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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09.29 00:00

마산·창원 역사 읽기 (19) - 나라 잃은 시기, 우리 지역의 민족교육자들

3. 지역의 인물을 찾아서

3-2 나라 잃은 시기, 우리 지역의 민족교육자들

 

나라 잃은 시기 우리 지역의 민족교육을 말하고자 할 때 ‘창신학교’는 마땅히 맨 앞자리에 놓을 만하다.

왜냐하면 창신학교는 우리 지역에서 비교적 이른 시기부터 근대교육기관으로서의 기능을 담당하였고, 그곳에서 배웠거나 가르친 이들이 뒷날 우리 지역의 크고 작은 민족운동을 주도하였기 때문이다.

나라 잃은 시기 창신학교가 경제적으로 운영이 어려웠을 때 지역민들이 뜻을 모아 학교를 살리고자 했던 노력은 바로 이런 까닭에 있을 것이다.

이글에서는 나라 잃은 시기의 민족교육활동가들 가운데 창신학교에서 삶의 중요한 한 때를 서로 부대낀 이들을 가려 뽑아 우리 지역의 정신맥락 하나를 가다듬고자 한다.

 

-민족 교육자이자 광복 투사였던 안확과 이극로-

창신학교에서 민족교육을 펼친 이 가운데 비교적 앞자리에 놓이는 이는 바로 안확(호는 자산, 1886-1946)이다.

<안확(1886~1946)>

 

우리나라 근대 학문의 기초를 마련한 이로 평가되는 안확이 창신학교에 처음 부임한 때는 1910년이다.

2뒤 그는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가 1916년 다시 창신학교로 돌아와 역사와 한글을 가르쳤고, 이듬해인 1917에는 그의 첫 저술서인『조선문법』을 펴냈다.

이 때 창신학교에는 주시경의 제자로서 일찍이 한글운동에 힘을 쏟고 있던 김윤경이 함께 일하고 있었고, 역시 주시경의 제자로서 평생을 한글교육과 보급에 힘을 쏟은 이윤재가 가까이 의신여학교에 교원으로 일하고 있었다.

안확은 비록 우리말에 대한 주시경의 연구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갖기도 했지만, 나라잃은시기에 ‘우리말이 곧 우리얼’이라는 언어민족주의적 교육관에 있어서는 김윤경이나 이윤재와 다르지 않았다.

마산에서의 안확은 단순한 민족교육가로서의 면모만 갖춘 인물이 아니었다.

그는 1916년에 조선국권회복단 마산지부장을 맡아 일하면서, 일제에 대한 적극적 투쟁을 실천해 보인 광복투사이기도했다.

1919년에 조선국권회복단 마산지부가 주도한‘4·3 진동의거’가 있은 뒤 그는 곧바로 마산을 떠났는데, 창신학교 시절 이은상의 스승이기도 했던 그에 대해 이은상은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선생이 교단에 올라서면 글을 가르치기 전에, ‘너희들은 대한제국의 국민이다’하고 우리들의 가슴에 불을질렀다. 이미 대한제국은 무너졌었다. 그러나 마산 창신학교의 교단 아래 앉았던 우리들의 가슴 속에는 대한제국이 살아 있었다.

 

안확이 교사로 일하고 있던 1910년에 창신학교에서 공부한 이 가운데 눈여겨보아야 할 이가 이극로이다.

 

<이극로 (1893~1978), 국어학자, 정치인>

 

이극로(호는 고루, 1893-1978)는 경남 의령 사람이다.

넉넉치 못한 농군의 살림이 싫어 나이 열 여섯에 집을 뛰쳐나와 길렀던 머리를 깎고 창신학교에서 2년 동안 신학문을 배웠다.

이극로는 이은상의 창신학교 선배이기도 하다.

가족의 아무런 지원 없이 가난한 고학생으로 스스로 벌어 공부를 하던 그를 두고 이은상의 아버지는 수 차례 이은상의 생활 태도를 나무랐다고 한다.

창신학교에서 공부를 마친 그는 곧 멀고 험한 유학의 길에 오른다.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그저 의기만 드높았던 시골 소년의 유학길이었다.

불가능해 보일 것 같던 그의 유학은 갖은 고생과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겨 결국 현실이되었다.

첫 유학지였던 중국 동제대학에서 그는 한글학자 김두봉을 만나 함께 한글 자모체계를 연구했다.

그리고 192310월, 독일 유학 시절에는 베를린대학에 마련된‘조선어과’에서 강사로 일하면서, 김두봉이 만든 한글 자모분할본 활자판을 이용해 <허생전>을 외국에서 최초로 인쇄, 배포하여 조선어를가르쳤다.

베를린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던 해(1927)에는 벨기에에서 열린 ‘세계약소민족대회’에  조선대표단 단장으로 참석하기도 했다.

그 이듬해 부터 영국과 프랑스에서 정치, 경제, 음성학 등을 배워 1929년 귀국했고, 곧이어 ‘조선어연구회’ 회원으로 일하다가 1929년에‘조선어사전편찬회’를 결성하였다.

1931년에는 ‘조선어학회’로 이름을 바꾸어 본격적인 한글사전편찬 사업에 힘을 쏟게 된다.

194210월에는 ‘조선어학회 박해 사건’으로 함흥형무소에 구금되어 관련자 가운데 최고형인 6년형을 선고받았다.

광복 뒤1946년엔 교육계에 몸담고 있으면서 초등학교 의무교육제도를 정부에 건의하여 통과시켰고, 다음해인 1947년엔 민주독립당 의장으로 선출되어 본격적인 정치활동을 시작했다.

1948년에 건민회 대표로 남북연석회의에 참석하였다가 평양에 그대로 남게 되었다.

이후 북한에서 김두봉과 함께 우리말 연구에 계속 힘쓰다가 1978913일에 숨을 거두었다.

 

-김윤경과 이윤재, 그외 한글운동에 헌신한 사람들-

이극로가 창신학교에서 공부하던 때에 학생들에게 민족정신을 심어준 이 가운데에는 김윤경도 있었다.

김윤경(호는 한결, 1894-1969)은 경기도 광주에서 나고 서울에서 공부했다.

1911년 주시경을 만나 처음으로 한글교육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고, 19114월에 창신학교 고등과 교원으로 부임해 1917년까지 일했다.

이때에 그의 첫 논문이랄 수 있는 <조선어학연구의 기초>라는 글을썼다.

이후 1921123에는 ‘조선어학회’의 전신이랄 수 있는 ‘조선어연구회’의 창립 회원이 되어 우리말 연구와 교육에 힘을 쏟다가, 1942101일에‘조선어학회 박해 사건’으로 구금되어 옥고를 치렀다.

<창신학교의 모습 (1909년)>

<창신학교 설립인가서(1909년)>

 

창신학교에서 김윤경을 만나 처음 한글에 대한 깊은 뜻을 배우고, 그 뒤 평생을 한글교육과 보급에 힘쓰게 된 이가 이윤재이다.

이윤재(호는 환산, 1888-1943)는 경남 김해 사람이다.

김해공립보통학교를 마친 뒤 김해·대구 등지에서 교직생활을 하다가, 마산으로 내려와 창신학교(1911-1913)와 의신여학교(1913-1917)에서 역사를 가르쳤다.

충무공 이순신을 우리나라의 가장 위대한 애국자로 여겼던 그가 나라를 빼앗긴 식민지 교단에서 어린 학생들에게 가르친 것이 무엇이었는지는 능히 짐작할 만한 일이다.

이윤재는 1919년에 평안북도 영변에 있는 숭덕학교에 교사로 일하였는데, 기미만세의거가 일어나자 학교 안에서 만세 운동을 주동하여 옥고를 치르기도했다.

1925년에는 서울의 협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는데 이 학교는 안확이 교사로 일했던 곳이기도 하다.

‘조선 사람에게 조선말 사전 한 권도 없음’을 통탄한 이윤재는 1927년에 최남선, 정인보 등과 힘을 모아 ‘조선어사전 편찬’에 힘을 쏟았지만 성과를 거두지 못하다가, 1929년 독일 유학을 마치고 돌아온 이극로와 동래 출신의 한글학자 최현배 등과 뜻을 모아 본격적인 사전편찬사업에 힘을 쏟았다.

이처럼 한글교육을 통해 민족의 얼을 오롯이 지켜내고자 애썼던 그는 옥중에서 숨을 거둘 때까지 한글교육과 우리말사전편찬 사업에서 잠시도 손을 떼지 않았다.

‘조선어학회 박해’사건으로 투옥되어 그가 겪은 고초가 어떠했는가는 경남 언양 출신의 한글학자인 정인섭의 회고를 통해 알 수 있다.

거기에는 긴 나무 걸상에 이윤재씨를 온통 맨몸으로 홀딱 벗겨 걸상에다 눕히고는, 몸과 허리와 두 발목의 세 군데를 노끈으로 걸상에 매어놓고, 순사 부장과 한국 순사 한 사람이 옆에 서서 그 일본놈이 주전자에서 찬물을 이윤재씨의 코와 입언저리에다가 부으면서 “상해 임시정부 문교부장 김두봉에게 독립운동 지령을 받았지”라고 물었다.

 

결국 이윤재는 이러한 일제의 잔혹한 고문에 의해 1943128일 함흥감옥소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의 나이 56세 때의 일이었다.

나라 잃은 시기에 남녘의 조그마한 갯가에서 나라 잃은 울분을 어금니로 깨물며 어린 영혼들을 조용히 일깨우던 이들과, 그 뜻을 이어 받아 뒷날 나랏말을 다듬고 지키는 일에 평생을 바친 이들이 있었다.

안확, 이극로, 김윤경, 이윤재 등이 그들이다. 그리고 여기에 다 옮겨 알리진 못했으나, 김두봉(기장), 안호상(의령), 안희제(의령), 윤병호(남해), 이우식(의령), 정인섭(언양), 최현배(동래) 등도 모두 이 시기 나랏말을 다듬고 지키는 일에 온힘을 쏟거나 보태신 우리 지역 분들이다.

일제의 가혹한 탄압과 삶의 곤궁함 속에서도 꼿꼿이 몸을 세워 평생 나랏말글 다듬기에 힘을 쏟고 보탬을 주신 분들이기에 나랏말이 헝클어지고, 민족 얼이 흐트러지는 이 때에 더욱 그분들의 삶을 돌이켜 그 뜻을 새겨야 할 필요가 있으리라 여긴다.

아울러 한때 그런 민족정신의 한 바탕이 되었던 우리 지역에 대한 정신사를 제대로 짚어 앞으로 올바른 지역사랑의 나아갈 바를 분명히해야 할 일이다.<<<

차민기 / 창신대학교 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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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젤리 2015.10.20 20:15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좋은글 잘보았습니다. 정말 이분들덕분에 우리가 있는것임을 뼈져리게 느낍니다.

  2. 젤리 2015.10.20 20:15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좋은글 잘보았습니다. 정말 이분들덕분에 우리가 있는것임을 뼈져리게 느낍니다.

  3. 젤리 2015.10.20 20:15 신고 address edit & del reply

    좋은글 잘보았습니다. 정말 이분들덕분에 우리가 있는것임을 뼈져리게 느낍니다.

2011.07.04 00:00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65) - 강점제1시기

<요보?>

<한 시기의 마산사회상황을 짧은 글로 표현할 수는 없습니다만 1910년대 마산상황 중 종교와 교육 그리고 당시 사회분위기의 일편을 간략히 포스팅합니다>

합방 2년 후인 1912년 4월 8일 당시 양산 통도사 주지인 천보(天輔) 김구하(金九河) 큰 스님이 마산지역의 포교를 위해 사답(寺畓)을 팔아 현 추산동 포교당(정법사) 터에 설법전(說法殿)을 창설한 것이 근대 마산불교의 시초입니다.

1년 후인 1913년 서울 각황사에서 전국 30본사(本寺) 주지들이 조직한 ‘불교진흥회’의 발기 간사인 위암(韋庵) 장지연(張志淵, 1864년-1921년)이 진주에서 마산으로 이주하여 8년 동안 살았습니다.
이 때 위암은 마산불교진흥회를 조직하여 불교 발전에 진력을 다했으며 천보(天輔)스님과 자주 교류하였습니다.

아래 사진이 1912년에 건축한 추산동 포교당입니다.
 

새 건물을 짓는다고 최근 헐었습니다.
 마산에서 가장 오래된 불교건축이 사라진 겁니다. 우리 지역 불교사의 상징적인 유산이 없어진다고 일각에서 안타까움을 표하기도 했지만 소리가 너무 작았습니다.

1901년 조선예수교 장로교회 공의회가 조직되면서 마산교회를 태동시킨 기독교는 이후 노산 이은상의 부친 이승규 등이 입교하는 등 교세를 넓히다가 1903년에는 마산포교회로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1919년에는 추산동에 신축예배당을 준공하고 명칭을 문창교회로 고쳤습니다.
아래 사진이 당시 신축한 문창교회의 사진입니다. 로마네스크 양식의 석조 건물입니다.

 20세기 벽두에 들어온 가톨릭은 완월동에서 천천히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고 개항직후 들어온 일본불교도 확장되어 갔습니다.

그 시절 마산의 교육기관으로는 합방 이전부터 있던 마산공립보통학교(현 성호초등학교), 마산공립심상고등소학교(현 월영초등학교), 사립 창신학교, 노동야학을 비롯해 1910년에 설립해 1911년 학생 50명으로 인가를 받은 외서면 완월리의 사립성지학교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1913년에는 창신학교의 여학생들로 구성된 의신여학교가 독립하여 개교하였고, 1915년에는 장군동 2가에 마산공립실과여학교가 개교하였습니다.
사립여학교는 의신과 성지가 있었지만 공립으로는 마산실과고등여학교가 최초였습니다. 이 학교는 1921년 실과여학교에서 고등여학교로 바뀌었는데 현재 마산여자고등학교의 전신입니다.
 

이 중 사립창신학교는 당시 신교육을 접한 많은 양심적 지식인들이 모여 있었습니다.
안확을 비롯한 민족지도자들이 학생을 가르쳤고 고루 이극로 같은 선각자들이 이분들에게 배웠습니다.
창신학교는 식민지 백성의 혼을 일깨우고 민족독립을 위한 저항정신을 불어 넣는 신식교육기관으로 마산사람들의 자존심이었습니다.

뿐만아닙니다.
개교할 때 호주선교사들의 도움이 컸던 탓에 학문, 체육, 예술 등 서양문물도 창신학교를 통해 많이 들어왔습니다.
한 예로 1914년 한강이남 최초로 창신학교 고등과에 7인조 밴드부가 창설되어 서양음악을 경남지역에 보급하기도 하였습니다.
아래 사진이 당시 창신학교밴드부입니다.


당시 창신학교를 말할 때 유독 ‘사립’을 강조하며 접두어로 붙였습니다.
식민지시대라 ‘공립’은 사실상 일본인 것이었고 '사립'만 한국인들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이 밖에 1907년 마산의 유지들에 의해 개교된「노동야학」은 1914년 10월, 1,300엔이라는 당시로서는 큰돈으로 창동에 교실 여섯 개를 가진(140평) 교사를 마련하였습니다.
마산의 노동야학활동은 전국적으로도 이름이 높았습니다.
1921년 한 해 동안 동아일보가 마산의 노동야학에 대해 보도한 것이 열일곱 번이나 될 정도였으니까요.

강점제1시기인 1910년대는 이질적인 두 나라의 문화충돌이 심했습니다.
지배자의 오만과 피지배자의 절망이 낳은 충돌과 갈등이 전국을 뒤덮었습니다.

식민지정치적인 문제가 아니더라도, 식민지 땅에서 일어난 지배민족과 피지배민족 간의 차별과 탄압, 그리고 전혀 다른 가치관과 문화에서 오는 이질적인 생활 습관 때문에 전국적으로 두 민족 간의 갈등과 마찰이 노골화되었습니다.

당시 일본인들은 한국인을 ‘요보’(‘여보세요’에서 ‘여보’의 일본인 발음으로 한국인을 놀리는 표현)라고 불러대며 모욕하였습니다.
공중목욕탕에서는 일본인들이 목욕을 마친 다음에라야 한국인의 입탕이 허용되었습니다.
기차나 전차에서 일인의 옆 좌석이 비어있더라도 한인은 앉을 수 없었으며, 길 가던 일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는 이유로 함부로 구타하는 횡포가 일상화되어 문제도 되지 않을 정도였습니다. 마산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런 상황을 알 수 있는 그 시기 언론보도 몇 가지를 소개합니다.

① 매일신보 1915년 2월 6일
「중전(中畑)이라는 일본인이 인천나무시장 근처를 가다가 나무바리가 길가에까지 차서 통행에 지장이 있다고 하여 성냥불로 이 나무 저 나무에 불을 질러 불이 크게 번짐」
② 동아 1920년 4월 19일
「시야(矢野)」라는 부산의 일인 운수업자가 노임 시비 끝에 한인 노무자 수백 명에게 권총을 난사」
③ 동아 1920년 6월 21일
「여름철만 되면 일인들이 벌거벗고 길거리를 횡행하여 큰 사회문제화」
④ 동아 1920년 8월 6일
「서울 황금정(을지로) 4가 공동수도물을 먼저 길러가겠다고 일인 우체국원 조천(早川)이 한국 부인을 군도(軍刀)로 위협」<<<



2011/05/16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8) - 강점 제1시기
2011/05/23 - [역사속 도시이야기] - 그림으로 보는 마산도시변천사 (59) - 강점 제1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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