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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28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 - 조선시대


<마산창과 유정당>

조용했던 마산포구에 조창이 생기자 조창에서 일을 보는 관원은 물론 인근 지역 관원들의 왕래까지 잦아지고 여각(旅閣), 객주(客主) 및 강경상인(江京商人)은 물론 각지의 상인들이 모여들었습니다.
해로와 육로의 접점이니만큼 시장으로서의 지정학적 조건도 좋았지만,
17-18세기 인구증가로 비농업인구가 급증하여 임노동자들이 도시에 집중하는 등 조선조 후기에 발생한 '봉건적 사회질서의 붕괴'가 마산포를 도시화시키는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했습니다.

마산창을 중심으로 자연스럽게 민가도 들어섰습니다.
동성리·중성리·오산리·서성리·성산리·성호리, 지금도 대부분 동명으로 이름이 살아있는 6개리가 이 때 형성되었습니다.
현재까지도 마산 도시구조의 주심부(主心部)인 이들 6개리가 오늘날 마산이라는 도시의 시작이었습니다.

이처럼 마산창은 마산포의 중심이자 마산포를 도시화시킨 발원지였으며 오늘의 마산도시를 있게 한 역사적인 공간입니다.


그림처럼 현 제일은행 마산지점과 남성동 파출소 일대, 지금은 세 블록으로 나누어진 직사각형 1,500여 평의 부지가 마산창이 있었던 유서 깊은 터입니다. 
지금은 도시 한복판이지만 당시에는 바다와 가까이 있었습니다.
조창 터와 바다 사이의 '이프, 남흥양복점, 수성목욕탕, 남성동천주교회' 등이 들어서 있는 터는 조창기능을 위한 작업 및 하역공간으로 추정되는 공지였습니다.
 
1760년 영조가 대동법을 시행하며 세운 마산창은 규모와 위상에서 당시는 물론 근대 이전까지 마산인근 최상위의 관아였습니다.

1899년 마산이 개항되자 개항업무를 집행하던 감리서아문(監理署衙門)으로 사용되기도 했고 그 보다 일 년 전인 1898년부터는 ‘마산포 우편물취급소’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현재 사용하고 있는 창동(倉洞)이란 동명도 마산창의 창(倉)자(字)에서 따온 것입니다.

아래 사진은 마산창의 본당이었던 「유정당(惟正堂)」입니다.
마산창 내 8채 건물 중 중심건물이었으며 세곡미 호송관으로 조정에서 내려온 조운어사가 머물렀던 곳이기도 합니다.


 

이 사진은 1900년 4월 30일 오후 2시에 있었던 마산포 각국거류지 제2회 경매장면인데 미의회 도서관 소장 자료입니다.
(
마산포 개항 후 각국거류지 경매가 모두 다섯 차례 마산포 해관에서 진행되었습니다.
1회와 2회 경매까지는 당시 마산포해관으로 사용되던 조창건물에서 진행하였습니다만 3회부터는 1901년 1월 1일 신마산으로 이전한 마산포해관에서 진행되었습니다)

「마산포 각국거류지 제2회 경매 정황에 관한 보고」라는 제목으로 일본 해군소속 군함 대도(大嶋)의 첩보주임 이집원후(伊集院後)가 1900년 5월 1일자로 작성한 보고서에 첨부된 사진입니다.
경매 중이라 차일을 쳐 놓긴 했지만 조창건물의 형태를 시각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유일한 자료입니다.

유정당이 어떤 건물이었는지 가늠해볼 수 있는 글이 두 편있습니다. 건물 준공 후 이곳을 찾은 창암(蒼巖) 박사해와 간옹(澗翁) 김이건의 시(詩)입니다.
김이건의 시 중 양창(兩倉)과 좌창우고(左倉右庫)는 마산과 진주의 두 조창을 말합니다.


  漕倉 惟正堂                조창 유정당             -박사해(朴師海)-

坐 來 新 棟 宇        새로 지은 집에 와 앉으니
蕭 灑 客 心 淸        나그네 마음 상쾌하게 맑아지네
海 色 楹 間 入        바다 빛은 난간 사이로 스며들고
島 霞 席 底 生        섬 노을은 자리 밑에서 일어나네
倘 非 經 緯 密        경위가 치밀하지 않았더라면
那 得 設 施 宏        어찌 규모가 넓었으리오
南 路 知 高 枕        남쪽 지방이 태평함을 알겠거니
蠻 氓 可 樂 成        변방 백성들이 즐겨 지었다오


       送 漕船歌                     송 조선가           -김이건(金履健)-

․․․․․ ․․․․․
始 建 兩 創 儲 稅 穀      비로소 두 조창 지어 세곡을 저장하고
繼 造 衆 艦 艤 海 澨      이어 많은 배 건조하여 바닷가에 대었다네
暮 春 中 旬 裝 載 了      늦은 봄 중순에 세곡을 다 싣고는
卜 日 將 發 路 渺 渺      좋은 날 받아 떠나려니 길은 아득도 할 사
玉 節 來 臨 燈 夕 後      저녁 등 밝힌 뒤 옥절이 임하고
州 郡 冠 盖 知 多 少      각 고을 관리들 많이도 모였는데
翼 然 傑 構 究 兀 起      나를 듯 헌걸하게 우뚝 솟은 집은
左 倉 右 庫 干 彼 涘      저 물가의 좌창과 우고라네
․․․․․ ․․․․․

이 두 편의 시에 의하면 유정당은 웅장할 정도로 규모가 상당히 컸을 뿐 아니라 시공 수준도 높았던 건물로 보입니다.
바다를 내다 볼 수 있는 전망을 가졌다고 했는데, 아마 대청에 앉아 마산 앞바다에 둥실 떠있는 돝섬을 훤히 내다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유정당에 대한 기록이 별로 남아 있지 않고 그간 연구조차 없었다는 점이 아쉽습니다.
겨우 『창원보첩』에 대청(유정당) 7칸․동별당 6칸․서별당 5칸․동고 15칸․서고 13칸․좌익랑 2칸(추정)․우익랑 2칸(추정)․행랑 3칸으로 총 8동 53칸 정도라는 기록만 남아 있을 뿐입니다.


마산도시의 발원지였던 마산창이 남겨 놓은 것은 없습니다.
창동(倉洞)이란 지명과 이곳이 마산창 터였음을 알려주는 표지석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오가는 행인들은 알까요?
바로 이 곳이 오늘 마산도시의 발원지라는 사실을,,,,,<<<


2010/04/08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여는 글
2010/04/12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1
2010/04/19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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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03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쳔사 -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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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10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 - 고려시대


<마산에 있었던 석두창의 위치는?>

조선시대 조창인 마산창은 위치와 규모 등 관련 내용들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마산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고려 석두창(石頭倉)의 중요성도 결코 조선시대 마산창 못지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두창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으며, 아직 그 위치도 밝히지 못한 채 몇 가지 가설만 나와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지금까지 주장된 석두창 위치에 대한 가설들을 소개하겠습니다.

석두창 위치 비정은 모두 세 가지인데 모두 그 근거와 논리가 좀 복잡합니다.
천 년 전에 있었던 석두창의 위치를 찾는 일이니 그도 그럴 것입니다.

세 주장의 결론만 간략하게 정리하겠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만 읽어볼 수 있도록 자세한 내용은 이 글 뒤에 별도로 붙여 놓았습니다)

첫 번째는,
몇몇 문헌(마산시사, 창원군지, 박희윤, 이지우 경남대 교수)에서「당시 마산포라 불렀던 현재의 용마산과 자유무역지역 후문까지의 어느 지점, 현 산호동 어딘가에 있다가 조선조에 현 어시장 해변으로 옮겼다」라고 추정한 것입니다.
이 주장에서 사용한 근거자료는,
세종7년(1425년)에 간행한『경상도지리지』, 중종 25년(1530년)에 간행한『신증동국여지승람』, 영조 때(1757년-1765년)에 편찬된 『여지도서』, 1895년에 간행한 『영남읍지』 등 입니다.

두 번째는 저의 주장입니다.
저는 앞의 주장이 문헌 해석방법에 무리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석두창이 현재의 남성동 해안으로 옮겨온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남성동 해안에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였습니다.
근거자료로는 지명과 자연조건 그리고 지형을 제시했고 사용한 자료는 『고려사』,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1899년 일본에서 제작한 근대식 지도, 조선시대 마산포 복원도 등 입니다.

세 번째는 부산대학교 사학과 한정훈 교수의 주장입니다.
한 교수는 석두창의 위치가 「산호동 일대이지만 반월산(무학여고 뒷산)을 중심으로 해서 그 앞 해안가에 위치하였을 것」이라고 추정했습니다.
추정근거로 지명의 의미 및 고려시대 조창의 입지조건과 인근의 교통망 등을 들었습니다.

위 세 주장에서 제시된 위치를 세 종류의 지도에 표기해 보았습니다.
첫 번째 주장 '산호동'은 청색,
두 번째 주장 '남성동'은 적색,
세 번째 주장 '반월산에서 해안가'는 녹색
입니다.
정확하지는 않습니다만 대충이나마 그 위치를 가늠할 수 있을 겁니다.

 <1833년에 제작된 고지도에 그려보았습니다>

<현재 마산지도에 백여년전 해안선을 복원한 후 비교해보았습니다>

<현재 마산지도상에 위치를 표시해보았습니다.
세 곳 모두 도시한복판이지만 당시에는 배가 정박할 수 있는 해안이었습니다. 세 번째 주장인 녹색부분은 삼호천과 산호천이 합해진 하류인데 지금은 복개되었습니다>

셋 중 어느 주장이 맞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아직 논의가 종결되지도 않았습니다.
본격적으로 연구하여 천 년 전 합포의 최대 최고시설이었던 석두창의 위치를 찾는다면 통합 창원시 최고의 문화유산이 될 것 같습니다.

도대체 어디쯤 있었을까요?
고려시대 마산에 있었던 석두창은,,,,



<석두창 위치비정에 대한 세 주장의 상세 글>   - 길어서 읽기 지겹습니다 -
 

첫 번째,
‘산호동 일대’라는 주장의 근거자료로 사용되었던 문헌의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세종7년(1425년)에 간행한『경상도지리지』 조세(租稅)조에서「이전에는 도내(道內)에서 세(稅)를 거둬 실어다 바치는 곳이 세 군데 있었다.
김해 불암창, 창원 마산창(옛 석두창), 사천 통양창」이라는 기록.

② 『경상도지리지』 내상조(內廂條)에서「우도내상(右道內廂)은 창원부에 있는데, 바다입구(海口) 마산포와 4리317보 떨어져있다」는 기록.
'병영성(兵營城)과 내상성(內廂城)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여기서 말하는 내상(內廂)은 현 합성동의 당시 ‘우도병마절제사영성(右道兵馬節制使營城)을 말함'

③ 중종 25년(1530년)에 간행한『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창원도호부 산천조(山川條)에「馬山浦 在會原縣 猪島在月影臺南 合浦在府西十里․․․․․․」라고 하여 마산포는 회원현에 있고 합포는 부(府) 서쪽 10리에 있다는 기록

④ 영조(英祖) 때(1757년-1765년)에 편찬된 『여지도서(與地圖書)』의 창원대도호부조(昌原大都護府條)에 수록되어 있는 창원부의 지도에서 석두창의 위치가 반룡산(盤龍山, 현 팔용산)밑인 지금의 산호동 일대(팔용산과 월영대 중간지점)에 도시(圖示)되어 있다는 것

⑤ 1895년 간행한 『嶺南邑誌』 창원대도호부(昌原大都護府)조에서「조창은 해창 부근에 있는데 새로 지은 것이다」라는 기록 등 입니다.

이 문헌들에 근거하여 내린 결론은

①「마산에 두 개의 포구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현재의 용마산과 자유무역지역 후문까지(산호동 일대)의 마산포이고 다른 하나는 현 어시장 쪽의 합포였다」고 규정하여

②「마산포에 석두창이 있었으니 현 산호동 어딘가에 석두창이 있었다」라고 결론짓고

③ 그러다가 조선 영․정조시기에 자연충적(自然沖積)으로 마산포에 선박출입이 어려워지자「현 어시장 해변인 해창 부근, 즉 합포로 옮겼다」는 주장입니다.

그리고 박희윤은 마산포에서 합포로 옮겨 간 사실을 두고 「산호동 일대는 구강이라고 부르던 곳으로 여기서 열리던 장을 ‘구강장’이라고 하였고 어시장 쪽에서 열리는 장을 ‘새강장’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예로 들었습니다.
즉 마산포에 있던 석두창이 퇴적물로 인해 조선 후기에 합포 지역으로 조창을 이전했기 때문에 원래의 지역을 ‘구강’, 새로운 지역을 ‘새강’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마산포라는 지명은 기존의 산호동 일대만 지칭하다가 현재의 남성동 일대인 합포 지역까지 확대되어 사용되었다고 비교적 소상히 설명하였습니다.

두 번째,
‘남성동 어시장 일대’라는 제 주장입니다.
위 석두창 위치비정 논리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시작합니다.

① 마산포와 합포의 위치를 규명하는 방법에서「마산포는 회원현에 있고 합포는 부(府)의 서쪽 10리에 있다」는 기록을 이용하면서, 마치 자로 잰 듯이 당시 행정구역인 회원현의 범역과 창원대도호부의 위치를 자구(字句) 그대로 적용하여 현 산호동 일대가 마산포이고 남성동 일대가 합포인데 석두창이 마산포에 있다고 한 점입니다.
따라서 산호동의 용마산에서 자유무역지역 후문까지의 어딘가 그것이 있었을 것이라는 논리가 석연치 않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아래의「대동여지도」입니다.
이 지도에는 위의 주장과 정반대의 위치에 마산포와 합포가 표기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만으로도 마산포와 합포의 위치를 비정하는데 활용한 문헌의 해석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동여지도」의 표기 범례에는 ■은 倉庫, ●은 古縣이라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合浦●」의 표기는 신라 35대 경덕왕 16년(757년)에 시행한 행정구역 정비 때 의안군에 영속되었던 합포현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서, 과거에 현(縣)이었는데 성(城)은 없다는 뜻입니다.

지도에 표기된 양상을 보아도 마산포는 기존의 연구처럼 산호동 일대를 지칭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②『여지도서(與地圖書)』의 창원부 지도에 도시(圖示)된 석두창의 위치에 대한 문제제기입니다.
우리나라의 각종 고지도(古地圖)에 나타나는 시설물들을 보면 축척과 거리의 개념보다는 존재 유무의 개념으로 표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지도에 나타나는 석두창의 위치를 사실로 연결시키면서 논거로 제시하는 것은 무리가 많습니다.

또한 석두창이 산호동 부근의 마산포에 있었다고 하는 주장은 시기와 명칭과의 관련성에서도 문제가 있습니다.

③ 조선 영․정조에 석두창을 현 어시장 쪽인 합포로 이전했다는 내용에 대한 주장의 타당성입니다.
이 주장은 석두창을 현재의 산호동 쪽에 있었다는 것을 결정해 놓고, 『영남읍지』의 ‘조창이 합포에 있던 해창 쪽에 있다’는 기록과 연결짓다보니「이전」이라는 해석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에 중요한 관아였던 조창이 이전되었다는 기록은 어느 문헌에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석두창이 이전했다면 영조 때 개창한 마산창의 위치로 이전한 것인지, 혹은 그렇지 않고 마산창은 별도로 신설한 것인지 정확한 설명이 없습니다. 석두창 이전 설은 현재로서는 논리적으로 납득할만한 어떤 근거도 없는 셈입니다.

④ 석두창이 오래 동안 사용되다가 자연충적 때문에 이전했다고 한 점에 대해 검토해 볼 필요도 있습니다.
석두창이 있었다는 산호동 해안의 지형지세를 보면 원래부터 퇴적물이 많았던
곳이지 석두창이 생긴 후 언제인가부터 퇴적물이 생기기 시작한 곳은 아닙니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 제시한 「1899년 산호동 일대의 해안지도」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지도는 1899년 일본 해군에 의해 작성된 근대식 지도로서 마산만의 간조선이 표시된 지도로서는 최초의 것입니다.


이 지도를 보면 지금까지 석두창이 있었다고 주장한 해안은 팔용산에서 내려오는 하천를 비롯하여 양덕천․산호천․삼호천 등의 하천 때문에 간석지의 폭이 무려 1㎞나 되는 곳이 있을 정도입니다.
조창부지로서는 매우 부적절한 자연조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위의 네 가지 이유를 보더라도 석두창이 현 산호동 일대에 있었다는 주장은 무리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석두창이 처음부터 현재의 남성동 해안에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 비정이 합리적이라고 봅니다.
이것은 저의 주장인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①『고려사』권79 조운, 성종 11년 수경가조(輸京價條)에 「나포 전호골포 합포현석두창 재언(螺浦 前號骨浦 合浦縣石頭倉 在焉)」이라고 하여「나포는 전에 골포라 하였고 합포현의 석두창이 여기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이 기록은 석두창의 위치를 확인하는데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
즉 螺(라, 소라)라고 불렀던 포구라면 그 형상이 소라의 형태와 관련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는 버드나무가 많다고 해서 유호(柳湖)라는 지명을 사용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오른쪽 그림은 제가 복원한 원마산 지형도입니다.
이 그림에서 나타나는 동굴강의 형태가 나포(螺浦)라는 명칭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특이한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② 조창의 명칭이 석두창(石頭倉)이라는 점입니다.
중국어에서는 ‘석두(石頭)’라는 단어를 곧 돌(石)을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이를 근거로 생각해 보면 대부분 갈대밭이었으며 간석지였던 해안에 소라 모양을 띤 움푹 들어간 포구 한 곳을 돌로서 호안(護岸)하여 굴강을 조성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합니다.
그 형상으로 보아 사실상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것이라기보다는 자연발생적인 포구를 인공으로 호안(護岸)하여 조성한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합니다.

③ 앞에서 말했듯이 현재의 용마산과 자유무역지역 후문 사이에는 여러 개의 하천 때문에 생기는 퇴적물로 인해 간석지가 매우 넓었을 뿐만 아니라 해안선의 형태가 밋밋하여 작은 풍랑도 피하지 못할 조건이었습니다.

반면 위의 두 그림에서 알 수 있듯이 ▲표의 동굴강은 간석지가 좁고 해안선의 형태도 항만으로 사용하기에 적합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인근에 이렇게 좋은 조건을 놔두고 산호동 쪽에 조창을 설치할 이유가 없었다고 봅니다.

이상과 같은 추정을 근거로 석두창의 위치는 애초부터 남성동해안의 동굴강에 있었던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또한 동굴강을 끼고 몽고군의 일본 정벌 때 사용된 전선소(戰船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기존의 굴강을 전선소 굴강으로 적절히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동굴강은 그 규모로 보아 당시 900여 척에 달했던 전함의 수리를 모두 맡기에는 부족했을 것이지만 기왕에 존재했던 굴강이었기 때문에 일부라도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 이 추정이 적절하다면 그 위치는 현재의 어시장 입구에 있는 속칭「너른 마당」의 북쪽 인접대지 일대입니다.

이 사실을 전제로 할 때,

조선시대의 마산창은 고려시대의 석두창을 이전한 것이 아니라 석두창으로 사용하다가 폐허가 되어버린 창지(倉址) 옆에 새로 건립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이 주장에 반론이 나왔습니다.

세 번째,

부산대학교 사학과 한정훈 교수의 주장입니다.

한 교수는 고려시대 조창의 입지조건과 인근의 교통망 등을 근거로 하여 석두창의 위치를 비정한 것입니다.

다음과 같은 논리입니다.

① 석두창은 합포현 내에 있는 골포(=螺浦)에 위치하였다.
골포의 골(骨)자는 우리만 의미에서 골짜기 깊숙이 들어간 곳의 의미가 있으므로 마산만 깊숙이 들어간 어느 지점에 형성된 포구를 지칭할 가능성이 높다.
그런 점에서 현재의 남성동 보다는 더 내륙으로 들어간 산호동 일대일 가능성이 높다.

② 고려시대 조창의 입지조건을 검토한 결과, 만(灣)의 입구보다는 내륙으로 들어간 해안이나 만의 깊숙한 지점에 위치하였다.
바다로 부터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였는데 그 역시 산호동 일대가 타당한 조건이었다.

③ 조창의 운반 조건을 볼 때 수운 이용이나 하천을 따라 형성된 소로의 이용이란 측면에서 내륙하천과 마산 앞 바다의 결절지점에 석두창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것을 근거로 볼 때, 석두창의 위치를 용마산 아래의 산호동 앞 바닷가 일대로 보는 것이 옳다고 하면서, 나아가 조창의 입지조건이나 교통망 그리고 당시 해수면의 변화까지 고려한다면 용마산 일대보다 내륙으로 더 들어간 지점일 수 있다고했습니다.
그 결과 내린 결론은,
석두창이 지금의 반월산(무학여고 뒷산, 이산, 이살미산, 와우산이라고도 불린다)을 중심으로 해서 그 앞 해안가에 위치하였을 것이라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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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의 역사 만큼이나 액자의 역사는 오래 되었을 것입니다. 회화의 전시, 보존 등을 위한 보조적인 위치에서 출발한 액자는 사진의 등장과 기술의 발달 등으로 현재는 picture frame 만이 아니라 photo frame, d..

기억을 찾아가다 - 11

11. 정전 후의 체험들 Ⅱ - 수학여행 전쟁이 막바지로 갈 때쯤 해선 민간자동차도 많이 다니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주로 화물차가 많이 보였는데, 마산 부산 간에만 다니던 버스 숫자도 상당히 불어난 걸 느낄 수 있었다. ..

건축의 외형 - ‘계단’ (Staircase)

오늘은 이전 포스팅들 보다는 조금 더 인공적인 형태라 할 수 있는, '계단' 이라는 주제를 가져와 보았습니다. 계단의 역사는 생각보다 오래 되어, 이미 BC3000년 경 메소포타미아의 지구라트 에서부터 찾아볼 수가 있습니다. ..

기억을 찾아가다 - 10

10. 정권 후의 체험들 Ⅰ- 깡통문화, 총탄 정전 반대를 외치는 집회와 행진이 전국적으로 있었고 마산에서도 무학초등학교 운동장에서 궐기대회가 열렸었다는 이야기를 어른들이나 형들로부터 엿들었던 기억은 있으나 거기에 관심을 기울..

건축의 외형 - ‘초승달’ (crescent)

달은 태양과 마찬가지로 여러 문화권에서 신화나 종교와 연결지어서 생각되었습니다. 초승달은 달이 뜨지 않는 삭 다음에 나타나기 때문에 서양권 에서는 새로운 시작을 의미한다 하여 new moon 이라고도 불리죠. 오늘은 이슬람의 ..

기억을 찾아가다 - 9

9. 한국전쟁기의 학교생활 Ⅲ - 용의검사, 학력경쟁 가교사생활 직후부터 실시된 용의검사는 생활환경이 좋은 도회지 넉넉한 집 아이들에겐 별 부담이 안 되었겠지만, 누추한 환경에서 생활하거나 항상 흙을 묻히고 살아야하는 농촌 아..

건축의 외형 - ‘삼각형’ (Triangle)

피라미드와 삼각형, 그게 그것 아닌가 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만, 입체도형과 평면도형 이라는 근본의 차이때문에 여러 분야에서 접근 또는 적용 방식 또한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피라미드와 삼각형 은 겹치는 부분도 있지만 확..

기억을 찾아가다 - 8

8. 한국전쟁기의 학교수업 Ⅱ - 떠돌이 수업 초등학교 5학년 때였던 1952년의 학교생활엔 참 변화가 많았다. 담임선생님도 세 번이나 바뀌었고 교실도 다섯 번이나 옮겨 다녔다. 그리고 전입생도 그 해에 갑자기 불어났다. 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