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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5.23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93. 어시장

93. 어시장(魚市場)

 

마산의 한인 경제의 동맥이라고 일컫는 구마산 어시장의 연혁은 확실치 않으나 약 2백 수십 년 전부터라는 고로(古老)들의 추측으로서 생선과 일용품 시장은 6,70년 전까지는 구강(舊江, 현 산호동)이라는 취락의 발상지라는 것이다.

지금은 어업조합으로 약진하여 부산에 버금되는 조합건물이 윤환(輪奐)의 위세를 뽐내고 있지마는, 조합 이전의 어시장에는 객주 제도라는 것이 있어서 영세 어민에게는 조업자금을 대여함으로써 어로고(漁撈高)의 몇 분의 얼마를 이자조로 공제하여 객주와 어민간의 상호 유대를 견지해 왔던 것이다.

합포사라는 객주들의 협의기관을 조직하여 외래자금의 침투를 공고하게 방어하여 그 움직임이 일사불란하였다.

 

<마산포 해안의 석축돌제(위)와 부두(아래)>

 

한 예를 들면 외래자금이라는 것은 특히 일인들을 지칭하는 것인바, 그 당시 욱일 승천의 강압세력을 가진 신마산 방면의 일인들이 음양으로 한인업계를 침식코자 하였으나 난공불락의 한인 아성에 근접도 못했으며,

실례로 길형(吉形)이라는 일인이 점포를 빌리기는 했어도 상거래를 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 그 결과는 명약관화로 수개월간에 파산한 바 있었다.

재래의 업자 외에는 연고 없는 여하한 한인이라도 냉연히 거부함으로써 마산의 몬로집단이요, 2의 개성이라는 명예스러운 평도 받았다.

그리고 연중 행사의 하나로서 풍어를 기원하는 어민들은 별신당에서 가장 경건한 제사를 올리기도 한다.

별신제의 음호(陰護)라고 할까? 그때만 해도 어업 허가는 지금처럼 남발이 아니었고 남획도 없었던 탓인지 언제이고 규격에 맞는 계절 생선이 풍요하였을 뿐 아니라 창원강(진해만 연안 즉 통영, 고성, 남해, 거제, 가덕의 통칭)의 생선은 그 진미에 있어서 멀리 동해와 서해의 것에 비교할 수 없이 월등하여 남녘 바다에서 합포만으로 몰려오는 어선은 장관을 이루었고 뭍에서 대기하고 있던 수십 필의 운반 우마차가 인근 군부(郡部)로 종락(終絡)하는 은성상(殷盛相)이었다.

그러던 것이 시세의 변천과 지방의 자연 발전으로 옛날 선창 앞 해변을 매축하여 현재의 위치에 어조(漁組)의 면모가 일신하고 석일(昔日)의 어시장은 옛날 모습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을 뿐이다.

일인들은 매축으로 확장된 이곳에 공동권과 우선권을 방패삼아 소위 내선합자어업조합을 강제로 조직하여 위세를 떨쳤으나 일본의 패전으로 진주한 지 불과 1,2년 만에 총 퇴진하고 오늘에 이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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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9.07 15:50

24시간 만에 마산 제대로 보여주기

먼 곳에서 10여 명의 손님이 왔었다. 역사를 공부하는 현직 교수와 젊은 대학원생들이었는데 모두 마산이 초행이었다.

오후 3시 경 버스 편으로 양덕동 터미널에 도착한 이들의 마산 여행은 이 도시에 얽힌 이야기를 듣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멀게는 여몽연합군의 정동행성으로부터 조창과 개항, 식민지 시대를 거쳐 가깝게는 3·15의거에 이르기까지 무려 1000년을 넘나드는 마산 이야기가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저녁식사는 신마산 두월동에 나가 해결했다.

‘통술거리’라 명명된 두월동 거리는 개항 직후인 100여 년 전, 일본인들이 차지한 조계지에서 최고 번화가로 쿄마찌(京町)라 불렀던 곳. 거리의 내력을 안 여행자들은 자신들이 100년 전 조계지 한 가운데 앉았다는 것만으로 매우 즐거워했다.

통술집 특유의 신선한 해물과 풍성한 양 때문에 모두들 낯선 도시의 밤을 한껏 즐겼다.


▲ 마산 통술거리와 통술집의 기본차림상

숙박은 돝섬에서 했다.
세련되지도 않고 고급스럽지도 않았지만 정성들여 꾸며 놓은 다양한 시설들이 있었고, 섬에 왔다기보다 마치 큰 유람선을 탄 듯해서 항구도시의 소박한 낭만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무엇보다도 섬에서 도시전체야경을 한눈에 바라 볼 수 있다는 것이 자랑이었다.

다음 날 아침, 일본인들이 조성한 개항장 거리를 걸어 마산이사청과 신동공사 터를 찾았다. 합방 직전 융희황제(순종)가 마산에 왔던 이야기와 개항 직 후 이 도시를 농단한 일본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며 이미 오래 전에 사라져 버린 역사의 흔적을 더듬었다. 하지만 우리는 단지 시간의 흐름과 공간의 의미만 되새겼을 뿐, 어느 것 하나 눈과 감성으로 느낄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단지 마산에 살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참담하게 사라져 버린 문화유산들에 대한 질책을 그들로부터 받았고, 현존하는 일본헌병대 건물만이라도 보존하라는 당부에는 책임 못질 약속을 했다.

100년 도시를 주마간산(走馬看山)으로 둘러보고 남성동으로 이동했다.
조창이 있던 남성동 네거리와 창동·동성동의 수백 년 된 골목길은 여행자들에게 지나간 시간의 신비한 체험이었지만 이곳 역시 매 마른 설명 외에 달리 보여줄 게 없었다.

다음은 어시장. 퍼덕이는 것은 도다리와 볼락만이 아니었다. 생선과 뒤섞인 사람에게도 생명이 퍼덕이고 있었다. 우리가 모두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해주는, 항구시민에게는 마음의 고향과 같은 곳이다.

 


▲ 마산 어시장. 싱싱한 해산물 만큼 언제나 활기가 넘쳐난다.


점심은 중성동 생선국 집을 찾았다. 장사를 시작한지 무려 40년 가까운 이 식당은 고객의 평균연령이 전국에서 가장 높을 것으로 추정될 만큼 오래된 단골손님이 많다.

특이하게 생긴 생선 모양을 보고 웃고, ‘탱수’니 ‘아구’니 하는 이름 때문에도 웃었지만, 시원하고 담백한 국물 맛에는 모두들 신기한 듯 놀랐다. 그들에게는 생선국 한 그릇도 새로운 문화체험이었다.

떠나면서, 시간을 가지고 다시 찾겠다는 약속도 하고, 뭐니 뭐니 해도 엊저녁 ‘통술집’이 제일 좋았다는 평가까지 있었지만, 모두들 한결같이 “이렇게 재미있는 여행은 처음이었다”는 말은 잊지 않았다.

이 행사는 기왕 마산을 찾는 분들에게 이 도시의 생생한 현장을 체험시켜주자는 친구의 제의로 만든 작은 이벤트였다. 개항장, 조창지, 수백 년 된 골목길, 돝섬과 바다와 어시장, 그리고 통술집과 생선국.

오직 마산에서만 만날 수 있는 이들 문화 컨텐츠의 위력은 예상했던 대로 놀라웠다. 24시간 동안 벌어진 이 작은 이벤트를 통해 그 동안 막연히 생각만 하고 있던 이 도시의 가능성도 찾을 수 있었다.

진정한 의미에서 마산 도시 발전을 원한다면, 그래서 사람 살만한 도시가 되기를 바란다면, 24시간 마산 여행이 성공한 까닭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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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은진 2009.09.07 16:08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이야기가 없는 것은 사람들이 없는 것이지,
    땅은 이야기를 감추고 있습니다.
    우리가 우리 선조들을 잘 모르고, 현재 우리가 살고 있는 모습을 모르니 이야기가 없는 것 같습니다.

    허정도 선생님 알려주신 코스는 괜찮은 것 같습니다.
    전에 저도 돝섬에서 숙박하는 것을 고려해 보았는데
    배가 일찍 끊어진다고 하던데
    통술 먹고, 내 짐작에는 배가 없을 텐데
    의문이 드는 군요.

    돝섬의 숙박시설만 잘 해도 좋은 추억이 될 거라고 생각합니다.

    • 허정도 2009.09.07 16:37 신고 address edit & del

      방문 감사합니다.
      당시에는 늦은 시간까지 배가 있었습니다만 지금은 사정이 어떤지 모르겠습니다.
      사실 여행이 별겁니까?
      낯선 공간에서 낯선 체험을 하는 것이 최고의 여행아니겠습니까?
      소박했기 때문에 더 좋았던 추억입니다.
      감사합니다.

  2. 林馬 2009.09.07 23:40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블로그도 운영하십니까?
    몰랐습니다.
    그리고 하루의 마산기행, 저가 이곳저곳 디다본 느낌이군요.
    마산에 살면서 마산을 이야기하지만
    이 글을 읽고 정말 저는 아는 것이 없구나를 느꼈습니다.
    우리 고장의 좋은 역사공부 잘 했습니다.
    기회되시면 중성동 생선국집 한번만 안내해 주십시요.
    그 댓가로 저가 쏘겠습니다.
    이 글로서는 도저히 감이 잡히질 않으니 말입니다. 하하~

    • 허정도 2009.09.08 08:21 신고 address edit & del

      환영합니다.
      ‘林馬’라고 하니 괜찮은데 ‘임마’라 하니 조금 미안하네요.
      어쩔 수가 없네요, ‘임마’를 ‘임마’라 하니,,,


      별 것도 아닌 글을 좋게 봐주어 고맙습니다.
      소박한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면, 우리 주변에 늘려있는 역사와 문화가 의외로 많다는 것을 철들고 나서야 알았습니다.
      마산 같은 올드시티에는 더 말할 것도 없죠.
      언제 기회 되면 함께 둘러보시죠.
      제가 아는 대로 안내해 보겠습니다.
      저보다 아는 게 훨씬 많은 친구들도 있으니,
      제가 모르는 부분은 친구들에게 물어서라도 해결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근데 ‘임마’가 누굴까????

    • 林馬 2009.09.08 15:16 신고 address edit & del

      '임마'를 모르신다고요???
      위 林馬를 함 눌러보시면 금방 알 수있을텐데요?
      울 대표님을 넘 존경하는 소박한 마산시민입니다 하하~

  3. 유림 2009.11.13 10:20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부끄러운 말입니다만 마산 토박이면서 정말 마산에 대해
    아는 것이 없습니다.
    아니 알 기회가 없었다고 하면 변명이 될까요?

    타지 생활을 하다 보니 고향이 너무나 그리워
    다시 돌아왔지만
    추억은 떠올릴뿐 보이지 않습니다.

    저도 공부 많이해서 친구들 마산오면 이야기 해주고 싶네요

    • 허정도 2009.11.13 11:23 신고 address edit & del

      방문감사합니다.
      다음 카페 '유장근 교수의 도시탐방대'에 가셔서 마산도시탐방에 참여해보시기를 권합니다.

2009.06.04 10:15

마른 멸치 언제부터 먹었을까?

최초 멸치생산 : 일본의 어업이민
우리나라에서 마른멸치(이하 멸치)를 맛보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지 않다. 일본이 우리나라와 1905년 맺은 을사조약에 의거 풍부한 수산자원을 가진 남해안 연안에 불법, 합법적으로 어로작업을 해오던 일본어민들에게 집단이주를 권유해 그결과 1909년까지 총1,146호 4,820명이 한국연안 40개 마을에 이주하였는데, 이중 60%이상이 남해안 연안마을에 이주했다.

당시 남해안 일대에 일본 어민들이 집단으로 이주하여 선진수산업을 전개하면서 마른 멸치를 선 보이게 되는데 멸치어장은 1910년 전후시기에 주로 히로시마에서 온사람들에 의해 통영, 거제지역을 중심으로 어장이 경영되었다. 당시에 우리나라는 생멸치를 잡아서 그냥 먹거나 멸치젓갈이나, 말린 포로 먹는 정도였기 때문에지금의 마른멸치처럼 생멸치를 가마에 쪄서 말리는 가공법에 의해 맛이 장기간 유지되는 고급 수산업기술은 당시에 전파된 것이다.

마산어시장에 멸치가 입하하기 시작한 시기는 1920년대에 당시 이순란, 김성칠씨가 일본에서 수입하여 판매한 것이 그 그 기원이 된다. 일본상인으로부터 수입된 멸치는 중개상인을 거쳐 대구, 김천 등지로 판매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당시 남해안에서 생산된 멸치의 대부분은 하관(시모노세키)을 통해 일본으로 수출되었다고 하다.

해방전까지 일본사람들로 구성된 '히로시마 온망조합'에서 멸치의 9할 이상을 생산하였다 하며 해방  5년후 한국인 최초로 온망어업을 시작한 사람은 거제의 진정률이었다고 한다. 이후 멸치의 주생산은 통영을 중심으로한 기선권현망수산업협동조합에서 우리나라 전체 생산량의 절반이상을 감당하고 있다.


마산의 어업이민
마산의 율구미 해안마을(지금의 가포동 일부)은 일본 지바현 어민들이 집단이주해 와서 살던곳으로, 일본 어민촌을 지바무라(千葉村)라고 불렀다. 1905년 1월 지바현의 수산조합 이사 吉野文吉은 어민 20명에게 보조금 4,000원을 보조금으로 주며 어업이민을 시켰다고 한다. 이주한 어민들은 모두 어획물 처리장을 건설하고 멸치 권현망, 도미 연라망, 수조망어업등에 종사하였다. 현재 가포의 장어구이로 유명한 '소나무집'이라는  식당과 그 일대에 당시의 흔적이 일부 남아있다.

                                                   (남해안의 죽방렴 사진)

멸치의 일상성.
멸치를 두고 회자되는 얘기들이 많다. 하챤고 짜잔한 대상을 두고 멸치도 생선이냐?는 얘기도 더러한다. 그건 멸치의 실상을 잘모르고 하는 얘기일 것이다. 신체구조상, 아가미, 지느러미 심지어 이빨까지 일반생선과 다를바 없이 있을건 다 갖추고 있다. 단지 크기만 작을 뿐이다.

멸치는 우리 일상생활 속에 깊이 자리 잡은 생선이다. 각종 국물맛을 내는데 멸치를 따를만한 것이 없으며, 김장의 멸치젓갈은 빠질 수 없는 재료이다. 가장 만만한 술안주로 마른 멸치와 고추장 그리고 갓 잡은 굵은 알배기는 회 무침으로, 멸치쌈밥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별미이다

몸값은 어떤가? 
키로당으로 치자면 일반 생선에 비교할 바가 아니다.  보통 키로당 2-3만원 정도이며, 죽방멸치인 경우는 30만원선이라고 한다. 이 만한 가격대의 생선이 과연 얼마나 있을런지! 죽방멸치는 우리들에게 죽을때 잘죽어야 몸값이 제대로 나간다는 교훈(?)을 보여주고 있다. 암튼 멸치를 만만케 보아서는 않될 듯 싶다.

멸 치     

죽방멸치의 똥은 쓰지 않다고 한다
비늘 한점 떨어지지 않도록

대나무 통발로 몰래 가둬

끓는 솥단지까지 곱게 모셔와

그 숨이 똑,

한번에 떨어지도록 했기 때문이다

똥이 쓰다는

아랫배 쪽에 흉터가 생긴

일반멸치는

그물에 몸이 걸린 채

온몸으로 苦悶死하므로

비늘도 상하고 속은

썩은 쓴 맛을 우려낸다는 것이다

종이그물에 몸이 얽힌 채

온몸으로 너무 고민한 잘 쓴 시들은

일반멸치의 맛이 난다

죽기 직전까지 살아 있는 게 관건이다

여러 번 죽는 것은 한 번 죽는 것만 못하여

비늘도 상하고 내장에 쓴 맛이 들어가는

일반멸치가 되는 것이니

시는 아무래도 말짱한 죽방멸치로 태어나야 한다


(정준영)

* 정준영시인은 죽방멸치를 멸치를 비유해서 죽기직전까지 살아있는 작가정신의 상징으로 표현하고 있다. 작가정신과 죽방멸치, 멸치가 이렇게 만만치 않은 대상으로 변신하게 될 줄 누가......?

멸치의 어원
한자로는 멸치(蔑致), 멸어(滅魚), 멸치어(滅致魚)로 불리는데, ‘물 밖으로 나오면 금방 죽는다’는 뜻에서 나온 이름이다. 멸치란 이름에 얽힌 또 다른 하나의 설은 물에서 나는 물고기의 대명사인지라 한자어로는 수어(水魚)라 하며, 고유어로는 물의 고어인 ‘미리’가 ‘며리’, ‘멸’로 음운변화하고 물고기를 뜻하는 접미사인 ‘치’를 합성하여 멸치로 되었다고 한다.

공식적으로는 우리나라의 수산물 검사법에 의하면 건조품 중 전장 7.7cm 이상을 대(大)멸, 7.6~4.6cm를 중(中)멸, 4.5~3.1cm를 소(小)멸, 3.0~1.6cm를 자(仔)멸, 1.5cm 이하를 세(細)멸이라고 구분하여 부른다.

멸치의 어획방법
멸치를 어획하는 대표적인 어업은 권현망이다. 멸치는 기선권현망, 유자망, 정치망, 낭장망, 연안들망, 죽방렴 등 30여개의 다양한 어업에서 어획되고 있지만 주로 기선권현망어업에 50~60%이상을 어획하고 있다. 이 권현망(權現網)이란 명칭은 풍어를 상징하는 일본의 바다 수호신인 권현신(權現神)에서 따온 것이라는 유래가 있다.

죽방렴은 말 그대로 대나무로 만든 어살(漁箭)이다.  수심이 별로 깊지 않은 바닷속에 길이 5~10m 가량 되는 참나무 말뚝을 'V'자 형태로 박는다. 이처럼 부채꼴로 박은 말뚝을 ‘살(삼각살)’이라고 하는데, 이것의 한 변은 길이가 무려 80m에 이른다. 그리고 살 안쪽의 뾰족한 부분에는 참나무 말뚝을 둥그렇게 박은 다음, 대나무로 촘촘하게 발(簾)을 쳐서 불통을 만든다. 불통과 살 사이에는 대나무를 엮어 만든 문짝이 매달려 있다. 이 문짝은 밀물 때에는 조류의 힘으로 활짝 열려 있다가 썰물 때에는 축 늘어져서 꽉 닫히게 된다. 그러므로 일단 불통 안으로 들어온 고기들은 다시 빠져나갈 수가 없다.  죽방렴에는 날씨가 따뜻한 봄부터 가을까지 멸치가 드는데, 죽방렴으로 잡은 멸치는 그물로 잡은 것 보다 곱절이나 높은 값에 팔린다. 그물로 잡은 멸치는 금세 숨이 끊어지는 데다 비늘이 다 벗겨지고 온 몸에 상처를 입어 맛이 떨어진다. 반면, 조류를 따라 자연스레 죽방렴 안에 들어온 멸치는 산채로 곧장 삶아서 말리기 때문에 맛이 훨씬 더 좋다고 한다.

 
멸치잡이는 멸치어군을 찾는 어탐선, 그물을 끌어 직접 멸치를 잡는 본선 2척, 잡은 멸치를 즉석에서 삶아 운반하는 가공.운반선 2척 등 대개 5척의 배로 구성된 선단을 통해 이뤄진다. 본선 2척과 어로장이 탄 어탐선이 같이 항해하다 어로장의 지시가 떨어지면 곧바로 배 한척마다 길이 500m가량의 그물을 투하하는 것으로 시작된다.두척의 배가 그물을 끌면서 걸려든 멸치를 그물자루 끝쪽으로 모으고 한쪽으로 몰린 멸치들은 굵은 호스와 연결된 펌프로 빨려들어가 곧바로 가공.운반선으로 자동으로 보내진다. 이 과정이 끝나면 본선 2척은 다시 투망준비를 하면서 어탐선이 어군을 발견할 때까지 대기하고 가공.운반선은 펌프를 통해 보내진 살아 펄떡이는 멸치들을 즉석에서 대나무 발에 담은 후 팔팔 끓는 솥에서 3~4분 가량 삶는다. 배위에서 삶아진 멸치들은 곧바로 육상의 건조장까지 운반된 뒤 13~14시간동안 말려진 다음날 바로 시장에 판매된다.

- 이학박사 황선도님 글에서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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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진이 2016.05.09 13:36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지식인에 담아갑니다
    출처는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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