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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2.27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139. 노일전쟁과 율구미

 

139. ·(·) 전쟁과 율구미(栗九味)

 

 

노국의 조계지인 율구미는 190315일을 마지막으로 노국 수변 8명이 철수한 후에는 공지화되었다.

 

이를 그냥 둘 수 없어 노국 영사 카자코브는 치지코브라는 자에게 그곳을 관리 시켰다. 관리 조건은 마산포에 입항하는 노국 군함에 공급할 용수정(用水井) 하나를 마련할 것과 산에 감시인을 두기로 하고 매월 10원씩 주던 것을 무급으로 하되 한국인에게 소작을 시켜 수확된 절반을 취득케 하였다.

 

노일 전쟁이 일어나 18일 치지코프가 마산포를 철수할 때 그가 가졌던 상품을 일본인 강기(岡崎)라는 자에 매도한 것이 연고가 되어 율구미 조계지를 이 강기(岡崎)가 관리했다.

 

또 부산에 살던 일본이 강본(岡本)이라는 자가 로인(露人)과 친했기 때문에 치지코프로부터 호텔 관리를 의뢰받은 관계로 같이 그 관리에 관계했다. 노일전쟁이 일어난 뒤 1904518일 조선정부는 조로(朝露)조약을 폐기키로 선언했다(·로 조약폐기칙선언서·露 條約廢棄勅宣言書). 1조에 한·(·()) 양국 간에 체결한 조약과 협정은 폐파(廢罷)하고 실시(實施)할 사().

 

따라서 190064일 외부통상국장 정대유와 마산 노국부영사(露國副領事) 소코브가 이에 체결한 율구미호약(栗九味互約)도 폐기됨과 동시에 율구미 노국 조계지는 자동적으로 조선정부에 복귀된 것이었다.

 

조선 정부는 조로(朝露) 조약의 폐기와 아울러 감리서에게 훈령하여 이를 정식으로 접수하고 주체적 입장에서 지방민을 위해 유효하게 활용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이를 등한시 했던 것이다.

 

그러나 안하무인격으로 횡포를 자행하던 일인들이 율구미에 손을 대기 시작했다. 즉 길야문길(吉野文吉)이라는 자는 전쟁이 일어난 1904년 여름부터 가을에 걸쳐 율구미의 재목을 맘대로 벌채한 것이 오천 원어치나 되고 그 수는 부지기수였다. 그 후 전술한 로인(露人) 치지코프가 철수할 때 그의 상품을 샀다는 강기(岡崎)90여 만원어치나 벌목하여 울창했던 율구미는 황폐하고 말았던 것이다.

 

율구미가 무방위 상태에서 일인들의 남벌로 황폐해가는 것을 보고도, 중앙 정부로부터 지령이 없어 감리(군수)는 외부대신에게 그것을 관리함이 타당한지 여부를 질문했던 것이다. 일본 영사 삼포미오랑(三浦彌五郞)은 이 기회를 틈타 율구미를 일본 세력권 내로 확보해두기 위해 일본 천엽현(千葉縣) 어업단을 이주시킬 계획을 추진시켰던 것이다.

 

그때 천엽현 어민들은 고기가 잡히지 않아 조선 남해 연안의 적지(敵地)에 그들 어민을 이주시킬 목적으로 천엽수산시험장장(千葉水産試驗場長) 이하 그 관하 어업 대표자가 시찰차 마산에 오게 되었다.

 

이들은 1904929일 마산 일본영사 삼포미오랑(三浦彌五郞)를 찾아가 그에게 협조를 구했다. 삼포(三浦)는 이들 시찰원들을 데리고 이곳을 답사했는데 먼저 50, 200명을 이주시키겠으며 1호당 일백 원씩 모두 오천 원의 보조로 19054월에 이주 실행을 하겠다고 했다.

 

이 조계지 면적은 30여만 평인데 그 5분의 3은 산지와 경사지이며 거기서 받은 30만 평(원문에는 두락) 중 논은 2백여 두락이고 수전(水田)수확은 벼 150석이 된다.

 

벼 일석을 5원으로 치면 총액 750원이 되고 밭에서는 연 수입 백 원은 내려가지 않을 것이라고 하였다. 이 가운데는 종래의 조선인 소작 14, 15인이 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 땅은 이주 어민의 경작지로 정하고 연 수입은 어민들의 적립금만 제외하고는 모두 그들이 찾아가도록 할 것이라 했다.

 

이 무렵 천엽현(千葉縣) 수산시험장장(水産試驗場長)에게 마산 일본영사가 어민 이주를 위해 사전조건을 다음과 같이 내세웠다.

 

(1) 마산 일본영사의 독단으로 율구미의 사용을 묵허(黙許)하는 것이므로 전쟁 계속 중에는 아무 일이 없겠으나 영원한 것은 보증하기 어렵다.

(2) 이주 어민이 올 때는 감독인을 보낼 것.

(3) 이주 어민이 다른 곳으로 전업하여도 억제하지 않겠으나, 단 전업에 관한 제정(提定)을 요한다.

(4) 이주자 조난을 위해 그 적립금을 마산 일본영사에 납입한다.

(5) 어민은 군용어부의 명의로 율구미에 이주시키고 조선 해수산조합 이외에 둔다.(이때 해수산조합의 감독권은 부산 일본영사가 가지고 있었다.)

 

시찰원 일행이 전기(前記) 사항에 합의를 본 106일 귀국 도상에 올랐는데 마산 일본영사는 곧 이 사실을 일본 외무대신에게 품청(稟請)했다.

 

율구미는 노국 조계지였으나 그 조약이 폐기되어 조선 정부에 복귀된 것인데도 이같이 법적 원칙을 무시하고 마산 일본영사가 그들의 국가권력을 배경으로 일본 어민을 이주시킬 계획을 서둘렀다. 이 얼마나 침략적이며 만행이냐. 이 한 가지 일로써 나머지 일을 상상해 보라.

 

마산 일본영사의 품청(稟請)에 대해 외무대신은 동년 1025일자로 회훈(回訓)을 통하여 재마산 노국 조차지가 소멸할 것은 의심할 수 없는 사실이라 하겠으나 일단 소멸한 이상은 조선 정부에 복귀해야 된다는 유권적 해석으로 훈령하였다.

 

그 후 천엽현(千葉縣) 지사와 마산 일본 영사는 거듭 어민 이주를 청허해 줄 것을 일본 외무대신에게 요청하였으나, 동년 1122일 부산 일본 영사에게 한 훈령 마산포의 노국 조차지에 관한 외무성 의견서가운데 광무 4330일의 조약 제3항에 의하면 만일 조차지 내에 조선인민의 토지·가옥 등이 있을 때는 조선 정부에서 이를 매상(買上)하여 노국에 인도한다. 운운으로 규정되어 있으므로 해() 민유지(民有地)는 조선 정부에서 매상(買上)하여 조선 정부로부터 다시 노국(露國) 정부에 인도한 것으로 단순히 해() 지소(地所)를 조선으로부터 다시 조차한데 불과하고 노국 정부에서 직접 민유전(民有田)을 매수했다고는 할 수 없다.

 

따라서 로조(露朝)조약의 폐기 결과 해조차권(該租借權)은 당연히 소멸하였으니 율구미 조차지는 조선 정부에 귀속한다는 유권 해석을 내렸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에도 아랑곳없이 19051월 일본 천엽(千葉) 어업자 20여 명의 총대표 길야문길(吉野文吉, 千葉縣 夷隅郡 수산조합 이사)은 다시금 율구미의 일부를 어업 가근거지로 사용케 해줄 것을 마산 일본 영사에게 출원(出願)하였다.

 

이때 마산 일본 영사는 일시 사용이라는 조건하에 통감정부의 허락을 받아 드디어 이를 허가하고 말았다. 당시 조선 정부는 주체성이 상실되어 친일 매국노가 가득 차 있어 일본 영사들이 이러한 불법을 감행해도 하등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실로 통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마산 일본 영사의 허가를 받은 일본 천엽촌 수산연합회는 현비(縣費) 보조 4천원을 얻어 먼저 20명의 어부를 선발하여 19052월 전 율구미 북서안에 불법 이주를 감행했다.

 

 

<일본 어업이민지였던 율구미 천엽촌 / 율구미는 국립마산병원과 창원기상대 일대의 산 전체를 말하며, 일본어민들이 정착했던 천엽촌의 위치는 창원기상대 인근에 보이는 마을이 있는 곳이다. 지금도 일본인들의 흔적이 남아 있>

 

 

이를 근거로 어획물 정리장을 건설하여 약권현망일통(鰯權現網一統), 조정승(鯛廷繩), 수조망(手操網) 등에 종사케 하고 19065월 중에는 다시 일본 당국에 80여 명의 이주를 요구했다. 그러나 당시 노국과의 전후 고말(姑末) 교섭이 완결되지 않아 허가하기 어렵다는 것을 동현지사(同縣知事)에게 통보하였다.

 

이 결과 50명만이 이주했는데 이 해 대실패를 하여 사망자와 귀향자가 생기고 잔류자는 30명에 불과하였다.

 

동년 12월 통감대신은 조선 의정부 참정대신에게 재마산 구로국(舊露國) 조차지는 일본 어민의 근거지로 극히 적당하여 전년 이래 해목적(該目的) 이용 중에 있으므로 당분간 차용하겠다는 것을 조회하여 동년 1220일 조선 친일 매국 정부의 동의를 받아 천엽(千葉)어업단의 사용이 묵허(黙許)되었던 것이다.

 

한편 일로(日露) 전쟁이 일어난 뒤로부터 전쟁이 끝나고 로인(露人)이 다시 율구미로 돌아올 때까지 율구미 관리 상황은 그 조계지에 조선인 소작인이 14,5이나 되었다. 이들 작물은 사음(舍音) 하성겸(河聖兼)이 받아 매각하여 그 대금 약 270원을 전후(戰後) 치지코프가 돌아 왔을 때 이를 지불했던 것이다.

 

1906년에 이르러 부산 노국영사 티 아이 봐시리트가 마산 겸임 영사로 마산을 관리하게 된 뒤, 종전에 치지코프가 가진 것과 동일한 조건으로 노국에 귀화한 조선인 이봉형(러시아 명 키리코오프)에게 관리시켜 취득케 했다.

 

관리 로인(露人)이 마산으로 돌아오고 율구미의 황폐가 문제로 대두되자 마산 일본 영사는 일인의 도벌을 조선 측에 전가시키기 위해 그곳 토지와 산판송추(山坂松楸)의 관리를 감리서에 의뢰했다.

 

이에 감리측은 응낙하지 않았다. 19066월 초에 귀환했던 로인(露人)이 돌아와 율구미의 책임을 일본 측에 추궁하게 되자, 일본 측은 우리는 무관하며 감리서에 그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여 감리 측은 여러 번 추궁을 당하게 됐다.

 

천인공노할 일본의 간사한 태도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감리는 로() 영사가 래주(來駐) 이전에 이에 대한 조선 측의 대책을 외부대신에게 청훈(請訓)하였던 것이다.

 

한편 1907년에 율구미에 불법 이주한 천엽현 어업단은 다시 실패하여 동년 말에는 재류자 11명으로 줄어들게 되었다. 1908년에는 어획의 호조를 가져와 이주자 19명의 증가를 보게 되고 19096월 현재에는 52명으로 증가하였다.

 

1909년으로부터 3년간은 매년 5천원의 현비 보조를 받게 되어 있었다. 이들 자본과 현비 보조는 다음과 같다.(1909년까지)

 

율구미 천엽(千葉) 어업단의 자본 및 현비 보조액

자본 수입액, 현비 보조액 4,000원 합계 4,000(비고 ; 수산연합회 보조) / 원본에는 1906년으로 실려 있으나 그 이전의 것으로 보임

1906년 자본 수입액 2,500원 현비 보조액 8,000원 합계 12,500

1907년 자본금 수입액 2,500원 현비 보조액 5,000원 합계 7,500

1908년 자본금 수입액 2,500원 현비 보조액 5,000원 합계 7,500

1909년 자본금 수입액 현비 보조액 5,000원 합계 5,000

 

그 뒤 율구미 노국 조계지는 일본 육군성이 노국에서 4만원에 이곳을 매수하여 일본 육군 군용지로 만들었다. 그리고 율구미에 불법 이주한 천엽 어업단도 1915년에는 보조의 길이 끊어져 어호(漁戶)의 태반은 귀향하고 그곳은 마산 중포병대의 군용지, 군용림이 되었다.

 

일제 치하는 마산 일본학교 조합이 그 관리를 위촉받아 그 수입을 교육비에 충당해 오고 있었다,

 

율구미는 1904518일 조로(朝露)조약이 폐기됨에 따라 이같이 일인들이 불법 점거하여 막대한 이익을 누렸다는 것은 마산 항민은 말할 것 없고 국가적으로 크나큰 손실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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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1.09 00:00

김형윤의 <마산야화> - 132. 아라사 함대 입항

132. 아라사 함대 입항

 

 

아라사(노국의 별칭) 함대가 마산포에 투묘(投錨)한 것은 1899(광무 3, 명치 32)이 처음이었다.

 

주한공사인 파브로프가 탑승한 군함 만츄리아 호가 인천에서 일본 장기(長崎)를 거쳐 상해로 간다 하고는 줄곧 마산으로 들어왔다.

 

 

<알렉산드로 파브로프 주한 러시아 공사>

 

 

그 뒤를 이어 같은 동양함대 사령장관 마카로프가 좌승(座乘)한 루리크호 외 한 척과 합류했다.

 

그들은 마산만을 중심으로 일대의 해심과 연안을 상세하게 측량하고 군사상 필요한 육지를 구획, 포목을 꽂았다.

 

그들은 광대한 토지를 점거하여 용암포와 같이 해군의 근거지로 삼으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에 못지않게 해군 반거지(蟠據地)로 타정(唾涏) 삼척(三尺) 욕심을 갖고 있는 일본이 한국정부를 위협하는 동시에 강경하게 노국에 항의한 경과 그들의 계획은 일단 좌절되었다.

 

그 이듬해 19003월에 한로조차조약이 체결되어 지금의 마산해수욕장인 밤구미(栗九味)를 해군기지로 하려했으나 지세가 부적(不適)하므로 포기하고 신마산의 요지인 월영동 일부를 매점(지금의 일성펌프제작공장, 현 경남대 정문 앞 북편)하여 영사관을 설치했다.(조선철도사 제1권 참조)

 

파브로프와 마카로프가 탑승한 만츄리아와 루리크호가 돌아간 6년 뒤(1905) 5월 노서아(露西亞) 발틱함대가 거제도 외해(外海)에서 일본 해군 연합함대에게 산산조각이 나고 쫓기고 쫓기어 울릉도 앞에서 백기를 든 것은 삼백년 로마노프 왕조의 붕괴신호와 다름없었으나(이 해 1월에 여순개성旅順開城, 3월에 봉천패전奉天敗戰) 극동에 해군기지를 점거할 야망은 추호도 변하지 않아 북으로 청진, 서에 용암포, 남쪽에 마산포 등 부동항을 찾아 헤매었으나,

마산의 경우 노국이 서남 해안선 일대를 조차한 것과 때를 전후하여 일본이 지금의 월영초등학교 이남의 대부분을 99개년 기한으로 조차하여 노골적으로 노국과 각축했다.

 

이러한 무렵 한국해안에 노함(露艦)이 자주 출몰하더니 급기야 1908(?) 함명(艦名) 미상의 노함(露艦) 1,2척이 저도 앞뒤에 투묘(投錨)하고 수많은 수병이 마산에 상륙했다. 그때는 이주해 온 일본인도 적었고, 일본 군대도 아직 주둔해 있지 않았다.

 

그들은 일본인이면 만나는 족족 폭행을 했으나 조선인 아동은 무던히 귀여워해서 구마산에서 신마산 선착장까지 안고 가기도 하고, 과자를 사주기도 했다.

 

그러나 물건을 살 때 낯선 돈을 내놓기 때문에 일본 돈이 아니라 해서 거절을 하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행패를 부리곤 했다.

 

그때 마산에 거류하고 있던 일본인은 대개 장사꾼들이라 일체 외출을 하지 않고 쥐 죽은 듯이 갇혀 있었다.

 

일부 수병들은 지금 구마산 부림시장 터에 있던 경무청으로 들어갔는데, 생후 처음 보는 황발벽안(黃髮碧眼)에 지레 겁을 먹은 관원들이 다 피신해 버리자 옥사의 창을 부수고 죄인들을 몽땅 풀어 놓았으나 그 가운데 낮잠에 깊이 등 죄수 한 사람은 이들 수병의 모처럼의 은전(?)을 받지 못했다는 넌센스도 있었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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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12.20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7) - 개항이후

<새고기 값이 가장 쌌던 마산포>

-마산포부근 지도-
1902년 / 향월원태랑 / 동경 청목숭산당 / / 한국안내 제8편 마산포안내 / 서울대중앙도서관


과문한 탓인지 모르지만 이 지도가 실려있는  책『한국안내』는 일본인이 편찬한 마산관련 문헌 중 최초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지도는 책의 부록에 첨부된 것이라 상세하지는 않습니다만 개항 초기 마산만 주변의 상황은 어느 정도 알 수 있도록 표기되어 있습니다.

지도에는「마산포 사건」으로 유명한 율구미(栗九味)의 노국전관거류지(露國專管居留地)와 자복포의 일본전관거류지(日本專管居留地)가 점선으로 표기되어 있어서, 20세기 초 마산포를 먹으려 혈안이었던 러시아와 일본의 각축을 짐작케 해줍니다.

도시지역에 대한 상세한 표기는 없고, 각국거류지와 마산포와 구(舊) 성적(城跡, 현 용마산에 위치한 산성으로 왜란 때 일본군이 쌓은 것임) 등 일본인들이 관심가질만한 곳들만 간략히 표기되어 있습니다.

마산포에서 부산으로 가는 도로는 팔용산 아래 봉암동을 거쳐 현재의 봉암교(당시는 다리가 없었음) 부근을 통과하여 진해 쪽으로 이어 지고 있습니다.
이 도로는 양덕동 부근에서 창원으로 가는 도로와 나누어졌음을 알 수 있으며, 오늘날의 창원공업단지 일부가 바다였다는 것도 이 지도에서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특히 지도 상부에 별도로「馬山浦各國居留地市街圖」란 제목의 조계지(신마산) 도면이 별도로 그려져있습니다. 꽃이 만개한 모양의 확대지도입니다.



여기에는 조계지 내에서 1899년부터 1902년까지 조성된 도로가 표기되어 있으며 북쪽 일부 도로, 즉 예전의 마산극장 부근에 있는 도로가 매립된 부분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해관장관택(海關長官宅)과 우편국의 위치도 표시되어 있습니다. 해관장 사택은 현 제일여고 부지로 신사로 이용됩니다.

이 지도가 실려있는  『한국안내』에는 20세기 벽두 마산상황이 자세히 실려있습니다.
그 중 재미있는 것 하나 소개합니다.

책 마지막 부분에 '명소고적(名所古跡)'이라 하여 당시 마산에서 가볼만한 곳을 소개하는데, 제일 끝에 '유렵지(遊獵地)'라는 제목으로 이런 글이 있습니다.

"마산부근 일대는 조류가 많아 겨울에 총을 지니고 해안을 따라서 돌아다니면 총 한발에 새 열 마리 이상 잡는 일이 많다고들 한다 (따라서 한국에서 날짐승 고기가 가장 싼 곳이 마산으로 오리 한 마리에 12전이라고 한다)"

이 지도가 그려질 즈음,
개발이 있기 전인 그 때 이 도시의 해안은 전부 갈대밭이었으니 당연히 새들도 많았겠죠.
새가 얼마나 많았으면 새고기 값이 전국에서 가장 낮았을까요. 

철새 때가 하늘 높이 날아 다니는 아름다웠던 마산의 해안,,,
콘크리트 호안으로 둘러싸인 지금, 옛날의 그 광경은 상상하기도 어렵습니다.

위 지도 위치의 현재 모습을 위성사진으로 잡아 보았습니다.<<<

 


 

2010/10/04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6) - 개항이후
2010/10/1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7) - 개항이후
2010/10/1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8) - 개항이후
2010/10/2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9) - 개항이후
2010/11/01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0) - 개항이후
2010/11/08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1) - 개항이후
2010/11/15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2) - 개항이후
2010/11/22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3) - 개항이후
2010/11/29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4) - 개항이후
2010/12/0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5) - 개항이후

2010/12/1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36) - 개항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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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용택 2010.12.20 07:37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이 귀한 자료를 어디서 구했습니까?
    참 재주도 용하십니다.
    그나 저나 올해도 며칠 남지 않았는데
    지역사 사람들 망연회나 한 번 해야되는 게 아닐까요?
    연말 잘 보내세요.

    • 허정도 2010.12.20 08:32 신고 address edit & del

      반갑습니다, 선생님.
      남 교수 한테 연락해보겠습니다.

2010.07.26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16) - 개항기


<가포에 똬리 튼 러시아>

마산포는 러시아와 일본이 서로 식민야욕을 불태웠던 각축장이었습니다. 시기는 개항 전후였고 그 절정이 「마산포사건」입니다.
「마산포사건」은 러시아가 부동군항(不凍軍港)을 얻기 위해 마산포를 점령하려했던 사건입니다. 사건개요를 요약합니다

러시아는 군사적 목적의 부동항을 얻기 위해 우선 조선정부와 마산포 저탄소(貯炭所) 설치에 관한 협약을 체결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를 간파한 일본이 러시아가 목적한 토지를 미리 매입해버림으로써 러시아의 계획은 실패로 돌아갑니다. 1900년 때 일입니다.
하지만
러시아는 단념하지 않고 마산포 남쪽의 율구미(현 마산시 가포동의 국립결핵병원에서 MBC 송신소에 이르는 바다 쪽으로 돌출한 지역)를 얻어
1900년 6월 4일 30여 만평의 러시아 단독조차지를 설치하였습니다.
이에 질세라 일본도 1902년 5월 17일을 기해 자복포(구 한국철강과 월영동 아파트단지, 구 국군통합병원 일대)에 일본 전관거류지 30여만 평을 설치하였습니다.

이미 설치된 신마산 각국공동조계지 인근 두 곳에 러·일 단독조계지가 추가되는 기현상이 생겼던 것입니다.

이와 같은 두 나라 각축이 있었지만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자 러시아 단독조계는 사라져버렸습니다. 러시아 단독조계가 없어지니 일본도 굳이 단독조계를 설치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결국 일본은 각국공동조계지를 그들의 전관거류지처럼 사용하고 자복포의 단독조계는 실행하지 않았습니다.

그때 상황 몇가지 소개합니다.

당시 마산의 분위기가 그랬던 만큼 강대국 군함의 마산 입출항도 많았습니다.
1899년 4월부터 1900년 11월까지 러시아와 일본을 비롯한 외국 군함의 마산항 출입 상황은 러시아가 가장 많은 28척, 일본이 10척, 영국이 4척, 독일이 1척이었는데 이 배는 모두 병함(兵艦) 혹은 수뢰정(水雷艇)이었습니다.

뿐만 아니었습니다.
러시아는 가포 인근인 율구미에 군대까지 주둔시켰습니다. 규모가 크지는 않았지만 의미는 컸다고 볼 수 있습니다.

다음 그림 두 장은 당시 러시아 해군이 율구미에 주둔했던 사진입니다. 
먼저 것은 ‘율구미 주재 러시아 사관 및 부영사 가족’ 사진입니다. 사택으로 보이는 뒷 건물에 사용된 재료는 형태를 보아 조선 현지에서 구한 것이 아니라 러시아에서 조달한 것으로 보입니다.


다음은 ‘율구미 주재 러시아 군대 체조장의 사관 및 수병’들 사진입니다. 수병들이 아직 소년 티를 벗지 못했습니다.


개항 나흘 후인 1899년 5월 5일, 러시아 고위공직자들이 마산포에 왔습니다. 주(駐)조선 러시아공사 파블로프가 일행과 함께 만추리아호를 타고 마산포에 도착합니다.
일행은 율구미라 부르는 자복봉 능선을 따라 30여만 평의 토지에 표석 500본, 표목 500본을 꽂아 임의로 그곳이 자신들의 영역임을 표시했습니다.
그리고 러시아 국기가 달린 5.4m의 표간(標杆)을 자복포 배후의 구릉과 가포에 인접한 해안에 각각 12개를 세웠습니다.
이곳이 나중에 러시아 단독조계지가 됩니다.


위 그림 왼쪽에 그려진 것이 바로 그 표간입니다.
미의회 도서관자료인데 마산포사건과 관련한 일본해군대신 관방서류에 수록되어 있는 자료입니다.
이 도면에는 율구미 능선을 따라 늘어선 표석과 표목의 위치와 함께 러시아 국기가 달려있는 표간의 상세한 도면이 그려져 있으며 표시물의 위치와 숫자는 이 도면을 설명하는 보고서에 별도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율구미 일대에 꽂힌 표석과 표목 각각 500개, 그리고 율구미 능선과 가포해안에 선 5.4m 높이의 24개 깃발을 상상해 보십시오. 러시아의 위세가 당시 어떠했는지,,,,
표목과 표간은 이미 썩어 없어졌겠지만 표석 500개는 땅 밑 어딘가에서 아직 잠자고 있겠지요.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표석 발굴에 나서 보면 어떨까요?

이러한 러시아의 행동은 호시탐탐 마산포를 넘보던 일본을 자극하였습니다.
일본은 마산포의 당시 상황을 일일이 본국 정부에 보고하면서 마산포를 러시아보다 선점하기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그 결과 러시아에 이어 일본도 자복포에 전관거류지를 설치하게 되었던 겁니다.

다음 그림은 그 시기에 첩보용으로 율구미를 촬영했던 사진입니다.
일본 해군소속 군함 '대도(大嶋)'의 첩보주임 이집원후(伊集院後)가 1900년 5월 1일에 촬영한 것입니다. 가운데 높은 봉이 갈마봉인가요?


마산포로 진출할 의사를 가진 나라가 러시아와 일본, 영국뿐만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프랑스도 석탄하역장과 해군병원의 부지로 사용하기 위해 마산포 부근에 진출을 원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음은 『오스트리아 헝가리제국 1885-1913년 외교보고서』 중 마산관련 자료입니다. 

No 65
1901년 9월 17일, 동경
조선에서의 프랑스와 러시아

존경하는 백작각하!
제가 이미 이전의 보고에서 자주 말씀드렸던 바, 조선 내에서의 프랑스의 활동은 일본신문에 계속 표제화되고 있습니다․․․․․․․․
신문들에 의하면 이전의 러시아와 마찬가지로 이제 프랑스도 석탄하역창과 해군병원의 부지로 사용하기 위해 마산포 부근에 위치한 작은 항구를 양도해 줄 것을 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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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김석 2010.07.29 20:19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이사장님 건강하시지요? 옛 마산...이젠 통합창원시...
    왠지 통합창원시와 마산...되게 어색하네요...
    앞으로 마산 도시변천사 자주 구독하겠습니다.

    • 허정도 2010.07.29 20:53 신고 address edit & del

      반갑습니다, 간사님, 아니 의원님.
      늦었지만 당선 축하드립니다.
      화상경마장 싸움할 때 이미 알아 보았습니다만 지역이 지역인지라 어쩔까 했는데 역시나 당선되더군요.
      지역 위해 더 큰 일, 더 좋은 일 많이 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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