신학교는 당시 신교육을 접한 많은 양심적 지식인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안확을 비롯한 민족지도자들이 학생을 가르쳤고 고루 이극로 같은 선각자들이 이분들에게 배웠습니다.
창신학교는 식민지 백성의 혼을 일깨우고 민족독립을 위한 저항정신을 불어 넣는 신식교육기관으로 마산사람들의 자존심이었습니다.

뿐만아닙니다.
개교할 때 호주선교사들의 도움이 컸던 탓에 학문, 체육, 예술 등 서양문물도 창신학교를 통해 많이 들어왔습니다.
한 예로 1914년 한강이남 최초로 창신학교 고등과에 7인조 밴드부가 창설되어 서양음악을 경남지역에 보급하기도 하였습니다.
아래 사진이 당시 창신학교밴드부입니다.


당시 창신학교를 말할 때 유독 ‘사립’을 강조하며 접두어로 붙였습니다.
식민지시대라 ‘공립’은 사실상 일본인 것이었고 '사립'만 한국인들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밖에 1907년 마산의 유지들에 의해 개교된「노동야학」은 1914년 10월, 1,300엔이라는 당시로서는 큰돈으로 창동에 교실 여섯 개를 가진(140평) 교사를 마련하였습니다.
마산의 노동야학활동은 전국적으로도 이름이 높았습니다.
1921년 한 해 동안 동아일보가 마산의 노동야학에 대해 보도한 것이 열일곱 번이나 될 정도였으니까요.

강점제1시기인 1910년대는 이질적인 두 나라의 문화충돌이 심했습니다.
지배자의 오만과 피지배자의 절망이 낳은 충돌과 갈등이 전국을 뒤덮었습니다.

식민지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더라도, 식민지 땅에서 일어난 지배민족과 피지배민족 간의 차별과 탄압, 그리고 전혀 다른 가치관과 문화에서 오는 이질적인 생활 습관 때문에 전국적으로 두 민족 간의 갈등과 마찰이 노골화되었습니다.

당시 일본인들은 한국인을 ‘요보’(‘여보세요’에서 ‘여보’의 일본인 발음으로 한국인을 놀리는 표현)라고 불러대며 모욕하였습니다.
공중목욕탕에서는 일본인들이 목욕을 마친 다음에라야 한국인의 입탕이 허용되었습니다.
기차나 전차에서 일인의 옆 좌석이 비어있더라도 한인은 앉을 수 없었으며, 길 가던 일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는 이유로 함부로 구타하는 횡포가 일상화되어 문제도 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마산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런 상황을 알 수 있는 그 시기 언론보도 몇 가지를 소개합니다.

① 매일신보 1915년 2월 6일
「중전(中畑)이라는 일본인이 인천나무시장 근처를 가다가 나무바리가 길가에까지 차서 통행에 지장이 있다고 하여 성냥불로 이 나무 저 나무에 불을 질러 불이 크게 번짐」
② 동아 1920년 4월 19일
「시야(矢野)」라는 부산의 일인 운수업자가 노임 시비 끝에 한인 노무자 수백 명에게 권총을 난사」
③ 동아 1920년 6월 21일
「여름철만 되면 일인들이 벌거벗고 길거리를 횡행하여 큰 사회문제화」
④ 동아 1920년 8월 6일
「서울 황금정(을지로) 4가 공동수도물을 먼저 길러가겠다고 일인 우체국원 조천(早川)이 한국 부인을 군도(軍刀)로 위협」<<<



2011/05/1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8) - 강점 제1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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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4) - 강점제1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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