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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2.19 00:00

기억을 찾아가다 - 18

18. 바냇들, 부림시장

 

정전 다음해 진학한 마산서중(전쟁 중인 195191일 6년제 마산공립중학교가 3년제 마산고와 마산서중으로 분리되었다. 마산서중이 현재의 마산중학교로 교명을 변경한 것은 195557일이었다) 3년 동안엔 거의 매일 바냇들 길로 다녔었다. 등교 땐 공군병원 스리쿼터를 많이 탔지만 하교 땐 거의 빠짐없이 그 길로 다녔다.

당시엔 모든 학교가 오후 세시경이면 파했기 때문에 부림시장, 철로, 바냇들에서 구경하고 장난칠 여유가 좀 많았었다.

바냇들은 용마산과 문둥산(반월산을 두고 그 땐 그렇게 불렀다. 거기에 한센일들 집단 수용소가 있었기 때문이다) 사이 꽤 넓은 들을 말하는데 동쪽 끝은 국도2호선, 서쪽 끝은 회원동 창신농업고등학교(현 회원동 한효아파트)까지를 대강 그렇게 불렀었다.

동쪽 끝에는 신흥방직주식회사(일제 때부터 있어온, 짐작에 만여 평이 넘었던 듯한 공장. 지금 신세계백화점 남쪽)가 있었는데, 1960년대까지도 존속했던 큰 회사였다.

1956년쯤 시내쪽으로 인접해 신한가공이라는 회사가 설립되고 그 바로 옆으로 새 길이 남으로써 산호동에서 회원동까지 차가 다닐 수 있는 벌판길이 형성되었다.

들 동북쪽, 지금의 종합운동장 위치 정도에 벽돌공장이 있었고, 그 남쪽 칠팔십 미터 쯤에 네댓 채의 집과 두세 채의 집이 각각 있었을 뿐 주로 논뿐인 그야말로 허허벌판이었다.

그런데 그 들판에 대한 기억으로 배배꼬인 벼 잎이나 갈라진 논바닥이 거의 전부이고, 누렇게 물든 풍요로운 들판의 기억은 없다.

지금 생각해보니 들판 규모에 비해 수로가 너무 빈약하여 가뭄을 많이 탔던 것 같다. 수원(水源)은 무학산 밖에 없겠는데 수로가 몇 안 되고 작아 벌판 남북을 횡단해 나 있었던 철로(3·15대로) 아래쪽으로는 물이 얼마 안 흘렀던 것으로 기억된다.

<1950년대 바냇들 지도와 현재>

 

우리 동네에서 선배 세 명, 동기 네 명, 후배 한 명이 함께 다녔으므로 으레 등하교 때 두세 명이나 네댓 명이 함께 다니기 마련이었다.

학교 파하면 몽고정에서 두레박 물을 얻어 마셔가면서 철로변(3·15기념탑 옆 도도록한 지역이 구마산 역이었던 현 육호광장에서 신마산 역이었던 월포동 벽산블루밍아파트로 가는 철도 부지)를 따라 부림시장을 지났다. 시간에 쫓길 땐 철로 따라 바로 갔지만 대부분의 경우 볼거리가 많은 시장 길로 다녔던 것이다.

전쟁 중에도 그랬지만 정전 후에는 더 많은 군용물자들이 흘러나와 사람들을 많이 불러 모았다. 거기에다 온갖 약장수, 마술사 등이 재주와 속임수를 부려 사람들을 모았다. 우리들은 그런 것들을 기웃거렸고 때론 넋을 잃기도 하면서 다니는 것이 재미있었던 것이다. 보는 재미도 있었지만 그걸 배워 흉내 내는 재미도 꽤 괜찮았다.

생각나는 하나가 있다.

사오십 센티 정도의 철로 조각 위에 돌을 올려놓고 수도(手刀)로 내려쳐 깨는 위력에 감탄하며 한참 보다가 집으로 향했는데, 구마산 역을 넘어 철로타고 오다가(철로 위로 걷기를 즐겼었다) 한 친구가 그걸 보여주는 것이었다.

처음엔 우리도 어리둥절했었는데 설명을 듣고 해보니 의외로 쉬웠다. 왼손바닥 오른쪽 끝으로 돌 끝을 잡고, 왼손 등을 철로에 붙이고, 돌이 철로에서 일 센티 정도 떨어지게 하고는 오른손 수도로 돌을 내려치면 순간적으로 돌이 쇠에 부딪치면서 깨어진다. 사실상 속임수였는데 우린 그걸 또 후배들한테 써먹으면서 우쭐대기도 했었다.

일 년에 한두 번이었지만 부림시장에서 구마산 역으로 가다 들렀던 환상적인 맛집도 생각난다.

지금 백제삼계탕 앞 주차장에 있었던 중앙중학교 담벼락에 붙여 지은 판잣집 가게였는데, 젠자이(단팥죽의 일본말)에 국화빵을 찢어 넣어 먹는 맛은 그때의 우리들에겐 그야말로 꿀보다 더한 맛이었다.

<합천 5일장에 가면 지금도 국화빵 넣은 단팥죽을 사먹을 수 있다>

 

구마산 역에서 삼사백 미터 가다가 용마산 끝자락쯤에서 벌판길로 들어서는데(지금 운동장 방향의 길) 거기에서 왼쪽 길로 가면 한센인들 집단촌을 거쳐 율림동, 합성동(그때는 창원군)으로 가고, 오른쪽 길로 곧장 가면 신한가공 쪽이었다. 이 길로 가다가 왼쪽으로 비스듬히 가면 어린교로 통했는데(현 백화점 북쪽 옆길 쯤) 이 길 외에도 군데군데 논두렁길 길들이 많았다.

들 가운데쯤에 삼사기 정도의 묘역이 있었는데, 지금 추상으로 이백여 평은 족히 되었음직한 넓이였다. 우리들은 여기에서 온갖 장난질을 다하며 놀았다.

무릎치기, 말놀이 등을 많이 했고, 긴 풀잎끼리 맺어 걸려 넘어지게 하는 소위 결초놀이도 했다. 감정을 못 푼 친구끼리 혹은 타교생끼리 한판 겨루는 장소로도 활용되었고, 동중이나 창신중에 다니는 동네친구 만나는 장소이기도 했다.

부모님 속여 모은 돈으로 부림시장에서 깡통(미군용 휴대식품 통조림) 몇 개 사서 파티 장소로도 거기가 안성맞춤이었다.

한편 한센인들과 애기들을 연관시킨 무서운 소문들이 떠돌았던 때라 어둑살이 지면 그쪽으로 두려움의 눈길이 가기도 했고, 용마산 북쪽비탈에 자리 잡은 공동묘지도 비 오고 컴컴해질 땐 공포감을 주기에 집으로 걸음을 재촉하기도 했었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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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11.27 00:00

기억을 찾아가다 -7

7. 한국전쟁기의 학교생활 - 떠돌이 수업

 

피난 갔다 와서 학교에 나가보니, 들은 대로 학교는 이미 군용병원이 되어 있었다. 이웃 마산상업중학교(용마고의 전신인 마산상고와 마산동중이 분리되기 전의 학교)도 마찬가지였다.

이때부터 우리들의 떠돌이 학교생활은 2년 남짓 계속되었다. 처음엔 용마산 남쪽 비탈 중하단 정도 되는 곳으로 등교했다.

거기엔 전쟁에 대비하여 파놓은 자형의 참호가 많이 있었고, 거기서 우리 반뿐만 아니라 여러 반이 이웃하여 학습생활을 했다.

 

<교실이 없어 마당에서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 1953년 6월 서울에서 촬영>

 

가운데에 작대기를 세워 칠판을 걸고 우리들은 호 안에 기대거나 서고, 바깥 풀 위에도 앉고 하여 진행하는 수업형태였다.

그때 우리들 각자가 선생님 지시에 따라 마련한 책상 대용 필수품이 화판이라 불린 물건이었다. 판자들을 덧대어 만든 넓적한 판 양쪽에 끈을 달아 목에 걸고, 판 위에 책과 노트를 올려 책상 대용으로 썼던 것이다.

노천에서 여러 반이 얼마 거리 없이 그렇게 수업하니, 두세 분 선생님의 목소리가 섞여 들리기도 했고 어떤 목소리 큰 선생님의 말씀은 다른 반 학생들의 웃음을 자아내기도 했던 기억도 남아 있다.

가을이 되자 우리가 옮겨간 곳은 용마산 동편 자락에 있던 서당과 그 옆의 어떤 창고였다.

당은 낡아 바람 막기도 어려워 판자나 비료포대 같은 것으로 얼기설기 벽을 만들어 사용했고, 창고는 판자벽이 그래도 양호하여 서당을 배정받은 우리 반 친구들은 창고 반 친구들을 부러워하기도 했었다.

바깥생활 내내 그랬지만 여기서도 학습생활이 옳게 될 리는 없었다. 그러나 우리들이 그곳에서 취한 놀이 행태는 지금까지도 뇌리에 남아있을 만큼 재미를 만끽시킬 정도였다고 생각된다.

창고 뒤쪽, 그러니까 용마산의 동쪽 끝자락이며 산호동의 뒷동산이 되는 곳에 열 그루도 넘었음직한 푸조나무가 있어, 나무에도 오르고 나무 뒤에도 숨고 동산 여기저기로 뛰어 다니며 쏘고 잡고 하는 푸조나무 열매 총놀이가 너무나 재미있었던 기억으로 남아있다.

 

<지금도 용마산 동쪽자락에 푸조나무가 있다. 전문가들은 수령 2~300년으로 추정한다>

 

댓가지를 10티미터 남짓 길이로 잘라, 가운데 홈에 푸조나무 열매을 넣어 앞 구멍을 막고, 다음 알을 뒤에 넣고는 구멍에 알맞은 크기의 나무공이로 힘껏 밀면, 압축된 가운데 공기의 힘으로 앞의 알이 튀어나가는데, 그 힘이 꽤 되어 맞으면 따끔한 정도라 우리가 편을 갈라 쏘고 잡으면서 용마산 자락 일원을 누비고 다녔던 것이다.

4학년이 되자 우리 반만 따로 회원동으로 갔기 때문에 다른 반은 어땠는지 잘 모른다.

봉화산 자락에 위치한 회원초등학교(당시 회원국민학교) 바로 아래에 있는 판자 창고에 우리 반이 들어갔다. 물론 책걸상은 없으니 화판은 필수품이었다.

일제 때 마구간이었기에 퀴퀴한 냄새가 났고, 낡고 파손된 판자벽은 매섭기로 이름났던 봉오재바람을 그대로 통과시킬 정도였다.

그러나 때가 때인지라 별 불평들 없이 생활했던 것 같은데 정작 견디기 어려워했던 것은 회원초등학교 학생들의 집단 괴롭힘이었다.

반별로 전 시내에 뿔뿔이 흩어져 있었기에 선생님들이 여러 가지 업무 차 교실을 비울 때가 잦았었는데 그때를 틈타 수십 명(어떤 때는 백 명도 넘어 보였다)씩 몰려와 이유 없이 때리고 물건을 뺏곤 했고, 하교 시엔 길목을 지키고 있다가 또 그렇게 괴롭히곤 했다.

선생님(실력이 뛰어 나기로 소문났던 배종호 선생님이셨다)께 일러 학교에 항의하고 나서 좀 덜한 듯했으나 하교 길에 해코지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던 것 같다.

그걸 피하기 위해 우리는 인연을 활용하기도 했다.

이웃인 마산상업중학교가 회원초등학교 운동장에 군용텐트를 치고 학습생활을 했었는데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방과 후 좀 시간을 보내다가 그 형들이 하교할 때 같이 하는 것이었다.

형들은 우리들의 사정을 듣고서 잘 보호해 주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봉암동, 양덕동에서 다니던 우리들은 바냇들 가운데 길로 오면 가깝고 편했는데도 근처에서 지키는 아이들한테 한두 번 당한 뒤로는 그 형들을 따라 구마산 역으로 둘러오곤 했다.

런데 이런 유형의 패거리 행패문화는 그때 거기서만 체험한 게 아니었고, 그 후에도 오랫동안 여러 곳에서 여러 유형으로 아주 아프고 부끄러운 체험으로 남아 있어 뒤에서 한 번 더 거론하고자 한다.<<<

박호철 / 창원미래연구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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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06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1) - 강점 제1시기


<1910년대의 마산 무역>


당시 마산전경사진입니다.
현 대우백화점과 삼익아파트 일대에 매립을 하기 전이라 해안선이 환주산 밑까지 깊숙이 들어와 있고, 신마산과 마산포 사이의 옛 마산시청부터 몽고정까지는 전부 논밭입니다.
왼쪽에 문신미술관이 있는 환주산을 시작으로 멀리 용마산과 팔용산 자락이 차례로 보입니다.
환주산과 용마산 사이에 있는 마을이 마산포이고, 산 능선 중 잘룩 들어간 곳이 현재 봉암다리가 있는 곳입니다. 매립 전이라 마산만이 꽤 넓습니다.

1911년 새해벽두부터 개항지였던 마산항이 폐쇄되긴 했지만, 식민지의 통치와 수탈에 필요한 선박에 대해서는 세관장의 특별허가라는 명목으로 선박의 출입항을 허용했습니다.
따라서 식민지 수탈정책을 수행하기 위한 일본 선박은 개항기 때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었습니다. 통계상으로는 오히려 늘었습니다.

다음 표는 강점 제1시기였던 1910년부터 1920년까지의 마산항 대외교역량입니다.
(이출과 이입은 한국과 일본간의 교역을 말합니다. 병합이 되었다해서 타국 간의 용어인 수출과 수입과 다르게 사용하였습니다)

연 도

수․이 출

수․이 입

합 계

1910

1911

1912

1913

1914

1915

1916

1917

1918

1919

1920

158,834

121,806

76,421

66,106

89,074

151,844

68,652

141,357

1,322,969

3,214,239

3,735,912

566,869

1,002,922

876,321

861,931

719,220

711,465

767,112

911,112

1,007,818

1,844,900

2,105,906

725,703

1,124,728

952,742

928,037

808,294

863,309

835,764

1,052,469

2,330,787

5,059,139

5,841,818


이 표를 보면
합방 직후 마산항의 대외교역 규모는 수출 면에서 다소 위축을 보인 반면 수입 면에서는 급격히 증가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즉 합방 해인 1910년에 수․이출이 약 16만 엔, 수․이입이 약 57만 엔이었는데 1911년에는 수․이출은 12여만 엔으로 다소 감소한 반면 수․이입은 100여만 엔으로 거의
두 배나 늘어났습니다.
이러한 급격한 증가는 비록 일시적인 현상이지만 식민지 초기에 시장 개척을 위한 일본 상인들의 경제활동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라 보여집니다.
그런가하면 1918-1919년부터 수․이출입액이 급증하게 되는데 그 원인은 확인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아무튼 마산항이 개항이 종료된 이후에도 교역량에서는 특별한 변화가 없었고 오히려 늘었습니다.
진해만 군항 신설 등의 영향과 점점 늘어가는 식민지 경제수탈이 그 원인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1918년 '조선및만주사출판부'가 펴낸 『最新朝鮮地誌(中)』에 의하면,
당시 마산에는 일본 외의 국가로 나가는 선박은 없었습니다.
일본과의 항로는 대판상선회사의 대판-인천 간 정기선이 매월 4회 기항하고 있었습니다.
연안 항로는 조선우선(郵船)회사의 부산-여수선, 부산-거제선의 정기선이 매월 2회 발착하는 것과 진해기선조합이 경영하는 마산-진해간의 1일 7회 왕복하는 작은 기선 3척이 전부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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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23 10:11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0) - 개항기


오늘부터 개항기 때 제작된 마산지도를 소개하겠습니다.
지도의 기본정보 표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는 지도의 제목이며 제목 아래에 표기한 것이 지도의 기본 정보입니다. 표기 순서는「제작연도 / 제작자 / 발행처 / 축척 / 수록처 / 소장처」순입니다.
기록이 불가능한 부분은 해당 칸을 비워「/ /」로 표기하는데 지도제목이 동일한 경우에는 지도명칭 뒤에「*, **, ***」를 붙여 구분하겠습니다.


<馬山浦 及 附近, 마산포 및 부근>

1899년 / 上野亮 外 / 일본해군 / 1 : 49,054 / / 일본국회도서관


일제는 일찍부터 마산을 자신의 식민지 주요 거점으로 눈독 들여왔었습니다. 그러므로 원산․부산 등과 마찬가지로 마산지역의 측량과 지도제작도 진작 시작되었습니다.

이 지도는 일제가 침략을 목적으로 한반도를 측량하기 시작한 직후 제작된 것입니다. 근대적 측량법에 의해 만들어진 최초의 마산관련지도로 추정됩니다.

표기내용과 축척, 제작시기 등을 미루어 지난 주 올린 글에서 소개한「군용비도(軍用秘圖)」의 초기도면으로 보입니다.

지도의 왼쪽 상부가 마산포인데 도면의 명칭처럼 진해, 웅천까지 마산포 근방 해안을 상세히 표기한 지도입니다.
오른쪽 상부에 별도로 그려놓은 것은 거제도 지세포 항을 확대한 지도입니다.

마산포부분만 확대하여 옮겨보겠습니다.


지도 상부에 짙게 표시된 삼각형 지역이 마산포입니다.

이 지도에 의하면 1899년 마산의 도시상황은 마산포(원마산)의 영역인 남성동을 중심으로 성립한 일단의 자연발생 취락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산포(원마산) 남서쪽으로 약 2km 떨어진 소위 신마산에 일본인들이 새로운 도시, 즉 각국공동조계지를 조성하기 시작했는데 위치는 지도의 좌측중앙부입니다. 가늘게 직선으로 표기되어 있습니다.
이 두 곳 사이에 위치한 중앙부(마산포와
신마산의 중간 부분인 현 자산동․중앙동 그리고 장군동 일대)는 논밭으로 이어진 채 인가(人家)가 거의 없었습니다.

원마산 외에는 오산이라 불렀던 용마산 아래의 현 산호동에 마을이 있었으며 북쪽으로 교방동 및 회원동 그리고 현 봉암교 아래의 봉암동에도 마을이 있었던 것으로 나타내고 있습니다. 양덕과 합성 쪽에도 이 당시 사람이 살고 있었지만 이 지도에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이 외에도 환주산 근처에 성호동과 자산동, 그 남쪽으로 완월동․신월동․월영동 쪽의 마을도 잘 그려놓고 있습니다.

무학산에서 마산만으로 흐르는 하천은 교방천과 회원천․척산천(尺山川)․장군천․창원천이 표기되어 있는데 특이한 것은 장군천이 현재처럼 직선으로 마산만과 연결되지 않고 휘어져 있다는 점입니다.
지도상의 장군천 하구는 마산선 철로의 기점이었던 마산 역 자리입니다.
1905년 이후에 제작된 자료들과 관련해 볼 때
장군천은 1905년 일본군에 의해 마산철도와 마산 역이 건설될 때 지금처럼 직선화된 것 같습니다.

각국거류지라고 표기되어 있는 조계지 내의 세관․일본영사관과 함께 나타나고 있는 건물은 개항과 함께 개설된 우편국을 말하는 것으로서 1899년 당시에는 임대건물에서 업무를 보고 있었습니다.

특이한 것은 봉암동 쪽입니다.
지금의 창원공업단지에 표현되어 있는 염전인데 구전으로 전해오던 봉암의 대규모 염전이 이 지도가 정확하게 그 실체를 표기하고 있습니다.
지도의 오른쪽 상부에 바둑판처럼 격자로 그어 놓은 것이 염전 표시인데 이 염전은 해방 이후까지 존속하여 1947년에 미군이 촬영한 항공사진에도 나타납니다.

보는 것처럼 이 지도에는 진해만을 중심으로 마산포 부근의 해안선․수심․지형 등이 비교적 정밀하게 표기되어 있습니다.

특히 간석지의 경계까지 상세히 표기해 놓아서, 매립 등으로 사람의 손이 닿기 전에 존재했던 천연상태의 마산포 해안 원형을 정확하게 알 수 있는 유일한 자료로 보입니다.

이 지도는 일본 국회도서관에서 찾았습니다.
지도를 보는 순간, 그리고 이 지도가 1899년 제작되었다는 기록을 보는 순간, 저는 전율했습니다.
너무나 상세하고 정확한 지도의 내용에 놀랐고, 다음은 1899년이라는 시기와 제작자가 일본해군이라는 점에 또 놀랐습니다.

1899년에 제작했다면 비밀리에 한반도 곳곳에 들어와 측량한 시기는 그 보다 몇 년 전일 겁니다.
1899년은 마산이 개항된 해이기도 하지만 을사조약 6년 전, 경술국치 11년 전인데 이미 그 때 한반도의 해안을 이렇게 샅샅이 조사해 놓았다는 사실에 놀랐던 겁니다.

조선을 식민지 삼겠다는 야욕이 한 눈에 확인되는 이 지도를 보면서 '이렇게 치밀하고도 은밀하게 준비한 일제의 야수를 벗어날 길이 없었겠구나'라는 자조감도 들었습니다.


아래 그림은 위 지도에 표기된 부분의 현재상황입니다.



끝으로 이 지도를 조금 더 확대해 현재 마산시내의 시설물들 위치와 비교해보겠습니다.
3.15의거 탑 바로 앞이 바닷가였고, 대우백화점은 바다 한 복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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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6.14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0) - 조선시대


<창원 탄생-합포성-임진왜란>

창원(昌原)이란 지명은 조선시대에 만들어졌습니다.
조선조 3대 태종 8년(1408년)에 의창(義昌)현과 회원(會原)현을 합쳐 창원(昌原)부로 승격되면서 그 이름이 역사에 등장합니다. 2008년에 창원시가 펼친 ‘창원탄생 600년’ 기념행사는 바로 이 사실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의창(義昌)의 ‘昌’자(字)와 회원(會原)의 ‘原’자(字)를 합쳐 만든 이름입니다.


7년이 지난 1415년(태종15년)에는 부(府)였던 창원이 도호부(都護府)되었습니다. 그러나
부성(府城)은 별도로 없었습니다. 현재 마산 합성동에 유적으로 남아있는 '합포성'의 병마도절제사가 창원도호부까지 다스렸기 때문입니다.

'합포성'은 고려 우왕 4년(1378년)에 부원수 배극렴이 왜구의 침입에 대비해 축성한 병영입니다.
올해 초 경남대학교박물관에서 『합포성지 정밀지표조사보고서』를 발간하여 당시 합포성을 도면으로나마 복원하였습니다.
연구책임을 맡았던 이상길 교수는 "역사적 가치로 보아 소중히 보존해야할 유적인데 시민들로 부터 외면 당하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소회를 밝히더군요.

아래 사진은 1930년대 일본인이 촬영한 당시의 합포성 사진이며 그 다음 것들은 각 시기별로 촬영된 합포성의 항공사진입니다.
1947년도 사진은 미군이 촬영한 것인데 흐릿하게 보이는 사각형 윤곽이 성지(城址)입니다. 1967년 이후의 사진은 국토지리정보원 보관자료이며 이상길 교수의 도움으로 올렸습니다.

                                       <1930년대 합포성 모습>

                                          <1947년 합포성 일대 항공사진>

                                       <1967년 합포성 일대 항공사진>

                                  <1975년 합포성 일대 항공사진>

                                         <1982년 합포성 일대 항공사진>


                                     <2008년 합포성 일대 항공사진>

합포성은 방어상 목적 때문에 해안에 바로 접하지 않고 내륙에 입지하였으며 내성과 외성이 있었다고 합니다.
현재 지명인 '합성동'은 내성 외성을 합했다고 해서 '합성'이 되었다는 설도 있고 '합포성'을 줄여 '합성'이 되었다는 설도 있습니다.

이 성의 구조에 대해서『동국여지승람』창원도호부 관방조에는
「右道兵馬節度使營 在古合浦縣距府十三里 石城周四千二百九十一尺 高十五尺 內有五井 裵克廉築」이라고 하여,
우도병마절도사영은 옛 합포현에 있으며 창원도호부에서 서쪽으로 13리 거리에 있고 석성(石城)인데 둘레가 4,291척이고 높이는 15척으로서 성안에는 우물이 5개소 있으며 배극렴이 쌓았다」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래 사진은 현재 합성동 어느 주택 담벼락에 남아있는 합포성벽입니다. 정확한 위치는 합성동 155-42번지입니다.
가벼운 현대식 블록 담장을 떠 받치고 있는 오래된 과거의 석축이 내 눈에는 마치 '시간의 낙관(落款)'처럼 보입니다.





합포성 성곽유적 일부가 유형문화재로 남아 이처럼 보존되고 있습니다.

                                             <합포성 성곽 유적>


다음 그림은 대동여지도에 표시된 합포성입니다.

중앙 상부의 원형 표식 안에 '창원'이라 적은 것이 의창동에 있었던 창원읍성이고 그 좌하의 작은 원형 표식 위에 고병영(古兵營)이라고 적은 것이 합포성입니다.




다음 그림은 이상길 교수가 복원한 합포성의 위치를 현재의 지도 위에 표시한 것입니다.

                                     
                                                 <합포성 위치>

창원시 의창동 일대에 있었던 창원읍성은 성종 8년인 1477년 완공되었습니다. 완공은 되었지만 창원도호부가 언제 신축한 부성으로 이전했는지는 정확히 모릅니다. 아무튼 1408년 탄생한 창원부의 행정치소는 짧게보아 칠십년 이상 지난 뒤 마산에서 창원으로 옮겼습니다.

부성(府城)이동이라는 도시의 대변화는 마산지역(당시 합포)에 있었던 행정과 군사의 중심기능이 창원(의창동 일대)으로 옮겨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부성이 이전하자 합포성에는 경상우도병마절도사영(慶尙右道兵馬節度使營)만 남았는데 이 영(營)은 임진왜란이 끝난 선조 36년(1603년) 진주로 옮겨갔습니다.

그 후부터 합포성은 역사적 소명을 상실하였고 4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 방치되었습니다. 현재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53호로 등록되어 명맥만 유지되고 있을 뿐, 위상에 걸맞는 대우를 받지 못하고 있습니다.

보존 받아야할 이 오래된 성곽은 '도시화'의 이름 아래 무너져 내렸습니다.
철도 마산선(마산-삼랑진) 개설로 1904년-1905년 사이에 성곽이 관통되었고, 이어서 1909년에는 마산-창원-부산을 잇는 신작로가 성곽을 관통하였습니다.
1960년대 말에는 현 마산자유무역지역 조성과정에서 합포성의 성벽이 매립용 골재로 사용되면서 성의 형태가 대부분 망실되었습니다.
1970년대 말에는 마산시의 도시확장정책으로 동마산개발이 시작되면서 합포성은 형체를 완전히 잃었습니다. 이 시기에 마산의 기차역(마산역, 구마산역, 북마산역)들이 현 마산역으로 통합되면서 기존의 철도는 광로(현 마산시외버스터미널 앞 대로)가 되고 그 옆으로 새로운 철로가 생겨 합포성은 또 한 번 관통당했습니다.

우리 지역도 임진왜란(1592년-1598년)의 피해가 많았습니다.
마산인근지역의 대표적인 전투는 현재의 창원시 동읍 신방리 서쪽 고지인 노현(露峴)일대 및 창원성 전투, 의병장 최강이 분전한 안민고개 전투, 이순신을 비롯한 조선수군 연합함대가 투입된 합포해전과 안골포 해전 등입니다.


전쟁기에 왜적은 장기전에 대비하여 남해안 여러 곳에 성(城)을 수축했는데 마산 산호동 용마산에는 그 때 축성한 왜성이 지금도 남아있습니다. 오른쪽 사진이 바로 그것입니다.

임진왜란 중 우리 지역 주민들은 왜구의 침입에 불굴의 저항의식과 희생정신으로 민족 자존심과 자주의식을 유감없이 발휘하였습니다.
7년이라는 장기간의 전쟁와중에서 병사 겸 부사인 김응서와 그를 따르는 군관민이 한 사람도 일본에 항복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임진왜란이 끝난 선조34년(1601년)에 창원도호부는 행정과 군사상 요충지인 대도호부(大都護府)로 승격되었습니다. 이유는 임진왜란 때 보여준 창원지역민들의 높은 충절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합포성에 있던 경상우도병마절도사영(慶尙右道兵馬節度使營)을 진주로 이전한 것이 대도호부 승격 2년 뒤인 것을 보면, 이 병영(兵營)이 떠나고난 뒤 약화될 창원지역의 행정과 군사적 비중을 강화시킬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됩니다.

아무튼 1408년에 시작된 창원부는 도호부를 거쳐 200여년이 지난 1601년 드디어 대도호부가 되었습니다. 1661년(현종2년)에 잠시 현으로 강등되기도 했으나 1670년(현종11년) 다시 대도호부가 되어 1894년 갑오개혁으로 행정구역이 개편될 때까지 지속되었습니다.

어떻습니까?
임진왜란 때 단 한 사람도 왜군에 항복하지 않은 불굴의 저항정신이 3.15의거와 부마민주항쟁으로 절대 권력을 두 번씩이나 쓰러뜨린 마산 사람들의 저항정신으로 이어진 것 아닐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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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따옥따옥 2010.06.14 09:36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같은 장소를 시대 순 변천사 사진을 보니까 참 ...
    앞으로 2008년 뒤에 실릴 사진은 어떻게 될지 정말 궁금해 지네요 ^^

    • 허정도 2010.06.14 10:00 신고 address edit & del

      글쎄 말입니다.
      저 유적지가 미래에는 또 어떻게 변할까요?

  2. 옥가실 2010.06.14 10:10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이렇게 보니,
    합성동이 마산 창원의 중심이군요.
    잘 보았습니다.

2010.06.07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9) - 고려시대


<'마산' 지명은 언제 어떻게 생겼을까?> *작년 11월 9일 포스팅했던 글인데 연재라서 또 올립니다

'마산' 지명의 기원에 대한 몇 가지 설이 있지만 아직 정립된 주장은 없습니다.
이 글에서는 지금까지 제기된 마산지명 기원설들을 모아 보았습니다.
구전으로 전해내려온 이야기에서부터 고려시대 여원연합군 일본원정 때 이곳에 몽고군들이 주둔한 사실과 관련이 있다는 주장까지 있습니다.

먼저,
일본인 추방사랑(
諏方史郞)의 주장입니다. 
그는 1926년에 간행한『마산항지』에서 '구전으로 내려오던 이야기'라고 전제하며
임진왜란(1592-1598년) 이후, 각 지역에 전염병이 창궐하여 창원 소재 오산진(현 산호동 용마고 부근)에도 매일 시체가 산을 이루어 50구, 30구 혹은 20구의 시체가 동시에 묻히는 등 참혹한 상황이 되었다.
살아남은 이 지역의 고로(古老)들이 서로 상의하여 유명한 풍수사에게 그 연유와 대책을 묻자 오산(午山)의 오(午)자에 문제가 많아 이런 일이 일어났으니 오(午)자 대신 같은 의미인 마(馬)자를 사용하라고 하여 오산(午山)을 마산(馬山)이라 개명하게 되고 이때부터 마산이란 지명이 생겼다
고 하였습니다.
이 주장은『마산시사』를 비롯한 관찬자료와 마산과 관련한 많은 문헌에서 인용하였으며 사실상 지금까지 가장 널리 알려진 마산의 지명 기원설입니다.

그러나
주장은 옳지 않습니다.
임진왜란 이전에 간행된 자료에서 마산이란 지명이 여러 군데 나타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근거 없이 구전으로 전해오던 이야기를 한 일본지식인이 활자화한 것으로 보입니다.

또 하나,
일제강점기 조선운송주식회사가 펴낸『조선항만지사정』에서는 마산지명의 기원에 대해
조선 제18대 현종(1660년-1674년 재위) 때부터 마산포라고 칭했다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 역시 현종의 재위기 이전에 이미 마산이란 지명이 기록에 등장한다는 점에서 잘못된 주장일 수밖에 없습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최초로 마산이란 용어가 등장한다며 그 기원을 주장한 학자도 있습니다.
하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이 간행된 중종 25년(1530년)보다 100여 년 전인 세종7년(1425년)에 편찬된『경상도지리지』(오른쪽 그림이 표지 제목) 내상조에
(경상)우도내상은 창원부에 있는데 바다입구인 마산포와 4리 317보 떨어져있다 (右道內廂 在昌原府 去海口馬山浦 四里三百十七步所屬)
라는 마산포에 관한 기록이 있고,

『조선왕조실록』세종10년(1428년) 8월 기록에
경상도 마산포의 바닷물이 붉게 물들었는데 물고기가 죽은 놈이 있었다 (그 당시 마산만에 적조현상이 발생했던 것으로 보이는 기록이다)
는 마산포 기록이 있으니 이 주장도 타당성이 없습니다.

음차현상으로 마산 지명의 기원에 대해 설명하기도 했으나 근거가 불명확합니다.

그러던 중, 몇 년 전에 새로운 주장이 나왔습니다.
고려시대 몽고군이 합포에 진주한 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한 박희윤의 주장입니다.

박희윤은 와세다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마친 후 현재 일본굴지의 도시개발회사 간부로 근무하는 마산사람입니다. 마산도시사연구는 국내에서 공부할 때 했습니다.
작년 추석에 고향이라고 마산와서 쇠락해가는 도시모습을 보며 많이도 안타까워하더군요.

박희윤은 몽고군이 일본을 침략하기 위해 합포(마산일대의 당시 지명)에 진주할 때
몽고군 1인당 말 4필로 보면 4만 필인데 이를 먹일만한 장소로 산호동 지역 바냇들 뿐이어서 이곳에 몽고군의 목마장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이로 인해 「용마산」「큰 말굿」「작은 말죽통」 등의 말(馬)과 관련된 지명이 생겨났을 것이다.
또한 용마산 아래에 있는 포구라는 의미와 일본원정당시 말들을 실어 나르던 포구라는 의미에서 「마산포」라는 지명이 생겼을 것이다
라고 하면서 그 시기를 고려후기로 추정했습니다.

아래 그림은 현재 지도 위에 당시의 지리적 상황과 박희윤의 추정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목마장으로 사용하였다고 추정한 바냇들의 면적은 약 25만여 평입니다.


그의 주장이 맞다면,
원나라 세조가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이 곳 합포의 자산성에 정동행성을 둔 것이 1274년이고, 두 번째 원정이 1281년이니 지금으로부터 700년도 더된 시기에 마산이라는 지명이 생긴 셈입니다.

600여년 전에 간행된 사료에 마산이라는 지명이 수록되어 있으니 앞의 주장들 처럼 시기적으로 오류가 있지는 않습니다.
몽고군-말-목마장-용마산-마산포로 이어지는 연결이 그리 어색하지도 않습니다.
몽고군이 ‘몽고정’만 남긴 것이 아니라 ‘마산’이라는 이름까지 남겼다는 주장, 참 그럴듯하지 않습니까?

'창원'이라는 지명은 조선 제3대 왕 태종이 재위하던1408년에 탄생하였습니다.
'마산'이라는 지명은 1425년 세종이 편찬한 『경상도지리지』에 최초로 등장합니다.

그렇다면 '창원'과 '마산' 중 어느 지명이 먼저 생겼을까요?

확인 되지도 않았고 확인할 수도 없는 ‘마산’ 지명의 정확한 기원은 무엇일까요?
이 오래된 지명은 언제 무슨 사연을 담고 만들어졌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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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따옥따옥 2010.06.09 14:58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지역에 관한 좋은 자료네요 ...
    마산이 왜 마산일까 가끔 별생각없이 궁금해 한 적이 있었던것 같은데...
    잘 보고 갑니다 ^^

    • 허정도 2010.06.11 15:12 신고 address edit & del

      방문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글이 오를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2. 골드 2010.06.11 10:56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어제 KNN 다큐"마산"에 나오시더군요. 박사님의 글을 보고 마산의 근대사에 대해
    관심을 가지게 되었읍니다.

    • 허정도 2010.06.11 15:11 신고 address edit & del

      관심가져주셔서 감사합니다.
      통합시의 미래에 기대를 걸어야 되겠지만, 마산시가 없어지는게 저는 참 서운합니다.

2010.05.10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 - 고려시대


<마산에 있었던 석두창의 위치는?>

조선시대 조창인 마산창은 위치와 규모 등 관련 내용들이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마산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고려 석두창(石頭倉)의 중요성도 결코 조선시대 마산창 못지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석두창은 별로 알려져 있지 않으며, 아직 그 위치도 밝히지 못한 채 몇 가지 가설만 나와있습니다.

이 글에서는 지금까지 주장된 석두창 위치에 대한 가설들을 소개하겠습니다.

석두창 위치 비정은 모두 세 가지인데 모두 그 근거와 논리가 좀 복잡합니다.
천 년 전에 있었던 석두창의 위치를 찾는 일이니 그도 그럴 것입니다.

세 주장의 결론만 간략하게 정리하겠습니다.
(관심 있는 분들만 읽어볼 수 있도록 자세한 내용은 이 글 뒤에 별도로 붙여 놓았습니다)

첫 번째는,
몇몇 문헌(마산시사, 창원군지, 박희윤, 이지우 경남대 교수)에서「당시 마산포라 불렀던 현재의 용마산과 자유무역지역 후문까지의 어느 지점, 현 산호동 어딘가에 있다가 조선조에 현 어시장 해변으로 옮겼다」라고 추정한 것입니다.
이 주장에서 사용한 근거자료는,
세종7년(1425년)에 간행한『경상도지리지』, 중종 25년(1530년)에 간행한『신증동국여지승람』, 영조 때(1757년-1765년)에 편찬된 『여지도서』, 1895년에 간행한 『영남읍지』 등 입니다.

두 번째는 저의 주장입니다.
저는 앞의 주장이 문헌 해석방법에 무리가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석두창이 현재의 남성동 해안으로 옮겨온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남성동 해안에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였습니다.
근거자료로는 지명과 자연조건 그리고 지형을 제시했고 사용한 자료는 『고려사』,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1899년 일본에서 제작한 근대식 지도, 조선시대 마산포 복원도 등 입니다.

세 번째는 부산대학교 사학과 한정훈 교수의 주장입니다.
한 교수는 석두창의 위치가 「산호동 일대이지만 반월산(무학여고 뒷산)을 중심으로 해서 그 앞 해안가에 위치하였을 것」이라고 추정했습니다.
추정근거로 지명의 의미 및 고려시대 조창의 입지조건과 인근의 교통망 등을 들었습니다.

위 세 주장에서 제시된 위치를 세 종류의 지도에 표기해 보았습니다.
첫 번째 주장 '산호동'은 청색,
두 번째 주장 '남성동'은 적색,
세 번째 주장 '반월산에서 해안가'는 녹색
입니다.
정확하지는 않습니다만 대충이나마 그 위치를 가늠할 수 있을 겁니다.

 <1833년에 제작된 고지도에 그려보았습니다>

<현재 마산지도에 백여년전 해안선을 복원한 후 비교해보았습니다>

<현재 마산지도상에 위치를 표시해보았습니다.
세 곳 모두 도시한복판이지만 당시에는 배가 정박할 수 있는 해안이었습니다. 세 번째 주장인 녹색부분은 삼호천과 산호천이 합해진 하류인데 지금은 복개되었습니다>

셋 중 어느 주장이 맞는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아직 논의가 종결되지도 않았습니다.
본격적으로 연구하여 천 년 전 합포의 최대 최고시설이었던 석두창의 위치를 찾는다면 통합 창원시 최고의 문화유산이 될 것 같습니다.

도대체 어디쯤 있었을까요?
고려시대 마산에 있었던 석두창은,,,,



<석두창 위치비정에 대한 세 주장의 상세 글>   - 길어서 읽기 지겹습니다 -
 

첫 번째,
‘산호동 일대’라는 주장의 근거자료로 사용되었던 문헌의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① 세종7년(1425년)에 간행한『경상도지리지』 조세(租稅)조에서「이전에는 도내(道內)에서 세(稅)를 거둬 실어다 바치는 곳이 세 군데 있었다.
김해 불암창, 창원 마산창(옛 석두창), 사천 통양창」이라는 기록.

② 『경상도지리지』 내상조(內廂條)에서「우도내상(右道內廂)은 창원부에 있는데, 바다입구(海口) 마산포와 4리317보 떨어져있다」는 기록.
'병영성(兵營城)과 내상성(內廂城)은 같은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여기서 말하는 내상(內廂)은 현 합성동의 당시 ‘우도병마절제사영성(右道兵馬節制使營城)을 말함'

③ 중종 25년(1530년)에 간행한『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창원도호부 산천조(山川條)에「馬山浦 在會原縣 猪島在月影臺南 合浦在府西十里․․․․․․」라고 하여 마산포는 회원현에 있고 합포는 부(府) 서쪽 10리에 있다는 기록

④ 영조(英祖) 때(1757년-1765년)에 편찬된 『여지도서(與地圖書)』의 창원대도호부조(昌原大都護府條)에 수록되어 있는 창원부의 지도에서 석두창의 위치가 반룡산(盤龍山, 현 팔용산)밑인 지금의 산호동 일대(팔용산과 월영대 중간지점)에 도시(圖示)되어 있다는 것

⑤ 1895년 간행한 『嶺南邑誌』 창원대도호부(昌原大都護府)조에서「조창은 해창 부근에 있는데 새로 지은 것이다」라는 기록 등 입니다.

이 문헌들에 근거하여 내린 결론은

①「마산에 두 개의 포구가 있었는데 그 중 하나는 현재의 용마산과 자유무역지역 후문까지(산호동 일대)의 마산포이고 다른 하나는 현 어시장 쪽의 합포였다」고 규정하여

②「마산포에 석두창이 있었으니 현 산호동 어딘가에 석두창이 있었다」라고 결론짓고

③ 그러다가 조선 영․정조시기에 자연충적(自然沖積)으로 마산포에 선박출입이 어려워지자「현 어시장 해변인 해창 부근, 즉 합포로 옮겼다」는 주장입니다.

그리고 박희윤은 마산포에서 합포로 옮겨 간 사실을 두고 「산호동 일대는 구강이라고 부르던 곳으로 여기서 열리던 장을 ‘구강장’이라고 하였고 어시장 쪽에서 열리는 장을 ‘새강장’이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예로 들었습니다.
즉 마산포에 있던 석두창이 퇴적물로 인해 조선 후기에 합포 지역으로 조창을 이전했기 때문에 원래의 지역을 ‘구강’, 새로운 지역을 ‘새강’이라고 부르게 되었으며 마산포라는 지명은 기존의 산호동 일대만 지칭하다가 현재의 남성동 일대인 합포 지역까지 확대되어 사용되었다고 비교적 소상히 설명하였습니다.

두 번째,
‘남성동 어시장 일대’라는 제 주장입니다.
위 석두창 위치비정 논리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시작합니다.

① 마산포와 합포의 위치를 규명하는 방법에서「마산포는 회원현에 있고 합포는 부(府)의 서쪽 10리에 있다」는 기록을 이용하면서, 마치 자로 잰 듯이 당시 행정구역인 회원현의 범역과 창원대도호부의 위치를 자구(字句) 그대로 적용하여 현 산호동 일대가 마산포이고 남성동 일대가 합포인데 석두창이 마산포에 있다고 한 점입니다.
따라서 산호동의 용마산에서 자유무역지역 후문까지의 어딘가 그것이 있었을 것이라는 논리가 석연치 않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근거는 아래의「대동여지도」입니다.
이 지도에는 위의 주장과 정반대의 위치에 마산포와 합포가 표기되어 있습니다. 이 사실만으로도 마산포와 합포의 위치를 비정하는데 활용한 문헌의 해석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대동여지도」의 표기 범례에는 ■은 倉庫, ●은 古縣이라 되어 있습니다.
따라서「合浦●」의 표기는 신라 35대 경덕왕 16년(757년)에 시행한 행정구역 정비 때 의안군에 영속되었던 합포현을 말하고 있는 것으로서, 과거에 현(縣)이었는데 성(城)은 없다는 뜻입니다.

지도에 표기된 양상을 보아도 마산포는 기존의 연구처럼 산호동 일대를 지칭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②『여지도서(與地圖書)』의 창원부 지도에 도시(圖示)된 석두창의 위치에 대한 문제제기입니다.
우리나라의 각종 고지도(古地圖)에 나타나는 시설물들을 보면 축척과 거리의 개념보다는 존재 유무의 개념으로 표시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지도에 나타나는 석두창의 위치를 사실로 연결시키면서 논거로 제시하는 것은 무리가 많습니다.

또한 석두창이 산호동 부근의 마산포에 있었다고 하는 주장은 시기와 명칭과의 관련성에서도 문제가 있습니다.

③ 조선 영․정조에 석두창을 현 어시장 쪽인 합포로 이전했다는 내용에 대한 주장의 타당성입니다.
이 주장은 석두창을 현재의 산호동 쪽에 있었다는 것을 결정해 놓고, 『영남읍지』의 ‘조창이 합포에 있던 해창 쪽에 있다’는 기록과 연결짓다보니「이전」이라는 해석을 하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당시에 중요한 관아였던 조창이 이전되었다는 기록은 어느 문헌에도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석두창이 이전했다면 영조 때 개창한 마산창의 위치로 이전한 것인지, 혹은 그렇지 않고 마산창은 별도로 신설한 것인지 정확한 설명이 없습니다. 석두창 이전 설은 현재로서는 논리적으로 납득할만한 어떤 근거도 없는 셈입니다.

④ 석두창이 오래 동안 사용되다가 자연충적 때문에 이전했다고 한 점에 대해 검토해 볼 필요도 있습니다.
석두창이 있었다는 산호동 해안의 지형지세를 보면 원래부터 퇴적물이 많았던
곳이지 석두창이 생긴 후 언제인가부터 퇴적물이 생기기 시작한 곳은 아닙니다. 이에 대해서는 아래에 제시한 「1899년 산호동 일대의 해안지도」를 보면 잘 알 수 있습니다.
이 지도는 1899년 일본 해군에 의해 작성된 근대식 지도로서 마산만의 간조선이 표시된 지도로서는 최초의 것입니다.


이 지도를 보면 지금까지 석두창이 있었다고 주장한 해안은 팔용산에서 내려오는 하천를 비롯하여 양덕천․산호천․삼호천 등의 하천 때문에 간석지의 폭이 무려 1㎞나 되는 곳이 있을 정도입니다.
조창부지로서는 매우 부적절한 자연조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위의 네 가지 이유를 보더라도 석두창이 현 산호동 일대에 있었다는 주장은 무리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오히려 석두창이 처음부터 현재의 남성동 해안에 있었을 것이라고 보는 비정이 합리적이라고 봅니다.
이것은 저의 주장인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①『고려사』권79 조운, 성종 11년 수경가조(輸京價條)에 「나포 전호골포 합포현석두창 재언(螺浦 前號骨浦 合浦縣石頭倉 在焉)」이라고 하여「나포는 전에 골포라 하였고 합포현의 석두창이 여기에 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이 기록은 석두창의 위치를 확인하는데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
즉 螺(라, 소라)라고 불렀던 포구라면 그 형상이 소라의 형태와 관련이 있을 수 있습니다.
 이는 버드나무가 많다고 해서 유호(柳湖)라는 지명을 사용한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오른쪽 그림은 제가 복원한 원마산 지형도입니다.
이 그림에서 나타나는 동굴강의 형태가 나포(螺浦)라는 명칭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특이한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② 조창의 명칭이 석두창(石頭倉)이라는 점입니다.
중국어에서는 ‘석두(石頭)’라는 단어를 곧 돌(石)을 나타내는 의미로 사용하였습니다.

이를 근거로 생각해 보면 대부분 갈대밭이었으며 간석지였던 해안에 소라 모양을 띤 움푹 들어간 포구 한 곳을 돌로서 호안(護岸)하여 굴강을 조성했을 것이라는 추정이 가능합니다.
그 형상으로 보아 사실상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된 것이라기보다는 자연발생적인 포구를 인공으로 호안(護岸)하여 조성한 것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합니다.

③ 앞에서 말했듯이 현재의 용마산과 자유무역지역 후문 사이에는 여러 개의 하천 때문에 생기는 퇴적물로 인해 간석지가 매우 넓었을 뿐만 아니라 해안선의 형태가 밋밋하여 작은 풍랑도 피하지 못할 조건이었습니다.

반면 위의 두 그림에서 알 수 있듯이 ▲표의 동굴강은 간석지가 좁고 해안선의 형태도 항만으로 사용하기에 적합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바로 인근에 이렇게 좋은 조건을 놔두고 산호동 쪽에 조창을 설치할 이유가 없었다고 봅니다.

이상과 같은 추정을 근거로 석두창의 위치는 애초부터 남성동해안의 동굴강에 있었던 것이라고 보는 것입니다.
또한 동굴강을 끼고 몽고군의 일본 정벌 때 사용된 전선소(戰船所)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기존의 굴강을 전선소 굴강으로 적절히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동굴강은 그 규모로 보아 당시 900여 척에 달했던 전함의 수리를 모두 맡기에는 부족했을 것이지만 기왕에 존재했던 굴강이었기 때문에 일부라도 사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 이 추정이 적절하다면 그 위치는 현재의 어시장 입구에 있는 속칭「너른 마당」의 북쪽 인접대지 일대입니다.

이 사실을 전제로 할 때,

조선시대의 마산창은 고려시대의 석두창을 이전한 것이 아니라 석두창으로 사용하다가 폐허가 되어버린 창지(倉址) 옆에 새로 건립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그런데 이 주장에 반론이 나왔습니다.

세 번째,

부산대학교 사학과 한정훈 교수의 주장입니다.

한 교수는 고려시대 조창의 입지조건과 인근의 교통망 등을 근거로 하여 석두창의 위치를 비정한 것입니다.

다음과 같은 논리입니다.

① 석두창은 합포현 내에 있는 골포(=螺浦)에 위치하였다.
골포의 골(骨)자는 우리만 의미에서 골짜기 깊숙이 들어간 곳의 의미가 있으므로 마산만 깊숙이 들어간 어느 지점에 형성된 포구를 지칭할 가능성이 높다.
그런 점에서 현재의 남성동 보다는 더 내륙으로 들어간 산호동 일대일 가능성이 높다.

② 고려시대 조창의 입지조건을 검토한 결과, 만(灣)의 입구보다는 내륙으로 들어간 해안이나 만의 깊숙한 지점에 위치하였다.
바다로 부터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였는데 그 역시 산호동 일대가 타당한 조건이었다.

③ 조창의 운반 조건을 볼 때 수운 이용이나 하천을 따라 형성된 소로의 이용이란 측면에서 내륙하천과 마산 앞 바다의 결절지점에 석두창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리고 그것을 근거로 볼 때, 석두창의 위치를 용마산 아래의 산호동 앞 바닷가 일대로 보는 것이 옳다고 하면서, 나아가 조창의 입지조건이나 교통망 그리고 당시 해수면의 변화까지 고려한다면 용마산 일대보다 내륙으로 더 들어간 지점일 수 있다고했습니다.
그 결과 내린 결론은,
석두창이 지금의 반월산(무학여고 뒷산, 이산, 이살미산, 와우산이라고도 불린다)을 중심으로 해서 그 앞 해안가에 위치하였을 것이라는 겁니다.<<<



2010/04/08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여는 글
2010/04/12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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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1.24 14:30

‘구(舊) 마산형무소 터’ 의 추억


‘유장근 교수의 도시탐방대’ 일곱 번째 길에 나섰다.
1월 9일 토요일 오후 1시 반, 코아 양과점 앞, 30여명이었다.
바람은 없었지만 짙게 흐렸고 기온이 낮았다.
코스는 오동동 문화의 거리에 있는 ‘3.15의거 발원지’에서 시작하여→구 마산형무소 터→오동동 일대→오동동 아케이드→용마고등학교→지하련 거주지→산호동 효자각→용마산→구강포구까지였다.

오동동 문화의 거리에 있는 3.15의거 발원지에서는 특별손님으로 3.15의거기념사업회 백한기 회장님이 직접 나와 의거에 대해 설명해주어 의미가 더했다.
한때 화려했던 오동동의 밤 문화에 대한 설명은 이승기 선생님께서 맡았는데 두 분은 마산상고 동기생이시다.

가는 곳곳마다 새로운 걸 느꼈고 배웠지만, 여기서는 나와 특별한 인연이 있는 ‘구(舊) 마산형무소 터’에 관한 글을 올린다.

                                    <일곱번째 탐방 코스>

     <3.15의거 발원지 표시동판과 의거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백한기 회장님>


8년 전 2002년 벽두,
이 터를 공원으로 만들자는 시민운동을 벌였다.
마산YMCA를 주축으로 ‘한국은행터 공원만들기 마산시민행동’을 조직하고 상임대표를 맡아 운동의 중심에 섰다.
달포 만에 무려 10만 여명의 서명을 받았고, 그것을 마산시의회에 제출 청원하였다.
하지만 부결되었다.

우리들이 이 터를 공원으로 만들려했던 까닭은 ‘도시환경’이라는 측면과 ‘터의 역사성’ 때문이었다.

             <공원만들기 운동의 발대식과 거리서명 캠페인 장면, 2002년>

돌이켜 보자.
마산은 1899년 개항이후 일제 강점기의 무차별한 개발과 매립, 해방 후 귀환동포 정착, 6.25 피난민 정착, 60년대 한일합섬과 수출자유지역에 의한 산업화 등 다른 도시가 경험하지 못한 격랑의 세월을 겪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언제 한 번도 도시를 균형 잡힌 시각으로 바라보지 않았다. 도시의 미래에 대해서도 깊은 성찰을 하지 않았다. 천혜의 자연이 있었지만 활용하지도 않았다.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임기응변으로만 해결했다.

도시의 질이 급격히 낮아졌고, 시민들도 도시환경에 불만을 가지기 시작했다.
그런 상황에서 ‘구(舊) 마산형무소 터’를 공원으로 만들자고 나선 것이다.
공원으로 하기에 충분한 땅은 아니었지만, 도심에 나온 시민들에게 짧은 여유라도 즐기게 해주고 싶었던 하나의 작은 몸짓이었다.

이야기를 먼 곳으로 돌려보자.
건강한 사회는 시민 스스로 생활의 제반 문제를 대응한데서 시작되었다.

유명한 런던의 하이드파크는 원래 왕이 사냥을 즐기던 숲이었다. 하지만 도심공원이 없었던 런던시민들의 헌신적 노력으로 세계최고의 공원이 되었다.
협상이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런던시민들이 울타리를 헐어버렸던 것이다.
이른바 오픈스페이스운동, 하이드파크는 이런 격동의 과정을 거쳐 탄생되었다.
영국에서 시작된 '내셔널트러스트운동’도 바로 이 경험을 바탕으로 출발하였다.
지켜야할 가치가 있는 자연적 문화적 유산을 시민 스스로 보존하기 위한 '내셔널트러스트운동’은 1895년 영국에서 시작되었다.
현재 영국 전 국토의 1.5%, 해안의 17% 가량을 소유하여 공익을 위해 사용되고 있다.

                                 <런던 하이드 파크>

이야기 하나가 더 있다.
사람살기 가장 좋다는 밴쿠버 이야기이다.

1886년 5월 12일 오후 7시 30분, 밴쿠버 최초의 시의회가 열렸다.
당시 밴쿠버 시민은 2,600명이었다.
이  첫 회의에서 의원들은 영국해군기지였던 땅 120만 평을 공원부지로 결정하였다. 민간에 매각되어 주택지나 산업단지로 개발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이 공원이 밴쿠버가 세계에 자랑하고 있는 ‘스탠리파크’다.
124년 전, 인구 2,600명 도시에 120만 평의 공원을 만든 밴쿠버의 결정.
이 결정과 이 비전이 오늘날 밴쿠버를 세계최고의 도시로 만든 주춧돌이었다.

                                         <밴쿠버 스탠리 파크>

밴쿠버 시의회 최초의 결정이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깊고도 넓다.
몇년 전, 인구 42만 도시의 마산시장은 1,500평 한국은행 터에 1/3은 건물을 짓고 나머지 천 평만 공원으로 하자는 계획을 발표한바있다.
40만 인구에 1,500평과 2천6백명 인구에 1,200,000평.
왜 마산은 날로 쇠락해가고 밴쿠버는 왜 오늘날 세계최고의 도시가 되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시 본래 이야기로 돌리자.
마산형무소 터의 지난 세월은 질곡의 역사 그 자체였다.
일제통감정치시절이었던 1909년에 부산감옥소 마산분감으로 사용된 후 무려 60여 년 간 감옥으로 사용되었던 자리다.
일제 때는 독립 운동가들이, 해방 후에는 좌우이념갈등과정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갇혔던 곳이다.
3.1운동 때에는 유명한 삼진의거를 비롯하여 마산, 함안, 창원, 웅동 등 인근지역에서 만세를 불렀던 모든 선조들이 이곳에 갇혔다.
아동문학가 이원수, 여성 정치인 박순천도 갇혔던 곳이다.


           <일제기 마산 형무소>            <'마산형무소 터'였음을 알리는 표지석>


정부가 수립되었던 1948년,
마산의 시인 월초 정진업은 이 형무소에 갇힌 친구를 생각하며 갇히지 않았던 시인의 아픔을 토했다. 「골목길」이라는 시(詩)다.

가치운 몸은 달라도
창살 틈으로 보내는 눈초리는
오직 한마음이라                     

네 손발의 사슬이 풀렸기로
오히려 억압은
첩으로 쌓이는데
아직도 무릎 꿇고
무료히 앉아 있을
벗의 닫혀진 억울한 세월을
너는 어이 잠시라도
잊어보는 것이냐?

고문에 항시 못 이겨        
이를 갈던
공포와 저주는
그래도 잊혀지지 않아                         


총을 멘 보초들 서있는
돌문 앞을 지날 때마다
죄 없이 조라드는
겁 많은 마음이

나무 가지 사이로
철창을 노리고
이룩할 민주의 나라                        
이리 더딤을 한탄하면서                              
밖에서 내 다만 참답게
일 하겠노라
인욕(忍辱)의 벗에게
머리 숙이며 가는
밤마다 정이 드는
나의 골목길이 있다.

식민지시대의 감옥은 단지 신체를 속박시킨다는 의미 외에 폭력적인 통치권력의 상징이다. 공원은 근대 시민들이 공유하는 도시의 열린 공간이다.
그러므로 이 터가 공원으로 변한다는 것은 「폭력적인 통치권력의 상징」이 「근대시민의 자유공간」으로 바뀐다는 의미를 갖는다.
우리는 여기에 의미를 부여했다.

       <당시 제시했던 자료 / 왼쪽은 당시 현장상황, 오른쪽은 공원조감도>

이제 세 도시가 통합되면 도시의 큰 그림은 다시 그려질 것이다.
따라서 이 터를 공원으로 하는 문제를 두고 ‘옳다 혹은 그르다’ 식의 논의는 뒤로 미루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이 터를 보니 마산의 도심공원 문제가 다시 떠올라 몇 자 적는다.

공원문제가 이 도시의 쟁점이 된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이 터 외에도 신포동 매립지를 아파트만 지을 게 아니라 일부를 공원으로 하자는 운동도 있었다.
모두 실패하였다. 마산시가 받아들이지 않았다.

현재 지정된 마산시의 공원의 면적은 자그마치 240여만 평이다. 이 면적은 마산 인구 일인당 약 6평 가까이 되는 규모다.
도쿄와 오사카의 공원 면적이 1인당 고작 1평 내외, 세계적인 도시 파리가 3평 반, 몬트리올이 4평, 뉴욕이 5평반인 것을 생각해보면 엄청 큰 규모다.
1인당 9평이나 되는 런던보다는 작지만 어쨌든 통계상으로 마산은 공원의 도시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건 말 그대로 통계일 뿐, 현실은 전혀 아니다.
이미 멀쩡하게 존재하고 있던 산과 계곡을 공원이라 이름 붙여 통계로 잡은 것이다.

이 도시에는 시민들이 손쉽게 이용할 수 있는 공원이 제대로 없다.
해변공원은 아예 없고 만날재 공원은 주로 행사용으로 쓰인다. 양덕동 삼각공원은 접근성이 나쁘다.
서항매립이다, 구항매립이다 하면서 20여 만 평의 해면을 매립하고서도 그럴듯한 도심공원 하나 마련하지 못했다.
오히려 시민들과 바다를 단절시켰고 수변공간계획은커녕 해안 전부를 자동차가 씽씽 다니는 길과 수입 원목들이 차지해 버렸다.

지금 계획되고 있는 ‘마산비전 2020’에 중앙공원, 산호공원, 추산공원 개발을 비롯하여 돝섬유원지개발, 구산해양관광단지개발, 팔용유원지개발 등 공원개발 계획이 다양하게 세워져 있지만 어디 한군데 도심공원은 없다.
엄청난 시설비를 요하거나 이미 존재하고 있는 산을 공원화하는 것뿐이다.

국내외를 막론하고 이토록 철저하게 도심공원이 없는 도시는 별로 보지 못했다.

이래서는 안 된다.
생활 속에서 이용할 수 있는 공원계획이 시급하다.
화려한 언어로 미래를 말하기에 앞서, 도심 속에서 생활 속에서 쉬기도 하고 걷기도 할 수 있는 공원을 시급히 만들어야 한다.
시민 1인당 공원 6평이라는 허구를 현실화시켜야 한다.

해안도시라면,
적어도 바닷가에서 가족이나 친구와 30분 정도는 편안히 걸을 수 있는 공원이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키 큰 나무 아래 잔디 깔린 바닷가에, 사람들이 걷고 자전거가 달리고 벤치에서 연인의 속삭임이 들려야 해안도시 아닌가?

도심공원이 전무한 도시,
바다가 있지만 바다와 차단된 도시,
역사의 가치에 관심 없는 도시,
그리하여 성장 동력조차 상실한 채 인근도시와의 통합 외에 다른 길을 찾지 못하게 된 도시......

이 도시의 '희망찾기'는 어떻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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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유림 2010.01.25 11:40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선배님 저도 찬성입니다.
    그 곳이 공원이 되면 아마도 오동동 창동 거리도 조금 북적이지 않을까 생각을 합니다
    창동에서의 추억이 많은 세대로서 늘 아쉬운 부분이지요
    어차피 구 상권일바에야 추억을 찾아오는 이들이 많이 오는 곳으로 만드는 것도
    참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황량한 그 곳의 모습은 지날때만다 늘 안타깝게 다가옵니다.

    통합 새도시에선 ...잘~ 되길 바랍니다.

    가포탐방때 뵐께요 ^^

    • 허정도 2010.01.25 16:38 신고 address edit & del

      반갑습니다.
      도심공원이 없는 게 마산의 걱정인데 딱히 이곳이 아니더라도 도심에 좋은 공원하나 들어서면 참 좋겠습니다.

  2. 조원문 2010.01.27 11:11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허정도 회장님 정말좋은 마산의 역사를 배우고갑니다
    저도 마산 토박이인데,,,,죄송 합니다,,너무 모르고 있었읍니다,

    지속적인 마산의 미래와 발전을 위해많은 자료보도록 하겠읍니다.
    정말 수고 많이 했읍니다...

    • 허정도 2010.01.27 16:11 신고 address edit & del

      반갑소.
      마산과 관련해 좋은 이야기 많이 해주세요.

2009.11.09 01:00

‘마산’은 언제 어떻게 생겨났을까?


'마산' 지명의 기원에 대한 몇 가지 설이 있지만 아직 정립된 주장은 없다. 지금까지 제기된 주장들을 모았다.

일본인 추방사랑(諏方史郞)은 1926년에 간행한『마산항지』에서 구전으로 내려오던 이야기라고 전제하며
‘임진왜란(1592-1598년) 이후, 각 지역에 전염병이 창궐하여 창원 소재 오산진(현 산호동 용마고 부근)에도 매일 시체가 산을 이루어 50구, 30구 혹은 20구의 시체가 동시에 묻히는 등 참혹한 상황이 되었다.
살아남은 이 지역의 고로(古老)들이 서로 상의하여 유명한 풍수사에게 그 연유와 대책을 묻자 오산(午山)의 오(午)자에 문제가 많아 이런 일이 일어났으니 오(午)자 대신 같은 의미인 마(馬)자를 사용하라고 하여 오산(午山)을 마산(馬山)이라 개명하게 되고 이때부터 마산이란 지명이 생겼다’
고 하였다.

이 주장은『마산시사』를 비롯한 관찬자료와 마산과 관련한 많은 문헌에서 인용하였으며 사실상 지금까지 가장 널리 알려진 마산의 지명 기원설이다.
그러나 이 주장은 옳지 않다. 임진왜란 이전에 간행된 자료에서 마산이란 지명이 여러 군데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근거 없이 구전으로 전해오던 이야기를 한 일본지식인이 활자화한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 조선운송주식회사가 펴낸『조선항만지사정』에서는 마산지명의 기원에 대해
‘조선 제18대 현종(1660년-1674년 재위) 때부터 마산포라고 칭했다’ 고 기록되어 있다.
이 역시 현종의 재위기 이전에 이미 마산이란 지명이 기록에 등장한다는 점에서 잘못된 주장일 수밖에 없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팔도총도>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최초로 마산이란 용어가 등장한다며 그 기원을 주장한 학자도 있다.
하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이 간행된 중종 25년(1530년)보다 100여 년 전인 세종7년(1425년)에 편찬된『경상도지리지』내상조에
‘(경상)우도내상은 창원부에 있는데 바다입구인 마산포와 4리 317보 떨어져있다 - 右道內廂 在昌原府 去海口馬山浦 四里三百十七步所屬’ 라는 마산포에 관한 기록이 있고,
『조선왕조실록』세종10년(1428년) 8월 기록에
 
‘경상도 마산포의 바닷물이 붉게 물들었는데 물고기가 죽은 놈이 있었다 (그 당시 마산만에 적조현상이 발생했던 것으로 보이는 기록이다)’ 는 마산포 기록이 있으니 이 주장도 타당성이 없다.

음차현상으로 마산 지명의 기원에 대해 설명하기도 했으나 근거가 불명확하다.

                                <조선왕조실록 중 세종대왕 편>


몇 년 전에는 새로운 주장이 나왔다.
고려시대 몽고군이 합포에 진주한 사건과 관련이 있다고 한 박희윤의 주장이다.
그는 몽고군이 일본을 침략하기 위해 합포(마산일대의 당시 지명)에 진주할 때,
 
‘산호동 지역 바냇들에 몽고군의 목마장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이로 인해 「용마산」「큰 말굿」「작은 말죽통」 등의 말(馬)과 관련된 지명이 생겨났을 것이다.
또한 용마산 아래에 있는 포구(浦口)라는 의미와 일본원정당시 말들을 실어 나르던 포구(浦口)라는 의미에서 「마산포」라는 지명이 생겼을 것이다’

라고 하면서 그 시기를 고려후기로 추측했다.

박희윤의 주장대로라면 원나라 세조가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이 곳 합포의 자산성에 정동행성을 둔 것이 1274년이고, 두 번째 원정이 1281년이니 지금으로부터 700년 이 더된 시기에 마산이라는 지명이 생긴 것이다.
600여 년 전에 간행된 사료에 마산이란 지명이 수록되어 있으니 앞의 주장들처럼 시기적으로 오류가 있지는 않다.

확인 되지도 않았고 확인할 수도 없는 ‘마산’ 지명의 정확한 기원은 무엇일까?
이 오래된 지명은 언제 무슨 사연을 담고 만들어졌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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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천부인권 2009.11.09 06:33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 허정도 2009.11.09 09:27 신고 address edit & del

      방문 감사합니다

  2. 林馬 2009.11.09 10:13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마산이 언제 어떻게 지명으로 사용되었는지 생각해본바 없지만
    읽어보니 그 역사는 재법 오래된듯하군요.
    좋은 정보 감사합니다.

  3. 이은진 2009.11.10 11:54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마산, 창원, 진해가 통합되는 논의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통합된 도시의 명칭 논란이 야기될 것으로 보입니다.
    이제 창원과 진해의 명칭 유래도 같이 고려한다면,
    통합도시의 명칭 논란에 좋은 근거 자료가 될 것으로 보입니다.

    • 허정도 2009.11.10 13:35 신고 address edit & del

      좋은 생각이네요, 감사합니다.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10 / 새마을운동의 농촌주택개량사업

4) 새마을운동의 농촌주택개량사업 - 2 농촌 주택개량사업은 새마을운동 시작 다음 해인 1972년부터 전개되었으며 담장이나 지붕 등의 부분적 보수와 개량으로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관리들은 초가지붕이 비위생적이고 아름답지 못..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9 / 새마을운동의 농촌주택개량사업

4) 새마을운동의 농촌주택개량사업 - 1 1960년대 이전까지 우리나라의 농촌은 전쟁으로 입은 농토의 피해와 농촌인구의 감소 등으로 아직 근대화의 영향을 받지 못한 채 재래식 농경생활을 유지하고 있었다. 주거환경 또한 전쟁피해..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8 /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3)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 3 1960년대와 1970년대의 주택 시장은 사회의 전체적인 분위기와 맞물려 개발과 성장의 논리가 지배하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 지어진 단독주택은 대부분 도시 한옥과 양식이 가..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7 /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3)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 2 1960년대는 한국사회의 큰 전환기였다. 4·19혁명과 5·16쿠데타에 따른 정치적 격변을 겪었고, 소위 경제개발정책에 따른 제반 개발이 계획적으로 유도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6 /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3) 해방 후부터 제4공화국(1970년대)까지 - 1 1945년 일제의 압제에서 벗어나면서 비로소 주체적인 주거문화를 창달할 수 있는 계기를 맞게 되지만 경제 사회적 제반 여건이 불비하여 주체적인 역량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5 /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

2)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까지 - 2 일제하의 중·상류계층의 주택 유형으로는 양식주택과 절충식(개량식)주택·개량 한옥·문화주택·공동주택·영단주택 등을 들 수 있다. 양식주택은 서양식주택을 말하며, 절충식 주택은 과도기적 상황에..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4 / 개항기부터 일제강점기

2) 개항기부터 일제시기까지 - 1 구한말(舊韓末)까지도 조선 사람들이 살았던 보편적인 주거 유형은 한옥이었다. 1882년 그리피스(W. E. Griffis)가 쓴 한국에 관한 역사서 『은자의 나라 한국』에는 당시 전통 한옥을..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3 / 조선시대 이전

1) 고대에서 조선시대까지 - 3 조선시대는 우리나라 주거문화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시기이다. 반상(班常)을 철저히 구분한 신분사회였기 때문에 신분에 따라 주택의 크기나 형태를 규제하는 가사규제(家舍規制)가 있었다. 신..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2 / 조선시대 이전

1) 고대에서 조선시대까지 - 2 주거사(住居史)에서 청동기시대와 초기철기시대를 구분하는 또 하나의 지표는 구들의 시작이다. 한국 주거문화의 정체성을 압축적으로 나타내는 구들은 난방기술의 획기적인 발전인 동시에 지상주거로의 변..

경남지역 주거변천사 -  1 / 조선시대 이전

오늘부터는 <경남지역 주거변천사>를 포스팅하겠습니다. 6~7년 전에 『경남도사』에 싣기 위해 간략히 쓴 글인데 출판될 기미가 보이지 않아 블로그에 올립니다. 어차피 공유하기 위한 글이니 이해하리라 생각합니다. 한반도 동남부에 ..

기억을 찾아가다 - 25 (마지막 회)

25. 3·15의거에 대한 기억 「그날 나는 ‘극장 구경 시켜주겠다’는 주무돈이란 동네친구의 호의에 끌려 10리 가까이 되는 길을 걸어 ‘시민극장’으로 갔다. 그때 나는 대학입시에 낙방한 직후라 의기소침해 있던 상황이었다. 우..

기억을 찾아가다 - 24

24. 이승만 행사 - 독립협회와 청년 이승만, 노인잔치...... 내 고등학교시절의 어느날 동회 서기가 들고온 책자를 잠시 훑어본 기억이 남아있다. ‘한국 정치인 99인집’이란 제목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이승만편이 현격히..

기억을 찾아가다 - 23

23. 떠돌이들, 좀도둑 전쟁이 끝나자 대다수의 사람들은 고향으로 돌아들갔지만, 상당수의 사람들은 남아있었다. 좌우갈등의 와중에 있었던 몸이라 돌아갈 수 없는 처지였다고 들은 문씨 같은 사람들도 있었는가 하면, 가봤자 땅뙈기 ..

기억을 찾아가다 - 22

22.기합, 주먹자랑, 몸단련 중학교시절에도 조금은 의식되었지만 신경을 곤두세울 정도는 아니었었는데, 고등학교에 들어가자 그 문제들은 신경의 상당부분을 자극하여 행동거지의 상당부분을 조종하고 지배할 정도로까지 작용했다. 소위 ..

공간의 재탄생 - 재생 건축 '선유도' 02

지난주에 이어 녹색 기둥의 정원 에서부터 선유도 이야기를 이어 나가보도록 하겠습니다. - 녹색 기둥의 정원 정수지의 콘크리트 상판 지붕을 들어내 기둥만을 남겨 만들어진 이 정원은, 선유도 이야기관 의 설명에 의하면 ‘휴식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