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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5.31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8) - 고려시대


<전쟁, 그 이후의 고통>


두 번전쟁 후,
조정에서는 마산지역의 지명이었던 의안(義安)을 의창(義昌)으로, 합포(合浦)는 회원(會原)으로 개칭하고 금주(金州, 지금의 김해) 수령이 통할하던 이곳에 현령을 직접 파견하여 행정지위를 승격시켰습니다. 일본 정벌기간에 보여준 마산지역 민관의 노고를 치하해 내린 조치로, 소위 민심수습책이었습니다.
'합포'와 '회원'은 최근 통합창원시 출범으로 두 개의 구청이 들어서는 마산에 '마산합포구'와 '마산회원구'로 행정구 명칭이 되었고 '의창'은 현 창원시의 두개 구 중 하나의 명칭인 '의창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조정의 배려도 하루하루 힘겹게 살아가야 했던 힘 없는 백성들에게는 아무 의미도 없었습니다.
전쟁 때문에 고난을 겪은 백성들에게 다시 내린 충격은 왜구의 침입이었습니다.

고려시대에 왜구가 우리 연안을 처음 침범한 것은 고종 10년(1223년)으로 여원연합군 1차 전쟁 50여 년 전입니다.


그 이후 크고 작은 노략질이 계속되다가 공민왕 때와 우왕 때에 가장 심해 무려 452회나 침략을 받았습니다. 고려기 전체 침입 484회의 90%가량이 이때에 있었습니다.

오른쪽 그림은 삼강행실도의 열부입강(烈婦入江) 부분입니다.
고려 말에 왜구가 침입했을 때, 정절을 지키려고 강으로 도망쳤다가 왜구의 화살에 맞아 죽은 열부의 행실을 칭송한 그림으로 당시 왜구의 횡포를 한눈에 알 수 있습니다.

왜구의 침입으로 가장 피해를 많이 입은 지역은 경상도 연해지역이었습니다.
왜구는 2-3척의 배를 타고와 노략질을 한 경우도 있었지만 심할 때는 200-500척의 대규모 해적선단에 수천 명이 타고와 침범할 때도 있었습니다.

마산 인근에는 고종 14년(1227년) 5월 웅신현에 침범한 일이 최초이며 2차정벌 1년 전인 충렬왕 6년(1280년) 5월에 합포로 침범해 고기잡이 하던 어부 두 명을 잡아가기도 했지만 그 때까지는 모두 소규모 노략질이었습니다.
그로부터 70년 뒤 충정왕 2년(1350년) 6월에는 20여 척의 배를 타고 합포에 침입하여 병영에 불을 질렀고, 공민왕 1년(1352년) 9월에는 540여 척의 대규모 선단을 끌고 와 합포를 공격하기도 했습니다.

왜구 침입사상 이곳 합포가 입은 가장 큰 피해는 공민왕 23년(1374년) 4월에 왜선 350척이 합포를 공격했을 때입니다.
이 때 왜구들은 별 다른 저항도 받지 않은 채 군영(軍營)과 병선(兵船)을 모두 불사르고 무려 5천여 명의 인명을 해친 다음 많은 재물을 약탈해 갔습니다.

이러한 왜구의 침입은 우왕 때도 계속되었습니다.
우왕 2년(1376년) 11월부터 시작해 그해 겨울은 경남지방의 진주, 함안, 동래, 양산, 언양, 기장, 고성, 울산, 진해, 반성 등이 거의 피해를 입었습니다.
왜구가 이곳에 상륙하여 의창현과 회원현의 관가를 공격하고 민가를 불살라 남아있는 사람이 별로 없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고려시대 왜구의 침범이 마산지역에 특히 많았던 사실을 두고 학계에서는 합포가 두 번에 걸친 일본 정벌의 원정기지였기 때문에 받았던 일본의 보복성 공격이라고 해석합니다.

돌이켜보면
근대 이전의 마산 역사에서 가장 괄목할만한 사건은 이곳이 두 번에 걸친 여원연합군의 일본정벌 발진기지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사건은 마산이 동아시아의 군사적 중심도시로 부각될 수 있었던 지정학적 가치를 역사의 전면에 부각시켰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고대 이래 한반도와 일본을 잇는 주요 루트가 김해였던 사실에 비추어, 13세기 여원연합군의 대선단이 지금의 마산항을 발진기지로 설정한 점은 주목할 만한 일입니다.
그 자체로 우리 지역의 소중한 역사자산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정동행성으로 사용되었던 자산성에 대해서조차 전문적이고 종합적인 학술조사도 없었습니다. 역사자원을 보존, 활용하지 못하는 단적인 사례입니다.
설화도 사실인양 뭔가를 만들기도 하는 세상인데, 있는 자원도 활용하지 않는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습니다.
이런 무관심은 일본이 하카다(博多) 일대에 당시 몽고군과의 전쟁 유적을 발굴 보존하고 이를 역사문화관광지로 다듬어둔  사실과 비교되어 더욱 안타깝습니다.

지금도
마산시 자산동 3·15의거기념탑 옆에는 ‘몽고정’이라는 우물이 있습니다.


위의 사진은 일제기였던 1930년대 몽고정의 사진이며 아래 사진은 80년 뒤에 찍은 지금 모습입니다.


몽고 군사와 말이 이 우물물을 마셨다고 전해집니다.
몽고정 옆에는 직경 1.4m의 바퀴모양 석물이 한 개 있는데 몽고군 전차바퀴이거나 물을 길을 때 발판으로 사용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일제강점초기 마산에 살았던 일본지식인 추방사랑(諏方史郞)의『마산항지(馬山港誌)』에 의하면 이 우물은 원래 ‘고려정’으로 불렀으나 일본인들이 ‘몽고정’으로 개명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1906년경까지 이 우물에는 ‘서성리수백년지음정(西城里數百年之飮井)’이라고 표시되어 있었다고 했습니다.

전쟁이 끝나 여원연합군이 떠나고 난 뒤부터 마산포의 서성리 사람들이 수백 년 동안 사용한 우물이었다는 말입니다. <<<


2010/04/08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여는 글
2010/04/12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1
2010/04/19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2
2010/04/26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3
2010/05/03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쳔사 - 4
2010/05/17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5
2010/05/24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6
2010/05/31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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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4.19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2) - 통일신라시대


<마산인근을 ‘합포(合浦)’라 부르다>

통일신라 신문왕 5년(685년)에 행정체계를 주-군-현으로 정비하여 중앙집권을 강화한 9주5소경제(九州五小京制)로 재편했습니다.
지금의 경남지방에는 진주와 양산이 9주(州)에 포함된 도시입니다.
당시 진주는 뒷날 강주(康州)가 되는 청주(菁州)로, 양산은 뒷날 양주(良州)가 되는 삽량주(歃良州)라고 불렀습니다.
삽량주(지금의 양산)에는 12개 군이 속해 있었는데 그 안에는 굴자군(屈自郡)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굴자군(屈自郡)에는 칠토(柒土-칠원)․골포(骨浦-마산)․웅지(熊只-웅천)에 각각 현(縣)을 설치함으로써 마산지역은 골포현이 되었습니다.

마산지역 현(縣)의 명칭인 ‘골포(骨浦)’는 포상팔국 중의 ‘골포국’에 이어 또 한번 사용되었습니다. 곧 '골포'는 기록에 남아있는 마산 최초의 국가명칭이자 행정구역명칭입니다.

스스로 몸을 굽힌다는 뜻을 가진 '굴자(屈自)'를 군명(名)으로 한 것과 포상팔국시대에 국명()이었던 '골포(骨浦)'를 행정체계 최하단위인 현명(縣)으로 사용한 것에 눈길이 갑니다.
혹시 전쟁에서 골포국을 굴복시킨 승리자 신라가 고의적으로 지은 이름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순전히 제 생각입니다.

마산에는 2천 년이나 되는 ‘골포’가 아직도 살아남아
골포 라이온스클럽’ ‘골포 부동산’ ‘골포 갯마을식당’ ‘골포 스크린골프’ 등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신라 35대 경덕왕 16년(757년)에 전국행정구역을 새로 정비하였습니다.
이때의 군현개편은 군과 현의 명칭개정을 비롯하여 군현의 승격과 강등, 영속관계의 조정 등 행정질서의 개편을 포함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서 지명을 한화(漢化)시켰습니다.

이 정비 때 지금의 진주지역인 청주(菁州)는 강주(康州)로, 지금의 양산지역인 삽량주(歃良州)는 양주(良州)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삽량주의 굴자군(屈自郡)은 양주의 의안군(義安郡)으로 바뀌었습니다.

의안은 창원시에 의안동이라는 동명으로 사용되었습니다만 몇 해 전 창원시가 동을 합치면서 인근 몇몇 동과 함께 의창동으로 변하면서 사라졌습니다.
하지만 ‘의창동주민센터 의안민원센터’라는 이름으로 아직 연명은 하고 있었습니다.

굴자군이 의안군으로 바뀔 때 현의 명칭도 바뀌었습니다.
마산의 골포현(骨浦縣)은 합포현(合浦縣)으로,
칠원의 칠토현(柒土縣)은 칠제현(漆堤縣)으로,
웅천의 웅지현(熊只縣)은 웅신현(熊神縣)이 되었습니다.

이 때 탄생한 합포(合浦)라는 지명은 여원 연합군의 일본 정벌 실패 직후인 고려 충렬왕 8년(1282년)까지 마산지역의 행정구역명칭으로 사용되었습니다.
행정구역명이 바뀐 뒤에도 '합포'는 지명이나 포구의 명칭으로는 계속 사용되어 마치 '마산' 지명의 대명사와 같이 사용되었습니다.
지금은 모두 ‘합할 합(合)’자를 사용하지만 조선시대에는 ‘대합조개 합(蛤)’자를 사용하기도 했습니다.

합포라는 지명에 대해서,
아래 그림(1833년 제작된 고지도의 일부)처럼 마산의 산호천과 삼호천 그리고 창원의 창원천과 남천이 팔룡산을 가운데 두고 창원과 마산 양쪽에서 흘러내려 마산 앞바다에서 합쳐지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습니다.
양쪽의 큰물이 합쳐지는 곳, 그래서 이곳을 ‘합포(合浦)’라 한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용자 삽입 이미지

물이 합쳐진 합포가 아니면,
‘대합조개 합(蛤)’자의 합포(蛤浦)도 병용했다하니 마산 앞바다 갯벌에 대합조개가 많아서 그렇게 불렀을까요?

하지만 보다 정확한 분석은 따로 있습니다.




동아대 김광철 교수에 의하면,
합포는 단순히 포구의 모양이나 물산에서 따온 것이 아니라 중국의 지명에서 따온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겁니다.
바로 위 두 개의 그림에서 보는 중국 남부지역 광서장족자치구 연해지역에 있는 '합포'에서 따왔다고 합니다.
 
중국의 '합포'는 대륙 최남단인 베트남 국경 부근, 곧 요즈음 한국사람들이 골프여행 많이 간다는 해남도와 가까운 곳에 있는 해안의 작은 도시입니다.
한대(漢代) 이래 지금까지 남아있으니 수천 년된 유서 깊은 지명입니다.

합포군은 후한시대 맹상(孟嘗)이라는 사람이 태수로 부임해 선정을 베풀면서 유명해졌답니다.
따라서 마산이 합포로 개칭된 것은 청렴한 수령이 다스리는 고장으로 인식되어 왔던 합포의 상징성을 고려한 의미 있는 결정이었다는 겁니다.

곧 '골포'에서 '합포'로의 개칭은 지방관을 비롯한 관료의 선정과 민생의 안정을 바라는 국가 염원이었다는 설명입니다.

환주(還珠)가 합포의 별호로 사용된 것도 이런 상징화 작업이었다는 설명도 곁들여 하고 있습니다.
'구슬이 돌아왔다'는 뜻이 담긴 '환주(還珠)'는 곧 선정을 펼친 수령의 상징이었기 때문입니다.

‘합포’라는 명칭은 마산에 구청이 있을 당시 ‘합포구’로도 사용되었지만 ‘합포초등학교’ ‘합포여중’ ‘합포고등학교’ 등의 학교이름과 ‘합포만’ ‘합포문화동인회’ '합포만의 아침' ‘합포우체국’ ‘합포동’ 등 지금도 마산에서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많이 사용되고 있어서 마산시민에게는 아주 친숙한 지명입니다.

다른 이야기로 가겠습니다.

신라시대,
이미 마산에는 부산, 울산 등과 함께 항만이 있었습니다.
(사)한국건설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항만건설사/1978년』를 보면 고대로부터 삼국시대에 이르기 까지 우리나라에서 항만으로 이용된 지역을 소개하면서 마산을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지금의 기준으로 불 때 당시의 항만건설은 공법상 원시적인 개발에 불과했지만 백제와 신라의 축항기술은 당시 아시아지역 최첨단이었다고 합니다.
일본기술자들이 와서 신라의 조선기술과 축항기술을 습득해 갔다는 기록도 있습니다.

당시의 축항기술은 천연의 자연조건을 최대한 이용하는 방법과 해상조건에서 오는 조수간만의 차이와 풍랑 등을 최대한으로 이용한 방법이었습니다.
시설은 석축돌제식(石築突堤式), 석주잔교식(石柱棧橋式) 또는 목재를 이용한 잔교(棧橋) 등 이었습니다.

당시 선진공법으로 축조되었던 신라시대 항만은 지금 이 도시 어디쯤에 있었을까요?
그리고 신라시대 마산의 부두에서는 어떤 분들이 무슨 일을 했을까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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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이윤기 2010.04.19 10:02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재미있게 읽고 공부 많이 하였습니다. ^^*

    • 허정도 2010.04.19 11:00 신고 address edit & del

      고맙소.
      설명을 하려니 글이 조금 기네요.

  2. 후배유림 2010.04.21 14:51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재미있게 읽고 있습니다 선배님.
    다음 글 기다리면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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