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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08.22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107. 최초의 야학교

107. 최초의 야학교

 

 

1911년 창원군 외서면 고산포(高山浦, 구마산)에는 한국 최초로 야학교(남자)가 탄생하였다.

 

발기인과 간부들은 지금은 전부 타계한 분들이지만 명부에 나타난 인물은 설립자 유천(柳川), 구성전, 교장 남전(藍田) 옥기환, 교감 창산(蒼山) 이형재, 경리 소원(小園) 김철연, 외 허당(虛堂) 명도석, 일파(一波) 김용환, 나인한(호 망각) 등 그때에도 쟁쟁한 청년 선각자들이다.

 

장소는 현재 시가지 구역확장으로 통로가 되었지만 당시 도면을 보면 남성동 69번지 조그마한 창고를 수리하여 시작하였다.

 

여기 수학생 중에는 초기 보통학교와는 달리 변발한 총각, 상투 있는 기혼자들로서 생도 전부가 선창에서 어물상의 고용인 또는 삭발 아동 등 혼성부대들이었다.

 

연혁은 기록이 소멸된 관계로 초대 교원의 성명은 도저히 찾을 길이 없지만, 선생은 대개가 창신학교 선생 혹은 보통학교 졸업자와 청년 유지들로서 보수는 봉사로 만족하였다고 한다.

 

처음 생도 수는 2, 30명에 불과하였으나 생도 수가 증가함에 따라 창동 64번지 민의소(현 시민극장)로 이전,

 

다음은 동 28번지에 목조 와옥(瓦屋) 4교실로 신축 이전하였다가 1926년 중성동 23, 전답 천여 평을 매입, 5개의 교실에 사무실, 수위, 사택 2동 그리고 회의실 등의 건축을 하여 이전하고, 창동에 있는 전 교사는 여자 야학교로 전용하게 되었다.

 

남자부 신축교사는 농촌공립학교보다 규모로나 건축 자체가 월등하여 전국에서 가장 하이칼라학교라고 당시 동아일보에 보도되기도 하였다.

 

교원의 봉급은 일인 평균 12원인데 모범교원에 한해서는 도 학무과에서 5원을 보조하기도 하였다.

 

학교운영을 옥기환 교장이 구마산 금융조합장으로서 받은 수당 3백 원을 1년 경상비로 충당하였으며 1936년에는 중학교 임시 준비책으로 옥기환 교장, 이형재 동아일보 지국장, 상원영(上原榮) 전 성호국민학교장 등이 합의하에 동 교내에 보습학원을 병설하기도 했다.

 

<1939년 마산 야학교 졸업사진, 가운데 앉은 노인이 남전 옥기환 선생>

 

 

그러나 가장 안타까운 일은 동교 출신 생존자라고는 거의가 없고 아니면 타처로 이사갔기 때문에 졸업생 수와 졸업 횟수를 알기에는 아득한 일이다.

 

* ; 보습학원의 전임강사는 박채우, 이영석

* 부기(附記) ; 교가 곡은 일본의 용감한 수병에서 흑동동칠야중(黑東洞漆夜中) 밤이 깊은데 억만창생(億萬蒼生) 잠들어 건곤(乾坤)이 적막(寂寞)’(가사 일부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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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10.13 00:00

마산·창원 역사 읽기 (21) - 최초의 마산시장 옥기환

3. 지역의 인물을 찾아서

3-4 최초의 마산시장 옥기환

 

“마산의 역사 속에서 전후를 막론하고 옥기환(玉麒煥 1875∼1953) 선생을 능가할 사람은 찾기 힘들다.”

이 말은 평생을 언론인으로 살며 마산의 역사연구에 몰두하였던 향토사학자 이학렬(李學烈) 선생의말이다.

옥기환은 마산에서 태어났다.

민족이 가장 고통스러웠던 암울한 시기, 제국주의가 지배하는 세계질서 속에 조선이 강제적으로 편입되고, 식민지 시기를 거쳐서 분단이 고착화되는 한국전쟁이 끝나는 시기를 살았다.

집안에 대해알려진 것은 별로 없지만, 4대째 마산에 정착하며 살았던지주집안이었으며, 어시장에서 객주(客主)로 활동했다고 전해진다. 그도 지주였으며, 사업가였다.

그는 마산지역 교육발전의 버팀목이었다. 한국 최초의 야학인 마산노동야학교를 설립하고, 성호초등학교, 마산공립상업학교, 마산중학교 등 오늘날 마산의 유서 깊은 학교의 육성에 적극 관여했다.

민족자본가이기도 했다. 경제인으로서 한국인 최초로 마산에 무역회사이자 주식회사를 설립하여 마산경제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얻어진 수익을 교육에 투자하여 새로운 인재를 양성하고, 민족의 독립을 위해 사용하였던 민족자산가였다.

 

-마산 교육의 버팀목-

옥기환에 대한 기억은 일제시기 민족의 각성을 촉진하고 지역의 발전을 꾀하기 위해 교육방면에 열정을 쏟은 교육지사로서의 모습이 가장 뚜렷하다.

“인재양성이 나라와 민족의 장래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임을 인식하고 선생이 교육사업에 뛰어들게 된 것은1907년이다.

선생은 구성전(具聖傳) 등과 함께 재원을 마련하여 한국 최초의 노동야학인 ‘마산노동야학교’를 개설하고 스스로 교장에 취임하였다.

마산노동야학은 처음에는 지금의 남성동 69번지에 있는 창고 하나를 수리하여 교실로 사용하였다. 학생 수도 20∼30명에 불과하였다. 학생들은 주로 선창 어물상의 고용원이나 공장근로자, 농민, 도시빈민의 아이들이었으며 수업연한은 1년이었다.

교과목은 조선어, 일본어, 한문 등이었는데, 당시의 일반 공립보통학교가 일본어로 된 교과서에다 일본어로 수업하였던 것에 비해, 노동야학은 조선어를 첫째 과목으로 가르쳤다.

시간이 지날수록 학생과 교사 수는 늘어갔다. 교사들은 대부분 창신학교의 교사들이었으나 김철두, 명도석, 김용환 등과 같은 청년지식인도 노동야학의 교사로 참여했다.

이들은 민중의 각성과 계몽이 우리 민족을 강력하게 만드는 첫걸음이라는 것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기에 아무런 보수 없이 무료로 교육을 담당하였다.

노동야학은 수업료를 받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교재 등도 무료로 학생들에게 지급하였다. 때문에 재정적 어려움은 컸다. 경영에 참여하던 사람들이 하나 둘 떨어져 나가면서 급기야 운영비 자체를 선생이 혼자서 부담해야 했다.

191410월에는 기존의 교사(校舍)를 대신하여 마산시 창동에 교실 여섯 개의 새로운 교사를 신축하였는데, 이 때도 선생이 주도적으로 나서 1,300의 거금을 조달하여 보다 많은 학생이 신교육을 받을 수 있게 하였다.

노동야학이 번창할수록 일제의 견제도심해졌다. 일제는 ‘노동’이라는 학교명에 대해 사상적인 트집을 잡았다. 때문에‘노동야학’은 학교 이름을 마산중앙야학교로 바꿀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의 마산중앙중학교와 마산공업고등학교는여기에서 출발하였다.

 

<중앙야학교 졸업식(1939년) / 앞줄 가운데가 옥기환 선생>

 

한편 그는 야학 하나만으로는 일반의 교육수요를 충족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야학이나 일반 보통학교를 졸업한 조선인이 더 높은 수준의 교육을 위해서라도 보다 상급의 학교가 필요함을 인식하였다.

때마침 3·1민족운동 이후 일본의 조선지배 정책도 일방적인 탄압과 수탈로부터 이른바 ‘문화정책’으로 그 방향이 바뀌면서 뜻있는 조선인들 사이에서는 고등교육의 필요성과함께 그 설립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었다.

마산에서도 선생을 중심으로 지역의 유지들이 뜻을 모아 마산에 실업학교를 설립하기로 하고 기성회를 조직하였다.

이때 선생은 기성회의 회장을 맡았으며, 19211228일에 3제 마산공립상업학교를 설립하게 된다.

이는 훗날 5년제의 정식 상업학교(지금의 마산용마고등학교)로 승격하게 된다. 이 때도 선생은 기성회장을 맡았다.

그밖에도 선생은 19215월 마산구락부 평의장으로 있을 때, 마산구락부에서 운영하던 마산학원과 마산여자야학교에 당해 년의 운영비로 200원을 기부하였고, 1924년에는 북간도에 있던 민족학교인 동흥중학교(東興中學校)의 확장을 위한 모금운동을 전개할 때 마산지방을 방문한 김홍선 등에게 지역인사들과 함께 약300원에 가까운 자금을 제공하였다.

1927년 신마산을 근거지로 삼은 조선인들이 중심이 되어 마산고등보통학교 창립기성동맹회를 조직하여 그 설립 준비운동을 진행하였는데, 이때도 이우식, 구성전 등과 함께 각각 1만원을 기부하기로 하였다.

결국 일제의 방해로 설립되지는 못했지만, 이후 일제가 마산중학교(현재 마산고)를 설립하는데 있어 커다란 자극제가 되었다.

특히 마산중학교의 설립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일본인이 60%, 한국인이 40%의 설립비를 부담하기로 하고 그 기성회가 결성되었을때, 선생은 한국인을 대표하여 부회장을 맡음으로써 그 실현에 기여했다.

그리고 193561일에는 선생의 회갑연 비용으로 쓸 작정이던 1,300원이라는 거금을 마산부 내의 각 공사립학교와 유치원에 극빈자 구제비로 기부하기도 하였다.

 

-성공한 사업가-

그는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과 자신이 이룩한 사업 등으로 많은 부를 축적함으로써 마산을 대표하는 부자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이런 부를 바탕으로 선생은 교육사업에 자신의 열정을 투자할 수 있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민족주의 진영과도 연결될 수 있었다.

19199월 당시 원동상회(元東商會)를 운영하고 있던 선생은 명도석, 김철두 등과 함께 경제적 자주성을 확립하기 위해 자본금 50만원으로 주식회사를 설립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이듬해에 주식회사 원동무역을 정식으로 출범시키게 된다. 이 회사는 마산에서 한국인이 설립한 대표적인 주식회사이며 무역회사로 성장하게 되며, 마산 경제사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주식회사의 모태가 된 원동상회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는 없다. 다만 1915115일 경북 달성군 수성면의 안일암에서 윤상태·서상일·이시영 등이 조직한 ‘조선국권회복단’의  자금원으로서 이들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고한다.

조선국권회복단과 원동상회가 관계를 맺게된 것은 마산을 근거로 활동하였던 민족주의자이자 국학자였던 안확(安廓)에 의해서였다.

안확과 원동상회간의 연결고리를 찾기는 쉽지 않다. 그러나 안확이 일찍이 창신학교의

교사를 지낸 경험이 있는데다가, 이 학교 교사들이 ‘마산노동야학’에 참여하였던 것이 인연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원동상회 운영자인 옥기환은 일찍부터 노동야학을 개설하는 등 지역사회에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데 힘쓰고 있었기 때문에 이 노동야학을 중심으로 안확과 옥기환과의 연결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원동상회가 조선국권회복단의 ‘자금원’으로서 기능할 수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원동상회와 조선 민족주의자들과의 관계는 원동무역회사가 성립된 이후에도 계속된 듯 하다.

그 구체적이고 명확한 관계는 현재의 상태로는 밝히기 어렵지만, 태평양전쟁의 발발과 함께 전시경제통제의 강화로 이 회사가 문을 닫기 전까지 해외의 독립운동단체에 회사의 이익금 중 일부를 꾸준히 독립운동 자금으로 보내왔다는 사실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

 

-초대 마산시장으로-

일제시기 교육과 경제인으로서의 옥기환의 업적은 마산의 역사에서 길이 남을 만한 것이었다.

그와 같은 선생의 업적은 마산의 지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기에도 충분했다. 그것은 선생이 미군정의 초대 부윤으로 추천되었다는 것에서도알수있다.

194512월에 마산에도 미군정청이 정식 발족되었다. 당시 미군정은 미군이 맡은 미군정 부윤 외에 한국인 부윤을 임명하여 양두체제를 갖추었는데 이 체제는 19473월 군정이 2선으로 물러날 때까지 계속됐다.

이 시기로부1949621일까지 마산부엔 4명의 부윤이 있었다. 그 초대 부윤으로옥기환 선생이 임명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선생은 약 5개월 간(19451215일부터 1946514일까지) 군정의 부윤직을 맡았다.

당시 군정 부윤은 행정이야 별문제로 여기지 않았으나 어수선한 당시 사회분위기의 안정을 위해서는 덕망있고 지역민으로부터 신임을 얻고 있는 지역 인사의 도움이 필수적이었다.

군정부는 여러 사람의 추천으로 선생을 한국인 부윤에 임명하였다. 그렇지만 선생은 군정부윤을 비롯한 부내 유지와 부청관계자들의 집요한 요청에도 수락을 완강히 거절하였다.

이에 군정청에서는 7번째로 선생을 찾아가 “당신에게 당신 나라 일과 당신이 사는 사회의 일을 해달라는데 거절할 수 있느냐”고 강하게 다그치며 민족감정을 자극하자 선생은 마침내 그 직을 수락하였다. 그나마 그것도 마땅한 인물이 나타날 때까지 몇 개월만 맡겠다는 조건부 수락이었다.

또한 초대 마산시장으로 추천되기도 했다. 주위의 요구를 뿌리칠 수 없었던 그는 시장직을 맡기도 했다. 그 역시 다음을 위해 스스로 물러날 줄 아는 아름다운 미덕을 갖고 있었다

그에게도 일제에 협력했던 발자취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대부분의 민족자본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일제에 대해 굴신(屈身)의 모습을 보였다는 점이다.

1911년 마산경찰서장이 조선인의 풍기교정과 공익증진을 위한다는 명목으로 전국 최초로 발기한 교풍회(矯風會)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일이나, 명치신궁(明治神宮) 봉찬회(奉讚會)에 많은 성금을 기탁하고 부협의원(府協議員)으로활동하였다는점등이그것이다.

이러한 점들은 분명 지적하고 넘어가야 할 문제이다.

역사 인물의 평가에서 지나치게 공만을 드러내고 허물을 감춘다면 그 또한 일종의 역사왜곡이다. 또한 너무 허물만을 강조하여 그 사람의 역사적 평가마저 부정한다면 그 역시옳지 않다.

옥기환 선생은 일제의 억압 속에서 살았던 인물이다. 그런 와중에서도 그는 교육과 경제계에 큰 업적을 남겼다.

특히 교육계에서 그의 활동은 당대뿐만 아니라 해방 이후 마산지역이 민주성지로 우뚝 서는 데 깊은 영향을 미치었다.

그가 세웠던 노동야학의 교사들과 졸업생들은 일제시기 마산지역의 민족운동과 해방 후 3·15, 4·19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였던 것이다.

사회의 행복은 그 사회가 존경할만한 인물을 얼마나 많이 보유하고 있는가에 따라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볼 때 마산의 역사 인물 발굴은 더없이 중요한 사업의 하나라 생각되며, 선생에 대한 공과의 연구도 그런 차원에서 보다 심도있게 이루어져야할 것이다.<<<

김원규 / 당시 경남대학교 박물관 학예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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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오동추 2014.11.08 10:20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마산이 그나마 민족정기를 이어받은 유서깊은 도시가 되는데는 이와같은 인물들이 있었기 때문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아무 특징없는 지리멸렬한 도시중의 하나였을 것입니다.

2014.10.06 00:00

마산창원 역사 읽기 (20) - 창씨개명 거부한 민족자산가 명도석

3. 지역의 인물을 찾아서

3-3 창씨개명 거부한 민족자산가 명도석

 

마산 진동 신기리 죽전마을 야트막한 뒷산 양지바른 곳에 묘 2기가 있다. 허당 명도석은 그의 부인과 함께 나란히 누워있다. 그의 사위인 김춘수가 지은 묘비문이 있다.

 

선생께서 남기신 항일투쟁 발자취는 크고도 뚜렷합니다. 일본인이 장악하고 있던 마산어시장에서의 상권투쟁(商權鬪爭), 노동야학교에서의 후진교육(後進敎育), 기미독립만세항쟁(己未獨立萬歲抗爭)의 마산에서의 주도, 동아일보 창립주주로 민족계도사업(民族啓導事業)에 참여 및 만주 땅 안동(安東)에서의 거사모의사건(擧事謀議事件)으로 체포되어 평양에서 치르신 옥고(獄苦), 밀양 폭탄사건(爆彈事件) 거사자금 전담(專擔), 의열단(義烈團) 경남거점조직을 주재(主宰), 일본에의한 창씨개명(創氏改名) 강요를 끝내 거부, 조선건국동맹(朝鮮建國同盟) 경남조직책 담당, 마산경찰서 갑종요시찰인(甲種要視察人)으로서 구금 10여 차례 등 이루 헤아릴 수가 없습니다.

 

그는 18854월 마산에서 태어났다.

옥기환과 구성전이 설립한 마산노동야학에 참여하면서부터 지역사회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다.

조선의 독립을 위해 고난의 세월을 보냈다. 그 결과로 1990년에는 독립지사로서의 공훈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追敍)받았다.

 

 <명도석 선생의 묘역>

 

-고난에 비켜서지 않고-

 

어시장 객주 출신으로 구마산 어시장 상민조합의 총무를 역임한 선생의 이름이 기록에 처음 나타나기 시작한 것은 19077월 설립된 마산노동야학교의 교사생활 부터이다.

암울한 조국의 현실에 깊은 우려를 나타내며 후진양성을 통해 민족의 운명을 개척하고자 하는 취지에서 설립한 민족학교였다.

 

학교생활을 계기로 김철두, 이형재, 김용환, 김명규, 김종신, 팽삼진 등과 같은 뜻 있는 젊은이들과 자연스럽게 교류하게 되었고, 마산의 민족운동을 주도적으로 이끌게 되었다.

또한 선생은 마산지역의 3·1운동을 주도하기도 하였다. 312일 지역인사들과 사전에 모의하여, 321일 장날을 기해 거사를 일으키기로 계획하고 자금을 지원하는 한편, 거사 당일에는 군중과 함께 태극기와 ‘대한독립’이라고 쓴 큰 깃발을 앞세우고 독립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며 시위행진을 주도하였다.

1920년 가을에는 미국에서 항일활동을 전개하던 박용만의 밀사와 중국 봉천성의 안동에서 만나 항일운동의 방향을 논의하던 중 일본 경찰에 발각, 체포되어 평양으로 이송되었다. 그러나 당시 일본 경찰측은 충분한 증거를 확보하지 못하여, 다행히 6개월만에 석방될 수 있었다.

그의 민족주의자로서 가장 두드러진 활동은 신간회 활동이었다.

신간회는 합법적인 운동조직이었다. 마산지회가 만들어진 것은 1927720일이고, 모두 4차례의 전체대회가 거행되었다. 명도석은 아주 핵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1927720일에 신간회 마산지회 설립대회에서 서기홍과 함께 정치문화부장을 담당하였다. 19281228일에 열린 제2회 정기대회에서는 회장직을 맡았으며, 19298월에 열린 ‘복대표대회 규약개정에 따른 임시대회’에서는 대회의 최고 의결권자인 집행위원장의 직무를 수행하였다. 1930년의 제3회 정기대회에서는 집행위원에 선임되었다.

이처럼 명도석은 신간회 마산지회가 존립하던 시기에 열린 4차례의 대회에서 매번 중요 간부에 선임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신간회 마산지회에서 그가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였는지 충분히 가늠케하고 있다.

신간회 마산지회는‘언론·집회·출판·결사·교육의 자유 획득, 조선어 교육의 실시, 실업교육 실시, 노동·농민·청년·소년·부인 형평운동의 건’ 등과 같은 중앙의 일반적인 강령을 준수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사립 마산 의신여학교 동맹휴학사건에 대한 조사 검토 건’, ‘보통학교 수업료 인상 반대의 건’, ‘일반 물가 인하[減下] 운동의 건’ 등 지역사회의 문제에도 깊이 관여하며 1920년대 후반에서 1930년대 초까지의 지역사회운동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였다.

명도석은 양조장을 경영하였고 또 옥기환 등과 함께 원동무역주식회사를 운영하고 있었지만, 19233월에는 노동자 200여 명이 모인 간담회에서 내빈으로 참석하여 축사하는 등 노동운동에도 비교적 호의적인 태도를 보여주고 있었다.

이러한 행동은 마산의 진보적 지식인들로부터 신뢰를 이끌어낼수있었다.

명도석의 활동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외지 독립운동단체와의 연계이다.

양조업에서 운송업으로 사업을 전환한 이후 자신이 운영하던 운송회사의 수송차량을 만주 등지에서 활동하고 있던 독립운동단체에 은밀히 독립자금을 지원하는데 이용하기도 하였다.

그 밖에도 옥기환 등과 함께 자력갱생을 위한 터전으로 만든 원동무역주식회사를 바탕으로, 평소 친분이 두터웠던 부산의 백산 안희제와도 연락하면서 독립자금의 공급처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일제말 몽양 여운형이 조선건국동맹을 결성하자, 경남조직책을 맡기도 하였으며, 그것을 인연으로 해방 후에는 건국준비위원회(建準)의 마산시 위원장직을 맡기도 하였다.

  <창원시 마산회원구 봉암로에 위치한 명도석 선생 기념비>

 

-좌·우로부터 존경받던 민족자산가-

 

선생은 늘 “뜻은 행하되 드러내지 않고 공을 세웠으되 명예를 생각하지 않는다”는 신조를 바탕으로 평생을 살아왔던분이다.

그러한 선생의 신조 때문인지 선생은 많은 활동에도 불구하고 세간에 덜 알려져 왔는지 모른다.

생은 일제에 의해 조국의 주권이 말살 당하자 민족정신의 고취를 위해 교육활동에 종사하였고, 열악한 노동조건하에서 고통 받고 있던 노동자의 입장에서 그들을 이해하고 그들의 편에 서기도 하였다.

1920년대 후반에는 보다 적극적으로 사회운동에 뛰어들면서부터는 민립대학 발기인, 마산물산장려회(馬山物産奬勵會)의 간부를 역임하고 신간회 마산지부를 이끄는 등, 실질적으로 마산의 진보주의 운동의 중심적 인물로 성장하여 좌·우 양 진영으로부터 존경을 받아 왔다.

그런 속에서도 자신의 사업을 운영하는데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또 거기에서 발생되는 수익을 조국의 독립을 위해 사용함으로써 민족자산가(民族資産家)의 표상을 이루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일제의 탄압이 조여오던 1940년대 일제가 우리의 민족정신을 말살하기 위해 창씨개명(創氏改名)을 강요할 때도 선생은 그것을 끝까지 거부함으로써 민족정신을 굳건히 지켰던 분이다.

그러면서도 해방 이후에 잠시‘건준’의 마산시 위원장을 맡기도 하였지만, 자신의 영달을 안중에 두지 않고 자택에 은거하면서 195464일 파란만장한 일생을 접게 되었다.

그런 점에서 허당 명도석 선생은 민족을 우선하는 선각자적 정신과 국난의 시기에 자산가들이 가져야 할 몸가짐을 스스로 실천하였다는 점에서 민족의 사표로서, 또 마산의 정신적 지주로서 길이 남을 만한 자취를 남겼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와 같은 그의 행적에도 불구하고 몇몇의 관심을 제외하고 지역사회에서 그에 대해 알고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

지역사회에 대한 애정과 관심은 어쩌면 지역 출신의 인물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출발한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묘비명은 이렇게 끝 맺고 있다.

 

집요한 감시와 위협 다 견디시고 온갖 간교한 회유, 모함 다 물리치시고 오직 광복의 그날 나라와 겨레가 질곡(桎梏)의 그 깊은 구렁에서 풀려날 그 날이 머지 않아 반드시 올 것을 굳게 믿으시고 또한 그런 그 신념을 끝내 버리거나 굽히지 않으신 선생 광복회천(光復回天)의 이 더 밝고 높푸른 하늘 아래 이제 고이 잠드소서.<<<

 

문은정 / 당시 경남대학교 박물관 학예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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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8.25 00:00

마산·창원 역사 읽기 (14) - 일제하 치열했던 민족해방운동

2. 청동기시대에서 10·18까지

2-7 일제하 치열했던 민족해방운동

 

1876년 조선이 강제적으로 세계자본주의체제에 편입된 이후 마산지역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일본인들과 친일 조선인들에 의해 잠식당하였다.

원래 마산은 개항 이후 러시아와 일본의 조차지 경쟁이 치열했던 까닭으로 개항 초기부터 외세에 의한 피해가 컸던 지역이었다.

특히 마산은 항구를 끼고 있었기 때문에 해상운송부문 및 어항과 관련한 상업부분을 잠식하기 위한 일본 상인들의 침략이 노골적으로 진행되어 마산은 일본인의 소굴로 변해 갔다.

1911년 일제는 마산항의 개항(開港)을 폐쇄하고 일본과의 단독무역만을 허락하였다. 그 결과 마산은 조선의 쌀을 비롯한 각종 물자를 일본으로 실어나르는 전초기지 역할을 하였고 동시에 일본의 소비재를 수입하는 창구로 변질되어 갔다.

<일본으로 반출하기 위해 쌓아둔 인천항의 쌀가마니>

 

또한 일제는 과거 일본인 조계지를 중심으로 본격적인 식민도시를 건설하기시작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에 대응하는 마산사람들의 저항도 점차 그 강도를 더해가게 되었는데, 시장권과 매축권을 수호하기 위한 운동과 어용단체 신상회사(紳商會社) 철폐 및 국채보상운동 등이 그 한 예이다.

또한 마산의 토착 상인들은 일본상인들과 대결하기 위해 민의소와 조선인 상업회의소를 만들어 일본의 경제적 침략에 대응하기도 하였다.

 

-‘천황만세’를 거부한 창신학교 학생들-

1910년 조선을 완전식민지로 만든 일제는 조선인의 저항을 막고 영구적인 지배를 위해 무단통치라는 극악무도한 지배방식을 택하였다.

그러나 일제의 침략에 대한 조선인들의 저항은 의병전쟁의 패배로 그 힘이 약화되어 본격적인 투쟁을 하기에는 역부족이었으며, 많은 사람들이 점차 독립에의 꿈을 버리고 일제에 굴복하는 경우가 많았다.

마산의 민의소와 조선인상업회의소에 관계하였던 많은 조선인 자본가들도 자신들의 입지를 위하여 일제에 굴복하였으며, 일제를 칭송하였다.

나아가 그들은 대표적 친일단체 마산교풍회를 설립하고 민중들을 통제하는 앞잡이 역할을 하였는데, 김병선, 손덕우, 김선집, 옥기환 등이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그들은 한말 이후 교육과 계몽을 통해 마산의 근대화에 앞장선 점도 있지만, 또한 친일의 길을 걸어갔던 것도 사실이었다.

이들에 비해 같은 자본가였지만, 비밀결사를 조직해 일제에 저항한 조선인 상인들도 있었다.

1910년대의 대표적인 민족해방운동 비밀결사조직인 ‘조선국권회복단 마산지부’의 지부장 안확, 이형재, 김기성, 배중세 등이 그러하였다.

뿐만 아니라 창신학교와 의신여학교 그리고 마산노동야학교에 관계했던 많은 사람들도 1910년대의 어려운 조건 속에서도 독립에의 꿈을 포기하지 않았다.

1911년에 일어난 창신학교 학생들의 항거사건은 그 좋은 예라고 할 수있다.

1911년 조선침략의 우두머리였던 일본국왕 명치(明治)가 죽고 대정(大正)이 즉위하자 일제는 이를 기념한다는 명목 하에 각급 기관과 학생들을 동원하여 시가행진을 벌였다.

이 과정에서 천황만세를 소리 높이 외칠 것을 주문한 일제에 대해 당시 행사에 동원되었던 창신학교 학생들은 호응하지 않고 일제에 저항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제의 기마경찰과 충돌한 학생들은 일제 경찰들을 공격하여 자산천(지금의 무학초등학교 옆 개울)에 밀어넣어 버렸다. 이 일로 창신학교는 많은 곤욕을 치룬 것으로 알려졌다.

일제에 강점당한 이후 국내에서는 일제에 반대하는 투쟁이 계속되었지만, 대부분의 투쟁은 일회적인 것이었고 조직적으로는 전개되지 못하였다.

그러19193월 만세시위는 그 사정이 달랐다. 그 시위는 일제를 놀라게 하였고 독립을 위한 조선인의 기개를 만방에 드높인 것이었다.

당연히 마산에서도 시위는 조직되고 시도되었다. 마산의 3·1운동은 기독교 계열과 연계되어 있던 이갑성(민족대표 33가운데 1인)과 임학찬 등이 중심이 되어 시작되었지만, 비밀결사 대동청년단 세력과 연결이 되고 있었던 김용환, 이형재 등 전투적 민족주의자들도 큰 역할을 하였다.

이 밖에 창신학교와 의신학교의 교사였던 이상소와 박순천 등도시위를 계획하거나 주도하였다.

만세 시위의 주 참가자는 창신학교와 의신여학교, 마산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을 중심으로 마산 시민과 인근 지역의 농민 등 광범위한 대중들이 참가하였다.

특히 마산의 시위는 33일 두척산(무학산) 시위를 필두로 321일, 325일, 331일 등 4차례 이상의 대규모 시위가 일어났으며, 4월에는공립보통학교의 학생들도 만세시위를 감행하는 등 어느 지역 못지 않게 그 열기가 뜨거웠다.

그러나 일제는 김용환, 이상소, 박순천 등 48명을 감옥살이를 시켰으며, 특히 김용환은 일제의 심한 고문으로 감옥에서 옥사할 정도로 그 기개가높았다.

3·1 운동 이후 국내외를 막론하고 전민족적인 민족해방과 독립에의 열기가 고조되고 있었지만, 민족해방운동 진영에서는 운동의 방법론을 둘러싸고 운동세력들이 나뉘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대개 실력양성을 통해 점진적인 독립을 추구하는 세력과 일제에 대한 전면적인 항쟁을 통해 즉각적인 독립을 추구하는 세력으로 나뉘어졌다.

그러한 상황은 마산지역도 마찬가지였다. 마산지역에서도 3·1동 이후 실력양성론을 추구하는 사람들에 의해 이른바 ‘문화운동’이 활발하게 일어났다.

이들은 19206월경 마산지역 문화운동의 구심점으로‘마산구락부’를 창립하고 교육·체육·계몽·교류활동 등을 활발하게 벌여 나갔다.

마산구락부를 만든 사람들은 과거 마산 민의소의 회원들이 많았으며, 손덕우, 옥기환, 김치수 등 대개가 상인을 비롯한 지주 출신의 자본가들이었다.

이들은 마산학원과 마산여자야학을 설립하여 정규학교에 가지 못한 아이들을 교육하였다.

또한 조선인 전용의 운동장을 만들어 각종 체육행사를 열었으며, 강연회, 토론회 등도 개최하는 등 적극적으로 문화운동에 나섰다.

밖에도 마산지역의 문화운동을 이끌었던 단체로 기독교 계통의 면려청년회와 면려청년회를 지원하던 문창예배당(교회)도 큰 역할을 하였다.

 

<1901년 설립된 마산문창교회의 1919년 모습>

 

그러나 마산지역의 문화운동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1922년 이후에는 극심한 침체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것은 1920년 이후의 경제공황과 더불어 조선인 자본가들의 자금력에 문제가 생겼기 때문이며, 또 일반 대중을 조직과 사상면에서 이끌어 갈 수 있는 힘이 부족하여 더 이상의 발전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마산지역 문화운동의 집회장소로 자주 이용되던 문창예배당을 교회측이 더 이상 집회장소로 사용하지 못하게 한 것은 문화운동이 대중과 분리될 수 밖에 없었던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예라 할 것이다.

 

-사회주의가 주도한 노동·농민 운동-

한편 문화운동을 주도하던 민족주의 계열의 인사들이 민족해방운동전선에서 이탈할 즈음 마산지역에서는 사회주의사상으로 무장한 사람들이 새롭게 등장하고 있었다.

김명규, 김형두, 손문기, 이주만, 이근우 등은 19221111일 ‘신인회’라는 사상단체를 조직하였다.

사상단체란 1920년대 전반기 사회주의 사상을 중심으로 한 진보적 사상을 연구하며 노동운동과 농민운동 등 대중운동을 지도했던 단체로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에서는 특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신인회는 19238월 조직을 확대하여 혜성사(살별회)로 개편되었는데, 신인회와 혜성사의 초기 회원 중에는 민족해방과 새로운 사회 건설이라는 1920년대 사회주의 운동의고유한 목표와는 거리가 먼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혜성사의 조직 이후 혜성사의 주요 조직원들은 사회주의 사상의 본격적 연구와 전파, 그리고 성장하는 노동·농민운동을 비롯한 민중운동을 지도하려고 하였다.

 

<1921년 준공된 마산 경찰서>

 

1924년 마산노동 동우회를 통하여 경남지방의 노동·농민운동 단체를 ‘조선 노동 총동맹’에 가입시킨 것은 이들의 활약에 힘입은 바가 컸다.

또한 노동자를 대상으로 하는 각종 강습회를 개최하였으며, 동경대지진 학살 동포에 대한 추도 및 기근 구제활동 그리고 지역내부의 파업활동에 대한 지원 등 여러가지 사회활동을 전개하였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1925년 건설되는‘조선공산당’에도 적극 참여하여 조선공산당 마산 야체이카(세포 -당원)가 되었다.

특히 김영규와 김형선은 1926년 조선공산당의 경상남도 집행위원회의 당과 공산청년회의 책임자가 되었는데, 이러한 사실은 신인회와 혜성사 출신의 민족해방운동가들이 경남지역에서 어떤 위상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알게 해준다.

그러나 1926년 조선공산당이 계획하고 주도한 6·10만세운동의 준비과정에서 김명규, 김기호 등 10명이 검거되고 김형선은 상해로 탈출을 하게 되는데, 지도부가 검거되자 마산지역의 조선공산당 활동은 사실상 중단되게 되었다.

이것은 일제의 가혹한 탄압에 따른 결과이기도 하겠지만, 당원의 대부분이 일제에 쉽게 노출될 수 있는 대중단체의 간부직에 있었던 그들 자신들의 잘못된 활동 때문이기도 하였다.

일제하 마산지역에서는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계열 외에도 아나키즘(무정부주의)계열의운동도 존재하였다. ‘마산 아나키스트 그룹’이 바로 그들이다.

마산 아나키스트 그룹은 1925년 김형윤을 중심으로 조한응, 김계홍 등이 최초로 시작하였는데, 본격적 활동은 1927년 서울에서 ‘김산’이라는 무정부주의자(직업은 목사)가 내려오면서 시작되었다.

이들은 외국인 선교사나 일제로부터 벗어난 자주적인 독립교회 활동을 전개하여 대중들의 지지를 많이 받았다.

대중의 지지를 확보한 마산의 무정부주의자들은 창원의 무정부주의 단체인 ‘창원 흑우연맹’과 연계하여 무정부주의에 관한 서적을 탐독하면서 일제에 저항하는 반제국주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1928년 상해에서 개최된‘동방 무정부주의자 연맹 결성대회’에 회원인 이석주를 파견하여 국제단체와 연계하기도했다.

그러나 마산과 창원에서 활동하던 이석주가 일제에 체포되면서 김형윤 등 다른 조직원들도 검거되어 마산아나키스트 그룹의 활동은 현저히 약화되었다.

일제하 마산지역에서는 이후에도 일제에 대한 저항을 멈추지 않았다.

1929년 조선전역을 강타한 광주학생운동의 여진 속에서 발생한 ‘친일교사 배척운동’ 시위사건과 1937년 신사참배거부를 주도했던 마산 창신학교의 학생들은 폐교가 될 때까지 일제에 대한 저항을 계속하였다.

이외에도 수없이 많은 노동자·농민 등 생산대중의 일제에 대한 투쟁도 일제하 마산지역의 민족해방운동에서 당당히 그 역할을 다했다고 할 것이다.

1960년대와 1970년대 이승만 독재와 박정희 독재정권에 대항하는 민주화운동의 성지로자리잡은 마산의 역사적 위상은 바로 일제의 억압에 굴하지 않고 치열한 저항정신을 보여준 마산인들의 역사적 경험에서 이미 예고되었다고 해야할 것이다.<<<

신춘식 / 당시 동아대학교 사학과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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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15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1) - 강점제3시기

<강점3시기 마산의 교육기관>

1941년 간행된『약진마산의전모(躍進馬山の全貌)』와『마산개항백년사』에 게재된 내용에 의하면 1930년대 마산의 교육기관은 공립으로 마산공립중학교․마산공립상업학교․마산공립고등여학교가 있었습니다.

반면 사립으로는 창신․호신․의신학교․마산노동야학교 등이 있었으며 초등교육기관으로서 마산공립심상고등소학교․마산성호공립심상소학교․마산완월공립심상소학교가 있었습니다.

유아교육기관으로는 사립마산유치원과 사립대자유치원 등 몇 개의 시설이 있었으며 종교기관에서 사회교육차원에서 행한 교육시설도 있었습니다.

현 마산고등학교의 전신인 마산공립중학교는 1936년 개설하였으며 입학생의 대다수가 일본인이었습니다. 한국인 학생은 친일파 자제이거나 성적이 우수한 극소수의 학생만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반면 마산상업고등학교를 거쳐 몇 년 전 용마고등학교로 바뀐 마산공립상업학교는 대부분 한국 학생들이었습니다.

1922년에 개교한 마산공립상업학교는 1939년 수학연한 5년제 상업학교로 바뀌었으며 1940년에 이르러 지금의 자리로 이전했습니다. 이 학교는 1941년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자 수학연한을 4년으로 단축하였고 1942년에는 신입생의 50%가 일본인 학생으로 채워지기도 했습니다.

다음 사진은 마산공립상업학교가 현재 자리로 옮기기 전 건물입니다.

 

 

마산공립고등여학교는 1927년 수학연한 5년제의 고등여학교로 개정한 현 마산여자고등학교의 전신입니다. 입학생은 주로 일본인이었으며 한국인 입학은 매우 어려워서 전체 재학생 수의 20%에도 못 미쳤습니다.

1932년 공사비 36,000원을 들여 기숙사를 지었는데 이 기숙사가 전국의 모범이 되어 각 지에서 온 시찰단이 끊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마산고녀는 1936년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습니다. 특히 1937년에 준공한 대강당은 기숙사와 마찬가지로 전국적으로 이름이 드높아 부인회 등 그 밖의 집회에도 자주 이용되어 부민들이 편리하게 이용하였다고 전해진다. 여기에서 말하는 부민(府民)이란 당시 마산에 살았던 일본인을 말합니다.

다음 사진은 마산고녀 이전 개교기념식 장면입니다.

 

 

 

하지만 창신학교에서 고등과로서 분리된 호신학교(濠信學校)가 1932년, 창신학교는 1939년에 문을 닫았고 여학교였던 의신학교도 이 시기에 문을 닫았습니다.

노동야학은 강점3시기에도 활기가 넘쳤습니다. 사설교육기관이었던 마산노동야학은 그 전통이 깊습니다.

1907년 시작된 마산노동야학은 1931년에 교사를 신축했습니다.

옥기환교장이 지역유지들과 협력하여 6,000엔의 교육기금을 마련하여 중성동에 있는 전답 1,000여 평을 사들여 여기에 5개의 교실과 사무실․회의실 및 2동의 사택 등이 있는 신교사(新校舍, 전 영남자동차학원자리)를 지었습니다. 원래의 노동야학교이었던 창동 교사는 마산여자야학교의 교사로 이용되었습니다.

이 외에 일본인이 운영한 복수야학회도 있었습니다. 일본 조동종복수사(曹洞宗福壽寺)의 사회교화사업으로서 광영박명사(光英博明師)가 경영하였습니다. 한국인 자제를 대상으로 했으며 1924년 교사 신축을 하였습니다.

현재의 성호초등학교인 공립보통학교는 1938년 학교명이 마산성호공립심상소학교로 바뀌었습니다.

그러다가 한국인 가정에서 자녀들에 대한 교육열이 높아지면서 학생들의 숫자가 늘어나자 통학거리 등을 감안하여 완월동에 분교를 설치하였는데 이 분교는 1938년 마산완월공립심상소학교로 독립 개교하였습니다. 지금의 완월초등학교입니다.

1904년에 일본인거류민회에 의해 발족된 마산공립심상고등소학교는 1936년 4월에 마산공립중학교가 설립된 이후 고등과를 폐지하고, 1938년경부터 마산포(원마산)에 사는 일본인 자녀 1․2․3학년에게 통학상의 편의를 위해 자산동에 분교를 두었습니다. 그 분교가 지금의 무학초등학교입니다.

마산공립심상고등소학교는 일본인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개항 직후부터 패망까지 운영된 마산 유일의 일본인 학교로서 현재의 마산월영초등학교 전신입니다.<<<

 

 

2012/07/3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0) - 강점제3시기

2012/08/0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1) - 강점제3시기

2012/08/1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2) - 강점제3시기

2012/08/2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3) - 강점제3시기

2012/08/2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4) - 강점제3시기

2012/09/0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5) - 강점제3시기

2012/09/1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6) - 강점제3시기

2012/09/1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7) - 강점제3시기

2012/09/2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8) - 강점제3시기

2012/10/0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9) - 강점제3시기

2012/10/0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30) - 강점제3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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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12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8) - 강점제2시기

<회사령 폐지와 마산도시변화>

1920년 4월 ‘회사령’이 폐지되었습니다.

‘회사령’은 1910년 12월 30일 조선총독부가 공포해 3일 만인 1911년 1월 1일부터 시행한 ‘기업통제령’입니다.

분문 및 부칙 20개조로 되어 있는 회사령의 주요 내용은 한국에서의 회사설립 및 한국 외에 설립된 회사가 한국 내에 지점을 설치코자 할 때는 조선총독부의 허가를 받아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회사령’의 표면상 이유는 한국의 산업을 위한다는 것이었으나 그 본질은 식민지인 한국에 일본 국내공업과 경합되는 근대공업을 억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한국의 기업 성장을 억제하고 한국을 일본자본주의를 위한 원료공급지로, 상품판매시장으로 육성한다는 의도로 만든 규정이었습니다.

회사령은 1910년대 내내 한국 내에서 한국 사람들이 마음대로 기업을 할 수 없게 통제함으로써 한국의 산업 발전에 큰 저해요소가 되었습니다.

이 법령 때문에 1910년에서 1920년 사이 10년 동안은 공업발전의 지표로 삼을 수 있는 도시인구증가율이 연평균 1.6%로 총인구 증가율 2.6%보다 1% 정도 낮았습니다.

이와 같은 ‘회사령’이 폐지되자 일본 자본가들이 대거 한국으로 진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마산에도 영향을 끼쳐 일본인들이 기업을 앞세워 본격적으로 원마산에 진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뿐만아니라 회사 설립을 마음에 두고 있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던 마산의 한국 자본가들도 회사를 설립하였습니다.

1920년대 초기 마산의 회사 설립 상황을 보면 주식회사마산정미소(1919년 10월 15일 설립, 자본금 10만원)․남선양조주식회사(1919년 11월 14일 설립, 자본금 10만원)․마산창고주식회사(1920년 5월 2일 설립, 자본금 10만원)․원동무역주식회사(1920년 5월 16일 설립, 자본금 50만원)․마산운수합자회사(1922년 9월 1일 설립, 자본금 7천원) 등입니다.

이 중 대표적인 한국인 무역회사가 원동무역주식회사입니다.
아래 사진은 1928년 신축한 남성동 원동무역 사옥의 당시 모습과 현재의 모습, 그리고 원동무역 터 앞에 세워 놓은 표지석입니다.
 


이 회사는 마산 경제계에 진출한 최초의 한국인 주식회사였으며 회사의 대표는 지역 유지 옥기환이었고, 업무는 육산부․해산부․위탁부․부대사업 등이었습니다.

옥기환 선생은 마산 지역에서 추앙받던 지도자로 일찍이 노동야학과 민족교육에도 관심이 높았으며 원동무역의 수익금으로 상해임시정부를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해방 후 미군정기에 초대 마산부윤(시장)을 지낸 분입니다.



1910년대에는 한국인 회사가 단 하나도 없었고 1923년 이후로도 회사 설립은 드물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때의 회사설립에 대한 지역사회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회사령 폐지에 따른 마산지역의 산업화는 도시변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1920년대 중반 쯤 부터 원마산(마산포)에 대대적인 도로개설공사가 일어났으며, 필요한 산업용지를 확보하기 위해 마산 앞바다가 매립으로 메워졌습니다.
그리고 신마산과 원마산으로 나누어져있던 두 도시의 중간지역(중앙마산, 도립의료원 일대)이 개발되기 시작합니다.<<<


2011/11/2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5) - 강점제2시기
2011/11/2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쳔사 (86) - 강점제2시기
2011/12/0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7) - 강점제2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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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장복산 2011.12.12 16:55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1928년이면 83년 전에 세원진 건물이군요. 표지석을 세워 둔 것으로 보아 역사적 의미가 매우 큰 건물인데...점점 원형을 일어 가고 있군요. 이런 의미 있는 건믈을 의미 있는 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방안은 없을지 궁금합니다. 예를 들면 개인 노래방이나 영업장 말고 상공회의소 건물 같은 공공성이 있는 건물로 사용하면 보존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 허정도 2011.12.12 23:24 신고 address edit & del

      요즈음 진해 일로 너무 신경을 많이 쓰는 것 같습니다. 제가 뭘 도와 드릴까 생각하지만 해드릴 것이 없습니다. 미안합니다, 선생님.

2010.11.08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1) - 개항이후


<성호, 창신, 근대식 학교가 서다>

마산 최초로 근대식 학교가 섰습니다. 
창원군에 있던 소학교가 마산으로 이전하면서 개설한 공립소학교로, 현재의 성호초등학교입니다. 1901년 4월에 개교하였으며 한국인들이 다녔습니다.

마산공립소학교는 1904년에 지방 유지들의 성금 2,000여원으로 교사(校舍)를 지었고 1911년 마산공립보통학교로 교명이 바뀌었습니다.
아쉽게도 1904년에 지은 교사의 사진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아래 사진은 1927년에 벽돌조 2층으로 지은 교사입니다.



일본인을 위한 최초의 정식 교육기관은 마산심상소학교(현 월영초등학교)입니다.

1902년 11월 조계지 내 남쪽 끝 해안의 한옥을 한 채 빌려 일본불교 정토종 개교사(開敎師) 삼우전지문사(三隅田持門師)가 마산포일본인소학교를 세웠는데 1904년 6월 마산심상소학교가 설립되자 합병하였습니다.

그러다가 1906년 9월 마산거류민단의 단립(團立)「마산심상고등소학교」로 바뀌었고 1908년 2월 지금의 월영초등학교 자리에 교사를 지어 준공했습니다.
마산심상고등소학교의 고등과가 후에 마산중학교(현 마산고등학교)가 됩니다.
아래 사진이 1908년에 건축한 마산심상소학교입니다.



이 두 학교 외에 1906년 5월, 마산포 성호리 교회당(현 문창교회)에 독서숙이 설치되었는데 이것이 사립 창신학교의 전신입니다.

「창신」이라는 이름은 1908년 9월부터 사용하였지만 사립학교령에 의해 정규학교의 인가을 받은 것은 1909년 8월 19일이었으며 남녀공학이었습니다.

창신중고등학교가 2008년 9월에 개교100주년 행사를 가진 것은 창신이라는 교명을 사용한 날을 창신학교의 시작으로 보기 때문입니다. 

외국의 원조와 마산 및 부산․통영․의령․함안 등지의 유지들의 도움으로 같은 해 상남동에 양옥을 짓고 낙성식을 가졌습니다.

아래 사진은 개교 후부터 1912년 5월까지 창신학교 초등과 교사로 사용했던 마산포 교회 예배당 건물이며 그 아래는 창신학교 설립인가서입니다.



이런 공식적인 교육기관 외에 원마산(마산포) 주민 스스로 교육기관을 만들었습니다.
1907년 7월 10일 개교한「마산노동야학」이 그것입니다.
노동야학이 전국적으로 확산된 것은 1920년대였는데 마산은 아주 빨랐습니다. 「마산노동야학」은 전국 최초였습니다.

나중에 마산 최초의 주식회사인 '원동상사'의 대표가 되는 민족자본가 옥기환 등이 설립한 이 학교는 남성동 69번지에 있는 창고를 수리하여 1년 과정으로 한국어․일어․산술․한문 등을 무료로 가르쳤습니다.

노동야학의 학생들은 주로 선창 어물상의 고용원이거나 공장노동자․농민․도시빈민의 자식들이었습니다.
교사의 대다수는 창신학교의 교사와 마산의 청년지식인 및 보통학교 졸업생들이었는데, 무보수였고 교육방침은 억압받는 민중의 각성과 계몽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창신학교 다음으로 설립한 사립학교는 성지학교입니다. 현 성지여자중고등학교의 전신으로 1910년 10월 24일 외서면 완월리에서 시작하였습니다.

 한편, 개항과 함께 일본의 불교도 마산에 들어왔습니다.
1902년 정토종 포교소가 설치되었고 이어서 서본원사 출장소(1903년 3월), 진언종 풍산파 마산포교소(1908년 8월), 일련종(1909년 3월), 조동종 포교소(1909년 8월), 천리교 마산포교소(1910년 4월) 등의 일본 사찰이 섰습니다.
이들은 일본인을 상대로 포교활동을 하면서 마산의 불교신도들에게도 포교활동을 펼쳤습니다.<<<




2010/10/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6)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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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11.25 00:32

250년 된 원마산(마산포) 골목길



「유장근 교수의 도시탐방대」 세 번째 참석 후의 글이다.
원마산(마산포)에 자연취락이 형성되면서 생긴 ‘길’에 대한 이야기다.

1760년, 마산창(馬山倉)이 설치된 후 마산이 도시 형태를 띠면서 도시공간의 성격도 형성되었다.
요즈음 말로 하자면 마산창 주변은 공공업무지구로, 현재 황금당 옆 골목길 주변은 상업지역으로, 동성동과 오동동 즉 코아양과점 뒤편 일대는 배후 주거지로 사용되었다.

‘·······사람이 다니면서 길이 생겼다’는 루쉰의 말처럼,
마산포에도 사람이 모이고 사람이 다니면서 ‘길’이 생겼다.
자연취락 특유의 좁고 꾸불꾸불한 ‘길’이었다.

<옛 마산 사람들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골목길>

지금도 생생히 남아있는 원마산의 좁은 골목길들은 멀게는 250년 가깝게는 200년이 족히 된 마산사람들의 ‘길’이다.
조선시대를 살았던 이곳 사람들이, 때로는 조창 쪽으로 때로는 해변의 선창 쪽으로 아침저녁 부지런히 다녔던 바로 그 길이다.
단지 길로서만이 아니라 마산 선인들의 숨결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삶의 흔적이기도 하다.

남성동 성당 옆 좁은 내리막 길도,
마산사람 누구나 친숙한 전설적인 떡볶이가게 ‘복희집’ 앞길도,
삼겹살로 유명한 삼도식당 골목도,
홍화집과 골목식당 길도, 아구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복잡하게 얽혀있는 동성동 좁은 골목길도,
옛 마산사람들이 걸었던 바로 그 ‘길’이다.

‘아는 것만큼 보이고 보는 것만큼 느낀다’고 했는데,
이 좁고 보잘 것 없는 골목이 ‘조선시대 길’이라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늘도 사람들은 무심코 길을 지난다.

도시탐방대원들과 골목길 내력을 이야기하고 복원도와 비교확인도 하면서 이 도시의 지난 시간을 맛보며 함께 걸었다.
간간이 들리는 옅은 탄성과 함께 탐방의 즐거움이 거리를 메웠다.



         <위 부터 남성동성당내려가는길, 삼도식당 길, 복희집, 홍화집 길>


<마산사람들의 자랑이었던 「원동무역」>

탐방길 시작한 후, 마산창(馬山倉), 매립 전 해안선, 어시장의 진동골목, 대풍골목, 서굴강, 동굴강을 지나 도착한 곳은 원동무역주식회사.

원동무역은 1919년 9월 독립지사 옥기환 선생과 명도석 선생이 마산 최초로 설립한 회사다.
현재 남성동 91-1번지에 남아 있는 사옥은1927년 8월에 착공해 1928년 4월에 준공한 철근콘크리트 2층 현대식 건물이다.
영욕의 세월을 지내고 외피만 바뀐 채 오늘도 말 없이 거리를 지키고 있었다.
설계한 사람이 누구이지 시공한 이는 또 누구인지 알길 조차 없지만 세련된 근대미의 격조 높은 이 건물은 일제기 마산포 사람들의 자부심을 한껏 채워준 건물이었다.
이 회사에서 남긴 이익금의 일부가 백산 안희제 선생에게로, 상해임시정부로 건너갔다고 한다.

옥기환 선생은 해방 후 초대 마산부윤(마산시장)을 지냈고, 허당 명도석 선생은 건준에 참여하는 등 해방 후에도 많은 일을 했다. 봉암로에 가면 허당 선생의 추모비도 있다.
마산이 배출한 주요인물 중 친일이니 친독재니 궂은소리 때문에 기념사업에 시비가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 두 분의 삶에는 흠결 있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암흑기의 자랑스러운 마산 어른이시다.


          <표지석 / 원동무역의 본래 모습 / 현 상태, 3층부분은 뒤에 증축>


<원마산 복원도 제작>

10여 년 전, 도시연구를 하면서 원마산(마산포)의 도시형태를 복원했다.
1912년 조선총독부가 공포한 사정지적도(査定地籍圖)를 이용해 분할과 합병으로 변형된 지적도의 원형을 추적해 복원하는 작업이었다.

1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지난했던 작업이 끝난 후 복원도를 들고 시내로 나갔다. 실제상황과 확인해보기 위해서였다. 현장 확인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골목골목 다니며 현장과 도면을 비교하면서 두 번 놀랐다.
도면상 복원한 작업의 정확도에 스스로 놀랐고, 복원도에 나타난 그 복잡한 골목길들이 그때까지 대부분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지난 토요일, 도시탐방대가 걸었던 길은 바로 그 때 확인되었던 길들이었다.
조그맣게 복사된 복원도와 창동 남성동의 골목길을 대조하면서 탐방대원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에 나도 즐거웠다.

<1908년 조선통감부 철도관리국에서 발행한 '마산전도' / 오른쪽 단선으로 표시한 길들이 원마산 골목길이다>


<1916년 조선총독부 육지측량부에서 제작한 '마산, 1/10,000지도' / 새로난 신작로와 원래의 골목길들이 그려져 있다.>

<복원도 / 1910년 경의 것이지만 도시계획이 없었던 시기라 조선시대로 까지 추정가능하다>
    <원마산의 옛 길 / 노란 색이 복원도에서 확인된 길인데 대부분 지금까지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뒤늦게 합류한 ‘창동의 산 역사’ 이승기 선생님의 창동과 극장과 영화에 읽힌 이야기가 분위기를 한층 더 띄웠다.
듣는 이와 말하는 이 즐겁기는 매한가지, 지나간 마산이야기에 토요일 오후가 금세 지나갔다.





<도시에서 역사란?>

마음만 먹으면 현대기술로 어떤 도시라도 만들 수 있다.
넓은 도로를 뚫고 번쩍번쩍한 건물도 짓고 키 큰 나무도 얼마든지 심을 수 있다. 그러나 도시의 역사를 급조할 수는 없다.
때문에 역사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곳이 남아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소중하게 보존해야 하고, 다음 세대에 잘 넘겨주어야 한다.

웬만큼 여행을 해본 사람이라면 잘 알겠지만 여행이란 것이 대부분 도시의 역사를 체험하는 것이다. 그래서 외국의 어떤 도시에서는 심지어 그들의 부끄러운 과거인 조계지까지도 복원하여 관광자원으로 이용하고 있다.
이처럼 도시의 역사는 단지 옛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치지 않고 그 도시의 소중한 문화자원, 관광자원으로 활용되는 것이다.
미국에서 서부 개척시대의 술집 따위들까지도 현재 사용하고 있는 집주인에게 국가재정까지 지원하면서 함부로 바꾸지 못하게 하는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이다.

마산 도시의 역사를 모두 복원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역사를 가진 도시에서 어떠한 역사적 흔적도 찾을 수 없고, 이를 위한 노력조차 하지 않는는 것은 심각한 도시적 비극이다.

창동과 동성동 일대에 남아 있는 골목길들은 자연취락을 원형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곳이며 마산의 도시역사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곳이다. 다른 도시에서는 도저히 이런 길을 만날 수 없다.
혹자는 꾸부러지고 좁은 골목길이 수치스러운 전근대적 모습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길은, 오늘의 마산이 있기까지 마산사람들이 서로 부대끼며 살았던 발자국이며 고금 모든 마산 사람들의 호흡과 땀이 녹은 생생한 기록이다.
그 역사적 가치는 어디에도 비할 바가 아니다.

한때 번성했던 마산 오동동이 최근 들어 점차 쇠퇴해지고 있는데 이곳을 살릴 길이 이 오래된 골목길 속에 묻혀있을 수도 있다.

생각해 보자.
250년이라는 긴 시간의 멋과 맛을 느낄 수 있는 ‘골목길’이 남아있다면, 우리는 어디로 가서 하루저녁 친구와 즐길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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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옥가실 2009.11.25 09:46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아침에 좋은 글 보고갑니다.
    특히 새로 작성한 원마산도로 지도가 좋습니다.
    이걸 들고 다시 옛길 탐사를 좀 해야겠군요^^

    • 허정도 2009.11.25 18:02 신고 address edit & del

      반갑습니다.
      공부해야할 것도 많을텐데 시민들을 위해 봉사하신다고 고생이 많습니다.
      언제 날 잡아서 물메기탕이나 한 번 먹읍시다.

  2. 영영사랑 2009.12.01 00:20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남성동,창동,복희집.. 떡볶이,오징어튀김.... 감동입니다. 혹시 아시는지요? 마산에는 골목이 많아 길을 잃었을때 어떻게 큰길로 나오는지? (하수구관따라 가다보면 큰길이 나왔어요 경험입니다) ?? 즐겁게 보고갑니다

    • 허정도 2009.12.01 10:40 신고 address edit & del

      하수구관 따라가 아니라 하수구 두껑따라 아닌가요?
      내 눈에는 하수구 관이 안 보이던데......
      방문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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