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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8.05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73) - 강점제3시기

오늘도 재미있는 사진 석 장 소개합니다

23. 구마산공설시장

지금의 부림시장입니다. 1924년 개설된 시장으로 당시 마산에서 가장 큰 시장이었습니다. 특히 마산장날인 매 5일과 10일에는 대성황을 이루었습니다. 건물은 연와조와 장가(長家)점포 3채였고 그밖에 아연지붕의 바라크식 건물 여러 동이 있었는데 수많은 노점 상인들이 어울려 저녁시장 시간이면 언제나 크게 붐볐다고 합니다.

 

24. 원동무역주식회사

조선회사령이 폐지되자 1920년 5월 16일 자본금 50만원으로 창립한 마산 최초의 한국인 회사입니다. 이 사진은 1927년 8월에 착공하여 1928년 4월에 준공한 철근콘크리트 2층 현대식 건물로 지은 사옥입니다.

외형이 변하긴 했지만 아직 원형이 남아있으며 건물 앞에는 이 건물의 역사를 말해주는 표지석이 서있습니다.

 

25. 공사 중인 마산공립중학교

마산공립중학교는 1936년 개설한 지금의 마산고등학교 본관입니다. 수년 전에 헐려 없어지고 새로운 건물이 이 자리에 들어섰습니다. 마산공립상업학교(현 용마고, 전 마산상고)가 한국인 위주로 발족한 것과 달리 마산공립중학교는 입학생의 대다수가 일본인이었습니다. 한국인 학생은 친일파 자제이거나 성적이 우수한 극소수의 학생만 입학할 수 있었습니다. 아래 사진은 헐려 없어진 건물 외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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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09.10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6) - 강점제3시기

<마산의 상업 및 유통·저장산업 등>

강점 제3기 마산의 산업 중 상업부분을 살펴보겠습니다. 우선 시장입니다.

마산의 시장은 1924년 개설한 원마산의 부림동공설시장과 1923년 신마산에 개설된 반월동공설시장 외에 구마산 어시장․신마산 어시장․우시장․신마산청과시장이 있었습니다.

다음 사진은 1937년경 부림시장 전경입니다.

 

그리고 1930년대 들어서 마산해산주식회사(1940년)와 부림동(富町) 부영(府營)청과시장(1941년)이 전 강남극장 앞에 개설되었습니다.

1931년 경상남도가 펴낸 통계연보에 의하면, 당시 마산에서 법인으로 등록된 회사는 주식회사 20개와 합자회사 5개로 총 25개가 있었는데 그 중 한국인이 소유한 회사는 8개였습니다.

1940년에는 법인조직으로서 마산에 본사를 갖고 있던 기업체는 주식회사 21개사․합명회사 2개사․합자회사 11개사 등 모두 34개로 9개가 늘어났습니다.

1920년 한국인에 의해 최초로 설립된 원동무역회사가 이때까지 건재하였습니다.

일제강점 제3기에는 이전까지 주로 도소매업의 판매업에만 진출해 있던 한국인들도 제조업 등 다양한 경제활동을 벌이게 됩니다. 회사령 폐지 이후 꾸준히 지속된 한국인들의 자본축적의 결실이었습니다.

1930년대 이후 한국인에 의해 설립된 회사는 합자회사환천(丸天)상회(1933년, 남성동 93-1번지, 미곡․자동차부품 판매 및 정미업), 신정상사주식회사(1935년, 창동 123번지, 해륙물산 위탁판매와 무역업 및 잡화 등 판매), 합명회사 낭화(浪花)양품점(1937년, 동성동 254번지, 양품점), 석산상사주식회사(1939년, 창동 49번지, 초자(硝子)․철물 및 페인트 도소매업) 등이었습니다.

원마산의 중심 상가와 부림시장 및 남성동 해안 일대에는 곡물과 해산물, 잡화 등을 파는 상인들이 많았으며, 일본 상인들은 주로 신마산 상가에 점포를 가진 자가 많았으나 원마산 지역에 진출하여 크게 사업한 사람도 있었습니다.

이 외에 보관․창고업도 성행하였는데, 기존의 마산창고주식회사 외 조선미곡창고주식회사 마산지점이 대표적인 창고였습니다.

조선미곡창고주식회사는 1930년 11월 경성에서 설립된 회사로, 1943년 신포동 1가 해안매축지(현 마산시 의회 청사 건너 편)에 임해창고를 건립하여 산미증산계획과 군량미 조달에 전략적으로 이용되었습니다.

해방 후 오랫동안 대한통운 창고로 사용되다가 몇 년 전 철거되었습니다. 해방기와 전쟁기를 거치면서 피난민 거처로도 사용된 건물로 격동기 마산의 역사를 온 몸에 담았던 건물이었는데 그만 사라져버려 아쉽습니다.

다음 사진이 조선미곡창고건물입니다.

 

1930년 4월 1일 경성에서 설립한 조선운송주식회사도 마산에 지점을 두었습니다. 위치는 중앙동 2가 8번지에 있었으며 철도국 지정으로 철도화물을 취급했습니다.

이 외에, 정미업은 1924년 당시 25개소였으나 1930년경부터 일본인들이 운영하는 정미소가 점차 쇠퇴하여 1939년에는 전체 정미업소는 16개였습니다. 그 중 일본인이 경영하는 회사는 3개소뿐이었습니다.

1907년 마산철공소에 의해 처음 시작된 마산의 철공업은 1939년에는 10여개의 중소 철공소가 가동되고 있었는데 한국인이 경영하는 업체는 2개소였습니다.<<<

 

2012/07/3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0) - 강점제3시기

2012/08/0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1) - 강점제3시기

2012/08/1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2) - 강점제3시기

2012/08/20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3) - 강점제3시기

2012/08/27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4) - 강점제3시기

2012/09/0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25) - 강점제3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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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12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8) - 강점제2시기

<회사령 폐지와 마산도시변화>

1920년 4월 ‘회사령’이 폐지되었습니다.

‘회사령’은 1910년 12월 30일 조선총독부가 공포해 3일 만인 1911년 1월 1일부터 시행한 ‘기업통제령’입니다.

분문 및 부칙 20개조로 되어 있는 회사령의 주요 내용은 한국에서의 회사설립 및 한국 외에 설립된 회사가 한국 내에 지점을 설치코자 할 때는 조선총독부의 허가를 받아야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회사령’의 표면상 이유는 한국의 산업을 위한다는 것이었으나 그 본질은 식민지인 한국에 일본 국내공업과 경합되는 근대공업을 억제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한국의 기업 성장을 억제하고 한국을 일본자본주의를 위한 원료공급지로, 상품판매시장으로 육성한다는 의도로 만든 규정이었습니다.

회사령은 1910년대 내내 한국 내에서 한국 사람들이 마음대로 기업을 할 수 없게 통제함으로써 한국의 산업 발전에 큰 저해요소가 되었습니다.

이 법령 때문에 1910년에서 1920년 사이 10년 동안은 공업발전의 지표로 삼을 수 있는 도시인구증가율이 연평균 1.6%로 총인구 증가율 2.6%보다 1% 정도 낮았습니다.

이와 같은 ‘회사령’이 폐지되자 일본 자본가들이 대거 한국으로 진출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변화는 마산에도 영향을 끼쳐 일본인들이 기업을 앞세워 본격적으로 원마산에 진출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뿐만아니라 회사 설립을 마음에 두고 있었지만 뜻을 이루지 못했던 마산의 한국 자본가들도 회사를 설립하였습니다.

1920년대 초기 마산의 회사 설립 상황을 보면 주식회사마산정미소(1919년 10월 15일 설립, 자본금 10만원)․남선양조주식회사(1919년 11월 14일 설립, 자본금 10만원)․마산창고주식회사(1920년 5월 2일 설립, 자본금 10만원)․원동무역주식회사(1920년 5월 16일 설립, 자본금 50만원)․마산운수합자회사(1922년 9월 1일 설립, 자본금 7천원) 등입니다.

이 중 대표적인 한국인 무역회사가 원동무역주식회사입니다.
아래 사진은 1928년 신축한 남성동 원동무역 사옥의 당시 모습과 현재의 모습, 그리고 원동무역 터 앞에 세워 놓은 표지석입니다.
 


이 회사는 마산 경제계에 진출한 최초의 한국인 주식회사였으며 회사의 대표는 지역 유지 옥기환이었고, 업무는 육산부․해산부․위탁부․부대사업 등이었습니다.

옥기환 선생은 마산 지역에서 추앙받던 지도자로 일찍이 노동야학과 민족교육에도 관심이 높았으며 원동무역의 수익금으로 상해임시정부를 지원하기도 했습니다.

해방 후 미군정기에 초대 마산부윤(시장)을 지낸 분입니다.



1910년대에는 한국인 회사가 단 하나도 없었고 1923년 이후로도 회사 설립은 드물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때의 회사설립에 대한 지역사회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회사령 폐지에 따른 마산지역의 산업화는 도시변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1920년대 중반 쯤 부터 원마산(마산포)에 대대적인 도로개설공사가 일어났으며, 필요한 산업용지를 확보하기 위해 마산 앞바다가 매립으로 메워졌습니다.
그리고 신마산과 원마산으로 나누어져있던 두 도시의 중간지역(중앙마산, 도립의료원 일대)이 개발되기 시작합니다.<<<


2011/11/2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5) - 강점제2시기
2011/11/2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쳔사 (86) - 강점제2시기
2011/12/0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7) - 강점제2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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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장복산 2011.12.12 16:55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1928년이면 83년 전에 세원진 건물이군요. 표지석을 세워 둔 것으로 보아 역사적 의미가 매우 큰 건물인데...점점 원형을 일어 가고 있군요. 이런 의미 있는 건믈을 의미 있는 용도로 사용할 수 있는 방안은 없을지 궁금합니다. 예를 들면 개인 노래방이나 영업장 말고 상공회의소 건물 같은 공공성이 있는 건물로 사용하면 보존이 가능할 것 같습니다.

    • 허정도 2011.12.12 23:24 신고 address edit & del

      요즈음 진해 일로 너무 신경을 많이 쓰는 것 같습니다. 제가 뭘 도와 드릴까 생각하지만 해드릴 것이 없습니다. 미안합니다, 선생님.

2009.11.25 00:32

250년 된 원마산(마산포) 골목길



「유장근 교수의 도시탐방대」 세 번째 참석 후의 글이다.
원마산(마산포)에 자연취락이 형성되면서 생긴 ‘길’에 대한 이야기다.

1760년, 마산창(馬山倉)이 설치된 후 마산이 도시 형태를 띠면서 도시공간의 성격도 형성되었다.
요즈음 말로 하자면 마산창 주변은 공공업무지구로, 현재 황금당 옆 골목길 주변은 상업지역으로, 동성동과 오동동 즉 코아양과점 뒤편 일대는 배후 주거지로 사용되었다.

‘·······사람이 다니면서 길이 생겼다’는 루쉰의 말처럼,
마산포에도 사람이 모이고 사람이 다니면서 ‘길’이 생겼다.
자연취락 특유의 좁고 꾸불꾸불한 ‘길’이었다.

<옛 마산 사람들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골목길>

지금도 생생히 남아있는 원마산의 좁은 골목길들은 멀게는 250년 가깝게는 200년이 족히 된 마산사람들의 ‘길’이다.
조선시대를 살았던 이곳 사람들이, 때로는 조창 쪽으로 때로는 해변의 선창 쪽으로 아침저녁 부지런히 다녔던 바로 그 길이다.
단지 길로서만이 아니라 마산 선인들의 숨결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삶의 흔적이기도 하다.

남성동 성당 옆 좁은 내리막 길도,
마산사람 누구나 친숙한 전설적인 떡볶이가게 ‘복희집’ 앞길도,
삼겹살로 유명한 삼도식당 골목도,
홍화집과 골목식당 길도, 아구찜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복잡하게 얽혀있는 동성동 좁은 골목길도,
옛 마산사람들이 걸었던 바로 그 ‘길’이다.

‘아는 것만큼 보이고 보는 것만큼 느낀다’고 했는데,
이 좁고 보잘 것 없는 골목이 ‘조선시대 길’이라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오늘도 사람들은 무심코 길을 지난다.

도시탐방대원들과 골목길 내력을 이야기하고 복원도와 비교확인도 하면서 이 도시의 지난 시간을 맛보며 함께 걸었다.
간간이 들리는 옅은 탄성과 함께 탐방의 즐거움이 거리를 메웠다.



         <위 부터 남성동성당내려가는길, 삼도식당 길, 복희집, 홍화집 길>


<마산사람들의 자랑이었던 「원동무역」>

탐방길 시작한 후, 마산창(馬山倉), 매립 전 해안선, 어시장의 진동골목, 대풍골목, 서굴강, 동굴강을 지나 도착한 곳은 원동무역주식회사.

원동무역은 1919년 9월 독립지사 옥기환 선생과 명도석 선생이 마산 최초로 설립한 회사다.
현재 남성동 91-1번지에 남아 있는 사옥은1927년 8월에 착공해 1928년 4월에 준공한 철근콘크리트 2층 현대식 건물이다.
영욕의 세월을 지내고 외피만 바뀐 채 오늘도 말 없이 거리를 지키고 있었다.
설계한 사람이 누구이지 시공한 이는 또 누구인지 알길 조차 없지만 세련된 근대미의 격조 높은 이 건물은 일제기 마산포 사람들의 자부심을 한껏 채워준 건물이었다.
이 회사에서 남긴 이익금의 일부가 백산 안희제 선생에게로, 상해임시정부로 건너갔다고 한다.

옥기환 선생은 해방 후 초대 마산부윤(마산시장)을 지냈고, 허당 명도석 선생은 건준에 참여하는 등 해방 후에도 많은 일을 했다. 봉암로에 가면 허당 선생의 추모비도 있다.
마산이 배출한 주요인물 중 친일이니 친독재니 궂은소리 때문에 기념사업에 시비가 끊이지 않는다. 하지만 이 두 분의 삶에는 흠결 있다는 소리를 듣지 못했다.
암흑기의 자랑스러운 마산 어른이시다.


          <표지석 / 원동무역의 본래 모습 / 현 상태, 3층부분은 뒤에 증축>


<원마산 복원도 제작>

10여 년 전, 도시연구를 하면서 원마산(마산포)의 도시형태를 복원했다.
1912년 조선총독부가 공포한 사정지적도(査定地籍圖)를 이용해 분할과 합병으로 변형된 지적도의 원형을 추적해 복원하는 작업이었다.

10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지난했던 작업이 끝난 후 복원도를 들고 시내로 나갔다. 실제상황과 확인해보기 위해서였다. 현장 확인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골목골목 다니며 현장과 도면을 비교하면서 두 번 놀랐다.
도면상 복원한 작업의 정확도에 스스로 놀랐고, 복원도에 나타난 그 복잡한 골목길들이 그때까지 대부분 원형대로 보존되어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지난 토요일, 도시탐방대가 걸었던 길은 바로 그 때 확인되었던 길들이었다.
조그맣게 복사된 복원도와 창동 남성동의 골목길을 대조하면서 탐방대원들이 즐거워하는 모습에 나도 즐거웠다.

<1908년 조선통감부 철도관리국에서 발행한 '마산전도' / 오른쪽 단선으로 표시한 길들이 원마산 골목길이다>


<1916년 조선총독부 육지측량부에서 제작한 '마산, 1/10,000지도' / 새로난 신작로와 원래의 골목길들이 그려져 있다.>

<복원도 / 1910년 경의 것이지만 도시계획이 없었던 시기라 조선시대로 까지 추정가능하다>
    <원마산의 옛 길 / 노란 색이 복원도에서 확인된 길인데 대부분 지금까지 원형 그대로 남아 있다>


뒤늦게 합류한 ‘창동의 산 역사’ 이승기 선생님의 창동과 극장과 영화에 읽힌 이야기가 분위기를 한층 더 띄웠다.
듣는 이와 말하는 이 즐겁기는 매한가지, 지나간 마산이야기에 토요일 오후가 금세 지나갔다.





<도시에서 역사란?>

마음만 먹으면 현대기술로 어떤 도시라도 만들 수 있다.
넓은 도로를 뚫고 번쩍번쩍한 건물도 짓고 키 큰 나무도 얼마든지 심을 수 있다. 그러나 도시의 역사를 급조할 수는 없다.
때문에 역사의 흔적을 느낄 수 있는 곳이 남아있다면 우리는 그것을 소중하게 보존해야 하고, 다음 세대에 잘 넘겨주어야 한다.

웬만큼 여행을 해본 사람이라면 잘 알겠지만 여행이란 것이 대부분 도시의 역사를 체험하는 것이다. 그래서 외국의 어떤 도시에서는 심지어 그들의 부끄러운 과거인 조계지까지도 복원하여 관광자원으로 이용하고 있다.
이처럼 도시의 역사는 단지 옛 모습을 보여주는데 그치지 않고 그 도시의 소중한 문화자원, 관광자원으로 활용되는 것이다.
미국에서 서부 개척시대의 술집 따위들까지도 현재 사용하고 있는 집주인에게 국가재정까지 지원하면서 함부로 바꾸지 못하게 하는 까닭은 바로 이 때문이다.

마산 도시의 역사를 모두 복원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역사를 가진 도시에서 어떠한 역사적 흔적도 찾을 수 없고, 이를 위한 노력조차 하지 않는는 것은 심각한 도시적 비극이다.

창동과 동성동 일대에 남아 있는 골목길들은 자연취락을 원형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곳이며 마산의 도시역사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곳이다. 다른 도시에서는 도저히 이런 길을 만날 수 없다.
혹자는 꾸부러지고 좁은 골목길이 수치스러운 전근대적 모습이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 길은, 오늘의 마산이 있기까지 마산사람들이 서로 부대끼며 살았던 발자국이며 고금 모든 마산 사람들의 호흡과 땀이 녹은 생생한 기록이다.
그 역사적 가치는 어디에도 비할 바가 아니다.

한때 번성했던 마산 오동동이 최근 들어 점차 쇠퇴해지고 있는데 이곳을 살릴 길이 이 오래된 골목길 속에 묻혀있을 수도 있다.

생각해 보자.
250년이라는 긴 시간의 멋과 맛을 느낄 수 있는 ‘골목길’이 남아있다면, 우리는 어디로 가서 하루저녁 친구와 즐길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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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옥가실 2009.11.25 09:46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아침에 좋은 글 보고갑니다.
    특히 새로 작성한 원마산도로 지도가 좋습니다.
    이걸 들고 다시 옛길 탐사를 좀 해야겠군요^^

    • 허정도 2009.11.25 18:02 신고 address edit & del

      반갑습니다.
      공부해야할 것도 많을텐데 시민들을 위해 봉사하신다고 고생이 많습니다.
      언제 날 잡아서 물메기탕이나 한 번 먹읍시다.

  2. 영영사랑 2009.12.01 00:20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남성동,창동,복희집.. 떡볶이,오징어튀김.... 감동입니다. 혹시 아시는지요? 마산에는 골목이 많아 길을 잃었을때 어떻게 큰길로 나오는지? (하수구관따라 가다보면 큰길이 나왔어요 경험입니다) ?? 즐겁게 보고갑니다

    • 허정도 2009.12.01 10:40 신고 address edit & del

      하수구관 따라가 아니라 하수구 두껑따라 아닌가요?
      내 눈에는 하수구 관이 안 보이던데......
      방문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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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을 찾아가다 - 8

8. 한국전쟁기의 학교수업 Ⅱ - 떠돌이 수업 초등학교 5학년 때였던 1952년의 학교생활엔 참 변화가 많았다. 담임선생님도 세 번이나 바뀌었고 교실도 다섯 번이나 옮겨 다녔다. 그리고 전입생도 그 해에 갑자기 불어났다. 처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